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대구강의02-현대신학의단초2(헤겔)-잘린부분
08대구강의02-현대신학의단초2(헤겔)-잘린부분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 헤겔의 문제점에 대해서 !!
오늘 직접인용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재의 내용을 보면, 헤겔의 존재론과 본질론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나오는데, 거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해야하는데, 교재만 보면 딱딱한 논리가 되어서 말이다. 아무튼 이 교재를 보려면 힘이 드는데, 그래도 읽어보면 나쁘지는 않지만, 물론 글자가 틀린 것도 몇 군데 있지만 말이다.
◈ 헤겔은 처음부터 인간을 의식 !!
지금부터 헤겔의 문제점에 대해서 비판을 해보겠는데, 헤겔의 신학에 있어서, 그는 처음부터 무엇을 의식했는고 하니, '인간'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을 의식해서, 인간문제는 그렇게 해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 신의 영역을 떼 내어버리고 인간은 유한자로서 인간에 머무는 것으로 끝이 났는데, 하지만 헤겔은 하나님의 법칙이 있는데 왜 인간들끼리 하느냐고 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인간에게 덮쳤다는 것이다.
헤겔이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관심이 결국 무엇인고 하니, 인간과 더불어서, 인간에 관한 신이라는 것이다. 지금 현대신학이 이런 헤겔 신학을 벗어나지를 못하는데, 여러분이 들었다시피 헤겔이 주장한 것이 완벽한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헤겔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완벽한 신학을 구축하면서도 현실세계에 대해서도 다 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헤겔신학은, 교회내부와 밖의 현실적 문제까지도 !!
그러니 헤겔의 신학은 교회만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교회 밖의 현실적 문제까지도 다 아주 큰 어망으로 모두다 끌어당겨서, 전체를 하나의 하나님 자기정신의 전개하고, 그리고 회수함으로서 말이다. 이것으로 완전히 설명해버렸으니, 이것은 철학의 승리인 동시에 신학의 승리로서 헤겔을 추앙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 모든 신학은 헤겔의 주석이다 !!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신학은 헤겔의 주석이다" 라고 주장했는데, 물론 여기에 대해서 반발이 심한데, 스피노자나 들뢰즈도 그렇고 말이다. 헤겔의 주장이란, 결국은 '자아절대' 라고 해서, 인간이 돗대인 줄 알고 까분다고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그들이 욕을 하든 말든 간에, 헤겔에 와서는 모든 철학은 완전히 마침표를 다 찍었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 - 헤겔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 !!
그래서 하이데거가 군지렁거리는데, "헤겔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자아가 신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데, 인간 속에 신이 침투해있으니 말이다. 마치 추운 날씨가 인간내부까지 침투해서 밥을 먹어도 벌벌 떠는데, 그래서 "당신, 왜 떠는가?" 라고 하면, "내가 춥거든"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추운 날씨가 밥을 먹고 싶은 의지를 이긴다는 것이다.
바로 하이데거는 이런 점이 싫다는 말이다. 그래서 "추위야 가라. 날씨가 추워도 나는 뜨겁게 라면을 끓여먹겠다" 라고 하는 것이 하이데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속에 있는 존재가 바깥의 현실보다 더 강렬하게 마구 뿜어낸다는 것이다.
◈ 헤겔의 하나님은 과연 언약의 하나님인가?
이 헤겔의 문제점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을 먼저 상정하고 그 다음에 신을 등장시키는데, 즉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세가 만났던 그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언약의 하나님은 기존의 있는 인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인간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있는 인간은 지옥으로 보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자기는 원래 없었는데 생겼다고 하는 놈들만 모아서 천국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 그리고 십자가도 모르고, 죄도 몰라 !!
그리고 제가 헤겔에 대해서 강의를 하면서 십자가를 언급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헤겔은 이 십자가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고 '성육신'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9절에 나오는 십자가 이야기는 하지 않고, 사실 헤겔은 이러한 십자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할 수 있는데, 즉 복음은 모른다는 것이다. (누가 복음을 알리요?)
◈ 다만 신의 낮아지심에만 집중을 !!
다만, "아, 신이 얼마나 낮아졌으면 인간이 되었을까?" 라고 하는, 즉 신이 인간이 높아지는 것이 반대해서 신이 그렇게 낮아진 것에 대해서만 집착을 했지,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헤겔이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말이다. 아직도 인간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고 있고, 인간을 격려하겠다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모르니 죄라는 말은 하지를 못하고, 또 그렇게 죄라고 하면 자기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니 말이다. 아무튼 헤겔은 십자가까지 오지는 않았지만 비슷무리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를 부정했으니, 자기가 법을 지켰다고 해서 의인이라고 까불지는 마라는 것이다. 언제 예수님이 법대로 했는가? 사랑으로서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유명한 신학자들이 하는 말과 비슷하지 않는가?
◈ 상대가 없으면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다 !!
지금 제가 힘이 없어서 강의하기가 어려운데 조금만 더 집중하시고, 아무튼 사랑으로 남을 포용하고,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가 없으면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다" 라는 것이다. 저기 아랫동네에서는 죽음이 무서워서 피신해서 자기만 생각하는데, 하지만 윗동네에서는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는, 그러한 생명과 사랑의 기쁨을 가지고서 임할 때, 그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결국은, 내가 곧 신이다 !!
이렇게 되니 무엇인고 하니까, 칸트보다 더 높이 올라가서 신과 일치하려고 하는, 신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결국은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이란 말이다. 이런 것을 알았으니 자기가 곧 신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은 아니지만, 그렇게 신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동력을, 즉 힘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영광이 아니라, 예수도 결국은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서 우리가 예수를 꺾고 넘어가야 하니 말이다. 우리는 신이 되어야지 예수처럼, 그런 하나님의 똘마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똘마니가 되면 우리 속에 있는 변증법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데, 즉 그 예수마저도 뛰어넘으려고 하는 변증법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 헤겔에게는 죄의 개념이 없어 !!
그것을 헤겔은 인간의 잘못으로, 즉 죄로 보지를 않고 신의 본질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즉 "너희가 먹는 날에는 신이 되리라" 라고 하는, 그 사단의 말에 동의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말이다.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선악과와 생명나무 !!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권을 인간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 즉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심판권은 하나님 자기 손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심판권이 영원히 가버리는 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자체를 죄로 규정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영원성을 보장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도록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켜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자체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죄'가 된다는 것을 확정시키는 것이고 말이다.
◈ 헤겔을 우리의 총회장으로 !!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헤겔은 반대하는데, 그는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지 타넘고 타넘어서 신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 내장되어있는 본성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들었으면 무척이나 반기고 좋아할 내용인데, 정말 복음 중에 복음이라고 말이다. 헤겔이 철학자이고 너무 어렵게 생각해서 그렇지, 만약에 알았다고 하면 헤겔을 총회장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없어도 되는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있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섬기라고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생각보다도 우리는 없다고 여기고, 오직 우리 안에 주님만 살아서 움직인다고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렇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 남아서 봉사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 03,26, 오후 11시 07분에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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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간사님, 질문할 것이 있습니까?
* 상호기만을 인간(?)의 특징으로 보면 되지 않습니까?
* 예, 그렇지요. 그러니 그 이전에는 노예가 되어서 살았는데, 그러나 이제는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기는(?) 것으로서, 즉 "아이쿠 사장님, 잘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뒤따라오니까 말이다.
* 물(物) 자체를 칸트는 남겨두는데 반해서, 헤겔은 그것까지도 포섭하려고 했으니,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경우에는?
* 그렇지요. 칸트는 그렇게 남겨두는데, 그리고 헤겔은 그렇게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역사로 등장했고, 그래서 추운 날씨 정도가 아니라 우리 내면까지 본질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 그러니 그렇게 역사로 들어와야만 그분을 알 수 있고, 포섭할 수 있지 싶은데요?
* 역사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이 남긴 사건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실체로 보자는 것이다.
* 칸트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그 물 자체를 파악할 수 없지 않습니까?
* 그렇지요. 잘 아시네요.
※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8.27~1831.11.14]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 데 의미가 있다. 또한 모든 사물의 전개(展開)를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辨證法)은 그의 논리학과 철학의 핵심이다.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슈투트가르트 출생.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무관 아들로 1788년 뒤빙겐대학교 신학과에 입학 J.C.F.휠데를린 및 F.W.셸링과 교우하였다. 졸업 후 7년간 베른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를 한 뒤 1801년 예나로 옮겨 예나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미 예나대학의 교수로 활약 중이던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 잇달아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셸링적 입장을 벗어나 1807년에 최초의 주저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 Phanomenologie desGeistes》을 내놓아 독자적 입장을 굳혔다. 이 무렵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예나대학이 폐쇄되자 밤베르크로 가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으며, 이어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이 되었고, 이곳에서 둘째 주저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1812∼1816)을 저술하였다.
18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취임, 그 동안 《엔치클로페디 Enzyklopa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817)를 발표하였으며, 1818년에는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고 곧 마지막 주저 《법철학 강요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1821)를 내놓았다.
베를린 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되었으며, 그의 철학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었으나 1831년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헤겔 철학의 역사적 의의는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 데 있다.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머리 속에서 생각한 이상에 치중, 이 이상을 현실로 실현해야 하며 또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 반하여, 헤겔은 현실이란 그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정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써도 그 이상이 역사의 법칙적 흐름에 알맞게 부합되어 있지 않는 한 그 노력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헤겔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가졌으며, 역사는 절대자 ·신(神)이 점차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이성(理性)이고 그 본질(本質)은 자유(自由)이다. 따라서 역사는 자유가 그 속에서 전개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며, 단 한 사람 전제군주(專制君主)만이 자유이었던 고대로부터, 소수의 사람이 자유이던 시대를 거쳐 모든 사람이 자유가 되는 시대로 옮아간다. 그리하여 현대는 바로 이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어야 할 시대라고 보았다.
헤겔은 이러한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장대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는데 그 체계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3부로 되었으며, 이 전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展開)를 정(正) ·반(反) ·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辨證法)이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이야말로 절대자이며 반면 자연은 절대자가 자기를 외화(外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논리학에서는 자연 및 정신에 대하여 고루 타당한 규정이 다루어졌다.
그의 철학은 그 관념론적 형이상학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과 반발을 받기도 하였지만, 역사를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역사주의적 경향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또 변증법이라는 사상으로도 후세에 다대한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선정한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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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증법 [辨證法, dialectic]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이 말은 그리스어의 dialektik?에서 유래하고, 원래는 대화술·문답법이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훌륭하게 전개되고, 그것을 이어받은 플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근세에 와서 변증법이란 말에 다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I.칸트이다. 칸트는 변증법(칸트의 경우 보통변증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뜻은 마찬가지이다)을 우리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推論),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와 같이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矛盾律)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W.F.헤겔이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반(反)·합(合)(정립·반정립·종합, 또는 卽自·對自·즉자 겸 대자라고도 한다)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즉, 아우프헤벤(aufheben:止揚 또는 揚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 그 자체에 모순이 실재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변증법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K.마르크스, F.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두산백과
현대 신학의 단초 - 헤겔 사상과 하이데거의 사상
20007,12 이근호
Ⅰ 서 론
헤겔(1770-1831)과 하이데거(1889-1976)는 세상과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성경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철학적 논리로서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성경 말씀의 권위를 앞장세우는 교회의 진리 전달 방식에 허점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나름대로 진리를 획득하고 또 구성하기 위하여 성경에 접근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 주체성에 이미 진리를 도출할 수 없게 만드는 문제점과 약점을 담고 있음을 통보해 주는 바도 된다.
즉 성경 구절을 거론하면서 남들에게 외친다고 해서 그 본인이 진리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우길 수 없는 일이다. 본인 자체가 비진리적인 심보와 심성과 욕망의 화신이 되어 이상, 그가 남들에게 날리는 성경 구절들은 기껏 자기 정당화를 커버하려는 변명이 지나지 않는다. 신과 신이 운영한다는 우주와 인간 세계에 대해서 누구든지 자기 견해를 따로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전파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하지만 그 주장들이 일관성을 가지고 앞 뒤에 맞는 논리 위에서 진행되지 못하고 본인들이 딛고 사는 그 시대와 삶의 환경의 한계를 반영하면서 그때그때마다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적응하려는 형태로 보이면서 분절된 주장들을 나열할 때, 과연 그 사람이 진리에 관심이라도 있는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에게 유리하다, 불리하다고 판정 짓는 기준도 실상은 보편적인 진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보편적 진리를 싫어하고 자기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개별적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에 치열하게 대항한다. 이 정도로 인간이란 존재는 성경 구절까지 거론하면서 실은 성경 말씀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다.
교회를 운영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반대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근본 심성은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그 시대의 사람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게 여전히 범람하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사람들이 십자가를 그토록 미워하는가? 도대체 인간들이 신을 언급하면서 공통적으로 결집될 수밖에 없는 진리관은 무엇인가?
헤겔과 하이데거의 철학은 죄악 된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결집될만한 인간들의 보편적 진리관과 신관을 설득력 있게 대변해주고 있다. 현대 철학과 현대 신학과 현대인들의 교회 내에서 설교나 성경을 이해하는 그 바탕적 의도를 대변해 준 셈이 된다. 자신이 십자가 원수로 살아오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판정을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은, 왜 인간들의 상식으로 예수님을 꼭 죽여야만 하는가를 다 드러내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Ⅱ 본 론
1. 헤겔의 사상
헤겔은 칸트, 야코비, 피히테 등으로 대변되는 당대의 철학을 ‘반성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이 철학들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이성의 오성화’에 있다고 단정한다. 이성이 단지 오성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신보다 나은 것을 자신의 외부에, 그리고 자기를 초월한 믿음 속의 피안으로 설정함으로써 이성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철학자들의 경향들에서 절대자, 실체, 물자체란 인식의 대상이 아닌 동경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에, 자연과 자유의 대립은 화해되지 않는 분리 속에 영속화 된다는 것이다. 경험적인 것이란 무한한 개념과 단적으로 대립하며,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이라고 하는 이 대립의 영역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들 있는 것이다.
물자체의 영역을 사유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는 없으며 이성이 물자체를 인식하고자 하는 월권행위는 반드시 해소할 수 없는 기만적 가상으로서의 이율배반에 빠져들고 만다는 칸트의 인식 이론은, 학문적인 면에서 사변적 사유의 거부를 정당화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무한, 즉 물자체가 이성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결코 이 이성적인 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는 해괴한 결론에 도달될 뿐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반성 철학이 갖는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가 반성 철학이 유한한 주체와 분리시켜 피안의 세계로 밀어낸 실체, 혹은 물자체, 절대자를 오직 실체 그 자체로서만 간주할 뿐 이를 주체로서 사유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실체 형이상학에서의 실체한 오직 자기 동일적인 실체로서만 사유될 뿐, 스스로를 사유하는 주체의 본성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들은 간과했다고 헤겔은 보고 있다.
실체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도리어 부정의 부정으로 대해야 한다. 절대자로서의 실체가 무규정적인 것, 혹은 추상적인 자기 동일자로 (스피노자의 주장)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규정들의 절대적 통일로 고향될 수 있기 위해서는 긍정으로서의 절대자 속에 부정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며 이는 오직 실체 자체가 부정적인 것으로서 파악될 때에만 가능하다.
실체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규정으로서의 단순한 부정을 부정의 부정으로, 즉 스스로를 부정하는 부정적인 힘이지 위력으로서 파악한다는 것과 동일하며, 이는 실체가 자기 자신을 사유할 수 있는 주체로서 정립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실체는 차안의 근거가 되는 근원자, 혹은 정초자가 아니라 차안의 세계로 자기를 전개시키고 또 이로부터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렇다면 실체를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사유한다는 것을 어떤 의미를 갖는가? 실체를 주체로서 파악한다는 것, 실체와 주체를 통일시킨다는 것은 실체에 자기 구별 능력을 부여하고 그 구별 속에서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머무르는 구체적 동일자로 실체를 전환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서 실체는 스스로를 구별함으로써 세계의 다양성으로 자기를 표출하고, 이로부터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가는 생동적인 실체로서 정립될 수 있다. 실체가 주체로서 자기를 구성해 가는 도정, 혹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 및 유한성의 절대적 고착을 파괴해 가는 이 도정은 ‘존재 논리학’과 ‘본질 논리학’에 준해서 설명할 수 있다.
존재 논리학은 전통적인 존재론에 대한 비판이다. 즉자 존재자만을 고찰하고 그 존재자 규정에 사로잡혀 있는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헤겔은 유한한 사물을 ‘즉자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측면으로 다가선다.
즉자존재란 유한한 사물로서의 어떤 것이 갖는 자기 동일성, 혹은 자립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 대타존재란 어떤 것이 타자에 대해서 갖는 타자 의존적인 측면, 혹은 타자 관계적인 측면을 의미한다.
즉자존재와 대타존재는 서로에 대해서 타자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관계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즉자존재를 대타존재에 대한 타자로, 역으로 대타존재를 즉자존재에 대한 타자로 간주하도록 함으로써, 양자를 타자에 대한 타자로서 드러내는 결과를 산출하며, 이러한 점에서 둘 중 어떤 것을 즉자존재라 칭하고 어떤 것을 대타존재라고 칭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의미 없는 일이다.
즉자존재란 대타존재에 대한 부정적 관계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한 그것은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벗어나 타자를 자기로부터 배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의 즉자 존재적 측면이 대타 존재적 측면 없이 언급될 수 없는 어떤 것의 본질적 계기이기 때문에, 대타존재는 곧 즉자존재로 이해되며, 대타존재 역시 즉자존재를 그 자신의 본질적 계기로서 자체 내에 포함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양자는 각자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대립된 것들의 일반이며 이것이 양자가 맺는 변증법적 연관 관계이다. 이는 타자를 그들 자신의 외부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이 그 자체에서 타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타자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의 타자로 전환되기에 이른다는 말이다.
즉 타자의 계기를 자기 자신 속에서 필수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나의 통일체로서 드러나게 되며, 타자의 계기를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이 측면이 자기 자신의 규정, 즉 통일성을 파괴하고 다른 계기로 이행하는 하는 주요한 논리적 기제라는 점이 밝혀지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 논리학’적인 부정은 ‘존재를 그 자신의 직접적인 지반이자 요소로 가지고 있는 부정으로서 이해된다.
존재의 영역이 직접성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본질의 영역은 이 직접성으로부터 반성된 것으로부터 반성된 영역이다. 헤겔은 ‘본질 논리학’을 ‘반성 논리학’이라고 부른다.
헤겔은 ‘가상’이란 본질의 고유한 정립이라고 말한다. 이때 본질은 가상의 정초자이자, 가상의 존립 근거를 형성하는 자립적인 것이며, 가상은 정초자로서의 본질을 통해서 정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에 의존하고 있는 비자립적인 것이다. ‘존재 논리학’은 어떤 것과 다른 것, 유한자와 무한자와 같은 규정들은 질을 담지하고 있는 존재자라는 점에서 그 자체적으로 존립하는 것들이다.
이 규정들은 어떤 하나의 규정에 대한 다른 하나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있는 것들로 현상한다. 이에 반해서 반성된 규정들, 즉 본질의 규정들은 상호적으로 존재하지 않고서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로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규정들을 ‘존재 논리학’에서처럼 자신의 규정과 나란히, 그리고 병렬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으로 통합하는 있는 규정들로서 제시되며, 이것을 타자에 대한 관계를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 굴절 환수시킨 규정들이라고 정의한다.
본질 논리학을 지배하는 원리는 ‘반성’이며 범주들이 갖는 관계 구조 자체만을 고찰한다는 점에서 ‘관계의 논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관계적인 부정성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부정성이며, 부정의 지반이나 토대는 ‘존재 논리학’에서처럼 질을 담지하고 있는 어떤 존재적인 것으로의 기체(基體)가 아니라, 오직 부정 그 자신일 뿐이다. 반성하는 운동은 오직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관계시키는 부정으로만 존재를 지니는 부정 그 자체로서의 타자이다.
존재 논리학에서의 부정이 ‘존재와 더불어 있는 부정’으로서 제한적 부정, 상대적 부정이라고 한다면, ‘본질 논리학’에서의 부정은 ‘부정과 더불어 있는 부정’, 즉 철저하게 ‘부정으로 일관된 부정’이며, 바로 이러한 부정 개념이 본질 논리학을 자기 관계적 부정성의 논리학으로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 다시 말해서 ‘본질 논리학’에서의 부정이란 자기 자신을 타자로 정립하고 타자로부터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본질의 주체적인 활동성을 표현하는 생산적 부정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반성의 개념에 대해서 헤겔의 반성 개념이 가장 뚜렷한 차별성은 반성을 인식 주관으로서의 자아가 담고 있는 하나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자기 운동적 구조로 객관화한 데 있다.
존재의 세계란 직접적인 대상의 영역이다. 이 직접적인 대상의 영역은 존재 자체가 품고 있는 본질을 가시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지를 못한다. 칸트가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칸트의 철학에서는 반성이 자기 확신을 목적으로 되돌아오는 주체가 이미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아는 자아로서 전제되어 한다는 난관에 부딪힌다.
자기 의식이 갖는 이러한 순환의 문제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던 칸트는 이 자기의식에 대해서 ‘나’란 하나의 개념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고, 도리어 모든 개념에 수반되는 다만 ‘의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오직 술어인 생각을 통해서만 인식되는 것이며, 그리고 따로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하등의 개념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리려면 언제든지 ‘나’라는 표상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중심으로 하고 원환을 그리면서 맴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하나의 귀찮은 일이지만, 그것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은 칸트가 ‘하나의 귀찮은 일’로서 간주한 이 자기의식의 순환성을 순환 그 자체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본질의 과정적인 운동성 속으로 지양하고자 하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헤겔의 반성 개념은 전통적인 반성 철학의 순환 이론을 해소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즉 전통적인 반성 이론이 하나의 결함이자 난제라고 표명한 사유의 순환성은 헤겔에서 있어서 결함으로 수용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의 본질 자체에 혹은 자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헤겔은 전통적 반성 이론이 갖는 오류를, 주체를 전체의 운동성 속에 통합시키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보고 있다.
자기 의식이란 순환하는 자기의 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구성해나가야 하는 것으로서 이해되며. 이러한 순환적 자기 운동의 구성 운동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기는 자기로서의 내용을 확보하게 되고, 인식 가능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은 반성을 그 반성에 토대로 놓여 있는 ‘객체로부터 분리된 주체’로부터 떼어 내어 사유가 자기 자신을 부단하게 구성해가는 객관적인 운동 형식으로 파악하며, 이러한 운동의 형식 속에서 주체는 구성의 조건으로 고정되는 대신에 구성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반성 개념을 그는 ‘절대적 반성’이라고 부르고, 이 반성의 운동을 무한한 자기 운동이지, ‘무로부터 무로 가는 운동이며, 그를 통하여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운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존재에서 본질로 이행해 오는 영역이다. 존재로부터 본질로 이행해 온다는 것은 존재 세계가 갖는 직접성을 지양하고 존재 자체의 내면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존재 세계와 단절된 주관적인 의식으로 침잠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 자체의 객관적인 규정들을 자체 내에 지양하여 품고 있는 본질의 세계로 귀환한다는 것을 뜻한다.
절대적 부정성으로서의 본질이 자기를 부정하고 직접성을 산출하며, 이것을 다시 자기에게로 환수하는 무한한 운동으로 이해된 반성이란 자기 자신을 객관적인 규정으로 드러내고 이 객관적 규정으로부터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와 자신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스스로를 구성해가는 본질 자체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 사유 자체의 운동인 것이다.
이 객관적으로 존재해 있는 자기 운동하는 본질이 자기를 구성해 가는 운동의 구조를 표현하는 개념이자, 동시에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구성해주는 원리이며. 이러한 점에서 헤겔의 반성 개념은 반(反)- 주관적, 반(反) -심리적인 특징을 갖는다.
헤겔의 반성 개념은 대상을 대상으로서 구성하고, 그 대상을 통해서 자기를 전개하는 객관과 합일되어 있는 사유 자체의 운동을 의미하는 바,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헤겔에서의 반성이란 대상의 객관적 규정들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기능을 갖는다.
그 절대적 부정성의 전개 논리는 가상과 본질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두 가지 과정을 갖게 된다. 하나는 절대적 부정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직접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서, 이것은 본질로부터 가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하며, 다른 한 번은 가상으로부터 본질로 되돌아가는 과정으로서, 이것은 직접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부정적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부적으로 더 들어가면 이 과정은 다음 두 가지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정립작용으로서, 절대적 부정성이 자신의 타자로서의 직접성을 경유하여 이로부터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복귀를 통해서 부정성이 직접성, 즉 자기 동일성을 확립했다는 것은 다시금 부정성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운동을 행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직접성이 부정 운동의 전제가 되기에 이러한 점에서 헤겔은 복귀를 통해서 확립된 직접성을 ‘전제작용’이라고 부른다.
이 논리 구조는 ‘동등성’과 ‘부등성’이라는 개념에 의해서도 표현될 수 있다. 자기 관계적 부정성으로서의 부정성이 자기 자신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곧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 동등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혹은 부정성의 자기 관계라는 점에서 부정성이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이며, 이것은 부정성이 자기 자신과 이루고 있는 부등한 관계, 곧 부등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절대적 부정성은 부정성 자신과 직접성의 통일이기도 하지만, 동등성과 부등성의 통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들 두 개의 개념은 각기 분리되어 그 자체로 고찰되거나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부정성의 논리적 구조 내에서 서로 동시적으로 공존해 있다. 헤겔은 이것을 ‘하나의 통일’이라는 표현으로 제시한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술어를 동일한 주어에 귀속시킬 수 없다는 일반적인 이해방식과는 달리, 절대적 부정성은 부정성 자신과 부정성 자신의 타자로서 간주되는 직접성을 자체 내에 동시적으로 귀속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직접성을 필연적인 존립 방식으로 확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헤겔은 직접성을 일상적인 이해방식에서처럼, 혹은 ‘존재 논리학’에서처럼 부정에 대립되어 그 자체에 순수한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이해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이상에서 제시된 반성의 운동을 달리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자기 관계적 부정성으로서의 반성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의 타자를 산출한다. 이 타자는 곧 직접성이며, 직접성이란 반성 운동, 혹은 부정성의 자기관계를 매개로 하여 산출된 타자라는 점에서 매개된, 반성된 직접성이다. 그러나 직접성의 이러한 모순적 구조 때문에 직접성은 자기 자신을 지양한다. 그러나 직접성의 자기 지양이란 다시금 부정성 자체를 의미하며, 이러한 점에서 자기 관계적은 부정성으로서의 반성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자기에게로 귀환하는 원환적 운동 구조를 갖는다.
여기 반성 운동에서 등장하는 타자란 하나의 가상적인 타자에 불과하다. 반성이란 오직 복귀하는 운동일 뿐이며 부정하는 운동, 즉 과정성일 뿐이다. 반성에 의해서 산출된 타자는 곧 반성 자신과 동일하며, 그래서 복귀된 부정자, 반성의 자기 복귀란 ‘자신의 부정자’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에게로 복귀한다는 것은 곧 자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과 동일하게 간주될 수 있다고 헤겔은 말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반발하고 곧 자기 자신에게로 도달하는 것, 이것이 본질의 자기 정립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립적 과정은 가상에서만 머물 수 밖에 없는 특수를 양산하기에 이 특수는 곧장 무력하게 보편 안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존재들의 구체적 자기 동일성이 확보될 수 없다. 그래서 헤겔은 정립적 반성을 외적 반성의 단계로 밀고 나간다. 이는 곧 자기 안에 차이를 차이로서 보존하고, 이 차이에서 곧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논리적 전략인 것이다.
헤겔의 외적 반성이란 칸트가 말한, 판단력을 의미하는데, 칸트는 오성과 이성과 판단력을 따로따로 구분 지었다. 칸트는 보편(규칙)을 인식하는 능력은 오성이며, 보편 아래 특수를 포섭하는 능력은 판단력, 특수를 보편에 의해서 규정하는 능력, 다시 말해서 특수를 원리로부터 도출하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했다.
보편이 주어져 있지 않는 상황, 즉 특수만이 주어져 있는 상황으로부터 보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경우, 여기에 요구되는 판단력을 칸트는 규정적 판단력과 구별하여 반성적 판단력으로 부르고, 특수로부터 반성적으로 보편을 산출해 냄으로써 자연과 자유 사이의 심연을 극복하고 매개시킬 임무를 바로 이 반성적 판단력에 귀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헤겔은 이 반성적 판단력에 절대적 반성 개념이 놓여 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 헤겔은 반성이 직접적인 것에서 추구하는 보편자, 원리, 법칙이 곧 직접적인 것 자체, 특수자 자체의 본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칸트는 직접적인 것에 이미 보편으로서의 법칙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를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말해서 자연 자체에 이미 목적으로서의 보편이 내재되어 있다는 인식에 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상과 물자체, 자연과 자유,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대립 구도에 얽매여서 이 원리를 다시금 반성적 사유 주체에 귀속시키고 말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 것으로 헤겔은 보았다.
그 때문에 칸트는 자연의 영역에 오성을, 자유의 영역에 이성을, 그리고 이 양자 간의 심연을 메우기 위해서 양자를 매개하는 능력으로서의 판단력을 설정한 칸트에게 있어서 두 영역의 매개는 항상 불충분한 것으로 남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 격률로 전학한 사례라고 헤겔은 간주했다.
헤겔에 의해 설정된 외적 반성의 논리적 의미는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이 갖는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이 한계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데 놓여 있으며, 그 한계의 극복은 외적 반성, 혹은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의 본성이 오히려 직접적인 것을 그 본성에 따라서 정립한다는 데 있는 것이며, 이렇게 정립된 직접적인 것이 곧 반성 자신과 동일한 것임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성취된다.
2.. 하이데거의 사상
하이데거는 ‘존재의 소리’를 촉구한다. 존재의 소리라고 말할 때, 그는 존재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소리를 낸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소리는 현존재를 일정한 근본 기분 안에 사로잡히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전해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이로움’이다.
현대는 이 경이로움을 잊었다는 것이다. 즉 존재가 존재에게서 떠나버린 시대로 그는 보고 있다. 현대인들의 사유방식이란 항상 존재자에 대한 은폐된 조작적 해석의 결과일 뿐이다. 즉 ‘나는 내가 사유한 것을 사유된 것으로 사유한다.는 식이다.
존재의 진리는 존재자로부터 분리되어서 현성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존재자가 되고 말 것이다. 존재의 진리는 존재자 안에 감싸 간직되는 방식으로 현성한다. 이렇게 존재의 진리가 존재자 안에 감싸 간직될 때 형이상학의 역사 안에서 존재를 상실했던 존재자는 다시 존재를 회복하게 되며 존재자는 다시 존재의 진리 안에서 현성하게 된다. 인간의 언어가 근원적으로 ‘침묵’ 안에 감싸 간직되는 원리와 같다.
존재 생기의 사건으로서의 발현은 존재의 ‘말 걸음’과 인간 현존재의 ‘응답’ 사이의 상호공속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언어는 인간의 상호 주관적인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주체적 능력으로 이해되어 있다. 이는 이성이 인간의 주관적 능력으로 이해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도구적 언어관은 언어를 존재자들을 지배할 수 있는 정보로 보는 과학기술시대에 극단에 이르게 된다. 이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세계와 사물을 불러내는 환기력을 갖는 언어인 예술의 언어 특히 시의 언어야말로 인간의 본래적인 언어라 생각한다. 시인은 언어에 대한 변화된 관계를 위하여 기존의 언어와의 관계를 포기하게 된다.
언어와의 다른 관계에로 ‘소환되어져 있음’ 안에서 시인은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의 소명을 경험한다. 말을 존재-부여하는 것으로서 관리하고 보존하도록 시인은 소환되어진다. 시인은 이제부터 그에게 시적인 말이 그의 존재를 부여하는 본질에 있어서 그의 시에 부여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언어로 고찰함으로써 그는 존재를 실체나 객체처럼 인간과 분리된 존재자처럼 사유하는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게 된다. 존재는 인간에게 항상 이미 말을 건네면서 인간의 눈을 열어젖혀 존재자 전체를 새롭게 드러내게 함으로써 인간과 모든 존재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본질에로 진입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언어의 본질은 ‘정적의 울림’으로서 나타난다. 밝히는 개현 안에서 언어의 본질로서 말함은 인간과 신, 하늘과 대지라는 세계방위들을 모은다. 이처럼 밝히는 모음과 모으는 밝힘 안에서 세계권역의 각각은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면서 다른 것과 가까이 있다. 마치 4 방위(동서남북)처럼 말이다.
하이데거는 세계권역의 서로 부르는 모음으로서의 활기참을 ‘울림’이라고 부른다. 명명하는 말의 본질유래로서 세계의 출현됨 안에 존속하는 이 말, 즉 ‘울림’은 하이데거가 의하여 한편으로는 ‘세계권역이 부르는 모음이라는 고유한 활기참의 관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의 울림’의 관점에서 선택된 것이다. ‘소리 나는 것은 울리는 것으로부터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세계권역의 부르는 모음은 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울리지 않는 것으로서 그것은 고유한 활기가 없지 않다.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자를 명명하여 개방되게 함으로서 울리는 말의 기원이 된다.
여기서 존재를 명명하여 개방함과 울림, 즉 세계권역의 부르는 모음과의 기원관계를 하이데거는 사물들 안에서 드러낸다. 세계를 밝히면서-은닉하는 트임과 영역. 세계권역의 부르면서 모르는 것- 세계 발힘의 이러한 생기는 본질적으로 사물들로서 존재자와의 관계 안에서 유지된다.
사물들은 세계 내재적인 사물로서 세계를 모으는 사물들이다. 사물들의 세계내재성은 사물들이 그들의 개방성 안에서 세계를 모으는 방식이다. 따라서 사물들이 그때그때 어떤 내용으로, 어떤 방식으로 있는가 하는 것은 사물들이 밝혀지는 세계권역들의 의미관계를 모으는 방식부터 규정된다.
사물들이 모으는 가운데서 사물들은 세계의 밝힘을 간직한다. 즉 사물들이 세계를 간직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밝히면서-은닉하는 세계의 개현사건이다. 세계의 밝힘은 밝혀지는 세계가 근원적으로 존재자와 존재자의 개방성 안에서 간직되는 곳에서만 근원적으로 생기한다.
기분에 젖어 있음‘은 단순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가 현존재에 대하여 정황성의 방식으로 개시되어 있기 때문에 기분들은 세계성격을 갖고 그리고 현존재의 정황성도 세계성격을 갖는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존재의 발현 사유를 통해서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로 간주하면 신과 동물 사이의 중간적인 존재로 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인간관을 극복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신을 모든 존재자들의 궁극적인 존재원인으로 보는 전통적인 신관도 극복하려고 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그 앞에서 부끄러워 무릎을 꿇을 수도, 노래하고 춤을 출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신을 넘어서 우리는 성스러운 것의 본질로부터 신성의 본질을 새롭게 사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Ⅲ 결 론
헤겔은, 절대적 부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철학적 풀이를 내놓았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자기 세계로 진입시키기 위해 자기 부정성을 듬뿍 담은 성육신 사건으로 사람들 앞에 등장하셨다는 것이다. 그 절대적 부정성이 반복되는 코스를 거쳐 인간 세계는 비로소 신의 진정한 세계 내 활약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내린 본질상, 늘 반성하면서 자기 부정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인간은 실상으로 정립시키는 가상적인 생활을 지속하게 되고 그 가상은 반성 능력을 부여하는 신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부여받는 결과이다. 이로서 인간은 신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
하이데거에 있어 하나님은 은닉된 존재의 모습으로 하나님은 계시면서 지금도 여전히 모든 존재자와 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은총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이다. 즉 교회 제도나 조직으로서 신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직접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존재함에서 오는 감동과 경이로움 가운데서 존재를 만나게 되는 도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주장들이 평소에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자기 존재에 대한 이유 없는 긍정이다. 이 무조건적인 긍정심에서 비롯된 모든 인간의 기본 심성 구조를 두 철학자가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소위 신학을 전공하고 성경 해석을 전공하는 자들에게 있어 아무리 빈틈없는 논리를 전개한다 할지라도 현대 신학자들 그 어느 누구도 이 두 철학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하지만 죄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신학이 되었든, 목회가 되었든, 철학이 되었든, 과 되었든 상관없이 십자가의 원수로 활용되는 사상들이다. 과연 인간이 신을 거론할 입장에 놓여 있는가?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저주받고 또한 결국 지옥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수긍하면서 성경을 대하는가?
참으로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났다면, 성경 구절 하나하나가 그 거룩한 피에서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경 구절을 하나 따로 건져낼 때마다 그 구절에는 십자가 피가 흥건히 젖어있다. 하나님은 성도를 십자가 피 안에서 만나신다. 그 외의 만남의 영역은 없다. 성도가 성경 말씀을 입에서 토할 때는, 십자가 피를 토해야 한다. 그 분의 공로다. 그 분의 희생 능력뿐이다. 그 분만이 참된 사랑을 말 할 수 있는 분임을 언급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성도만이 자신이 죄인으로서 십자가 용서 안에 놓여져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드높이기 위하여 창세 전부터 어느 시점에 어느 지역에 태어나기에 작정된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