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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6월 2일 강의 자본의 두 얼굴강의[신학]

대구 6월 2일 강의 자본의 두 얼굴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602 자본의 두 얼굴

첨부파일 : 자본의 두 얼굴.hwp (32.0K), Down:14

우리교회(IP:124.♡.85.92)

08-06-0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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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신학의 허상 시리즈- [자본의 두 얼굴] 이름 : 이근호 2007-05-17 15:55:49

[ 자본의 두 얼굴 ] 김동수 저 한얼미디어 (광주: 2005)

사회학자인 이진경씨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서 ‘노동 없이 생산이 가능한 새로운 개념의 자본론’을 부르짖었는데 여기에 대한 반박론을 펼친 것이 저자의 글이다. 저자가 반박에 나서게 만든 권위 있는 이론적 배경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나온다. 따라서 본 책의 내용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이진경씨와 김동수의 상호 다른 해석을 견주어놓은 것이다. 저자인 김동수씨가 펼쳐내는 [자본론]의 진수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

경제법칙은 그 성질상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다. 이는 곧 경제법칙은 인간의 의지나 욕구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나타나고 작용한다. 물론 경제법칙은 자연법칙과 다른 점이다. 자연법칙은 인간의 참여 없이 그 스스로 나타나지만, 경제법칙은 인간의 생산활동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이 생산양식의 생산관계를 파악하게 되면 경제법칙도 밝혀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본적인 경제법칙은 잉여가치법칙이다. ‘잉여가치’라는 말은 ‘사용가치’라는 말과 더불어 차별 지으면서 등장된다. ‘사용가치’란 자연 재료에다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어 생겨나는 가치이다. 사용 가치를 낳게 하는 노동을 ‘유용노동’이라고 하는데 이 ‘유용노동’은 ‘필요노동+잉여노동’으로 나뉠 수 있다. 필요노동이란. 노동자에게 주어진 욕망 충족에 필요한 사용 가치의 양만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이다. 그렇다면 잉여노동이란 노동자 본인에게 필요이상으로 강요당하는 노동이라는 말이다. 이 잉여노동이라는 ‘유용노동’에 의해서 생겨난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이고 자본가들은 오로지 이 ‘잉여가치’를 노리고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가들의 생산해내는 사용가치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품화되어 시장에서 돈으로 교환될 때, 그 상품가격에 담겨있는 잉여가치(이윤)를 획득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잉여가치가 보다 더 많이 확보하는 방안으로 그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개인적 소비로 다 써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본을 추가적으로 늘리는 데 보태게 된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용가치를 만들어낸 노동자들은 어떤 위상을 지니게 되는가? 그들은 자본가들의 눈에는 그저 자본가들의 돈 힘에 의해서 호출 당하는 진열되어 있는 상품이 된다. 상품 생산은 자본가들의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에로의 투자가 이루어지는데 불변자본이란, 생산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자본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계나 토지나 건물이나 원자재나 원재료를 말한다. 상품화 되어서 에너지 원료로 쓰인 가스나 석탄이나 기름의 가치는 그대로 상품 속에 담기게 되니 불변자본, 혹은 같은 말로 ‘생산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자본은 가치를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전시킨다.(고정자본은 불변자본을 두고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기계는 고정자본이지만, 원재료 같은 것은 유동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가변자본이란 생산과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힘의 크기가 변하는 자본을 말하는데 노동자와 그 노동력을 뜻한다. 이 가변자본만이 가치를 변동시킨다.

상품이 생산되면 그 안에는 상품가치가 담기게 되어 있는데, 노동자들이 받는 노임의 가치만큼의 가치를 얻는다면 자본가들로서는 자본을 투자한 이유가 상실된다. 따라서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필요이상의 노동을 강요를 해서 그 잉여노동시간으로 획득된 가치에 대해서 이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되가져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간의 괴리를 낳게 하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란 다름 아닌, 생산과정에서 얻어지는 사용가치와 전혀 상관없이 시장 내에서의 ‘가치’가 따로 존재해서 ‘가격’이라는 이름을 달고 팔린다는 사실이다. 즉 노동자가 얼마나 수고했느냐와 상관없이 시장에서는 구매자가 거의 없으면 헐값이 팔릴 수밖에 없고 그것이 시장에서는 자기 노동력이 가격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즉 사용가치란 노동자의 수고에 의해서 얻어지지만, 시장 내의 가치란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품화 되지 못하는 상품이란 사용가치가 아예 전혀 없는 것이 된다. 노동력도 일종의 상품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시장 원리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장 원리에 또 따라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가들이 그렇게 신경 쓰게 되는 ‘수익률’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생산과정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에 합리적인 자본구성인 ‘유기적 구성’을 갖추어 ‘잉여가치율’이 높은 상품을 생산해도 다른 자본가들의 제시한 수익률 시장에서 경쟁해야만 한다. 즉 ‘수익률’ 자체도 자본가들의 개인적 요구만을 고집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어느 자본가인들 높은 수익을 마다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들의 욕심은 시장 원리에 준해서 고분고분해야 한다. 이것이 ‘평균수익률’이다.

자본가들은 이 평균수익율을 염두에 두면서 더 큰 수익을 위해 잉여가치를 다시 다음번 생산과정에 투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잉여가치는 한 번씩 생산과정이 순환할 때마다 계속 불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단 시간 내에서 자본 회전을 빨리 가져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늘어난 잉여가치는 다음번 생산과정 순환에 ‘축적된 자본’으로 투입되게 된다.

예를 들면, 자본가가 10,000(8,000 불변자본c +2,000 가변자본 v)의 자본을 투하하여
12,000가치를 생산한다면 전체 과정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Ⅰ : 8000c+2000v+2000s(잉여가치)=12000C(전체 가치) : S′(잉여가치율)=100%

동일한 조건에서 잉여가치 전체(2,000s)를 생산에 재투자한다고 결정했다면 확대된 생산에서의 자본의 가치구성은 9,600(8,000+1,600)c+2,400(2,000+400)v가 되고 이것이 다시 회전하면 다음과 같다.

Ⅱ: 9600c+2400v+2400s=14400C : S′=100%

이것이 바로 ‘확대재생산’이다. 단순한 단순재생산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필요이상으로 노동을 해서 얻어진 잉여가치가 다시 무상으로 자본가들의 재산에 누적이 되어 그것으로 인해 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재투자되는 것이다.

노동력의 판매에 의해 노동은 노동자로부터 이탈하여 자본가의 소유로 되었으므로, 노동의 대상화 결과인 물질적 부는 타인의 소유물인 자본으로 되고, 자본가의 소유인 상품은 노동력의 구매수단으로서 노동자에게 제공되어, 자본가가 향유할 부의 원천인 궁핍한 임금노동자를 재생산한다. 이 반복된 재생산의 결과, 노동자는 자본가를 재생산하고, 자본가는 노동자를 재생산함으로써 자본 관계 자체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이중의 이익을 얻는다. 노동자에게서 받는 것은 그가 향유하는 부의 직접적 원천인 잉여가치이다. 다른 한편 자본가가 지불하는 화폐는 생산적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유지에 사용되어, 자신의 부를 영원히 증식시켜 줄 계급을 얻는다. 이렇게 하여 노동자는 이 자본가 혹은 저 자본가에게 속하지는 않지만 자본가계급에는 속하는 것이다.

계급이란 인격과 신분 자체의 차별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 노동이 없이 자본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면 이런 계급도 소실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두 다 자본가가 되는 방도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이진경씨는 ‘자본을 넘어서 자본’이라는 책을 내었다가 김동수씨로부터 보 책을 통해서 반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경씨의 아이디어는 이렇다. 가치를 따지지 말고 분배의 관점에서 자본을 재조명해보자는 것이다. 즉 자본의 독점성을 해체하여 독점성에서 오는 절대 이윤을 분배를 통해 평준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분배는 유통이다. 유통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 낸다면 구태여 기계로 인한 생산과정에 종속된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반격은 이렇다. 상품을 구매할 돈이 없다면 어떻게 유통이 성사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돈, 즉 화폐란 상품이 지니고 있는 사용가치와 교환될 때만 비로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용가치의 생산, 즉 상품 생산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통이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상품의 순환과정이라는 말이다.

생산적 노동이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귀결되는 것이 마땅한데, 생산성 향상이란 곧 자본주의의 자기필연성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단순히 사용가치 생산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잉여가치 생산의 원천이라는 새로운 유용성을 가지고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고, 노동력이어야말로 이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역사적 발견에 의해 자본은 그 존재를 자기필연성에 매개된 것으로 표시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사물을 다루는 시대에서 벗어나 인간이 인간을 다루어야만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되고, 타인의 노동에 의존한 방식이다 는 점에서 ‘인간들만의 자기 완결적 사회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다른 대안적 사회 양식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타인에게 제공할 이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생존에 필요할 상품을 구매할 화폐를 얻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같이 노동하면서도 그 노동의 가치의 동등과 차등의 불일치가 반복적으로 상승해가는 과정이 인간 사회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 복음적 평가 )

경제학은 인간의 질을 따지지 않는다. 그냥 노동하는 것을 긍정해야지 만이 인류 문명의 화려한 발전상을 해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악한 일인가?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세계가 나쁜 세계일까? 성도 두 명만 남아 예배드린다고 과연 주님 보시기에 지옥 갈 짓인가? 큰 병원에 환자가 하나만 있다고 해서 나쁜 병원인가? 자식 없이 홀로 사는 여인의 가정이 저주받은 가정인가?(갈 4: 24) 경제적인 노동의 효율성을 따지자면 나쁜 상황일 수밖에 없다. 노고의 가치를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노고의 보상은 이마에 흐르는 땀이나 해산의 아픔으로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인간의 노동만이 활개 치는 곳이 아니다. 인간들이 기대한 모든 노고의 성과는 허무로 돌리고(전 1:2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오로지 하나님의 노동의 결실을 향하여 질주하는 곳이 이 세상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주님의 노고로 맺힌다. 인간들은 주께서 밀어내시는 대로 밀리면서 살 뿐이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의로서 인정받고(롬 4:6), 열심히 일한 것이 죄로 인정받는다.(약 4:16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미 죽은 자에게 있어 가치란 주님의 생명뿐이다. “이 땅에서 너희는 이미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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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07 18:41

대구080602자본의두얼굴

08 대구강의 7 - [자본의 두 얼굴] 김동수 저, 한얼미디어(광주: 2005)

08,06,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마르크스는 왜?

오늘은 김동수씨가 쓴 '자본의 두 얼굴' 이란 책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이 책은 경제에 관한 책인데,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해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았는데, 한 쪽은 이진경씨이고, 다른 한 쪽은 이 책의 저자인 김동수씨인데, 마르크스에 대해서 둘 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종하고 신봉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둘 다 마르크스 편에 있으면서 그의 자본론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경제에 관한 것인데, 그러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굳이 이런 것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할지 몰라도, 즉 "예수님과 마르크스가 무슨 관계인가?" 라는 것인데, 예수님만 믿으면 되지 마르크스까지 알아야 하느냐고 말이다. 즉 마르크스를 모르면 지옥에 가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상관이 없는 경제문제까지도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렇게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유럽에 있어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사실 너무나도 중요한데, 도대체 마르크스가 그 당시 사회의 어떤 점에 대해서 문제를 제시하고 불만을 가졌는지 말이다.

이러한 것이 성경과 무관하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유럽에서는 이러한 기독교 정신을 성령을 통해서, 즉 교회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전 국가적으로 확산을 해버린다는 말이다. 즉 이웃사랑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한다는 것이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런데 개인적으로 기부를 한다든지 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고 하니까, 자기는 일은 하기 싫지만 남들처럼 즐기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즉 국가가 빈부격차를 줄여서 다같이 잘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말로만 공동체라고 하지 말고, 같이 즐기고 같이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국가가 하나의 공동체라고 하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 있는 바와 같이 이웃사랑을 실시하는데, 그것을 개인이 하도록 맡겨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 이웃사랑도 이제는 국가가 !!

예를 들어서, 어느 부자가 제 아무리 기부를 한다고 해도, 즉 그 부자가 자기 수입의 10%를 기부해도 나머지 90%를 가지고서 가난한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도 내지 못할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옷가지와 음식과 저택을 소유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부의 상징은 요트인데, 사실은 과거부터 그러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뉴질랜드나 호주에 가면 미국의 갑부들이 깔아놓은 호화요트들이 온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는 사진으로만 보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배가 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해서, 국가에서 "오냐. 줄게" 라고 해서 밥을 주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배가 부르니 이제는 요트를 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누구는 요트를 타고, 누구는 ##를 타고" 라고 하면서 불만을 터트린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교회에서 이웃사랑을 하지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저기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가면 그래도 부자에 속한다는 것이다. 전혀 일이나 노동도 하지 않고 그냥 등 따시고 배부른 부류에 속한다는 말이다. 물론 미국에는 거지도 양담배를 피운다는 말도 있었지만 말이다. (ㅋㅋ)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보면서, "우리도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라는 것이다. 국가가 우리가 내는 세금을 가지고 어디에 사용하는가? 국가의 전문관료직들이 우리가 해야하는 이웃사랑을 대신해서 해주고 있다는 말이다.

부자들이 자기들끼리만 배 부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율의 세금을 매김으로 말미암아서, 즉 그들에게서 받은 세금을 가지고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도 몸이 아프거나 불편해서 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장애인이나 독거노인들에게 무상으로 음식이 제공되는데, 여기에는 부자들의 잉여가치가 투입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경영체제, 즉 국가의 행정체제에 있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있어서, 사실은 여기서 하나님 사랑은 날아가 버리고 이웃사랑만이 남는데,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대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국민들은 세금을 내고 좀 쉬고 !!

그러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민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답시고 그렇게 바쁜데 매일같이 교회에 가야할 것이 아니라, 쉬는 날에 몸이 피곤할 때는 등산도 하고 온천도 가야지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은 자기들은 마음으로 다 하겠다는 말이다.

유럽에서는 대부분이 어릴 때 세례를 받는데, 그러니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웃사랑을 함에 있어서 국가에 세금을 내는 형식으로, 그렇게 자기도 충실히 세금을 잘 내고 있으니, 그 세금으로 국가가 알아서 집행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들이 하는 이웃사랑이라는 말이다.

◈ 이웃사랑의 구현 - 의료보험 !!

그것이 바로 근대초기였고, 그런데 21세기에 들어가면 이웃사랑이 상당히 세련되어서, 이 이웃사랑이 그만 의료보험으로 전환이 되고 만다는 만이다. 이 의료보험이 무엇인고 하니, 건강한 자들이나 부자들이 아픈 사람을 생각해서 가진 것을 좀 베풀라는 것이다.

요즘 병원에 가면 CT촬영은 기본이고, 웬만하면 MRI도 찍어야만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런 수 십억 하는 첨단장비의 혜택을 가난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니, 부자나 건강한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에게 도와줄 때,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의 구현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을 더 세밀하게 말해보면, 미국 소고기 수입으로 인해 우리나라 목축업자들이 힘이 들 때, 그리고 서해안 원유유출사고로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원칙대로 하자면 그 피해에 대해서는 사고를 낸 놈들이 갚아야 당연한데, 그런데 누가 갚는고 하니, 국가에서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것이다. 조류독감으로 농가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피해에 대해서 70%를 국가에서 알아서 보상을 해주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자연재해를 당하든지 어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국가에게서 이웃사랑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이웃사랑보다 지금 국가가 하는 이웃사랑이 더욱 나아 보일 수도 있는데, 체계적이고, 합리적이고, 열심이고 말이다. 또한 강제적인데, 왜냐하면 세금은 누구든지 다 내어야 하니 말이다. 영화를 한 프로 보더라도 다 세금이 붙는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아프리카의 토속종교나 아시아의 왕권제도가 근대국가의 제도로 바뀌었는데, 지금 네팔도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뀌었는데, 그들이 외국의 물이나 한번 먹어보려고 근대국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들이 다들 하니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새롭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이웃사랑은 왕정체제보다 현 민주주의가 더 !!

과거 왕정체제에서는 왕이 제 아무리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해도, 역시나 왕은 자기 먹을 것은 챙기고 나서 여분의 것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베풀어준다는 것이다. 국가적인 민란도 미리 좀 예방하고 말이다. 왕은 굶으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왕이 제아무리 어질고 착하다고 해도, 그것보다 더욱더 사랑을 베푸는 것이 현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마누라가 몇 명인가? 너무 많아서 숫자도 잘 모르는데, 하지만 그때에 일반 민중들 속에서는 돈이 없어서 장가도 못간 사람들이 허다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 십 명의 마누라와 식솔들을 거느리면서 어떻게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가 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어 봐야 그 당시 국가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책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국민성금이라고 해서 기부금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심지어는 그런 것을 뜯어먹는 인간들도 있다는 것이다. 강원도 그렇게 심하게 수해가 났을 때, 그때 공사대금을 가지고 커미션을 챙기고, 서로 뇌물을 주고받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아직도 공사가 다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국가에서 감사원을 두어서 그러한 상황들을 감사를 하는데,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공무원들은 너무 박봉이라고 털털거리지 말고, 보너스를 800%나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인데, 또 연금도 따로 있고 하니 말이다. 사실 목사들보다 더 농땡이를 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물론 공무원들이 그렇게 노는 것이 국민들을 도와준다는 말도 있지만 말이다.

◈ 성경에서 이웃사랑보다 더욱 더 !!

이렇게 이웃사랑을 베푸는 것이 왕정체제보다도 현재 우리가 속해있는 민주주의 제도가 나았을 때, 여기서 왕정체제보다 낫다는 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 어느 체제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당연히 왕정체제 하에서 기록이 된 것인데, 물론 구약에서 초창기에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다윗을 비롯한 왕이 다스리던 시대였고, 신약도 역시 로마시대였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왕정체제에서의 이웃사랑보다도 현재 민주주의 제도아래에서 이웃사랑이 더 우월하다면, 그것은 곧 왕정체제에 대한 극복이고 발전인데, 그렇게 되면 왕정체제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이 성경을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더 이상 목사에게서 들을 이야기가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성경이 왕정체제의 산물이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요?

그 말의 의미는, 성경은 그런 왕정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증거하는데, 그것을 기록하는 시대적인 배경이 바로 왕정체제의 역사라는 것이다. 구약의 다윗시대부터 시작을 해서 신약의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물론 성경을 읽던 독자들도 그러한 왕정체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고 말이다.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데, 그런데 지금은 임금이 없으니 그것을 당연히 대통령으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 대통령이 어떻게 높은 지위에 있는 자란 말인가? 현재 민주주의제도 아래에서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오히려 국민의 머슴인데 말이다.

(딤전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 대통령은 국민의 머슴 ??

그러니 지금 우리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는 기간이 너무 짧아서, 민중들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대통령을 당연히 높은 직책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도 한 사람의 관료인데, 이 관료라는 것은 분업으로서, 행정체제의 일부를 담당한다는 말이다. 마치 농사를 지을 때 분업화가 되어서, 벼나 고추 등을 심는 사람과 추수하고 따고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말이다.

◈ 진중권 - 도대체 대통령이 뭔데?

요즘 진중권씨가 그렇게 열을 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대통령을 아직도 지도자로 보고 있는 민중들의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때문인데, 영국에서 1688년에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시민운동을 할 때, 사실 말이 시민운동이지 그 당시 민중들은 왕정체제의 인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는데, 즉 아무리 의회가 중요하다고 해도, 그래도 임금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자꾸만 싸우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지금 민주주의 제도도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국민들은 대통령 선거를 하면서도 아직도 조선시대의 임금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월급을 많이 받고, 높은 지위에 있는 귀족처럼 여기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진중권씨는 그것을 반대하는데, 그것은 전근대적이고 근대국가의 초창기 사고방식이니 말이다. 지금 이 시대에서는 대통령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국민의 머슴인데, 그런데 머슴이 왜 주인인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느냐는 것이다. 머슴인 주제에 말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미국산 소고기가 싫다고 하면 수입을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데, 제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말이다. 그런데 왜 대통령은 자꾸만 자기 마음대로 고집을 피워서 소고기를 수입하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인식의 틀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발달한 사람과 과거 조선시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과 사고방식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진중권씨도 잘못이 있는데, 그 점이 무엇인고 하니, 정치가 전문적인 분업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데, 그래서 그 양반은 국민들이 간섭하는 것을 허용을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간섭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완전히 분업이 되었으니 책임만 물으면 되는데, 물론 선거를 통해서 말이다.

◈ 메시야, 히틀러의 등장 !!

그런데 국민들이 일일이 다 간섭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히틀러와 같은 인간이 등장하게 되는데, 왜 히틀러가 등장하게 되는고 하니, 국회가 너무나 싸우니 국민들이 거기에 진절머리를 내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그런 난장판 국회를 깨끗하게 해결할 뛰어난 놈을 찾게 되는데, 그때 히틀러가 나타나서 어지럽던 국회를 시원하게 다 정치를 하고 처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자진해서 히틀러의 말을 듣게 되고 그에게 맹종하게 되었는데, 칼슈미트는 '독재론' 이란 책에서, 어느 나라이든지 독재가 없이는 그 나라의 경제가 발전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말이다. (아니, 그 양반이 박정희도 알고 있었나?)

아무튼 이제는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이웃사랑도 뭔가 받은 것이 있어야 제대로 할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자비롭게 때문에 좋은 이웃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그 이웃들이 혜택을 받으면, 자기는 그런 하나님의 이웃사랑을 간접적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 막스 베버 - 칼빈주의와 자본주의의 연대성 !!

여기에 대해서 언제 한번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욥기를 할 때 했지 싶은데, '증여' 라는 것은 자기가 공짜로 받은 것을 공짜로 그냥 주는 것으로서, 이것을 '시혜(施惠)', 즉 임금이 베푸는 은혜이고 선물인데, 그것이 자본주의 국가가 되면 소위 자본가들이 시혜를 할 것이 많기 위해서도, 즉 자선을 많이 베풀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유명한 막스 베버가 주장한 '칼빈주의와 자본주의의 연대성' 이라는 가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에 의하면,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고 하니, 졸지를 말고,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을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부자가 되게 해주시고, 잠언에도 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부자가 되면 남을 도와줄 수가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되니, 그러면 이상주의적 국가가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칼빈주의를 이야기해도 칼빈주의의 예정론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무엇에만 귀를 기울이는고 하니, 어떻게 하면 우리가 왕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가 잘 살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있는 대로 이웃사랑을 합리화시키고 그것을 행정화시키면 되는데, 즉 법적으로 고정화시켜버리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굳이 교회에 가서 이웃사랑을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이웃들도 어릴 때 모두 세례를 받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국가를 통해서 이웃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경제체제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누가 반론을 제시하는고 하니, 그 이름도 유명한 '마르크스' 라는 것이다.

◈ 마르크스 - 이웃사랑을 하려면 똑바로 해라 !!

제가 지금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려고 서론을 그렇게 길게 했는데, 마르크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이웃사랑을 하려면 똑바로 해라!" 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웃사랑을 거부하고 다시 왕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려면 성경말씀에 나와있는 대로 제대로 하라는 말이다. 그래도 마르크스가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아닌가?

성경에 이웃사랑에 관한 구절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데, 그냥 보지를 말고 자기가 마르크스라고 여기고서 한번 보자는 말이다. 지금 마르크스가 이 성경구절을 가지고서 남을 설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여기 44절과 45절에 있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라는 것은, 그야말로 '레닌주의'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마르크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제자인 레닌 말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여기 46절에 나오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라고 하는, 그런 성전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웃과 더불어서 다같이 잘사는 그런 사회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딱 보니 성경에 나오는 바로 이 구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것을 어디까지 관련을 시키는고 하니까, 처음 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에 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서로가 이렇게 살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기가 지금 새로운 기발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이전의 원시사회 때에 사람들은 욕심이 없이 서로서로에게 통용하고 나누어주는 생활을 했었다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등장하는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민주주의가 싹이 트고 있었는데, 국민을 위해서 전문적인 공무원들이 있다면, 그 공무원들은 당연히 모든 국민들이 다같이 골고루 잘 살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잘살게 되면 무엇인고 하니, 범죄가 없어진다는 것인데, 물론 범죄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줄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의하면 말이다.

◈ 범죄는 가난에서 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범죄란 무엇인가? 성질이 더러워서 사고를 치는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배가 고파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범죄는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인 빈곤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빈곤은 과거 수도원에서 많이 시도를 했는데, 정말로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은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도 그렇게 했고 말이다.

중세시대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어도 개인적이 아니라, 국가적인 역량을 모아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에 있는 대로 말이다. 그렇게 성경에 있는 대로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종교적인 입장에서, 자기가 낸 세금이 고아와 과부를 돌볼 때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아이쿠, 좋은 일을 했구만" 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도 구원을 받을 수 있네"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에 있는 대로 행했으니 말이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그런 것을 국가가 아니 개인적으로 해봐야 라면 몇 박스밖에 더 도와주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으니, 즉 라면정도가 아니라 따뜻한 잠자리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부자들에게 세금을 좀 많이 거둬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둬봐야 푼돈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자기의 주장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보았는데, 즉 "성경을 믿는 이 사람들아,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정말 믿는가? 사도행전 2장 44절에 나오는 이 말씀도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서 어떻게 천당에 간다고 하는가? 꼴좋다. 너희들끼리 잘 가라" 라고 하면서, 아주 날카롭게 지적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리가 있는 주장이고 말이다.

◈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마르크스는 말하기를, "그런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조상들이 다 해오든 것이다" 라고 하는데, 즉 서로 서로 나누어주면서 그렇게 다들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바로 여기에, 즉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라는 데서 자본주의의 사회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서로 나누어주고 통용하는 것이 정답이고 맞는 것인데,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물론 마르크스도 잘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데, 마르크스가 그런 부자들에 대해서 무조건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잘 사는 사람들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어떤 나쁜 짓을 하는고 하니, 그렇게 잘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 자기들이 그렇게 잘 살아가는 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가난하게 되는 원인제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그러한 체제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의 원인제공에 대해서 말이다.

아니, 부모를 잘 만나서 유산을 받아서 잘 사는 것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자기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잘 하지 못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단순노동이나 하면 월급을 적게 받을 수밖에는 없고, 어렵게 살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 국가는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

마르크스도 이런 점은 인정을 하는데, 마르크스가 의사와 단순 노동자가 같은 월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도대체 잘 사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기에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가면 갈수록 더 궁핍해지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고치고 개선해야만 하는데, 그것을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고 하니, "아하,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지켜야지"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해보니, "아하, 벌써 근대국가 자체가 나도 모르게 이미 이웃사랑을 실시하고 있었구나" 라고 말이다.

국가에서 이미 그렇게 실시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런 체제를 이미 유럽에서 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왕정체제는 말고, 기존의 모든 공화국체제 아래에서는 성경말씀에 있는 대로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았는데, 체계적으로 법적인 힘을 가지고서 말이다.

◈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서 !!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모순이 과연 무엇인가? 조금 전에 여기에 관해서 질문도 있었는데 말이다. 잘 사는 사람은 그대로 잘 살고, 그렇지 않고 못 사는 사람은 계속해서 그대로 자기들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선지서 이사야 5장에 보면, 부자는 전토에 전토를 더하고 가옥에 가옥을 더한다고 되어있는데, 그것은 곧 모든 체제가 말로는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체제가 부자들을 위한, 모든 법적인 뒷받침도 다 부자들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더라는 말이다. 의회도 마찬가지인데, 어디 국회의원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사 5: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아무튼 이런 부자들의 부(富)가 이상하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증가하는데, 그래서 그 이유를 조사를 해보니, 원래 일을 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될 몫이 그만 부자에게로 빠지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서 5장에도 나오는데, 그래서 부자들을 보고, 울고 통고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약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약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그러므로 지금 마르크스가 하는 이야기들이 전부 성경말씀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왜 이 성경공부시간에 경제를 공부해야 하는고 하니까, 서양의 경제학들이 다 성경이 그 밑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웃사랑에 대한 구체화 작업으로서 말이다.

◈ 목사도 국회로 !!

만약에 이러한 방면에 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목사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목회를 그만 때려치우고 정계에 입문을 하지 싶은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만이 본격적으로 이웃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예를 들어서, 장애인 교회에서 당회장을 하다가, 장애인을 대표해서 국회에 들어가서 장애인을 위한 법을 만들고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목사로서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장애인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이 정치를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서경석 목사라는 양반인데, 우리나라에 이주해온 사람들 모임을 만들어서 일을 하는데, 물론 비리에도 얽히고 말이다. '제국' 이란 책을 보면 이렇게 이주한 사람들의 모임도 엄연한 하나의 경제파트라는 것이다. 이번에 한나라당에 장애인단체의 목사들이 비례대표로 들어갔고 말이다.

◈ 이진경과 김동수 !!

그래서 이진경씨는 뭐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아예 노동자체를 하지 않고도 골고루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경제체제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마르크스 선생님이 진짜로 원했던 바가 아니냐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해서 김동수씨는 뭐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아니, 세상에 노동도 하지 않고 무슨 가치가 발생을 하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이진경씨가 노동을 하지 않고도 다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산업기계의 발달로 인하여 육체적인 노동은 줄어들고 유통만 남게 되는데, 그러한 유통을 통해서 많은 이익을 남기도록 경제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이진경 - 이제는 유통이다 !!

그러한 유통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암웨이인데, 그리고 초대형 할인마트가 그렇고 말이다. 물론 대형백화점은 당연한데, 이렇게 모두가 다 유통산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이제는 유통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네덜란드의 튜울립이나 장미를 대형마트에 유통을 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굳이 씨앗을 가지고 와서 잘 키울 생각만 하지 말고, 그런 것은 기계에 맡기고 관심을 먼저 유통에 가져달라는 것이다. 즉 머리를 쓰라는 말인데, 팔뚝 근육은 기계에게 맡기고, 그것이 곧 자동화시스템인데, 사람들은 유통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쁜 의미에서의 유통이 아니고 말이다.

남태평양 바다에서 참치가 많이 난다고 하면, 그런데 그 참치가 그곳에서는 천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오천원을 한다면 그것이 문제인데, 그러니 어민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이천원에 팔고 천원은 어민들이 먹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머리를 쓰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곧 현대의 경제구조이니 말이다.

◈ 이제 교회가 아닌 집에서 !!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한가? 이진경씨의 주장에는 이런 것들도 대부분 포함이 되는데, 교회도 일종의 유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건물을 지어서 부동산 사업을 할 생각일랑 말고, 집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통해서 설교를 하라는 말이다.

그것도 자기가 설교하기가 힘이 들면 기존의 설교집이 있으니 그것을 보고 온 나라가 다같이 절기에 맞추어서 하면 되고, 장로님의 기도도 하기가 힘이 들면 역시 기도문을 통해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교인들은 그렇게 인터넷을 보고 헌금을 하고,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웃사랑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국가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말이다.

그렇게 되니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차를 타고 교회에 와서 모이고 말고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이나, 특히 유럽이 모두가 그 꼴이 모양이 아닌가? 이제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자본론은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까, "지금 이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것인데, 즉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현실문제에 있어서 말이다. 성경에서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하는 명령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바로 그것에 대한 연구인데,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하는 성경공부도 거기에 의미가 있고 말이다.

그러니 말로만, "이웃사랑을 하세요", 혹은 "구제를 하세요" 라고 하지 말고, 즉 교회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말고, 그런 사람들은 집을 멋있게 지어서 모두 수용을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려고 하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부(富)가 유통과 같은 것을 통해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김동수 - 이진경씨, 당신은 너무 이상적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김동수씨는 언급하기를,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이상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반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자본의 두 얼굴' 이라는 책이란 말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책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먼저 우리 교재 1페이지 중간 부분을 보자.

** 경제법칙은 그 성질상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사람의 힘으로 다같이 잘먹고 잘살 수 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에 있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라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힘으로 한 것인가? 사람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같은 사람은 주장하기를, 그런 것이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도 가능한데, 즉 객관적인 논리를 따지면 사람으로도 다함께 잘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성령까지 동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종의 경제의 법칙인데, 그러니 그런 경제법칙만 밝혀내면 된다는 것이다.

◈ 경제법칙만 밝혀내면 굳이 !!

그러니 문제가 간단한데, 성령을 받고 기도를 하려고 하지 말고, 경제법칙만 알게 되면 다같이 잘먹고 잘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도와줄 수가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생산양식'을 조사하는 것인데, 즉 생산양식의 생산관계를 파악하게 되면 그러한 경제법칙이 밝혀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산이 우선이고 소비는 나중이다" 라는 것이 마르크스 시대의 경제이론인데, 즉 뭔가 생산하는 것이 있어야 나누어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렇지가 않고, "나누어주는 것이 먼저이고, 그렇게 나누어주는 가운데서 생산이 되는 것이 있다" 라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조금 전에 제가 소개한 이진경씨의 '유통구조론'이고 말이다. 나누어주는 가운데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쌀가마니가 있는데 그것을 보낼 때 농사를 지은 사람이 직접 낑낑거리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택배를 부르게 되는데, 그러면 택배회사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을 여러 명을 고용해야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이들이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뭔가 나누어주는 과정 속에서도 생산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을 힘들게 만들어내는 것만이 생산이 아니라, 이렇게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도 역시 총생산에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택배일이 농사일보다 훨씬 더 힘드는데?)

◈ 프로야구나 축구도 유통업 !!

그러한 유통이 곧 서비스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프로야구라는 것이다. 요즘 롯데가 인기 상한가인데, 삼성은 어제도 깨지고 말이다. SK가 삼성을 '18:빵'으로 이겼는데, 그러면 대전이나 청주 사람들은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기쁨이 생산성에 크다란 효과를 준다는 말이다. 물론 삼성은 잘하나 못하나 대구경제는 엉망이지만 말이다.

그런 프로스포츠의 생산효과가 통계적으로 조사가 되어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통계로 나온다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SK 야구단은 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기 지역의 경제를 살리니 말이다. 물론 실제로는 삼성 선수들이 훨씬 더 많은 돈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하는 짓을 보면 연봉을 도로 빼앗아내어야 하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이번에 한국축구가 요르단을 '3:빵'으로 이겼는데, 김두현이 헤트트릭을 세워서 말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는 것이다. 만약에 졌다고 하면 업무능률이 떨어지고 말이다. 이런 것도 계산상으로 다 나오는데, 즉 수치로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박지성이 돈을 많이 받는 것도 당연한데, 수 천억의 경제유발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과거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인간의 노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자연의 혜택을 베푸는지, 즉 지진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고, 제때에 비가 와야 되고, 그래서 생산물의 대부분을 자연의 몫으로 돌렸는데, 왜냐하면 제 아무리 사람들이 열심히 해도 땅이 비옥하지 않고 적당할 때 비가 오지 않으면 먹을 것도 챙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 모든 종교는 감사제사로 시작 !!

모든 종교의 시작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즉 "신에게 감사하자" 라는 것인데, 그러니 모든 종교의식은 바로 '감사의 제사' 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에게 제사하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면, 그 다음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조상제사'로 바뀌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현대에 들어와서는 땅이 비옥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사람이 요소비료를 가져다가 땅에다 주면 된다는 말이다. (혹시 요소비료를 아시는지?) 물론 앞으로 이것이 공업화가 되면 그렇게 일일이 비료를 주지 않아도 되는데, 농사를 짓는 것도 모두 다 기계로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동화 시스템으로 말이다.

◈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결국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맡겼던 법칙이 이제는 인간 손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객관적인 법칙으로 전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아도는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에서 생긴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 이전과 자본주의 이후가 달라지는데,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서는 잉여가치는 어디서 누가 주는고 하니 신의 은총이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씨를 뿌려놓으면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후에서는 자기가 일하지 않으면 잉여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잉여가치는 신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한 사람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곧 신의 이치라는 말이다. 그러니 마태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도 자본주의와는 전혀 맞지 않는데, 아침에 일찍 온 사람이나 나중에 온 사람이나 동일하게 품삯을 주니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성경의 그런 부분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일을 한만큼 제대로 챙겨야 한다고 여기니 말이다. 물론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거리를 주어야 하는데, 국가에서 만들어서 말이다.

◈ 마르크스 - 이자만 제대로 받으시오 !!

우리가 여기서 마르크스를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는 자본자가 이자를 받는 것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이자만 제대로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자본가들이 이자보다 더 많은 것을 챙겨서 받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시비를 걸었는데, 즉 남의 것을 왜 자기가 챙기느냐는 것인데, 그러니 이자만 제대로 계산해서 받으라는 말이다. (러시앤캐시, 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본적인 경제법칙은 잉여가치법칙이다. 이 '잉여가치'라는 말은 '사용가치'라는 말과 더불어 차별 지으면서 등장된다. 그리고 '사용가치'란 자연 재료에다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어 생겨나는 가치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소가죽이 있다면 이것이 그냥 가방이 되는가? 가방이 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소를 잡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가죽을 벗기고 가공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재단을 해서 가방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판매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택배로 운송해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소에게 있을 때는 거의 제로였던 가치가 가방으로 판매가 될 때는 10만원이라는 가치가 되는데, 중간에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 과정에 자본이 필요하게 되는데, 소를 운반할 때 트럭을 구입하든지 해서 말이다.

◈ 노동자는 왜 항상 모자라는가?

마르크스는 그렇게 자본자가 돈을 빌려줄 때 이자도 받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자만 쳐서 받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가 그러한 생산과정에 개입을 해서 필요 이상의 이자를 챙기게 될 때, 그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이 되면, 노동자는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노동을 두 배로, 세 배로 더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에게 그 몫이 언제나 모자란다는 것은, 노동자가 노동을 적게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등쳐먹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자꾸만 누군가가 가지고 가기 때문에 자기 먹을 밥이 모자라는데, 하지만 그것을 먹었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분명히 밥은 모자라는데, 그런데 가지고 간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 그러니, 아예 경제구조 자체를 뜯어고치자 !!

그래서 마르크스는 주장하기를, 그것이 바로 부자, 곧 자본가의 마음가짐이니, 그런 사람들을 붙들고 복지를 하자고 하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자는 자기 생색을 내는 차원에서 그저 몇 푼 던져주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 것보다는, 아예 경제구조 자체를 뜯어고치자는 것인데, 즉 근원적으로 배려를 해주는 것이 제대로 된 복지라는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그만 이 책에 '뿅' 가고 마는데, 읽고 나면 자본론의 투사나 열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요즘 매일같이 하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도 역시나 그러하고 말이다. 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너무나 하자나 빈틈이 없고, "정말 그렇구나" 라고 납득이 될만한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이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서 제대로 반격을 하는 사람이 없는데, 여기 이진경씨도 마르크스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김동수씨와 서로 자기가 추종자라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용가치를 낳게 하는 노동을 '유용노동'이라 하는데, 이 '유용노동'은 '필요노동+잉여노동'으로 나뉠 수 있다. 필요노동이, 노동자에게 주어진 욕망 충족에 필요한 사용 가치의 양만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이다. 그렇다면 잉여노동이란, 노동자 본인에게 필요이상으로 강요당하는 노동이라는 말이다. 이 잉여노동이라는 '유용노동'에 의해서 생겨난 가치가 곧 '잉여가치'이고, 자본가들은 오직 이 '잉여가치'를 노리고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자본가 : 가방을 좀 만들어 주세요.
* 노동자 : 예, 알겠습니다. 여기 다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만 집에 갑니다.
* 자본가 : 안 됩니다. 그냥 가버리면 제가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만 더 만들고 가세요.
* 노동자 : 예? 할 수 없지요. 하나 더 만들고 가겠습니다.

◈ 자본가는 이윤(잉여가치)을 노려 !!

이 노동자는 하루에 가방을 하나만 만들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를 더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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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