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장 22-28절 제목 :있는 자와 없는 자
막 4:22-28 (있는자와 없는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41)
본문 : 마가복음 4장 22-28절
제목 : 있는 자와 없는 자
듣기 :
, 보기 :
이근호
08-06-15 13:32
있는 자와 없는 자
2008년 6월 15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4:21-29
(막 4: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막 4: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막 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막 4: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막 4: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막 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막 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막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초대교회는 참으로 소박했습니다. 예수님으로만 행복하다고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행하고 계신 솜씨에 탐복하고 고마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결코 자신들의 애씀과 솜씨와 결과를 자랑하기 위해 모여든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창조주의 솜씨와 능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코 소위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의 솜씨나 능력을 나타내라고 당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창조주되시는 분의 능력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인간’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제멋대로 자신을 지칭해서 ‘인간’이라고 우기는데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없고 오직 ‘영의 인간’과 '육의 인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는 허구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실제로 있는 것은 ‘영의 인간’이냐 아니면 ‘육의 인간’ 이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러한 분류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 위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다 이루었다”라는 그 순간에서부터 소급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시점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때입니다. 곧 요나의 기적입니다. 죽음 속으로 들어가셔서 죽음의 내막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어 다시 우리에게 부활로서 알려주신 그 기적 말입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정작 심판 때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홀로 아신 상태에서 외친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한 거룩과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이 거룩과 의는 인간들의 자기 위주의 생활로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즉 거룩은 돈을 주거나 열심히 행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 인간으로 태어난 것으로서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들이 뭘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등불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등불의, 기능을 높이 들어서 널리 비추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들어준다고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등불 스스로 그렇게 처신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뿐만아니라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라고 하십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아무리 숨겨진 일이요 감추어진 일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국 온 찬하에 드러나고 만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과 세상의 밑바닥을 말합니다. 밑바닥이 내부로부터 올라오게 되면 세상을 움직이는 장치가 됩니다.
이 장치는 마치 세차장에 설치는 자동 세차기계와 같습니다. 차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그 털북숭한 기계가 허연 거품을 물고서 앞뒤좌우로 왔다갔다 하면서 차의 모든 면을 씻어줍니다. 그런데 차 안에 탄 사람이 느끼는 것은 마치 기계가 가만히 있는 차가 앞 뒤에 움직여서 차의 먼지를 씻겨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이 평생 살면서 자신이 자기를 움직여야 자신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았다고 여기는 그것은 ‘목숨도 아니요 생명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성은 외부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알지 못하고 자꾸만 신기하고 놀라운 것을 찾아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린아이들에게 심판의 개념이 없습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나를 심판해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말입니다”하고 나옵니다.
사고방식이 자기가 중심이 되어 수평적으로 뻗어나가려고 합니다. 수직적인 심판성이 늘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저희들을 죽여주옵소서. 그래서 비로소 우리의 해골 위에 예수님께서 엄연히 살아계심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살아있으면 참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의 세차 기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자신이 움직여야 무슨 일이라고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말하기를 “작은 복은 부지런해야 하고 큰 복은 하늘이 내려다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에 대해서 들을 귀 있던 없든 다 잘 알아듣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위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심판을 모릅니다. 심판이란 자신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심판 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양과 염소입니다. 양이란 자신이 모시는 왕이 따로 있는 자요 염소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최종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행복해요’는 지옥 갈 염소인 반면에, ‘나는 예수님으로 행복해요’는 천국갈 양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인간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시키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사명이 우리 내부에 침투하게 되면 우리는 초대 교회 사람들처럼 “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행복해요”라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있는 자는 더 있겠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아버린다’는 말씀은 소유개념으로 자기에게 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예수님보시기에 ‘전혀 없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그 ‘있다는 것’도 실은 ‘없는 것’에 해당됩니다.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 ‘있는 것’이 제대로 ‘있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각자 자기 사업이 있고 자기 가진 것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의 것으로만 있는 것’으로서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것에만 더 주시고 키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서 나의 자랑거리가 없어지게 하시고 예수님만이 자랑임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