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8. 5. 23) 둘째 시간 녹취록
광주 강의(08. 5. 23) 둘째 시간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5. 23) 37-2
중보자 이야기했는데,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니까 한 번 복습해 봅시다.
약속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어떤 인격자, 형체를 가진 어떤 분이란 말이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부름 받았습니다.
뭐가 대단하냐?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그 능력이 바로 우리 중보자가 하시는 일인데, 우리는 그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수혜자라고 하지요.
자, 그러면 어떤 혜택이 있는가?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허리가 되는 혜택을 입어요. ‘너는 몸통이 아니야. 네가 머리 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왜 그것을 못 믿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죽었는데 자기가 멱살 쥐고 구원 못합니다. 아무리 힘을 잘 쓰는 사람도 죽으면 전혀 힘을 못 쓰지요. 자신이 알아서 공동묘지에 가서 눕는 것이 아닙니다. 죽었으면 이제는 불에 태우든지 땅에 묻든지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해 주는 것이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지 말고 우리는 하나의 허리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뚱뚱한 아줌마 보면 허리가 없잖아요. 뚱뚱한 몸체 속에 허리로 들어가 있어서 몸통이 움직이면 허리는 그냥 따라서 움직이는 것. 그 정도 선에서 머물러 있을 때 이게 신앙이 좋은 겁니다. 이것이 정말 높은 신앙의 경지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 예수 믿는다.’고 합니다. ‘내 인생 나는 몰라. 그분이 알아서 하실 거야.’ 이게 믿음 좋은 거예요. 내가 내 구원의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지요. ‘이것 지킬까요, 저것 지킬까요?’ 이게 아니고, 성경대로 알아서 지키게 해 주실 거예요. ‘너는 허리다.’ 라는 것을 알아서 지키게 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허리가 있으면, 허리를 보면 안 되고 몸통을 봐야겠지요. 히브리서 7장에 허리 위 몸통에는 멜기세덱이 있습니다. 이 멜기세덱이 얼마나 어려운지 젖을 먹는 사람은 모른다고 했어요. 멜기세덱이 위에 있고, 멜기세덱이 몸통이고 그 밑에 허리가 있는데, 이 멜기세덱의 반열은 지상에 내려오지 않는 반열이에요.
히브리서 7장 2-3절에 멜기세덱의 특징이 나와 있어요. 의의 왕, 평강의 왕이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이 멜기세덱은 사람들이 그렇게 얻고자 하는 의, 평강, 영생 이 모든 것을 다 쥐고 있고, 이 땅에 내려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 있어요. 이분이 바로 중보자에요. 저는 이것을 혓바닥으로 봅니다. 혓바닥의 뿌리는 하늘에 있고 그 끝은 지상에 내려오고.
뿌리가 멜기세덱에 있어요. 그래서 멜기세덱이 갖고 있는 의가 우리의 의가 되고, 멜기세덱이 갖고 있던 평강의 우리의 평강이 되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죽음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 허리에 속한 우리한테 그냥 그대로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이 멜기세덱의 반열, 이 하늘의 신분이 그대로 유지되는 분이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님이라고 히브리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너와 무슨 관계가 있어?’ 하고 따지면, ‘우리는 예수님의 반열에 허리에 속한다.’ 이러면 정답입니다. 예수님이 혓바닥처럼 축 쳐졌는데 쳐진 이 부분이 바로 허리부분. 여기서 레위지파가 나오지요. 멜기세덱 밑에 아브라함, 아브라함 허리 속에 레위 지파가 있었다.
구약에 12지파가 있는데, 아브라함 아들이 이삭, 이삭의 아들이 야곱, 야곱의 아들이 레위. 그런데 레위 지파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이미 아브라함 속에 뭐가 들어 있다? 레위가 허리에 박혀 있다고 해서 허리란 말이지요.
아브라함은 누구한테 혜택을 받았다? 멜기세덱에게 혜택을 받아서 십일조를 드렸는데 이 십일조는 그 허리 속에 있는 레위 지파가 아브라함이 드릴 때 같이 드린 셈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입장이 바로 중보자의 입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기능을 다 갖고 있으니까 예수님 허리에 우리가 포함 되어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으로써 받으시는 분도 되고, 아브라함처럼 드리시는 분도 되고 이 안에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에요. 그 기능입니다. 우리도 혜택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나 우리는 동일하게 일방적으로 받는 것뿐이에요. 그러나 중보자는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에게 주고 양쪽 다 일을 하는 것이 중보자에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 기능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20절에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중보는 한편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양편 다 위하지요. 그 양편을 위하는 분이 여러분이 아니고 오직 한 분이신데, 그 한 분이 양쪽 일을 하시는 한 분이란 것입니다. 양쪽 다를 살피시는 분이 예수님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다른 석가모니나 이런 사람은 안 되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신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방향이 하나지만, 중보자 되시는 분은 방향이 한쪽이 아니고 양쪽으로 나눠져서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다 하시기에 중보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보자는 여러 명이 되면 안 돼요.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중보자도 한 분이고, 그 중보자는 어느 한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양편 일을 다 해야 될 중보자인데, 그분은 예수님입니다.
성경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소개하고 설명할 때, 이런 아주 어려운 용어들을 많이 사용해요. 왜냐하면 자꾸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거죠. 양쪽 다를 위하는 분이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더 골치 아프게 말하는데, ‘예수님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것은 더 해결이 안 되고 엉뚱한 쪽으로 가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이다.’ 그런 뜻이 아니고, ‘예수님은 양쪽 다를 위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해야지요.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몰라요.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마치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예수님이 다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멜기세덱은 하늘에 계신 분이지만 중보자처럼 일하고, 아브라함도 바치는 쪽의 이야기를 하지만 이미 허리에 레위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예수님과 유사한 점이 있고, 그런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중보자가 해야 될 관계를 다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그야말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죠. 이것은 역사를 초월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에 속하고? 아브라함은 역사에 속하고, 역사를 초월한 멜기세덱과 역사를 초월하지 못한 아브라함이 만나면서 성사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초월하는 분과 역사 안에 있는 분 양쪽 다를 겸비한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지요. 신분은 하나님이면서도 몸은 역사에 속해서 역사 속에 나타나신 그런 분으로, 우리와 동일하게 이 땅에 사셨던 그런 분입니다. 중보자가 되려면 양쪽 다를 겸비해 줘야 중보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더 어려운 것을 해 보겠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쉽고 어렵고를 떠나 중보자를 알려면 이것을 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19절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이 말도 참 어렵습니다. 율법이 무엇인가? 죄를 지어서 추가된 것이다. 이 뜻이거든요.
그 다음에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야, 참 어렵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천사로 말미암아, 누구의 손을 빌어서 줬습니까?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보자가 뭐냐에 대해서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보자는 하나님도 위하고 인간도 위하는 것이 중보자다. 그러면서 중보자는 두 사람이냐? 아니다. 그럼 세 사람이냐? 아니. 오직 한 분이다. 왜 한 분이냐? 그 통로가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오는 길도 오직 한 길만 정해졌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해서 중보자는 하나가 됩니다.
하나이면서도 몇 가지 기능을 한다? 두 가지 기능을 하니까 이게 어렵단 말입니다. 그 두 가지 기능이 뭐냐? 갈라디아서 3장에 보니까 하나는 율법을 베푸심. 두 번째는 약속을 성취. 이 두 가지 일을 하는 겁니다.
천사를 통해서 중보의 힘을 빌어서 율법이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럼 율법을 왜 줬느냐? 율법을 누가 줬지요? 중보자가 줬지요. 그 중보자는 무슨 일 한다? 하나님 일도 하지만 사람을 위한 일도 하지요. 양쪽 일을 합니다.
‘인간을 위한다. = 율법 주었다.’ 이게 연결됩니까, 안 됩니까? ‘나는 오 목사님을 위한다. 몽둥이 들고 설친다.’ 이해됩니까, 안 됩니까? 오 목사님 입장에서 얼른 이해가 안 되지요. 나를 위할 것 같으면 맛있는 과자나 사오든지 과일을 사오든지 내가 좋아하고 흠모할 만한 것을 줘야 할 텐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인간아!
사 람: 예.
하나님: 내가 너에게 좋은 것 줄까?
사 람: 예. 주세요.
하나님: 여기 몽둥이다.
이거 이해됩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짜 예수 말고 가짜 예수를 찾는 이유가 진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를 들고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 믿는 거예요. ‘너 맞아야 돼.’ 이거거든요.
사람들이 절에 다니다가 교회로 왔단 말이지요. 절에서 하던 행세 교회에서 그대로 하거든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저 신령님께 비나이다. 우리아이 고3인데 어찌했든 이번이 꼭 좋은 대학에 붙게 해 주세요.’ 이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기도 아닙니까. 이게 우리가 좋아하는 메시아고 부처고 예수 아니냔 말이지요.
그런데 열심히 빌고 있는데 뒤에서 뭔가로 뒤통수를 때립니다.
‘왜 때려요? 당신 누군데?’
‘나는 네 중보자다.’
‘뭐 이런 중보자가 다 있어!’
‘원래 중보자는 그래.’
중보자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설명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기존의 알고 있는 중보자하고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피해 버립니다. 교회 헌신예배 초청받고 설교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나중에 항의가 들어와요. 주로 항의하는 사람은 당회장 목사, 장로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와요. 그런 설교해서 교회 성장을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교회 성장시키겠다는 그 자체가 몽둥이 맞을 짓인데, 그들은 하나님께 잘 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자기 죄를 몰라요.
지난 시간에 한 것 다시 해 보겠습니다.
죄가 아닌 게 뭐냐 하면, ‘나는 허리에 불과하고 몸통은 주께서 알아서 하신다.’ 이게 죄 아닌 거예요. 그러면 뭐가 죄냐 하면, ‘내 구원, 내 천당 가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한다.’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나는 허리에 속한다는 것을 안 믿고, 내가 내 주인이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독불장군이지요. 자기밖에 몰라요.
신이나 예수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예요. 내가 기도하면 기도하는 대로 응답해 주고 하여튼 자기 똘마니가 되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죄에요. 정말 제가 사람들 보면 답답한 게, 목사들 하는 말이 “복음대로 하는데 교회가 왜 성장을 안 합니까?” 그 사람은 마땅히 교회가 성장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에 교인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교인 없다고 그리스도 몸이 없는 겁니까? ‘마땅히’ 또는 ‘당연히’ 이게 말이 안 돼요. 우 집사님이 수술하시고 몸이 아프고 그런데 그 때 주의할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마땅히 안 아파야 되고 당연히 건강해야 된다는 그 논리가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없잖아요.
‘우리교회 교인이 몇 백 명 있어야 된다.’ 그렇게 되고 싶지요. 되고 싶은 것은 사실인데, ‘마땅히 교인이 있어야 한다.’ 이거는 말이 안 돼요. 이상하게 마땅히 있을 분은 나도 아니고 오 목사님도 아니고 마땅히 있을 분은 중보자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멜기세덱만 있으면 아무 이상 없어요. 왜? 그분이 의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는 필요 없고 의만 있으면 되거든요.
마땅히 있을 분은 멜기세덱이고 우리는 멜기세덱이 나은 작품 아닙니까. 멜기세덱의 긴 그림자거든요. 멜기세덱이 펄럭일 때마다 우리는 같이 펄럭이면 그만입니다. 허리가 된 주제에 지가 몸통인줄 알고 --
사도바울은 굶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했어요. 사도에게서 ‘마땅히’는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주의 일은 반드시 ‘예’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만 마땅하고 나는 전혀 안 마땅하다는 거예요. 내 기대와 소망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겁니다. 심지어 내 목숨까지 나에게 마땅한 게 아니에요. ‘나는 내년까지는 꼭 살아야 돼. 내 자식 결혼할 때까지는 살아야 해.’ 이런 논리는 성경에 없습니다.
이제 장로님이 되셨는데, 최종훈 장로님이 집사님 시절에 경유 값이 싸기 때문에 자기는 경유차를 산다고 아주 탁월한 선택인 양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즘 경유 값이 휘발유 값을 초월했습니다. 탁월한 선택이 어디 있습니까. 탁월한 선택 없어요.
중국에서 아이 하나만 낳으라고 했는데 이번에 지진이 나서 하나뿐인 아들 많이 죽었습니다. 이제 자식도 없어요. 중학교 건물이 무너져 800명이 깔렸는데 그 부모들 대부분 이제 자식이 없습니다. 왜? 나라에서 하나만 낳으라고 해서 따랐는데 그 자식 죽었으니 자식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허리인 주제에, 부속품인 주제에 우리는 ‘마땅히, 당연히’ 그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주여, 그냥 주시는 대로 먹고 살다가 갑니다.’ 이러면 돼요. 참새를 누가 키웁니까? 참새는 우울증이 없어요. 참새는 그냥 기르시는 것뿐이고, 들풀이 자기 장래 걱정하는 것 봤습니까? 내일 꺾여서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오늘은 아무 걱정 안하고 그냥 삽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나라 의를 바라보면서 들풀처럼 참새처럼 살아야 돼요.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닙니다. 주의 것입니다. 내 것으로 시작해서 주님의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자, 이제 조금 더 나가봅시다. 점점 어려워지는데, 우리한테 허락도 안 받고, 우리와 의논도 안하고 중보자 되시는 분이 몽둥이를 들고 왔어요. 뭐냐 하면, ‘넌 이렇게 나쁜 놈이니까 죽어야 돼.’ 하고 율법을 누가 가져 왔습니까?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다 너희를 위한 것이다.’ 율법을 준 것은 너희를 위한 조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0절에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몽둥이로 때리는 것, 이것이 저주거든요. 법대로 못 살면 저주 받습니다. 우리는 법대로 못 사니까 저주 받아야 되지요. 자, ‘저주를 내리시는 법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약속을 위배하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모순되는 것이라는 거지요. 정답이 뭡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모순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얻어맞으면 맞을수록 그것은 곧 구원 되는 사람이란 말이지요. 모순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우리는 몸통 중에 허리에 속한데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을 몸통으로 봐서 ‘이 몸통 천국 넣어 주세요.’ 만날 이렇게 나와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말씀 주시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십계명도 다 지키겠습니다. 십계명 안 지키는 사람은 지옥 보내고, 지킨 나는 천당 보내고 그렇게 합시다.” 자꾸 자기 자신을 자기가 책임 질 수 있는 몸통 전체로 보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중보자를 보면서 ‘저 사람이 미쳤나? 왜 저러지. 자기가 왜 설쳐.’ 이렇게 나와요. “주여, 어떻게 하면 천당 갑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이러고 있어요. 그래서 중보자가 그 사람을 인간 만들기 위해서 몽둥이로 때리는 거예요.
중보자가 알아서 한다는 것을 그렇게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그 소리가 귀에 안 들어오고, 중보자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해요. 이번에 [피]라는 제목의 책을 써는데 이 대목이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이런 구절이 나와요. “내가 나한테 충성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충성한단 말인가?” 그렇게 해놓고 뒤에,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소리가 귀에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안 들어오지요. 왜? ‘나는 나한테 충성하기 바쁜데 뭘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미쳤나?’
그러니까 사람은 성경을 100번 1000번을 봐도 자기밖에 몰라요. 나에게 충성하고 나에게 봉사하고 어떤 일을 해도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이지 내 곁에 있는 남 좋으라고 하는 짓이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도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습니다. 밖에서 문제 일으키는 남편을 어느 아내가 좋아하겠어요? 잔소리 하다 하다 그래도 안 되면 갈라서고 하는 거지요.
다 내 뜻대로 될 때만, 그런 조건 하에 사랑하는 것이지, 무조건 날 버리고 남을 좋아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도를 닦아도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내가 도를 닦아서 옆 사람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 닦는 나 구원 받으려고 도 닦는 거예요.
그런 자들에게 몽둥이 들고 뒤통수를 때리는 분이 누굽니까? 중보자입니다.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영생밖에 모르는 사람을 몰라보고 곧 죽어 흙이 될 놈이 뭘 안다고 까불어!’ 하고 때리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을 가지고 때리는 이것이 결국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중보자가 크게 보여야 할 텐데 자꾸 내가 크게 보입니다. 나 자신이 너무 크게 보이는 거예요. 중보자는 사라지고 누가 보입니까? 내가 나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어요. “아, 그때 행동 잘했으면 돈 더 많이 벌었을 건데.” 만날 생각하는 것이, 국가 발전도 선진 조국도 아닙니다. 자기 성공뿐입니다. 지금 유류 값 올라가는데 국가 경제 걱정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기름 값 올라가면 ‘내 주식 값이 어떻게 될까?’ 그 생각하지.
사람이 자기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경우에 확실한가 하면, 가난해 지면 자기 생각에 더욱 더 집착합니다. 가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치사함, 조잡함, 속됨, 그리고 굽실거림. 이것이 가난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돈이 있으면 여유만만, 품위, 고상함. 이런 몫이 다 부자한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고상함, 여유만만, 품위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은 아직 돈이 있다는 뜻입니다. 돈이 인격을 결정합니다. 아무리 인격을 지키려 해도 사람이 가난해지면 치사하게 됩니다. 인간성이 더러워서 치사해지는 것이 아니고, 돈이 궁하면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잠언을 할 텐데 잠언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네가 가난할 정도로 겸손할 수 있느냐?’ ‘네가 가난마저도 기뻐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할 수 있느냐?’ 왜냐하면, 지혜자는 이 땅에 가난하게 왔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가난하게 오셨어요. 머리 둘 곳도 없었잖아요.
가난하면서도 안 치사할 수 있느냔 말이지요. 세상에 이런 인간은 없어요. 이유가 뭐냐? 사람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나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 전체를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 내가 우주의 전부인줄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가난해 지면 하나님의 의와 사랑 이런 것은 2차적인 문제에요. 이것은 시급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유만만하고 품위 있으려면 내가 돈을 벌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그게 이 세상에서 승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의 명분은 게임입니다. 남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인생의 목적이 뭐냐고. 그들의 대답을 축약하면 ‘세상이라는 이 밀림에서 내가 패자가 아닌 승자가 된다면 내가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을 이겼다는 즐거움,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여기에서 나와요. 게임에서 최후의 1인자가 되기 위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왜 사람은 중보자가 가까이 있어도 중보자를 안 믿는가? 내가 내 사랑이라는 경계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내 예쁘다. 내 남편 훌륭하다.’ 이것이 뭐냐 하면,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하나의 용어들입니다. ‘너 아파트 몇 평이니?’ 이게 전부다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거예요. 최후의 승자가 된 사람을 우리는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대통령은 우리를 몽땅 승리자로 만들라고 대통령을 세운 거예요. 그런데 대통령 되고 난 뒤에 나를 패자로 만든다면 그 대통령을 용서하지 않겠지요.
화물연대가 장사가 안 된다면 파업을 하면서 대통령에게 대들겠지요. 왜? 당신은 우리를 승자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강남에서 정몽준이 큰 표 차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유가 뭡니까? 강남 전체를 뉴 타운으로 만든다고 했지요.
전 국민이 오직 승자가 되기 위한 일념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몽둥이 들고 뒤통수를 때립니다. 왜? 승자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는 틀에서 못 벗어나고 그 틀을 확장시킵니다. 여기에 멜기세덱이 갖고 있던 그 영원한 의와 진리와 영생이 이런 못난 인간에게 드디어 쳐들어오지요. 그래서 “너는 나의 몸통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허리다. 염려하지 마라. 나는 네가 너밖에 모르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까 너를 극히 사랑해서 내 몽둥이 들고 갈게.”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몽둥이입니다.
율법의 대표적인 것이 뭡니까? 십계명 아닙니까. 그리고 이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이거 엄청난 전류가 흐르는 전기 몽둥이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 그런 설교 했어요. 세상 사람들의 가훈에 보면 ‘멀쩡하게 살자!’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세상이 미친 세상이기에 그런 교훈이 먹혀들까요. 술 처먹고 와서 행패부리고, 그 때 진짜 실감나는 가훈이 뭐겠어요? “여보, 올해만큼은 제발 멀쩡하게 삽시다.” 매일 컴퓨터 게임에 미쳐서 밤에 잠도 안자고 하는 아이에게 “애야, 제발 좀 멀쩡하게 살아라.” 이 ‘멀쩡하게 살자’는 말이 굉장히 부러워하고 흠모할 만한 가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뭡니까? 멀쩡하게 살면 됩니까. ‘마음을 낮춰라.’ ‘멀쩡하게 살자’는 말은 상당히 좋잖아요. 그런데 ‘마음을 낮춰라’는 것은 승자 되지 말고 패자가 되어도 승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배웁니까? 남이 볼 때 패자인데, 흠모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보시기에 승자가 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승자가 되면 안 되고 나를 포함시킨 어떤 분이 최후의 승자가 되면 나는 그분께 포함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등달아 승리자가 되지요. 이 일을 바로 중보자가 한단 말입니다.
중보자를 설명할 때 제일 좋은 예화가 뭔가 하면, 무쇠 솥뚜껑으로 작은 접시를 덮는 겁니다. 큰 솥뚜껑으로 접시를 덮을 때 접시에 담긴 참외, 토마토가 보이겠습니까, 안 보이겠습니까? 안보이죠. 이것을 성경에서는 사랑으로 덮은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다른 말로 하면 무쇠 솥뚜껑으로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오기 전에 뭐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왜 멸망 받아야 하며, 우리는 왜 우리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왜 우리 힘으로 구원 받지 못하는가?’ 이것을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충분히 알려주는 기능을 뭐가 합니까? 율법이 하고, 그 율법을 사랑하시는 중보자께서 주신 거예요. 율법을 주신 후에 약속을 주심으로 이 두 가지 일을 다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도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성취될 수 있도록 하시는 그분이 바로 중보자 예수님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뭐냐 하면, 그러면 ‘너는 죄인이야. 내가 용서해 줄게.’ 이러면 십자가가 필요 없잖아요. 말만 하면 되잖아요. “오용익 목사님 이리오세요. 죄인 맞지요? 용서해 줄게요.” 이렇게 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오 목사님 모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목사님 이리 오세요. 당신은 죄인입니다.” “미쳤나, 내가 죄인이게.” 사람은 자기에게 죄인이라는 소리를 제일 싫어합니다. 천하의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도 나에게 죄인이라고 하면 자기 가치가 설 곳이 없잖아요. 그러면 결국 내가 죄를 더 짓기 위해서 사는 것밖에 안 되는데 이 모독, 이 모멸감을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화평교회 오신 분들 중에도 이런 것에 시달린 분이 계실 거예요. “내가 왜 죄인인가?” 하고. 성실하게 살았고, 착하게 살았는데.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자녀를 키운다고 그렇게 애쓰고 새벽밥 지으면서 대학 보내고, 시어머니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존경했는데, 마지막 돌아가실 때쯤 되어서 복음을 전하니까 화를 벌꺽 냅니다. “내가 왜 죄인인데?” 하고.
결국은 그 좋던 관계가 복음 때문에 원수지간이 돼 버려요. 그런데 ‘어머니는 왜 이런 귀한 복음을 싫어할까?’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 어머니 못지않게 우리도 당연히 예수를 싫어해야만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너는 죄인이고, 소경이며 내 피가 아니면 용서 받을 길이 없다.”는 그 말씀이 싫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게 고마워진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속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 점이 어려워요.
자기는 성질이 좋고 인품이 좋아서 자기를 향해서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해도 그냥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만 안 그렇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생각해 보세요.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성격이 더 나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착한 일 더 많이 해요.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동냥도 많이 하고 이웃을 돕는 일도 많이 해요. 심지어 불교 신자이면서 재산을 천주교 고아 돌보는 일에 헌납한 사람이 우리 친척가운데도 있어요.
심지어 안 믿는 사람 가운데도 헌혈하고 심장 때주고 그런 사람 많아요. 자기 절제하고 자기 관리 하고. 다 좋은데 “당신은 죄인이며 예수님 십자가 피 아니면 용서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소리만 하면 독이 올라요. 갑자기 좋은 관계가 원수지간이 돼요.
“뭐 예수 피로 용서 받는다고. 그러면 부처는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만 중보자가. 너희 예수쟁이들은 너무 독선적이다. 산을 오르는 길은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닌데 꼭 예수만 고집 하냐?”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논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나는 내 사랑에서 나를 포기 못하겠고, 나는 허리 되기 싫고 내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몸통이고 싶다.’ 그 이야기입니다.
“손대지 마. 나는 끝까지 나 사랑할거야. 내가 날 안 지키면 누가 지켜. 내 자존심은 내가 지킨단 말이야.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저리 가. 내 인생 내가 지킨다.” 이렇게 되니까 “그러면 당신 죽으면 어디 가는데?” “그건 난 몰라.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는 허리에 속합니다. 내가 몸통이 아닙니다. 사랑해서 율법을 줬어요. 그리고 우리가 지은 죄의 저주는 이미 다 처리반이 있어서 다 가져가시는 분이 있어요. 누가 가져갑니까?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셔요. 죄 지으면 가지가고, 또 죄 지으면 가지가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의인 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는데, 사람들은 이상해요. 예수님의 피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 내 손가락에 피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현실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피를 흘린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네 손가락에 피 흘린 것 이상으로 내 피도 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 흘리셨습니다. “용서해 줄게.” “예 고맙습니다.” 이게 아니고, “피를 봐라.” 이 말은, “너도 한번 피 흘려 봐라. 아프지?” “예 아픕니다.” “나는 너보다 더 많이 아팠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 내 목숨보다도 주의 목숨이 더 귀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피로써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피를 누가 흘렸습니까? 누가 찔러 피 흘린 겁니까? 내 고집 때문에, 내가 내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에게 피 흘리게 했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보고 내가 바로 죄인이고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피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찔렀습니다. 나는 나만 챙기고 사수한다고 내 근처에 오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날 사랑하는 것밖에 모르고 주님 사랑하는 것은 모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피란 말입니다. 피를 가지고 다가올 때는 “너 같은 고집쟁이를 위해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교체를 하자는 거예요. “내가 주인 될게. 넌 내 똘만이 돼라. 지금까지는 네가 주인공이지만 이제 내가 주인공 될게. 너 장래 너 미래 내가 보장해 줄게.”
그래서 우리는 이제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피로 값 주고 샀으니 이제 너희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니라.’ (고전 6:19-20) 이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중보자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는 허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몸통 따라가면 허리도 따라갑니다. 그리고 내가 뭘 했다, 내가 잘못을 했다. 실수를 했구나, 이런데 너무 연연해하지 마시고, ‘보고 싶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니까, 나를 사랑하는 분이 계시니까 그분이 보고 싶다. 어서 오시옵소서. 사랑이 모든 법을 이겨요.
“갈라디아서 이것 지켰나? 로마서 이 말씀 지켰나?” 이렇게 자꾸 따지면, “주여 저 못난 것 아시지요? 그러나 주님 보고 싶습니다. 기다려집니다.” 이렇게 사랑하면 돼요. 내 힘으로 안 되는 그 천국을 중보자가 다 이루셨어요. 그래서 그분이 보고 싶어요.
이것을 디모데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모든 사람이 이 진리를 알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모든’은 인간의 신분이나 직업이나 남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은 한 분이고 이런 일을 하실 분은 네가 아니고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는 중보자가 따로 이 땅에 오셨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십자가 피를 보고 이미 현실로 이루어진 일이구나 하는 것을 느긋하게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한테 안 지려고, 그저 이기는 것을 생의 유일한 쾌감으로 여기며 내 사랑에 몰두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내 사랑에 가려진 것이 주님의 사랑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주님을 사랑하는데 내가 가리지 않도록 내가 방해꾼이 되지 않도록 주여 철저하게 저희들을 관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 6. 16. 10:08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