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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8대구강의02-현대신학의단초2(헤겔)자유게시판잠언

08대구강의02-현대신학의단초2(헤겔)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8 대구강의 2 - 헤겔과 하이데거 2

08,02,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헤겔이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끄집어낸 이유는?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헤겔(1770-1831)과 하이데거(1889-1976) 중에서 두 번째로 헤겔을 하겠는데, 먼저 교재 2페이지를 보자.

** 헤겔은 칸트, 야코비, 피히테 등으로 대변되는 당대의 철학을 '반성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이 철학들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이성의 오성화'에 있다고 단정한다.

◈ 칸트의 '반성철학'에 대해서

그러니 우리가 헤겔을 알려고 한다면, 칸트, 야코비, 피히테, 그리고 셰링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주장한 이 '반성철학'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헤겔의 나름대로의 자기 철학을 끄집어낸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만약에 기존의 선배 철학자들이 말한 것이 옳다면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그런데 뭔가 이야기하겠다는 것은, 그 선배들의 주장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면 그들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좀더 깊고 좀더 넓게 나아가야 하는데, 그래서 헤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후대에 나오는 철학자가 앞에 있는 선배 철학자를 공격 아닌 공격하고 비판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헤겔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는고 하니, "칸트, 야코비, 피히테, 셰링 등을 보아라. 완전하지는 않잖아"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헤겔을 알려고 하면 칸트, 야코비, 피히테, 셰링 등을 또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사기를 보려면 앞의 출애굽기나 레위기, 민수기 등을 보아야 하듯이 말이다.

◈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 등을 배경으로 !!

어떻게 보면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해서 일을 하시더니만, 그런데 왜 사사기에서는 사사들을 앞장세워서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이 종좀 던지는 질문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지 말고 바로 사사를 불러서 일을 하시면 되는데, 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 등을 깔고 나서 사사로 넘어옵니까?"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을 직접 대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성경에 들어와서 직접 관통하는 식으로 보아야 하느냐는 것인데, 소위 이것이 '구속사' 라는 것인데, 즉 "왜 성경을 관통해서 보아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어서, 우리 인간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헤겔이 말하는 정신 !!

이것이 오늘 공부하려는 헤겔사상에서 제일 난해한 점인데, 즉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헤겔은 이것을 '정신' 이라고 하는데, 정신 앞에 이성, 이 이성 앞에 의식이고, 그리고 의식 앞에는 죽음이고 말이다. 즉 "죽음→의식→이성→정신→절대이성"으로, 그렇게 자기 논리를 전개시키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잠시 접어두고서 성경으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이렇게 인간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은 저기에 계시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소나기를 퍼붓듯이 자기 일을 하시면, 우리가 알아서 받아 챙기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비켜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관통하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 구약과 신약의 전체적인 차이를 몰라요?

그렇게 인간에게 찾아와서 인간을 관통해버리면, 우리 인간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죄'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육' 이라는 용어로 바뀌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더욱 험악해져서 악마로 되고 말이다. 그런 거 몰라요? 구약과 신약의 전체적인 차이를 몰라요?

구약성경의 모세오경이나 선지서 중 아무데나 살펴보아도, 거기에 보면 죄나 육이나 악마라는 용어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냐 하면, "이 명령대로 순종하라" 라고 되는데, "내가 지시할 테니, 그대로 따라라" 라고 말이다. 잠언서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을 때만 죄이고, 순종했다면 의롭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확정적으로 죄라고 하지 않고,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하면 의가 되는, 즉 죄와 의가 항상 잠정적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구약성경은 단정적으로 "너는 무엇을 해도 죄야" 라고,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처럼 말이다.

쉽게 말해, 구약성경은 사람내부를 관통을 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깊이 들어오지는 않고, 뭔가 자꾸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빨리 지켜라. 지키면 복을 줄게. 아브라함을 봐라. 순종해서 복을 받았잖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 구약은 인간내부 깊이 침투하지 않은 반면에 신약은?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아직까지 인간내부에 그렇게 들어오지를 않는데, "왜 시키는 데로 하지 않아? 그래서 너를 이방민족처럼 벌을 하리라. 그러니까 정신차려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어떠한가? 로마서 3장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완전히 인간내부에 깊숙이 들어와 버리는데 말이다.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렇게 되면 죄를 짓고 짓지 않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육으로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서, 구약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도 있다" 라고 하는데 반해서, 그런데 신약에서는 "육에서는 반드시 죄만 나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말한 노예의지(?)와 너무나도 유사한데 말이다.

만약 기독교 신자와 신자가 아닌 불신자가 같이 헤겔을 공부해보면, 물론 기독교 교인이 아닌 성도가 헤겔을 공부한 경우는 거의 없고, 성도가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서 공부한 사람은 제법 되는데, 그래도 불신자 쪽에서 헤겔을 연구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 누가 헤겔을 연구하는가?

성도가 연구한 경우는 거의 없기에 제외하고, 교인으로서 헤겔을 공부한 사람들은, 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감출 수가 없는데, 물론 이것을 논문에다 다 쓸 수는 없지만, 심사교수들이 불신자들이라서 기분 나빠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논문심사를 하면서 "이러한 부분을 좀 빼야지. 이것이 종교신학은 아니잖아" 라고 하는데, 물론 대부분 자기들이 다 알아서 미리 빼지만 말이다. 그래도 교인들은 헤겔철학의 근본이 기독교에서 나왔음을 약간은 가미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헤겔에 있어서, 신이라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대상을 관계할 때, 칸트의 경우에는 이런 대상을 생각하지 않는데, 특히 피히테 같은 경우에는, '절대자아'로서 전혀 대상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주체가 어떻게 자기 주체로서 동일성을 갖추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렇게 '주체'가 등장하고 '동일성'이 나오는데, 이렇게 동일성을 갖출 때 '실체'가 된다는 것이다. 즉 주체가 동일성이란 본질을 갖추게 되면 실체가 된다는 말인데, 그렇게 하면 주체가 실체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주체, 실체, 동일성, 본질 등, 머리 땡기는 용어들이 마구 나오고 말이다.

◈ 칸트가 말하는 '반성'이란?

지금 제가 쉽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칸트에 있어서는 이성적으로 따져보니 자기 생각대로 이 세상이 돌아가지 않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 난로를 작년에 구입했는데 올해는 그 성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이 유아실에 있는 난로가 그 정도란 것은 우리가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들뢰즈의 경우에는 '기억' 이란 용어도 나오고 하겠지만, 지금은 칸트의 시대에 맞추어서 이야기하는데, 아무튼 이 난로의 경우에 성능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치든지, 바꾸든지, 아니면 돈이 없으니 올 겨울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반성'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반성' 말이다.

◈ 하지만 반성할 필요가 없는 분이 !!

그렇다면 이렇게 반성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빛이 있어라" 라고 해서 빛이 있으면 반성이 있겠는가? 없다는 것이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했을 때, 즉 그렇게 나사로를 보고 나오라고 외치는 주체자가 무슨 반성이 필요한가?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명령했을 때 나사로가 나오는데 말이다.

이렇게 자기가 그렇게 말한 대로 다 되는데, 그렇게 다 되면 자기를 되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하는 이성적인 생각과 현실이 일치되니, 그렇게 되니 무엇이 유지되는고 하니, '동일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 데카르트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무슨 말인고 하니, 주체 안에는 사유가 있는데, 즉 생각이 말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생각=존재" 라고 되어야 하는데, 그러니 분열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간격이 벌어지면 말이다. "니는 누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이, 그대로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저는 이러 이러한 사람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잘 참습니다" 라고 해놓고는 누군가가 자기 자동차를 박아도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한 이성조차도, 즉 외부세계의 현실이 자기 이성과 간격이 벌어지느냐는 것이다. 자기는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간격이 벌어지니 칸트가 하는 말이, "아하, 그건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벌어진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은 무한에 관한 것이고, 인간은 유한하니, 그러니 유한이 어떻게 무한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알 수 없으니, 인간은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여기에서 경이로움의 미학이 나오는데,

◈ 인간은 물(物) 그 자체 ??

다시 말해서, "야, 이 거대한 폭포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미약하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미약하니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 보잘것없다고 겸손할 때, 그것을 두고 '물(物)자체' 라고 하는데, 물론 이게 흐르는 물은 아닌데, 그러니 용어들이 다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자연 그 자체는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알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칸트의 주장인데, 칸트는 또 말하기를, 저쪽 참된 현실과 우리 인간의 유한성은 완전히 분리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무한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체가 인간 이성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장점인고 하니까, 잘난척하지 않고, 까불지 않고, 날마다 스스로 겸손하게 반성을 한다는 말이다.

◈ 칸트 - 반성하면서 신을 닮아가자 !!

이렇게 반성하게 되면, 결국 자아는 반성하는 이성, 즉 자기의 잘못과 부족함을 깨달으면서도 전체의 것을 더 알아가고, 그렇게 알아가면서 또 반성하고 말이다. 그러한 것 자체로 인해서 주체는 누구를 닮는고 하니, 신과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칸트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주체'에 있는데, 즉 '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성화론' 이란 말이다. 그래서 성화론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칸트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아무튼 "우리는 부족한데, 신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신의 형상을 닮아가자" 라는 것인데, 어떻게 닮는고 하니, "날마다 반성을 하면 닮아가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관심사가 '나'에게 있는데, 그러니 '나' 라는 자체가 그 얼마나 겸손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으려고 하고, 그 얼마나 충실한지, 그러한 모든 것이 다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와 도덕에 관해서는 칸트보다 더 뛰어난 철학자는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마도 "목사님, 목사님의 칸트 이야기를 들어보니, 물론 아직 헤겔의 주장을 듣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들어보나마나 칸트가 맞네요" 라고 말이다. 믿음적이고, 신앙적이고, 기독교적이고 말이다. 그런데 무슨 시비를 걸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이 시비를 걸었다는 말이다.

◈ 그러나 반성하는 인간이란 종(種)의 일부에 불과 !!

이러한 반성철학에 있어서, 물론 피히테나 셰링에 오면 약간 벗어나기는 하지만, 이 반성철학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만 챙기는 것이 어떻게 이 세상에 있어서 참된 삶이 되느냐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날마다 반성하면서 사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의 일부이지, 어떻게 이 세상 전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전체를 규명해야지 어떻게 자기 하나만 반듯하면 그만이냐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만 반듯하게 산다고 하는 소리가 얼마나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그런 것을 한번 알아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반성한다' 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최선을 다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최선을 다하면 죄가 면책되는가? 누가 한번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내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했다" 라고 하면, 그렇게 완전하지 않아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넘어가도 괜찮다는 말인가?

◈ 헤겔 - 신에 대해서 알려면 똑바로 알아라 !!

그러므로 헤겔은 말하기를, "신에 대해서 알려면 똑바로 알아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 하나님이 누구를 위한 하나님인고 하니, 반듯한 자기를 위한 하나님인데, 그러니 오늘날의 개혁주의 성화론과 너무나도 같지 아니한가? 반듯한 자기, 즉 "신과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신을 닮아서 반듯하게 살면, 그렇게 신을 본받아 가는데, 내가 나에게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칸트의 주장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좋고 훌륭해 보이지만, 그러나 세상전체를 다 알아야 한다는 헤겔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이 칸트는 자아 속에 갇혀있는, 즉 여전히 주체 속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 칸트 - 주체 속에 갇혀있으면 실체가 되지 못해 !!

그런데 그렇게 주체 속에 갇혀있으면 무엇을 잃어버리는고 하니, 이것이 칸트의 중요한 첫 번째 핵심인데, 주체 속에 갇혀있으면 실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변화하는 주체인데, 실체라고 하는 것은 완료된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미흡한고 하니까, 본질이 있어야 실체가 되는데, 이 주체는 찾아가는 본질, 만들어 가는 본질, 형성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그런 본질을 닮으려고 애쓰고 최선을 다하는 주체이지, 그것이 본질에 감추어진 바로 그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 헤겔이 칸트에게 시비를 거는 이유는?

그렇다면 "나만 반듯하게 살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신이 내려주신 '본질'을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신이 허락하신 본질을 말이다. 그러니 칸트는 이 본질을 자기만 훌륭하면 된다고 하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주체의 본질로 그만 변질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칸트에게 시비를 거는 이유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칸트가 뭐라고 반박하는고 하니, 보통 철학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그래서 아무리 헤겔의 책을 봐도 기독교적 냄새는 모두 다 제거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 본질을 도대체 어디서 찾느냐는 것이다.

◈ 그러면 본질은 어디서 찾는가?

그러면 칸트가 말하기를, "헤겔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온전한 본질을 모르면서, 자기 하나만 최선을 다하고, 반성하고, '부족합니다' 라고 하고, 그렇게 해서 절대정신에 이르지 못했는데, '인간이라서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좀 봐주소. 하지만 저는 찾아가는 중에 있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 완료된 본질이 아니고, '애씀'이나 '노력'에 불과한 것인데, 그러니까 진짜 본질을 모르고 있고, 차라리 아예 모른다고 하자" 라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신의 본질을 안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헤겔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 이기적이고 '절대자아' 밖에 모르는, 그래서 궁극적인 자아로밖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피히테의 주장이고 말이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나 피히테의 절대자아에 반대해서 반성하면서, 그렇게 반성하는 가운데 현실과 이상에 맞지 않는데, 그것은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맞지 않는데, 그렇게 자꾸만 반성만 하고 일치되지 않고 동질성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해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헬들링(?) 같은 경우에는 '문학' 이라는 것이다. 괴테의 문학도 그렇고 말이다. 예술이고 말이다.

◈ 칸트 이후에 너무 개인주의적으로 !!

그래서 칸트 이후의 시대를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칸트가 반성하면 된다고 하니, 사람들이 전부가 개인적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저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에이 씨(?)" 라고 말이다. 그러니 전부가 그 관심사가 자기는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 박사님은 박사님 수준에 맞게 하고, 저는 제 수준에 맞도록 하면 되지 않습니까? 박사님의 수준을 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라고 말이다.

◈ 집사님, 에베소서를 좀 읽으세요 !!

그래도 목사라고 소위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소리를 교인들로부터 엄청 듣는데, 에베소서를 좀 읽어보라고 하면, "아니, 이렇게 바쁜데 에베소서를 읽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즉 "신이시여, 너무 바빠서 에베소서를 읽지 못하니, 그 말씀에 제가 좀 맞지 않는 것이 있어도, 그만 좀 봐주소"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제 수준은 바쁘다보니 에베소서이고 뭐고 일년에 성경을 한번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수준인데, 그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할 테니, 에베소서를 읽으라고 하던지, 뭐 그런 소리는 좀 하지마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칸트 이후에 그렇게 개인적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론은 없다(?)" 라고 하는데, 즉 "내 수준은 이 정도 밖에 안 되니, 그래서 나는 내 수준에 맞도록 최선을 다하는데, 그러니 수준이 높은 당신들이 당신들의 수준에서 말하면 안 되지 않는가? 그런데 수준 높은 당신들이 수준 낮은 나를 왜 질타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창호 9단의 훈수조차도 !!

하지만 이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말이 안 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5급들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그런데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이 그들 옆에서 훈수를 둔다는 것이다.

* A : 아하, 재미있다.
* B : 저, 그런데 돌을 거기에 놓으면 안 되고 여기에 놓아야 살아요.
* A : 그냥 놔둬요. 우리는 5급 수준이니.
* B : 그래도 이렇게 해야.
* A : 당신들은 9단들끼리 그렇게 바둑을 두고, 우리는 5급끼리 둔다니까 그러네.
* B : 그게 아니고 바둑이 좀 발전하라고 하는 소리인데.
* A : 아니, 자꾸 힘들게 하지 말라니깐. 노력한 것이 이 정도 5급이니 말이야.
* B : 그래도...

그러니 9단이 5급에게 훈수를 해도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바둑의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수가 약간 높으면 더 행복합니다" 라고 조언하면서 사람조차도 그 사람의 좀더 나은 행복을 목표로 삼고 훈수한다는 것이다.

◈ 돈이 인간의 관심사조차도 !!

제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지금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니, 왜 헤겔이 화를 내는고 하니까,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18,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경제가 발전했는데, 그렇게 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했는고 하니, "야, 이제 돈을 벌어야 대우를 받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 이전에는 돈이 없어도 신분자체가 돈을 포함했는데 말이다.

공작님, 후작님, 백작님 이라는 신분자체가 재벌이고, 그 밑에 있는 사람은 종으로서 스스로 여겼다는 것이다. 한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으로 말이다. 그렇게 영원한 신분제로 분류되던 시대에서,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돈을 버는 상공인들이 대우받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중국을 보면 바로 그러한데, "나는 원래 농사꾼인데, 나는 원래 군인인데" 라고 하는 것이 없이, 주식에 투자해서 대박이 나면 그 사람은 인간대접을 받고, 즉 상하이의 최고급 아파트에 살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올림픽이 열릴 때 청소나 하던지 말이다.

◈ 새로운 철학의 등장 !!

그러니 경제에 따라서 철학이 바뀌는데, 그렇게 사람의 사고방식이 바뀌면, 철학자들은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경제에 마구 휘둘리는 것을 극구 반대해보려고 하는데, 그래서 제동을 걸기 위해서 온갖 논리라는 논리는 다 동원을 하는데, 즉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이 아니고, 인간은 바르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돈 많은 사람이 뭐라고 하겠는가?

* A : 인간은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 B : 그러면 철학자 양반, 바르게 사는 것이 뭔데요?
* A : 예, 바르게 사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 B : 그러면 칸트의 말이 맞네요.
* A : 하지만 칸트 정도로는 안 됩니다. 그는 이런 점이 잘못되었습니다.
* B : 그래요?

그렇게 해서 새로운 철학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윤리적 차원에서 보면 제 말이 맞지요? 윤리가 무엇인고 하니, 그 시대의 사고에 대해서 계속해서 보완해나가는 것인데, 그래서 그 시대에 맞는 윤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옛날 윤리 말고 말이다. 사람들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로 튀어서 타락한다는 것을 빨리 눈치를 채서 말이다.

◈ 윤리의 역할 - 인간이 인간답게 살도록 !!

그러니 옛날 것 말고 지금 완전히 그 인간성을 버려놓은 그 원인을 추적해서 다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윤리가 해야할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당연히 그 시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그 당시나 현재나 동일하고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아이쿠, 세상 참 더럽다. 돈만 알고 철학도 모르고 말이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칸트 이후에 철학자들이 하는 말이, "그래, 칸트도 문제가 있지. 사람들에게 자기가 노력만 해서 반듯하게 살면 된다" 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반듯하게만 살아서는 돈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철학자인데, "여러분, 돈을 버세요" 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무엇인고 하니, 참된 인간 속에는 자연을 닮아 가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셰링'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셀링과 헬들링(?) 같은 경우에는 문학이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준다고 했다는 말이다. 언어를 초월해서 말이다. 그러니 모든 갭을 문학이란 아름다움으로 극복하는데, 그 아름다움 앞에서는 돈도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예술을 하는 자들은 헬들링(?)을 엄청 존경한다는 말이다.

◈ 인간의 본질 -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

그렇다면 도대체 이 본질을 어디서 찾는가? 지금 이 교재에 나오는 것도, 헤겔이 신자가 아니니 계속해서 논리로 나오는데, 헤겔이 직접 말하는 그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지금부터 이야기하겠는데, 그것이 바로 '성부와 성자 사이'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혼자 있으면 완성이 되지 않는데, 물론 하나님은 그 자체가 완성이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됨의 본질을 다 보여줄 수는 없는데,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있는 그런 인간으로 왔을 때,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 여기 하나님의 본질이 있다. 건져가라" 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 속에 들어와서 그런 죄 속을 관통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에게 모독을 받고, 서러움을 당하고, 심지어 피 흘림을 당하고 말이다.

◈ 하나님의 아픔을 아는 것이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 !!

그래서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이 받지 않은 제사를 드린 가인이 제사를 드린 아벨을 쳐죽이는데, 그러니까 거기에 하나님이 한 몫을 하시는데, 즉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부러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쉴새없이 개입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픔과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설움을,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을 안다는 것이다.

헤겔이 이러한 관점에서 책들을 섰는데, 그런데 대부분의 불신자들이 이러한 헤겔의 책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그렇게 헤겔을 연구하면서 기독교를 언급하면서도, 그런데 십자가 사상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가 없다는 것이다. 이 헤겔의 사상을 이야기하면서도 말이다. 제가 보기에는 철학자들이 반칙을 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 헤겔 - 신이 신을 버렸다 !!

칸트는 무엇인고 하니, "열심히 해보자", "최선을 다하자" 라는 것인데, 그런데 헤겔은 무엇인고 하니, 본질적으로 봐서 인간 속에 있는 신의 본질은 무엇인고 하니, 칸트처럼 열심히 해서 신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니라, "신을 버렸다" 라는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신이 신을 부정한 것인데, 바로 여기서 그 유명한 변증법이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이 신을 버렸다는 것이다.

◈ 하나님 자기 자신을 부정으로 본질을 계시 !!

헤겔은 말하기를, 인간이 인간사를 그렇게 연구해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모르게 되면, 이 세상 전체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부정함으로서 하나님의 자기 본질을 비로소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기 자신을 부정함으로서 말이다.

◈ 하나님의 자기부정의 경로에 인간의 역사가 !!

하나님은 그냥 그대로 하나님의 계셔도 여전히 하나님임에 분명하지만, 자기 아들을 성육신이 되게 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즉 본질을 드러내고, 그렇게 해서 더 나아가서 그 아들을 자기 앞으로 회수하는데서 온전한 모든 신의 본질을 다 보여주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부정하고, 그렇게 해서 부정된 하나님을 회수하는 그 경로에, 즉 경로의 양탄자에 인간의 역사가 좍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역사 속에 인간의 개별자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쉬운 예를 들면, 오늘 날씨가 엄청나게 추운데, 오츠크해 기단에 밀리면 이렇게 추운데, 상공 100M에 올라가면 추운가? 역시 추운데, 그러면 50M에 올라가면? 역시 춥다는 것이다. 머리 위에도 역시 춥고 말이다. 밖으로 나가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묻는데, 그 추위가 우리 내면에 들어오면 어떠한가? 우리 내면도 역시 춥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의 영역이 역사와 민족과 사회의 영역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그렇게 생각했던, "자아가 무엇인가? 자아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왜 내 인생은 내 생각대로 되지를 않는가? 나의 삶은 어디서 끝이 나는가?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라고 말이다.

◈ 칸트는, 자기 자아를 통해서 자기를 바라보는데 !!

그러니 "내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그러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라고 하는, 그런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칸트의 경우에는, 자기 자아를 통해서 자아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나 헤겔의 경우에는 이러한 "나는 나다" 라고 하는 것을 '언어동의어반복(?)' 이라고 하는데, 즉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나는 나다" 라고 하면, 결국에는 '절대자아'로 끝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여기에 무엇이 와야 하는고 하니, "나는 나다" 라고 하는 것은 데카르트인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이다. 그 생각하는 '나'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반성해서 더욱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가는데 말이다.

◈ 헤겔은, 신의 본질이 덮쳐와야 비로소 !!

그런데 헤겔은 그것이 아니라, 거기에 신이 와야, 즉 신의 본질이 덮쳐와야 비로소 "나는 나다" 라고 하는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자기는 곧 신의 절대정신(절대이성)에 합류된, 그렇게 해서 거기에 포함이 되어서 한꺼번에 휩쓸려 가는 물방울과 같은 '나'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헤겔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헤겔의 이런 사상이 어디서 왔는지를 조사해보니, 그것이 바로 '스피노자' 라는 인물에게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스피노자는 자기 주장이 그만 두리뭉실하게 범신론이 되어서, 즉 신이 따로 없고 이 움직임 자체를 신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 실체는 하나님밖에 !!

어렵더라도 조금 참으시고, 그러니 스피노자에게서 실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동일성을, 즉 "나는 나다" 라고 하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말이다. 그러니 개인은 실체가 아니라, 그냥 개별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스피노자가 유대인이기에 구약성경 어디를 인용하는고 하니, 출애굽기 3장에 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라고 하는 부분인데, 그러니 이렇게 자기 스스로 있는, 즉 "나는 나다" 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신밖에 없지, 인간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신만이 이렇게 자기 동일성(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런데 헤겔의 입장에서는, 만약에 그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은 실체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실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봐서 말이 안 되는데, 예를 들어서, 두 사람이 잠을 잤는데, 그렇다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되는가?" 라는 것이다.

◈ 스피노자와 헤겔의 아이스크림 쟁탈전 !!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아이스크림 두 개를 날씨가 더운데 두면 실체성이 유지되는가? 분명히 처음에 둘 때는 아이스크림 'A' 와 아이스크림 'B' 라는 실체성이 유지되었는데, 그런데 그 두 개를 난로 근처에다 함께 두면 나중에 어느 것이 A인지 B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진득진득한 아이스크림의 속성만 남지 말이다.

그러니 이와 같이 그 어떤 것도 속성만 남는다고 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주장이고, 반면에 상식적으로 이 세상에서 인간을 볼 때, 아이스크림이 녹아 내려서 합쳐지는 이전의 그런 개체성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헤겔이라는 것이다.

◈ 스피노자 이후에 철학은 타락했다 !!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스피노자 이후에 헤겔 철학을 가지고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까, 들뢰즈 같은 경우에 그런 주장을 하는데, "스피노자 이후에 철학은 타락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스피노자가 바른 소리를 했는데, 스피노자를 비판한다는 그 인간이 오히려 스피노자보다도 더 못하다는 것이다. 베르그송 같은 현대철학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그런 그렇고, 헤겔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스피노자를 약간 인용하면서 칸트의 반성철학 자체가 너무나 경제주의적이고 이기적이고 돈밖에 모르는 그 시대상을 반성하고, 그 반성하는 자체를 반성하고 그것을 쳐야 할 때는, 뭔가 "인간은 이렇다" 라고 하는 그 실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어야 하는데, 그러니 인간이 그런 실체성을 가지려면 인간 앞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신이 있어서, 그 신이 온다는 것이다.

◈ 인간이 실체가 되려고 하면, 먼저 신이 실체가 되어야 !!

그러니 그렇게 인간이 실체가 되려고 하면 먼저 신이 실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과 인간의 관계가 뚜렷하게 성립이 되는데, 스피노자처럼 흐리멍텅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신은 뚜렷한 인격자가 되어야 하고, 인간이 이렇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본질을 모르는데, 그러니 잠정적인 실체가 되지 못하고 그냥 주체만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나, 여기 여기에 있다" 라고 해놓고는, 막상 "니가 뭔데?" 라고 하면, "몰라. 하지만 알려고 애쓴다" 라고 하는, 그것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즉 "나는 이러 이러하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일도, 모래도 이럴 걸" 라고 하지, "영원히 이렇다" 라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의 본질은 예수님의 '성육신'으로만 !!

그러니 이것을 내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인간에게서 찾지를 말고, 신께서 어떻게 자기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었는지를 살펴보면 되는데, 그것은 오직 성자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성육신'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 관심을 두면 되는고 하니, 인간에 대한 관심은 접어두고, 이제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살피면 되는데, 즉 어떻게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의 실체로서, 즉 인간으로서 뚜렷한 실체를 말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유대교 교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데, 하지만 헤겔은 무엇인고 하니, 그는 개신교 교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이고 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헤겔의 말이 맞지 않느냐는 말이다.

◈ 스피노자 - 어, 나는 그런 예수를 믿지 않는데 !!

만약 여기 스피노자가 앉아있다면, 헤겔이 말하기를, "스피노자, 당신은 인간은 실체가 없다고 했지만, 물론 당신은 믿지 않지만, 예수님은 신이고 인간인데, 즉 신이기에 실체가 있고, 그 자리에 인간 예수가 있으니, 그러니 인간이란 실체가 있을 수 있는 게 드러나는데, 그런데 왜 당신은 없다고 하는가?" 라는 것이다. 물론 스피노자의 경우에 "나는 그런 예수를 믿지 않는다" 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말이다.

◈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부정하는 식으로 본질을 드러내는데 !!

실체는 이미 그 자체에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실체가 어떻게 본질을 드러내느냐는 것인데, 즉 실체에서 그 본질을 드러낼 때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제가 이 교재를 쓸 때에 참고한 책(?)을 보면 그 이유를 묻지 말라고 하는데, 즉 이유를 묻지 말고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부정하는 식으로 본질을 끄집어내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사실 인간은 그렇게 물을 자격이 되지 않는데,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이 세상 자체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바라보지 않고 인간중심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어떤 인간도 이 칸트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다" 라고 하는데서 말이다.

◈ 피히테 - 남이 아닌 '내'가 그렇게 보아야 !!

피히테 같은 경우에도, 이 세상을 아무리 해도, 즉 꽃이 그렇게 많아도 "내가 꽃이 있다" 라고 해야 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서 나왔기에 어디로 가는고 하니, 결국 '내'가 꽃이 아니라고 하면 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가 자기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남이 아무리 주전자라고 해도, 자기가 주전자가 아니라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피히테의 경우에는 '절대자아' 인데, 즉 모든 것이 자아가 있어서 그래서 나타난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주장하기를, 그렇게 되면 인간은 너무나도 이기적인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나를 건드리지 마라" 라고 말이다. 이렇게 너무나 이기적으로 가면 안 되고, 그래서 지금 독일이 개신교 국가이니,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었는지, 그것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심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도 없다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해서, 그것이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데,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동등됨을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비워서, 즉 자기를 부정해서 종의 형태로서 자기 앞에다 세운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서,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본다고 해서 '즉자(卽自) 존재' 라고 하고, 또한 앞에 있는 것을 '대자(對自) 존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들을 세웠는가?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가 없는데, 즉 아버지는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가 될 수가 없고,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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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자 [卽自, an sich] - 사물의 직접태(直接態)로서 다른 것과의 연관에 의해서 규정되는 단계까지 도달하지 않은 미발전(未發展)의 상(相). 독일의 철학자 G.W.F.헤겔이 사용한 철학용어이다. 따라서 인식하는 주관에 대해서 아직 발현(發現)되지 않는 ‘잠세태(潛勢態)’, 또한 자기 자신에의 반성적 관계가 결여되었다는 뜻에서 ‘무자각태(無自覺態)’의 뜻도 된다. 즉자는 다른 것과 교섭하여 자기의 자립성을 잃게 되는 ‘대타(對他)’로 발전하고, 다시 여기서 자기 자신과 관계함으로써 자기를 회복하는 단계인 ‘대자(對自)’로 발전한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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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로 인하여 내가 된다 !!

이렇게 자기 스스로가 "나는 나다" 라고 하는 것은 칸트나 피히테처럼 즉자존재, 즉 자기가 누구인지 스스로 자기를 동일시하고 애를 쓰면 '즉자존재'로서 머무르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반성 속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까, 즉 "글쎄, 내가 나인데 내가 이럴 수도 있잖아" 라고 반성하는 가운데서 무엇이 생기는가?

그렇게 자기 스스로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라는 것인데, 그런 이성이 작업을 하는 가운데서, 반드시 자기를, 즉 '즉자존재'를 부정하는 본질을 드러내면서 이 이성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를 생각함으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나는 너로 인하여 내가 된다" 라는 것이다.

◈ 헤겔의 '노예와 주인관계'에 대해서 !!

이것을 좀더 쉽게 해보겠는데, 헤겔의 유명한 '노예와 주인관계' 라는 것이 있는데, 옛날에는 노동을 누가 했는가? 노예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은 그렇게 노예가 했지만, 그 노동한 그 행위는 누가 했는가? 주인이 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돌쇠야, 마당을 쓸어야지" 라고 하면, 그렇게 이야기한 그 주인의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 행위를 유발시키는 명령이 떨어지고 말이다.

그러면 돌쇠는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마당을 쓰는데, 마당을 쓰는 그 의사는 주인에게서 왔는데, 자기들은 노동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집에 손님이 와서 "어허, 이 집에 오니 마당이 훤하네" 라고 한다면, 주인이 하는 말이 "내가 좀 신경을 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자기는 전혀 마당을 쓸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번에 어이없게도 숭례문이 홀라당 불에 다 타버렸는데, 그것이 도대체 누구 탓인가? 웬 영감쟁이가 나라에 불만이 많아서 열을 받아서 불을 질렀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노무현 탓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노무현 정부가 왜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 노예에게 의존하고, 노예는 주인에게 의존 !!

아무튼 주인은 노예가 없이는 주인 값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주인은 명령만 할뿐이지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노예인데, 그런데 이 노예는 주인이 없이는 노예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노예는 자기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릴 입장이 되지 못하니 말이다. 자기는 노동만 있지 행위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주인은 누구에게 의존하는고 하니, 노예에게 의존하고, 노예는 주인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관계, 그것이 바로 '대자존재' 인데, 그런데 거기에 이성이 들어가면 '반성'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주장과 같은 것인데, 그렇게 되면 노예가 아무리 노동을 해도 기쁘지를 않는데, 모든 공로가 주인에게 다 돌아가니 말이다.

그래서 노예가 다음부터는 주인이 시켜서가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한다면 자기의 반성이 나오는데, "나는 주인이 명령이 없으면 안 해도 된다" 라는 것이 노예의 자아인데, 그런데 그렇게 노예의 자아를 부정해버리면, 그것은 "나의 나이기를 이탈한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나'이기를 이탈해서, 즉 그렇게 해서 기존의 자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벗어나게 되면, '시켜서 하는 나'에게서 '시키지 않아도 하는 나'로 바뀐다는 말이다.

◈ 행위는 주체만이 할 수 있는데 !!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주인이 "니가 이렇게 시키는 데로 열심히 일을 잘 했구나. 여기 맛있는 밥을 먹어라" 라고 하면, 노예는 "예, 감사합니다" 라고 되는데, 그런데 그 다음부터 주인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자기가 노동해서 생기는 그 기쁨이, 즉 주인에게 갔다오는 기쁨이 아니라, 노동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기쁨이 오게 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것이 곧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행위를 해버리면,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행위는 누구만 할 수 있는고 하니, '주체'만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주체만이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체가 되라면 자기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헤겔이 살았던 시대상황이 !!

헤겔이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바야흐로 그 시대가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형성되던 그러한 귀족시대가 끝이 나고, 이제는 누구든지 노동을 하는 자가 임금을 받아서 자기가 알아서 자수성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교재 1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이 헤겔이 언제 사람인고 하니,1770년에서 1831년에 살았던 인물인데, 이때는 유럽에서 국가간에 무역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누가 선진국이 더 빨리 되는지 말이다. 그래서 철강석을 비롯한 지하자원을 먼저 캐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그 에너지가 국가의 권력이 되니 말이다.

그것은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석유를 확보하는 것이 곧 국가의 권력이 되니까 말이다. 석유값이 올라가게 되면 모든 물가가 상승하고 권력에 누수가 생기니 말이다. 중국이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까지 가서 왜 축구장을 지어주겠는가? 돈이 남아돌아서 인가? 석유를 비롯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하자원이 탐이 나서 그렇다는 말이다.

◈ 근대의식 - 나도 주체가 될 수 있다 !!

아무튼 그때부터 유럽은 이제 노예시대는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다 행위자가 되어서 주체가 될 수 있고, 즉 주인이 될 수가 있는 그런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식' 이라는 것이다. '자아의식' 이라고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본질을 드러내는가? 스피노자 같으면, 하나님은 스스로 즐거워하면 그만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혼자 그렇게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렇게 해도 아무도 시비를 걸 수가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되심을 포기하고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 참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자기 부정을 통해서 !!

그것은 바로 기존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신은 참된 신이 아니고, 진짜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가 참된 하나님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기 부정을 앞장세워서, 그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낸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 우리 인간이라면, 그러한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도 자기를 부정해서 예수님을 앞장세우는, 그런 본질이 인간에게도 담겨있다는 것이다.

◈ 피조물에게는 반드시 창조자의 흔적이 !!

이것이 헤겔이 주장한 것인데, 물론 복음에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말이다. 헤겔이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한 부분이니까, 과거부터 전해오는 논리가 무엇인고 하니,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것은, 그 만든 것에는 만든 자가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든 것을 분석해보면, 만든 자가 거기에 비추어져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과는 맞지 않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헤겔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대해서 연구하려면 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반복하지는 않겠는데 말이다.

◈ 여기서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이 !!

헤겔은 주장하기를, 아무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바로 주장한 '정(正)'과 '반(反)'이 되고, 그렇게 해서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재림하심으로 해소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합(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반합의 변증법이, 사실 이 변증법은 논리의 일종으로서 그 특징이 정반합이라는 관계로서, 즉 서로 대립되는 부정의 관계로서 합에 이른다고 하는 논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변증법은 물론 헤겔이 처음이 아니라 과거부터 있었고 말이다.

헤겔이 이것을 끄집어내어서 전세계를 움직이는 동인(動因), 즉 하나의 원동력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이때부터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칼 마르크스에 의해서 꽃을 피우는데, 관념적 변증법에서 물질적 변증법, 즉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바뀌면서 말이다.

◈ 헤겔의 변증법과 성부, 성자, 성령 !!

아무튼 이 시대가 드디어 스스로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될 수 있는 시대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런데 변증법 원리에 의하면 노예가 주인이 되었다고 해서, 거기에서 멈추겠는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성부에게서 나와서 성자로, 그 성자에게서 성령을 통해서 다시 성부에게로 회수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데, 아들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고 말이다.

(고전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렇게 회수하는 것이 신의 완료라고 한다면, 물론 인간은 아직 그런 회수까지는 되지 않지만 회수되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가 말이다. 신의 본질이나 인간의 본질을 다같이 일치되는 것으로 보니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은 "아, 이제 나는 주인이다" 라는 것에 멈추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 인간은 멈출 수 없는 기관차 !!

지금부터는 좀 쉬운데, 잘 한 번 들어보세요. 아무튼 이제부터는 인간은 너나 할 것이 없이 누구나 다 주인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취직 자리는 하나인데 그 직장을 원하는 희망자는 10명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로 서로가 피가 터지도록 싸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홉스가 이야기한 것을 빌리자면, 즉 만인을 투쟁의 대상으로서 본다는 것이다. 만인을 투쟁의 대상으로 말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것을 '죽음'으로 보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 우리는 노예상태에서는 벗어났는데, 그래서 자기가 사유하고 또한 자기가 행동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헤겔은 '욕구' 라고 보는데, 그런데 이 욕구가 죽음에 매여있다는 것이다. 즉 취직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취직을 해야만 하는데, 하지만 적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 주관적 자아의식에서 객관적 자아의식으로 !!

여기서 헤겔은 주장하기를, 인간은 죽음에 쫓기듯이 "나는 주인이고, 노예가 아니다" 라고 해서, 거기에서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나는 주인이고, 노예가 아니다" 라고 하면 누가 밥을 주느냐는 말이다. 헤겔은 "나는 주인이다" 라고 하는 것을 어려운 말로 '주관적 자아의식' 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러한 주관적 자아의식이 밥을 주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객관적 자아의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정반합의 '반(反)'이 들어오게 되는데, 즉 자기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주관에서 객관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 이라는 것은, 일종의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하다가 죽을란다"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객관'은 무엇인가?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주관이 있다고 해서 객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돈까스라도 팔아야 자식을 공부시키지 !!

예를 들어서, 부모가 되어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해서 자식이 다 잘 되는가? 그렇게 하려면 머리에 장바구니를 이고 시장에 나가서 나물을 팔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객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자식이 잘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해놓고, 만약에 자기에게 돈이 100억 정도가 있다면 시장에 나물을 들고 나가겠는가?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가는가? 죽음에 쫓기기에 나간다는 말이다. 돈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자기는 자기이고 싶은데, 그런데 그 자리에 멈추지 않도록 쫓아내는 자기가 아닌 반대의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반대의 세력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처럼 노예로 있을 수도 없고 말이다. 왜냐하면, 정반합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회전목마처럼 제자리에서 그렇게 도는 것이 아니라, 회전계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데, 즉 과거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 어셔가의 몰락 !!

에드가 알렌 포의 작품 중에서 '어셔가의 몰락' 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어느 한 귀족이 맛있는 것만 찾아다니는데, 너무나 그렇게 다니다가 보니 이제 맛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옷만 입다가 보니 이제 좋은 옷도 없고 말이다. 아름다운 음악만 찾다보니 이제 아름다운 음악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몰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절대를 추구하면 할수록 점점 더 좁아진다는 것이다. 복음을 설교하는 목사가 3년을 하고 나니 밑천이 다 떨어져서 더 할 것이 없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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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셔가의 몰락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 미국의 시인, 소설가 에드가 알렌 포의 단편소설. 1839년 발표. 이듬해에 《괴기담》에 수록되었다. 전통있는 집안의 후예인 로더릭 어셔의 긴급한 편지로 초대된 친구 ‘나’는 잔뜩 흐린 가을날에 그 저택을 찾는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어셔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어셔의 쌍둥이 누이동생 마더린이 죽어 장례를 치렀는데 폭풍우 치는 어느날 밤에 가사(假死) 상태로 장례를 치렀던 누이동생이 책을 읽고 있던 오빠에게 와서 쓰러지자 남매는 둘 다 숨진다. 이 무서운 사건을 목격한 ‘나’는 겁에 질려 밖으로 달아나다가 뒤돌아보니 저택은 두 동강이 나며 음울한 늪 속으로 침몰하였다. 정신이상을 겁내는 작가의 불안한 심리가 엿보이는 산문시풍의 걸작이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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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겔이 말하는, 상호기만과 상호인정 !!

아무튼 이 정반합이 회전하고 상승하는 것인데, 이렇게 상승하기 때문에 과거의 노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래서 주인 노릇을 하면서 살기는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되려면 상대방을 인정해주어야 하고, 그 대가로 자기가 먹고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호인정' 이라고 하는데, 헤겔은 이 상호인정은 나중에 기독교 시대의 이야기이고, 그 이전까지는 죽음이 강하기 때문에 '상호기만' 이라는 것이다.

이 상호기만이라는 것은,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인데,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이쿠, 어서 오이소. 이것은 제가 밑지고 파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나, "손님, 다른 곳에 가도 이러한 것은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 등이 전부가 다 상호기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상호기만이 근대국가에 들어오면, 근대국가는 분업화가 되는데, 근대까지는 정치가 백성을 책임을 졌는데, 그러나 현대국가에 들어오면 행정관료로, 즉 하나의 기능인으로 바뀌게 되어서 하나의 직업이 되는데, 이것은 아튀세르의 '신급론'을 다룰 때 했는데, 정치꾼은 따로 있다고 말이다.

◈ 진중권이 말하는 현대국가 !!

진중권 교수는 정치꾼 따로, 시민연대 따로, 그렇게 다 있다고 했는데, 즉 국가는 기능이 다른 어떤 다른 기능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중권 교수의 주장은, 이제는 누군가가 영웅처럼 등장해서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고, 이 시대는 정치는 하나의 기능인으로서 멈추되, 그 최종판정은 정치꾼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연대에서 시민들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상호기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기능들끼리 만나면 상호인정을 해주는 척하는 상호기만을 한다는 것이다. 즉 속인다는 것인데, 부동산 세금을 좀 인하해준다든지, 복지정책을 한다고 하면서 저소득층에 선심을 쓰듯이 돈을 좀 떼 내어 준다든지 말이다.

그러니 진중권 교수는 하는 말이, 대통령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하지 말고, 우리가 평소에 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즉 "우리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될 일을 누군가 뛰어난 인재가 대신해서 해주고 우리는 돈을 버는데 열중하겠다" 라고 하는 것이 이제 현대국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대한민국은 로버트 태권브이가 !!

그러나 그 양반의 주장이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까 실체가 없으면 개인절대주의로 빠진다고 했는데, 그러므로 실체가 있어야 될 이유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가치를 그대로 지켜주어야 하는데, 만약에 신만이 실체이고 개인은 주체만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나면 총을 들고 누가 나가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국가의 문제라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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