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3: 6- 9 (예수님의 고초)
사 53: 6- 9 (예수님의 고초)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41)
본문 : 이사야 53장 6- 9절
제목 : 예수님의 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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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06-11 20:57
예수님의 고초
2008년 6월 11일 본문 말씀: 이사야 53:6-9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마음가짐은 자신의 내면의 평화를 얻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평정을 되찾고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가 되는 방향으로 세상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됩니다. 즉 자기 자신이 착한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도 착한 양반일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신앙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상은 그렇게 고요하거나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도리어 과격하고 거칩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돌리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는 광경을 자아내는 식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그런 좋으신 하나님 상이 아니라 도리어 그나마도 유지했던 고요함과 평화마저 깨뜨려버리는 그런 하나님상으로 등장합니다.
도살장에 질질 끌려가는 몰골을 누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늘 봐도 부자연스럽고 난폭하고 폭력적이고 혼란스럽습니다. 양을 잡아 죽이고 그리고 죽기 위해 끌려가는 난폭한 모습은 우리의 마음의 평정을 깨트리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만약 참으로 그 끌려가시는 분이 참 하나님이시라면, 그동안 우리는 일방적으로 엉뚱한 하나님을 상상하며 살아온 겁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고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허상을 신으로 알고 온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오직 ‘끌려가는 불쌍한 양’의 모습 이외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난폭한 상황이 황당하고 난처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만큼 우리는 평소에 줄 곧 우리 생각만 하고 산 셈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 분의 처참한 몰골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졌기에 가야할 코스임을 감히 상상조차 하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염두에 둔 구원자란 항상 대단한 영웅의 자태를 휘감고 나타난다고 믿어왔습니다. 시편 89편에 보면, 메시야의 하시는 일이 나오는데 그 일이란 다름 아닌 원수를 박멸하는 일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니 자연적으로 사람들은 다윗의 큰 승리를 회상하기 마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치고 작은 돌멩이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일거에 무너뜨린 그 통쾌한 승리를 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대단한 조그마한 다윗과 같은 맥락으로 범세계적이고 범우주적인 큰 승리를 안겨다 줄 위인이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원수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보다 힘에 의해서 우위에 있었고 이스라엘은 늘 힘이 딸리기에 그들의 종처럼 무시와 핍박을 받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대하고 대망하는 메시야란 결코 그 어느 이방민족에게도 뒤지지 않는 큰 힘을 쓸 수 있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오시는 메시야는 인간들이 기대한 것과 완전히 딴판입니다. 힘을 쓰기는커녕 모든 힘을 다 뺀 그런 타입의 메시야가 오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메시야를 이스라엘을 막강한 원수의 힘 속에서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진정한 비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40:5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제안을 합니다. 벌 받기 위해 바벨론 나라에 포로 잡혀가는 저 유다 백성에 나와 같이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너는 빠질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래놓고서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빠져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친히 벌을 내리시는 그 형벌의 현장에 하나님께서 합류하여 그 저주를 다 받으시고 그 저주의 본질을 드러내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 홀로 하실 일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빠져야 될 일이었습니다. ‘배제의 원리’를 적용시키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6절에, 우리들은 양같아서 다 빠지고 맙니다. 정작 죄지은 양들이 빠진 그 현상에 하나님만이 남아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질질 도살장으로 끌려가셔야 하는 겁니다.
이처럼 자신이 내리시는 형벌을 하나님 자신이 받는다는 그런 하나님관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나올 수 없는 하나님 모습입니다. 이것이 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왜 저주를 친히 받으셔야 할까요? 이점에 대해서 선지자 요나의 경우를 통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지 않는 고장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탄 배를 겨냥해서 큰 풍랑이 일어나 같이 동선한 애매한 다른 사람까지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은 각자 자신의 신들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배 밑에서 한참 잠자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이 섬기는 신을 불러대로 풍랑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선장은 동선한 사람 중에서 자신들의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자가 바로 요나 선지자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존의 모든 신이 무용지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을 숨기는 것을 포기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참된 하나님은 거칠게 우리의 앞길을 막아버립니다. 우리는 순하고 자연스럽고 착한 신으로 찾아오기를 원하지만 참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나가 산 채로 죽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밝혀집니다. 요나는 죽음의 끝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우주의 탄생의 원리와 근원이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즉 이 우주의 생명과 죽음은 오직 죽음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봐야 하는 내용입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신상의 고요함을 챙길 수 없는 자입니다. 그 무서운 죽음이 샘솟는 곳이 어딘지 그 비밀의 장소를 알아야만 하는 자였습니다.
죽음이 나오는 곳이 곧 생명도 함께 나온다는 것을 요나는 발견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언약이 실현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그곳이 바로 죄용서와 거룩과 의가 나오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지심을 요나의 기적에 비유했습니다. 즉 죽음과 생명은 오직 예수님의 자신의 피에서 나옵니다.
피가 있는 자, 곧 용서받은 자는 생명이요 그렇지 않는 자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예수님이 아시기에 이미 죄에서 승리한 자로서 과감하게 희생양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죄용서함을 받은 성도는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이미 생명을 얻었기에 평생을 살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슨 죄 때문에 그 십자가 길을 가셔야만 했는지 우리도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신의 가치를 우리가 모독하지 말고 이미 승리자됨의 자세를 보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