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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 6월 13일 강의 엡 2장 20절, 21절강의에베소서

서울 6월 13일 강의 엡 2장 20절, 21절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613 엡 2장 20절, 21절

우리교회(IP:124.♡.85.92)

08-06-14 20:03

우리교회(IP:220.♡.176.141)

08-07-02 14:47

서울080613a엡2장20절

에베소서 제 13강 (이 근호목사, 2008년 6월 13일-a, 서울의존교회)

2008-06-27 14:56:36 녹취 : 오용익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사람을 보고 하는 소리가 ‘영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이 되지 못한 사람을 일컬어서 ‘육’이라고 했습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고 다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되는데 사람이 있다고 해놓고는 사람을 나눕니다. 영적인 사람 따로 있고 육적인 사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람은 천국을 가고 육적인 사람은 지옥을 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 제가 떡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그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입이 헤 벌어지시면서 “아이고, 수고했다”하면서 이런식으로 주고 받고 주고 받고가 되어야 하는데 사도바울은 그것이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고 착하게 살려고 애를 써도 육으로 난 것은 그냥 육이고 ‘지옥으로 가시기 바랍니다’하는 식으로 육의 사람은 그냥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교인들을 볼 때에 “여러분들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순종 하세요”, 이러고 맘니다.

“당신은 육적인 인간입니까? 혹은 당신은 영적인 인간입니까?” 라는 것을 묻지를 않고,
“여러분은 사람입니까?”
“예, 우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시거든요.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되었습니까?”
“되었습니다.”

이렇게 끝나버립니다. 이것이 불교경전에도 나오고 유교경전에도 나옵니다. ‘사람이 공덕을 쌓으면 복을 받고 나쁜짓을 하면 화를 입는다’는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것은 처음부터 육이니 영이니 하는 것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남에게 착한일, 공덕을 쌓으면 그것이 나에게 마일리지처럼 점수가 쌓여서 복이 오고, 같은 인간으로서 출발해도 내가 나쁜 일을 하게 되면 게 화가 되어서 나중에 염라대왕 계시는 지옥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나’는 중립입니다. 내가 착하게 될지 나쁘게 될지는 나 하기 나름입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판단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느냐 거기에 따라서 내 장래가 나 하기 나름으로 결정된다.’ 이게 바로 유교나 불교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게 육적인 사람에게서 나온 지옥가려고 환장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여기 모인 학생 여러분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서 배울 때 어떻게 배웁니까? “여러분들은 착한 일을 해야 복을 받습니다.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습니다.” 이렇게 가르치지요? “나쁜 일을 많이 하세요. 그래도 구원받습니다”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은 안계시지요?

그래서 그것을 배우는 학생들이 혹시라도 자기뜻대로 안되면 ‘아이고, 내가 나쁜 짓을 했구나’라고 여기고 혹시 자기 맘대로 잘되면 ‘아, 역시 나는 하나님께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듬뿍 받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고쳐져야 합니다. 그 생각을 안 고치면 지옥 갑니다. 그걸 뜯어고치든지 어쨌거나 그 생각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 바뀌어지는 것이 육의 인간에서 영의 인간으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그것이 나에게 쌓여서 복이 되고 나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그것이 나에게 쌓여서 저주가 된다’는 생각이 바뀌어지는 겁니다. 육의 인간 앞에는 ‘오직 나 뿐이다’가 있습니다. 다시 합니다.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게 그 나쁜 일이 쌓여서 나에게 저주가 온다’고 그렇게 생각할 때 복이 오고 저주가 오는 것은 누구 하기 나름이냐 하면, 나 하기 나름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오직 ‘나’(only) 만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나만 있어요. 내가 잘하기 나름에서 내가 복을 받는 거예요.

육, 여기는 오직 자기만 있고 영의 하나님은 저쪽에 계십니다. 그런데 영적인 사람은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분이 함께 계시는데 그 어떤 분이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어떤 일을 치렀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영적인 사람이란 나보다 앞서신 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 십자가 때문에 나에게는 저주가 오고 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모든 좋은 것이 그냥 공짜로 다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와 상관없이 내 앞선 분이 십자가를 졌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나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고 그것을 믿고 인정하는 사람, 그게 영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영적인 사람을 이보다 더 쉽게 설명 못하겠습니다.

영적이라고 해서 기도해서 뿅 간다든지, 기도하다가 불받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저주밖에 받을 것이 없는데 이제는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내 앞에 계신 어떤 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좋게 보고 예쁘게 보고 아주 지독한 사랑을 퍼붓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광적인 사랑입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퍼붓는 사랑을 사도바울은 ‘이것이 어찌 기쁜 소식(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게 바로 복음이며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 받는다’고 합니다.

내가 뭘 하고 내가 뭘 조심해서 영생 얻고 복 받는 것이 아니고 나와 상관없이 내 앞서 계신 그분이 먼저 나한테 묻지도 않고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보시고 우리에게 생각지도 않은 놀라운 영생과 모든 축복과 행운을 우리에게 다 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고 합니다.

방금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목사님, 듣기는 괜찮은데 그 이야기가 우리 듣기 좋으라고 목사님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까?”라고 의심하는 분도 계신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이 즉흥적으로 ‘십자가 하번 져 볼까?’라고 해서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고 그 전에 미리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을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약’이라는 아주 어려운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언약이라는 말 대신에 쉬운 말로 고쳐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왕과 모세와 한바탕 붙었습니다. 모세와 바로와 한바탕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냥 구경만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겼습니다. 바로왕이 모세를 괴롭힐 때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바로의 큰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잘되었다. 고소하다. 어딜 감히 하나님의 종인 모세에게 대드는가? 죽어도 마땅하고 죽어도 싸다’할 것 같은데 단순하게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바로왕의 맡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고 바로왕의 왕궁 안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맏아들까지 갑자기 다 죽고 말았습니다. 바로왕의 신하들의 맏아들도 다 죽었습니다. 이 중에는 모세와 싸우기는커녕 구경도 못해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싸우기는 바로와 모세와 싸웠는데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기를 바로에게만 내리신 것이 아니고 바로에게 속해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은 모든 자들의 맏아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모세와 바로의 싸움이 개인적인 감정의 1:1 싸움이 아니라 바로의 편을 들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 곧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 자의 아들들은 다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거부하시고 ‘네가 영의 사람이냐 육의 사람이냐’ 그것만 물으시는 겁니다.

육의 사람이란 ‘내가 행동하는 여하에 따라서 내 운명이 결정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육의 사람이고 영의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는 것과 관계없이 내 앞서 계신 분이 나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십자가 지신 분이 우리 앞에 서성거립니다. 그래서 앞에서 누가 뭐래도 예수님아 다 커버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 뒤에 숨어서 “저는 할 줄 몰라요. 예수님이 다 하셨어요”라고 하면서 숨어 있습니다.

대신 우리 앞에 거대한 예수님께서 서 계셔서 “마귀야, 이리와 봐. 누가 이 사람보고 시비를 걸어. 내가 십자가에서 피흘려서 다 처리해서 처리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데 무엇을 따져. 얘에게 줄 저주가 없다. 얘에게 돌아올 화가 없어! 왜? 내가 앞장서서 다 처리 했으니까.”

이게 바로 원수된 것을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화목되게 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즉흥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구약 때문에 그런 낌새가 있었습니다. 그 낌새란 모세와 바로와의 싸움에서 모세를 미워하고나 싸움하지도 않은 바로 왕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맏아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모세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거룩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완벽하게 거룩하기에 근처만 가도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천국에서 살려면 완벽한 거룩이 될 때만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안죽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모세와 바로왕의 싸움을 남의 이야기로 그냥 종교 간의 싸움 이야기로 들었습니다. ‘저 사람들 종교싸움 하네. 나는 종교 없다. 나는 나 혼자 편하게 살고 만다. 모세와 바로가 무지하게 싸우는데 나는 둘 다 싫고 나는 내가 최고야’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이 싸움의 결과에 말려들어서 갑자기 자기 집에 있는 맏이들이 다 죽었습니다.

심지어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맏이까지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어떤 한 사람을 갈구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거룩하지 못하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육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완벽한 거룩,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거룩입니다.

어릴적부터 조금의 흠이나 티도 없어야 되는 완전한 거룩입니다. 초등생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오른손으로 구제를 하고 왼손으로 도둑질을 했다는 나는 착한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일까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어쨌든 착한 일을 했으니까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왜 같은 몸이면서 나쁜 짓을 하느냐’고 보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 많은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 많은 율법의 99%를 지키고 1%를 지키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볼까요, 좋은 사람으로 볼까요?

나쁜 사람으로 보면서 ‘왜 너는 같은 몸 가지고 나쁜 짓을 하느냐’ 라고 봅니다. 하나님앞에서는 100% 완벽한 거룩이 아니면 다 죽습니다. 그게 바로 육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는 겁니까? “목사님 말대로라면 히브리인들은 흠도 티도 없어서 살았다는 말입니까?”라고 할수 있는데 그 말이 맞아요.

히브리 사람들도 흠도 티도 애굽처럼 똑같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많은데 히브리사람들이 되레 묻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들과 내가 다를 바 없이 똑같이 나쁜 놈인데 어떻게 저를 살려 주십니까?” 도리어 묻습니다. 바로왕에 속한 사람들이 와서 “너희들은 뭐가 잘나서 우리아들만 죽고 너희 아들들은 다 살았는가? 너희가 우리보다 잘난게 뭐가 있어?”

그러면 모세에게 속한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글세, 나도 몰라. 나도 이상해. 나나 너나 똑같이 나쁜 놈 맞는데 그런데 우리는 살았어.” 생명의 고귀함이 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저쪽을 다 죽여야 되는 겁니다. 예수 믿든 안 믿든 어설프기는 다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도리어 사는 쪽은 반문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이여! 왜 저를 살려 주십니까?’ 그래서 제가 쓴 글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물을수 있는 질문은 하나밖에 없다. ‘주여, 저 같은 인간을 왜 살려주십니까?’ 그 질문외에 다른 질문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입 다물라!” 임금이 신하들이나 중전에게 이 소리를 하잖아요. “입을 다물라!”

‘하나님, 죄지은 것밖에 없는 나를 왜 살려 주십니까’라는 그 물음외에 다른 물음은 해서는 안 됩니다. ‘왜 우리 애는 성적이 떨어집니까? 왜 우리 집은 이렇게 못삽니까? 왜 우리 집에 불이 났습니까?’ 이런 것은 물으면 안 됩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천당 못가고 지옥가야 됩니까?’ 그런 것은 물으면 안 됩니다.

‘주여, 저도 지옥에 가야 되는데 왜 저를 살려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았다. 예수님께서 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너보다 앞서서 다 작정하시고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 처리로 인하여 우리는 그때부터 육의 사람이 아니고 앞에 있는 십자가를 인정한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영적인간, 혹은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다른 교회 가서 ‘바쳐야 복 받는데 안 바쳐서 복 못 받고 섬겨야 저주를 안 받는데 저주받는 이유는 잘 안 섬겨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하, 불교신자가 저기 또 있다’고 보면 됩니다.

명심보감 처음에 나옵니다. ‘사람이 공덕을 쌓으면 복을 받고 화를 쌓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나옵니다. 그런 소리를 하면 그게 바로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바로에 속한 사람들, 모세 때문에 갑자기 죽은 그 사람들 가운데서 착한 사람 참 많습니다. 성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부간에 유별하고 친구 간에 친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인격적으로 흠없고 티없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더욱 더 양심적으로 ‘믿을 것은 내 양심밖에 없다. 믿을 것은 내 착함뿐이다’라고 하면서 더욱더 열심히 자기 마음의 거울을 닦아서 명정의 상태,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성화하고 또 성화해서 지극한 성화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자기 아들이 죽었습니다.

실컷 성화했는데 자기 맏아들이 죽어버린 거예요. 이유는 단 한 가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답이 간단합니다. 인간 쪽에서 “주여, 제가 착실합니다. 게으름피우지 않았습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하나님께서 묻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너, 어린양의 피가 있나?”

‘어린양의 피가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것을 네 글자로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두 글자로는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가 있을찌어다.” 사도바울이 바보가 아닙니다. 얼마나 인간들 속에 태어날 때부터 ‘내가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이것이 가슴속에 꽉 들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바울도 그런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사람이 완전히 180도 달라져서 ‘그것이 아니고 그것은 마귀의 소리였다’고 합니다. ‘그게 아니고 지금부터 내말을 들어라. 십자가다. 딩동댕!’ 하고 끝내 버렸습니다. 자기 앞에 십자가가 있는 사람은 영의 사람이고 자기 앞에 자기의 성실함이 있는 사람은 육의 사람입니다.

인간은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제 삼의 인간은 없습니다. 육 아니면 영, 영 아니면 육입니다. 관직이 높다든지 왕의 후손이라니 효자라느니 그런 것도 다 필요 없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육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자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도 자기 인생길에 그리스도의 피가 없으면 그것은 육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사도바울은 복음을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간단한데 왜 이렇게 에베소서는 어려운가?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은 간단한데 복음을 가리려고 가당치도 않는 잔가지를 잔뜩 붙여놓아서 그 잔가지를 잘라내려고 하니까 이야기가 복잡해 진 겁니다.

에베소서 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영과 육을 이렇게 나누었으니 잘 이해하실수 있을 겁니다. 육으로 생각하는 성전 따로 있고 영으로 짓는 성전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2:19-22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육으로 짓는 성전 따로 있고 영으로 짓는 성전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육으로 짓는 성전은 누가 지을까요? 아까 육은 나밖에 없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육으로 짓는 성전은 내가 짓겠지요. 그것이 육이 성전입니다. 내가 헌금내서 그 돈으로 예배당 짓는 것, 이것이 육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영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앞에 계신 십자가지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적 사람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영에 속한 성전은 누가 지을까요? 사람이 지을까요, 하나님이 지을까요? 하나님이 짓습니다. 이게 답이 어렵지 않은데 실제로 부흥사가 와서 학개서를 들이대면서 ‘하나님의 집은 이렇게 초라하게 놔두고 너희 집만 호사스럽게 꾸미고 사느냐’고 호통치면서 작정헌금 할 사람 손들라고 하면 그대로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손들고 구두로 약속하는 것은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얼마 내겠습니까?”
“75억!”

이런 것은 말만 하고 내지 않아도 누가 말을 못합니다. 이랬다고 저주 받나 안 받나 시험해 봐도 무방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육으로 짓는 성전, 그것은 내가 짓는 성전이기에 거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안계시면 텅텅 비어있겠다 싶은데 그게 아니라 마귀가 들어갑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불순종의 영, 마귀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기에 하나님이 들어오지 않으면 마귀에게 꼭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육의 성전을 짓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마귀가 처음 만났을 때 마귀가 예수님보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이 성전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나, 맞다고 하면 팬들이 몰려올 것이다’라는 겁니다.

내일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 가수 조용필의 40주년 콘서트가 열립니다. ‘기도하는…’ 할 때 사람들 와, 하고 넘어갈 겁니다. 왜 에베소서가 어려워지는 걸까요? 사람들이 성전, 하면 떠올리는 것이 아, 옛날 그 솔로몬의 성전을 연상하기 때문에 그것을 잘라낼 필요가 있기에 이야기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그것을 잘라내야 되는 겁니다. 잘 지어놓으면 시설이 좋잖아요. 잘 지어 놓으면 시설도 좋고 좋은데 문제는 거기에 하나님이 안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안 들어오면 비워놓지’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오면 거기에 마귀가 들어옵니다. 안산강의에서 중요한 대목을 했기에 그것을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예수의 고난이 너희에게 넘치면 너희에게 예수의 위로가 넘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를 공부하게 되면 ‘예수의 고난이 넘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을 접하는 순간, ‘아, 내가 지금 예수의 고난을 받나, 안 받나? 돈이 주는 위로와 예수님이 주는 위로가 어느 것이 더 위로가 될까?’ 자꾸 걱정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이란 고린도후서의 말씀이 나에게 필요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 주는 고난이 예수의 고난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안보면 안보는 채로 그냥 남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핍박하는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가슴에 와 닿는 실례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일 아침에 설교 전에 너무나 우스워서 참지 못하고 웃었습니다. 찬송가를 하면서 웃으면 안되는데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찬송 부르기 전에 재정보고를 하는데 150만원이 적자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고 뒤에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가 “참 즐거운 노래를 늘 높이 부르세…”가 나온 겁니다. 그러니 그 상황이 얼마나 웃깁니까? 상황을 약간 바꿔보겠습니다. ‘이번 주에 흑자 2000만원입니다’ 하고 나서 ‘참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 누가 안 즐겁겠습니까? 그런데 적자의 재정보고를 듣고서는 안 즐거운 겁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영의 성전을 생각하지 않고 육의 성전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육의 성전이 적자 난 것 하고 영의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없는데 상관을 지어놓으니까 이게 짜증이 나는 겁니다. 제가 그래서 신신당부를 한 겁니다.

‘영의 사람은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영의 사람이고 육의 사람은 자기 행동만 자꾸 기억나는 것이 육의 사람이다’라고 분명히 제가 언급을 했는데 실제 응용문제 들어가 보니까 ‘참 즐거운 노래’가 안 되고 얼굴 찡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게 되더라는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흑자재정이 되어야 ‘참 즐거운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 영, 영, 복음, 복음, 복음 그렇게 이야기를 했건만 또다시 돌아오는 것은 결국 내 행동에 의해서 복도 받고 저주도 받는다는 명심보감적인 사고방식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니 마귀같은 목사들과 부흥사들이 그것을 노리고 들어갑니다.

그것이 왜 먹혀 들어가는가 하면 우리 자신들이 영적인 사람들 이라는 것을 잘 무장을 하지 않으니까 우리 자신들이 ‘지난번에 몸이 아픈 것은 내가 벌 받을 짓을 했을거야’라고 본인이 그런 사례를 막 찾아내요. 점쟁이들이 그런 짓을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함정에 빠지도록 하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의 술책입니다.

‘믿을 놈은 나뿐이다. 예수고 뭐고 나만 믿을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교회를 나오니까 마귀가 교회까지 따라와서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다. 봐라. 어린양의 피로 생명을 얻었잖아.”
“아멘 믿습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실제에 들어가서는 다시 자기 쪽으로 홱 돌아서는 이것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육의 성전이 따로 있고 영의 성전이 따로 있는데 육의 성전은 누가 짓는다? 인간이 짓는다. 인간이 짓는 성전은 눈에 보입니까, 눈에 안보입니까? 눈에 보입니다. 이것이 육의 성전의 특징입니다.

눈에 보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실적 위주로 나오겠지요. 전에는 컸는데 이제는 작다든지 전에는 작았는데 이제는 커졌다는 실적위주가 되겠지요. 그래서 실적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육을 북돋우고 격려하게 되면 실적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식으로 합니다. 일반 회사에서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의 성전은 우리가 짓지 않고 영으로 짓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나온 성전이 따로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화목인데 화목이란 ‘나,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그 광적인 사랑이 아가서에 나옵니다. ‘네가 백날 도망가봐라. 내가 너를 쫓아간다’고.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쫓아가니까 그 여인이 “아저씨 왜 그래요?” 하면서 문들 닫아 버렸어요. 그래서 문에 치이면서도 끝까지 따라가는 거예요. “너는 나를 이렇게 해도 나는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하면서 그 손에 몰약을 쥐어줍니다. 아주 지독한 광적인 사랑입니다. 그 광적인 사랑은 죽음보다 더 셉니다.

죽음가운데 있어도 소용없어요. 죽음까지 따라가서 구원해 내는 사랑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거지가 되었어도 그런 것을 묻지도 않아요. 노숙자가 되었든 거지가 되었든 그런 것을 묻지도 않고 사랑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영의 사람은 사랑으로 만드는 성전이죠. 사랑으로 만드니까 눈에 안보입니다. 눈에 안보이고 마음으로 믿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실적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 자체가 최종 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 집 재벌 2세가 시골 촌뜨기 아가씨에게 하는 말,

“당신을 사랑하는데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머리를 안 감았는데요.”
“안감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사랑합니다.”
“혼수 장만할 돈이 별로 없습니다.”
“돈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사랑합니다.”

실적을 묻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로 다 끝난 겁니다. 그래서 영으로 지은 성전에서는 목사가 교인들에게 실적을 내놓으라고 닦달내지 않고 다구치지 않습니다. 실적을 따지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거기는 육의 교회이고 비어있는 곳이 아니고 마귀가 활개치는 곳입니다. 마귀가 없는 곳에 성령이 있고 성령이 없는 곳에 마귀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으로 계신 성전에는 뭘 해도 용납이 되고 어디를 가도 사랑으로 덮어줍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벧전 4:8)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마치 두꺼운 솜이불 같습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준비하고 있다고 확 덮어 버립니다. 질식이라도 시킬 정도로, 숨도 못 쉴 정도로 덮어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아하, 내가 성전 된 것은 내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성령 받은 것이 이미 나보다 앞장서서 주님의 사랑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확인받고 깨닫는 식으로 우리에게 평생을 살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의 마지막 대목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이렇게 사시면 됩니다.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 뒤에 오는 우리는 어떤 해나 저주도 안 받습니다. 예수님 지신 그 십자가 길을 가게 되면 내 앞에 있는 십자가 피가 나의 상급이고 내 방패가 되니까 그 십자가 피를 보면서 우리는 뭘 보는가 하면 ‘주께서 알아서 다 처리해 주시는 저 죄, 도대체 얼마나 내 속에 더러운 것들이 들어 있는가’, 그 죄들이 몽땅 튀어 나오는 세월이 바로 우리 인생의 남은 세월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속에 있는 죄들이나 구경하세요. 시집 안 가신 분들 시집가셔서 남편한테 잔소리 하는 죄도 지으시고 장가 안 가신 분들 장가가셔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멈출 수 없는 지독한 것이 아내의 잔소리라는 것을 몸소 느끼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다 잠언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애들키우면서 ‘아하, 내가 괴물을 낳았구나. 내 속에서 괴물이 튀어 나왔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살면서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앞장서서 계신 분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긴 그림자 속에서 ‘이런 죄가 있었기에 피가 없이는 구원 안 되는구나’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남은 세월을 편안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괜히 그 앞에서 착한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이런 것도 들어 있었구나’ 하면서요. 사람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괜히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도 병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사랑으로 덮어버립니다. 이 말은 자기가 스스로, 인력으로 자기 죄를 끊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죄를 끊는다.’ 안됩니다.

이게 물침대 같습니다. ‘나는 죄를 끊었다’ 하고 한쪽에서 죄를 누릅니다. 그러면 다른 쪽에서 툭 튀어 나옵니다. 욕망은 물렁거리기 때문에 이쪽을 누르면 다른 쪽으로 튀어 나오게 되어 있지 그게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안 짓게 되면 안 짓는 그 죄를 다른 스트레스로 변형시켜서 죄를 짓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생살이가 이렇게 물렁물렁거리는 욕망덩어리라는 것을 애들은 잘 모릅니다. 인생 더 살아봐야 압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우리는 그 안에 있지요. 그러면 성전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으니까 이유도 없이 무조건 거룩한데 그렇다면 거룩한 성전에 속했을 때 우리 속에 어떤 변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외부환경이 좋아져야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길수 있습니다’ 라는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내면의 환경을 바꾸십니다. 내면의 환경을 바꿈으로 말미암아 외부의 어떤 환경이 주어져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수 있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부로 침투되는 겁니다.

수박은 외부에서 망치로 때리면 깨지는데 화산은 외부에서 때려서 터지는 게 아닙니다. 화산은 지구 내부의 3500도 이상 되는 맨틀이 녹아서 마그마가 되고 그것이 지표를 녹이면서 지진도 일어나고 폭발도 일어나서 분출하면 사람들이 죽고 난리가 나는 겁니다. 우리의 외부 환경을 신자나 불신자나 다 힘듭니다.

기름 값이 치솟는데 경유 값이 휘발류값보다 더 올라 버렸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대에 환경이 좋아지면 예수 잘 믿겠다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는 광야에서 다 실패합니다. 광야는 환경이 아주 나빴습니다. 물도 없었고 양식도 없는 나쁜 환경에서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서 말씀이 올라와야 그 말씀이 너를 살린다’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몰라서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다 죽었습니다. 지금도 안식의 때가 남아 있고 우리가 있는 곳은 광야입니다.(히 4:9)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내부 환경이 예수님의 피로서 물들어지도록, 예수님의 피가 출렁출렁 거리면서 ‘예수님께 용서 받았어. 예수님의 용서 받았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의 내면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자기가 완벽하기 위해서 자기 자율성을 주장합니다. ‘하나님 제가 앞으로 뭘 하면 됩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자율성을 주장합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의 피가 출렁거리면 ‘나는 참 지독히도 더럽고 나쁜 놈이 맞는가 보다’ 하면서 항상 자기를 나쁜 놈으로 보는 사람한테는 기름 값이 좀 오르고 서민들 사정이 좀 나빠져도 그게 그렇게 큰 문제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 속에 거룩이 있느냐, 거룩하냐를 묻는 것이지 광우병 안 걸린 소고기 먹고 오래 살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면속에 예수님의 피가 출렁거리면 ‘나는 죄인 맞기에 오직 일방적인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용서로만 내가 구원될 수 있구나. 내 성실함이 아니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가 없이는 안 되는구나’를 아는 것이 내면 환경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렇게 달라지게 되면 우리가 어떤 외부의 환경이 나빠지더라도 심지어 생존의 위협이 다가온다 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교회(IP:220.♡.176.141)

08-07-02 14:49

서울080613b엡2장21절

에베소서 제 14강 (이 근호목사, 2008년 6월 13일-b, 서울의존교회)

육의 성전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입니다. 영의 성전에서는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영의 성전을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도 성령 받았다. 너도 성령 받았다.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끼리 있으면 여기에 하나님이 임할 것이고 여기가 온전한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전의 주인공이 성령 받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육의 성전하고 같은 겁니다. 에베소서와 다른 성경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육의 습관이 떠오릅니다. ‘영의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을 대신하는 것은 뭘까? 바로 우리들이다. 눈에 보이는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은 성전의 주춧돌이기에 우리끼리 강강술래 하듯이 손을 잡고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께 들어오셔서 우리가 성전이 된다.’

이런 식으로 다 설명합니다. 제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 책을 본적이 없습니다. ‘돌로 지은 성전은 가짜지만 몸으로 지은 성전은 진짜다.’ 모든 신학, 설교, 주석들과 소위 복음을 안다, 개혁주의라는 사람들의 주장이 대부분 다 이런 주장인데 이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은 끝까지 눈으로 보이지 않아야 됩니다.

그 예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고 하늘에 올라갔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제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신 예수님을 쳐다보지요? 그때 천사가 하는 말이 “어찌하여 올라가신 예수님을 쳐다보느냐? 그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방금까지 눈에 보이다가 안 보이는 상태로 가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전처럼 다시 있는 주님, 눈에 보이는 주님으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때 천사가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제자들을 꾸중한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자기들을 쳐다보면서 성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사도들이 생각하는 성전은 눈에 보이건 안보이건 항상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그곳이 성전이 되는 겁니다.

천천히 다시 생각해 봅시다. 에베소서 1:4에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창세전’이니까 인간은 빠지고 없던 시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입니다. 택한 그 시점에 우리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두분 사이에서 이미 결정 났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11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잖아요.

지금 그리스도가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제가 차이점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눈에 보이는 성전으로 하기 위해서 대타로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집단인 자신들을 눈에 보이는 교회라고 삼았는데 저는 이것이 틀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인간들이 성전으로 삼아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하나님을 모셔버리면 이것은 육의 성전과 동일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 우리끼리 모였습니다. 자, 이제 우리끼리 모였으니 하나님만 모시면 여기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구나.’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소이고 거기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접근하고 우리는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접근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안에서 통일되는 겁니다. 이 안에는 시간도 초월하기에 ‘창세전’이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인간들끼리 모이면 ‘창세전’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모이기 시작한지 50년 되었다.’ 여기에 역사가 있습니다. 성전은 시간개념이 빠져야 되고 공간개념이 빠져야 됩니다. 성전이 되려면 우리들이 모인 곳이 성전이 아니고 예수님이 성전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46년동안 지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지으리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때까지 알지 못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그 성전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하는 줄을 알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9-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 몸이 아니고 부활하신 몸입니다. 그 부활하신 몸에 우리는 끌려가니까, 끌려가는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부활하신 몸 되신 분의 영인 성령이 우리에게 오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디로 합류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일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운데 계시는데 하나님은 사랑으로 합류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린 죄인으로 합류하니까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냥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을 해 줘야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나 위주로 생각하면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제부터 기존교회 목사들이 하는 설교를 들어보세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성전인데 성전을 어떻게 관리했습니까? 여러분은 땅투기를 했지요? 거짓말을 했지요? 하나님의 성전인데 거짓말을 했기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멸하실 겁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했고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돈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가 저주이고 악인데 당신들은 눈만 뜨면 돈을 사랑하니 그래놓고는 여러분이 성전이라 할수 있습니까?”

어떤 목사들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전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구원 안 됩니다.” 도대체 앞뒤가 하나도 안맞으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복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의 자기 성전을 멸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여러분은 저주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그래서 구원 못받습니다.”

어쩌라는 겁니까? 예수 믿고 뭘 어쩌라는 겁니까?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실컷 복음으로 구원된다고 해놓고 우리 몸을 관리 잘 못해서 지옥간다는 겁니다. 사람이 나이 80만 되어 보세요.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고 거의 짐승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욕심을 다 터뜨려 놓고 모르는체 합니다.

처신? 체면? 인격? 천사 같은? 이것은 젊을 때 정신이 제대로 박혔을 때 하는 소리죠. 나이 80넘고 치매 걸려 보세요. 천사가 어디 있습니까? 악마지요. 나이 많아서 악마 안 되는 인간 나와 보라고 하세요. 목사? 장로? 집사? 다 추잡스럽게 늙습니다. 단지 신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추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이 컨디션 좋을 때 방그레 미소가 나오면서 ‘형제사랑’이 그냥 나옵니다. 컨디션이란 습도와 기온이 몸에 잘 맞을 때 입니다. 불쾌지수가 올라갈 때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 위선이지 어떻게 사랑이겠습니까? 월 150만원이 벌금으로 날아가 보세요. 사랑이 안 됩니다. 치통에 시달리고 불면증으로 잠을 못자면 정신이 망가집니다.

정신이 망가지면서 만사가 귀찮아지고 예수고 뭐고 다 싫어집니다. TV에서 리포터가 어떤 노인 분에게 질문하기를 “남편이 좋습니까? 돈이 더 좋습니까?” 하니까 “그걸 말이라고 묻나? 남편, 그게 무슨 필요? 귀찮아 죽겠다!” 신혼 때도 그랬겠습니까? 젊을 때 과부되어 보세요. 울면서 허수아비 만들어 놓고서 밥상을 차린다는 그런 설화도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양반가의 며느리가 청상과부가 되어서 그렇게 하니까 시아버지가 종과 함께도망가도록 해주고 노비문서를 없애줬다는 전설 같은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간은 흙이기에 정신이 아무리 육체보고 똑바로 하라고 해도 육체는 후패해져 순간순간 썩어져 가고 있습니다. 머리가 쇤다는 말은 흙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 갈 때가 다 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실컷 십자가로 구원된다고 해 놓고는 뒤에 가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 잘못하면 지옥간다?’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합니까? 차라리 ‘내가 예수를 안믿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야지요. 이것이 그 유명한 개혁주의 성화론인데 다 그 신학교 출신 목사들인데 개혁주의는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다시 율법을 거론하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짓’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 앞서서 나에게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용서하신 그 십자가를 피를 모독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갈라디아서 1: 8 ,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갈라디아서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5: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서 6:14,15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자뿐이니라.”

목사들이 ‘성전을 더럽히면 멸한다’는 그 본문을 가지고 왜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로 전환을 시키는 것일까요? ‘에베소서를 봐라. 앞부분은 복음이 나오지만 뒤로 가면 하라는 명령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명령들에 복종 안하면 지옥간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결국 헷갈리게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이고 앞에서는 복음이야기인데 뒤로 가면 하라, 하라가 왜 있느냐는 겁니다.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입니다. 마귀도 태어나기 전, 마귀가 있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이게 복음의 비밀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마지막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 근호 목사, 당신이 그 말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책임집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창세전’부터입니다. 천사도 없을 때부터입니다. 하나님만 계실 때입니다. 십자가를 위해서 하나님은 사랑을 준비했고 우리쪽에서는 우리의 죄를 가지고 십자가에 가는데 우리 힘으로 못갑니다.

그때 성령이 오셔서 ‘너는 죄인, 예수님은 의인, 의인 예수님이 너 대신 희생했다’는 것이 성령을 통해서만 십자가가 보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십자가를 알수 없습니다. 그 본문 어디에 나옵니까? 고린도전서 2:8입니다.

고린도전서 2: 8, 9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인간의 마지막 카드가 인간의 마음인데 그 마음으로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은 결국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어떻게 압니까? 고린도전서 2:10에 보면 ‘하나님의 깊은 것은 성령을 받아야 안다’고 되어 있는데 그 깊은 것이 십자가이고 그래서 사도는 ‘십자가외에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0-12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2: 2 “내가 너희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결국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사랑이고 우리가 준비할 것은 죄밖에 없는 겁니다. 죄를 들추어 내기 위해서는 ‘아내된 자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4)고 하는 겁니다. 어느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합니까? 잘해 줄때만 복종하는 척 하지요. 술 먹고 집에 들어오는 남편한테 복종을 왜 합니까?

어느 바보 같은 여자가 남편이 자기를 무시하는데 복종하는 여자는 바보 같은 여자입니다. 결혼한 남자의 느낌은 당황스러움입니다. 천 번을 사랑한다고 해보세요. 천 번을 사랑한다고 했기에 웬만한 작은 실수정도는 봐주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단 한번 약간(여기에 강조, 정말 약간)이라도 아내를 무시한다든지 혹시 아내의 가족이나 친구와 연관되어서 약간(여기도 다시 강조, 진짜 약간) 무시하는 듯 마는 듯 했는데 아내가 사흘 동안 말 안 해버립니다. ‘너, 나 무시하지!’ 이렇게 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로 실수하는데 풀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사람은 자기가 자기 욕망을 못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삐진 마음을 무슨 수로 돌려놓습니까? 삐지고 싶지 않아도 삐졌는데. 남편 된 자들은 이것을 이해를 해 줘야 합니다. 여기서 깊은 진리가 나옵니다. 결혼한 여자가 아이를 낳을때 본인이 낳고 싶어서 낳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에 이것이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가 아이를 낳는 기능이 여자의 자존심보다 더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여자라는 용어는 원래 좀 잘못된 용어인데 일제 때 여자라고 불렀는데 남자와 같이 일을 하라는 뜻으로 여자라고 불렀습니다. 여자는 원래 여자가 아니고 여인입니다. 여인이란 ‘남자 흉내내지 말고 여자다우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인이 뭐냐? 해산, 아기 낳는 겁니다. 남자가 죽도록 일하는데 여자보고 죽도록 일하라는 말이 아니고 남자가 죽도록 일하는 것과 동일한 가치가 여자가 아이 낳는 일입니다. 제가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16-19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땀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니 하시니라.”

남자는 이마에 땀 흘리면서 일하고 여자는 아기를 낳으면서 아픔을 갖는 것이 여자의 본도리입니다. 여자가 품을 수 있는 운명의 실체라는 말입니다. 저주받은 운명의 실체는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아프다는 것과 남자의 운명의 실체란 일하면서 힘들게 일해야 된다는 겁니다. 요새는 거꾸로 되어서 남편은 집에서 놀고 여자는 취직해서 일합니다만.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가 나오니까 그것을 착각합니다. 내 힘으로 ‘하라’는 것은 할 수 있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꾸만 오해를 합니다. 인간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왜 못 지켰겠습니까? 성경에서 율법이 있는 것은 어떤 것은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못한다는 말이 아니고 해도 해도 단 하나라도 못 지키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못지키는가 하면 지킬 능력이 없어서 못 지키는것이 아니고 방향성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지켜도 그 모든 영광과 명예가 다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지켜 봤자 전부 다 나에게 돌아오기에 그것이 엉터리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이 주스를 마실수 있는가?” 주스를 마신다는 것은 주스를 내 목에 흘려 넣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아, 그것은 내가 할 수 있어.”

입에 주스를 넣었습니다. “아, 맛있다. 봐라. 지켰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틀렸다는 겁니다. 왜? “당신이 주스를 마시는 것은 주스를 마시면서 십자가 피를 생각해야 그게 주스를 마신 것이 된다”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구약에 보면 ‘양을 잡으라’고 합니다.

양을 잡는 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칼을 들고 양을 잡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틀렸다는 겁니다. 양을 잡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잡으라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사울이 예수쟁이들을 다 잡아 죽인 겁니다. 왜 쓸데없는 해석을 덧붙이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직접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킨 것은 하나도 지킨 것이 못 된다는 겁니다. 왜? 중간에 뭐가 빠졌기 때문입니까?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가 지켰다고 하니까 모든 율법을 지켜봐야 누구에게 돌아옵니까?

오로지 자기 영광과 자기의로 돌아오니 그 자체가 악마의 짓이 될 뿐입니다. ‘아내가 남편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께 하듯이 하라’는 말씀을 지키니까 사람이 그것을 지킬 수 있고 복종 한다는 겁니다. “여보! 날 때려. 그래도 내가 복종한다.”

그런 것은 복종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종은 “주여, 예수님은 저의 구세주고 저는 십자가 앞에 구세주입니다”라는 것이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배경으로서 ‘아내된 자여 남편에게 복종하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종은 안 된다’는 겁니다. 두 시간은 되는데 두 시간 30분은 안됩니다. 23시간은 되는데 나머지 1시간은 안됩니다.

일평생 복종했는데 딱 한순간 남편이 나를 무시하는 그 순간에 복종이 안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을 들추어내기 위한 것이 인간입니다. 지키는 것이 인간이 아니고 못지키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은 반드시 영으로 해석하라고 합니다(고후 3:6).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은 그 말씀 앞에 나의 행함을 들이대지 마시고 나의 행함을 십자가에 가지고 가서 어디로 가느냐? 십자가가 우리 앞에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나는 이제 술 안 먹기에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할 때 술 안 땡긴다고 해서 성령이 땡긴다는 법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니까 ‘나는 술 안 먹었다’를 자랑합니다. 나는 나에게 도취되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연세 많은 분들, 신앙생활 오래 해도 결국 남는 것은 ‘나는 나다’만 남습니다.

‘내 앞에서 어른거리지 말라. 자식이고 뭐고 나는 나 밖에 모른다.’ 자기 부인이 안됩니다. ‘내가 얼마나 교회에 충성했는데 나를 왜 안 알아주는가?’ 남는 것은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늙은 목사들의 특징이 그거 아닙니까? ‘내가 이 교회에 충성해서 교인들을 얼마나 모아놨는데 젊은 것들이 나를 소홀히 해?’

이것이 늙은 목사들이 주책 아닙니까? 늙어서 추잡하게 놉니다. 아주 추잡하고 더럽게 늙어요. 이것이 욕이 아니고 그 본색을 이야기한 겁니다. 욕이란 없는 것을 과대하게 하면 욕이지만 있는 것을 그대로 이야기 해 주는 것은 욕이 아니지요. 이 말은 ‘너도 더럽게 늙는 것이 아니고 나도 더럽게 늙는다’는 말이고 ‘내가 곧 뒤따라갈게’라는 말입니다.

나는 나에게 도취되면서 살아요. 성경말씀 하나 지키면 어쩔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 주장은 뭐냐? 어떤 성경구절에서도 십자가를 끄집어내라는 말이 아니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제 말은 그게 다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말씀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아내 된 자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못 지키는데 성령을 통해서 이것을 지키게 하실 때 내 힘으로 지켰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남편에게 복종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을 때 그 모든 것은 주께서 나를 사용한 흔적으로 믿으라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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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