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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8대구강의03-주님의전쟁4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03-주님의전쟁4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8 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26 - 주님의 전쟁4

08,03,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떴다, 예수님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교재 94페이지에 있는 '가짜 메시아' 부터 인데, 조금 어렵게 하겠는데, 신약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예수님의 실존문제인데, "예수님이 떴다" 라고 하면, 요즘 새로 짓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하면, "그래서? 그것이 뭔데?" 라고 나올 것이고 말이다.

지금 그 당시 신약성경의 시대에 사회가 문제가 생기고 혼란에 빠진 것은 예수라는 인물 때문에 그러한데, 그래서 예수라는 사람을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잊어버리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없애는 방향으로 일을 하는데, 그런데 일부러 예수라는 인물을 연구해서 문제를 일으킬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설령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뭔가 들은 것이 있어도, 듣지 않은 것으로 여기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 예수에 관심이 없는 현대인들 !!

그래서 현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데, 그렇게 해야 안정된 자기 삶에 혼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곳이 아니라면 가지를 않으니 말이다. 사람은 들어갈 때부터 이미 필요에 의해서 들어가고, 거기에서 자기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채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나오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고, 즉 신으로부터 어떤 행운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에게 예수를 이야기해버리면,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예수는 일단 제쳐놓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 문제는 그 놈의 제자들 !!

그러한 행태는 그 당시나 요즘이나 동일한데,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 라는 인물을 한때의 에피소드 정도로 여기려고 하는데,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그리고 사도바울이라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이미 한물 간 인물인 예수를, 즉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단다" 라고 하면서 잊고 싶은데,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그렇게 잊혀져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의 제자라고 하는 인간들이 글을 써서 마구 들쑤셔놓는다는 것이다.

예수를 빼버리면, 오늘 한국교회가 믿는 신과 그 당시 유대인들이 믿는 신이 똑같다는 것이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으니 말이다. 사람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만 없다면 걸림돌이 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예수는 지금도 살아있다 !!

그러나 현재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과거에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이런 것이 참 어려운 것인데, "예수님이 지금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골칫거리라는 것이다.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 이야기를 빼놓고는,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복을 주세요" 라고 하고 나서는, 자기는 또 월요일부터 열심히 살면 별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듣지 않으려고 하는 예수가 자기 가정과 자기 사업장, 그 어디를 가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큰 문제라는 말이다.

◈ 인간과 충돌하는 예수님 !!

이렇게 살아 있으면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하는데, 즉 예수님은 살아있고 그렇게 살아있으니 행위를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살아있으니 자기도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행위만을 생각하는데, 그런데 성경은 주님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래서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그것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듯이 인간이 하는 일과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충돌을 일으키는가? 그것은 인간은 자기밖에는 모르기 때문인데, 그런데 예수님도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충돌을 일으키는데, 그래서 인간이 이런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모르면 매일같이 충돌을 일으키다가 그만 지옥으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의 살아계심 그 전체를 무시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냥 고난주일이나 지키고 부활절에 새벽집회나 참석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두 세 사람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 !!

그러나 주님의 뜻은 그런 인간들이 조작한 절기가 아니라, 실제로 지금 주님이 두 세 사람이 모여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께 있으면서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하시는데, 그래서 그 모임에 속한 자들은 거기에 대해서 순종을 해야 하는데, 하지만 인간들은 거기에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자기 일에 바쁘고 몰두하다보니, 주님의 일에 신경을 쓰고 마음을 맞출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께서 자기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 라는 이름이니, 모인 무리들이 다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함께 나눌 때,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모임이고 단체가 된다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무리 살아계셔도, 그 모임이 자기들의 행한 것을 자랑하든지, 혹은 실패한 것들을 끄집어내어서 자기들 이야기를 해버리면, 그것은 예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모인 모임이기에, 그 자체가 신약시대에서는 빙시(?)가 된다는 것이다.

◈ 신약성경은 촉촉한 물수건 !!

그래서 제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하는데, '촉촉한 물수건' 이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지 감이 옵니까? 왜 남자들이 이발소에 가면 아가씨가 면도하기 전에 얼굴에 얹어주는 그 물수건 말이다. 이런 촉촉한 물수건으로 온 얼굴을 다 덮을 때 피부가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 촉촉함이 온 얼굴 피부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 촉촉함에 묻어있는 끔찍함 - 끝났다 !!

바로 신약성경을 이런 촉촉한 물수건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촉촉함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종말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신약성경을 들을 때마다 무엇이 촉촉이 스며드는고 하니, "이 세상은 끝났다" 라고 하는 것이 촉촉이 묻혀서 들어오는데, 바로 그렇게 들어오게 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종말이 되어야 오신 분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말이다.

◈ 하지만 우리는 바쁜데 !!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있고, 밭을 메고 있고, 물건을 사고 팔며, 그리고 두 사람은 잠을 자고 있는데, 그렇게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쪽에서 촉촉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종말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말이다. 그렇게 촉촉함이 덮쳐올 때, 그런데 우리는 지금 밭을 메야 하고, 물건을 사고 팔이야 하고, 시집가고 장가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살아계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하면서 다가오니까, 아까 제가 뭐라고 했지요? 그냥 듣지 않은 것으로 하면 그만이란 것이다. 물론 목사 같은 경우에는, 자기 하는 일이 성경을 보고 설교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 이야기를 해야하지만, 하지만 교인들의 경우에는 교회에 가지 않고 성경을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신약성경을 펼쳤다고 하면, 거기서 어떤 내용들이 나오는고 하니, 지금 소비자들, 즉 교인들의 입맛에 맞추고 싶어도 정말 그 사람이 성령을 받는 목사라면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자체에서 올라오는 그 촉촉함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은 끝났다" 라는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이렇게 "이 세상은 끝났다" 라고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어느 철없는 젊은 목사 !!

소비자들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살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기독교 방송을 보니까 어떤 선교단체에 속한 젊은 목사가 말하기를, "꿈과 비전은 열심히 기도하면 25년(?) 이내에 반드시 이루어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바로 이런 소리를 듣고 싶어서 오는데, 분명히 그 젊은 목사도 성경을 펼쳤을 것인데 말이다.

그렇게 신약성경을 펼치게 되면, 오늘 교인들이 몇 명이나 왔는지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메시야인데, 그런데 메시야는 마지막 날에 종말을 몰고 온다는 것이다. 종말이라는 촉촉함을 말이다. 그래서 그 촉촉함이 덮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밭을 매고 물건을 사고 파고 하는, 그런 자기 생각을 할 겨를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활동하는 신약성경을 펼치게 되면 말이다.

◈ 아, 본질과 실존 !!

이것을 조금 어렵게 말해보면, "본질과 실존은 구분되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이 흔히들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실존인물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말을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어서 뽑아낼 것은 다 뽑아내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분이 종말을 몰고 온다는 본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만을 믿겠다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분이 그렇게 살아있다는 것만을 믿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도대체 그분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살아있고, 그분이 메시야이고 또 그분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고 하는데, 즉 그렇게 예수님의 실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그분의 본질이 우리의 실존을 깨면서 !!

그러나 그러한 자기가 믿는 예수님의 실존은 그분의 본질과 결합될 경우에, 우리 인간들 속에 있는 그분에 대한 실존개념은 모두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본질이 '나' 라고 하는 것마저도 전멸을 시킬 때, 그때 비로소 등장하는 예수님의 실존은 자기가 그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실존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문장이 너무 길어서 다시 해보면, 아무튼 본질과 실존을 나누어야 하는데, 인간들이 예수님의 실존을, 즉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그게 어디에 근거하는고 하니, 자기가 살아있듯이 예수님도 그렇게 살아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그런 것은 인정하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주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그러한 실존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주님의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 즉 자기 확대일 수가 있으니 말이다.

◈ 마치 도마의 경우처럼 !!

이것은 마치 도마가 부활한 예수님을 봐야만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데, 그러한 도마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보여주셨는가? 예수님은 자기의 실존이 아닌 본질을 보여주셨는데, 즉 손에 있는 못자국과 옆구리에 있는 창자국을 보여주셨다는 말이다. 그러자 도마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 라고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도마는 갑자기 예수님이라고 하다가 하나님으로, 즉 예수님은 그렇게 본질이 되어서 도마를 덮쳐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도마는 자기가 예상도 하지 못한 예수님의 본질에 휩쓸리면서, 도마 자신의 실존이 누구의 실존에 휩싸이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의 실존에 잠식을 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도마는 그 다음부터 예수의 증인이 되고 말이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예수님도 우리처럼 실존과 본질이 ??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은 살아있다" 라고 하면서도 본질이 아닌 실존으로 보는데, 이것이 바로 아직 예수님에게 점령을 당하기 이전의 상태인 "나는 있다" 라고 자기 실존의 차원에서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근호가 있다. 키는 168이고 몸무게는 77키로이다. 성질은 급하지만, 아내에게는 꼼짝도 못한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실존과 본질을 동일하게 보다가, 즉 자기가 그렇게 실존과 본질이 같이 있으니 예수님도 역시 그렇게 보다가, 도마에게처럼 그런데 예수님의 진짜 본질인 십자가가 다가왔을 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본질이 도마를 덮친 것인데, 일종의 강간인데(?), 그야말로 강제로 덮치니 말이다.

이렇게 그분의 본질이 덮쳐버리면 도마는 촉촉한 물수건의 종말이라는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가 아닌 주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중요하게 되고, 그런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인해서, 더 이상은 이 세상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 즉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

다시 말해서, 이제는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여전히 있어야 하는 세상으로 말이다. 물론 그 중에서 '나'도 포함되고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한 조치로서, 그래서 아직도 존재해야만 하는 이 우주, 바로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본질이 오지 않으면, 물론 예수님이 살아계시기는 하지만, 그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에게 도움을 주고 유리하게 해주는지, 즉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라고 하면서 항상 자기 중심으로 생각을 하다가,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본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감사하자' 라는 것을 예로 들자면, "주님께서 이런 것을 주시니까 감사해야 되겠다" 라고 한다면, 이러한 경우에는 자기의 본질과 실존이 중심이 되어서, "제가 주님께 감사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항상 감사하라' 라고 했으니, 저에게서 감사가 나오기를 바라고,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이다.

◈ 교도소에 간 것도 주님의 본질과 실존을 위해서 !!

평소에 자기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그만 교도소에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교도소에서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바뀌었는고 하니, 자기가 지금 이렇게 교도소에 있는 것은, 즉 왜 하나님께서 자기로 하여금 교도소에 가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가 교도소에 있는 것은 공간이고, 나이 30세에 그랬다고 하면 그것은 시간이고, 그런 시간과 공간은 신약시대에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본질과 실존을 위해서, 자기는 21세기 그때 그렇게 교도소라는 공간에 있어야 하고, 그때 나이가 30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감사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주님' !!

그렇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교도소에 왔다면, 그러면 감사가, 즉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속성이 다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주님의 본질에서 나온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 중심의 이 우주에서 예수님에게 대한 감사가 나오면, 자기는 지금 이렇게 30살에 교도소에 있는데, 그런 30살이라는 시간과 교도소라는 공간이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감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즉 자기가 무엇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때 그 자리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는 교도소에 가도 감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위해서 그때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감사가 얼마나 자기를 초월한 감사인지를, 즉 주님의 속성으로 인한 감사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 팔팔한 30대를 교도소에서 보내도록 해서, 바로 그런 감사를 고백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감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온 감사임을 말이다.

◈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동네 !!

그 이전에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를 해도 그 감사의 주체를 예수님이 자기 자신으로 보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신약성경 전체가 전혀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누구 동네인고 하니 예수님의 동네인데, 우리 인간들의 동네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이 아닌 신약시대에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는?)

12제자가 도망을 갔을 때, 가롯유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 주님께서 다시금 그들을 찾아오시는 의도가 무엇인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지금 우리와 동일한데, 그들은 한시도 자기들이 손해보고 이익을 보는 계산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수시로 주판알을 튕겼는데, 그렇게 자기의 행동이 이익과 손해인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여전히 예수님이 메시야인 상태에서, 그러한 행태가 주님 앞에서 과연 통하겠느냐는 말이다.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오직 성령을 받아야 !!

그래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계시는 동안에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부활승천을 하고 난 뒤에 성령을 보내리니, 너희에게 그 성령이 임하게 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인간이 자기 주체가 살았으면 아무리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해도 근본주체인 자기에게 되돌아오게 되는데, 즉 예수를 증거하는 자기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순이 되니,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차이점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영적인 것과 육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차이가, 즉 바울서신과 베드로서신과 요한서신에 나오는 그런 차이점에 대해서,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면 잘못된 차이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지만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 영과 육에 대해서 분명한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육' 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리고 '영' 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자기를 좋게 하기 위해서 영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약성경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종말의 촉촉함을 간직한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때문에 말이다.

◈ 영적 - 시골장터의 파장 분위기 !!

그러니 분위기가 얼마나 스산하겠느냐는 것이다. 제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이라도 금방 헤어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분위기 말이다. 그야말로 시골 5일장이 다 끝나는 파장하는 분위기인데, 바람이 불고 먼지가 날리고 떠날 사람은 다 떠나고, 그리고 낙엽이 이리저리 뒹구는 말이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구만...)

그러한 파장 분위기를 즐겨 증거하는 것이 바로 영적이라는 말인데,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분명히 파장은 파장인데, 그들은 예수님이 떠나고 나니 별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옛날에 하던 직업으로 돌아갔는데,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말이다.

하지만 그 파장 분위기는 자기 자신들을 위한 파장 분위기인데, 즉 누군가가 와서 일을 시키는 자가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니 감사합니다" 라는 것으로 끝나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나를 사랑하는가?" 라고 3번이나 질문 아닌 질문을 하고, 그리고 나서 성령이 오고 난 다음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일을 한다는 것이다.

◈ 메시야가 오면, 그것이 곧 종말 !!

이런 차이점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영과 육으로 나누게 되면, 사도바울이나 사도베드로, 사도요한이 모두 다 마찬가지인데, 사실은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만약에 지금이 종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지금이 왜 종말이냐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이 그대로 있고 바다가 그대로 있는데 말이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따지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 인간들이 나를 죽였으니 결국 인간은 세상은 악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메시야가 마지막 때에 약속대로 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심판주이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하는 것은, 심판하려고 왔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으로 인해서 다 멸망을 당한다고, 그렇게 메시야가 종말을 몰고 왔다는 말이다.

◈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에 대해서

그런데 이것이 영적으로 상태로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쉽게 말해서, 자기 자신이 죽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자기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을 하다보니 더 어렵게 되었는데, 자기 안에 뭐가 꾸깃꾸깃 들어있는 것이 있는데, 자기가 펄펄 살아있으면 이것이 감추어져 있지만, 자기가 실패하고 망하고 죽는 그 순간에, 자기 안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것이 비로소 발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 방법이 바로 이러한 방법인데, "나는 개떡이고 망해야 한다" 라고 하는 순간에, '나'의 잘남에 감추어져 있고 억눌려 있던 예수님의 하신 일이, '나'의 못남을 통해서,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 모세도 바로의 아들이 아닌, 고난받는 백성들과 함께 !!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계속해서 나오는데, 모세가 바로의 아들로 계속 있으면 안 되고, 차라리 자기 백성과 고난받기를 원했을 때, 그때 그리스도가 주는 상급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의 재롱에 빠지면 안 되고, 이삭을 하나님께 갖다 바칠 때 인간의 육에 의해서 숨겨져 있던 예수 그리스도가 비로소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죽은 자인데, 이렇게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물론 우리들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이 분만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성도를 죽은 자로 만들어놓고, 그 가운데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죽지 않고 뭔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그런 요소가 바로 종말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다.

◈ 우리는 죽고 그분이 살아야 !!

이런 식으로 신구약 전체를 보게 되면, 인간의 실존적 해석이 모두 다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아무튼 죽음인데, 매일같이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는데, 그렇게 매일같이 죽어야 그 속에서 예수님이 매일같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살아버리면 예수님은 시큰둥하게 되고 무가치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살아있는 자기가 더 가치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가치 있는 자기가 안방을 차지하고 예수님은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에는 인간 자체가 예수님을 공격하기에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주님을 공격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망해야 되고 죽어야 하는데, 그렇게 자기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안에서 예수님이 튀어나옴으로 말미암아서, "너희들이 죽였어도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이 인간 세상의 질이 악하다고 하는 것을, 즉 악한 세상임을 확연하게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 신약성경 - 나는 죽고 그분은 살고 !!

바로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들이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니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전부 다 이런 원리에 대해서 해석을 해버리면, 제가 장담하는데 그야말로 100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서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 라고 하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니 0점이라는 말이다. (100:love)

그러니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죽여야만 그 속에서, 즉 인간들 속에 숨겨져 있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즉 "너는 죽었지만 나는 살았잖아. 그러면 그만이지 무엇을 더 원하는가?" 라고 하는, 그렇게 주님만 살아계시면 모든 것이 다 'OK' 라는 것이다. 우리는 죽어도 괜찮다는 말인데, 오히려 우리가 죽어야 그분이 사시니 말이다.

◈ 육적인 해석 - 나도 살고 그분도 살고 !!

이러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영적인 해석인데, 그렇다면 육적인 해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육적인 해석이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계속해서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육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혹시 '매개체' 라고 게 무슨 말인지 알지요? 예를 들어서, 저항이 있는 철사와 같은 것에다가 전기를 통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벌겋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전기히터의 원리이고 말이다. 그것은 철사가 자기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전기를 가하니까 벌겋게 된다는 말이다.

◈ 성도는 벌겋게 달아오른 코일처럼 !!

그렇다면 성도가 벌겋게 된다는 것은 전기가 통과하듯이 무엇인가가 통과했기에 그런 것인데, 이와 같이 마지막 때에는 성도가 그런 매개체인데, 주님이 생산자이고 주님이 소비자인데, 주로 말미암아서 죽고 사는데,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는가? "예수님 혼자 잘하세요" 라고 하는가?

주님이 통과하게 되면 성도도 그렇게 벌겋게 되는데, 만약에 성도가 아니라면 벌겋게 될 아무런 이유가 없고 말이다. 성도이기 때문에 주님이 통과하면서 "너희들이 나를 죽였지. 나를 죽였지" 라고 하면, 그러면 성도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맞습니다. 저희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할 때 성도는 마치 철사코일처럼 벌겋게 달아오르는데, 그렇게 벌겋게 되면서 오직 누구만을 증거하는고 하니, "그러니 이 세상은 망해도 마땅하고 당연하잖아" 라고 하게 되니까, 결국은 성도는 하나의 매개체이고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육적인 요소인고 하니, 이렇게 매개체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될 인간들이 무엇으로 등장하는고 하니, 갑자기 '주체'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육적으로 여기는 태도라는 말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아까 전기를 보내면 철사가 벌겋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전기를 보내는 것은 예수님과 악마간의 싸움의 결과인데, 그렇게 싸운 결과로서 성도에게 그렇게 전기를 보내어서 벌겋게 만드는 것인데, 즉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 세상이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이 세상 권세자들과의 싸움이라는 말이다.

◈ 가짜 메시야 - 매개체가 주체가 된 육적인 메시야 !!

그런데 그만 이런 매개체가 주체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바로 악마가 사람들에게 세뇌시켰던 메시야 개념이 되는데, 즉 '가짜 메시야' 라는 말이다. 그런 가짜 메시야로서 육적인 메시야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종말에는 영적인 메시야와 육적인 메시야가 둘 다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진도를 좀 나가야 되겠는데, 교재 95페이지를 보자.

** 사탄은 베드로가 기존에 인식하고 있던 메사아 상을 고수하도록 독려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새롭게 제시하는 메시아 상을 거부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셨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사실상 악마가 하는 말이 맞지 않는가?

지금 악마가 하는 말이 사실은 맞는 소리인데, "예수여, 왜 고난을 받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백성에게 영광을 받아야 하고 환영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라고 말이다. 이것을 마귀가 지금 누구에게 이야기하는고 하니까,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욕하는 바리새인들은 나쁜 놈들이고, 지금 예수님의 12제자들과 함께 있는 자들은 좋은 사람들이니, 이렇게 이미 나쁜 사람들과 좋은 사람들이 나누어져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새삼스럽게 고난받을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냥 이미 나누어져 있는 것을 분류작업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편인데, 바리새인들 편이 아니라 말이다.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나가서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을 불이 떨어져서 죽게 하소서" 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들은 이미 예수님에게 속해 있으니, 이렇게 예수님에게 속해 있는 자들은 생명책에 자기들 이름이 기록되어있는 것을 기뻐하게 되고, 12가지 권세를 다 자기들이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들에게 온갖 혜택이 다 돌아오는데, 그래서 12제자들은 너무나 기분이 째진다(?)는 것이다.

◈ 제자들은 계속해서 가짜 메시야 상을 !!

그러니 이렇게 이미 예수님과 12제자는 한편이고, 저쪽에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다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 그 생각이 바로 사탄이 심어준 메시야 상을 베드로가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하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도 그대로이고 말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그런 메시야관이 바로 오늘날 교회에서 고대하고 있는 메시야 상과 너무나도 동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는 괜찮은데..." 라고 하는 것 말이다. 그것이 바로 육적인 메시야이고, 또 가짜 메시야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일종의 중간과정이 되어버리고, 목적지가 무엇인고 하니, 결국에는 자기가 잘되는 것인데, 즉 계속해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말이다. 자기가 중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그런 철사가 아니고, 즉 매개체가 아니고 말이다. "내가 예수님에게 감사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자기가 감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렇게 자기가 예수님에게 감사를 하게 되면 뭔가 챙길 것은 챙기겠다고 하는, 그렇게 챙기는 마지막 최종지점에 여전히 자기가 버티고 서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전체말씀에 대해서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참 어려운데, 물론 제가 하는 말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자기 실존처럼 예수님 실존도 그렇게 !!

저와 같이 성경공부를 수십 년을 하다가도 예수님에게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반응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아까 제가 한 이야기를 다시금 해보면, "지금도 예수님은 살아계시고, 일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라고 하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기의 실존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실존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을 두고서 "예, 믿습니다" 라고 해도, 그러나 여전히 자기 실존이 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살아계시니, 제가 주님에게 잘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이렇게 살아있고 하나님도 역시 살아계시니, 내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서 잘해드리면 하나님도 나에게 복을 주겠지" 라고 말이다. 이러한 생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실존과 자기의 본질, 그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 것이고 주님은 주님의 것인데, 그러니 서로 좋게 지내면 좋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와서, 자기가 점령당하고 공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서, 둘이 서로 친하게 잘 지내면 된다는 말이다.

◈ 사탄아, 물러가라 !!

하지만 주님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서 육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시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당장에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씀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라. 그렇지 않으면 잃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일만 하지 다른 일은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처럼 이것저것 마구 기웃거리며 설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는 일 외에 다른 일은 하지 못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만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만 우리 안에서 살아남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나도 살고, 주님도 살고" 라는 것은 주님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항상 마지막에는 자기에게로 !!

인간은 자기가 살아있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항상 모든 것은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는데, 자기가 살아있으니 최종판단은 누가 하는고 하니, 살아있는 자기 자신이 한다는 것이다. "좋고 나쁘고, 믿고 안 믿고" 라고 하는 그 판단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성경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말씀을 믿는다고 하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를 않고 마지막에 다 찾는다"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짜로 믿는다고 하면, "예, 맞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이지 빈틈이 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믿고 인정하면 되는데, 즉 자기 생각이란 것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성도의 죽음 - 주께서 다 하십니다 !!

정말이지 예수님께서 모두 알아서 하시는데, 그것을 믿는다면 구태여 자기가 무엇을 따로 떼 내어서 일을 다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자기는 죽어지내면 되고, 다만 "주님은 이런 이런 일을 하십니다" 라고 하는 매개체로 그냥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이는 하나의 방식이 되고 말이다.

그러니 주께서는 "니 생각은 하지마" 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생각을 하게 되면 자꾸만 판단을 하게 되는데, "아, 이번에는 성공이구나, 실패구나, 잘했구나, 못했구나" 라고 하는 판단을 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런 판단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판단이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마귀 - 다음에는 좀더 노력해서 잘해야지 !!

그런 판단을 하게 되면 옆에서 누가 거드는고 하니까, 마귀가 부추기게 되는데, "이번에는 좀 더 완벽하게 해야지. 이번에는 전과 같은 그런 실수가 없도록 해" 라고 말이다. 마귀는 이렇게 자꾸만 반성을 촉구하고, 물론 회개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 탐색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만 자기의 행동을 믿게 되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마귀 입장에서 보면 대성공인데, 성경말씀을 믿지 않도록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걱정근심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렇게 말씀을 믿지 않아서 나온다는 것이다.

◈ 아, 그놈의 도둑 !!

십자가 마을에 올라온 박윤진 씨의 글에 의하면, 어제 자기가 도둑을 맞았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제법 심각한 일인데, 잘 잠궈둔 유리창 문틀도 다 뜯기고 했으니 말이다. 물론 박윤진 씨는 전혀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모든 하든 일들을 다 포기하고 신학교에 갔다고 하면, 자기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일인데, 하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전혀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미 중요한 것이 나와있는데, 신학교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렇게 중요한 것이 이미 나와있는데, 그런데 거기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서, 자기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는 것을 중요한 것처럼 집어넣느냐는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이 아니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기에 생기는 현상이 아니냐는 것이다.

◈ 주여, 제가 암에 걸렸는데요?

그러므로 그런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그만 암에 걸려서, "주여, 제가 암에 걸렸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이 중요한가? 그것도 역시 전혀 중요하지 않고 심각하지 않는데, 그런데 심각하게 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주체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는 매개체에 불과한데 말이다.

자기가 교도소에 갔다고, 그래서 콩밥을 먹었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에게 심각한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말이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교도소에 가기 전까지는 그런 것이 심각한 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 제자들과 멱살잡고 싸우시는 주님 !!

지금 제가 신약성경에서 베드로의 경우만 이야기했는데, 하지만 이렇게 하면 신약성경 전체의 해석이 다 풀린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로만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기 제자들과 멱살을 잡고 싸우는데, 다음과 같이 말이다.

"이 놈의 자슥아, 내가 너를 선택해서 구원했는데, 정말이지 너도 마지막 때의 의미를 모르겠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제자들도 이에 질세라 주님을 붙들고 싸우는데, "주님,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공한 인생이 되지 못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싸운다는 것이다.

◈ 마귀 - 너의 경험으로 스스로 판단을 해야지 !!

그러니 우리가 마귀를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마귀는 항상 판단을 우리에게 요구하는데, 즉 성경의 판단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말이다. 성경말씀을 결코 믿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런 종이에 쓰여진 글을 믿지 말고, 너의 감정과 느낌을 믿어라" 라고 말이다. 즉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경험과 그런 판단을 말이다.

◈ 베드로의 말이 그렇게 심한 실수(?)였던가?

제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이런 문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왜 주님은 베드로를 보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해서 그렇게 핀잔을 주고 야단을 쳤는지, 심지어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이라고 했는데, 왜 베드로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지 말이다.

그때 예수님은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라고 했는데, 그래서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그 앞을 보니, 예수님이 "내가 죽어야 한다" 라고 하니, 베드로가 "주님,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훌륭하신 주님이 그런 심한 일을 당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시겠습니까?" 라고 말이다. 과연 베드로의 이 말이 사람의 일이고,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책망을 받을 만한 것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제 교재 96페이지를 보자.

** 자기네들이 하나님과 원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하늘에서 오시는 참 메시아는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임무를 띠고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다. 메시아가 보여주는 수난과 십자가는 인간의 기존 삶이 하나님에게는 역겨운 저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계속 자기네들의 세계에 집착하고 그들의 문명과 문화에 찬사를 보내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메시아는 수난으로 일관된 삶을 보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수난을 받는가?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하니 자기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러니 예수님은 자기 안에 잠자고 있고, 자기는 그 앞에서 설치고 있고 말이다.

◈ 감사자체를 위해서 성도가 존재 !!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그런 성도를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성경에서 있어서 하나님의 심각함과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리의 말씀, 그것이 성도를 통해서 비로소 개진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자체를 위해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있다는 말이다.

◈ 성도는 영광과 함께 고난받는 코스로 !!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이 대목이 상당히 어려운데, 우리가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데, 그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도 함께 받아야 하는가? '고난'도 같이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지금 우리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고난을 주겠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성도가 가야할 코스가 바로 그 코스이기 때문에 말이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가 고난을 받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나는 고난을 받아야해" 라고 하면서 자꾸만 자기를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주께서 고난을 주시는데,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판단을 해서, "이건 고난이 아니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집이 3채 있고 땅이 10만평이 있으면, 그런 것은 고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서 말이다. 자기는 욕을 얻어먹고 뭔가 신체적 고통이 와야만 고난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인데 말이다. "주여, 지금 제가 고난을 당하지 않고 있으니, 고난을 받게 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주여, 제가 회개합니다" 라고 하면서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고난주일을 지키고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성경을 믿지 않으면 자기가 실천에 옮겨야 믿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노시는 분인가? 고난이라는 것이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닌데 말이다.

◈ 인간의 실존에서 나온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

이것을 다시 해보면, 우리의 실존에서 나오는 고난은 고난이 아닌데, 본질자체가 베드로의 모습이고, 그것이 곧 사탄이니 말이다. 이렇게 사탄의 본질에다가 인간의 실존을 뒤집어 씌어놓았는데, 이러한 상태로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편인데, 저 바리새인들은 나쁜 놈들이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지켜주시면, 우리도 같이 하늘나라의 12권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알고 있던 주님의 실존과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도마가 뭐라고 했는가? 자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봐야만 믿겠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아담에게서 내려온 본질인데, 그 껍데기인 실존이 바로 도마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을 보여주니, 갑자기 도마가 자기가 판단한 봐서 믿겠다고 하는 모든 것이 와장창 다 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본질이 도마의 본질에 들어가니, 도마의 본질은 죄가 되고 예수님의 본질은 하나님의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과 우리와의 만남이 신약성경에서는, 우리는 멸망을 당해야 하고, 주님은 멸망을 시킬 심판주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 안에 신구약이 다 들어온 것인데, "나는 종말에 당연히 당해야 될 죄인이고, 주님은 온 우주를 심판할 심판주입니다" 라는 말이다.

◈ 영적 인간 - 주님의 증인 !!

이러한 주님의 본질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렇다고 해서 껍데기인 실존이 변한 것은 아닌데, 도마가 특별히 재벌이 된 것도 아니고, 베드로가 잘 먹고 산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껍데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게 되니까, 껍데기는 어차피 흙이니 별 상관은 없는데, 아무튼 본질이 바뀌게 되니, 주님의 종이 되고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는 '영적 인간' 이라는 것이다.

◈ '육적차원'과 '영적차원'에 대해서 !!

지금부터는 이 '영적인간'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한번 설명해보겠는데, 이렇게 '육적차원'과 '영적차원'이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육적차원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상식적인 것이니 한번 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물리학에서 '차원'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떤 한 존재를 설명할 때에 요소가 몇 가지이냐에 따라서 차원이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3가지 요소가 되면 3차원에 속하는데, 데카르트의 좌표에 의하면, X좌표와 Y좌표가 있는데, 이렇게 한 지점을 표시할 때는 X가 필요하고 Y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평면인데, 그렇게 X와 Y가 필요하니 2차원이란 말이다. 이것을 입체로 이야기하면, X와 Y와 Z가 되는데, 즉 3차원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시간의 좌표를 더해버리면 4차원이 되고 말이다.

◈ 영적차원 - 육적차원을 심판하는 세력 !!

이렇게 차원이 설명이 되는데, 그렇다면 영적차원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0차원은 점을 그렇게 말하는데, 1차원은 직선을 의미하고 말이다. 그리고 영적차원을, 흔히들 사람들은 이것을 초월한 차원을 말하는데,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적차원이란, 육적인 차원을 심판하는 그 세력을 두고서 '영적차원'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죄라고 하면서 심판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묵시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공격할 대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인데, 현재 '나' 라는 인간은 3차원에 있는데, 여기 3차원에 시간까지 더하면 4차원이 속하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는 항상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어디를 몇 시에 가고 있으며" 라고 하는 시간과 공간의 4차원의 요소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육적인 차원인데, 우리는 이런 4차원에 갇혀있다는 말이다.

◈ 과연 바다가 인간의 말을 듣는가?

예를 들면, 바다가 누구 말을 듣는가요? 천 목사님, 성경에 보면 바다가 누구의 말을 듣지요? 갈리리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분이 누구이기에 바다도 순종하는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옳은가? 틀린 것인가?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무슨 말인고 하니까,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바다가 잔잔해졌는데, 그래서 제자들이 "그분이 누구기에 바다도 순종하는가?" 라는 물음 속에는 무엇이 포함되었는고 하니, 적어도 바람과 바다는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데, 즉 자연은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는 전제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노는 그 차원에서는 바람과 바다는 각자 자기 길을 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들끼리 가고 바다와 바람은 자기들끼리 가고 말이다. 이것이 곧 자연세계의 차원에 있는 것인데,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인간들이 익히 몸과 경험으로 알고 있는 세계에서, 왜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시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믿음이 생기겠는가? 오늘 강의가 진행이 되도록 답변을 좀 해보세요. 당연히 믿음이 생기지 않는데, 왜냐하면 지금 3차원에서 백 날을 믿어봐야 예수님을 영적차원에 포함시키지를 않고 자기가 속해 있는 3차원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3차원의 세계를 고발하려고 오신 분 !!

하지만 예수님은 이 3차원의 세계를 고발하려고 오신 분인데,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자기가 3차원의 공간에서 원했던 것을, 즉 미흡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니까 사람들이 많이 쫓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도망을 가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태어났다고 하는 자체가 저주받은 것임을 본인 스스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말이다. 최선이란, 말 그대로 선(善)을 열심히 다하고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더 이상 무엇을 더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누가 알아듣겠는가?

◈ 분명히 말씀이 남아있는데 !!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이근호 목사 당신 말대로, 이것도 치고 저것도 치고 다 쳐버리면 도대체 남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한다면, 그러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고 하니, 오직 성경말씀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을 믿지 않으니, 그렇게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한다면, 그러나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지금 현실이 바로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오직 성경말씀대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주님의 이루심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무엇을 하나 뚝 떼 내어서 자기는 이만큼 이루었다고 하든지 하면, 주님의 일이 항상 자기 차원 속의 일이 되어서, 그것이 곧 사탄이 원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단아 물러가라.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라고 했던 것이다.

◈ 하나님의 3차원의 세계로 모시자 !!

그러니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골치 아픈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 달라이라마가 피곤한 인물이듯이 말이다. 지금 예수라는 분이 와서, 각 교회마다 그야말로 골칫거리를 만드는데, "예수님의 바른 뜻을 전해 주세요" 라는 교회가 없다는 말이다. "제발 더 이상 예수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라고 하지 말이다. 예수 이야기는 그만 이야기하고, 비전을 이야기하고, 즉 하나님이 3차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 그래, 여기 있다 - 십자가 !!

물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3차원으로 들어오셨는데, 그것은 바로 요나의 기적인 십자가라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의 형태로만 3차원의 세계에 들어오셨다는 말이다. 다른 것은 없는데, 그리고 이 십자가는 사랑인데, 즉 로마서 5장에 보면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했다고 하는 것이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확정했지 언제 인간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확정을 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좀 주세요" 라고 했으면 했지, "예수님, 피를 흘려주세요" 라고 요청한 제자들이 있느냐는 것이다. 아니, 12제자들 가운데 피를 흘려달라고 요청한 제자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물론 없다는 것이다.

◈ 누가 예수님의 피 흘림과 살 찢김을 요청했는가?

예수님의 피 흘림과 살 찢김에 대해서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요청한 인간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지 말이다. (성부 하나님과 의논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 라고 말이다.

십자가는 마치 높은 곳에 있는 저수지와 같아서, 모든 화평과 인내와 자비가 거기서 다 쏟아진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에서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쏟아진 그 화평과 인내와 자비, 그것들 하나하나가 우리 인간들을 정죄하고 고발하는 요소로서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 찔러, 찔러, 찔러 !!

이렇게 영적차원에서 육적차원으로 침투할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는, 그렇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고발하는 기능을 가지고서 들어온다는 것이다. 믿음도 그렇고, 소망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는 말이다. 화평과 자비도 말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를 찔러대는, 즉 일종의 고발하는 기능으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죽어야 돼" 라고 하면서, "아니, 믿음도 모르면서 무슨 믿음을, 소망도 모르면서 무슨 소망을, 사랑도 모르면서 무슨 사랑을 이야기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안에서는 "야, 그냥 실존이 아니라, 실존과 본질이 하나가 되어서 살아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알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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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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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