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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603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칭의와 화해자유게시판로마서

20080603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칭의와 화해

이름 : 한윤범(IP:59.6.189.254)

20080603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칭의와 화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여기 칭의는 법률적인 의미인 것이다. 하는 이 대목에서 새로운 번역도 그래 돼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보면 래드가 테일러라 하는 사람과 스나이드 이 사람에 대해서 상당히 의식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노만 스나이드와 테일러의 이야기, 테일러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 또는 센다이, 뭐 히드렘 이런 분은 처음 들어봐.

이런 사람들이 로마서 칭의 이론을 상당히 의식하죠. 아까 이야기한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최근에 자기 시대의 사람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래드가 자꾸 의식하는 이 사람들이 무슨 칭의를 이야기했는지 그걸 살펴봅시다. 이 책에 나온 대로. 사람들이 책을 모르니까. 래드가 이야기한 대로 따라가 봅시다.

칭의는 법률적인 것이다. 그 중간에 가보면, 오래전에 센다이와 히드렘은 그들의 뛰어난 로마서 주석에서 논리적인 반대를 제기했다. 뭐냐 하면, 칭의의 법률적인 면을 인정하면서 칭의를 허구라 견주었다. 칭의는 허구다. 어째서 허구냐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믿는 자가 자기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간주되고] 시비는 거는 게 의로운 게 아니고, 의로운 것처럼 간주되는 것이지, 의는 아니다. 라는 주장을 센다이와 히드렘이 한 거예요. 의로운 것처럼 간주된다.

실제로 사람은 의롭지 않으며 오히려 불의하며, 로마서 4장 5절에 의해서. 아까 4장 5절 봤지요. 뭡니까?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한다. 이 대목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법부터가 하나님은 사실 그가 불경건할 때 의로운 사람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활은 그 기초부터 허구에 세워졌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이 누구냐? 테일러라는 사람이 반대하고 나섰어요. 의가 허구적인 것을 부인하고 실제로 전가된 의란 입장에서 칭의 교리를 해석한다. 근데 이게 또 문제에요. ‘전가된 의’ 이거 또 시비 거는 사람 또 있어요. 래드도 약간 시비 거는데. 전가된 의, 전가됐다는 것은 이동했다는 거죠. 저쪽 것인데 이쪽 걸로 옮겼기 때문에 허구가 아니고, 실제로 의란 겁니다. 하지만 전가된 의에요. 전가된 의는 성경신학자들이 주장한 게 아니고, 오래전부터 이미 조직신학자들이 주장했던 건데 성경신학자들이 조직신학자 주장에 동의하는 거죠.

[의가 죄인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은 겁자에게 용기를, 바보에게 지혜를 전가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인하여 한 사람이 의롭다 여김 받았다면 그가 절실한 의미로 의롭기 때문이지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의롭기 때문에는 아니어야 한다. 하는 것이 테일러의 주장입니다. 상당히 갑자기 테일러가 복잡한 문제로 이끌지요. 이런 주장이 왜 복잡하냐 하면, 성경 구절을 여러 가지 칭의에 대한 구절을 다 끌어 모으면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아서 복잡해지는 겁니다.

그는 말하기를 바울의 사상에서 한 사람이 의롭게 여기심을 받을 때에 그는 영적인 동향으로 그는 더 이상 불경한 자나 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칭하는 더 타당한 의미는 그는 참으로 의인이다. 테일러의 이 말을 그는 비록 완전히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마음과 의향으로 의롭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매 그렇게 하여 우리 안에 우리가 자랑할 수 없는 의로운 마음을 창조하신다. 라는 것이 테일러의

여기에 대해서 테일러가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들어봅시다. 테일러 앞에 뭐가 있었어요. 센다이. 일본사람 같아. 현대를 현다이 하지요. 센다이가 뭐라고 합니까? 칭의라 하는 것은 허구다. 테일러는 허구가 아니고 실제로 우리가 의인이다. 여기에 반대한 사람이 뭐냐? 노만 스나이드. 스나이드는 말하기를 테일러가 칭의를 법률적 의의 영역에서 제거할 때 충분히 고찰하지 못했다. 스나이드가 칭의가 전가된 의와는 아무 관계없다는 데서 데일러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테일러가 의로운 마음의 전달을 칭의로 해석하는 혼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을 전달하는 것 하고 의롭다고 하는 것 하고 같은 게 아닌데 그만 그걸 같이 봤다는데서 지금 테일러가 오해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뒤의 말이 더 어렵습니다. 스나이드는 칭의와는 관계없으며 의를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한다. 개혁신학의 견해와 테일러의 견해는 둘 다 하나님의 구원의 요건을 어떤 종류의 의를 요구하셨기에 틀림없다고 가정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상당히 문제가 어려운데

뭐냐 하면, 여기서 갑자기 노만 스나이드는 테일러는 고발하는 정도가 아니고 뭡니까? 개혁주의신학의 칭의 개념을 공격하고 잇지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어떤 의를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 잘못이라는 거예요. 죄인에게 하나님이 와서 어이, 이근호. 예. 의 내놔라. 없는데요. 죽을래. 이렇게 요구했다는 거예요. 없지. 없으면 내 것 줄까? 의 부어서 의 내놔라. 여기 있습니다. 옳지. 됐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요구했다는 뜻에서 없는 자기 백성에게 없는 의를 줘가면서 요구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스나이드는 말하기를 의는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근호를 구원하려고 하는데 의가 없어서 못하고 있다가 자기 것 줘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에 의해서 생겨버린 것이 뭐냐? 칭의라는 거예요. 너는 종말에 이미 법정에서 의인으로 됐다. 이거는 뭔가 쓰나미처럼 해일이 밀려왔는데 배가 산으로 막 간 거예요. 뭔가 밀려왔기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간 거예요. 뭐가 밀려왔기 때문에 우리가 졸지에 의인으로 선언 받은 것이다. 라는 노만 스나이드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이건 조직신학하고 또 다르지요. 조직신학에서 주장하는 전가된 의 그런 개념을 다 부셔버리지요. 의는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그게 어디하고 연관되느냐 하면, 이런 게 좀 어려운데. 이게 뭐냐? 그래 돼버리면 노만 스나이드에 있어서 칭의 다음에 화해가 아니고, 뭐부터 먼접니까? 화해가 먼저고 화해결과로써 칭의가 되는 거예요.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한 거예요.

화해가 뭡니까? 우린 이제 좋은 관계다. 비록 네가 나를 원수라고 보지만 원수라는 것은 좋은 관계로 해소돼야 된다. 네가 나쁜 짓한다고 저주하고 이런 일은 없다. 왜? 먼저 화해를 제시한 분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제시한 화해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그 증거가 뭐냐? 화목제물이라 하지요. 고린도후서 5장 19절,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그냥 제물이 아니고 화목제물로 화해하겠다는 의사로 넌 나하고 이제는 좋은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로 화목제물 주시고, 다시는 저의 죄를 저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것, 이게 화해라고 본 겁니다.

사도바울은 구약에 나오는 제사에서 화목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서 다 이뤘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또 복잡해져요.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그렇게 했느냐? 다시 말해서 화해가 ‘주관적’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주관적이란 말이 더 어렵지요. 화해가 주관적이냐, 아니면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면 어떻고, 객관적이면 어떠냐? 문제 또 나오겠지요.

주관적이면 개인적인 감정문제겠지만 객관적이면 역사적이 돼요. 그래서 에베소서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화해했다 할 때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갑자기 개인적인 사적인 감정이 등장하는 게 아니고 갑자기 뭐냐 하면,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막혔던 담이 헐어지니까 이거는 주관적이 아니고 이건 역사적이죠. 역사적으로 유대인, 이방인 차별이 없지요. 화목제물로 줬는데 그걸로 생긴 여파가 뭐냐 하면, 율법이 폐해버려요.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있어요. 사도바울이 글 쓸 때 어렵게 썼어요. 뭐냐 하면, 율법을 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목이 되고 십자가에서 이제는 화평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화평의 하나님이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 십자가 안에서 화평이라 했거든요. 이게 주관적이 아니고 개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이게 뭐라고요? 역사적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문제다 이 말입니다. 나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구원받았다, 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하나님이 세상 자체를 나만 다루는 게 아니고 세상 전체를 재편하려고 하고 하나의 구조를 다루고 있는 입장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려운 말이 들어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뭐 됐다?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 배후에 누가 있고? 진짜 참 하나님이 있고, 이방인 배후에는 누가 있고? 악마가 있잖아요. 결국은 하나님 편에 속한 사람과 이방인 편에 속한 사람이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거는 어디 하나님하고 어디 악마하고 같이 화목 됩니까? 원수지요.

원수를 철폐했다고 이야기하면 될 텐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을 폐함으로써 없애고 찢어버림으로써 이제 원수지간이 서로 유대인이 이방인이 화목 됐거든요. 그러면 율법은 왜 끼어들었느냐 말이죠. 율법이 끼어든 목적이 뭐냔 말이죠. 율법이 끼어든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원수 맞다, 원수 확실함 이걸 확정짓기 위해서 율법이 끼어들어야 되고, 율법이 안 끼어들면 결국은 인간은 거기서, 거기서 똑같은 존재라고 드러날 뿐이죠. 참 논리가 무척 어렵지요.

율법이 안 끼어들면 지가 십계명 받은 놈이야? 나와 똑같지. 이래 될 수밖에 없는데 율법이 끼어드는 순간 저쪽은 우리의 원수고, 저쪽은 봐서 우리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근데 서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수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로가 달아서가 아니라 배후에 계신 분이 달라서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율법을 이루어서 원수가 해소됩니까, 율법을 폐해서 원수가 됩니까? 왜 사도바울에서는, 마태복음에 보면 뭐라 돼있어요? 예수님께서 5장에서 마태복음 산상설교에서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려 함이 아니고 온전케 함이라. 이게 유대적인 사고방식 가지고 해석하면 이래 돼요. 내가 율법의 미진한 것을 다 채우려 함이니. 이래 돼있어요. 유대주의를 연구한 사람이 마태복음 해석에 보면 그래 나옵니다.

미진한 보충될 것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온 것이지 완전케, 온전케 같은 뜻이에요. 이만큼 찼는데 약간만 차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에서 해석하면 차는 게 아니고, 율법 자체가 엉뚱한 길로 간 것을 바른 길로 가는 거죠. 한쪽이 미진한 것을 채워서 완성이 아니고, 방향 자체가 성질 자체가 다른 성질을 이쪽에서 보면 옳은 성질로 바꾸는 거죠. 율법이 율법 값을 하게 하는 거고,

이쪽은 뭐냐? 양적인 개념이죠. 양적으로 모자란 부분을 마저 채워서 미진한 걸 채워서 완성되고 양적인 개념의 완성입니까? 아니면 질적으로 율법 자체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제대로 보려 하면 율법은 이렇게 쓰여져야 율법이다, 라고 질적인 차이냐 말이죠. 둘 중에 어느 것이 온전을 위해서 오셨느냐 하는 그 문제가 생긴다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 산상설교 듣고 오해했잖아요. 몰랐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 첨 봤다. 하지만 그 사람 속에는 유대인 속에는 뭡니까? 양적으로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걸 마저 채웠구나 하는 사람만 있었지, 그 율법의 그러니까 뭐라 하느냐 하면, 열심히 따라 붙으면 언젠가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저 채울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산상설교 내용이 그래 되는 겁니다. 뭐라고 돼있어요? 조금만 노력하면 된단 식으로 된다고요. 산상설교 내용이 그런 식으로 돼있어요. 얼른 보면.

네가 간음 안 했어, 바람 안 피웠어? 그것 가지고 양적으로 모라라. 그럼 뭐해야 됩니까? 마음속으로 간음 안 해야 온전히 다 채워. 라는 식으로 예수님이 그렇게 설명했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문자적으로 본 사람은 자기가 양적인 의가 모자람으로 여겼는데 거기에 마침 예수님이 동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이죠.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어디 못 간다? 천국에 못 간다. 그러니까 야, 이거 우리는 바리새인을 추월하고 이제는 예수님이 원하는 것까지 올라서면 우린 구원받겠구나. 하는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말씀이 산상설교가 되는 겁니다.

또 있지요. 뭐냐 하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갈 것이 아니고, 내가 이야기한 산상설교대로 다 지키지 아니하면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마지막에 무너져 내린다고. 그러니까 이 말은 산상설교처럼 다 해야 우리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되는 거예요. 그 반석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의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산상설교의 문자대로 보면 예수님의 복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내가 그 산상설교를 다 지켜야 반석이 되는 해석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그 해석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해석을 듣고 요시, 앞으로 열심히 더 해야지. 이런 생각을 낳게 만들어요. 제자들에게.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하고 난 뒤에 아무 말씀 지킬 가능성 전혀 없는 문둥병자가 공짜로 구원받잖아요. 그래 놓고 하는 말이 내가 온 것은 너희 죄를 대신 짊어지려 함이라. 이사야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할 때 그들은 또다시 헷갈리는 거예요.

산상설교 다 지켜서 되는 게 아니고, 뭔가 산상설교 율법대로 나 지켰습니다. 하는 나 자신을 철거해야 될 대상으로 뭔가 묻혀서 율법이 없어지면서 같이 묻혀서 날아가야 될 것이 바로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내 마음도 날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알아야 됩니다. 그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러면 안 됩니다. 죽으면 안 됩니다. 하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 자기를 부인하라. 실컷 삼년 동안 들은 것도 자기를 부인해야 돼요.

그런 점을 래드는 고려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조금 있다 설명해드릴게요. 진짜 의가 뭔지를. 지금 우리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그들이 어떤 식으로 칭의에 접근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지.

이거 이야기해봅시다. 지금 유다와 이방인들이 율법 때문에 원수가 된 거예요. 율법이 없었으면 원수가 아닌데 지나 개나 똑같은 인간인데 율법이 들어감으로써 원수가 됐는데, 율법을 폐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화목케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할 때 이층이 아니고 같은 일층에서 이게 화목 된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층에서 이루어져요. 일층이 아니고 이층에서 다른 층에서 이뤄져요. 다른 층에는 율법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폐지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이장우 목사님, 나하고 있는데 층이 가려지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이니까 모르는 겁니다. 이걸 철폐해버리니까 보이잖아요. 그런데 주님 뜻은 뭐냐, 사도바울의 뜻은 뭐냐? 이래 보는 것은 옛날 보는 것과 똑같이 봐서 율법이 있으나마나라 이 말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그러니까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율법이 철폐되면, 철폐되니까 너도 살았고 나도 살았고. 유대인들이 뭐라 합니까? 나는 살았는데 이방인들은 개구나. 하는 것이 율법이 철폐되니까 둘 다 죽어야 될 마땅한 저주받은 인간이란 말이죠. 그럼 어디 가야? 이층에 올라가야 돼요. 이층에 올라가니까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주님의 창조물, 주님이 만든 피조물로써 둘이 구분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신학자들은 자꾸 뭘 생각하느냐 하면, 철폐됐다는 아래층, 일층만 생각해서 거봐, 이방인, 유대인들 율법 철폐하면 똑같잖아. 예전으로 되돌아가요. 율법은 괜히 들어갔다가 괜히 빠져나온 거야. 그 사람들 이론에 의하면.

자기가 죄인 됨에 대해서 똑같다는 뜻인데, 역시 하나님은 날 구원해줘야 돼. 라는 여전히 자기 입장에서 옹호하면서 똑같데. 이방인들도 이제는 그렇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우리를 구원해야지. 이방인들이 유대인 흉내 내는 기라. 둘 다 죽어 마땅하면 저주 받아 마땅하며 죄인이라는 이래 생각하는 게 아니고, 괜히 율법 들어갔다가 괜히 빠져.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의 율법이 가입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 받게 함이라.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율법은 우리끼리 사이좋게 지낸다. 사이좋게 지내는 걸 화목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게 화목이 아니에요. 그럼 뭐냐? 이제는 하나님이 이래 봅시다.

래드가 힌트 준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 지음 받은 거예요. 우리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구원하심을 담아놓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된 겁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주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해서 재료로 뽑힌 거예요.

이게 미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스나이드 이야기부터 먼저 하고 가봅시다. 노만 스나이드가 의는 구원의 결과지 구원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이래 나옵니다. 그 다음에 그 뒤에 쭉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스나이드는 말하기를 실제적인 의든지 덮어쓰는 의든지 혹은 전가된 의든지] 세 가지 다 구분시키고 있지요. 칭의 이론이 복잡합니다. 이만큼. 개신교 역사 오백 년 역사 동안에 칭의 이론이 굉장히 복잡해요. 그 다음 또 한 가지 윤리적인 의든지. 이것을 전부다 구원에 필요한 조건이라면 이건 엉터리다 이 말이죠. 구원에 이런 의가 있어야 구원받는다면 다 엉터리다 이 말이죠.

그래서 배심원제도라 하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스나이드는. [실상 배심원이라는 관념은 그 자체가 성경적인 개념을 배제한 현대적 사상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의로우시며 거룩한 재판장이며] 그런데 스나이드의 문제점은 뭐냐? 스나이드는 의를 마치 하나님 자신도 추종하는 하나님 외부에 있는 어떤 요청인 것처럼 착각한다. 이게 래드가 스나이드를 공격하는 겁니다.

스나이드가 뭐케요? 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게 스나이드고, 래드는 뭐라고 공격하느냐 하면, 그래 되면 하나님보다 뭐가 위에 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보다 위에 있는 그거는 모순이 있는데 그거는 무엇에 어긋나느냐? 개신교 전체의 신론에 어긋나다 이래 보는 거예요. 하나님 속성에 어긋난다. 래드가 주장하는 거예요.

하나님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의가 있지, 하나님이 어떻게 의가 먼저고 하나님도 그 의에 복종하는 그런 존재로써 하나님을 전락시키느냐 이 말입니다. 래드가 스나이드를 공격하기를 반대하기를.

그래서 래드는 이야기하기를 법적인 것이 있어야 된다. 법적인 배심원제도가 현대사상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법적인 것이 분명히 있어야 된다. 이래 보는 거예요. 김세윤 같은 경우에는 칭의를 이래 보지요. 사도바울이 칭의란 용어를 쓴 것은 법적인 용언데 그건 그 당시에 로마에 로마서가 뭡니까? 로마서가 로마인들에게 로마인들은 모든 체제가 법적인 체제 아닙니까? 거기에 합당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렇게 되면 김세윤 교수는 어디에 해당됩니까? 김세윤 교수의 이론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슈바이처 그 다음에 사람에 해당되죠. 그러니까 이게 칭의가 중심 분야가 아니고, 다만 유대주의와 대항하기 위해서. 왜냐? 로마의 용어를 사용했다는 말은 이게 실제 중심에 핵심사상은 아니지만 전도용으로써 목회용으로써 거기에 해당되겠지요.

그래서 그 뒤에 래드가 쭉 비판해가면서 아까 이야기한 칭의 있잖아요. 그걸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자기 말이 맞다 이 말이죠. 칭의라는 것은 그러니까 래드가 한 중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아까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지요. 칭의로 멈추면 안 되고 실제로 우리의 마음에 변화까지 봐야 칭의다. 이러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래드는 강력히 반대하죠. 왜 반대하느냐 하면, 칭의의 반대말은 ‘정죄’가 되죠. 여기서 어려운 것 하나 해봅시다.

정죄라는 것이 논리가 이래요. 칭의는 법적인 칭의가 아니고. 실제로 우리 마음이 의인처럼 바른 행동이 나와야 그게 의다 이래 하거든요. 현재 성화론자가 이래 주장하잖아요.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게 참 옳은 것 같아요. 네가 의 안에서 행하려 함이라. 로마서 6장 나오지요. 네가 의의 종으로써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닌데 어찌 거하리요. 이제는 뭐다? 네가 하나님의 의의 종으로써 의를 행해서 선한 열매를 맺게 함이라. 할 때는 이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칭의란 것이 법적인 것이 아니고 어떤 심판적 선언이 아니라 똑바로 해 마. 하는 그런 것까지 요구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의 걱정해야 됩니다.

그런데 칭의의 반대말이 정죄라는 것을 개념 해보면 이 이론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정죄란 뭡니까? 죄에 대해서 너는 죄라고 정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정죄라는 것이 너 한번 행세해 보고 나쁜 짓하면 정죄한다. 이게 정죄 아니잖아요. 정죄가 뭐냐 하면,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뭐 된다? 죄인으로 정죄 아닙니까? 정죄 당했다고 해서 계속 나쁜 짓해야 된다는 법이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죄인과 함께 들어올 때 예수님이 간음죄, 모든 죄 다 지어야 됩니까? 모든 걸 지어야 그때 비로소 십자가 질만 합니까? 아이고, 십계명 가운데 다 어겨야 돼. 어겨야 비로소 나는 죄인이라고 여겨지고 죄 있는 육신의 몸이 되고, 죄 있는 육신의 입장에서 십자가에 올라가야 된다. 이렇게 하십니까?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세례요한한테 세례받는 그 순간부터 이미 죄인이 돼버렸어. 정죄함이 돼버렸어요. 죄 안 짓더라도 죄 아래 있는 거예요. 죄 아래 들어왔다 이 말이죠.

사실 그게 신비에요. 그 논리가 어려워요. 죄 아래 들어왔을 때 예수님의 지정의 가운데 어느 부분이 아래 들어왔느냐? 그 문제가 또 나온다고. 육신과 영혼과 혼 어느 부분이 또 죄 아래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영은 안 들어가고 혼과 육만 들어가면 그것도 문제가 돼요. 삼분설에서 세상에 온전히 죄인 돼야지 영은 빠지고 혼과 육만 죄인 되는 그런 수는 어디 있어요, 또.

보통 벌콥에서는 뭐라고 제안합니까? 예수님께서 영과 혼은 온전한데 뭐가 문제다? 육이 문제가 돼서 배고프고 눈물 흘리고 그거는 하나님답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영과 혼에서 두 가지 빠지는 게 돼요. 빠지면 아예 사람을 세 가지로 나누지 말아야 됩니다. 그게 문제가 된다고. 조직신학에서. 이 문제가 되는 이것을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일반교인들도 그런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을 때 목사가 거기에 대해서 상담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래드가 이런 것은 옳은 거예요. 칭의는 칭의대로 하고, 그 다음에 성품에 대해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걸로 해야지 칭의에다가 똑바로 행동해. 까지 다 포함해서 칭의해버리면 정죄 개념이 우리는 자칫하면 정죄 개념도 유보된 셈이 된다니까.

결국 십자가가 유명무실해지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 됐다는 것이 유명무실해져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 내가 살아봐야 죄인인 줄 알지. 이래 된다고. 그러니까 객관적인 것이 자꾸 주관적인 것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면 객관이 객관 값을 못하고 주관을 모아서 결론을 내려야 객관되는 그런 귀납적 방법밖에 안 된다 말이죠. 그거는 위험하죠. 다 해보고 난 뒤에 죄인 할게.

성경은 믿어야 될 건데 사람은 그걸 믿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내가 한번 해보고. 자꾸 행함으로 바꾼다고. 주께서 구름타고 오실 것이다. 보여 주이소. 네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리라. 의로운 느낌을 주이소. 맨 날 믿음이 아니고 행함화 된 믿음을 자기가 체험해서 그 체험들을 끌어 모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래드는 강력하게 반대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래드의 칭의 이론은 뭐다? 종말론적이다. 종말론적이 뭐다? 최후의 법정에서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최후의 법정에서 뭐냐? 니는 마. 의인이야. 하고 남들이 다 받을 최후의 그 선언을 우리는 미리 받아버린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도 의인이다 이 말이죠. 어떻게 의인이냐? 증거 댈 수도 있고, 의인으로 간주할 수 도 있고 그거는 따로 따지지만 어쨌든 간에 법적인 칭의는 포기 못한다는 것이 래드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이거는 자기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법적인 의가 있어줘야 뭐가 값을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심판주로서 값을 하는 거예요. 근데 스나이드는 말하기를 의가 먼저고 하나님이고 인간이고 그 밑에 복속돼있으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는 너를 의라고 선언한다. 나는 의라고 칭한다는 하나님의 심판권 자체가 무시돼버리잖아요. 하나님의 의가 그냥 흘러내리는 것뿐이지 하나님의 자의적인 판단이 죽잖아요.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 아닙니까? 나는 너를 의라고 한다. 하고 선언할 수 있는 그런 고난을 하나님께 줘야 될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창조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의를 창조한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사야 45장에 나오죠. 나는 의를 창조하고, 심지어 악도, 빛도 창조하고 의로움도 창조하고.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 된다. 그러면 칭의 맞잖아. 본인이 선언해서 의롭다. 종말론적으로 그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것도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 된다.

자, 과연 이러한 래드의 이야기가 동의될 수 있는 것인가? 그거는 조금 있다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래드가 말하기를 죄 없는 사람이 괄호 열고 법적으로 괄호 닫고 이래 하잖아요. 뭐냐? 죄 없는 사람을 법적으로 죄인 되게 해서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윤리적이 아니고, 뭐냐 하면, 래드가 깊이 있게 이야기해요. 예수님이 윤리적으로 의인인데 윤리적으로 죄인 된 게 아니고, 예수님은 법적으로 죄인 됐듯이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윤리적이 아니고 법적으로 의인 된 것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리고 칭의는 무죄 단계를 초월했기 때문에 무죄와 같은 것도 아니다. 무죄와 유죄냐 하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지만 이것은 어떤 분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하느냐 문제기 때문에 내가 어떤 윤리적인 행동을 하느냐 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다 말이죠. 그 말 맞잖아요.

사람들한테 지 행동을 너무 쳐다봐. 지금 하나님 주신 의는 선물이에요. 자꾸 선물 뜯어서 빵이 있으면 빵 먹으면 될 텐데 내가 빵 먹을 자격이 되나, 마나. 맨 날 소화도 안 되고 말이죠. 그러지 말란 말이죠. 줘도 못 먹는다. 주면 준대로 먹으라 이 말이죠. 이게 평생가요. 목사, 집사 관계없어. 평생 간다니까 사람들이.

교회 교역자 중에서 부교역자 이런 설교해보세요. 대번 쫓겨납니다. 니, 교회 말아먹으라고 하느냐? 네 그런 설교가 맞긴 맞는데 알아먹는 사람이 몇 명이냐?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쫓기면 영적 세계로 도피하게 돼요. 윤리적으로 쫓기면 교회로 온다고. 그게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유교도 그렇고. 거기에다가 따지지도 말고 하지도 말고 이래 돼버리면 기분은 좋지만 체험화 되지 못해요.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특히 누가 싫어하느냐 하면 나이 많은 장로들이 싫어해요.

칭의에 근거, 수단은 바로 래드가 또 이야기합니다. 래드가 큰 소리 막 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인들이 죄를 많이 져서 죄인 된 게 아니고 죄의 정도가 아니라 그 죄 자체 때문에 그들은 정죄된다. 그들이 죄한테 굴복했기 때문에 죄인 된 게 아니고 인간들이.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인 되었다. 이래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는 관점을 좀 알아 달라 이 말입니다. 부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관점은 뭐냐? 네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관점을 따라줘. 그런데 인간들은 맨 날 양심에 호소하면서 내가 죄졌구나. 이래서 죄인이다. 죄에서 죄인이 아니고, 죄의 정도에 따라 죄인이 아니라 테레사 수녀는 착한 일 많이 하고, 나는 착한 일 이게 아니라 그건 유대인들이고. 죄 아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너는 죄인이다.

그게 뭐냐? 율법이 주어진 것이 죄 안에 가두기 위해서. 율법이 준 것은 죄 안에 가두어서 죄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이 죄에서 풀려날 기미가 있다, 없다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사도바울하는 이야기를. 규정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정도에 따라서 죄인 같으면 우리는 마음 고쳐먹고 착한 일 하면 돼요. 그럼 죄에서 벗어날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인간 자체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이 말은 곧 우리 힘으로 죄에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죄 말고, 율법 말고 다른 의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방적으로 의인으로 규정해버린 거예요. 마치 우리를 죄 아래 규정하듯이. 이걸 바로 로마서에 보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우리가 죄인된 것처럼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가 졸지에 의인된 은혜에 왕 노릇하는 상태가 아니냐 말이에요.

이게 바로 래드가 말하기를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거예요. 근데 래드의 책에 보면 화해하고 칭의를 분리해놨어요. 아까 스나이드의 말이 그 점이 맞는 것 같죠. 화해가 먼저 사랑을 대신했기 때문에 결과로 칭의가 주어진 게 맞다. 근데 스나이드의 그 점에 대해서는 래드는 또 이유 없이 동의도 안 하고 칭의가 뭐냐? 하나님의 손을 내미는 그걸로 그쳐버려요. 화해에 대해서. 화해와 칭의가 연결이 안 돼. 다이아몬드에서 화해와 칭의가 같이 있는데 이것 또 구분해버리면 두 개의 다이아몬드가 돼버리죠.

아까 다이아몬드 이야기했는데 다이아몬드는 하나의 다이아몬드 아닙니까? 그러니까 칭의를 거부해버리면 화해고 소명이고 다 같이 날아가도록 돼있어요. 그래야 그런 이론이 돼야 돼요. 믿음 죽이면 남은 것 다 날아가고, 화해 죽이면 다 날아가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한 덩어리로 돼있어야 돼요.

그건 우리가 지난 시간에 했지요. 그게 어디서 나옵니까? 피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피의 효과를 증거하기 위해서 뭘 이야기했다? 화해, 칭의, 의로움 이런 걸 소명 다 어디서 나온다? 창세전부터 예수님께서 예정하신 피에서 나온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피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하나님의 의죠. 다른 말로 하는데 그걸 이야기한거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래드의 이 완벽한 칭의 이론이 문제가 뭐냐를 따져봅시다. 빈틈이 없지요. 종말론 사건이라 했으니까. 래드의 칭의 이론은 무슨 사건? 종말론적 사건으로써 마지막에 오실 심판주가 아예 우리 보고 법정에서 너는 의롭다 인정한 이상은 그것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정한 이상은 이게 칭의다. 이게 윤리적이고 이런 건 아니다. 우리가 정도에 따라서 의인되고 이런 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육적인 이해와 영적인 이해를 래드가 구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칭의 이론은 육적인 사람에게 줘도 좋다고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이해되는 이론은 문제가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이해가 되는 칭의 이론이 돼야 돼요. 그럼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육적은 중심이 누구냐 하면, 자기가 중심이에요. 영적은 중심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것의 중심이 된 그런 의식, 사고방식이 바로 영적이라 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다. 그 이유는 이야기 안 해도 여러분 다 아시겠지요.

예수님께서 오른편에서 오른편이란 말은 뭐냐 하면, 본질과 실존이란 말인데. 하나님의 왼편에 계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이런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한다. 기능이죠. 기능을 하는 곳이 오른쪽이에요. 그 본질과 실존에 대해서 나와 있는 게 십자가마을의 게시판에 보면, 구득영 목사님 글 올려놓은데 보면 나옵니다. 본질과 실존의 차이점.

실존은 이름입니다. 하나님 이름이죠. 주께서 내 주에게 하잖아요. 주 오른편에 앉아있는 사람 있잖아요. 마귀의 척결은 누구 담당입니까? 오른쪽 담당이에요. 실제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왼쪽에 계시는 본질 되시는 하나님이 오른쪽에 계시는 주께서 주를 보내셔서 마귀를 척결하시고 오른쪽에 앉아계셔서 우리에게 뭘 준다? 성령을 보내줄 때만 이 사실이 비로소 이해가 돼요.

그럼 이해가 된다는 말은 성령이 안 오고 거듭나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는 어디 안에 있다? 육적인 관점에서 성경의 이런 내용을 육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다하겠지요. 뭐, 주께서 내 주에게 어떤 일을 하신다. 이걸 무슨 관점이다? 육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겠지요. 그러면 영적인 관점과 육적인 관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선 예수님 중심이어야 되고 우리 중심은 안 되느냐 하면, 우리가 뭐냐 하면,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래드가 뭐라 했습니까? 율법에 가입된 것은 우리 안에 뭐 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갇히게 함이죠. 그런데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하는 거예요.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에 일하시는 게 아닙니다. 무능이 아니고 적극적 의미에서의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는 가만있는 존재가 아니고 뭘 발생시킵니까? 죄를 발생시켜줘야 예수님이 영적인 일을 할 때에 그냥 나는 영적이다 날아다니면서 일 하시는 게 아니고, 십자가 피 흘려 죽었잖아요.

그처럼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지만 내가 보여줄 기적은 뭐밖에 없다?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 이건 뭐냐? 이 세상이 악하고 음란하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 21절에 보면, 어둠에 속한 사람이 어둠에 가만있는 게 아니고, 빛을 미워해서 어둠에서 안 나오게 돼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어둠이 빛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둠한테 핍박을 받은 과정을 통해서 어둠이 얼마나 평소에 빛을 싫어하고 미워하는지 알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냥 죄인이다. 잘못됐습니다. 이게 아니고 우리 속에 뭐가 있다? 뭔가 빛을 미워하는 그 빛이 누구에요? 예수님을 미워하는 요소를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러한 의의 이론, 그것이 바로 올바른 의의 이론이 아니겠는가가 제 생각입니다.

지금 방금 한 시간 넘게 이야기해도 뭐가 안 나옵니까? 우리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그 이야기했지요. 우리는 야, 증거됐다. 야, 의 받았구나. 우리 기분 좋은 이야기 들었잖아요. 마지막 때 우리를 의인이라 한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은혜로다. 그 다음에 증거 돼서 죄를 죄인이라 하고 의인이라 부르는구나.

이것이 지금 누굴 안 다치게 했다? 우릴 손 안 댔다? 나라는 존재를 손 안 댔잖아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러면 뭐가 죽어요? 예수님께서 그냥 연설하는 자가 되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죽게 했다는 그 원인이 포함이 안 된 칭의 이론이 돼버린다 말이죠.

다이아몬드 이론에서 아이고, 그건 십자가에서 따로 합시다. 안 돼요. 저는 그건 반대에요. 십자가는 따로 있고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전부다 하나가 돼있지요. 하나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게 돼있어요. 하나의 다른 광채가 색깔이 하나에서 나온 색깔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칭의를 전도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칭의에 대해서 어리석다 하는 적이 없습니다. 네가 의인이다. 물론 그 당시 종교에서 전부다 기대했던 바에요. 진짜 어리석은 건 십자가가 어리석은 거예요.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지혜, 이 깊은 지혜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알려주지 않는 깊은 지혜는 오직 의도 아니고, 화해도 아니고, 소명, 예정도 아니다. 신자 됨도 아니다. 오직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선택론 같은 경우엔 심오하지요. 그 심오한 걸 유대인들 다 믿고 있었습니다. 창세전에 선택했다는 그건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사항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알면서 영적이라고 우기면서 단 하나 십자가에 대해서는 그들은 아무리 인간의 지혜를 해도 어리석게 미련하게 보이지 그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여줄 수 있는 칭의, 그러니까 의가 이렇다. 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보여주는 그 의에 십자가에서 관계성을 가져야 이것이 올바른 의의 이론이다. 그럴 때 법적인 칭의 개념은 제가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면 칭의 개념 말고 무슨 개념으로 바꾸느냐? 법적인 칭의 개념이 돼버리면 나는 의로움을 받았다. 이래 돼버려요. 그러지 말고 챙기는 개념 말고, 관계개념으로 나가자.

뭐냐 하면, 너 의인이야, 죄인이야? 저 의인이라고 했잖아요. 의인 맞잖아요. 감사합니다. 하지 말고 그 의를 뜯어보니까 의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는 그 관계가 용수철처럼 안 떨어지고 이어져 있는 거예요. 이어져 있어야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의의 종이란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의의 종은 어떤 특징을 갖느냐? 의의 열매를 맺어요.

의의 열매라 하니까 사람들이 분명히 래드는 말하기를 윤리적이고 아니고 이거는 아니다. 백날 해도 막상 너 의인이야? 따지면 꼭 뭘 끄집어내요? 니 자선을 했나, 니 구제를 했어. 성경대로 해서 지킨다. 꼭 이걸 내세운다 말이에요. 분명히 래드가 지 말로 했어요. 하나님의 의는 법정적 의기 때문에 윤리적이 아닙니다. 자기 말로 그렇게 했고, 스나이드 이 사람도 뭐라고 합니까? 이건 전가가 됐든 뭐가 됐든 의라 하는 것은 구원의 요건이 아니고 구원의 결과다.

그런데 결과다 해놓고 결국 돌아온 건 뭡니까? 결과니까 나 의인 맞잖아. 라고 하면서 의인 되는 확인작업 들어가는 거예요. 확인작업에 들어가는 것이 결국 뭐로 확인됩니까? 자기 행동을 가지고 확인하는 거예요. 십자가로 확인하는 게 아니고 자기 행동을 가지고 확인한다 이 말이죠. 그래 되면 더 의로운 행동을 많이 한 쪽과 적게 한 쪽의 정도의 차이가 또다시 결국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행동이 완벽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기가 책할 것이 없다는 것이 뭐 때문이냐 하면, 자기는 지금 주님의 사랑에 넋이 나갔기 때문에 책할 게 없는 거예요. 자기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왜? 지금 성령께서 하는데.

예를 듭시다. 스데반 집사가 돌아 맞을 때 스데반 집사가 이래 생각했습니까? 주여, 어떻게 폼 잡아야 내가 의의 행동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이랬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지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돌의 각도가 더 아프게 맞기 위해서 더 심하게 이거 아닙니다. 그는 뭘 쳐다봤습니까? 주님 쳐다봤는데 그 관계가 바로 의의 관계입니다.

자기 행동을 어떻게 반듯하게 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의 그 영광을 뭐냐? 세퀴나 영광이에요. 세퀴나는 말하자면 뭐냐? ‘현존’, 신의 현존이에요.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다 죽습니다. 그 앞에 제가 어떻습니까? 물을 수가 없어요. 죽은 놈이에요. 완전히. 눈이 가버렸어. 사도바울은 눈 가버렸습니다. 세퀴나 영광에. 봉사 됐잖아요. 영광이에요. 광채에요. 주님이 현존해버리면 우리는 그 광채에 나 볼 여력이 없어요.

모세가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했을 때 거기서 만났거든요. 그게 주얼리의 이티 춤이라 안 합니까? 베이비 원 모어 타임 할 때 춤 안 춥니까? 만날 때 여기 모세는 자기 복장 이런 것 없었어요. 그냥 광채가 입히니까 그 하나님의 세퀴나의 영광이 임하니까 모세가 돌판 들고 나갈 때 모세가 수건을 얼굴에 덮어야 했어요.

왜? 자기는 몰랐는데 밑에 백성들이 그 영광에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었어요. 아마 그림을 그리면 희미하게 나타났어요. 모세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나요. 수건을 덮으니까 윤곽이 나타나는 거예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뭘 먹었습니까? 먹기는 뭘 먹어요. 물 마셨어요? 뭐 마셔요.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는 그 문제는 세퀴나의 영광 앞에는 무의미한 거예요.

바로 사도바울이 책할 게 없다는 게 나쁜 짓 안 한 게 아니고, 주님의 영광에 도취돼서 정신이 없어요. 그게 바로 의로움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렇다면 남는 것은 뭐냐?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육적에 의가 오면 그릇이 되고 주님의 자비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이 죄 짓고 싶어서 죄 짓는 게 아니고, 인생을 살면서 하나의 지혜라 할까요? 사람이 죄짓고 싶어 죄짓는 게 아니고, 죄가 유발되는 쪽으로 우리가 존재하게 돼요. 관계 아닙니까? 세상 관계 속에 우리가 거기서 죄 아니라고 여겼는데 문뜩문뜩 죄라고 새삼 느껴지는 관계 속에 들어가요.

죄와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만남, 이것이 우리 안에서 새삼스럽게 죽을 때까지 계속 돼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이 안에 죄와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만날 때 우리의 죄와 주님의 용서가 만날 때 바깥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의 관계가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은 심판만 의로운 게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는 것조차도 주께서 의롭다고 할 때 그걸 두 자로 ‘화목’ 죄인을 용서하는 그것 다른 말로 화목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고. 다이아몬드에서 다 같은 이야기에요. 의고 화목이고. 저는 사도바울을 그렇게 사용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서신에 보면, 이 사람 주장하는 칭의라는 게 별로 안 나타나더라. 있기는 있는데 강조된 건 맞는데 별로 안 나타나고, 화목도 많이 나타나요. 그게 화목도 나타나고 하는 건 전부다 예수님 하는 일에 십자가 안에 그게 다 담겨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화목이라고 나타나고, 의 나타나고, 용서, 사랑, 어떤 땐 사랑도 많이 나타나요. 그렇게 나타나는 겁니다. 그 안에는 항상 십자가 구원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감추어진 비밀이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거예요. 언제? 종말 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이유도 없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이유도 없이 의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의인으로 규정받았사오니 이제는 주님의 의가 우리 안에 작용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화해스럽고 공의로운지를 우리를 통해서 증거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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