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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8대구강의06-주님의전쟁6자유게시판히브리서

08대구강의06-주님의전쟁6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8 대구강의 6 - 주님의 전쟁 6 - 지옥의 하나님 27

08,05,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선택'에 대해서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우리 교재 100페이지부터 한번 살펴보자.

**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은, 옛날 출애굽 시절의 여호와의 선택 행위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역도 선택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여기 선지자의 활동과 과거 출애굽 시절 하나님의 선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는 말씀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오해를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하셨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하지만 성경의 의미는 그것이 전혀 아닌데, 하나님께서 옛날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선택할 때에 이미 이스라엘은 구원이 된 거룩한 백성이라고 간주를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들 말고 다른 백성들도 이미 선택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런 점이 어려운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스라엘 전체가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가 모두 다 선지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선택을 받을 때 그들이 어디를 지향하는고 하니, 장차 오실 다수 중에서 한 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다수 중에서 한 분이다" 라는 것이다.

◈ 선택은, 오직 한 분을 지향하도록 !!

여기 이렇게 전체가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고 할 때,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선택되었다" 라고 할 때 그 선택은 어떤 선택인고 하니, 먼저 자기들이 왜 선택이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다수 중에서 한 분'으로, 그렇게 그 한 분을 지향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올라가게 되는데, 하지만 바로 올라가지 못하고 언약을 통해서만 올라가는데, 제사장이 거룩한 자가 되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말미암아서 올라가게 되는데, 그것이 곧 '모세언약' 이라는 것이다.

◈ 모세언약 - 제사장을 통해서 !!

그리고 이러한 다수의 백성들이 이 모세언약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이 선택이 된 것은 자기들 가운데 있는 제사장 덕분인데, 그런데 그 제사장은 또 하나의 하나, 즉 하나님의 하나됨에 의해서 거룩이 주어져서 제사장이 거룩하게 되었고, 또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선택이 되었다는 말이다.

◈ 히브리서 7장 - '허리'(?)를 통해서 !!

이것을 히브리서 7장에서는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단어가 참으로 희한한데 '허리'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축구에서 말하는 '미드필더' 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허리' 라고 하는 것은 중간에 끼어 들었다는 말이다.

(히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을 가졌으나
(히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히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계속해서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한데, 물론 그래도 할 수 없지만, 이렇게 원래 하나인데 중간에 끼어 들어서, 그렇게 해서 뒤에 끼어 든 것 때문에 형성된 다수의 집단이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다수의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은 허리의 기능을 하고, 그런 허리의 기능을 통해서 허리 말고 원래 하나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구조라는 것이다.

◈ 이미 구약시대에도 하나를 지향하는 구조가 !!

물론 이것을 다른 말로, 구약은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하나됨을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시간적으로 길게 이야기한 것이고, 제가 방금 허리를 말한 것은 물론 시간적인 것도 포함이 되지만, 그것은 나중에 시간적으로 메시야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먼저 이스라엘 내부에서, 즉 이스라엘의 자체적인 구조 내에서도 동일하게 자기 시대에 이미 하나를 지향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이미 그 당시에 그러한 구조를 내부에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적으로는 나중에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한 분을 보여주고 말이다.

◈ 김희보 교수의 '남은 자' ??

총신에서 구약을 가르치는 김희보 교수는 이러한 점은 모르고, 그냥 구약의 '남은 자' 개념을 통해서, "남은 자 중에 남은 자가 누구인고 하니,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 양반의 '이스라엘 역사'(?) 라는 책의 관주에 보면 그런 주장을 하는데, 다른 교수들이 시비를 걸까 싶어서 그런 지는 몰라도 관주에다 슬쩍 넣어놓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남은 자 중에 남은 자를 성경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설명하면서 그런 주장을 하는데, 물론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판들이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다수에서 하나가 나왔는지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라는, 그런 요구를 받는데, 하지만 김 교수는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못하고, 그냥 믿음으로 그렇게 된다고 얼버무리고 만다는 것이다.

◈ 하지만, 왜 다수에서 하나로?

사실상 이것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될 부분이 아닌데, 아니 다수가 다 천당에 가면 되지 왜 거기에서 굳이 하나가 나와야만 되고, 그렇게 해서 천당에 가게 되는지, 그것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다 천당에 가면 되지, 왜 굳이 하나로 묶여서 천당에 가야 하는지를 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원래 원칙이 그렇다"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상대방에게 그런 것은 말이 안 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라는 요구를 당연히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각자가 천당에 가면 되는데, 왜 굳이 하나로 모여져야 하는지, 그것을 제대로 설명해보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주장이 그러한데, 교인들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각자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아니 뭘 또 하나로 모아지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즉 하나로 모아져야 한다는 논리가 전혀 없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교회마다 각자가 개판(?)을 친다는 것이다.

◈ 구약의 선택은, 버림받기 위해서 !!

하지만 그런 논리는 십자가가 아니면 도저히 해결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이 십자가는 버림받은 돌(?)인데, 이왕 어려운 것인데 계속해서 어렵게 진행해보면, 아무튼 구약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림을 받기 위한 것인데,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버린 자를 두고서 '잃어버린 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

예수님은 자기가 온 것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그들을 찾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는데, 그러므로 '이스라엘=잃어버린 양' 이라는 말이다. 물론 지금 이스라엘이 있지만 이 이스라엘이 모두 잃어버린 양이 아니고,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 본질을 가진 이스라엘이 따로 있고, 바로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으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주장하기를 "아니 구원을 받았으면 되었지, 또 무슨 '잃어버린 양' 타령인가?" 라고 하는데, 그러나 저의 주장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선택을 받아서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택함을 받았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맞지 않느냐는 말이다.

◈ 왜 하필이면 '잃어버린 양' 인가?

이것이 지금 유대교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현대의 구약 신학자들의 책에도 그러한 주장이 나오는데,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넜고,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면, 그것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분명히 맞는데, 그런데 왜 또 잃어버린 양이 등장해야 되고, 또 메시야가 왜 필요 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이제부터 나와 함께 동행하면 천당에 간다" 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손을 털면 그것으로 끝이란 말이다. 즉 그렇게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구원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끝나버리면 그것이 곧 구약이란 말이다. 그런데 성경이 구약으로 끝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신약에 들어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왔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 '이스라엘=구원받는 자'인데, 즉 이미 택함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는데, 무슨 잃어버린 양이 또 나와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았으면 잃어버린 양이 아닌데, 그런데 왜 이렇게 서로 마찰이 되는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이다.

◈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목사는 "예,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라고 답변을 하면 참으로 간단한데, 그런데 졸지에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잃어버린 양이 나와버리면 교인들은 당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인들이 그러한 잃어버린 양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구원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그래서 "아하,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구나" 라고 생각해버리기에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면 아무리 예수님을 부르고 또 불러도 예수님이 아닌 마귀가 응답하는 것이지, 예수님은 전혀 묵묵부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내가 잃어버린 양인가? 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잃어버린 양이라고 할 때, 자기 자신을 버림받은 돌로 간주하는데,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방식으로 구원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물론 신약에 와서 말이다.

◈ 구원은, 버림받은 돌이 잃어버린 양을 찾는 방식으로 !!

사람에게 버림받은 돌(모퉁이 돌?)이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은 이렇게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오셨는데,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잃어버린 양'이 되는데, 그러나 그 잃어버린 양이란 것은 과거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니고, 12제자들을 기초로 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거의 이스라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이라는 말 대신에 '잃어버린 양' 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렇게 해서 이제 이스라엘은 버림받은 돌이 되시는 그분이 찾을 경우에만 참된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구원은 지우개와 복분자가 !!

지금 강의 내용이 어려운데, 힘이 들어도 조금 쉽게 해보면, 여기 지우개가 있고 복분자(?)가 있는데, 그런데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아무리 모여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혹은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니면 "나는 개 같은 이방인이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스스로 "나는 구약성경을 믿는다", 혹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왔다" 라고 하면서 지우개와 복분자를 선택했다면, 그 나머지는 제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이 중요하니 잘 한번 들어봐야 하는데, 이렇게 지우개와 복분자가 있는데, 지금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 이렇게 교회가 있고 목사가 있는데, 그래서 교인들이 와서 하는 말이, 물론 지우개와 복분자도 같이 왔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을 믿어줄까요"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구원받으려고 몰려온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나는 이 지우개와 복분자만을 선택했다" 라고 하면, 그것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겠다고 교회로 우르르 몰려온다고 해서 모두가 이스라엘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니, 김희보 교수가 "남은 자가 하나이다" 라고 이야기는 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하시면서 왜 남은 자만 구원을 하시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한다고 했으면 모두 구원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야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 구약 때는 '자기백성' 이라고 했는데 ??

구약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자기 백성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언약을 주어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한다고, 그래서 함께 동행한다고 그렇게 강조를 해놓고는, 모세 때에 말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잘라내는 개념으로 보여지는 남은 자가 있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잘리고 잘려서 나중에는 한 사람만이 남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김 교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데, 물론 저도 그 양반의 강의를 들었지만, 그때는 저도 이런 신학적인 체계가 없어서 수업시간에 질문은 하지 못하고, "아하, 그렇구나.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구나. 아멘" 이라고 이해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만나면 그런 점에 대해서 좀 묻고 싶은데, 그런데 나이가 많아서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아직 살아 계시는가요? 이미 돌아가셨다구요? 성질도 급하시기는,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서 말이다. 만약에 살아 계셨다면 연세가 여든에 가깝지 싶은데 말이다.

* 질문 - '남은 자' 라고 하면 남겨진다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인지요?

'남은 자' 라고 하는 것은 있는데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데서 툭툭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구약 엘리야 당시에 엘리야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구원받은 자는 자기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가 7000명이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것으로, 즉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지 않으면 엘리야는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좀더 어렵게 말하면, 사람이 신학을 좀 공부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할 때는 자기 영역이 조금씩 확장이 되는 것이지, 결코 이 세상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그런 우리의 영역확장이 아니라, 오히려 외부에서 우리의 영역을 치고 들어오는데, 즉 조금 전에 말한 복분자가 구원을 받듯이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고 하니, "아하, 내가 주님을 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계시로 알려주어야만, 그렇게 포섭이 된 자만이 구원을 받는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주께서 말이다.

◈ 차 교수님, 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셨지요?

아무튼 김희보 교수가 돌아가셨다고 하니 많이 아쉬운데, 참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제가 총신 3학년 때, 서울 인사동에 우리나라 합동측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동교회' 라는 것이다.

거기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전도세미나를 하는 도중에 있었던 일인데, 차영배 교수가 전도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어느 학생이 질문을 하나 했는데, 아마도 제가 질문했는지도 모르겠는데(ㅋㅋ), 뭐라고 질문을 했는고 하니까, 참 예리한 내용인데, "그렇게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면 예수님은 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하셨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차영배 교수가 답변을 하지 못했는데, 아니 그렇게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로 가서 열심히 전도를 하지 않고, 자기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왔다고 하셨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하겠다고 나서면서 왜 스스로 전도를 적극적으로 제한하시느냐는 말이다. 왜 다른 양들은 안 되고, 잃어버린 양만을 찾으려 왔다고 말이다. 그 질문을 하고 하니까, 그만 그 세미나 자리가 숙연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썰렁해졌겠죠? ㅋㅋ)

◈ 선택은 구원이 아니라, 사명 !!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을 구원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선택을 했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곧 '선지자' 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선택이 되지 않으면 못할 일을, 선택을 하셔서 일을 맡겨서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라고 선택한 것인데, 즉 육은 영의 일을 하지를 못하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육이 못하는 영의 일을 하라고 선지자로 선택을 하셨다는 것이다. (목사가 선지자인가??)

그렇다면 선지자가 온전히 그 일을 했는가?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다니엘이 그 일을 제대로 감당했는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온전히 제사를 드렸는가? 그런 제사를 드리지를 못했는데, 그것이 히브리서에 나오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 선지자 - '못한다' 라는 것을 미리 !!

그렇게 '못한다', '못한다' 라는 것을 깔아놓음으로 말미암아서, 진짜 선택된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즉 "너희들은 못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마지막으로 '남은 자'이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버림받은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들이 자기가 하는 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는 예수님이 오시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분명히 영적인 일인데, 그렇게 영적인 일을 하라고 부름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부름을 받아놓고는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았다는 것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우리 교재 '지옥의 하나님'의 2부에 보면 목사에 대해서 나오는데, 아무튼 목사님들에게 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목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좀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달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조폭두목이 자기 2인자나 3인자에게 지시를 하기를, "어이, 이번에 내가 미국에 갔다오는 동안에 강남 나이트클럽 5개만 접수해" 라고 명령했다면, 힘이 엄청나게 들기는 하겠지만 주먹으로 접수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목이 "어이, 내가 이번에 미국에 갔다오는 동안에 너 자신을 부인해" 라고 했다면, 그것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선지자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흉내를 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데, 심지어는 베드로도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데, 기껏해야 사단의 일이나 하는데, "주여,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베드로야 물러가라" 라는 것이 아니라,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 선지자의 보람은, 사명감에 !!

선지자가, 목사가, 또는 주의 종들이 어떤 경우에 보람을 느껴야 하는가? 남들이 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하지 못하는 일을, 자기 안에 있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데, 그런 일을 주께서 자기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을 말이다.

주의 종이라면 당연히 이러한 감격이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당회장이 부목사에게 시키는 일은 주의 일이 아닌데, 조폭들이 하는 일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가? 마치 초등학생에서 미분적분을 풀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요즘은 푸는 아이들도 있다고 하든데??)

◈ 선지자 - 선택된 분이 따로 계신다 !!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선택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하,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주께서 맡겼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도록 함으로 말미암아서, 진짜 일을 완수하시는 분이 따로 계심을, 즉 진짜 선택된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뽑힌 사람이 바로 '선지자' 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굉장히 길어지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과와 실적에 대해서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왜냐하면, 성과와 실적은 육의 나라에서 하는 것이니 말이다. 주께서 "당신, 몇 명을 모았는가?" 라는 것을 물어보고 구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성과와 실적이 결부된 가짜 예수로 뭉쳐진 인간 !!

여러분이 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주께서 구원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과와 실적이 결부된 예수는 가짜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이미 우리 육 안에 잉태되어있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는 잠자고 있는 가짜 예수를, 즉 성과와 실적으로 뭉쳐있는 가짜 예수를 부인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런 성과와 실적을 묻지 않고 구원하시는 진짜 예수를 위해서 살아가겠느냐고 하는 것을 묻는데, 그래서 교체작업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일을 하면서도 항상 성과와 실적만 생각하는데, 그러므로 그러한 성과와 실적이 제대로 오르지 않고 깨지고 박살나는 일들이 선지자에게 늘 일어난다는 것이다.

◈ 선지자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

우리가 성경을 보면 엘리야가 일을 참으로 많이 했는데, 그런데 그가 한 일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던가?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아니, 제단에다 송아지를 잡아놓고는 그 주위에 찬물을 부어놓고는 기도를 해보라는 것이다. 어디 스스로 불이 붙어서 송아지가 활활 타는지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고 나서 선지자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왕을 피해서 도망을 다니는 것밖에는 더 있었는가? 하지만 엘리야가 마지막에 얻은 것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이 남는 장사가 아닌가? 그러니 이것은 그야말로 천장이 푹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 '푹' 주저앉고 내려앉는 천장 !!

그렇게 이층에 있던 불수레가 그만 밑으로 내려와서 엘리야가 탔는데, 물론 엘리사는 죽을 때 탔지만, 아무튼 엘리야는 살아있을 때부터 주의 수레를 타고 일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주의 수레를 두고 구약에서 '주의 이름'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엘리야는 주의 이름으로 일을 했는데, 그 실체가 바로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고 말이다. 또한 다윗의 경우에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그때는 주의 이름으로 이겼는데, 즉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물리쳤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혓바닥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본질이 우리 눈에 띄어야 한다는 것이다. 밖에 보이는 혀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성도를 택했다고 하는 것은, 밖에 있다가 혓바닥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혓바닥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이 아니고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사실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들이 바로 선지자라는 것이다.

에스겔의 경우에, 마누라가 죽어도 울지도 않고 (요즘 이런 인간은 많은데, ㅋㅋ), 390일을 왼쪽으로 누워서 잠을 자고, 또 인분으로 연료를 삼아서 떡을 만들어 먹고 말이다. 엘리야는 허리띠를 풀어서 강에 놓아서 강물이 그만 썩어버렸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가? 하나님은 왜 그런 일을 시키느냐는 말이다. 광기, 혹은 엽기적인 일들인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게 사람이 흉내조차도 내기도 힘든 일들을 말이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서울대를 나온 '천상병' 이라는 문둥병자(?) 시인이 있는데, 술을 먹고서 길에서 죽었다는데 말이다. 그 양반이 지은 '이제는 내 본향을 가리니(?)' 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는데, 혹시 아시는지? 이런 것이 곧 인간의 한계인데, 인간은 기껏해야 그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양반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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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병 [千祥炳, 1930.1.29~1993.4.28] -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시(嬉路市)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퇴. 1952년 《문예(文藝)》에 《강물》, 《갈매기》 등을 추천받음.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 사건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름. 가난·무직·방탕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함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친구들이 만들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귀천(歸天)》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미망인 목순옥(睦順玉)이 1993년 8월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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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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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성이 아닌 혓바닥 !!

사람들이 저의 말을 곡해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인데, 사람들은 "낙원으로 가면 좋지 않는가?" 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종교성이지 결코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분명 성경은 그런 종교성이 아니라 혓바닥(?)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 곰 발바닥, 소 발바닥, 곰 혓바닥, 소 혓바닥, ㅋㅋ)

사람들이 성경책을 본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가?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이고, 유대교적인 모습인데, 옛날의 선지자들을 보면 주께서 그들을 선택한 것처럼, 지금 신약시대에서도 주께서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것만은 제가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께서 옛날 선지자들처럼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그것은 구원을 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고,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새삼스럽게 그 사람에게 맡기기 위해서 선택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성도이고 말이다.

◈ 아니, 성경에 웬 객소리가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참아라. 세상이 너희들을 모른다. 그러니 누가 너희들의 말을 듣겠는가? 오직 귀 있는 자만 듣는다" 라고 하시는데, 그런 장식품 같은 객소리(?)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종교성이 아니라 주님이 실제로 우리 안에서 과거 선지자들이 한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지금도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너희를 몰라도 마귀는 알 것이다" 라는 것도 그러한데, 그것이 바로 '선택' 이라는 개념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 선택은 그분을 증거하기 위하여 !!

한번 더 정리하면, 선택은 구원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다수에서 오직 하나로 가는 것인데, 즉 "우리 다같이 구원받읍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분이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고, 내가 그분의 일을 하고 있다" 라는 것을 남들에게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것이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오히려 더 어려워진 것 같은데, 아까 제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하면서 강의 초반부에 '허리'를 언급했는데, 이 허리라는 말은 미들, 즉 중간이라는 것인데, 그리고 허리는 하나에 관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이 하나이고, 또 아브라함 허리에 레위지파가 있었는데, 이 레위지파가 모세언약이고 말이다.

◈ 하나에서 다수의 속성이 !!

레위지파가 모세언약을 가지고 들어간 것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함인고 하니, 자기들은 중간에 들어간 허리에 불과하고, 실제로 모든 일은 하나이신 멜기세덱이 했다는 것이다. 즉 무엇을 지킨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이렇게 하나에서 다양성(다수성)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런 점을 김희보 교수가 몰랐는데, 이렇게 하나의 실체가 있다면, 그리고 이 실체는 영원한 것인데, 여기에서 다수의 속성이 나온다는 것이다.

◈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도 !!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하나인데, 그런 믿음을 보여주는 택함을 받은 자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그 유명한 모세라는 것이다. 모세는 바로왕 공주의 아들 됨을 거부하고 말이다. 그들에게 그러한 다양한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가 하는 일을 모세가 하면 안 되고, 모세가 하는 일도 역시 노아가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친 것도 하나의 실체를 보여주는 속성이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실체의 속성, 즉 그런 관계를 두고서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믿음은 하나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 !!

그러니 믿음은 하나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믿음을 두고서 믿음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믿음은 예수님이다" 라고 하니까, 양무리인지 마귀무리인지, 그 마을에서는 그렇게 시비를 걸고 나온다는 것이다. 요즘도 그 마을에 사람들이 살고 있나요? 아무튼 하나의 실체에 다수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왜 눈이 손더러 쓸데없다고 하고, 머리가 발더러 쓸데없다고 하느냐고 책망을 하는데,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모두가 다 쓸모가 있고, 나름대로 주께서 쓰시는 것들인데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다수의 속성이 하나로 묶어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고전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전 12:19)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고전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 왜 하나로 묶는가?

그렇게 하나로 묶어진다는 것은, "나는 구원받았다" 라는 소리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일을 하라고 선택을 하셨구나" 라고 고백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맡겨진 일은 인간이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육적인 인간이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말이다.

여기에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자부심이 없다면 정말이지 주의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비참하고 외로운지 말이다. 성과나 실적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엷어지니 말이다. 교인이 10명이 있다가 5명이 한번 되어보라는 것이다. 밤에 잠이 오는지 안 오는지, 말은 못하고 그야말로 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혓바닥인데, 즉 5명이든지 10명이든지 그것은 주님 소관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목회를 하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 자기의 속성인데, 그러니 누구를 본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니는 니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목회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 니는 공부 많이 해라. 나는 놀란다 !!

어떤 목사가 저에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니는 공부 많이 해라. 나는 공부 안 할란다. 내가 왜 너를 따라가야 하는가?" 라고 말이다. 사실 말은 맞는 말인데, 물론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농땡이 치려고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남을 따라갈 필요는 없는데, 다들 각자의 속성이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서로가 다들 다른데, 하지만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부정' 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자기 부인을 하면서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내 챙길 것은 챙기겠다" 라고 하면서 그런 농땡이를 치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기 부정이 없이 "나는 놀거야"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종도 복종도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윌리엄 오캄 - 하나님이 시키면 간음도 간음이 아니다 !!

윌리엄 오캄이 이러한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하나님이 시키면 간음도 간음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그 당시에 어디서 그런 믿음이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도 그 당시 교회에서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율법적으로 나오니, 오캄은 교회와 대치하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어제 설교시간에 제가 마광수 교수를 언급했는데, "사랑에는 불륜이 없다" 라고 말이다.

이제 우리 교재 101페이지에 나오는 고린도후서 4장 3절에서 4절 말씀을 보도록 하자.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여기 3절에 "만일 복음이 가리웠다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일은 주님께서 하신다. 니가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따지지 마라. 일은 내가 다 한다" 라는 것으로, 즉 사도바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바울이 알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선택을 받았으니 말이다. 선택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이런 사실을 아는데, 그래서 주님에게 들어갈 때는 자기 것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주의 것으로서, 즉 주님의 것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구원을 받을 거야" 라고 하면서 촐랑거리며 들어갔다가, 주님에게 얻어터지고는 하는 말이,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주님이 그 안에서 작용을 하는데, 그 작용이 바로 '하나됨' 인데, 이 세상 모든 움직임은 주께서 다 하신다고 하는 그 하나됨이라는 말이다.

◈ 사도들이 증언해주는 주의 전쟁 - 왜 싸우는가?

이제 교재 102페이지에 나오는 '사도들이 증언해주는 주의 전쟁'을 살펴보겠는데, 참으로 어려운 내용인데, 좀 쉽게 하자면, 한 마디로 말해서 "왜 싸우는가?" 라는 것인데, 왜 싸워야만 하느냐는 말이다. 즉 "우리들은 싸우기 싫은데, 하나님께서는 왜 싸우시는가?" 라는 말이다.

그런데 로마서 12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할 수만 있으면 서로 화평하게 지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서로 잘 지내라고 해놓고는, 정작 하나님 본인은 싸우시겠다고 하는데,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는 그렇게 말해놓고, 에베소서 12장에서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다" 라고 하면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말이다.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것을 서로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싸움은 분명히 있고 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 대상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인가? 보이지 않는 공중권세를 잡은 자가 그 대상인데, 그런데 그는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사람을 잡고 마음대로 하는 자인데, 그러니 사람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그 배후에 있는 자와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니 우리도 사람과는 싸우지 않지만 그 배후에 있는 놈과는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 내 여자니까, 내 여자니까 !!

어제 '삼손과 들릴라'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삼손이 여자를 밝히는 것은 죄가 아닌데,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나의 여자' 라는 점이라는 말이다. 삼손은 주님의 전사이고, 그래서 주의 일을 위해서 싸워야만 하는데, 그런데 따로 자기 여자가 있으니 마귀가 무엇을 공격하는고 하니까, "까불면, 니 여자는 재미없어" 라고 하면서, 자꾸만 삼손 본인에게 시비를 건다는 말이다.

삼손에게 자기 여자가 없으면 여자 때문에 공격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하지만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했다는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여자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는 말인데, 그러니 마귀가 여자에게 달려든다는 것이다.

◈ 그 놈의 잘못된 사랑 때문에 항상 마귀에 !!

이것은 비단 삼손의 문제만이 아닌데, 그러니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뿐,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여자도 자기 것이니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인데,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끝까지 자기 것을 지키면 되는데, 그렇게 자기 것도 지키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지도, 간수하지도, 그리고 구원하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도 기어이 자기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인데, 그것을 마귀가 제대로 안다는 말이다. 그냥 자기 최선을 다할 뿐인데, 그렇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중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해결책이 전혀 없으면서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 선풍기 정도는 내가 !!

마치 어설픈 전기 수리공처럼, 선풍기가 고장이 나서 자기가 실력으로 고치지를 못하면 포기를 하면 되는데 그런데 몇 시간씩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치지 못하면서도 습관이 무엇인고 하니까, 마치 자기가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우기고 있다는 말이다. 아니 무슨 바보 영구도 아니고, 해결책이 없으면서도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영구는 바보가 아니데, ㅋㅋ)

자기가 그렇게 자기 사랑을 하다보니,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에 바빠서 결국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니 다른 전쟁에 빠져있는데, "나를 건드리기만 해봐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곧 육적인 전쟁이 아닌가?)

◈ 내 교회를 사수하라 !!

오늘날 목사들이 무슨 전쟁을 하는가? 자기 교회를 지키는 전쟁에 몰입해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몰입전쟁인가? ㅋㅋ)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니, 목사님 말을 그렇게 심하지 하면 안 되지요? 모두가 다 주의 일을 하는데 말입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자기 교회 교인이 옆에 있는 교회에 가버리면 목사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데, 분하고도 아까워서(?) 말이다. 자기가 심방을 하면서 시간과 물질을 얼마나 투자했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척(?) 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아예 저주의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주의 일인가? 자기 일이지 말이다.

◈ 인간은, 자기 지키기 몰입전쟁에 빠져 !!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자기 것을 지키고, 그리고 나서 자기 것을 확장하는 전쟁을 말이다. 그 전쟁 말고 다른 전쟁을 우리는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공부를 잘해야 되고, 당연히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여자들 치고 이런 전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물론 남자도 그렇고 말이다. 식당을 하더라도 자기 식당이 다른 사람의 식당보다 장사가 당연히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식당이 장사가 잘 되면 얼마나 배아파하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니 기도를 해도 당연히 자기 자식이나 하는 일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거기서 무슨 이웃사랑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끝까지 자기 사랑을 지키는 전쟁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로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우리 이름이 아니라 말이다.

이런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의 바로 그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위험한 전쟁을 했는데, 저는 그것을 보면서 다윗에게 묻고 싶은 게 무엇인고 하니, "골리앗과 한번 더 붙고 싶지는 않은가요?" 라고 말이다. 물론 심술궂은 질문이지만, 아마도 두 번 다시는 붙고 싶지 않다고 하지 싶은데 말이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의 전쟁을 해야 하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피조물이 있다는 것이다. 피조물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자기를 만들어준 창조주의 이름, 즉 아버지의 이름으로 전쟁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전부가 다 자기 이름으로 전쟁을 하니, 그런 영적인 전쟁에서 인간들은 원수노릇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폰라드의 '여호와 전쟁' !!

'폰라드' 라는 구약신학자가 있는데, 그가 무엇으로 유명해졌는고 하니, '성전(聖戰)', 즉 '거룩한 여호와 전쟁' 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박사학위논문이고 말이다. 제가 그것을 보고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렇게 구약의 핵심이 잡히지 않고, "율법이 핵심인가? 아니면 흔히 말하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왔던 하늘나라인가?" 라고 하면서 고민하든 차에 말이다.

만약에 구약에서 하늘나라가 핵심이라면, 예수님께서 새삼스럽게 "하늘나라가 왔다" 라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하늘나라가 그렇게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것이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은 이미 하늘나라이니 말이다. 그렇게 하늘나라가 되었는데, 무슨 새삼스럽게 하늘나라가 오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따진 내용인데, 이미 우리가 하늘나라인데 새삼스럽게 하늘나라가 왜 오느냐고 말이다. "우리나라를 지키고 이방나라를 박살내려고 그렇게 하는가?" 라고 하는데,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는 심판의 나라이다" 라고 하니까,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 구약의 주제는 과연 ??

아무튼 구약의 주제가 풀리지 않았는데, 땅인지, 약속인지, 언약인지 말이다. 물론 언약은 맞는 것 같은데,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주제가 폰라드가 말한 바로 '주의 전쟁' 이라는 것이다. 그 주의 전쟁이 바로 '주의 이름' 이고 말이다.

이렇게 되니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와 '하나님' 이라고 하는 주의 이름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즉 하나님께서 왜 자기 이름을 전에 가르쳐주지 않고 있다가, 왜 지금에 와서 '여호와' 라는 이름을 가르쳐 주었는고 하면, 그것은 바로 전쟁을 하려고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 하나님 : 너희들, 이제 내 이름을 알았지?
* 백성들 : 예, 알았습니다. 안녕히 계셔요.
* 하나님 : 아니, 어딜 가노? 이리와.
* 백성들 : 왜요?
* 하나님 : 이제 내 이름을 알았으면 전쟁을 해야지. 두유언드스탠?
* 백성들 : ???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전쟁 !!

그래서 지금부터 여호와와 바로가 전쟁을 붙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 이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서, 자연적으로 모든 다른 신들은 무엇이 되는고 하니까, 두 글자로 '우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전쟁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보다 더 좀 편안하게 잘 살아보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힘들어서 못살겠습니다. 땅을 좀 주세요. 그리고 적들을 물리쳐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들의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부르짖었는데, 그러나 주님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그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면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 주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 !!

그렇다면 주의 이름은 왜 전쟁을 해야 하는가? 좀 어렵지만 정신을 차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하고, 죽은데서 살리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없다'와 '죽었다' 라는 것을 합치면, 이것이 바로 애굽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아직 없는데, 그래서 없는 이스라엘을 있게 만들고 죽었던 이스라엘을 살리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쟁에 여호와의 이름이 개입되는데,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 4절에 보면, "생명이 죽은 것을 삼키려한다" 라고 하는 것이다.

(고후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은, 그런 일을 전혀 할 수가 없는데, 즉 인간들은 할 수도 없고 사실상 할 마음도 없는데,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이 전쟁을 일으켜서 빼앗아서 주게 된다는 것이다.

◈ 주인을 결박하고 늑탈해야만 !!

지금 할 것은 다음 주 설교내용인데 미리 한번 해보면, 강도가 세간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강한 집주인을 묶어놓고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전쟁을 벌려서 마귀를 꽁꽁 묶어서 마귀에게 사로잡혀있던 잃어버린 자들을 데려다가 자기 백성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막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그러니 우리가 마귀에게 붙잡혀있는 한, 제 아무리 팔짝팔짝 뛰어도 이스라엘이 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는, 바로 그런 상황을 우리에게 통보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주의 이름' 이냐는 것이다. 칼이나 활과 같은 무기가 아니고 말이다. 왜 여기에 이름이 들어가느냐는 말이다.

◈ 전쟁을 하는데, 왜 이름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특히 구약신학자들이 여기에 대해서 엄청나게 노력을 했는데, 왜 이름이 들어가야 되는지를 말이다. 폰라드나 침멀리, 특히 클라우스는 자기의 '조직신학' 이라는 책에서 칼바르트의 이름신학을 가지고 와서 나름대로 언급했는데, 물론 바르트의 이름신학은 하이데거에서 왔고 말이다.

아무튼 클라우스는 '조직신학' 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전쟁은 이름으로 한다" 라고, 거기까지는 이야기했는데, 그러나 "왜, 이름인가?" 라는 것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바르트도, 하이데거도 말하지 못했고 말이다. 물론 하이데거는 철학자이고 불신자이니, 그러한 이야기를 할 필요조차도 없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 바르트가 말하는 '이름신학' !!

그런데 바르트가 하나의 힌트를 주었는데, 물론 희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왜 이름인고 하니, 이 이름은 '피조성' 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왜 개를 한 마리 사면 집에 데리고 와서 먼저 이름부터 짓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떤 관계에 돌입을 하려면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장터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를 집에 데리고 오면 일단은 이름을 붙여주는데, 그냥 "이놈의 개야"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은 주인이 붙여주게 되는데, '근돌이' 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말이다. 아무튼 그 이름은 개가 스스로 만든 이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이 일방적으로 붙여주게 되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앞으로 그 개의 소유권이 이름을 붙여주고 부르는 자에게로, 즉 주인에게로 넘어온다는 것이다. 저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르트에 의하면 말이다.

이러한 칼바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기 이름을 가르쳐준 것은,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이 없었는데, 앞으로는 모세를 비롯해서 애굽에서 건져낸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거룩한 나라가 되는데, 거룩한 사람이 아니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거룩한 나라로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면 왜 피조성이 아닌 창조주의 이름인가?

이러한 이론에 의하면 피조성은 설명이 되는데, 일반인들도 이런 것은 이해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바르트의 신학의 깊이가 드러나는데, 앞의 설명에 의하면 문제는 그 이름이 사람, 즉 피조성의 이름이 아니고,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피조물이 이름이 아닌 창조주의 이름이라는 말이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르트는 이야기하기를, 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치고 있는 또 하나의 피조성을 등장시키게 되는데, 즉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선택하고, 그 이름을 자기 백성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바르트의 '이중선택설' 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에게 한 모든 것이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그대로 제공이 되는데, 그것도 공짜로 제공이 된다는 말이다. 저는 이것을 '이중폭포' 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폭포가 한번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말이다.

◈ 그러나 바르트의 이중 선택설은 만인 구원론으로 !!

그런데 이런 이중선택론이란 바르트 이론의 문제점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되면 그만 '보편 구원론'으로 흘러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은 피조성이니, 결국 피조성이라는 말은 인간이란 말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기 사랑하는 택한 아들이라고 할 때, 하나님은 분명히 아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르트는 이 아들개념을 모르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신성과 인성으로 구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게 이렇게 신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성이 있으니, 하나님은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님을 대표적으로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선택했으니, 십자가에 버릴 때는 "에라이, 이 놈아. 너희들은 지옥에 가야 돼" 라고 하면서 버려놓고는, 다시 부활을 시킬 때는 예수님을 건지는데, 이 예수님에게 모든 인간성이 다 딸려 들어오고, 그렇게 되니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도바울의 이야기와 다른데, 사도바울은 남은 자와 망하는 자가 있고,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특히 사도요한이 요한복음 17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의 택한 자가 따로 있는데, 그들을 데리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르트의 주장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요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 칼바르트의 오류는?

바로 이런 성경말씀과 어긋난다는 것인데, 그래서 칼바르트의 신학적 오류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계시고 이렇게 인간이 있다면 그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어서(?) 신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실수인데, 순서가 하나님과 인간, 그 다음에 그 중간에 하나의 중보자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이러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에 갈 사람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물론 천국에 갈 사람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피조성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를 위해서 우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인데, 이렇게 해야 사도바울의 주장과 맞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여기에 보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가 도대체 누구인가?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해놓으셨다는 것이다. '아들' 이라고 하니, 재벌 2세쯤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오직 아들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의 오류는 무엇인고 하니,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보니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렇게 보면 안 되고 십자가에서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양쪽을 다 보아야 다시 십자가로 모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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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8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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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