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4: 1- 3 (잉태치 못한자의 노래)
사 54: 1- 3 (잉태치 못한자의 노래)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41)
본문: 이사야 54장 1- 3절
제목: 잉태치 못한 자의 노래
듣기:
, 보기 :
이근호
08-06-25 21:04
잉태치 못한 자의 노래
2008년 6월 25일 본문 말씀: 이사야 54:1-3
(사 54:1)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54: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사 54: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획대로 실시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불가능’이란 모습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됩니다. 즉 우리 인간이 해 낼 수 있다는 식으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로서 덮쳐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잉태치 못한 자가 노래하라는 겁니다. 즉 ‘잉태치 못함’과 ‘노래’가 연결지어집니다. 과연 인간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자식도 못 낳는 여인이 마치 많은 자식이 있는 듯한 여인이 신나게 불러대는 그 노래가락을 같이 부를 기분은 아닌 것입니다.
자식 못 낳는 여인은 풀이 죽은 정도가 아니라 실은 저주받은 자의 흔적입니다.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추장 집안 사이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추장이 아브라함 가족에 대해서 오해한 대가로 그 집안의 모든 여인의 태는 닫혀버립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 챈 추장은 아브라함에게 기도를 요청해서 아브라함이 다시 그들 집안의 태를 열어줍니다.
이처럼 자식을 못 낳는 여인은 하나님께서 저주받을 자로 낙인 찍혔다고 인식됩니다. 이런 여인이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 관여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일이 성도에게 들이닥칠 때, 매사가 이런 식입니까? 왜 불가능을 앞장 세우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사야 53장을 거치면서 분명히 확정된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이란 인간을 저주받을 죄인으로 삼아버리는 조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제물이 될 어떤 인물을 하늘에게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은 자’라는 평가를 받지만 실은, 그 분이 받은 저주와 형벌과 고통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버린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은 성경을 보던지 뭘 하던지 간에 자신을 건드리지 않고 방어하는 자세로 임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열심을 내는 일이 있고 그 일을 자랑하지만 실은 그 일 뒤편에서 강력한 자존심이 버티고 있습니다. 즉 사람의 일이란 배후에 있는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한 시도들입니다.
장사를 하든지, 공직에 근무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뭐든지 ‘나도 자존심 있다’는 점에 외치는 행위들입니다. 그래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들을 마구집어넣고, 심지어 천국가는데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각종 성경 지식들을 쓸어담듯이 집어넣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는데는 기피해버립니다.
자신에 대해서 건드리지 않고 손대지 않고 외부의 것을 마구 끌어당겨서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을 거치게 되면, 인간들이 확실히 죄인임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가버리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홀로 남아서 떠나가 버린 자기 양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분은 우리 대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저주 받으시는 그 십자가에서 자신도 함께 못박힌 자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이 십자가에 실제로 못박힌자가 아니라면 성경과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자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모든 글은 십자가 못 박힌 채로 읽어야 될 내용입니다. 즉 성도가 왜 죄인인가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점을 오직 성도만 압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식이 없고 잉태하는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그런데 노래하고 기뻐하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사야 53장에서 있었던 그 일로 인해 혜택을 입은 것입니다. 잉태치 못하기에 평생 울고 지내야 할 자가 메시아의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많은 여인보다 더 많은 자식을 갖게 되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잉태치 못한 여인 같은 우리에게 귀한 자식을 주시는 겁니까? 갈라디아서 4:26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은 그분께서 친히 자기 자식을 낳으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잉태치 못한 자임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게 들이닥칠 때마다, 우리는 구원에 관해 아무 것도 나 자신에게 가할 수 없는 무능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헌금을 하든, 설교를 하든, 신학공부를 하든 봉사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전혀 하나님의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는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새로운 피조물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세상에 대고 외칠 이야기는, “나의 어머니는 하늘에 계시다”는 소리입니다. 참으로 성도는 외롭고 쓸쓸하고 알아주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행복과 즐거움을 약화시키기 못합니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있어 무능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졌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17-18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아 본 것은 혈육이 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로 인한 혜택을 입었기 때문이랍니다.
창세기 3:16에 보면, 여인이 해산하는데 고통이 주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는 고통이 반드시 주어집니다. 이는 이미 우리 인간이 저주받을 자이다 는 사실을 출산과정 속에서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은 우리 예수님에게도 해당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인간이 받을 저주 속에 참여 하셨습니다.
그런 고통을 보면서 새로운 피조물들은 자신의 가치와 함께 예수님의 홀로 일하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이 봉사하고 섬기면서 결코 이런 자신의 일들이 자신을 구원해 낸 것이 아님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고통만이 우리의 무능력을 들추어낼 수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