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6월 13일강의 고후 8장 1절
안산 6월 13일강의 고후 8장 1절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613 고후 8장 1절
우리교회(IP:124.♡.85.92)
08-06-14 19:59
관리자(IP:220.♡.41.203)
10-11-2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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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080613고후8장1절
2010-11-26 23:16:54 녹취 : 박온정
안산080613고후8장1절 / 이근호 목사
『고린도후서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
한 부락에 교인이 있다는 말은 ‘교인 몇 명이냐,’ 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관심있는 사람이 한 명 생겼다 이 말입니다. 그 부락에 나 말고 교인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성경을 덮어버리면 그 부락에 성도 하나도 없어요. 왜냐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살거든요.
신학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고린도후서 그 당시의 풍습이 아니라 성경은 성령께서 몇 천 년이 흘러도 성경을 계속해서 깊이 있게 적재적소에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도록, 그걸 능력이라 하는데요, 고린도전서에 보면「네가 이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니」하나님 말씀으로 듣는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11장에「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하는 것이 예수님 당시 그때에만 필요한 말씀입니까? 안산시민과 관계없고 2008년도 우리와 관계없는 겁니까? 아니죠. 분명히 요한복음11장에 있는 말씀인데 안산시내에 한 명의 신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느냐 하며는, 방금 얘기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 재미로 살잖아요.
그 사람이 요한복음11장 25절 같으면 12장은 무슨 내용일까? 관심 두는 게 옳고 만약에 12장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12장에서 같이 공부할 수 있다면 혹시 바빠서 참석을 못해도 관심을 둔다 이 말이죠. 고린도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이는 사람이 몇 명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요한복음을 다 했고 고린도후서를 하고 있다면 이 고린도후서에 대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같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저는 감사한 거예요. 이게 고마운 거예요.
사모님 같은 경우 아이들 키우잖아요? 애들 키울 때 바쁘다보니까 언제 말씀에 관심이 있는가 하며는, 일요일 날 주일뿐이거든요. 정말 큰 사명감이 큰 엄마 같으면 저녁마다 붙들고 가정예배 드리자하는데 가정예배 드릴 시간이 안 되잖아요. 하다보면 내가 성경실력이 딸려서 만약 애가 물었을 때 내가 모르면 창피하게 되니까. 내가 성경에 대해서 모른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잖아요.
어쨌든 간에 걔들은 엄마 아빠 덕분에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성경을 펼친다고요 성경을. 그렇다면 만약에 걔가 많이 바빴다, 바빠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 취직을 해가지고 일요일마저 회가 가게 되어 못 온다 할 때에 -예를 들어서입니다- 교회와 바이~바이~하게 되는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도 어쨌든 해먹고 살라니까 바이~바이~ 했을 경우에 비록 교회는 안 나오지만 걔가 계속 신자 맞다, 성도다. 라고 판정내릴 수 있는 근거가 뭘까요?
만약에 걔가 교회 참석하고 않고 간에 걔는 신자 아닙니다! 만약에 교회 참석하는 게 신자고 참석 않은 게 신자 아니라면 걔는 더 이상 신자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그때 말씀 들을 때 그때가 좋던데…내가 왜 이렇게 사나…내가 말씀 듣고 살아야지,’‘내가 어릴 때 교회 가서 복음 들었는데 내 처지가 왜 이리 됐나’ 라고 뭔가 ‘말씀을 들어야 돼, 말씀이 나를 살려’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면 형편상 교회 못 나와도 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일 년 보냈다. 그런데 일 년 뒤에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남들 교회 안 가는데 내가 왜 교회 가는데?’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교회 나오고 안 나오고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뭐가 관계가 끊어져있는가 하며는, 말씀으로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나는 말씀 없이도 산다.’ 이 말입니다.
‘나는 말씀 없이도 산다,’ 이렇게 됐을 경우에, -얘기를 좀 더 해보면- 만약에 자기가 교회 못 나오고 회사일 하는데 회사 내에서 갑자기 성경 볼 시간이 됐다 했을 때 ‘나는 말씀 없이도 산다’ 한다면 코앞에서 성경본다고해도 참석하겠어요? 않겠어요? 안 하겠지요! 그러면 솔직히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인간이 성도로서의 백성이 사는 모습이 말씀으로 사는 건데, 그러면 백성의 면면을 어디서 찾습니까? 예, 찾을 길이 없지요. 찾을 길이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 우리 사정이 꼭 그 사정인 거예요. 고린도후서를 강의하면 고린도후서1장에서 환난 나와요. 환난. 고린도후서1장에 나오죠?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고린도후서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난 이야기 나오잖아요. 말씀을 가까이한다 할 때, 지금 내가 등 따습고 배부르고, 오히려 말씀 듣는 시간이 나의 돈벌이하는데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데 말씀을 왜 보느냐, 이러거든요.
우리가 고린도후서 했잖아요. 하면서 1장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우리에게 넘치잖아요. 그렇다면 만약에 말씀을 들춰봤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라고 했을 때 과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닥치는 것을 우리가 허락했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돈 없어서 고난 받는 것은 얘기했고, 돈 없어서 교회도 안 다니고, 돈 없어서 말씀도 안 듣는 이런 것은 가능한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적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 고난으로 인하여.…
그러면 이 말씀을 본다는 것은 뭐냐면 써먹기 위한 지식을 얻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형편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백성답냐, 하는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을 봐야 된다 이 말입니다! 평소에 학교 간다. 학교에서는 뭘 요구합니까? 그리스도 고난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 성적 아닙니까. 그러면 아이는 관심이 어디에 있어요? 관심이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 주의 말씀에 맞느냐, 그게 아니라 성적을 어떻게 올릴 것인가가 관심사잖아요.
그런 식으로 계속 습관들이고 그런 식의 버릇이 든다고요. 그야말로 공부 때문에 주일 날 교회도 안 나오고, 이러면 어떤 인간성이 되느냐 하면, 말씀 없이는 살아도 공부 못하면 안 되는구나, 를 확정짓게 되고 굳어져버려요.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고난이 왜 오느냐 하면,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치여 가지고 진짜 신자들이 고난 받는 거예요.
‘이보게, 사람 그리 사는 게 아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고 성적이 전부가 아니야!’ 라고 동네 친척이나 동네사람이 얘기했다가 괜히 욕 얻어먹는 고난, 환난이 그거예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봅시다. ‘나만 교회 안 나가면 그만이지.’ 보통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돈이 없어서 못 살지 교회 없어도 산다, 말씀 없어도 산다’ 이럴 것 같으면 자기 혼자 문제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다들.
그런데 만약에 우리 옆에 성령 받은 진짜 신자가 있다면, 누가 누구를 핍박하겠습니까. ‘나는 돈으로만 산다’ 이게 누굴 핍박하겠어요. 바로 성도를 핍박한다고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걸 우리는 고린도후서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공부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라는 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고린도후서1장에서의 고난 이야기가 여기 시작된 이유가 이 고난이 어디서 오는 고난이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도 나는 돈만 있으면 산다,’는 사람 때문에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핍박을 많이 받은 거예요. 그 고난이 1장에서 무슨 고난이라 했습니까? ‘그리스도에 인한 고난’ 그래서 오늘날 돈 없어서 고난 받는 사람은 있어도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 받는 사람 나오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랑해줘야 돼요.
나는 곧 죽어도 말씀 없으면 못 살겠다. 이럴 경우에만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받아요. ‘말씀이라는 건 바쁘면 안 보면 되지,’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이 누구를 핍박하느냐 하면, 진짜 성도를 핍박하게 돼요. 진짜 핍박받은 성도는 뭐냐 하며는, 말씀이 최우선이라는 것 때문에 핍박받는 고난이 이 복음 때문에 고린도후서에 고난 받는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8장 하는데 1장에서 쪽 나오는 게 8장에 나온 거예요. 오늘 칠판 있으면 참 좋은데, 고린도후서가 신약 아닙니까? 신약을 염두에 둘 때 히브리서에 나오지만 ‘광야’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해요. 애굽에서 빠져나와 약속의 땅을 바로 들어가지 않고 중간지점이 광야 아닙니까. 왜 광야를 통과하는가를 아셔야 되요.
광야라 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아무리 애써도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얘기해주는 게 광야예요.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은 사는 축에 들지도 않습니다. 내 힘으로 돈 벌고, 내 힘으로 공부하고... 이거는 사람 사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광야라 하는 것은 뭐냐면, 내 힘을 살다가는 약속의 땅에 한 명도 못 들어가요. 한 명도.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광야에서 다 죽었잖아요.
광야에서 출생한 사람만 가나안땅에 들어갔지,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두 사람 빼고 다 죽었잖아요.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 다 죽잖아요. 결국 다 죽었다는 뜻이에요.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좋은데 그림 대신 여러분 상상하세요. 여러분들이 고물이나 폐차장, 쓰레기장에 외롭게 서 있어본 적 있습니까. 사기그릇이 짜브락 짜브락 다 깨지잖아요. 쓰레기장에 서 있으면 공동묘지에 서 있는 그런 기분. 그러면 자기 밑바닥에 뭐밖에 없습니까? 전부 다 죽음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세상을 광야로 보라는 뜻입니다.
산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죽은 사람뿐이에요. 전부 다 이 세상은. 모두들 자기 힘으로 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힘으로. 광야라는 것이, 그 당시에 오십만이 나왔든 백만 명이 나왔든 간에 나왔을 때,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같이 살아도 같이 산 게 아니에요. 그야말로 시체들과 동행한 거예요. 열심히 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결판나는 그 마당에서 그들은 유턴, 돌아섰잖아요. 왜나면 천국 가는 법을 몰랐었어요.
맨 날 얻어먹고 맛있는 반찬에 메추라기 고기 먹었는데, 문제는 고기 먹고 -그림으로 그리면 참 좋은데 - 쉽게 말해서요, -쉬울지 어려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천국 가는 환경은 이부환경이 좋아서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내부에 천국 가는 환경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되요. 화산이 폭발할 때 화산의 외부에서 터져서 폭발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마그마로 인해 폭발하잖아요. 마그마 같은 천국의 환경이 치밀어 올라오는 사람에 한해서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깥 환경이 어떤 환경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의 내부적 환경이 달라져야 되요.(아멘) 내면의 환경이 달라져야 되요. 내가 있다 했을 때 바깥 환경이 있잖아요. 에덴동산에 있는 거 다 먹으라 했잖아요. 소용없어요! 아담 내면에 약속이 치밀어 올라와야 되요. 우리라는 인간은 우리의 바깥을 본다고요. ‘하나님 기름 값 올라 못 살겠습니다, 트럭이고 뭐고 경유 값 올라 안 되겠습니다. 좀 살려주세요.’ 전부다 뭣 때문에 호소합니까.
내면의 문제가 아니고, 환경이 나빠서 못 살겠습니다. 우리교회에 ‘치킨 집’ 하는 집 있잖아요. 참, 목사 입장에서도 많이 안타깝고 괴롭지요. 치킨 집 하는데 이건 (완죤) 폐업 직전이라. 조류독감 때문에. 그러니 목사입장에서는 계산을 하지요. 장사가 잘 돼야 십일조 많이 들어오는데 장사 안 되면 헌금 덜 들어온다. 헌금 적게 들어오면 내 월급도 깎인다. 이런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도 인간적으로 봐서는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도.
조류독감 때문에 하루에 한 마리도 안 사먹는다는데 얼마나 안타까워요. 그럴 때 그들이 고린도후서 보겠습니까? (주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안 보지요! 기도는 하지요. 어떻게? ‘주여, 쪼매 풀칠만 하게 해주시면...’ 대번에 이렇게 나올 거 아닙니까. 옛날에 우리나라 교회가 10리 40리서만 와도 성공이었습니다. 교회마다... 사경회 하면요, 구루마 끌고 와서 다 했어요. 지금은 아무리 교통이 발달해도 성경대로 하면 교회 부흥 안 됩니다.
교회 노인들 놀이터 만들어주는, 노인들 와요. 교회 부흥되어서 나이 많은 노인들 끌어모으는 수밖에 없어요. (나이 먹어서, 늙어서 외롭지 않기 위해 타락한 교회에 한사코 나오라던 친구 생각남. 늙어서 일은 늙어서 생각하겠다고 답변했던 -녹취자) 뭐 배워주고, 점심해주면 옵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깥 환경 있잖아요. 교제 나누고 재미나게 놀고, 취미생활하는 거 가요교실 열고...(목사님은 어찌 그리 소상하게 잘 아실까요)
젊은 주부들 끌어 모으려고 젊은 주부들이 원하는, 아이들에게 영어 공짜로 갈쳐주고 자원 봉사하는 영어강사 하나 받아가지고. 전부 다 외부 환경문제예요. 그런데 ‘성경공부 한다’ 하면 아무도 안 오지요. 광야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만나를 주는 그게 만나가 아니었어요. 신명기8장에 보면 만나가 아니었고 그게 뭐였습니까. 하나님 말씀이 그 맛나에 담겨서 준 거예요.
만나를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신8:3」만나 먹고 제발 너희의 교만한 마음 푹 낮춰라, 사는 게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영원히 사는 것은 오직 주께서 살려줘야 삽니다. 라는 것을 이 광야라는 이 특수한 환경 속에서 특수하게 몸에 베이도록. 완성된 이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몸에 베여야 된다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했어요. 「나는 율법의 일점일획을 다 이루러왔다」이렇게 했지요?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마태복음5장23-24절에 보면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화해 않으면 너의 죄를 낱낱이 다 고발하여 그 죄 값을 다 치루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천국에 가려면 이 땅이 살만한 곳이 못되는 지옥인가를 율법을 통해서 철저하게 알아야 되요! 우리는 일점일획의 율법 앞에서 두 눈 두 팔 다 뽑혀도 우리는 그 말씀을 못 지킨다는 것을 철저하게 이 세상에 살면서 이걸 느껴야 된다.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이 넘친다.
8장2절 한번 봅시다.『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뭐, 개뿔이 있어야 내지요.(ㅋ) 연보라는 게 뭡니까. 연보가 여윳돈 내는 것 아닙니까? 가난한데 무슨 연보를 냅니까. 그리고 환난은 걷혀져야 기쁨 아닙니까? 그런데 「환난 가운데 넘치는 기쁨」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는 이 이야기를 왜 써놨느냐 하며는, 사고방식 자체가 ‘좋은 환경 주시면 하나님 잘 섬길게요’ 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고린도후서 8장2절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열번) 죽었다 깨어나도! 좋은 환경 주시면 배불러서라도 찬양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겠습니다.(소화시키기는 좋지요-녹취자 ㅋ) 이런 사람은 이 땅 광야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광야라 하면 후딱 지나가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광야는 후딱 지나가는 게 아니고, 지나가면서 광야 같은 환경이 내 속에서 살아나야 되요 이게. 다시 이야기할까요? ‘광야? 에구 제수 없다, 빨랑 지나가자’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따위 사고방식을 가지고 광야 거치면서 ‘와~ 광야 지나가면서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구나,’ 라고 바뀌어 지라고 광야라는 게 있는 겁니다.
쉽게 얘기해서 자동세차 하는 곳 있잖아요. 차를 밀고 가게 되면 거품 내면서 세차되잖아요. 그게 그냥 터널이 아니에요. 터널 같으면 그냥 차 몰고 나가면 그만입니다. 반드시 그걸 통과했으면 더럽던 차가 어떻게 돼요? 깨끗하게 달라져야 돼요. 차는 껍데기만 달라지면 그만이지만. 광야를 살고 있는 21세기 2008년도는요, 이 어려움을 통과하라고 ‘조금만 견뎌라’ 는 세상이 아니고 우리 내면의 정신 사고방식이 아니었던 사람이 예수처럼 바뀌어 지라고 기름 값 오른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목을 죄는(조이는) 겁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만약에 가짜신자 같으면요 ‘하나님께서 돈 필요할 때 여유를 줄 때는 교회 나가서 헌금할만한데 이렇게 기름 값 오르고 장사 못할 것 같으면 누구는 고집 없나요? 전 같으면 교회 한 번씩 나왔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힘들게 하면 일요일 날도 교회도 장사하렵니다.’ 라고 버틸 게 아닙니까. ‘그래! 버텨라!’ 이 말이지요. 그래서 걸러내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걸러내는 거예요.
‘외부적인 환경이 좋아지면 예수 믿겠습니다.’ 이거는요, 광야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무시하는 거예요. ‘환난을 주고 광야를 주신 것은, 아하, 내가 사는 게 무엇이고 죽는 게 무엇인지를 거꾸로 생각했구나.’ ‘내가 죽어도 사(싸)다!’ 라는 자만이 광야 속에서 진짜 산자고, ‘아니야, 나는 살아남아야 돼,’ 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 사람은 광야를 그냥 통과하는 사람이에요. 그냥 통과해서 지옥에...왜냐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지 않으니까. 그게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궁금한 게 뭐냐, 고린도후서8장에서 어떻게 환난이 기쁨을 낳고, 어떻게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낳았는지 그 이유가 어디 있는지를 봅시다. 3절에 봅시다.『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렇게 돼있죠? 어떤 경우에 이런 엄청난 일이 생기는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알게 될 때에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에 게 지시하고 명령하시는 분이 따로 존재할 때, 그분의 지시에 따라서 자기 내부에 새로운 환경이 세워지죠.
‘우리 내면의 환경’이라고 했는데 환경대로 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연보를 할 때 누구한테 물어보겠어요? 자기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자기 내부에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진, 천국 가도록 만들어진 환경에게 물어보겠지요. 헌금 얼마 한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물어본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이게...
물어보기 전에 천만 원 하려다가 물어본 뒤에 오만 원 하는 것. 그래도 좋아요. 물어보기 전부다 액수가 더 많아져야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 내면에 계시는 주님께 물어본다는 그 자체. 연보 그렇게 합니까? 보통은 안 물어보고 협상하지요? ‘주님, 이번 달 생활비가 조금 쫓깁니다. 다음 달에 많이 할 테니까 지금 이만큼 한 것 봐주소’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거는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게 아니고, 주님과 협상하지요. 어떻게? 봐달라고! 주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아이가 이번에 아파가지고 약값 많이 들어가 쪼달리는 거 아시지요? 지금 천 원하는데 다음에 하나님께서 복 주면 그때 2천원 올릴게요. 지금은 돈 없어서 천 원만 하렵니다. 이거는 지시받는 거 아니고, 지시받는 거하고 협상하는 거와 같은 말입니까? 아니지요! 예? 지시받는 거와 협상과 달라요. 협상한다는 건, ‘주님이여, 이 돈은 내거니까 손대지 마소’ 내 돈이니까 손대지 말라고...
「힘에 지나도록 연보하는 거」요? 이거 분명히 얘기합니다. 이거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힘에 지나도록 하지 마세요! 이게 제 결론입니다. 만약에 이 말씀대로 힘에 지나도록 헌금을 하면, 그 의로움이 누구한테 오겠어요? 주여, 제가 이렇게 잘났습니다. 라는 자기 의로 돌아와요. 그러니까 ‘주여, 힘에 지치도록 했습니다, 저 어때요? 저 연보 잘했죠?’ 이러면 안돼요, 그것도 역시 여전히 그 돈은 누구 것입니까? 자기꺼예요. 자기돈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좀 어려운데요, 어려우나 들어보면 쉽습니다. 뭐냐 하면, 일단 헌금을 하세요. 해놓고 주님께서 시켜서 했다고 생각하세요.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누구 생각을 빼라? 누가 얼마 냈다는 생각을 아예 삭제해버리세요. 그러면 연보를 통해서 다시금, 내 돈은 한 푼도 없다! 돈 액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지난번에 이천 원 했다 이 문제가 아니고, 연보를 통해서 연보한 돈만 내 돈이 아니고, 현재 연보 않고 남아있는 이 돈도 내 돈 이 아니다 하는 그것이 바로, 연보를 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천원을 하더라도 그렇게 자기 것이 없다는 상태에서 천원을 했다면 힘에 넘치도록 한 것이 됩니다. 희한한 이론이 나오죠? 돈 천원을 하더라도 아예, 내 돈이 없다고 여겨버리면 천원을 하더라도 말씀에 의한 ‘힘에 넘치도록’ 하는 거예요. 그런데 천원을 하더라도 ‘주여, 내가 생활비 쪼달리면서도 천원 했습니다. 이래 나오면 그 사람은 전혀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연보가 되는 겁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뭐냐 하면, 은혜대로 헌금을 안 했다, 이래 되는 겁니다. 말은 쉬워요. 연보를 할 때 반드시 뭐로 하라? ‘은혜대로’ 하라 이 말입니다. ‘은혜로 하라’ 말은 굉장히 쉬워요. 말은 쉬운데 은혜로 하려면 ‘연보를 했다’ 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서 내게 했다는 식으로 액수와 관계없이. 그렇게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게 하시고. 저 과부의 두 렙돈, 그게 큰돈이죠. 두 렙돈이 무슨 큰돈입니까. 예? 생활비 다 바쳤다 해도 그건 큰돈은 아니에요.
그런데 과부가 두 렙돈, 그걸 왜 바칩니까. 자기 돈이 아니거든. 자기 돈이 아니라고 그냥 뿌립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지시가 떨어졌거든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연보든 뭐든 간에 하여튼, ‘너는 네 몸이 아니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줘,’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바에요. 여러분 이제 하나님 원하는 거 알아죠? 간단한 겁니다. ‘주여, 환경 때문에 못 살고, 에너지 때문에 못 살겠어요’
바깥 환경 탓하지 말고, 우리 내부의 새로운 환경이 차올라야 구원받는데 그 새로운 환경이 뭐냐! 너는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사는지 너는 네 몸도 아니고, 네 인생도 네 게 아닌 거예요. 사모님 인생 나야 모르지요. 얼마나 울면서 지냈는지, 이것이 인생인가? 할 정도로 모든 우여곡절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생을 하던 뭘 하든간에 현재 있는 몸뚱아리 그 인생이 주님의 뜻인데. 주님의 뜻이라면 귀하다. 어떻게 망가지든, 노숙자가 되던 은혜가 임하면 그것이 귀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걸 고린도후서 전부터 쭉 이야기해왔었어요. 지금 8장의 연보 이야기 나오니까 고린도후서3장 2장 계속해서 그 이야기였어요. 뭐라고요? 네 몸은 네 몸이 아니니까 씨잘데기 없는 걱정근심일랑 하지 마라! 만약에 지금 네가 아직도 네 몸으로 여기면, 문제는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광야 같은 세상을 통과하면 기다리는 것은 약속의 따잉 아니고, 지옥이 있다는 겁니다. 지옥이. 지옥이 기다린다 말이지요.
왜? 뭐가 안 바꿔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안 바꿔졌기 때문에! 자, 그러면 제가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광야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물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수준에서 몇 백억? 얼마를 가져야 환난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돈을 이만큼 가졌으니까 환난 안당하고 있다. 환난이 없다고 여기는 액수가 얼마쯤 되겠습니까. 이정도 같으면 환란 아니다, 라고 했을 때 얼마쯤이면 몇 백억을 가져야 돼요? 수 천 억을 가져보세요.
성경을 보면 관점이 달라져요. 돈이 적으니까 환난이고 돈 많으니까 환난 아니고?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광야로 통과하니까 모든 인간은 환난 받고 있습니다. 돈을 수 백 억 갖고 있는 그 부자도요, 물어보세요. 마음고생 얼마나 심한지. 사람들이 어리석다고요, 가난한 사람만 고생한 거 같아도 안 그래요. 단 이런 사람만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겠죠. 어떤 사람?
내 몸은 네 것이 아닙니다. 수백억을 가졌든, 수조원을 가졌든, 집안에 돈 한 푼 없든 간에. 어쨌든 내 몸은 내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광야 가운데서, 환난 가운데서도 본문 말씀처럼 ‘넘치는 기쁨’이 온다 그 말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알았습니다. 이게 어려워요. 사람들은 ‘에구 돈만 주면 넘치는 기쁨 오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돈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내 몸은 하나님 은혜로 주님이 주신 내 몸이 아니라는 그 하나로 인하여, 환난 가운데 큰 기쁨이 오고, 가난 가운데 넘치는 연보를 하는 거예요.
넘치는 연보라해도 빌 게이츠 한 편 내는 것보다 더 적어요. 그 당시에 넘치는 연보지요. 남들이 들으면 웃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걸 은혜로 했기 때문에 넘치지 않은 연보가 없어요. 뭐든지 주님의 돈이고 주님의 돈을 내가 심부름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오백 원을 내든 백 원을 내든 간에 돈 내면서 ‘주여, 제가 주님의 돈을 냅니다,’ 내 돈 없습니다. 헌금 내면서 기쁨이 생기고 하나님 은혜를 새롭게 더 깊게 안다 이 말이지요.
교회에서도 연보를 이렇게 가르쳐야 되요. 연보 하면서, 연보하는데서 오는 십자가 복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그런 기회가 되도록 해줘야 해요. 연보하면서. 그러니까 교회가 액수 때문에 너무 닦달내지마세요.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이 나중에 가난하게 되면 교회 안 나오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지만 150만원 적자예요. 광고시간에 150만원 적자라고 광고 했잖아요. 그 다음에 한 찬송가가 뭐냐면, ‘참 즐거운 노래를 ~’ 그 노래 불렀다고요.
그 노래 부르면서 예배시간에 속으로 얼마나 웃은 줄 아십니까? 150만원 적잡니다. 라는 광고를 하고 난 뒤의 숙연한 분위기. 주보에 나온 찬송가를 펼치니까 ‘참 즐거운 노래를’ 부르니 이게 글자로 따라 부르지 마음으로 가겠습니까? 웃기는 거죠. 말이 안 되잖아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제정보고에 3천 만 원 남아돕니다. 해놓고 ‘참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 노래 저절로 되겠지요.
그런데 교회가 뭡니까. 천국 가야될 사람들 모임 아닙니까? 천국에 가야될 사람들 같으면 천국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참 즐거운 노래는 어떤 경우에도 참 즐거운 노래여야 된다? 교회가 적자가 돼도 무슨 마음이 나와야 된다? 참 즐거운 마음이 넘치도록 나오는, 그런 기회를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허락하신 거예요.
막상 적자가 되고나니 들킨 거예요. 결국 우리는 기껏, 기뻤다, 좋았다, 웃었다는 게 주님 주시는 은혜로 기뻤다 즐겁다 그건 핑계, 다 거짓말이었고, 무엇에 근거해서? 돈이 좀 있으면 그게 있으면 하나님 이름 거론하면서 참 즐거운 노래를 불렀다 이 말이죠. (나의 기쁨의 출처를 찾아라. - 녹취자)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생활도 마찬가지로. 보세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 실상을 고발하는, 실상을 폭로하는 멋진 기회를 주셨습니까.
속으로 우스워가지고, 예배시간에 웃으면 또 안 되잖아요. 속으로 참느라고 애를 먹었어요. 그리고 찬송 끝나고 난 뒤에 그걸 그대로 인용했지요. ‘자, 보세요, 즐겁던가요? 안 즐겁지요? 교회 맞습니까? 이거 지금 천당 간다고 와 있습니까?’ 인간 자체가 돈에 웃고 돈에 우는 그런 인간인데, 천국에서 돈 달랍니까? 그게 바로 고린도교회와 똑 같아요!!
교인들마다 부자고 십일조 많이 내어서 교회가 풍성해서 연보를 낸 게 아니에요. 외부 환경은 극한 가난이었고, 환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내부에서는 많은 연보와 큰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바뀌게 된 그 이유가 방금 뭐라 했습니까? 내 몸은 누구 것이 아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이거 죽을 때까지 깨달읍시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얼마 전에 장사익이라는 사람이 불렀던 놀 있습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그 사람들은 모르죠. 저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를 이렇게 해석하죠. ‘네 몸은 네 것이 아닌데 왜 네 과거를 가지고 울고불고 왜 하느냐’ 네 몸은 네 몸이 아닌데. 남의 몸을 가지고 왜 설쳐 대냐 말이죠. 너한테 무슨 과거가 있는데? 내가 만들어준 과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너한테는 과거가 없다 이 말이죠.
왜냐면 현재도 네 몸이 네 몸이 아닌데, 마찬가지로 우리 미래는 없어요! 주님의 몸의 미래일 뿐이지, 주님께서 구름타고 어떻게 조치할 미래가 있을 뿐이지 나의 미래는 없어요. 저나 여러분의 미래는 규정됐습니다. 늙어죽는다는 것...ㅋㅋ(어서 와, 나의 미래 나의 죽음이여) 머리 다 희어지고. 결정 났어요. 무슨 미래가 있어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 미래도 기대하지 마세요. 차라리 기대한 게 있으면 실망이 큽니다.
낼 되면 또 주님의 몸으로 사는 거고, 모래 되면 주님의 뜻으로 사는 거고, 그리고 글피가 되면 주님의 것으로 살 뿐이지, 은혜로 넘치는 기쁨으로 살 뿐이지. 자꾸 내꺼 내꺼 그러지 마세요. 실망을 사서하려면 몰라도. 그러면 실망이 너무 큽니다. 이건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요, 7절에 봅시다.『오직 너희는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것이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9절에 보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
예수님께서 부자였죠. 돈 부자가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사랑 부자예요. 사랑 부자.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가난하고 무엇에 쪼달립니까. 은혜도 쪼달리고, 사랑도 없고, 게다가 돈까지 없고! (ㅋ) 우리는 풍요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랬던 그 고린도교회가 극한 고난과 극한 환난 가운데 어떻게 됐다고요? 환난 가운데 그 교회가 뭐가 됐습니까? 풍성하게 됐죠. 뭐가 풍숭하게 됐습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게 되었으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 은혜가 아니냐 이 말입니다.
이게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말이죠. ‘내 것은 없다!’예요. 네 것 아니니까 내가 가져간다. 그런 지시는 우리에게 내린 적 없어요. 내 몸이 내 것 아니니까 자살하자, 이거 말도 안 되죠, 왜! 그런 지시는 받은 적이 없거든. 성경에 자살하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네 몸을 가꾸라 하지 자살하라는 게 어디 있어요?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니까 성경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그렇게 관리해야 된다 말이지요.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할게요. 광야라는 게 뭐냐 하면, 네가 네 힘으로 사는 곳이 천국이 아니다는 거죠. 광야라 하는 것은요, 네가 네 힘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다 치워버린 게 광야입니다. 물이 있습니까, 고기가 있습니까, 떡이 있습니까? 그러면 광야는 무엇으로 삽니까. 주님으로 더불어 사는데 이게 바깥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자신의 내면에 ‘나는 말씀으로 사는구나,’ 깨닫는 그것이 광야 40년입니다.
말은 쉽다 정말. 말은 쉬워요. 사람이 언제 불리하냐면 예상하는 게 없고 기대하는 게 없으면 현재 있는 것으로 행복한데, 내일 뭔가 예상한 순간부터 지금 행복은 날아가 버리고, 그 다음부터 금심과 걱정이 찾아옵니다. 그건 우리가 지난 시간에 했죠.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근심은 우리를 지옥 보내는 근심이고 하나님의 근심이 있는데 그건 뭐냐 회개하는 근심은 고린도후서 지난 시간에 했던 겁니다. 진도 나가봅시다.
자, 14절에 봅시다. 이제 너희의 유효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유효란 뭐냐, 차고 넘치는, 여유분. 여유 있다 이 말이죠. 돈이 여유 있는 게 아니고요, 마음의 여유가 있어요. 여러분 오늘 살고 그만 살렵니까? 주님이 불러줄 때까지는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야 돼요. 사도바울은 보너스라고 했습니다. 그 보너스가 뭔지 알아요? 사도바울은 보너스가 뭔지 압니까? 보통 회사의 보너스 나오면 기다리잖아요. 월급 이외에 주잖아요. 사도바울의 보너스는 지가 죽는 거예요.
죽는 것을 산 걸로 여기고 죽는 것을 보너스 두둑히 타는 날로 여길 때 정말 그 사람은 여유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시는 분입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언제 설교가 되냐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다, 죽기 위하여 설교하면 신학을 아무리 연구해도 이걸 써먹으려 하면 듣는 사람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뭔가 믿음이 아닌 것으로 보이고, 딱딱해 보이고, 억지가 돼 보이고. 언제 설교가 부드럽고 자연스럽냐 하면, 성도여, 나 지금 죽으려고 환장했습니다. 성도여! 바이~바이~ 지금 나는 이런 식으로 죽어가고 있군요.
자기가 자기를 죽이면 자살이죠. 자기가 자기를 순교하면 목사에게 뭘 느끼느냐 하면, 욕심을 못 느껴요. 욕심을 느낄 수가 없어요. ‘저러다 진짜 죽네’ 설교하면서 교인들이 뭔가 욕심을 느끼게 되면 탐욕을 느끼게 되면, 그 설교는 뭔가 노림수를 가진 설교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힘들어져요.(냄새가 금방 나죠-녹취자) 그렇게 되면 그 교회가 자기 교회가 되죠.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이 죽는 마당에는 인심이 후한법입니다. 자기가 세상을 하직하는 그 순간이 오면 원수도 사랑하게 돼있습니다. 생전 원수 사랑 않다가 지 죽을 때 원수 사랑하죠. 제가 군대 얘기하면 기분 나쁘겠지만 군대의 그렇게 못되게 굴던 고참도 예비군복 입고 마지막 떠나게 될 때, 그렇게 못살게 굴던 후배들한테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그동안 내가 좀 심했제? 그쟈? 미안하다.’ ‘사회에서 만나면 봐줘, 미안하다,’ 자기가 떠날 때 되니까 마음을 낮추더라 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 보기에는 떠나기 전부터 진작 마음을 낮췄으면 처음부터 인상이 좋은 인상 될 건데, 꼭 끝날 때 예비군복 입고 떠날 때, ‘그동안 섭섭한 것 있으면 잊어라, 응?’ ‘군대가 다 엿같잖아!’ 이런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해요. 그래서 저는 군에 있으면서 미리 알고 약간 고참될 때부터 아예, 나는 제대 날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포기했어요.
사도바울 소원이 죽는 게 소원이었어요. 죽는 날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가슴이 콩당콩당 보너스 두둑히 타는 날처럼 얼마나 그걸 기다리는지 사도바울 소원이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었어요. 그럴 때 평소에 그 사람 마음이 얼마나 여유가 있겠어요. 얼마나 소원하겠어요. 그게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아니겠습니까? 성령의 열매죠. 윤리 도덕이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늘 이렇게 죽고자 하는 것.
그 다음에 19절 한번 봅시다.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은혜의 일로 누구를 보내느냐 하면, 디도를 보내요. 디도가 왔다 갔다 전령 역할을 하니까. ‘형제를 보내노니 영접 해 다오’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자, 9장에 봅시다. 다시 한 번 헌금이야기를 하는데, 6절에 한 번 봅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이 말을 왜 하냐면 5절 끝에 보면『…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렇게 돼있거든요. 지금 사도바울이 액수가 적어서 걱정이 아니고 자꾸 뭐가 걱정되느냐 하며는, 연보를 하나님의 은헤로 않고 자기 결정에 의해 연보를 할까 싶어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연보를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주님의 지시가 있다고 느껴지면, 그 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내가 주의 사람이구나, 내가 하나님 백성이구나, 느끼는 그 희열은 돈을 주고도 못 바꾸는 큰 축복이 옵니다. 구약에 나와요.
구약의 거룩이라는 것은 돈이나 열심으로서 거룩을 얻을 수가 없어요. 구약의 거룩은 오직 어린양의 피로 얻은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 하느냐 하면, 너희들도 마찬가지로 살아라, 말이죠. 하나님이 너희에게 거룩을 줄 때에 돈으로 주고 돈 받고 준 것도 아니고, 열심 있다고 준 것이 아니듯이 너희들도 평소에 살아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하게 되면, 네가 네 자신에게 은혜가 안 된다. 억지로 하게 되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
결국 억지로 하고 사랑으로 하지 않으니깐, 백날해도 얻는 기쁨은 적다 이 말이죠. 지금 무슨 말이냐면 ‘심는다’는 말은 기쁨이에요. 기쁨. 헌금을 하는데 헌금 하는 그 이상으로 기쁨이 넘치더라 이 말입니다. 큰 기쁨. 기쁨이 생겨야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나라장로교회’ 간판이 안돼있어요. 그런데 오늘 오다가 쳐다보니까, ‘나라 장로교회’ 처음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라’니까 한자로 국國 나라 국 자, 나라 전체가 장로교회가 된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장로교회. 그렇게 생각했어요. 맞아요? 그래서 이건 너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빼버리고 나라 장로교회,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정말 나라장로교회가 늘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넘치는데 숫자 몇 명, 꼬맹이들하고 몇 명 와도 하나하나가 주님께서 떠밀었다고 생각하세요. 왜냐면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돼야지, 인간의 교회되면요, 자꾸 서글퍼져요.(ㅜㅠ.ㅠ) 예? ‘아이구 교인들 꼬라지하고 교회 재정이 또 문 닫겠다.’ 이러면 자꾸 낙심이 되고 낙심이 되면 뭐든 억지로 돼버려요.
그러면 환난가운데 큰 기쁨. 고린도후서에 그런 말 아닙니까. 고린도후서 왜 있습니까? ‘지금 이대로 살고 있나? ’ 우리한테 확인하러 온 거예요. 당신네들은 이런 교회 맞아요? 지금 확인한다고 성경에 했는데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입니다’ 이렇게 나와 버리면 성경 안의 교회와 지금 우리 교회하고 안 되잖아요.
‘우리교회’가 백만 원 이상 계속 적자가 유지 되고. 나중에 천만 원까지 계속될지 모릅니다만 아무튼 얼마나 감사한지, ‘주여, 우리교회를 사랑하시는군요.’ 그래서 찬송 하나도 앞으로는 억지로 찬송 부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제 알도록 ‘참 즐거운 노래’가 재정이 어려울 때 참 즐거운 노래가 안 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외부적인 환경만 기대했을 뿐이지 내 속에 있는 이 말씀이, 복음이 주는 진짜 큰 기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깨닫는 그런 기회를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리라.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있다는 증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다른 증거가 아니고.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환난가운 데 큰 기쁨> <가난 가운데 큰 많은 연보>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이 모든 몸은, 네 몸은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다. 과거를 묻지 말고.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네 몸은 네 몸이 아니라는 확인케 하려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이 바쁜 시간에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어야 하는, 그래야 내 힘으로 내가 밥 먹고 사는 것이 상식화 되어 있고, 이게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는 가운데서 참된 교회 고린도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광야 같은 세상을 보내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지옥에 가지 않도록 저희들을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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