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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530a 울산강의-창세기 35장자유게시판창세기

20080530a 울산강의-창세기 35장

이름 : 한윤범(IP:59.6.189.254)

20080530a 울산강의-창세기 35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창세기 35장 하겠습니다. 창세기 35장의 내용은 야곱이 일행과 더불어서 세겜 땅에 있다가 세겜 땅에서 일이 벌어져서 자기 딸이 강간을 당했고, 오빠들이 복수를 했다는 일을 당하고 난 뒤에 그 세겜 족속과 함께 있을 수 없어서 벧엘이란 곳으로 내려와서 거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그 대목이 35장의 대목입니다.

지중해 있다면 이스라엘 여기 이걸 바단데 사해라 하고 위에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이렇게 와서 세겜이란 동네에 여기 있다가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벧엘이 있어요. 이 근처에 베들레헴이 있지요. 여기 와서 여기서 일어난 일이 오늘 창세기 35장의 계시 받고 있는데 여기서 몇 가지 일이 터지지요. 유모가 죽고 그 다음에 누가 죽느냐 하면, 사랑하는 자기 아내 라헬이 죽고, 그리고 끝에 보면 아버지 이삭이 죽었다고 기별이 와서 고향에 왔다가 올라온 몇 가지 사건이 있는데

그렇게 죽는 사건하고 또 무슨 사건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벧엘, 여기서 단을 쌓으라고 벧엘에 제단을 쌓아야 된다고 이야기했고,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로 옮기겠다고 이야기했고 그리고 장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네 허리에서 왕들이 줄지어 일어나서 왕들이 나올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창세기 35장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려워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1장 20절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라고 돼있고, 23절에 보면, 이것이 복음이라. 십자가 피가 복음이라 돼있거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게 야곱이란 사람이 지리적으로 세겜에 있다가 벧엘에 가서 하나님의 계시 받았다 하는 이 이야기와 지상에서 이렇게 여기 있다가 이래 옮기고 여기 옮기는 것 이 이야기하고 신약의 십자가 피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이거 관계를 지어야 돼요. 그래서 창세기 구약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한 단계, 한 단계 단계가 있어야 돼요. 야곱이란 사람이 그냥 여기 살다가 세겜에 살다가 벧엘에 살았단다. 오늘날 우리도 여기 살다가 외국에 나갈 수도 있고 그렇지요. 그것 하고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십자가 피로 세운 복음하고 이게 무슨 연관성이 있느냐 말이죠. 연관이 없어 보이잖아요. 내가 여기 살다 여기 갔다. 그러니까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다. 이거 앞뒤가 전혀 안 맞는 이야기다 말이죠. 여기는 중간에 무슨 단계가 있어야 돼요.

중간의 단계의 힌트가 히브리서 11장 14절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 14절에 보면 뭐라고 돼있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걸 하나의 뭉쳐서 봐요. 뭉쳐서 뭐라고 보느냐 하면, 그들은 이 땅에 나그네였고 객이었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들이 지상에서 수평적으로 여기서 옆으로 이동했지만 실은 그들은 뭘 바라봤느냐 하면,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본향의 뜻을 바라봤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이래 되지요. 여기 지금 안경집이 천국이라면 천국이 어떤 모습을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그림자가 지상에 비춰질 게 아닙니까? 조명등이 보이면 그림자가 있잖아요. 이 그림자 역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신앙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다 이 말입니다. 위쪽에서 잡아당기니까 딸려가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위쪽에서 잡아당기는 걸 뭐라 하느냐? 그리스도라 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니까 그들은 앞당겨서 예수님보다 미리 이 땅에 먼저 등장해서 그들의 진로를 결정한 겁니다. 계속 사건들이 터지면서 계시가 주어지면서.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기는데 당길 때 그냥 예수님이 몸으로 당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해야 될 사건들이 있어요. 목적지는 어디냐 하면, 십자가 핍니다. 십자가 피를 위해서 가셔야 될 그 자국, 흔적들이 구약에서는 뭐로 등장하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들이 있는 지역에서 이동하는 경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추적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잖아요. 위층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이 죽어서 복음이 만들어졌다면 결국은 그 말은 뭐냐 하면, 지상에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뭘 목적이냐 하면, 그들은 결국 죽기 위해서 산 거예요.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문제에요. 그들에게.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죽음을 내가 묘사해 낼 것이냐? 그게 성도의 관건인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제가 흔히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계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이래 물어보거든요. 세상 사람들은 계시로 사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갖고 있는 자기 능력으로 살지요. 교사면 교사로, 장사면 장사로, 목사면 목사로 자기 재주껏 사는 겁니다. 그러나 영적 사람은 뭐로 사느냐 하면, 자기 재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로 살아야 되거든요.

그러나 계시로 산다할 때 이 말이 어폐가 있어요. 방금 하나님 주신 계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계시를 받아서 산다 이래 됐는데 사실 그건 틀린 말이고, 계시 받아야 우린 죽을 수 있습니다. 더 비약적으로 이야기해서 성도에게 보너스가 있는데 그 보너스가 뭐냐 하면, 죽는다는 게 보너스에요. 아주 멋진 보너스에요. 힘들지? 힘듭니다. 내 죽여줄게. 아이고, 기뻐라. 이게 신앙인이라니까. 살기 힘들지? 아, 미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기다려. 니 죽여줄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게 신앙인에게 주는 보너스에요. 성과급이에요. 죽는 게.

계시가 없으면 어쨌든 간에 살아야 돼요.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면 죽는 것이 즐거우니까 사는 것도 즐거워져 버려요. 죽는 것이 즐거우니까 죽기 전에 있는 모든 것도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죽을 좋은 일이 남아있으니까 가슴 콩닥콩닥 하면서 지금 즐겁게 나그네 길을 살아간 사람이 누구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인데 성경은 그걸 뭐로 이야기한다? 나그네 삶을 살았는데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이 땅의 고향이 아니고, 하늘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본향이다 이래돼요.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가면, 이게 아니고 저쪽에 가는 것이 즐거워서 이쪽에 나그네를 힘들지만 기쁜 소망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기쁜 소식, 복음이죠. 그걸 오늘 본문에서 찾아내야 돼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걸 찾아내는 게. 말로 설명하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제가 이걸 쉽게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림으로 설명해도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렵다, 어렵다 해서 다 어려워서요. 이렇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뭐라 했습니까?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뭐가 없고? 계시가 없고, 성도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뭐로 산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죠. 또 복음. 복음이 계시의 완성이니까. 복음 또는 말씀, 하나님의 계시로 인도받으며 사는데.

오용익 목사님의 글에 이런 게 있어요.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어느 사회에서?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줄 받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하늘에서 이 계시의 나라에서는 뭐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두 가지 저주 가운데 골라잡아야 돼요. 어느 쪽의 저주인지 하여튼 한쪽 저주 받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살 때 이 계시 속에 하나님의 계시 속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계시라 하는 것은 뭐냐? 새로움 아닙니까? 새로운 공간이 들어오고, 새로운 시간이 들어와요. 이게 어려워요. 예를 들어서 지금 내 나이가 만약 오십이다. 오십이 넘었습니다만 오십이다. 나는 지금 대구에 산다. 이게 뭡니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뭡니까? 나를 구성한 시간이 오십이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공간은 뭡니까? 대구 아닙니까? 이거는 새로운 게 아니죠. 이건 누적된 거. 근데 새로운 계시가 와버리면 오십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지고, 대구 산다는 게 의미가 없어지는 이것이 깨어지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는데 그게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시간과 예수님의 공간이 여기에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쉽게 해도 어려워요.

야곱은 자기 살 단도리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장차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겠다. 이것은 야곱은 생각지도 않은 겁니다. 야곱한테 그게 없어요. 이 식솔들하고 우에 밥 먹고 살지? 그거는 계시를 없는 불신자들이 어이, 아저씨. 우에 삽니까? 그저 식솔들하고 먹고 살아야 되죠. 똑같아요. 야곱도 마찬가지. 나도 내 식구하고 먹고 살아야 돼.

똑같은데 여기에 새로운 계시가 와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새로운 뭐가 뒤집어씌우냐 하면, 뭐가 뒤집어씁니까? 새로운 사명이 뒤집어써요. 자기가 먹고 살려고 사명을 완수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는 세상사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똑같아요. 똑같은데 사명이 주어지게 되면 위주가 내 먹고 사는 위주가 아니고 뭐가 위주냐 하면, 사명이 앞장선 사명이 우선이고 나는 뒷전이 되는 나의 시간, 공간은 뒷전이 되고 사명 안에 있는 시간, 공간이 우선이 되는 그러한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 버려요. 사명이 우선이고 나는 뒷전인 거예요.

예를 들면 내가 술을 먹었다. 목산데 기분 나빠서 술 한 잔 했다. 술 먹고 난 뒤에 기분 더럽다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 제가 술을 먹었습니다. 목사가 되서 술 취하지 마라. 자기가 가르쳐놓고 자기가 술을 먹었습니다. 이래서 되겠습니까? 아마 다음주 벌 받아서 교인 다섯 명 안 나오지 싶습니다. 주여 이럴 수 있습니까?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응답하기를 이 쪼다야. 니가 지금 니가 잘하고 못하고는 니는 뒷전이라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우선이지 내가 얼마나 착하며 내가 얼마나 완벽하며 훌륭하고 이거는 뒷전인데 여전히 사명이 우선인데 우리는 뭐라고 자꾸 오해를 하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나쁜 짓 하니 벌 받아 싸지. 자기 단도리하면 자기 회개하면 혹시 징계가 완화될까 싶어서 그 생각하고 있다고. 이런 오류가 굉장히 많습니다.

나는 이런 계시를 받았어요. 라고 그걸 남한테 이야기하면 될 일인데 나는 이런 계시 받아서 이렇게 훌륭해요. 이걸 증거하려고 시도하는 게 인간이란 말이죠. 그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우린 버린 자식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 나와요. 본문 봅시다. 너무 어렵게 하면 안 된다.

오늘 본문 35장 10절에 누가 읽어보세요.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 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이 말을 그냥 그대로 보세요. 야곱은 사적인 소망도 있고 희망도 있고 나는 이렇게 반듯하게 살란다. 나는 이제 하나님 믿고 잘 살아야지. 이런 게 있을 거예요. 그거 하나님 마음에 안 둬요. 그건 야곱 때 생각이라니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자식은 잘 키워야 되고, 나는 목사로서 모범이 돼야 되고, 나는 집사로서 우리교회 순순히 봉사해야 돼. 그거는 계시를 받기 전에 자기 생각이라니까. 자기 자존심과 관련돼있어. 신자인데 내가 빛과 소금이 돼야지. 이거는 지 자존심이라니까요. 그건 하나님 뜻 아니에요. 괜히 지 발에 지린다니까. 괜히 미안해서 하는 거예요. 너무 세상적으로 살고 돈만 밝히고, 신자라 해놓고 불신자 못지않게 살고, 내가 이래서 되겠는가? 그거는 지가 미안해서 지가 지 생각하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반듯하게 살고 그거는 안중에 없습니다. 중요한 건 뭐밖에 없다고요? 사명이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야곱이 되서 나는 장차오실 메시아를 보여줘야 되고. 이건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아이고. 어쨌든 간에 밥 먹고 사는데 하나님 도와줘서 안 굶고 살고. 이게 지 생각이라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 보여주는 것은 누구 몫이에요? 야곱의 자기 몫이 아니고 누구 몫입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어떻게 다루느냐 몫이 아닙니까? 이거는 누구 숙제냐 하면 하나님 숙제지, 왜 야곱이 하나님 숙제를 지가 왜 걱정합니까?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하는 일을 내가 왜 걱정하느냐 말이죠. 지가 하나님도 아닌 게, 지가 메시아도 아닌 게.

성도가 계시 받는 이익이 뭐냐 하면, 그 점이 이익이에요. 불신자는 내 행동이 반듯하게 따라서 복도 받고, 행동 개차반하면 벌 받는다 이거 벌벌 떨며 살아가는 게 불신자라면, 신자의 좋은 점은, 좋은 점하면 어폐가 있지만, 아예 그런 걸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니까요. 어디 보험회사 CF처럼 육십 이상만 되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보험 들면 다 보상해준다 안 합니까? 어떤 병이든지 묻고 따지지 않고.

주님께서 컵의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컵의 물이 저 혼자 걱정하는 거예요. 주께서 마실 때 내가 너무 쫄랑대고 찰랑거린다. 찰랑이든 쫄랑이든 묻지 않고 마시면 마시는 거예요. 왜 자꾸 내가 나는 오늘 반듯하게 살았을까? 어제는 내가 훌륭했을까? 그런 것 가지고 신경 써버리면 뭐가 죽느냐 하면, 사명이 죽어요.

이 사명의 내용이 뭐냐 하면, 사명의 내용은 여러분 다 아시는 겁니다. 아까 제가 골로새서 했어요. 사명이 뭐냐? 십자가 피 아닙니까? 사명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죽어 남이 사는 겁니다. 이게 대속이라 하죠. 아주 고상한 말로 대속물. 내가 너희에게 온 것은 섬김을 받는 게 아니고 내 몸을 너희에게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걸 간단히 말해서 뭐냐? 나는 죽고, 남이 사는 거예요. 부모 죽고 자식 살잖아요. 부모들이 희생하는 이유가 그거 아닙니까? 부모는 고생하고 자식은 희희낙락이고 안 그렇습니까?

이게 이 사명을 우리가 실천에 못 옮깁니다. 그리고 이걸 옮기려고 하지 마세요. 자기가 이 사명 감당하면 계시 받은 게 아니고, 지가 계시를 만들어낸 사람이라. 이건 사깁니다. 주님의 사명은 안 되는 걸 함이에요.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이 사명 속에 내가 죽고 남이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는 그 모습이죠. 그것을 우리에게 해내고야 마는 거예요. 이걸 믿어야 믿음이에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계시대로 나를 다룰 것이다. 그걸 믿는 게 믿음이에요. 내가 뭘 하는 게 아닙니다.

사명이 있게 되면, 사명에 뭐가 따라온다 했습니까? 공간 따라오고 뭐가 따라온다 했습니까? 시간 따라오죠. 사명이 없으면 나의 시간이 있고, 나의 공간이 있잖아요. 근데 사명에 구애받으면 다른 말로 하면 계시를 받으면,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렇게 되면 이건 하나님의 공간이 되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이게 달라져요.

이거는 야곱의 시간과 공간이었다면 하나님 뭐라 합니까? 다시는 너를 뭐로 부르지 않는다? 야곱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이 말은 현재 네가 차지한 그 공간은 너를 위한 공간이 아니고, 누굴 위한 공간이다? 장차오실 메시아를 보여줄 사명을 위한 나의 공간, 하나님의 지정해준 하나님의 공간이고 그리고 네가 앞으로 해야 될 인생, 그 인생의 모든 시간은 누구 시간이다? 야곱은 죽었으니까 야곱이라 부르지 않으니까 야곱의 시간이 아니고 무슨 시간이다? 이스라엘 내용대로 되고 마는 사명의 시간이 남아있는 겁니다.

우린 이걸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아, 내 인생이 내 게 아니고 내 인생이 내 소유가 아니고, 내 이런 자체가 내 게 아닌데 혼자 모든 걱정을 내가 다 짊어지고 한다고.

그러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질문 해보이소. 주님의 시간과 공간이 왔을 때 우리가 거부하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거부하면 주님의 시간과 공간이 나의 시간과 공간에 튕겨서 배척받아서 주님의 시간과 공간이 들어와야 될 건데 내가 원체 고집이 세서 아아, 나는 내 시간과 공간 이외에 딴 거 들어오면 차버릴 거야. 이래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의 사명이 우리 고집보다 더 셉니다. 그 고집 센 게 주님의 고집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게 없어져 버려요. 나하고 주님하고 싸워야 되는데 내가 없으니까 고집 센 내가 주님의 시간이 되고 주님의 공간이 돼요. 그 자체가. 자꾸 거룩하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고집 센 게 뭐가 주님 것이냐 하지만 천만에 말씀.

주님의 사명은 완벽하고 깨끗하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자꾸 그런 오해를 하는데 주님의 사명은 뭐냐 하면, 죄 있는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이게 주님이 죄 지고 가는 모습 아닙니까? 주님께서 죄를 지고 가실 때는 그 죄가 우리한테 그대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럼 내가 갖고 있는 내 죄가 주님 지신 그 죄가 되니까 내 고집대로 사는 것이 그게 주님의 사명이라니까. 논리가.

너무 빨리 했다. 천천히 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고 갔잖아요. 제 말이 뭐냐?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이 들어오잖아요. 주님이 들어오면 우리 죄를 지신 주님이 들어오기 때문에 주님이 지신 그 죄가 누구 죄냐 하면, 내가 지금 평소에 살아가고 있는 내 성깔이고, 내 죄 그대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바꿀 필요 없이 가만 살면 주께서 주님의 사명대로 그 죄를 뭐로 바꿉니까? 그 죄를 의로 바꾸는 일을 고집 센 나를 가지고 하고 있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거룩해지려고 할 필요 없이 현재 있는 그것을 주께서 다루시는 그 관계가 거룩이다 이 말이죠.

무척 편하지요. 더 쉽게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다시 하면, 다시는 너를 이근호라 부르지 말고 에서라 부르겠다. 할 때 우리가 부르라 했습니까, 그래 불러 달라했습니까? 하나님 지가, 지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알아서 부르겠다는 걸 뭐 어쩌라고? 부르지 마세요. 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하이소. 좋은 대로 하세요. 좋은 대로 하지잖아요. 좋은 대로 한 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그네 생활한 겁니다. 나그네 생활하고 좋은 대로 하니까 더 나은 본향이 하늘 위에 모이고.

세상에 이것보다 더 편하게 하는 설교 없습니다. 그냥 사세요. 지금 사시는 대로 사시는 게 그게 지금 주님한테 가는 길이에요. 뭐 구체적으로 말씀 지키고 뭐고 할 것도 아니에요. 이런 계시를 만약에 받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냐 아니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상태에서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가 나와요. 반드시 감사가 나오고, 하나님의 계시를 안 받게 되면 노력이 나온다고.

노력이 나오면 이거는 전부다 사이비입니다. 열심히 해야지. 악착같이 해야지. 말씀을 지켜야지. 기도는 반드시 지켜야지. 성경은 석 장은 하루에 꼭 봐야지. 이거 노력이 나오면 사이비 계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계시를 준 적이 없어요. 무슨 계시냐 하면, 주님께선 반드시 감사가 나오게 돼있어요. 오늘도 석 장이나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밑에 같으면 나는 오늘 석 장이나 봤다!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이쪽에는 뭡니까? 오늘 성경 석 장이나 봐서 감사합니다.

감사가 나온다하는 것은 자기 바깥에 외곽이 있다는 말이고, 노력이 나온다 하는 것은 자기가 누굴 쳐다보는 겁니까? 자기 쳐다보고 사는 거고요. 감사는 자기 안 쳐다보고 고맙습니다. 하고 누구 쳐다보는 게 감사고. 계시 받았다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외곽에 누가 서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바깥에 누가 서 있다 이 말이죠. 그분이 나에게 계시를 준 거예요. 뭐라고? 메시아 일에 동참했다고. 너는 메시아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의도에 질문했어요. 목사님,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구원사역이 어떻게 차이 납니까? 간단하게 설명돼요. 여권과 비자의 차이입니다. 여권 있다고 그 나라 못 가지요. 여권 있어야 되지만 뭐가 있어야 돼요? 비자를 받아야 갈 수 있습니다. 비자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고, 여권은 창조하심이에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여권 줬어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마태복음 22장 말씀에 보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뭐가 없다? 택함 받은 자가 없다 이 말이죠. 청함을 받아 놓으니까 지가 들어가려고 해. 천당을 들어가라고 해. 비자도 없이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여권이 있다고 우기는 게. 이게 천주교입니다.

천주교 뭔 줄 알아요? 하나님이 우릴 만들어 놨다. 우리 존재가 어디서 나왔겠는가? 신으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는 뭐다? 천주교신학이 뭐냐? ‘존재=선’이에요. 우리에게는 뭐가 있다? 선한 형상이 있다. 선한 형상을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이걸 하나님의 형상이다. 동물하고 다른 점.

하나님이 창조했다. 창조한 증거가 뭐냐? 내 속에 양심이 있고, 거룩과 그리고 의와 이런 것을 추구하는 보니까 아직도 죄는 졌지만 우리 안에 선은 남아있다. 이 선을 개발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게 천주교 이론입니다. 요새 개신교 이론 돼버렸지만. 원래 천주교에서 하는

영생훈련이 뭔 줄 알아요? 영생훈련이 안에 있는 하나님 주신 선한 것을 이것을 삭히지 말고 사라지게 하지 말고 그걸 개발하는 게 영생훈련이에요. 주님이 주신 선한 것을 왜 묵히느냐 이 말이죠. 주님이 주신 존재할 때부터 주신 좋은 것을 좋은 이성과 좋은 감정을 양심을 개발해서 보다 하나님 영광을 돌려야지. 요거 여권입니다. 그런데 비자는 안 왔어. 비자는 택함을 받아야 돼.

여권 소지한 사람은 자길 쳐다보지만 비자라 하는 것은 저쪽에서 초청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내 안에 선한 게 있느냐가 아니라 현재 선이 있든 악이 있든 간에 그것조차도 몽땅 포장해서 하나님이 쓰신다는 거예요. 니, 방 좀 빌려줄래. 니 인생 쓰겠다. 그냥 쓰시겠다는 거예요. 내 인생을. 접수했거든. 네 것이 아니거든. 내 것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네 인생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야곱은 네 이름이니까. 다시 이제부터 이름을 뭐라 한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새로운 업무가 부여되는 업무의 장소에요.

만약에 현대자동차에서 와서 목사님, 일주일 간만 교회 쓰겠습니다. 합기도 간판 지워버리고 여기다 삼성그룹 기획실 붙여 놔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일 하죠. 우리 교회 일 못하고 일주일 동안 자기 일 하잖아요. 그 식이라. 너는 이제부터 간판은 야곱이 아니고 뭐다? 이스라엘. 지 마음대로, 하나님 보고 지 마음대로 하지만 지 마음대로 들어와서 지 마음대로 시간과 공간 다 해버려요.

주님이여, 이거 무슨 시간과 공간입니까? 장차오실 공간이다. 장차오실 메시아의 하는 작업이 이미 아브라함 속에서 발동을 하니까 그때부터 야곱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야곱은 가는 길도 뭐보고 가고? 계시에 따라서 가야 되고, 하는 일도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하고 그리고 앞으로 장래에 자기 허리에 많이 왕들이 줄줄이 태어나는 것도 누구 숙제입니까? 누구 과제에요? 지 과제 아니고 누구 겁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시를 받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사람이 계시는 안 받고 말씀을 안 보게 되면 성도가, 맨 날 걱정이 뭐냐 하면, 내가 오늘도 완벽했을까, 나도 철저했을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했을까? 말 실수를 했구나. 아이고, 큐티를 두 번 놓쳤네. 자꾸 조마조마, 초조초조. 이래가지고 마귀가 좋아하겠다.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 내가 영발이 있지. 자기 관리.

그런데 그것은 결국은 시험에 나중에 우울증 증세까지 나오죠.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거울이 있는데 거울을 보게 되면 누구 얼굴이 보이게 됩니까? 자기 얼굴 밖에 안 보이죠. 천 번을 봤습니다. 천 번 보니까 누구 얼굴 보여요? 천 번을 보든 만 번을 보든 천 번 봤으니까 천한 번 쯤 다른 사람 얼굴 이런 거 없어요. 천 번을 거울 앞에 서도 자기 얼굴이고, 만 번을 봐도 자기 얼굴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자기 처지에 비춰서 성경을 보게 돼요. 예를 들어서 안전성을 가지고 야곱 이야기를 보면, 참 야곱 안 됐다. 난 이렇게 안정되게 사는데 야곱은 왜 이렇게 지지리 고생이고. 하나님 믿고 사는데 이런 고생을 하다니 참 야곱 안 됐다. 그래도 난 다행스럽게도 정착돼있으니까 좋지. 지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나그네 생활하는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야곱, 당신 신세나 내 신세나 우에 그렇게 똑같노. 나도 여기 오늘은 저기 정처 없이 떠도는데 야곱이나 나하고 똑같구나. 둘 다 자기 생각해서 보거든요. 자, 어느 쪽 맞습니까? 안정성 가지고 야곱의 불안정성을 보는 게 맞습니까, 불안정성 가지고 야곱의 불안정성을 보는 게 어느 게 맞습니까? 둘 다 다 지 생각해요. 둘 다 성경해석 잘못된 거예요.

그러면 성령을 받고나서 성경을 보게 되면 뭐가 보이냐 하면, 성경을 보면 자기가 해골이 보이고, 진짜 말짱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는. 성경에서.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만 증거한다 했어요. 그럼 자기는 뭐냐? 그냥 이미 죽은 시체로 보여요. 죽은 시체가 안정되면 뭐하며 불안정하면 뭡니까? 시체인데.

성령을 받고 성경을 보게 되면, 죽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피로써 나를 살려내고 있구나.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매일같이 살려내고 있구나가 보여지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성경을 그냥 자기가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역시 오늘도 내가 열심히 살아야지. 이게 성경 보면 그렇지만 진짜 성령을 받고 성경을 보게 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려줬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안다 이 말이죠.

에스겔 나오잖아요. 성령이 임하니까 죽은 해골도 산 사람 되듯이 이게 한 때 기적이 아니고, 지금도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자기 처지를 보고 성경을 보니까 이게 매일같이 해골 같은 나를 살려낸다는 건 안 들고 지난번에 처음 예수 믿을 땐 한번 그랬다가 지금은 내가 알아서 내가 산다. 그런 생각이 주도적으로 밀려오잖아요.

그러다가 몸이 아프다든지 뭔가 일이 터지면 아이고, 내가 건강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지켜주니까 건강도 지켜주는구나. 그때 잠시 2.5초 정도 알고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고. 그렇다 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앞에 우리는 이미 죽은 자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게 사신 분이 죽은 자를 계속 살려내는 방식으로 모든 성경은 성도를 그렇게 이끄십니다. 이게 성령으로 볼 때 이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 35장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그걸 35장을 통해서 한번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잠이 오더라도 참으세요. 나중에 휴식시간 있으니까.

야곱을 뭐 되게 했다고 합니까? 이스라엘로 다룰 때는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로 이끄십니다. 이스라엘로 이끄시는데 이끄는 것이 아까 제가 장소적, 공간이죠. 공간적으로 이끄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시간적으로 이끄셔요. 시간적으로 말하면 네 허리에서 장래에 왕들이 출몰한다. 왕들이 출몰한다 이것이 시간적인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끄시고, 장소적으로는 뭐냐 하면, 벧엘이에요. 창세기 35장에서.

야곱으로 하여금 한 장소로 굳히게 만드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된 이후에 이스라엘 가지고 한 장소에 고정된 하나의 장소, 일이죠. 하나의 장소로써 야곱을 그 장소에 이끌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중보도 하나이시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보면 나오거든요. 하나의 중보자가 오직 하늘과 땅의 통로는 하나밖에 없다. 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겐 감추시고 오직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되게 해서 그걸 알려주는 계시가 창세기 35장에 나옵니다.

그럼 이것을 말로 하면 재미없으니까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하늘과 땅은 막혔습니다. 여기 야곱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갑자기 구멍이 나요. 하늘에 구멍이 나면서 여기서 뭐가 부느냐 하면, 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요. 회오리바람이 부는데 야곱으로 하여금 나그네 생활, 세겜이니 벧엘이니 하다가 회오리바람 걸려들었다 하면 말려들어서 어디 가느냐 하면, 여기 한 가지 장소에 굳히게 만들죠. 이게 뭐냐 하면, 벧엘이에요. 뭉치게 되도록 하는 거예요.

자, 야곱 대신에 오늘날 우리 성도. 성도가 인생을 살면서 이것저것 해보지만 성도 믿는 구석은 뭡니까? 오직 뭐밖에 없어요? 나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라는 것을 항상 그것이 떠오르도록 회오리바람을 지가 찬 공간에 지가 찬 시간대에 돌리는 거예요. 오십 대면 오십 대, 육십 대면 육십 대, 사십 대면 사십 대. 그때마다 돌려서 난 사십이다. 오십에 뭐 할꼬? 육십에 뭐 할꼬? 이래 생각하면 수평적 아닙니까? 나는 사십이다. 오십 되면 뭐 하지? 육십 되면 뭐하지? 나는 여기 있다. 사십 대, 오십 대, 육십 대 이래 나오다가

이게 육십이 되던 팔십이 되던 관계없이 너는 이미 하나의 중보자 밑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십 대, 오십 되도 쳐다보고, 육십 되도 이걸 쳐다보고, 칠십 되도 이걸 쳐다보고. 이 모인 것이 뭐냐? 오직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다. 여기에 모이게 한다 이 말이죠. 하나에 모이게 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로 집약시키는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요 공간대입니다.

나는 미국 산다. 미국 살다 다음에 영국가고 하는데. 미국 살든, 영국 살든, 우리 목사님 태국에서 오셨는데 태국에 살든, 한국에 살든 그게 중요한 게 내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있는 처소가 주와 함께 있는 천국이다 이 말이죠. 하나의 주님의 계시가 떨어지면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곳입니다. 새로운 공간개념을 제공하는 거예요.

야곱으로 하여금 자꾸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거든요. 야곱으로 하여금 그 하나에 귀속되도록 하나에 복속되도록 그렇게 회오리바람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란 이름으로 회오리바람이 계속적으로 하는데 그걸 확정짓는 것이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제단이에요. 여기 보면 나오지요. 네가 벧엘에 가서 이제는 제단을 쌓아라.

이것이 뭐다? 하나님께서 너는 벧엘로 가서 무려 삼십 년. 라반 집에 이십이 년 동안 있었으니까 나머지 팔 년 합하면 삼십 년 동안 헤매다가 다시 벧엘로 돌아왔을 때 벧엘을 떠나서 멀리 갔던 그 삼십 년의 긴긴 시간과 공간은 다시 벧엘로 되돌아오게 하는 잡아당기는 벧엘에서 뭔가 끌어당기는 힘이 그동안 야곱으로 하여금 뭐 되게 했다? 이스라엘로 변하게 했던 그 힘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도입니다. 성도가 뭔지 몰라요. 하지만 평생토록 우리는 성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긴긴 인생을 살면서 결국은 어디로 모읍니까? 성도의 자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이 창세기 35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 피로 화목케 했다는 것이 이게 수평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조명발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면서 야곱에 관한 모든 흔적들이 결국은 하나에서 하나로 다 모아지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이걸 다시 그림으로 그리면 아직까지 중요한 건 제가 손을 안 댔습니다. 제단이 뭐며, 이스라엘이 뭔 뜻인지 이런 것은 아직까지 이건 계속 이야기할 것입니다.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4절, 18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오실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믿음이라 하는데. 이게 수직적인 그림자가 지상에 비춰버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온 가나안 동네를 다 돌아다닙니다. 다 헤집고 다녀요. 하란에서 와서 사건이 벌어지고 모든 사건. 이 모든 사건을 꺾음으로써 성경을 말하기를 그들이 나그네 생활하는 것은 수평적으로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가고자 함이 아니라 A 지점에서 수직적으로 어디 지점? C 지점. 천국으로 가고자 해서 그들은 나그네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디를 정착해도 나그네에요. 정착 안 해도 나그네고, 정착해도 나그네고. 그런 인식이 성도 아니면 계시 안 받으면 그런 인식이 안 생깁니다. 사명이 나를 내 인생을 이따위로 만들어요. 사명이 우선이지 나는 우선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꼼지락꼼지락 아이고,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서 실수를 했습니다. 나는 뭘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 개인이 바라보는 건 의미 없어요. 네가 실수를 하든 뭘 하든 그게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네가 얼마나 훌륭했느냐, 네가 얼마나 착실했느냐?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엔 사명이 하나님의 계시가 너보다 우세하다. 너보다 힘 더 세다 이 말입니다. 네가 어떻게 너 관리하는 것보다도 너를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너보다 더 센 것을 이 사람들은 나그네 생활하면서 혹독하게 그걸 체험하죠. 야~ 주님이 나보다 더 세구나. 고린도전서 나오지요. 누가 주보다 강한 자냐? 주님이 우리보다 더 센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두 가질 안 했습니다. 제단이 뭐냐 이야길 안 했고, 이스라엘 왕이 무슨 뜻인지 이야기 안 했지요. 그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시는 십자가죠. 십자가가 이 안에서 제단을 쌓는 것, 그 다음에 열왕이 태어나오는 것, 이거는 예수님이 하는 사역, 십자가 사역과 이 제단 쌓는 것과 연관이 되겠지요. 제가 다만 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들이 나그네 생활하는 이것만 그리스도의 이것과 회오리바람 하나로 모아진다는 것, 이거는 설명한 겁니다.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보면, 성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돼요. 사람이 계시를 안 보면 누굴 본다? 자기 점검, 자기 관찰. 남은 저런데 나는 왜 이 모양이냐? 남 비교 들어가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개척하고 자기가 선택하려고 이렇게 하는데. 인생 좀 살아보면 동서남북 말 몰고 내질러 봐도 어느 길로 가도 똑같습니다. 아이, 그때 동쪽으로 가지 말고 서쪽으로 갈걸. 서쪽으로 가도 마찬가지에요. 이 수평적인 인생에서 어느 길을 선택했든 그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으로선 개의치 않습니다. 선택 자체를 무시해요.

프로스트의 책에 그런 게 있다면서요. 숲속에 두 가지 있는데 나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 가지 않은 길을 간다 해보세요. 지도 보면 맨 수평인데. 지가 어떤 선택해도 선택자체가 의미 없다니까요. 그건 기껏 여권 만드는 것밖에 안 돼요. 비자는 지가 선택해서 비자 얻는 것 아니에요. 자신의 선택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이미 결정돼버렸어요. 이게 참 우릴 마음 편하게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사십 대, 오십 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주님께서 콧방귀도 안 뀌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 있다.

자, 그러면 제단을 쌓아라. 어려운 거예요. 단을 쌓으라 했습니다. 단을 쌓는다는 게 이게 아마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제단을 쌓는 게 뭔 뜻이냐? 제단을 쌓는다는 말은 간단히 이야기해서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제단을 쌓는 것은 분명히 내가 있잖아요. 칼 들고 식도 들고 나를 죽이는 겁니다. 그걸 넉 자로 뭐냐? ‘영구 없다’해요. 제단을 쌓는다는 말은 주님 보시기에 저 여기 없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이 제단이 있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칼 들고 죽여서 제단에 올라가 누워 자살하는 거예요. 이게 제단이에요. 뭐 제단 쌓으라니까 돌 쌓고 참 잘 쌓았다. 관람하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제단을 쌓는다는 말은 니는 죽은 놈인 것을 인정하는가? 그 이야기에요.

흔히 교회에서 뭐라 하는지 압니까?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아라. 복을 받았으니까. 새벽제단마다 제발 새벽기도 헌금 좀 해라. 그 설교할 때 제단 쌓아라 하잖아요.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장차. 제단을 쌓아 봅시다. 제단 쌓습니다. 제단을 쌓을 때 방금 누가 올라가지요? 우리가 올라가는데 어떻게 올라간다? 산 자가 올라가는 게 아니고, 죽은 자가 올라갈 그때만 이 죽은 자에게만 제단 위에 죽은 자로서 나타난 분을 만날 수가 있어요. 이게 위층이 됩니다.

요새 주얼리 춤에 뭐냐 하면, 이티 춤 해서 손가락 춤 있지요. 내 손가락이 죽었다는 신호로 손가락이라면 진짜 메시아는 죽은 자로서 죽음 안에서 만나요. 산 사람은 메시아를 못 만납니다. 제단을 쌓아야 제단 위에서 둘 다 죽은 채로 만날 때 비로소 메시아를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는 뭐냐? 흠모할 것이 없지요. 흠모할 게 없다는 부러울 게 없다 이 말이죠. 우리가 보기 싫은바 되어서 우리도 그를 싫어한바 되지요.

사람이 좋아하는 게 사람이 뭘 기대하느냐 하면, 지금 살아있는 나를 더욱더 살려낼 수 있는 그런 분을 은근히 기대했는데 그런 자를 흠모했는데 저 사람 만나면 나도 살 수 있겠다 했는데 사람에게 흠모할 게 없고 부러울 게 없다는 말은 전혀 나 사는데 보탬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은 예수님은 이 땅에 제단 쌓기 위해 왔거든요. 본인의 제단. 본인 제단이 무슨 제단입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히브리서에 뭐라 합니까? 자기가 무슨 양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아닙니까? 주님이 제단을 쌓는 그 제단에 같이 합류해야 그래야 생명을 얻어요. 영생을 얻는다고. 그걸 하나님께서 야곱한테 미리 시키는 거예요. 이스라엘한테 미리 시키는 거예요. 제단을 쌓아라. 다시 말해서 장차오실 메시아는 이 땅에서 너처럼 죽으려고 오신 분이다.

흔히 말하기를 벧엘이 뭡니까? 하늘의 문 아닙니까? 문이니까 우리는 이리 생각해요. 여기 문이 있지요. 마치 우주인들이 오는 하늘 구멍이 뚫렸고 나는 그 밑에 서 있으며 박수치며 꽃다발해서 등장하고 웰컴 외계인, 이티. 이러며 만날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날 죽이고, 저쪽 죽고, 죽음 안에서 비로소 만나는 거예요.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나는 죽어서 주님 따라 간다 했지요. 아직 오지 마라 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뭐 되기 전입니까? 예수님께서 어린양이 되기 전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십자가 지기 전이기 때문에 베드로 못 와요.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이미 죽었다는 그분으로 이미 죽어버린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이 와버리면 죽은 분이 올 때 비로소 우리 속에 성령에 의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안에 있다. 이런 미친 소리하죠. 남들은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베드로는 지 혼자 성령 받아서 나중에 외치다 순교 당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남들은 모르는데 이미 산 사람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살아있었던 거예요. 그게 골로새서 1장에 그걸 뭐라 하느냐? 두 자로 ‘비밀’이라 해요. 조금만 더 하고 십분 쉽시다.

제단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야곱 보고 너 이런 것 하란 말이 아니고 장차오실 메시아가 제단을 쌓는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그 모션을 그 폼을 앞장서 해야 되거든요. 왜냐? 지 사명이니까. 제단을 쌓은 제단은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쌓는 그 제단이기 때문에 야곱이 거기에 제단을 쌓고 또 가는 곳마다 쌓고 쌓을 때마다 뭐가 없어져야 하느냐 하면, 점차 야곱을 사라지고 이스라엘로 하기 위한 사명만 남는데 이게 참 그림으로 설명해야지 어려워요.

야곱을 실선이지만 이스라엘은 점선이에요. 점선의 알맹이를 누가 채웁니까? 장차오실 메시아가 채우면서 메시아의 장차오실 하실 일을 하나님의 지금 야곱에다 채우는 거예요. 그래야 뭐가 됩니까?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안 되면 야곱한테는 왕이 안 태어나요. 왕은 어디서 태어나느냐 하면, 야곱이 뭐로 될 때? 이스라엘로 돼야 거기서 쫙쫙 왕이 빠진다고. 그래 돼요.

왕을 생산하는 기계가 되려면 야곱이 사라지고 이스라엘로 바뀌어야 되는데 이스라엘로 바뀌는 그 모든 흐름이 뭐냐 하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아서 장차오실 제단에 죽으실 어떤 희생 분의 오심을 알려주는 그 일에 동참할 때 야곱은 점차 이스라엘 화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변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래 이야기했지만 그 뒤에 나오는 것 보면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뒤에 보면 요셉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의 약전은 야곱의 남은 여생은 이러니라. 해놓고 나머지 요셉 이야기 나온다고. 요셉이 뭐냐 하면, 바로 요셉이 희생물입니다. 요셉이 희생물이 되어서 야곱이 이스라엘 됨을 요셉이 다 채워 넣어요. 요셉의 희생이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사명이 뭔가를 알려주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되죠.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장차오실 결국 야곱은 제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께서 장차오실 메시아의 할 일을 나에게 시키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분 쉬었다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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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