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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509-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2강자유게시판에베소서

20080509-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2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에베소서 제 12강 (이 근호목사, 2008년 5월 9일-b,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2:16-18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방금 읽은 대목에서 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원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보통 세상에서 죄라는 말은 ‘아,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내가 실수 했구나’라는 자기자책을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 원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상대가 있습니다.

원수라는 것은 ‘너는 우리 집안과 원수 집안이야’ 하든지 혹은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한 번 해보자’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저주하고 공격하고 밀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나를 해코지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내가 있고 상대방이 있는데 그 상대방을 적으로 삼고 밀치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죄 있다, 죄 있다 하는데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아이고,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구나’라는 말은 잘 안합니다. ‘아이고,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구나’라고 생각을 안 하고 ‘아이고, 내가 실수했고, 내가 잘못했고, 내가 바보였고, 내가 조금만 잘했으면,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사람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는 내 사정 나만 안다’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인간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 나가. 난 하나님하고 안 놀아. 나는 내 것만 있으면 돼. 누가 내 빵을 먹어?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을 해? 저리가!’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만든 겁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 드릴까요?’ 이것이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 드릴까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예,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제가 어떻게 따먹겠습니까?”

이렇게 나와 줘야 그것이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에 부합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람이 죄를 짓고 난 뒤에는 ‘나는 나다. 누가 감히 내 영역에 간섭하는가?’라고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좀 어렵지만 쉽게 하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우리의 몸이란 우리의 거처입니다. 내 몸이 나의 자리인데 이 자리가 하나님보시기에 원수의 거처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나만의 거처, 자리, 영역, 이것을 ‘단자’라고 하는데 나만의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 합니다. 사람은 나만이 절대화되는 자기만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국가도 그렇고 스포츠의 세계도 그런 것을 잘 보여줍니다. 롯데자이언트가 부산 팀이죠. 그 팀 응원한다고 ‘부산 갈매기’부르고 난리 납니다.

부산 사람들은 롯데프로야구팀이 경기를 하면 부산사직구장이 그득 찹니다. 부산갈매기를 부르면서 응원하는 동안은 너, 나가 없고 전부 하나고 한편입니다. 왜 가족을 사랑하느냐 하면 자기만의 영역이기에 가족을 사랑합니다. 내가 낳은 내 새끼, 내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철통같은 수비를 해서 외부에서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벽을 뚫고 들어옵니다.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6,37)고 나옵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왜 내 영역을 침범하느냐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개인적인 영역이란 없어야 됩니다.

하나님만이 거기서 우대를 받아야 되고 하나님만의 거처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원래 이 목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빵을 드시다가 갑자기 빵 속에서 쇳조각이 나오면 기분 좋아요, 나빠요? 기분 나쁘죠. 빵이라는 것은 내가 먹으면 입속에서 살살 녹아져야 되는데 갑자기 쇳조각이 나오면 먹을 수 없잖아요. 그러면 그 빵은 먹을 수 없는 빵이니까 갖다 버려야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이부자리가 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창문이 되고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옷걸이가 되고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자개농이 되고, 그처럼 모든 인간이란 하나님을 모실만한 가구 같은 배치물로서 인간을 만들어 놓았는데 사람들은 죄짓고 난 뒤에 그것을 자기거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입니다. 여기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웬 아저씨가 술을 먹고 자기 집에 떡 앉아 있습니다. “아저씨, 남의 집에 왜 와 있습니까?” 그 술 먹은 아저씨가 와서 “내 집이다!”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럴 때는 주거침입죄로 119에 신고해서 그 아저씨를 쫓아내야지요.

“아저씨, 이것은 아저씨 집이 아니고 내 집입니다.” 지금 그 일을 하나님이 우리보고 하는 겁니다. “이 웬수야, 이것은 네 집이 아니고 내 집이야. 네 몸은 네 집이 아니고 내가 거할 몸이야!”

강의를 새로 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안다고 할 때 일단 뭘 생각 하느냐 하면 내 거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혹시 도움받을 데 없는가 하고 두리번 거리다가 ‘옳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내 수입은 늘어나고 도둑놈도 지켜줄 테니까 내 거처는 아주 행복한 거처가 될 것이다,’

나의 거처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기도하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객이 바뀌었습니다. ‘이 거처는 제가 쫓겨나고 주님께서 거처해야 될 주님의 몸입니다’라고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있고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내가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주 비참하게 사셨습니다. 비참하게 사셨어도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민하고 걱정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참해도 마땅히 아버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면 그것으로 대만족 한 겁니다. 누가 나를 사용한다는 것, 누가 내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 대환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맘대로 사용해 주소서’가 아니라 ‘어느 놈이 내 것을 빼앗아 가?’ 하고 바짝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몸이라는 것이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좆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말을 따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마귀 말이라면 껌뻑 죽고 마귀의 말이라면 거기에 엎어지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님이라면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말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식으로 우리가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반대로 살아가니까 뭘 하더라도 내 것을 하나라도 더 챙기고 내 것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것을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흙에 속한 인간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만드는지 지금부터 그것을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주인 노릇하는 이 천한 몸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거처할 몸으로 전환시키는가?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여기 우리가 있는데 우리 안은 시커멓습니다.

안산에서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우리 몸안에 뱀이 한 열 마리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있는데 이런 말이 죄송합니다만 자기는 냄비에 돼지고기를 삶는다고 삶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까 뱀이 한 열두마리쯤 들어 있다고 하면 기겁을 하겠지요. 너무 엽기적인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라는 뚜껑을 열어보면 더 놀랍니다.

우리 안에 뱀이 열 댓마리,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귀신이 들어 있는 겁니다. 평생 가도록 들춰보면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공중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우리 안에 뱀이 들어 있습니다. 요즘 애들은 잘 모르는데 요충, 십이지장충 이런 것으로 합시다. 밥맛은 좀 떨어지겠지만 이런 것이 들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자기를 대속물로 주심으로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뱀을 노리고 마귀에게 잡히기 위해서 들어와 버립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예수님은 희생제물이 되어서 죽어야 되고 일단 우리 속에 들어와서는 누가 죽이는가? 우리가 죽이고 마귀가 죽이는 겁니다. 이 전체를 보면 누가 죽이는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죽이십니다.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였다. 이로서 세상은 끝났다. 하나님의 뜻은 더 이상 없고 남김없이 다 알려져 버렸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 예수님이죠,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외에 하나님은 다 엉터리 하나님입니다. 감사헌금하면 복준다, 사업이 잘된다는 것은 전부다 가짜 하나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남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남자를 죽였는데 우리 안에 들어와서 보면 누가 죽였다? 뱀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한 남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면 인간 안에서는 누가 이겼습니까? 인간이 승리했고 그 인간 배후의 악마가 승리했습니다.

언제까지? 삼일동안만. 삼일동안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동안 승리한 겁니다. 그것은 죽음의 승리, 죄의 승리, 율법의 승리, 뱀의 승리, 악마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삼일이 지난 새벽, 여명도 없던 캄캄한 밤, 어느 여자 분이 예수님의 시체를 얻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있어야 될 시체가 없었습니다. 한 돌 위에 웬 아저씨가 앉아 있다가 여자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여자여, 누구를 찾고 있나요?”

“여기 누워 있던 시체를 찾는데요?”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지고 전 세계를 심판해 버립니다.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면 그것은 산 것이 아니고 헛산 겁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율법의 심판에 대해서, 저주에 대해서 이미 살아나 버린 거예요. 이게 기관차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객차가 되기 위해서 그 살아나신 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딱 들어붙어 있는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우리 몸은 진짜 몸이 아니고 땅에 속한 흙에 불과하고 진짜 몸은 우리의 몸을 하늘의 형상 만드는 그 예수님의 몸이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새로운 형상의 몸이며 그 몸을 우리가 입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들이 쓸데없고 지어낸 것이라면 십자가도 지어낸 것입니다. 십자가가 지어낸 것이라면 제가 지금 하는 말들이 쓸데없고 지어낸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2000년 전에 한 남자가 죽었고 그 남자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면 방금 제가 한 그 이야기 말고 다른 진리는 없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이 교회는 기존의 한국교회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문화센터입니다. 젊은 사람들 불러 모아서 봉사하게 만들고 나이 많은 사람들 불러내서 교인 만들어서 문화센터 사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모릅니다. 그전에 절에 다녔던 심성을 그대로 가지고 절 같은 교회를 찾아 온 겁니다. 빌면 복 받고, 자기의 영역이 더욱도 확장되고 높아지고 성공하는 것, 끝까지 내 영역이 네 영역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높다는 그것을 자랑하고 싶고 자기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서 온 겁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그런 교회는 없습니다. 세상에, 예수 믿어서 내 영역이 확장된 그것을 복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야기 한 적이 없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불교라는 전통에 연결해서 이어붙인 객차처럼 기독교라는 이름의 절간을 또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그저 정성스럽게 빌면 복 받는 것, 자기 잘되기 위해서 하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새벽기도 하면 애들 좋은 대학에 가는 것, 그런 것뿐입니다. 거기서 말하는 천국은 다 거짓말입니다. 얼마 전 설교에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광주강의 마치고 난 뒤에 PD수첩을 보니까 피자재료에 들어가는 치즈가 있는데 몸에 해로운 모조치즈를 만들어서 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모조치즈는 고발하면서 모조 복음은 왜 고발 안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지도 못하고 천국 가지고 못하는 복음들, 그것은 왜 고발 안하느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반도체 칩처럼 심어 버립니다. 부활이 여기, 우리 몸 외부가 아니라 우리 몸 안에서 부활이 일어나게 만들어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은 마귀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율법의 모든 저주를 이겼다는 그 이김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대신 죽으심입니다.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시면 무엇이 부활되는가? 우리는 아직 흙에 속해 있어서 몸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엇이 부활되는가?

대속물의 의미, 대속물의 가치가 부활합니다. 악마한테 걸려서 맥도 못추고 흐지부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속과 대속과 속죄와 화목제물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다 이루었음을 부활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구속이라는 것은 값을 주고 샀다는 것이 완성되고 대속이란 대신 죽어서 완성되었다는 말이고 속죄란 죄 그 전체를 씻어준다는 말이고 화목이란 이제 너와 나는 한 몸, 같은 한통속이 되었다는 겁니다.

원수지간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용하시는 분이 어떻게 사용하시는가에 따라서 사용되고 안하고 하는 것이지 그릇이 깨끗하게 된다고 해서 사용을 더하고 덜 하는 그것은 아닙니다. 사용하시는 분이 사용하려다가 ‘아유, 더러워서 사용 못 하겠다’는 이런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이고 부활하신 분이 찾아오신다는 말은 죽은자인줄 알고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우리 힘으로 죄도 못 이기고 우리 힘으로 마귀도 못 이기고 우리 힘으로 율법을 못 지키는 것을 이미 아시고 그 자리에 자비와 사랑, 구속과 대속과 속죄와 화목의 가치를 담습니다.

여기 쟁반에 곰보빵 두 개와 카스테라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그릇에 무엇을 담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분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 그릇에 뭘 담든지간에 예수님의 구속과 대속과 속죄와 화목제물이 담겼다는 그 자체로 그 내용물이 그릇을 가치 있게 간주해 주는 겁니다.

거지인데 만약에 화목제물이 담겼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피, 용서하심의 피가 담겨 있기 때문에 거지는 천사에게 받들려서 천국에 갔어야 했고, 천국에 가면 그 거지를 시찰하면서 ‘봐, 내가 사랑으로 건져낸거야. 쟤도 봐, 내가 용서하니까 여기 왔잖아’라는 식으로 하나 하나 시찰하면서 모든 구석구석을 자신의 공로와 자신의 피의 은혜성을 드러내는 찬양을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거하시는 거처가 되는 겁니다.

이런 비밀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되도 않는 소리로 들리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없으면 제가 사기치는 겁니다. 노인들 불러 모아놓고 쇼하면서 3만원짜리 건강식품 가져다가 68만원에 팔아먹는 사기꾼같이 될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었다면 내가 하는 소리가 다 거짓말’이라고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더운데 금요일 날 직장 다녀와서 쉬어야 할 텐데 이 무슨 짓이며 이 얼마나 불쌍한 짓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안 죽었고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는 것은 다 놀이고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에베소서에 보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밖에 모르는 원수된 자,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받으셔서 이제는 하나님이 거하는 거처,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거처라는 것이 더 이상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제는 나의 거처가 나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점을 다 함께 즐거워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나저러나 이제는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그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면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인가? 주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입니다.

원수라는 것이 왜 생겼는가?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율법 때문에 생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줄 몰랐었는데 율법이 주어지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 것이 들통 났고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의도적으로 위배하는 불순종하는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율법을 폐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율법의 완성이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시는 분만 있으면 사랑이 성립이 됩니다. 부부의 사랑은 서로가 사랑해야 성립이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한쪽만 사랑해도 성립됩니다. 그게 구약의 아가서에 나옵니다. 아가(雅歌)란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인데 거기에 보면 남자가 여자를 죽자 사자 따라 다닙니다.

계속 따라다닙니다. 지난 오후설교에서 삼손의 여성행각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삼손은 아내를 사랑했는데 아내는 삼손을 필요로 했지 삼손을 사랑하지를 않았어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한쪽만 사랑하니까 그 여자가 삼손을 차버렸습니다. 자기 여자 아버지는 삼손을 미워했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기분 나빠 하는 것은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는 그것이 가장 기분 나쁩니다. 완전히 처가에서 자기를 가지고 논 겁니다. 삼손이 거기에 화가 나서 여우삼백마리 붙들어서 꼬리에 횃불 붙들어 매서 처갓집과 그 동네까지 전부 다 태워버립니다. 그것도 분에 안차서 나귀턱뼈로 천명이나 죽여 버립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일방적인 그것으로 그만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끝까지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자만 있으면 사랑의 대상은 사랑하는 자로부터 멀리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붙잡혀서 사랑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요.

그 사랑은 어느 정도 사랑하느냐 하면 죽어도 사랑합니다. 상대방이 죽어도 끝까지 따라붙어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지독한지 심지어 자기 목숨을 버리도록 사랑하잖아요. 세상에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 봤습니까? 말로는 사랑한다는 많이 있지만 자기 목숨을 버리도록 까지 사랑하는 사람 봤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 가끔씩 있습니다만 그런 것을 객기라고 합니다. 서울 철교에 올라가서 “선녀야! 네가 날 사랑안하면 나는 죽어버리련다!” 그때 선녀가 “죽어라. 나는 다른 사람 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다”고 하면 끝나버립니다. 인간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고 안 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의 목숨을 담아서라도 죽어가는 자기사랑의 대상을 다시 터뜨리면서 이끌어냅니다. 그게 바로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되어 있는 그런 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갑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고 싶어서 태어나게 만들어서 끝까지 사랑하셔서 끝까지 자기 품으로 데려가시는 그 일관된 경륜, 하나의 과정, 그것을 에베소서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3:9-11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를 예정하신 뜻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의논된 바가 있습니다. ‘누구누구를 만들어서 사랑하겠다’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그 인간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폭발시켜서 기어이 자기 사람으로 삼아서 천국에서 오직 주님 주신 사랑만 영원토록 찬양하도록 일괄적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진행에 하등의 차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내가 이 말씀을 못 지켰다고 자꾸 우왕좌왕 하면 마귀만 좋아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이룬 것을 흐지부지 하게 만들면 최고로 좋아 합니다. ‘봐라. 예수 믿어도 소용없잖아. 너 자신을 믿어야지. 예수를 왜 믿나?’하는데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꽂히게 되면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그 어떤 것도 안 끊어지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만큼 질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환란, 곤고, 핍박등이 오는 겁니다. “거봐! 안 끊어지잖아. 그치?” 자꾸 ‘네 안에 나 있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난처한 일을 자꾸 만듭니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자꾸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거봐. 네가 원망해도 불평해도 내 사랑은 그냥 있잖아. 내가 원망하면서 나에게 달려들어도 나는 내 십자가 사랑에서 너를 버리지 않는다니까!” 이게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시장 통에서 어린애를 데리고 가는데 그 애가 장난감 안 사준다고 엄마를 때리고 엄마를 발로 찹니다.

그래도 엄마는 애손을 단단히 쥐고 놓지 않습니다. ‘너 오늘 집에 가서 보자.’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얼마나 하나님의 정강이를 걷어찹니까? ‘이번 주에 교회 가나봐라. 내가 지금부터 예수를 믿으면 내가 개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걷어찹니까? ‘내가 예수 믿어놓고 받은 것이 뭐가 있는가? 빼앗기기만 했지 뭘 받았는가?’ 하면서 얼마나 원망했습니까?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면 십자가라는 것은 거저주신 생명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나의 능력, 나의 처소, 내 까치집 만든 그것은 결코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고 마귀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심판을 못 이기고 저주를 못 이기며 사망을 못 이깁니다. 여러분이 재산 한 60억되고 아파트 평수는 100평 되어 보세요. 행복할까요?

안 돼봐서 모르겠다고 하지만 상상해 보세요.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외부에 있는 아파트 평수가 문제가 아니고 나 자신이 늙어가고 있고 나 자신이 불안합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내 안의 내가 아무리 먹고 먹어도 더 먹고 싶고 채우고 채워도 또 채우고 싶은 내 안에 뱀이 열 마리쯤 들어 있는데 그 뱀을 어떻게 처리 합니까?

아무리 정결하고 살고 순수하게 테레사 수녀처럼 살아도 내 속에서 나오는 시기와 질투와 그런 저런 욕망들을 내가 한 번도 자제할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책의 제목이 ‘피’인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인생은 게임판이라는 겁니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무조건 남에게 안 지려고 한다는 겁니다.

게임에서 승리하려고 하는데 그 승리라는 게 끝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끝이 있으면 좋겠는데 끝도 없습니다. 야구선수가 3할 대를 치면 4할 대 치고 싶고 축구선수가 두골 넣었으면 한골 더 넣고 싶어요. ‘박지성이 뭐해. 한골 더 넣지’라고 합니다. 모든 죄가 어디서 나옵니까? 욕심에서 나옵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뭐가 됩니까? 사망이 됩니다. 이 세상에 안 죽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안 죽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뭐가 있다? 욕심이 있고 욕심이 있는 이상은 죄를 짓게 마련이고 그 죄가 사람을 죽이게 마련입니다. 어떤 인간도 욕심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물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의 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살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와! 예수님 멋쟁이다! 해보다 더 빛난다. 놀랍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예수님께서 잠깐 보여줬습니다. 거기에 예수님만 빛난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영이라고 합니다. 영이란 말은 흐물흐물 수증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영광을 입은 것을 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하늘의 영광을 입은 겁니다. 우리는 곧 얼마 안 있어서 죽고 나면 하늘의 영광을 곧 입습니다. 이미 죽은 모세와 엘리야는 하늘의 영광을 입었거든요.

그걸 보고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저 우리 같은 인간들은 저 하늘의 영광이 손상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저 초막 셋을 지어서 세분을 모시겠습니다’라고 나올 때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아, 신난다. 저들이 그래도 우리 영광 알아주는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는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가 죽은 것이 그렇게 중요한데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별로 안중요합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다. 성경전체는 예수님이 자기 몸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는 그것이 전체의 주제인데, 우리의 평소 생활은 내 생활 여건이 더 단단해지고 내 구역, 내 거처가 더 확대되어서 남보다 더 크게 되는 것, 여기에 24시간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남의 자식 같으면 그렇게 키우겠습니까? 내 것과 네 것을 다 구분합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이제부터 성령께서 집을 지을 때 어떻게 하는지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 왔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목숨을 빼앗고 목숨을 부활로 주셨습니다.

그냥 있는 목숨을 주신 것이 아니고 있는 목숨을 빼앗아 버리고, 부활의 목숨을 하나님으로터 받아서 예수님께 그 목숨을 주심으로 예수님을 살려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빼앗음과 거저 줌을 똑같이 우리에게 되풀이 하십니다.

우리는 나의 것, 나의 거처, 안경, 이빨, 전부 나의 것, 내 책(이 뒤에 써 놓았어요. 우리교회 이 근호목사), 우리는 내 목숨부터 시작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빼앗아 가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성령의 일입니다.

내 기대, 포부, 희망, 예상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겁니다. 빼앗아 가면 그 빈자리에 예수님의 뜻을 거저 주십니다. 돈 받고 주거나 기도 받고 주시는 것이 아니고 거저 빼앗고 거저 주시는 겁니다. 빼앗을 때는 나의 것을 빼앗아버리고 주실 때는 주님의 것으로 주십니다.

여러분 집에 자녀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자녀를 키울 때 내 자식이라는 생각을 빼앗아 버리고 주님이 거저 주신 자녀라는 식으로 그 생각을 계속해서 교환시킵니다. 그러면 내 것일때와 주님의 것일때와의 차이점이 뭡니까? 내 것일 경우에는 세상 근심에 푹 잠깁니다.

‘내 자녀를 어떻게 키우지? 내 아파트 평수를 어떻게 넓히지? 내 돈 지갑을 어떻게 지키지? 내 빌딩이 지금 5층인데 어떻게 10층으로 높이지? 그래야 임대수입이 더 많아질 것인데.’ 항상 내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키우느냐가 근심거리가 됩니다. 학생의 성적이 지금 10등이라면 그 이상으로 키우고 싶어 합니다. 항상 내 성적이기에 내가 키우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빼앗아 갑니다. 빼앗아 가면서 무엇도 함께 빼앗아 갑니까? ‘어떻게 키우자’하는 나의 포부나 나의 기대도 함께 빼앗아 가버립니다. 빼앗아 가고 무엇을 주느냐 하면 ‘이번에 학급에서 10등을 했는데 그것도 내 수준에서는 참 잘한거지. 웬 은혜인지.’ 집에 아내가 있다면 ‘세상에 웬 은혜인지 내가 이런 아내를 만날 수가 있나?’

남편이 있다면 ‘이런 남편이 세상에 또 없을 거야. 다른 사람은 술먹고 두 번이나 때릴때 나는 한번밖에 안 때리니 이런 남편이 어디 있겠어.’ 전부 다 거저주시는 것, 내 수준에 이런 남편, 이런 아내, 이런 교회가 또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목사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내가 하는 이런 설교에 교인이 한명이라도 있는 것이 고맙다.’ 다 가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어렵다.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다 가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안가고 버티고 있는 것을 보니까 세상에 이런 은혜가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죠.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는 그 생활을 성령을 통해서 되풀이 하는 겁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까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는다고 했죠, 그러니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아 버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채우시는 일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그것이 “이미 너는 저주를 이겼고 율법을 이겼고 사망을 이겼고 죄를 이겼고 다 이긴거야. 네가 걱정 안해도 이미 결론은 다 나와 있다. 왜 자꾸 산자가 걱정해. 왜 산자가 더 살려고 걱정하느냐. 이미 사는 것도 은혜인줄 모르고. 네가 행함으로 살았느냐? 은혜로 살아 놓고서. 앞으로 살 것도 행함으로 살 것이 아니고 은혜로 살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 6:30) ‘내일 시장에서 팔리우는 참새도 하나님께서 기르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친히 기르시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왜 자꾸 하나님이 길렀다고 생각 안하고 네 힘으로 길렀다고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똑같은 결론이라도 자꾸 사고방식이 내 것이 되면 세상 근심을 사서 합니다. 이 세상에 근심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에 이르는 근심이 있고 또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상 근심입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고 시작되는 근심, 이것은 욕심에 욕심을 더 키우도록 만들어서 죄를 낳게 만들고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죄라는 것은 아까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원수지간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의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받을 자와 미움 받을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 탁자를 밑에서 흔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흔들 때,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듣고도 그래도 내 것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나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이 불신자이면 떨어질 것이고, ‘아하, 내 것이 아니구나. 주님의 것이 되기 위해서 내가 이만큼 키워 왔구나’라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이 사랑받기로 예정된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 목사지만 집에서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교회 교인 몇 명 안 되도 그 교인들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교인이라고 생각해도.

교회 나오면 복 준다는 소리를 하지 않거든요. 그들이 자기 영역을 더 키우겠다는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에 나올 텐데 그 노림수에 대해서 한마디도 좋은 쪽으로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에 안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해도 노동의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자기 것을 빼앗기려고 교회 오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빼앗기기 위해서 오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 왔으면 뭔가를 얻어내야지 있는 것도 빼앗기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으며 그런 교회를 왜 갑니까? 제가 생각해봐도 그런 교회는 안 갈 공산이 큽니다. 그래서 주일 아침이 되면 ‘주여, 오늘도 포기했습니다. 한명도 안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가 보면 연세가 85세 되신 분, 또 제일 먼데 사는 분들이 제일 먼저 와 계십니다.

요새 기름 값이 얼마나 비쌉니까? 수십키로씩 달려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제일 집 가까운 분들, 걸어서 오는 분들이 오히려 늦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겁이 나지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제 예상은 한명도 안 오는 것이 제 예상이거든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뭘 듣겠다고, 뭘 듣겠다고 옵니까?

그런 현상들이 우리 의존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의 있는 금요일마다 그런 것을 느낍니다. ‘안 올 것이다. 빵 때문에 온다? 빵은 아무데서나 사먹으면 그만이고 안 올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이게 하시고 이게 바로 주께서 사랑하신 거처, 교회입니다. 우리는 흙이고 흙은 몸이 아닙니다. 몸은 뭐 밖에 없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그 한 몸을 주님께서 유일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간주하시고 그게 바로 성전이고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비록 몸은 대구와 서울 이렇게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 사랑받은 자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자로서 모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살았고 저주와 심판에서 면제되고 예수님의 대속물의 사랑이 있사오니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것은 빼앗아 주시고 주님의 것으로 다시 채워지는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매일 같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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