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부산 6월 3일 조지래드19 칭의와 화해강의[신학]

부산 6월 3일 조지래드19 칭의와 화해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603 칭의와 화해

우리교회(IP:124.♡.85.92)

08-06-03 19:18

우리교회(IP:220.♡.176.141)

08-06-11 18:11

부산080603a조지래드19신약신학-칭의와화해a

20080603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칭의와 화해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칭의와 화해]. 칭의에 대한 교리가 여기에 32과에 보면 무수하게 많이 나옵니다. 이 사람의 용어에 정통개혁계의 칭의 이론이 상당히 발전해서 거기에 대해서 찬반논쟁이 계속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을 그들의 칭의 이론에 대한 각각의 견해들이 어떤 견해들이 있는가 32과에 중요한 것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성경 봐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그런 칭의 교리 같은 거 알아서 뭐 하느냐? 나는 내가 믿는다는데 말이 많으냐? 이렇게 나갈 수 있거든요. 그림을 그리면, 여기 성경이 있다. 내가 여기 있다. 2008년도 내가 있다. 그럼 2008년에 내가 성경 봐서 나름대로의 칭의 교리를 수립했는데 틀릴 게 뭐가 있느냐? 이렇게 나오게 되면 신학하는 사람들이 발끈하죠. 너같이 그래 봤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이게 종교개혁 때부터 루터와 캘빈부터 칭의 교리가 발달해서 이 칭의 교리를 더 섬세하게 더 깊이 있게 하고 그걸 체계를 세우고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듣고 거기서 성경 전체내용과 이 칭의 교리가 어떻게 부합되는지, 모순되는지 안 그러면 잘 연결되는지 그런 것을 검토했던 오백 년 역사가 있다.

오백 년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고, 내가 보니 성경 보니 나오네. 난 믿는다. 할 때 그런 것은 깊이가 없다 이렇게 하지요. 주관적인 칭의 교리다. 다른 사람 의견은 안 듣고 주관적인 칭의 교리가 된다. 일반교인들도 그렇게 될 공산이 큽니다. 그럴 때 신학을 좀 맛을 봤던 사람들이 여기서 힘을 주지요. 이게 어디 아마추어가. 프로들이 오백 년 역사의 칭의 교리를 다 섭력했던 프로들이 칭의 교리를 어떻게 봤는가를 여기 잘 나와 있습니다.

여기 성경신학이란 것이 사실은 성경신학하는 것이 최근에 19세기에 생겼고, 그전에는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이란 게 구분되지 않았을 때니까 조직신학자들이 어디 하나에 치우침이 없이 그야말로 성경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성경 전체내용을 성경대로 접근해 나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론을 세웠는데 구원론 뭐 신론 있는데 그중에 구원론 중에서 하나의 칭의 교리로써 굳건히 자리를 잡고,

이것이 그동안 오백 년 동안 쌓아왔던 천주교와의 싸움에서 개신교가 밀리지 않고 개신교가 값을 하고 개신교가 자기주장을 차별화시킬 수 있는 그런 근거로써 칭의 교리를 상당히 강조했었습니다. 딴 건 양보해도 칭의 교리 양보 못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건 때려죽여도 양보 못한다. 그런 비장한 각오로써 개신교의 자존심을 걸로 오백 년 동안 연구를 해왔던 내용들이 여기 잠시 나와 있어요.

그런데 천주교나 바깥에서 말하기를 그러면 개신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리라하고 주장하는 너희들이 너희들 사이에는 의견이 일치되었습니까? 물을 때 이거는 답변이 궁하다 이 말이죠. 그래 너희들은 의견이 같은가? 안 같잖아. 그렇다면 개신교 쪽에서 하는 말이 우린 내부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죠. 내부조정하기 위해서는 갖가지 견해가 나왔다는 것을 전제하거든요.

같은 칭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놓고도 그 칭의에 대해서도 갖가지 의견이 제시되는데 그 갖가지 의견이 제시될 때 옳다, 그르다를 뭐로 판정 내리느냐 하면, 신학의 전체, 성경 전체내용과 얼마나 잘 조화가 되는가, 모순 없이 매끄럽게 연결되느냐? 만약에 칭의 교리 강조하다가 다른 것이 다치게 되면 그건 약간 문제가 있다 판정을 내리는 겁니다. 다른 교리들도 다 살리면서 칭의 교리는 칭의 대로 옳다면 누가 틀리느냐 하면, 결국 천주교가 틀렸고 개신교가 맞는 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천주교 학자들도 바보가 아니잖아요. 그들도 성경 무시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개신교로 안 넘어오고 천주교에 남아있는 이유가 있다 이 말이죠. 그건 뭐냐 하면, 개신교가 칭의 교리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 전체 신학에 모순을 일으킨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안 넘어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개신교에선 모순이 없다고 하고, 천주교나 다른 사람들은 모순이 있다고 하고, 모순이 있다면 지적해보라고 하고. 지적을 하게 되면 너희들이 신학의 기초부터 잘못됐구나. 이래 주고받고 하는 가운데서 개신교 나름대로의 정체성, 자아성이 슬슬 굳혀지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이것은 흔히 전통교회에서 이단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단 교단을 공격할 때 성경하고 전체하고 안 맞는다. 성경문자 일부하고는 맞는데 전체하고는 안 맞는다. 하는 그것 가지고 공격 많이 하잖아요.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라고 조용기 목사가 해석을 내릴 때 그 해석 자체를 두고 잘잘못이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성경의 핵심과는 안 맞는다. 이래 되는 거죠. 성경에 그 구절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성경이.

빌립보서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돼있어요. 항상 기뻐하라. 이 말은 다른 말은 안 기뻐하는 놈은 어디 간다? 지옥 간다. 그래 된다 말이죠. 어떤 특정 구절을 예를 들어서 이초석 같은 경우는 초대교회는 병 낫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병 낫는 기적을 인정 안 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단이고, 이초석 자기 집단은 진짜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죠. 방언했는데 방언 안 하니까 방언 안 하는 놈들은 지옥 가고 방언한 우리는 구원받는다. 이게 순복음교단의 특징 아닙니까?

이런 논쟁을 할 때 전체적인 조화가 어떻게 되는가를 남들이 뭐라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지금까지 나는 성경 봤다. 칭의 교리 봤다. 나 옳다. 이렇게 할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봤는가를 면밀히 검토해서 나보다 성경구절을 폭넓게 알고, 폭넓게 안다는 말은 그만큼 다른 것도 충분히 고려했다는 뜻이고, 좁게 알면 다른 것은 고려 안 하고 이것만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독단적인 경솔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신학 공부하는 것이 안 해도 될 문제는 아니에요.

빌립보서 3장에 나는 그리스도를 알고 배설물로 갖다버렸다 하니까 사람들은 갖다버릴 것도 없다 갖다 버렸어요. 사도바울은 이미 알고 갖다버렸는데 갖다버릴 게 뭔지도 모르고 버렸다 해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당신이 아는 그리스도가 뭐요? 가만 들으니 그것도 사도바울 입장에선 갖다버릴 거예요. 사도바울이 뭘 갖다버렸는가? 그 사도바울이 갖다버린 쓰레기통을 뒤질 줄 알아야 되는데 사도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을 이걸 모르니까 남 흉내 내고 쓰레기통 다 들고 가면 되는 줄 알고 있다니까.

사도바울이 갖다버린 그 쓰레기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자신의 목숨이 들어있습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들어있어요. 자아까지 들어있다고요. 그런데 보통 예수하고 갖다버렸다고 해놓고는 자존심이 아직 안 버렸어요. 사도바울은 자기부인이 돼서 그런 걸 버렸는데 이거는 나는 예수님만 고상하고 딴 거 버렸다 해놓고 들어보면 전부다 예수가 아니고, 지 자존심이 들어있고, 오기가 들어있고, 지 고집이 들어있고, 이기주의가 들어있고, 자기 존재가 들어있는 그래놓고 뭘 갖다버렸다고 합니까? 심지어 자기 신학을 빙자한 자기 자존심이 들어있을 때 신학하는 사람들, 신학교 교수들이라든지, 공부 좀 한 사람들, 래드도 포함되지요. 문제성이 많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래드도 소개하는 칭의 교리에 어떤 류의 칭의 교리가 있는가를 우리가 책을 통해서 보도록 합니다. 여기에 래드가 몇 사람을 거론하는데 몇 사람 해도 열 명 넘는 것 같아요. 여기 [칭의 교리의 중요성]이라고 있습니다. 번역이 그렇게 돼있어요? 칭의 교회의 중요성해서 슈바이처부터 나오지요.

알버트 슈바이처, 노벨평화상 받은 유명한 사람이요. [바울에게서 종말론의 중요성을 절감한 슈바이처는 믿음에서 얻는 칭의를 출발점을 삼으면 바울을 오해하게 될 것이라며 이 교리는 중심 분화구에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얻어지는 구원의 신비적인 교리의 가장자리에 긍정된 보충적인 분화구이다.]

첫 번째 슈바이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의 중심을 칭의 교리를 삼아서는 안 된다 이래 보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신학이 그걸 지진이라면 그 지진의 진앙지, 중심에는 슈바이처는 뭐로 보느냐 하면, ‘인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봐요. 예수 안으로 보기 때문에 신비죠. 성령 안에서 신비다. 신비로 보기 때문에 칭의 교리는 중앙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바깥에 결과로 해석돼야 된다. 칭의라 하는 것은 이 신비, 예수 안의 신비가 바깥으로 나온 그러한 결과물이다 말이죠. 어쩌면 찌꺼기라 할 수 있고, 결과물이다 할 수 있고 이렇게 하죠.

그 다음에 [앤드루스는 사바티에와 같은 의견에 따라서 칭의를 정하여진 의에 대한 고차원적이고 세련된 개념 형성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법적이고 열등한 관념] 칭의 교리는 법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사랑으로 사도바울에서 법을 내세운다 하는 것은 다시 후퇴하는 것이 된다. 이래 봤어요. 이거는 앤드루스. 칭의라 하는 것은 약간의 조약한 관념 또는 약간의 후퇴한 개념, 후퇴한 체계, 뒤로 물러간, 수준이 낮은 약간 천박스럽다 하는 거예요. 법적으로. 여기는 열등한 그러한 이론이다. 이래 보는 겁니다.

스튜워트란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사상, 경험할 수 있는 단서를 칭의에서보다 그리스도의 연합에서 찾고 있다. 이건 연합이죠. 그러니까 슈바이처 예수 안하고 약간 다르죠.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거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 거기에

그리고 데이비스은 브레데와 더불어서 데이비스는 말하기를 뭐냐 하면, 칭의라 하는 것이 중심이 안 되는 이유는 사도바울에서 칭의가 전부를 차지하는 게 아니고, 칭의는 어떤 이론이냐 하면, 그 당시에 유대교와 유대주의와 대항하기 위해서 예수 안에 있던 새롭게 형성된 그 하나님의 복음이 저쪽의 유대주의 대항하다 보니까 하나의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 칭의 교리를 내세웠다. 왜냐하면 저쪽에선 행함으로 구원받았다 하니까 아니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해서 나온 거다. 일종의 저쪽을 치기 위한 무기인데 무기를 센터에 둘 순 없는 거 아니냐.

예를 들어서 비빔밥을 먹는데 비빔밥 어땠어요? 참 맛있어요. 이러면 될 텐데 아, 비빔밥 먹는 숟가락 참 이쁘데. 이러면 비빔밥 마련해준 기분 나쁘잖아요. 숟가락도 제공한 건 맞지만 숟가락 가지고 뭐 퍼먹으라고? 비빔밥 퍼먹으라고 했는데 아, 숟가락 참하데. 다른 데 가면 젓가락만 내 놓더니 숟가락 내놓다니.

젓가락만 내놓는 게 유대주의라면 사도바울은 비빔밥 퍼먹는 숟가락 내놓는 숟가락이 뭐에 해당된다? 칭의인데 그것은 뭘 퍼먹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한 건데 그걸 세상에 숟가락 자랑하고 숟가락이 전부다 하고 갖고 다니면 되느냐 하는 이야기에요. 역시 이것도 다 개신교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중심지는 뭐냐 하면, 데이비스는 뭐냐 하면, 유대주의와 대항한 것이고 실제는 성령에 관한 강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 말고 쭉 넘어가 봅시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칭의의 배경]이란 걸 통해서 유대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유대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참 중요한 게 들어있어요.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봤는가? 지금 이 사람이 유대주의를 언급했는데 실제로 유대주의와 좀 달라요. 래드가 주장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 사람이 일단 봤던 유대주의가 어떤 것인가 보면, 여기에 보면 유대주의들은 유대교는 일종의 당좌예금으로 묘사되어서 하나님의 계산 장부에 올라있는 대변 기입액과 차변 기입액을 매일매일 완전히 결산된다. 매일 결산된다는 게 강조해요. 뭐냐 하면, 차변은 뭐가 되겠습니까? 착한 일 한 것, 선행한 것, 어떤 공덕을 쌓은 것 이게 차변이고, 대변은 뭐가 되겠어요? 나쁜 짓 한 것, 말씀에 어긋난 것.

지금 래드가 이야기한 유대주의에서 우리가 하나 상당히 염두에 둘 것은 뭐냐 하면, 유대주의가 결코 온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 주의가 아닙니다. 유대주의가 온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걸 저희들도 알아요. 인간에겐 절망이란 걸 압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토라, 토라라 하는 것은 토라는 세 종류가 있지요. 성문서, 지혜, 역사서. 역사서 해도 되고 예언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토라가 하나님의 말씀이 중간에서 다 지킬 수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네가 지향성,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거룩해야 돼야 돼. 마음이 동하여 그쪽으로 향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율법이 토라에 의해서 다른 민족과의 차별되는 특성이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이걸 가지고 ‘아들’이라 해요. 아버지에게 아들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게 상식이죠. 아버지에게 아들이 있다. 부모 있으니까 자식이 있지.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린 아버지에게 아들이 있다 할 때 어느 부잣집 있을 때 아이고, 당신 재산이 얼맙니까? 오백 억 됩니다. 아이고, 좋겠다. 아들 좋겠다. 아들 몇 명입니까? 한 명입니다. 아이고, 그 아들 좋겠네. 자기 아버지 오백 억 되니까.

그래 되는데 만약에 하늘나라의 아버지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 중에서 이스라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라 했거든요. 아버지라 부른다는 말은 이것은 곧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도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참 유대인들에게는 고맙게도 오직 아브라함 자손 외에는 아들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아들이 있다는 생각, 여러분 그런 아이디어를 가집니까? 다른 민족은 있을 수 없어요. 다른 민족은 왜 없느냐 하면, 모든 피조물이 다 신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냥 섬기기만 하면 그만이지 족보 따질 필요 없잖아요. 당신은 누구 아들이요 따지는 것은 아버지가 많을 경우에는 당신은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묻는데 한 아버지, 모든 사람이 아들 같으면 따질 필요 없이 신을 섬기면 다 아들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이방종교의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라면 유대인들은 그게 아니고, 지나 개나 아들이 아니다 이 말이죠. 지나 개나 아버지가 되는 거 아니다 말이죠. 사람에게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는 것처럼 똑같이 하나님에게도 지 자식이 있다는 이 아이디어는 이건 놀라운 겁니다.

왜 놀라우냐 하면,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 하나님이 만든 사람이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만들었다고 해서 아들이다, 아니다? 아들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럼 아들 아니면 뭐냐? 저주의 자식이다. 그거는 유대인들의 토라, 민수기에 의해서 발람, 발람은 저주의 아들 아닙니까? 아말렉, 저주의 아들입니다. 특히 에서, 저주의 아들이라고. 이거는 철저하게 그들은 규정합니다. 아무나 아버지가 아니고, 아무나 아들이 아니란 말이죠.

출애굽기 4장 봐라. “너는 내 아들이라” 했잖아요. 시편 2편에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길에서 멸망당한다. 유대주의에 의하면 누구 이야기합니까? 이스라엘에게 편입되지 아니하면 네가 졸지에 저주받는다. 이런 뜻이에요. 이사야 53장에 하나님의 종이 고난 받지요. 누굴 이야기합니까? 이스라엘 본인을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는 잘 들어보세요.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말을 안 하고, 이 세상 사람들은 아들 아니면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이게 유대주의 결정판입니다. 이런 내용은 여기 안 나와요. 래드 책에 안 나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어디 나온 이야기죠? 요한복음 5장이죠. 아들을 공경치 않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를 공경 않는 자는. 요한복음 14장에 아들을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갈 자가 없느니라. 이제 유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때려죽인 이유를 알겠지요.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라 하니까 뭐라고 합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 애비는 마귀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보면, 니는 마귀 새끼, 뱀 새끼다. 예수님이 맞아죽을 짓을 했지요.

이건 단순히 그러면 그러고, 말면 말고가 아니고 유대주의 근원자체, 바탕자체는 부정입니다. 이거는 수천 년 역사자체를 부정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이야기하는 게 예수여, 공격을 하고 비난을 하더라도 우리 아브라함 자손한테 하지 말고 저 개 같은 이방인들에게 하라 말이야. 왜?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렇게 해 왔으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토라라 하는 게 보통 토라가 아닙니다. 말씀이 아닙니다. 이거는 모세가 직접 상장 받듯이 직접 받은 거예요. 받은 거기 때문에 말씀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강의 중에 나와요.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하고 유대인은 원수지간입니다. 에베소서 3장에 의하면. 율법 받은 민족과 안 받은 민족과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욕하려고 하거든 하나님

왜 율법을 준 줄 알아요? 아들이라고 준 거예요. 남은 아들이 아닌 거예요. 율법이 없으면 아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구원 받으려면 유대인 되든지 안 그러면 우리한테 맞아죽든지 해야 돼요. 하나님이 저주하실 것이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 약 올릴 일 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개 같은 이방인이 아브라함 본 자손보다 천국에 앉으리니 돼있거든요.

사울이란 사람이 스데반 사람 때려죽여도 합당하고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의논해서 저 자는 죽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위해서 합당하다고 그리고 민중들이 예수를 죽이고 바나바를 풀어놓으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게 유대주의를 알아야 예수님 죽음도 이해가 돼요. 유대주의가 민다나오 필리핀 원수지간한테 그런 소리한 게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아들 되는 그들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선택된 하나님의 택정한 아들에게.

그래서 유대주의 오늘 여기 나오는 교재 나오는 유대주의 보면 그런 것은 다 빠져 있는데 여기 있는 건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유대주의는 인간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뭐라 했어요? 마음이 우리는 하나님 아들이며 우리는 죽으나 사나 이 토라에 의해서 이 말씀에 의해서 거룩한 하나님 율법에 의해서 우리는 거룩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으로 성의죠. 성의를 보이면 하나님의 매일 청산해줘요.

성의가 뭐냐 하면, 나 이것이 토라에 의해서 잘못됐고, 이것은 토라대로 말씀대로 지켰습니다. 라고 자기 스스로 장부를 만들어 내보여요. 주여, 이 말씀은 내가 잘못됐고, 이 말씀은 지켰나이다. 이렇게 하면 지킨 것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주고, 나쁜 것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주는 것이 매일, 내일까지 미루지 않지요. 매일매일 청산을 해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뭐라? 자선이다. 자선을 가지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라 한다.

이 의가 제일 먼저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의를 얻었다 할 때 ‘믿음으로’를 강조하지 않아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선을 받아서 의인되었다는 걸 강조합니다. 믿음으로를 강조하지 않아요. 믿음을 강조해서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도바울이에요.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아요. 뭘 받았느냐가 중요하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하는 그걸 강조하지 않아요. 사도바울은 자기를 부정해야 된다고 본 것이고, 유대인들은 부정하지 않더라도 받아 챙기면 될 것 아니냐? 이래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자기를 부정해버리면 처음 믿을 때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부정해야 되기 때문에 그 다음에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그 다음에 착하게 살겠다는 성의표시가 긍정될 수 있는 신학적 근거가 없어져버려요. 말 좀 어렵게 했어요. 뭐냐 하면, 믿음으로 전 못난이입니다. 그저 자비 베풀어주시면 고맙지요. 라고 일단 받아놓고 그 다음에는 어매, 기 살아. 해서 착한 일 하려하면 또 바울이 나와서 또 행함이야. 이러면 어매, 기 죽어. 또 행함을 부정해야 되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기들 신앙이 뭐냐 하면, 차변, 대변 공덕을 쌓아야 될 것 아닙니까? 공덕 쌓으려면 뭘 따져야 돼요? 날마다 뭘 점검해야 됩니까? 자기 행함을 점검을 해야 되잖아요. 자기 행함을 점검해야 되는데 자기 부정하면 자기 행함을 부정하게 되니까 공덕을 쌓을 게 없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리잖아요. 지금 이게 유대인들한테 하는 것인지 오늘날 성화론자에게 하자는 건지 구분 안 되지요. 똑같습니다. 둘 다.

이 책에 보면 이래 돼있어요. 대변 기입액과 차변 기입액은 매일매일 완전히 결산된다. 만약에 그 수지가 대변 쪽이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고, 차변 쪽이면, 내 말을 반대로 했는데. 대변, 차변 반대로 해도 괜찮지요. 하여튼 한 쪽에 착한 일이 많으면 의롭게 되고, 차변 쪽이면 정죄를 당한다. 그러므로 잔액계정에 따라서 심판받는다. 항상 마음속에 계산기가 있어야 돼요. 그럼 뭐냐? 토라의 공덕이 뭐냐? 자선과 자비를 베푸는 것.

그래서 사도바울이 주장 가운데서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여김. 로마서 4장 5절. 일한 것도 없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한다는 그 대표자로 누굴 내세웠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서 경건치 않는 아브라함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잖아. 여기에 내세울 때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사도바울을 예수님처럼 죽이려고 고소를 했지요. 그래서 체포돼서 로마까지 끌려가잖아요.

그러니 사도바울이 가는 길이 꼭 예수님이 십자가 가는 길하고 꼭 같아요. 그 말은 오늘날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뭘 전철을 되풀이해야 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가는 길과 예수님 가는 길을 되풀이해야 돼요. 그럴러면 우리 안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우리 안에 유대주의도 있고 또 유대주의한테 욕 얻어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내부에서 또 내가 나를 정죄하고 내가 나한테 욕 얻어먹어야 돼요. 내 속의 새로운 피조물이 나라는 옛날 피조물로부터 욕을 얻어먹어야 돼요. 니가 그래서 공덕 언제 쌓고, 니가 그래서 저주받으면 우에 할래? 이런 식으로.

그래서 우리 속에서 항상 값없이 의롭게 된 그 존재를 가지고 성경에서는 사도바울은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새로운 피조물 아닙니까? 새로운 피조물 우리가 새끼를 키우는 기라. 새로운 피조물을 거부하는 자가 누굽니까? 헌 피조물 아닙니까? 나라는 헌 피조물이 나라는 새로운 피조물을 내 속에서 계속 핍박을 하고 압박을 가할 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살아있는 겁니다. 남이 구박하기 전에 내가 나를 구박해요. 나의 양심이 나를 구박한다고. 값없이 의롭게 됐다 해도 백날 해도 내가 용납 안 하는 거예요.

집안이 잘 안 될 때 교회가 잘 안 될 때 내가 일 만들어요. 갑자기 일이 꼬이면 어쩔 줄을 몰라요. 야, 기도 시간 늘려야 되겠구나. 하고 갑자기 당황해하고 성경을 두 장 더 봐야 되겠구나. 아이구, 심방을 해야 되겠구나. 갑자기 지가 당황해서 난리라. 교회가 지 교회라. 주님의 몸이 아니고 자기 교회, 지 책임 하에 있는.

갑자기 목사님 자녀 아파 보세요. 목사가 안절부절 입니다. 사모님은 더하고. 생전 기도 안 하다가 기도하고 난리입니다. 비상 걸렸어, 비상 걸렸어. 하나님의 저주받았다고, 징계가 떨어졌다고. 그 순간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하나님이 값없이 경건치 않은 의롭다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가려지지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려버린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죠.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했는가? 누가 이런 얘기했지요. 베드로가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어요. 천사가 얘기했지요.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느냐?

길거리에 전부다 죽은 자입니다. 그들에게 기대하지도 말고, 의지하지도 말고, 기대 걸지도 말고 볼 것도 없어요. 우리는 산 자를 찾아가는 산 자의 사람인데 살다보면 죽은 자가 부럽고, 죽은 자를 탐내고, 나도 같이 저 사람처럼 못 돼서 안달내고. 그래 되면 주께서 성령을 넣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살림 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값어치가 내가 내 값어치 내가 짓밟아 버려요. 내 안의 그리스도를 내가 죽인다고.

이 유대주의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엄청난 유대주의가 우리 안에 턱하니 지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유대주의가 신학의 역사가 이천 년이 넘어요. 이천 년 동안 인간의 모든 지혜를 다 쏟아 부어서 만든 게 유대주의입니다. 그러니 유대주의가 이러한 인간의 육적인 속성을 다 보여주는데 개신교 오백 년 됐다고 해서 유대주의가 없어질까요? 매일같이 유대주의라. 천주교도 물론이고. 이슬람도 물론이고.

여기서 래드가 말하는 칭의 이론이 여기 다른 사람의 이론은 뒤에 나오니까 그때 하고요. 래드가 말하는 칭의 이론에 아주 강력하게 나는 칭의는 이렇게 본다고 강력하게 내세우는 핵심이 있습니다. 칭의는 뭐냐? 종말론적이다. 이 대목입니다. 하여튼 어느 신학자든지 래드가 이 이야기할 때는 신났어. 신학자들 나와 봐. 한방에 다 조져버리죠. 개뿔도 칭의도 모르면서 까불고 있어. 칭의는 뭐냐? 종말론적이야. 이 한 마디로 모든 이론을 조져버리는 거예요. 이 사람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그래서 래드 글을 쭉 읽어보면 전체내용에서 어느 대목에서 가장 신이 나느냐 하면, 이 대목에서 신이 나요. 다른 사람들은 쥐뿔도 모르거든. 신난다. 칭의는 종말론적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칭의는 우리가 얻고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메시아가 떴다 하면 메시아 떴기 때문에 우리에게 덮쳐지는 것이라 하는 거예요. 칭의가. 기존신학은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의롭게 되느냐? 내가 의인이라 하는 것을 어떻게 이 칭의를 획득하느냐? 여기에 관심이 있다면 래드는 그걸 전부다 일소에 붙이고 웃기고 있네. 일소에 붙이고 종말론적이란 뭐냐 하면, 래드가 이론에 보면 약간 몇 퍼센트 부족한 게 있어요.

하여튼 래드의 종말론적 이야기에서 보면, 메시아가 떴다 했을 때에 값없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종말이 될 경우에만 나타나는 아주 독특한 기이한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종말이란 게 뭐냐 하면, 이게 심판 날이거든요. 좀더 핵심적인 걸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한번 여러분 물어봅시다. 성도가 심판을 언제 받습니까? 유대주의에 의해서 심판은 마지막 날 심판 받지요. 최종 너는 의인이야, 넌 죄인이야. 언제 받습니까? 마지막 때 종말은 심판 날이고, 종말에 실시하는 심판에 의해서 너는 의인이야, 죄인이야 하면 되는데 래드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게 칭의라 하는 것은 법적으로 칭의라 하는 법이라는 것은 재판정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심판 장소에서 너는 의인이라 판정하는 것은 다른 말로 ‘너는 심판없다’ 이 말이에요. 나 의롭게 되는데 좀 주세요. 이게 아니고 조금 줄게. 미리 줄게가 아니라 마지막 최종 심판에서 아무개, 아무개는 너는 의인으로 선포합니다. 라는 것이 칭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요.

칭의를 내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전 우주를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앞당겨서 재판을 실시했는데 그 재판에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돼있는 아무개한테는 최종 법적으로 의인인 것이 합격이 판정이 났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이미 종말이기 때문에 종말의 최종심판에서 무슨 짓을 해도 이미 의인으로 판정이 된 겁니다. 그래서 래드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무죄상태가 아니고 중립상태가 아니라는 거예요. 심판을 받아야 될 중립상태가 아니고 이미 최종 판정이 나버린 의인이 되는 겁니다.

최홍만이가 5급 장애자 판정 받았습니다. 다시 군에 안 가는데 또 가서 자기 신체 판정해달라고 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기라. 니 군에 오지마라에요. 오면 귀찮으니까. 키 큰 데 침대는 우에 할 거예요? 오지마라 이 말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 보고 지옥에 오지 말래요. 천국 가래요. 우째우째 살다가 멋대로 살다가 천당에서 만나자 이 말이에요. 천국에서 만나재요. 왜요? 판정을 이미 받아버렸어요. 의인이라고.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외쳤던 복음이라는 겁니다. 의인은 뭐로 살리라? 믿음으로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 수도 있고’ 이게 아니고, ‘믿음으로 살다가 죄인 되고’ 그것도 아니고, 의인은 산다, 안 산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뭐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로마서 1장 몇 절입니까? 로마서 1장 찾아봅시다. 1장 17절, 복음에는 뭐가 나타났다 했어요?

복음의 왜 기쁜 소식이냐 하면, 잘해라. 임마. 똑바로 해. 앞으로 심판이 있어. 훌륭하게 살아. 이게 복음이 아니고 복음에는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 의를 믿는 자에게는 이미 칭의, 판정으로 법적으로 의인이 돼버렸다는 겁니다. 이제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거예요. 더 이상 그게 없어요. 더 이상 우리한테는 심판이라는 게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심판대에서 우리는 의인으로 확인될 그런 심판 밖에 없어요.

여호수아의 옷을 벗기고 마귀들, 사탄, 인간의 최후의 적이 사탄 아닙니까? 인간을 유혹했던 자니까. 인간을 유혹해서 인간을 죽음의 파멸에 저주에 빠뜨렸던 사탄 앞에서도 하나님의 의는 빛을 발하죠. 사탄이 너는 저주받는다. 니는 지옥 간다. 백날 손가락질 하는 사탄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사탄이 보란 듯이 마귀가 보란 듯이 한번 봐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의가 입힌 사람을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그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그리스도니 이 사랑에서 환란, 핍박 어떤 게 올지라도 이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게 사도바울의 중심이 아니라면 뭐가 중심이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래드 이야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도 좋고, 연합도 좋은데 그 안에서 폭발, 터져 나오는 게 뭐냐? 하나님의 의가 폭발해 나온다. 왜? 이게 복음이기 때문에. 연합이 복음이 아니고, 인이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복음이다. 어떻게 구원받는가가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복음이다. 그러니까 종말에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우리는 뒤집어쓰는 것이 되죠. 무거운 솥뚜껑, 무쇠 솥뚜껑에 뒤집어쓰게 되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 의가 된다.

어떤 사람은 이걸 다시 사적으로 의를 알았으니 착하게 산다. 이래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래드는 반대하기를 뭐냐 하면,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됐다. 이 대목을 무시하지 마라. 백날 의인되려면 바르게 착하게 살아야 의가 유지되지, 나쁜 짓 하면 받은 의도 놓쳐버린다. 이러지 말란 말이죠. 그러면 다시 어디로 빠집니까? 유대주의로 빠지지요.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뭐 됐다? 의인 됐다는 거예요. 로마서 5장 19절.

그래서 래드는 말하기를 우리가 기다리는 의의 소망은 심판에서의 방면 즉 의롭다는 법적 승인. 여기서 제목이 [칭의와 화해] 아닙니까? 그래서 신학자들이 난해한 게 뭐냐 하면, 칭의에서 화해로 갈 것이냐? 아니면 화해에서 칭의로 갈 것이냐? 아니면 칭의 따로, 화해 따로냐? 하는 그게 신학적으로 또 골치 아픈 이야기죠.

만약에 칭의에서 화해라든지, 화해에서 칭의로 간다든지, 칭의, 화해 따로 돼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법적으로 의인 돼놓고 화해 안 하면 지옥 가는 수가 생기요. 이게 바로 벌콥의 조직신학이나 이런 조직신학의 문제점 아닙니까? 구원의 단계를 설정해버리니까 단계, 단계 중간에 단계 안 밟고 스톱해버리면 지옥 가는 수가 생겨버려요.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에요.

그래서 제가 그게 아니고 라고 쉽게 설명한다고 나름대로 한 게 뭐냐 하면, 다이아몬드 다양한 면을 제시했죠. 다이아몬드의 면들이 각이 꺾여 있잖아요. 이래 보면 칭의고, 방향 틀어서 보면 이게 화해고, 영화고, 이래 보면 중생이고, 소명이고, 믿음이고, 부르심이고. 하나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연합된 그 모든 상태를 이렇게 면을 조사해보면 믿음 이렇지, 이걸 줄로 쪼개서 자, 이제 믿었으니 슬슬 소명 한번 받아볼까? 이런 식으로 나가면 중간에 만약 스톱해버리면 어디에 이르지 못한다?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다이아몬드의 다양한 면이라고 생각할 경우에 저쪽에서 뭐라고 반대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다면 구원의 뭐가 빠지느냐 하면, 구원의 시간론이 빠진다 이 말이죠. 울산에서 했던 어떤 목사님이 그런 질문했잖아요. 휴식시간에. 예수를 일단 믿어놓고 그 다음부터는 죄를 계속 받은 겁니까? 라고 질문한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구원이란 것을 이렇게 하나의 다이아몬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시간으로 봐서 내가 걸어가는 길로 보는 거예요. 내가 터벅터벅 걸어가야 될 길. 하니까 내가 걸어가는 길에 있어서 성령께선 그냥 도와주기만 하는데. 도움 받는 것도 내가 기도 착실히 하고 부지런 떨어야 성령이지 만약에 기도 안 하면 성령이 소멸되고 나가버리면 나는 가다가 힘 빠져서 지옥 가면 우야노? 하는 그런 일이 생긴다 이 말이죠.

그러니 시간론이 개입되면 뭐가 돼요? 성화론 돼요. 개신교의 오백 년 루터 이후에 제일 큰 이슈가 뭡니까?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화론 가지고 생긴 문제 아닙니까? 도대체 성화됐다는 인간들 나와 봐라. 구경 좀 해보자. 성화, 성화 주장하지 말고 나처럼 돼라. 성화됐다. 그럼 나처럼 된 인간 나와 보란 말이죠. 도대체. 그 인간이 이 성경 전체, 사도바울 명령과 규례를 몇 퍼센트 지키는지 구경 좀 해보자. 예수님 말씀대로 진짜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뽑아냈는지 보자 이 말이죠. 실제로 그런 사람 있지요. 고자 되려고 끊고 하는 사람 있지요.

영성 훈련했다는 사람 구경 좀 하자. 영성훈련 값이 어떤 값인지 도대체 어느 수준 됐는지 A급인지. A급 구경 좀 했으면 좋겠어, 정말.

이 복잡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일반직업을 가지면서 주일날 일년 내내 안 빠지고 나올 수 있는 그런 사람 있는가 생각해봐요.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취업할 때 주일날 지키지요. 토요일도 놉니다. 신신당부 약속했던 회사가 수출 물량하면 나발이고 주일이 어디 있어요. 불러내고. 주여, 나는 이제는 나는 회사 취직한 게 아니고 자영업하기 때문에 주일날 쉽니다. 개뿔을 문 안 열어. 예배 마치고 문 열어버리는데. 가게 문 닫고 교회 나온다고?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뭐, 자녀교육 확실히 시킨다고? 자식이 어디 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 봤든가요?

도대체 영성훈련 A급, 성화론 A급 어느 수준인지 구경 좀 하고 싶어. 아직까지 구경 못했어. A급을. 테레사 수녀 정치꾼입니다. 아마 이래 나오면 기초의원, 국회의원 나올 사람. 자꾸 지금 칭의라는 것은 칭의 다음에 화해 자꾸 순서를 정해요. 화해 다음에 칭의일까? 아니면 칭의 다음에 화해지 않을까? 이게 나 구원받고 싶은 욕망에서 뭔가 좋은 건 다 가져서 갈아야 그래야 내 구원 안심이 되는 양 여기는 것.

칭의 이론 뒤에 들어가면 칭의 이론에서 여러 가지 반대주장, 다른 주장이 나옵니다. 그건 다음 시간에 합시다.

우리교회(IP:220.♡.176.141)

08-06-11 18:15

부산080603b조지래드19신약신학-칭의와화해b

20080603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칭의와 화해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 칭의는 법률적인 의미인 것이다. 하는 이 대목에서 새로운 번역도 그래 돼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보면 래드가 테일러라 하는 사람과 스나이드 이 사람에 대해서 상당히 의식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노만 스나이드와 테일러의 이야기, 테일러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 또는 센다이, 뭐 히드렘 이런 분은 처음 들어봐.

이런 사람들이 로마서 칭의 이론을 상당히 의식하죠. 아까 이야기한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최근에 자기 시대의 사람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래드가 자꾸 의식하는 이 사람들이 무슨 칭의를 이야기했는지 그걸 살펴봅시다. 이 책에 나온 대로. 사람들이 책을 모르니까. 래드가 이야기한 대로 따라가 봅시다.

칭의는 법률적인 것이다. 그 중간에 가보면, 오래전에 센다이와 히드렘은 그들의 뛰어난 로마서 주석에서 논리적인 반대를 제기했다. 뭐냐 하면, 칭의의 법률적인 면을 인정하면서 칭의를 허구라 견주었다. 칭의는 허구다. 어째서 허구냐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믿는 자가 자기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간주되고] 시비는 거는 게 의로운 게 아니고, 의로운 것처럼 간주되는 것이지, 의는 아니다. 라는 주장을 센다이와 히드렘이 한 거예요. 의로운 것처럼 간주된다.

실제로 사람은 의롭지 않으며 오히려 불의하며, 로마서 4장 5절에 의해서. 아까 4장 5절 봤지요. 뭡니까?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한다. 이 대목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법부터가 하나님은 사실 그가 불경건할 때 의로운 사람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활은 그 기초부터 허구에 세워졌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이 누구냐? 테일러라는 사람이 반대하고 나섰어요. 의가 허구적인 것을 부인하고 실제로 전가된 의란 입장에서 칭의 교리를 해석한다. 근데 이게 또 문제에요. ‘전가된 의’ 이거 또 시비 거는 사람 또 있어요. 래드도 약간 시비 거는데. 전가된 의, 전가됐다는 것은 이동했다는 거죠. 저쪽 것인데 이쪽 걸로 옮겼기 때문에 허구가 아니고, 실제로 의란 겁니다. 하지만 전가된 의에요. 전가된 의는 성경신학자들이 주장한 게 아니고, 오래전부터 이미 조직신학자들이 주장했던 건데 성경신학자들이 조직신학자 주장에 동의하는 거죠.

[의가 죄인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은 겁자에게 용기를, 바보에게 지혜를 전가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인하여 한 사람이 의롭다 여김 받았다면 그가 절실한 의미로 의롭기 때문이지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의롭기 때문에는 아니어야 한다. 하는 것이 테일러의 주장입니다. 상당히 갑자기 테일러가 복잡한 문제로 이끌지요. 이런 주장이 왜 복잡하냐 하면, 성경 구절을 여러 가지 칭의에 대한 구절을 다 끌어 모으면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아서 복잡해지는 겁니다.

그는 말하기를 바울의 사상에서 한 사람이 의롭게 여기심을 받을 때에 그는 영적인 동향으로 그는 더 이상 불경한 자나 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칭하는 더 타당한 의미는 그는 참으로 의인이다. 테일러의 이 말을 그는 비록 완전히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마음과 의향으로 의롭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매 그렇게 하여 우리 안에 우리가 자랑할 수 없는 의로운 마음을 창조하신다. 라는 것이 테일러의

여기에 대해서 테일러가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들어봅시다. 테일러 앞에 뭐가 있었어요. 센다이. 일본사람 같아. 현대를 현다이 하지요. 센다이가 뭐라고 합니까? 칭의라 하는 것은 허구다. 테일러는 허구가 아니고 실제로 우리가 의인이다. 여기에 반대한 사람이 뭐냐? 노만 스나이드. 스나이드는 말하기를 테일러가 칭의를 법률적 의의 영역에서 제거할 때 충분히 고찰하지 못했다. 스나이드가 칭의가 전가된 의와는 아무 관계없다는 데서 데일러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테일러가 의로운 마음의 전달을 칭의로 해석하는 혼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을 전달하는 것 하고 의롭다고 하는 것 하고 같은 게 아닌데 그만 그걸 같이 봤다는데서 지금 테일러가 오해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뒤의 말이 더 어렵습니다. 스나이드는 칭의와는 관계없으며 의를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한다. 개혁신학의 견해와 테일러의 견해는 둘 다 하나님의 구원의 요건을 어떤 종류의 의를 요구하셨기에 틀림없다고 가정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상당히 문제가 어려운데

뭐냐 하면, 여기서 갑자기 노만 스나이드는 테일러는 고발하는 정도가 아니고 뭡니까? 개혁주의신학의 칭의 개념을 공격하고 잇지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어떤 의를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 잘못이라는 거예요. 죄인에게 하나님이 와서 어이, 이근호. 예. 의 내놔라. 없는데요. 죽을래. 이렇게 요구했다는 거예요. 없지. 없으면 내 것 줄까? 의 부어서 의 내놔라. 여기 있습니다. 옳지. 됐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요구했다는 뜻에서 없는 자기 백성에게 없는 의를 줘가면서 요구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스나이드는 말하기를 의는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근호를 구원하려고 하는데 의가 없어서 못하고 있다가 자기 것 줘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에 의해서 생겨버린 것이 뭐냐? 칭의라는 거예요. 너는 종말에 이미 법정에서 의인으로 됐다. 이거는 뭔가 쓰나미처럼 해일이 밀려왔는데 배가 산으로 막 간 거예요. 뭔가 밀려왔기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간 거예요. 뭐가 밀려왔기 때문에 우리가 졸지에 의인으로 선언 받은 것이다. 라는 노만 스나이드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이건 조직신학하고 또 다르지요. 조직신학에서 주장하는 전가된 의 그런 개념을 다 부셔버리지요. 의는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그게 어디하고 연관되느냐 하면, 이런 게 좀 어려운데. 이게 뭐냐? 그래 돼버리면 노만 스나이드에 있어서 칭의 다음에 화해가 아니고, 뭐부터 먼접니까? 화해가 먼저고 화해결과로써 칭의가 되는 거예요.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한 거예요.

화해가 뭡니까? 우린 이제 좋은 관계다. 비록 네가 나를 원수라고 보지만 원수라는 것은 좋은 관계로 해소돼야 된다. 네가 나쁜 짓한다고 저주하고 이런 일은 없다. 왜? 먼저 화해를 제시한 분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제시한 화해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그 증거가 뭐냐? 화목제물이라 하지요. 고린도후서 5장 19절,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그냥 제물이 아니고 화목제물로 화해하겠다는 의사로 넌 나하고 이제는 좋은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로 화목제물 주시고, 다시는 저의 죄를 저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것, 이게 화해라고 본 겁니다.

사도바울은 구약에 나오는 제사에서 화목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서 다 이뤘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또 복잡해져요.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그렇게 했느냐? 다시 말해서 화해가 ‘주관적’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주관적이란 말이 더 어렵지요. 화해가 주관적이냐, 아니면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면 어떻고, 객관적이면 어떠냐? 문제 또 나오겠지요.

주관적이면 개인적인 감정문제겠지만 객관적이면 역사적이 돼요. 그래서 에베소서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화해했다 할 때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갑자기 개인적인 사적인 감정이 등장하는 게 아니고 갑자기 뭐냐 하면,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막혔던 담이 헐어지니까 이거는 주관적이 아니고 이건 역사적이죠. 역사적으로 유대인, 이방인 차별이 없지요. 화목제물로 줬는데 그걸로 생긴 여파가 뭐냐 하면, 율법이 폐해버려요.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있어요. 사도바울이 글 쓸 때 어렵게 썼어요. 뭐냐 하면, 율법을 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목이 되고 십자가에서 이제는 화평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화평의 하나님이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 십자가 안에서 화평이라 했거든요. 이게 주관적이 아니고 개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이게 뭐라고요? 역사적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문제다 이 말입니다. 나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구원받았다, 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하나님이 세상 자체를 나만 다루는 게 아니고 세상 전체를 재편하려고 하고 하나의 구조를 다루고 있는 입장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려운 말이 들어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뭐 됐다?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 배후에 누가 있고? 진짜 참 하나님이 있고, 이방인 배후에는 누가 있고? 악마가 있잖아요. 결국은 하나님 편에 속한 사람과 이방인 편에 속한 사람이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거는 어디 하나님하고 어디 악마하고 같이 화목 됩니까? 원수지요.

원수를 철폐했다고 이야기하면 될 텐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을 폐함으로써 없애고 찢어버림으로써 이제 원수지간이 서로 유대인이 이방인이 화목 됐거든요. 그러면 율법은 왜 끼어들었느냐 말이죠. 율법이 끼어든 목적이 뭐냔 말이죠. 율법이 끼어든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원수 맞다, 원수 확실함 이걸 확정짓기 위해서 율법이 끼어들어야 되고, 율법이 안 끼어들면 결국은 인간은 거기서, 거기서 똑같은 존재라고 드러날 뿐이죠. 참 논리가 무척 어렵지요.

율법이 안 끼어들면 지가 십계명 받은 놈이야? 나와 똑같지. 이래 될 수밖에 없는데 율법이 끼어드는 순간 저쪽은 우리의 원수고, 저쪽은 봐서 우리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근데 서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수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로가 달아서가 아니라 배후에 계신 분이 달라서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율법을 이루어서 원수가 해소됩니까, 율법을 폐해서 원수가 됩니까? 왜 사도바울에서는, 마태복음에 보면 뭐라 돼있어요? 예수님께서 5장에서 마태복음 산상설교에서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려 함이 아니고 온전케 함이라. 이게 유대적인 사고방식 가지고 해석하면 이래 돼요. 내가 율법의 미진한 것을 다 채우려 함이니. 이래 돼있어요. 유대주의를 연구한 사람이 마태복음 해석에 보면 그래 나옵니다.

미진한 보충될 것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온 것이지 완전케, 온전케 같은 뜻이에요. 이만큼 찼는데 약간만 차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에서 해석하면 차는 게 아니고, 율법 자체가 엉뚱한 길로 간 것을 바른 길로 가는 거죠. 한쪽이 미진한 것을 채워서 완성이 아니고, 방향 자체가 성질 자체가 다른 성질을 이쪽에서 보면 옳은 성질로 바꾸는 거죠. 율법이 율법 값을 하게 하는 거고,

이쪽은 뭐냐? 양적인 개념이죠. 양적으로 모자란 부분을 마저 채워서 미진한 걸 채워서 완성되고 양적인 개념의 완성입니까? 아니면 질적으로 율법 자체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제대로 보려 하면 율법은 이렇게 쓰여져야 율법이다, 라고 질적인 차이냐 말이죠. 둘 중에 어느 것이 온전을 위해서 오셨느냐 하는 그 문제가 생긴다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 산상설교 듣고 오해했잖아요. 몰랐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 첨 봤다. 하지만 그 사람 속에는 유대인 속에는 뭡니까? 양적으로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걸 마저 채웠구나 하는 사람만 있었지, 그 율법의 그러니까 뭐라 하느냐 하면, 열심히 따라 붙으면 언젠가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저 채울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산상설교 내용이 그래 되는 겁니다. 뭐라고 돼있어요? 조금만 노력하면 된단 식으로 된다고요. 산상설교 내용이 그런 식으로 돼있어요. 얼른 보면.

네가 간음 안 했어, 바람 안 피웠어? 그것 가지고 양적으로 모라라. 그럼 뭐해야 됩니까? 마음속으로 간음 안 해야 온전히 다 채워. 라는 식으로 예수님이 그렇게 설명했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문자적으로 본 사람은 자기가 양적인 의가 모자람으로 여겼는데 거기에 마침 예수님이 동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이죠.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어디 못 간다? 천국에 못 간다. 그러니까 야, 이거 우리는 바리새인을 추월하고 이제는 예수님이 원하는 것까지 올라서면 우린 구원받겠구나. 하는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말씀이 산상설교가 되는 겁니다.

또 있지요. 뭐냐 하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갈 것이 아니고, 내가 이야기한 산상설교대로 다 지키지 아니하면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마지막에 무너져 내린다고. 그러니까 이 말은 산상설교처럼 다 해야 우리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되는 거예요. 그 반석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의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산상설교의 문자대로 보면 예수님의 복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내가 그 산상설교를 다 지켜야 반석이 되는 해석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그 해석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해석을 듣고 요시, 앞으로 열심히 더 해야지. 이런 생각을 낳게 만들어요. 제자들에게.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하고 난 뒤에 아무 말씀 지킬 가능성 전혀 없는 문둥병자가 공짜로 구원받잖아요. 그래 놓고 하는 말이 내가 온 것은 너희 죄를 대신 짊어지려 함이라. 이사야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할 때 그들은 또다시 헷갈리는 거예요.

산상설교 다 지켜서 되는 게 아니고, 뭔가 산상설교 율법대로 나 지켰습니다. 하는 나 자신을 철거해야 될 대상으로 뭔가 묻혀서 율법이 없어지면서 같이 묻혀서 날아가야 될 것이 바로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내 마음도 날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알아야 됩니다. 그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러면 안 됩니다. 죽으면 안 됩니다. 하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 자기를 부인하라. 실컷 삼년 동안 들은 것도 자기를 부인해야 돼요.

그런 점을 래드는 고려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조금 있다 설명해드릴게요. 진짜 의가 뭔지를. 지금 우리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그들이 어떤 식으로 칭의에 접근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지.

이거 이야기해봅시다. 지금 유다와 이방인들이 율법 때문에 원수가 된 거예요. 율법이 없었으면 원수가 아닌데 지나 개나 똑같은 인간인데 율법이 들어감으로써 원수가 됐는데, 율법을 폐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화목케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할 때 이층이 아니고 같은 일층에서 이게 화목 된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층에서 이루어져요. 일층이 아니고 이층에서 다른 층에서 이뤄져요. 다른 층에는 율법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폐지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이장우 목사님, 나하고 있는데 층이 가려지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이니까 모르는 겁니다. 이걸 철폐해버리니까 보이잖아요. 그런데 주님 뜻은 뭐냐, 사도바울의 뜻은 뭐냐? 이래 보는 것은 옛날 보는 것과 똑같이 봐서 율법이 있으나마나라 이 말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그러니까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율법이 철폐되면, 철폐되니까 너도 살았고 나도 살았고. 유대인들이 뭐라 합니까? 나는 살았는데 이방인들은 개구나. 하는 것이 율법이 철폐되니까 둘 다 죽어야 될 마땅한 저주받은 인간이란 말이죠. 그럼 어디 가야? 이층에 올라가야 돼요. 이층에 올라가니까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주님의 창조물, 주님이 만든 피조물로써 둘이 구분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신학자들은 자꾸 뭘 생각하느냐 하면, 철폐됐다는 아래층, 일층만 생각해서 거봐, 이방인, 유대인들 율법 철폐하면 똑같잖아. 예전으로 되돌아가요. 율법은 괜히 들어갔다가 괜히 빠져나온 거야. 그 사람들 이론에 의하면.

자기가 죄인 됨에 대해서 똑같다는 뜻인데, 역시 하나님은 날 구원해줘야 돼. 라는 여전히 자기 입장에서 옹호하면서 똑같데. 이방인들도 이제는 그렇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우리를 구원해야지. 이방인들이 유대인 흉내 내는 기라. 둘 다 죽어 마땅하면 저주 받아 마땅하며 죄인이라는 이래 생각하는 게 아니고, 괜히 율법 들어갔다가 괜히 빠져.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의 율법이 가입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 받게 함이라.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율법은 우리끼리 사이좋게 지낸다. 사이좋게 지내는 걸 화목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게 화목이 아니에요. 그럼 뭐냐? 이제는 하나님이 이래 봅시다.

래드가 힌트 준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 지음 받은 거예요. 우리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구원하심을 담아놓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된 겁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주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해서 재료로 뽑힌 거예요.

이게 미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스나이드 이야기부터 먼저 하고 가봅시다. 노만 스나이드가 의는 구원의 결과지 구원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이래 나옵니다. 그 다음에 그 뒤에 쭉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스나이드는 말하기를 실제적인 의든지 덮어쓰는 의든지 혹은 전가된 의든지] 세 가지 다 구분시키고 있지요. 칭의 이론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8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열람 ➜ 강의 부산 6월 3일 조지래드19 칭의와 화해 [신학] 최고관리자 08-06-03
6,516 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03-주님의전쟁4 - 최고관리자 08-06-02
6,515 자유게시판 이분설 or 삼분설 [신학] 최고관리자 08-06-02
6,514 우리교회 [일반] 서장로님 다운로드 이렇게 하십시요 [일반] 최고관리자 08-06-02
6,513 강의 대구 6월 2일 강의 자본의 두 얼굴 [신학] 최고관리자 08-06-02
6,512 자유게시판 인간사고의 한계와 신학의 가치 [신학] 최고관리자 08-06-02
6,511 우리교회 [주보] 6월 8일 주보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6-02
6,510 우리교회 [일반] 후원자 요청으로 계좌번호 알려드립니다. [일반] 최고관리자 08-06-01
6,509 우리교회 삿 17: 1- 2 (축복과 저주) 사사기 최고관리자 08-06-01
6,508 설교 마가복음 3장 31- 35절 제목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6-01
6,507 우리교회 막 3:31-35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6-01
6,506 강의 울산 5월 30일 강의 창세기 35장 창세기 최고관리자 08-05-31
6,505 우리교회 [일반] 알약 바이러스 스파이웨이 등 치료백신 [일반] 최고관리자 08-05-28
6,504 우리교회 사 52:13-15 (형편 없는 몰골) 이사야 최고관리자 08-05-28
6,503 우리교회 [주보] 6월 1일 주보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5-25
6,502 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02-현대신학의단초2(헤겔)-잘린부분 [신학] 최고관리자 08-05-25
6,501 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02-현대신학의단초2(헤겔) 잠언 최고관리자 08-05-25
6,500 우리교회 삿 16:28-30 (삼손의 순교) 사사기 최고관리자 08-05-25
6,499 설교 마가복음 3장 20- 30절 제목 :예수님이 받은 오해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5-25
6,498 우리교회 막 3:20-30 (예수님이 받은 오해)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5-25
6,497 강의 광주 5월 23일 강의 디모데 전서 2장 5절, 중보자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08-05-25
6,496 우리교회 사 52: 3- 7 (속량의 기쁜소식) 이사야 최고관리자 08-05-21
6,495 강의 대구 5월 19일강의 지옥의 하나님 100p 선택과 남은자(잃어버린양) [신학] 최고관리자 08-05-19
6,494 자유게시판 인간은 신이 아니다 - 최고관리자 08-05-19
6,493 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01-주님의전쟁3 - 최고관리자 08-05-19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