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613-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3강자유게시판에베소서

20080613-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3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에베소서 제 13강 (이 근호목사, 2008년 6월 13일-a, 서울의존교회)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사람을 보고 하는 소리가 ‘영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이 되지 못한 사람을 일컬어서 ‘육’이라고 했습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고 다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되는데 사람이 있다고 해놓고는 사람을 나눕니다. 영적인 사람 따로 있고 육적인 사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람은 천국을 가고 육적인 사람은 지옥을 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 제가 떡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그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입이 헤 벌어지시면서 “아이고, 수고했다”하면서 이런식으로 주고 받고 주고 받고가 되어야 하는데 사도바울은 그것이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고 착하게 살려고 애를 써도 육으로 난 것은 그냥 육이고 ‘지옥으로 가시기 바랍니다’하는 식으로 육의 사람은 그냥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교인들을 볼 때에 “여러분들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순종 하세요”, 이러고 맘니다.

“당신은 육적인 인간입니까? 혹은 당신은 영적인 인간입니까?” 라는 것을 묻지를 않고,

“여러분은 사람입니까?”

“예, 우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시거든요.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되었습니까?”

“되었습니다.”

이렇게 끝나버립니다. 이것이 불교경전에도 나오고 유교경전에도 나옵니다. ‘사람이 공덕을 쌓으면 복을 받고 나쁜짓을 하면 화를 입는다’는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것은 처음부터 육이니 영이니 하는 것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남에게 착한일, 공덕을 쌓으면 그것이 나에게 마일리지처럼 점수가 쌓여서 복이 오고, 같은 인간으로서 출발해도 내가 나쁜 일을 하게 되면 게 화가 되어서 나중에 염라대왕 계시는 지옥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나’는 중립입니다. 내가 착하게 될지 나쁘게 될지는 나 하기 나름입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판단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느냐 거기에 따라서 내 장래가 나 하기 나름으로 결정된다.’ 이게 바로 유교나 불교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게 육적인 사람에게서 나온 지옥가려고 환장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여기 모인 학생 여러분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서 배울 때 어떻게 배웁니까? “여러분들은 착한 일을 해야 복을 받습니다.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습니다.” 이렇게 가르치지요? “나쁜 일을 많이 하세요. 그래도 구원받습니다”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은 안계시지요?

그래서 그것을 배우는 학생들이 혹시라도 자기뜻대로 안되면 ‘아이고, 내가 나쁜 짓을 했구나’라고 여기고 혹시 자기 맘대로 잘되면 ‘아, 역시 나는 하나님께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듬뿍 받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고쳐져야 합니다. 그 생각을 안 고치면 지옥 갑니다. 그걸 뜯어고치든지 어쨌거나 그 생각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 바뀌어지는 것이 육의 인간에서 영의 인간으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그것이 나에게 쌓여서 복이 되고 나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그것이 나에게 쌓여서 저주가 된다’는 생각이 바뀌어지는 겁니다. 육의 인간 앞에는 ‘오직 나 뿐이다’가 있습니다. 다시 합니다.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게 그 나쁜 일이 쌓여서 나에게 저주가 온다’고 그렇게 생각할 때 복이 오고 저주가 오는 것은 누구 하기 나름이냐 하면, 나 하기 나름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오직 ‘나’(only) 만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나만 있어요. 내가 잘하기 나름에서 내가 복을 받는 거예요.

육, 여기는 오직 자기만 있고 영의 하나님은 저쪽에 계십니다. 그런데 영적인 사람은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분이 함께 계시는데 그 어떤 분이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어떤 일을 치렀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영적인 사람이란 나보다 앞서신 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 십자가 때문에 나에게는 저주가 오고 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모든 좋은 것이 그냥 공짜로 다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와 상관없이 내 앞선 분이 십자가를 졌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나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고 그것을 믿고 인정하는 사람, 그게 영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영적인 사람을 이보다 더 쉽게 설명 못하겠습니다.

영적이라고 해서 기도해서 뿅 간다든지, 기도하다가 불받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저주밖에 받을 것이 없는데 이제는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내 앞에 계신 어떤 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좋게 보고 예쁘게 보고 아주 지독한 사랑을 퍼붓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광적인 사랑입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퍼붓는 사랑을 사도바울은 ‘이것이 어찌 기쁜 소식(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게 바로 복음이며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 받는다’고 합니다.

내가 뭘 하고 내가 뭘 조심해서 영생 얻고 복 받는 것이 아니고 나와 상관없이 내 앞서 계신 그분이 먼저 나한테 묻지도 않고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보시고 우리에게 생각지도 않은 놀라운 영생과 모든 축복과 행운을 우리에게 다 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고 합니다.

방금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목사님, 듣기는 괜찮은데 그 이야기가 우리 듣기 좋으라고 목사님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까?”라고 의심하는 분도 계신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이 즉흥적으로 ‘십자가 하번 져 볼까?’라고 해서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고 그 전에 미리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을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약’이라는 아주 어려운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언약이라는 말 대신에 쉬운 말로 고쳐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왕과 모세와 한바탕 붙었습니다. 모세와 바로와 한바탕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냥 구경만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겼습니다. 바로왕이 모세를 괴롭힐 때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바로의 큰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잘되었다. 고소하다. 어딜 감히 하나님의 종인 모세에게 대드는가? 죽어도 마땅하고 죽어도 싸다’할 것 같은데 단순하게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바로왕의 맡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고 바로왕의 왕궁 안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맏아들까지 갑자기 다 죽고 말았습니다. 바로왕의 신하들의 맏아들도 다 죽었습니다. 이 중에는 모세와 싸우기는커녕 구경도 못해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싸우기는 바로와 모세와 싸웠는데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기를 바로에게만 내리신 것이 아니고 바로에게 속해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은 모든 자들의 맏아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모세와 바로의 싸움이 개인적인 감정의 1:1 싸움이 아니라 바로의 편을 들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 곧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 자의 아들들은 다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거부하시고 ‘네가 영의 사람이냐 육의 사람이냐’ 그것만 물으시는 겁니다.

육의 사람이란 ‘내가 행동하는 여하에 따라서 내 운명이 결정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육의 사람이고 영의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는 것과 관계없이 내 앞서 계신 분이 나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십자가 지신 분이 우리 앞에 서성거립니다. 그래서 앞에서 누가 뭐래도 예수님아 다 커버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 뒤에 숨어서 “저는 할 줄 몰라요. 예수님이 다 하셨어요”라고 하면서 숨어 있습니다.

대신 우리 앞에 거대한 예수님께서 서 계셔서 “마귀야, 이리와 봐. 누가 이 사람보고 시비를 걸어. 내가 십자가에서 피흘려서 다 처리해서 처리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데 무엇을 따져. 얘에게 줄 저주가 없다. 얘에게 돌아올 화가 없어! 왜? 내가 앞장서서 다 처리 했으니까.”

이게 바로 원수된 것을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화목되게 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즉흥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구약 때문에 그런 낌새가 있었습니다. 그 낌새란 모세와 바로와의 싸움에서 모세를 미워하고나 싸움하지도 않은 바로 왕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맏아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모세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거룩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완벽하게 거룩하기에 근처만 가도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천국에서 살려면 완벽한 거룩이 될 때만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안죽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모세와 바로왕의 싸움을 남의 이야기로 그냥 종교 간의 싸움 이야기로 들었습니다. ‘저 사람들 종교싸움 하네. 나는 종교 없다. 나는 나 혼자 편하게 살고 만다. 모세와 바로가 무지하게 싸우는데 나는 둘 다 싫고 나는 내가 최고야’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이 싸움의 결과에 말려들어서 갑자기 자기 집에 있는 맏이들이 다 죽었습니다.

심지어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맏이까지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어떤 한 사람을 갈구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거룩하지 못하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육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완벽한 거룩,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거룩입니다.

어릴적부터 조금의 흠이나 티도 없어야 되는 완전한 거룩입니다. 초등생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오른손으로 구제를 하고 왼손으로 도둑질을 했다는 나는 착한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일까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어쨌든 착한 일을 했으니까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왜 같은 몸이면서 나쁜 짓을 하느냐’고 보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 많은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 많은 율법의 99%를 지키고 1%를 지키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볼까요, 좋은 사람으로 볼까요?

나쁜 사람으로 보면서 ‘왜 너는 같은 몸 가지고 나쁜 짓을 하느냐’ 라고 봅니다. 하나님앞에서는 100% 완벽한 거룩이 아니면 다 죽습니다. 그게 바로 육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는 겁니까? “목사님 말대로라면 히브리인들은 흠도 티도 없어서 살았다는 말입니까?”라고 할수 있는데 그 말이 맞아요.

히브리 사람들도 흠도 티도 애굽처럼 똑같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많은데 히브리사람들이 되레 묻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들과 내가 다를 바 없이 똑같이 나쁜 놈인데 어떻게 저를 살려 주십니까?” 도리어 묻습니다. 바로왕에 속한 사람들이 와서 “너희들은 뭐가 잘나서 우리아들만 죽고 너희 아들들은 다 살았는가? 너희가 우리보다 잘난게 뭐가 있어?”

그러면 모세에게 속한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글세, 나도 몰라. 나도 이상해. 나나 너나 똑같이 나쁜 놈 맞는데 그런데 우리는 살았어.” 생명의 고귀함이 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저쪽을 다 죽여야 되는 겁니다. 예수 믿든 안 믿든 어설프기는 다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도리어 사는 쪽은 반문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이여! 왜 저를 살려 주십니까?’ 그래서 제가 쓴 글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물을수 있는 질문은 하나밖에 없다. ‘주여, 저 같은 인간을 왜 살려주십니까?’ 그 질문외에 다른 질문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입 다물라!” 임금이 신하들이나 중전에게 이 소리를 하잖아요. “입을 다물라!”

‘하나님, 죄지은 것밖에 없는 나를 왜 살려 주십니까’라는 그 물음외에 다른 물음은 해서는 안 됩니다. ‘왜 우리 애는 성적이 떨어집니까? 왜 우리 집은 이렇게 못삽니까? 왜 우리 집에 불이 났습니까?’ 이런 것은 물으면 안 됩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천당 못가고 지옥가야 됩니까?’ 그런 것은 물으면 안 됩니다.

‘주여, 저도 지옥에 가야 되는데 왜 저를 살려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았다. 예수님께서 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너보다 앞서서 다 작정하시고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 처리로 인하여 우리는 그때부터 육의 사람이 아니고 앞에 있는 십자가를 인정한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영적인간, 혹은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다른 교회 가서 ‘바쳐야 복 받는데 안 바쳐서 복 못 받고 섬겨야 저주를 안 받는데 저주받는 이유는 잘 안 섬겨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하, 불교신자가 저기 또 있다’고 보면 됩니다.

명심보감 처음에 나옵니다. ‘사람이 공덕을 쌓으면 복을 받고 화를 쌓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나옵니다. 그런 소리를 하면 그게 바로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바로에 속한 사람들, 모세 때문에 갑자기 죽은 그 사람들 가운데서 착한 사람 참 많습니다. 성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부간에 유별하고 친구 간에 친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인격적으로 흠없고 티없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더욱 더 양심적으로 ‘믿을 것은 내 양심밖에 없다. 믿을 것은 내 착함뿐이다’라고 하면서 더욱더 열심히 자기 마음의 거울을 닦아서 명정의 상태,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성화하고 또 성화해서 지극한 성화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자기 아들이 죽었습니다.

실컷 성화했는데 자기 맏아들이 죽어버린 거예요. 이유는 단 한 가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답이 간단합니다. 인간 쪽에서 “주여, 제가 착실합니다. 게으름피우지 않았습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하나님께서 묻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너, 어린양의 피가 있나?”

‘어린양의 피가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것을 네 글자로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두 글자로는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가 있을찌어다.” 사도바울이 바보가 아닙니다. 얼마나 인간들 속에 태어날 때부터 ‘내가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이것이 가슴속에 꽉 들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바울도 그런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사람이 완전히 180도 달라져서 ‘그것이 아니고 그것은 마귀의 소리였다’고 합니다. ‘그게 아니고 지금부터 내말을 들어라. 십자가다. 딩동댕!’ 하고 끝내 버렸습니다. 자기 앞에 십자가가 있는 사람은 영의 사람이고 자기 앞에 자기의 성실함이 있는 사람은 육의 사람입니다.

인간은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제 삼의 인간은 없습니다. 육 아니면 영, 영 아니면 육입니다. 관직이 높다든지 왕의 후손이라니 효자라느니 그런 것도 다 필요 없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육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자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도 자기 인생길에 그리스도의 피가 없으면 그것은 육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사도바울은 복음을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간단한데 왜 이렇게 에베소서는 어려운가?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은 간단한데 복음을 가리려고 가당치도 않는 잔가지를 잔뜩 붙여놓아서 그 잔가지를 잘라내려고 하니까 이야기가 복잡해 진 겁니다.

에베소서 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영과 육을 이렇게 나누었으니 잘 이해하실수 있을 겁니다. 육으로 생각하는 성전 따로 있고 영으로 짓는 성전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2:19-22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육으로 짓는 성전 따로 있고 영으로 짓는 성전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육으로 짓는 성전은 누가 지을까요? 아까 육은 나밖에 없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육으로 짓는 성전은 내가 짓겠지요. 그것이 육이 성전입니다. 내가 헌금내서 그 돈으로 예배당 짓는 것, 이것이 육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영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앞에 계신 십자가지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적 사람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영에 속한 성전은 누가 지을까요? 사람이 지을까요, 하나님이 지을까요? 하나님이 짓습니다. 이게 답이 어렵지 않은데 실제로 부흥사가 와서 학개서를 들이대면서 ‘하나님의 집은 이렇게 초라하게 놔두고 너희 집만 호사스럽게 꾸미고 사느냐’고 호통치면서 작정헌금 할 사람 손들라고 하면 그대로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손들고 구두로 약속하는 것은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얼마 내겠습니까?”

“75억!”

이런 것은 말만 하고 내지 않아도 누가 말을 못합니다. 이랬다고 저주 받나 안 받나 시험해 봐도 무방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육으로 짓는 성전, 그것은 내가 짓는 성전이기에 거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안계시면 텅텅 비어있겠다 싶은데 그게 아니라 마귀가 들어갑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불순종의 영, 마귀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기에 하나님이 들어오지 않으면 마귀에게 꼭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육의 성전을 짓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마귀가 처음 만났을 때 마귀가 예수님보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이 성전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나, 맞다고 하면 팬들이 몰려올 것이다’라는 겁니다.

내일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 가수 조용필의 40주년 콘서트가 열립니다. ‘기도하는…’ 할 때 사람들 와, 하고 넘어갈 겁니다. 왜 에베소서가 어려워지는 걸까요? 사람들이 성전, 하면 떠올리는 것이 아, 옛날 그 솔로몬의 성전을 연상하기 때문에 그것을 잘라낼 필요가 있기에 이야기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그것을 잘라내야 되는 겁니다. 잘 지어놓으면 시설이 좋잖아요. 잘 지어 놓으면 시설도 좋고 좋은데 문제는 거기에 하나님이 안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안 들어오면 비워놓지’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오면 거기에 마귀가 들어옵니다. 안산강의에서 중요한 대목을 했기에 그것을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예수의 고난이 너희에게 넘치면 너희에게 예수의 위로가 넘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를 공부하게 되면 ‘예수의 고난이 넘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을 접하는 순간, ‘아, 내가 지금 예수의 고난을 받나, 안 받나? 돈이 주는 위로와 예수님이 주는 위로가 어느 것이 더 위로가 될까?’ 자꾸 걱정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이란 고린도후서의 말씀이 나에게 필요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 주는 고난이 예수의 고난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안보면 안보는 채로 그냥 남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핍박하는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가슴에 와 닿는 실례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일 아침에 설교 전에 너무나 우스워서 참지 못하고 웃었습니다. 찬송가를 하면서 웃으면 안되는데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찬송 부르기 전에 재정보고를 하는데 150만원이 적자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고 뒤에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가 “참 즐거운 노래를 늘 높이 부르세…”가 나온 겁니다. 그러니 그 상황이 얼마나 웃깁니까? 상황을 약간 바꿔보겠습니다. ‘이번 주에 흑자 2000만원입니다’ 하고 나서 ‘참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 누가 안 즐겁겠습니까? 그런데 적자의 재정보고를 듣고서는 안 즐거운 겁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영의 성전을 생각하지 않고 육의 성전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육의 성전이 적자 난 것 하고 영의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없는데 상관을 지어놓으니까 이게 짜증이 나는 겁니다. 제가 그래서 신신당부를 한 겁니다.

‘영의 사람은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영의 사람이고 육의 사람은 자기 행동만 자꾸 기억나는 것이 육의 사람이다’라고 분명히 제가 언급을 했는데 실제 응용문제 들어가 보니까 ‘참 즐거운 노래’가 안 되고 얼굴 찡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게 되더라는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흑자재정이 되어야 ‘참 즐거운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 영, 영, 복음, 복음, 복음 그렇게 이야기를 했건만 또다시 돌아오는 것은 결국 내 행동에 의해서 복도 받고 저주도 받는다는 명심보감적인 사고방식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니 마귀같은 목사들과 부흥사들이 그것을 노리고 들어갑니다.

그것이 왜 먹혀 들어가는가 하면 우리 자신들이 영적인 사람들 이라는 것을 잘 무장을 하지 않으니까 우리 자신들이 ‘지난번에 몸이 아픈 것은 내가 벌 받을 짓을 했을거야’라고 본인이 그런 사례를 막 찾아내요. 점쟁이들이 그런 짓을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함정에 빠지도록 하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의 술책입니다.

‘믿을 놈은 나뿐이다. 예수고 뭐고 나만 믿을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교회를 나오니까 마귀가 교회까지 따라와서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다. 봐라. 어린양의 피로 생명을 얻었잖아.”

“아멘 믿습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실제에 들어가서는 다시 자기 쪽으로 홱 돌아서는 이것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육의 성전이 따로 있고 영의 성전이 따로 있는데 육의 성전은 누가 짓는다? 인간이 짓는다. 인간이 짓는 성전은 눈에 보입니까, 눈에 안보입니까? 눈에 보입니다. 이것이 육의 성전의 특징입니다.

눈에 보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실적 위주로 나오겠지요. 전에는 컸는데 이제는 작다든지 전에는 작았는데 이제는 커졌다는 실적위주가 되겠지요. 그래서 실적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육을 북돋우고 격려하게 되면 실적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식으로 합니다. 일반 회사에서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의 성전은 우리가 짓지 않고 영으로 짓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나온 성전이 따로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화목인데 화목이란 ‘나,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그 광적인 사랑이 아가서에 나옵니다. ‘네가 백날 도망가봐라. 내가 너를 쫓아간다’고.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쫓아가니까 그 여인이 “아저씨 왜 그래요?” 하면서 문들 닫아 버렸어요. 그래서 문에 치이면서도 끝까지 따라가는 거예요. “너는 나를 이렇게 해도 나는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하면서 그 손에 몰약을 쥐어줍니다. 아주 지독한 광적인 사랑입니다. 그 광적인 사랑은 죽음보다 더 셉니다.

죽음가운데 있어도 소용없어요. 죽음까지 따라가서 구원해 내는 사랑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거지가 되었어도 그런 것을 묻지도 않아요. 노숙자가 되었든 거지가 되었든 그런 것을 묻지도 않고 사랑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영의 사람은 사랑으로 만드는 성전이죠. 사랑으로 만드니까 눈에 안보입니다. 눈에 안보이고 마음으로 믿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실적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 자체가 최종 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 집 재벌 2세가 시골 촌뜨기 아가씨에게 하는 말,

“당신을 사랑하는데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머리를 안 감았는데요.”

“안감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사랑합니다.”

“혼수 장만할 돈이 별로 없습니다.”

“돈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사랑합니다.”

실적을 묻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로 다 끝난 겁니다. 그래서 영으로 지은 성전에서는 목사가 교인들에게 실적을 내놓으라고 닦달내지 않고 다구치지 않습니다. 실적을 따지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거기는 육의 교회이고 비어있는 곳이 아니고 마귀가 활개치는 곳입니다. 마귀가 없는 곳에 성령이 있고 성령이 없는 곳에 마귀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으로 계신 성전에는 뭘 해도 용납이 되고 어디를 가도 사랑으로 덮어줍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벧전 4:8)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마치 두꺼운 솜이불 같습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준비하고 있다고 확 덮어 버립니다. 질식이라도 시킬 정도로, 숨도 못 쉴 정도로 덮어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아하, 내가 성전 된 것은 내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성령 받은 것이 이미 나보다 앞장서서 주님의 사랑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확인받고 깨닫는 식으로 우리에게 평생을 살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의 마지막 대목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이렇게 사시면 됩니다.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 뒤에 오는 우리는 어떤 해나 저주도 안 받습니다. 예수님 지신 그 십자가 길을 가게 되면 내 앞에 있는 십자가 피가 나의 상급이고 내 방패가 되니까 그 십자가 피를 보면서 우리는 뭘 보는가 하면 ‘주께서 알아서 다 처리해 주시는 저 죄, 도대체 얼마나 내 속에 더러운 것들이 들어 있는가’, 그 죄들이 몽땅 튀어 나오는 세월이 바로 우리 인생의 남은 세월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속에 있는 죄들이나 구경하세요. 시집 안 가신 분들 시집가셔서 남편한테 잔소리 하는 죄도 지으시고 장가 안 가신 분들 장가가셔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멈출 수 없는 지독한 것이 아내의 잔소리라는 것을 몸소 느끼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다 잠언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애들키우면서 ‘아하, 내가 괴물을 낳았구나. 내 속에서 괴물이 튀어 나왔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살면서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앞장서서 계신 분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긴 그림자 속에서 ‘이런 죄가 있었기에 피가 없이는 구원 안 되는구나’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남은 세월을 편안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괜히 그 앞에서 착한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이런 것도 들어 있었구나’ 하면서요. 사람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괜히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도 병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사랑으로 덮어버립니다. 이 말은 자기가 스스로, 인력으로 자기 죄를 끊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죄를 끊는다.’ 안됩니다.

이게 물침대 같습니다. ‘나는 죄를 끊었다’ 하고 한쪽에서 죄를 누릅니다. 그러면 다른 쪽에서 툭 튀어 나옵니다. 욕망은 물렁거리기 때문에 이쪽을 누르면 다른 쪽으로 튀어 나오게 되어 있지 그게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안 짓게 되면 안 짓는 그 죄를 다른 스트레스로 변형시켜서 죄를 짓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생살이가 이렇게 물렁물렁거리는 욕망덩어리라는 것을 애들은 잘 모릅니다. 인생 더 살아봐야 압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우리는 그 안에 있지요. 그러면 성전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으니까 이유도 없이 무조건 거룩한데 그렇다면 거룩한 성전에 속했을 때 우리 속에 어떤 변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외부환경이 좋아져야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길수 있습니다’ 라는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내면의 환경을 바꾸십니다. 내면의 환경을 바꿈으로 말미암아 외부의 어떤 환경이 주어져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수 있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부로 침투되는 겁니다.

수박은 외부에서 망치로 때리면 깨지는데 화산은 외부에서 때려서 터지는 게 아닙니다. 화산은 지구 내부의 3500도 이상 되는 맨틀이 녹아서 마그마가 되고 그것이 지표를 녹이면서 지진도 일어나고 폭발도 일어나서 분출하면 사람들이 죽고 난리가 나는 겁니다. 우리의 외부 환경을 신자나 불신자나 다 힘듭니다.

기름 값이 치솟는데 경유 값이 휘발류값보다 더 올라 버렸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대에 환경이 좋아지면 예수 잘 믿겠다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는 광야에서 다 실패합니다. 광야는 환경이 아주 나빴습니다. 물도 없었고 양식도 없는 나쁜 환경에서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서 말씀이 올라와야 그 말씀이 너를 살린다’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몰라서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다 죽었습니다. 지금도 안식의 때가 남아 있고 우리가 있는 곳은 광야입니다.(히 4:9)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내부 환경이 예수님의 피로서 물들어지도록, 예수님의 피가 출렁출렁 거리면서 ‘예수님께 용서 받았어. 예수님의 용서 받았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의 내면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자기가 완벽하기 위해서 자기 자율성을 주장합니다. ‘하나님 제가 앞으로 뭘 하면 됩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자율성을 주장합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의 피가 출렁거리면 ‘나는 참 지독히도 더럽고 나쁜 놈이 맞는가 보다’ 하면서 항상 자기를 나쁜 놈으로 보는 사람한테는 기름 값이 좀 오르고 서민들 사정이 좀 나빠져도 그게 그렇게 큰 문제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 속에 거룩이 있느냐, 거룩하냐를 묻는 것이지 광우병 안 걸린 소고기 먹고 오래 살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면속에 예수님의 피가 출렁거리면 ‘나는 죄인 맞기에 오직 일방적인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용서로만 내가 구원될 수 있구나. 내 성실함이 아니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가 없이는 안 되는구나’를 아는 것이 내면 환경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렇게 달라지게 되면 우리가 어떤 외부의 환경이 나빠지더라도 심지어 생존의 위협이 다가온다 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8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6,567 묻고답하기 하나님 나라 신학 이후에 더 이상 나올 신학이 없다? - 최고관리자 08-06-30
6,566 자유게시판 성도의 삶에 대한 빠진 내용(2) 로마서 최고관리자 08-06-30
6,565 자유게시판 성도의 삶에 대해 빠진 부분의 내용(1) - 최고관리자 08-06-30
6,564 우리교회 [주보] 7월 6일 주보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8-06-29
6,563 우리교회 삿 20: 1- 7 (백성의 총회) 사사기 최고관리자 08-06-29
6,562 설교 마가복음 4장 35-41절 제목 :풍랑과 믿음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6-29
6,561 우리교회 막 4:35-41 (풍랑과 믿음)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6-29
6,560 강의 광주 6월 27일 강의 디모데 전서 2장 8, 15절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08-06-28
6,559 자유게시판 20080613-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4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6-27
열람 ➜ 자유게시판 20080613-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3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6-27
6,557 자유게시판 한국교회에 대해 분노하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져온 글> 미가 최고관리자 08-06-27
6,556 우리교회 [일반] 한국교회에 대해 분노하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 미가 최고관리자 08-06-26
6,555 자유게시판 책 제본의 실수에 대하여 역대하 최고관리자 08-06-26
6,554 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06-주님의전쟁6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8-06-25
6,553 우리교회 사 54: 1- 3 (잉태치 못한자의 노래) 이사야 최고관리자 08-06-25
6,552 자유게시판 성도의 삶에 대한 질문과 답변 책이 인쇄가 잘못&#46124;는지.. - 최고관리자 08-06-25
6,551 우리교회 [공지] 서버 복구 되었습니다. [공지] 최고관리자 08-06-24
6,550 우리교회 [주보] 6월 29일 주보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6-22
6,549 우리교회 삿 19: 1- 6 (12토막 난 첩) 사사기 최고관리자 08-06-22
6,548 설교 마가복음 4장 33-35절 제목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6-22
6,547 우리교회 막 4:33-35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6-22
6,546 자유게시판 아벨의 제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08-06-21
6,545 자유게시판 십자가 마을 여름수련회 교재(잘린 나머지 부분) 잠언 최고관리자 08-06-20
6,544 자유게시판 십자가 마을 여름 수련회 교재 잠언 최고관리자 08-06-20
6,543 자유게시판 십자가 마을 여름 수련회 잠언 최고관리자 08-06-19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