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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506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속죄자유게시판히브리서

20080506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속죄

이름 : 한윤범(IP:59.6.189.254)

20080506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속죄

(강의:이근호 목사)

이 책이 래드의 책에 보면 구약과 연관시키는 걸 보면 잘 했습니다. 특히 속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구약의 법궤, 증거궤 뚜껑을 언급한 것은 래드가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지요.

래드가 자유주의를 반박하면서 구약에 분명히 하나님의 그 무서운 속죄, 법궤라 하는 것은 만지면 죽게 돼 있잖아요. 저주받아서. 그 근처도 못가요. 못가기 때문에 레위지파가 둘러싸서 운반해야 되지 아이고, 같은 이스라엘인데 같은 홍해 건너왔는데 같은 인간 아닌가? 민주주의 방식으로 나가면 큰일 납니다. 구약은 민주주의 아니에요.

거룩이냐, 속되냐? 속하냐, 거룩하냐? 이 두 가지 노선이 가게 돼있지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냐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거룩한 인간 아니면 인간 취급을 안 하니까. 애굽 군사들 홍해 빠진 것 보세요. 같은 인간인데 빠져 죽었잖아요. 어디를 약속의 땅을 넘봐, 이것들? 하고서 홍해 바다에 몰려서 다 죽지요.

이스라엘만 구원하는 홍해만 아니라 뭐도 보여주는 홍해다? 약속이 없는 자는 이렇게 망하도록 돼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홍해였습니다. 열 가지 재앙도 마찬가지에요. 열 가지 재앙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재앙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이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열 가지 재앙입니다.

상당히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독단이죠. 근데 그 하나님의 독단을 이스라엘도 이해 못하고 애굽도 이해 못했어요. 이스라엘도 이해 못한 상태에서 계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받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결국 그들이 정작 이해를 해야 될 것은 홍해를 건너왔다, 열 가지 재앙에서 우리는 빠졌다, 기분 좋다. 뭐, 우리는 광야의 전쟁에서 여호수아가 칼로 이겼지만 모세가 손들어서 이겼다.

전부다 나, 나 이게 아니라 피에 관한 겁니다. 언약의 피. 누군가 희생을 해서 피를 흘려야 이것이 뭐로 이어지냐 하면, 이게 거룩으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히브리서에 보면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이걸 ‘모형’이라 하고, 달리 이야기하면 이걸 가지고 ‘그림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히브리서에 의하면. 모형이요, 그림자로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또 골치 아픈 논리가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형과 그림자하고 반대에 뭐가 있겠습니까? ‘실체’가 있겠지요.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대해서 어느 신학자도 제가 보기에는 규명한 사람이 없어요. 모형과 그림자와 실체, 이걸 연결시킨 그 관계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모형입니다. 아시지요? 예수님이 실체입니다. 아시지요? 넘어 갑시다. 이래 되는 거예요. 이건 그림자입니다. 아시죠? 그럼 넘어갑시다. 그 관계가 사람마다 지 마음대로 모형과 실체를 하는 거예요.

문제는 이게 ‘연속성’이냐, 아니면 뭐냐? ‘불연속성’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요. 연속성일 경우와 불연속성일 경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에 모형과 실체가 연속성이라면, 연속성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가 이게 모형이잖아요. 맞지요? 율법은 모형이니까. 모형은 폐기처분돼야 되니까.

그런데 십일조라는 모형과 신약의 헌금과 연속돼있다고 한다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구약에는 10% 했지만 신약에서는 그것보다도 더 하라고 10%만 했다는 거예요. 최소한이 10%고 신약에는 10%가 아니고 다 바쳐야 되죠. 그런 의미에서 불연속성이 아니고 연속성이라고 주장을 하는 이론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내가 묻지요.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았잖아요. 그건 모형이죠. 그러면 신약에서 양을 몇 마리 잡아야 되겠습니까? 구약에 사람들이 여호와를 믿었잖아요. 여호와께서 요구한 것이 어린양이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어린양을 받기는 하나님이 받지만 바치는 자는 누굽니까? 아직까지 인간이란 말이죠.

연속성이란 말은 뭐냐 하면, 십일조도 마찬가지에요. 십일조가 10%에서 다 바쳐야 된다 하는 것은 바치는 주체가 누굽니까? ‘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연속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그림자 시대든, 실제 시대든, 어떤 시대든 뭘 해야 된다? 인간이 뭔가를 꼼지락거리면서 해야 된다를 가지고 모형과 실체를 연결시키지요.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구약 때는 양 바쳐서 하나님께서 받았는데 신약에서는 뭘 바칩니까? 이래 물으면, 그들은 말라기 십일조 말한 게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바쳐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바치는 겁니까, 어이 되는 겁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바칠 수 있습니까? 점점 더 나가면 해괴망측한 일이 나오지요. 양은 늘 잡았지만 우리는 한 번만 예수님 바치면 된다. 두 번 다시 예수님 바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히브리서에 의하면 ‘단번’에 했으니까.

단번에 라든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누가 바친다? 내가 예수님을 바쳐야 된다는 그런 이론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결국 이런 연속성을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너무 십일조에 대해서 연연하다 보니까 지금 무리수를 뒀어요. 오바한 거예요. 오바만 하면 괜찮은데 문제는 이래돼서 문제지. 오바해서 예수님을 양처럼 생각해서 우리가 바치는 주체자로 생각했다는 자체가 문제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동의할 수 없다면 간단하지요. 모형에서 모형 대목, 구약 대목에서 주체는 인간 맞습니다. 그건 우리 인정합시다. 양 바친 사람들, 하나님이 양 뚝 떨어져서 준 게 아니고 양 바친 사람, 제사장 있어요. 주체가 누굽니까? 인간 맞습니다. 그런데 실체에서는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하고 그 당시 구약하고 예수님하고 같은 아담에 속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연속성이 있는데 로마서 8장 3절, 참 이 대목을 제가 중요시 여기는데. 거기 보면 같은 인간이란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같은 인간이란 말을 한 것이 아니고,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죄 있는 육신’이란 말을 써요. 죄 있는 육신으로써의 연속성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뭐냐 하면, 저주 받는데 대해서 연속성이라.

구약의 제사장들은 양 바쳐서 뭐 받고? 저주 받고. 예수님은 자기는 뭘 받았어? 죄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육신의 몸을 버림으로써 아버지한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저주 받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 이 대목에서 아주 강조하고 있는데, 십자가에 달린 자는 뭘 받는다? 예수님은 우릴 위해서 저주 받았어요. 저주를 받아야 돼요. 저주 받는데서 연속성이에요.

그 다음에 축복을 받은데 연속적이 아닙니다. 이걸 이 책에선 이야기를 못하고 있어요. 저주 받는데 연속적인데 이 사람 책에 보면, 고린도후서 5장 13절,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이야기해놓고 그 다음에 자유진영에서 적극적으로 내놓는 미사일이나 곡사포에 이 사람이 대응을 못하고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 죽으실 때 모든 사람이 죽었지요. 그죠? 그러면 자유진영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났을 때 모든 인간이 살은 겁니까? 어때요? 래드는 여기서 실력이 딸려서 말을 안 한 거예요. 그걸 찾아보니 말을 안 해요. 말을 못하고 있어요. 흐지부지 넘어가 버렸어요. 주제를 갑자기 딴 데로 넘겨버려요.

고린도후서 한번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그 다음에 뭡니까? “대신하여 죽였은즉” 자, ‘대신’이란 의미가 뭔 뜻이냐를 이해해야 돼요.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이 뭔 뜻이냐? 이 말은 한 사람이 죽었는데 모든 사람이 죽었느니라. 왜냐하면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결국은 자유진영에서 특히 칼 바르트가 그렇게 주장해요. 칼 바르트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죽은 것이다. 그 대표했다는 말이 대신, 대속이란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유일한 선택받아서 살았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이 주님 앞에서는 사실은 산 것이다.

어떤 학생이 질문하기를 그러면 칼 바르트 교수님은 보편구원설을 주장하는 겁니까? 라는 질문을 했지요. 책에서. 그거는 하나님 소관이지 내가 말할 성질이 아니다. 학생이 논리가 그런 식이 아닙니까? 대신했다는 말은 한 사람의 운명이 전체 운명을 대변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대변했던 분이 죽었다가 축복 받아서 영생을 얻어서 다시 살아났다면 이것은 지옥 갈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지옥 간다는 말은 허풍이든지, 위협이든지, 여호와증인 말대로 잠시 위협했다가 나중에 스스로 철거하자는 이야기인지, 지옥이란 부처 말대로 결국은 모든 인간은 다 환생을 하든지 간에 구원받는다는 그런 뜻입니까? 하니까 나는 보편구원론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이건 박영선 목사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구원될 자를 예정했다. 박영선 목사 보고 그러면 지옥 갈 사람을 예정했습니까? 그런 것은 성경에 안 나와 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안 했습니다. 안 하고말고 본인의 이야기가 뭡니까? 나는 이야기 안 하기로 했습니다. 성경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기계라는 사실을 하나의 공장이라는 사실, 뭔가 생산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무엇과 얽히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자꾸 자기 문제와 얽혀 들어가니까 주님의 관심사는 그쪽이 아닌데 내 구원이 아닌데 어떻게 사용한다는데 자꾸 자기 자신의 욕망,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을 자꾸 거기다 섞어 넣는 거예요.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욕망이 아무짝도 소용없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죄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죄 있는 육신의 입장에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욕심에 불과하고 사탄의 욕망에 불과하지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쨉이 못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자기 구원을 이야기한다면 제가 분명히 단언합니다. 지옥 간 부자가 자기 빼내 달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자기로선 정당합니다.

주여, 제가 잘못했다 안 합니까? 내가 예수님이 구주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지옥 갔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날 빼 주이소. 지옥 가운데 물 한 방울 아쉬워서 힘듭니다. 그러니까 빼 주이소.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부자가 뭐라 합니까? 이미 난 조진 몸이다. 하지만 동생 다섯 명이 있는데 걔들은 아직 희망이 있으니까 좀 봐주소. 이래 한다고.

그 말은 뭐냐 하면, 이미 부자마저도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조치가 아님을 지옥 가서 비로소 알고 자기 처지를 그냥 인정해버리는 거예요. 지옥 와야 된다는 처지를 인정해버리는 거예요. 죽어서 안 거예요. 모든지 산 자나 죽은 자의 주가 되신다는 개념을 그때 안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점을 두고 이렇게 하잖아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면 좋을 뻔 했다고 한 이야기가 너무나 측은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이 그걸 측은하게 본다고 해서 지옥에서 가룟 유다가 천당 가고, 부자가 천당 가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한 취지가 뭡니까? 니 자리는 그게 니 자리다 이 말입니다. 미워하게 받을 예정된 것은 끝까지 지옥 가서 미움의 대상이 돼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가 사랑할 사람을 내가 만들 권한이 있음을 온 우주에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미워할 사람을 내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권한이 나한테 있다, 왜? 인간들아! 라고 큰 소리 치지는 그 권한을 우리가 인정해줘야 됩니다.

그러니 자유주의 이런데서 이걸 아주 싫어하고, 보수주의에서 이 이야기하면 그걸 하이퍼칼빈주의. 더 노린다면 울트라슈퍼칼빈주의. 칼빈주의의 특징은 자기 구원을 자꾸 연계를 한다는 거예요. 구약의 언약을 몰라요.

홍해가 갈라졌을 때 아, 이 사람이 가서 좋다. 이렇게 보지 말고 왜 애굽 군사가 따라와서 죽느냐를 염두에 둘 때 우리와의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위해서 새롭게 지음 받은 존재다. 라는 사실이에요. 그만한 재주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한테 그만한 재주가. 그만한 실력이 있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실력이 좋은지 없는 인간도 만들어서 오직 언약을 위하여 새롭게 만들 그런 재주가 있고, 그 재주가 발휘된 것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불신자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사도바울이 했잖아요. 이 나의 복음을 기뻐하는데 왜냐? 망할 자에게는 망하도록 복음이 있고, 복음을 자꾸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생각하지 말고 망할 자를 망하도록 있고, 구원될 자는 구원으로 복음이 있는 건데 자꾸 구원받는다는 생각 말고 망할 자는 왜 망하는지 망해야 될 이유를 보여주는 거에 복음을 딱 깨어놓으면 아, 이래서 망하는구나. 복음 안에 그게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걸 왜 누락해요. 그걸 왜 빼먹어요. 복음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속죄, 대속, 구속, 화목제물 이 모두는 뭐냐? 지금까지 보수주의는 뭡니까? 우리는 이래서 구원받는다. 이런 내용만 이야기했는데 저는 거기서 탈피해서 이래서 지옥 갈 자는 지옥 간다는 내용이 거기서도 뽑아내야 그게 합당하다 이 말입니다. 속죄, 대속 구약에 있는 그런 개념에서 왜 지옥 갈 자는 지옥을 가야만 하느냐? 그 내용도 뽑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어떻게 뽑아내는가? 궁금하지요.

그게 이번에 [피]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십자가 사랑도 아니고, 십자가 희생도 아니고, 피입니다. 왜 누가 피를 흘렸느냐? 이 문제에요. 지금까지 관심사는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느냐 인데 제가 촉구하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겁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했다고요? 피 흘려서 돌아가셨다에 그것이 성경 전체의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 말이죠.

내 피 났다. 내가 피 나서 아파할 때 그때 뭐가 사라져요? 주님께서 피 흘렸다가 사라지고, 주여 왜 내 손가락에 피 흘리게 하셨습니까?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죄 있는 육신의 몸에 이게 내용물입니다. 속 내용물입니다.

고린도전서 한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기록된바 첫 사람은 아담은 산 영이” 되었지요. 마지막 아담은 무슨 영입니까? 살려주는 영이잖아요. 살려주는 영 아닙니까? 이 말을 자유주의나 불교신자 들으면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왜? 내가 죽었단 말인가? 살려주는 영이 누구라고요? 예수님이다. 살아있는 나를 또 살려주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예수는 없어요. 늘 살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못 사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보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잖아요. 이 말은 뭐냐? 사도바울이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부활이 한 때 부활이 아니라 늘 살려주는 그 기운, 에너지, 그런 영역, 그런 통치, 작용 그 속에 놓여있단 말이에요. 이 말을 다른 말로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늘 우리는 죽음의 통치 하에 있다는 말이죠, 이게. 우리는 늘 죽기 때문에 늘 살려줘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마치 일대 일로 대해요. 당신 오늘 뭘 해 줄 건데. 바쁜데 빨리 해주고 가소. 이래 되는 거예요. 자꾸 살려준다는 것은 생각 안 하고 사람을 대하듯이 어떤 나도 인격자, 당신도 인격자 둘이 잘 해서 좋은 걸로 해봅시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한쪽이 일방적으로 죽은 나를 살린다 생각 안 하고 나로 하여금 구속의 의미가 생각나는 건 모르고 말이죠. 그건 그 이야기고.

아까 어떻게 이동해봅시다. 피를 흘렸다는 겁니다. 이 피에 대해서 래드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하도 복잡하게 이야기해서 읽기도 싫지요. 이래 이야기했지요. 여기서 래드가 자유주의하고 싸워요.

뭐냐 하면, 자유주의는 아이고, 피 좀 이야기하지 마라. 피 흘렸다는 말은 딴 게 아니다. 그냥 예수 죽은 거야. 죽었는데 왜 죽었는가? 그냥 사랑한다, 난 희생한다. 그래서 죽은 거야. 그러니까 피 이야기하지 말고, 죽는 이야기하지 말고 그걸 뭐로 때우자? 희생적인 사랑을 해주셨다. 그걸로 그만 대체하자. 이게 자유주의거든요.

그런데 보수주의는 뭐냐 하면, 피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피를 사랑으로 대체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유주의는 뭐라 합니까? 이럽니다. 에라이, 피 한 바가지 뿌려봐라. 구원받는가? 이래 나오거든요. 그들은 아주 피를

피라 하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종교에 보면, 하나님의 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인간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극단적인 행동이 뭘까요? 피를 내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엘리야 시대 때 바알과 아세라 그리잖아요. 소도 인간도 피 보면 흥분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소는 흥분 안 할 거예요. 아마 투우할 때. 그걸 보는 관중들이 더 흥분할 거예요. 피를 보고.

프로이드 이론에 평소에 인간은 남이 죽는 것을 그렇게 그리워한답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 탤런트 이혼하고 이러면 속이 시원해서. 남 망한 것. 남 망하고 죽고 이런 것 없으면 사람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프로야구, 프로축구에서 뭐라 합니까? ‘죽여라’ 안 캅니까? 중국유학생들 죽여 버려. 티벳 이놈들, 죽여 버려라. 중국유학생 주장 아닙니까?

사람이 악이 바치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그냥 말로 해도 안 되고, 죽이지 아니하면 속이 풀리지 않는 겁니다. 익산에 ( ) 들고 돈 사백만원 훔쳐서 돈 어디 썼는지 알아요? 유흥비로 날렸다는 거예요. 유흥비라는 게 뭐냐 하면, 상대방을 죽이는 거예요. 술집 여자를 죽이고 자기도 죽고. 거기 쓰는 비용이 유흥비입니다. 모든 술집에서 나이트클럽에서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고상함을 죽이는 작업이에요. 일종의 회개 작업이랄까? 주여, 나 부족합니다. 그걸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술로 마약으로 그렇게 푸는 거예요.

인간의 욕망, 인간의 죄를 인간이 껍데기만 했지만 그 껍데기만 하니까 너무나 스트레스 받으니까 한 번은 저녁에 밤에는 껍데기를 훌쩍 벗겨서 고상 덩어리, 점잖 덩어리를 확 벗기고 화끈하게 푸는 그런 걸 할 때 사람들은 아이고, 숨 좀 쉬자. 안 합니까? 교회도 부흥회 열고 손바닥 치고, 이것도 숨 좀 쉬자. 법에 일탈이죠.

자유주의는 뭐라 하느냐 하면, 피를 볼 때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극단적인 행동 안 하면 그들이 못 알아먹으니까 피를 보니까 비참하잖아요. 참혹하잖아요. 그때 사람들이 보니까 야, 누구 죄 때문에 돌아가셨나? 아,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이렇게 자극 받아서 믿게 된다는 거예요. 자유주의에서.

근데 여러분, 자극 받아서는 안 믿습니다. 자극 받으면 더 나쁜 점이 그 다음부터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돼요. 사람이 죄가 죄를 부르는 이유가 시시한 자극은 자극도 아니에요. 청소년들이 점점 게임에 빠지는 이유가 뭡니까? 청소년들 게임 보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어. 울프3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감나게 3D 가지고 사람들 총 가지고 죽이거든요. 제가 봤어요. 할 줄 모르니까 컴퓨터 모르니까 보니까 초등학생들이 총 들고 돌고 있는데 막 죽여요. 500원 내고 하는데. 막 피 흘리고 죽어. 수류탄 던지고 이래요. 나중에 그것도 시시해져요. 더 생생하게 실감나게 갈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래드가 할 말이 없으니까 이렇게 합니다. 피가 왜 중요하냐 하면, 피는 생명이라 했으니까 피는 죽는 것만 아니고 생명의 시작된다. 이 대목이 나와요. 읽어보셨으면 그대로 나와요. 죽음이 곧 생명의 시발점이다. 죽음이 있어야 생명이 시작된다. 이래 보는 거예요.

그래서 래드는 인정하는데 그거 틀려먹었습니다. 그거는 자유주의가 아니고 일반적인 철학가들에게도 놀림감이에요. 왜냐하면 그래 돼버리면 죽음과 생명이 같은 방향이 돼버려요. 그러나 우리가 아는 상식과 일반적인 상식은 죽음과 생명은 서로 처소가 달라요. 가는 방향이 다르다고. 이건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에서도 죽음의 세계하고 생명의 세계가 달라요. 방향이 달라요.

그런데 만약에 피가 생명의 시발점이라면 같은 노선이 되면 같은 방향이 돼요. 같은 방향이 될 때 논리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어느 선까지 죽음이고, 어느 선까지 생명이냐가 이게 모호해져버려요. 몇 층까지 올라오면 죽음이고 몇 층 올라오면 삶이냐? 이게 모호해져버린다고요. 이게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왜 생기느냐 하면, 전부다 우야면 내 구원받으려고 하는 자기 구원에 몰두하다 보니까 예수님의 뜻은 모르고 전부다 내 챙길 것만 챙기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예수님의 피라 하는 것은 이거는 죽음이고, 이 죽음은 뭘 이야기 하느냐 하면, 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죄가 없는 곳엔 죽음이 없습니다. 진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죠. 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면 죄가 장성한 즉 뭘 낳는다? 사망을 잉태, 생산하죠. 사망을 낳아요. 생산해요. 두 개 다 생산돼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사망한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은 어떤 편에 속하든 간에 인간 자아는 없고, 뭐든지 자꾸 생산하는 공장과 기계에 수단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내가 죄 짓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지배한다 이 말입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우리가 전에 봤지요. 언젠가 했는데. 아, 울산 가서 했구나. 로마서 7장에 보면, 죄가 지배해요. 우리는 죄에 팔렸어요. 죄에 팔려서 값을 주고 죄에서 빼내 준 거예요. 값으로. 여기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값 주고 산 것이 됐느니라. 아까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뭡니까? 니가 하나님의 값 주고 됐으니까 뭐가 되지 마라? 사람의 종이 되지 마라 했지요. 이것은 이미 우리의 주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고, 어제에 팔린 인간을 이제는 이쪽에 팔린 존재로 이동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쪽에 팔렸을 때 팔려서 가만있습니까? 나는 팔렸다 해서 창고 가만있었습니까? 어디든지 팔리면 활발하게 팔린 쪽을 위하여 충성, 봉사하게 돼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우리를 다스리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죄의 종으로 죄를 위하여 죄로 말미암아 죄를 위하여 살게 돼있고, 죄를 위하여 사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가 성립돼야 죄를 위하여가 성립돼요. 아따, 어렵다 정말.

나는 이제부터 죄를 위해서 살 거야. 라고 자기 실력을 발휘 못해요. 죄가 들어와 줘야 그 죄가 죄를 위하여 살게 돼있어요. 로마서 7장에 이야기하고 딴 데서 이야기해요. 그러한 위치가 그런 구조가 돼있어야 되지요. 그 구조가 그대로 와서 주를 위해서 살 때는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해서 살아요.

참,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순종하라’ 순종 안 하면 방종을 가르치는데 하는데 성도의 순종은 성령 없이는 순종이 안 됩니다. 자꾸 제가 성령을 집어넣는데 저쪽은 자꾸 성령 빼고 이근호 목사는 순종하지 마라 했다. 방종하라 했다. 맨 날 이런 소리한다고. 내가 성령 집어넣었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집어넣어도 지 마음대로 성령 빼버리고, 성령 집어넣어도 빼버리고. 뭐 성령하고 원수질 일 있나. 성령 안에서 행하라 했는데 성령을 빼버리고 이근호 목사님은 행함을 거부한다고.

성령을 집어넣어야 자기 부인이 돼요. 그래야 자기 부인이 돼요. 자기 마누라란 말이 아니고. 뭘 해도 봉사를 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게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잖아요.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믿음과 소망, 사랑과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성령 안에서 이게 정과 욕심을 날마다 못 박을 때 못 박아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니고, 못 박는 그 순간 우리를 못 박아놓고 그 나머지 일을 주께서 벌이셨다 이 말이죠. 그리고 나의 경건과 나의 노력으로 믿음으로 했다고 하지 마라 이 말이죠. 나는 그 순간에 주 위해서 못 박아 있었고 일은 성령께서 일을 하셨다 이 말입니다.

주로 말미암을 때만 주를 위할 수 있지요. 나로 말미암아 주를 위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전에 우리가 죄의 종이었을 때 역시 나로 말미암아 죄 안 졌어요. 왜?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데 그건 뭐냐? 죄에 팔려버린 내가 있어서 죄에 팔린 내가 선을 좋아하는 나를 우세해서 그걸 극복하고 나를 딛고 죄 좋아하는 죄에 팔린 상태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와버린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소릴 다 해요. 이 나쁜 짓은 내가 한 게 아니고, 내 속에 죄가 했다. 이런 무책임한. 아마 내가 이야기했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니까 가만있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밖에 있는 죄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게 생산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생산할 때는 성령님이 관리자로 오셔요. 우리 혼자 맡기는 게 아니고. 니, 예수 믿었지. 이제 니하고 나하고 해보자. 이런 것 없습니다. 성령님이 오십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는 이렇게 있는데 우리 속에 성령님하고 누구하고? 예수님하고 알아서 우리를 사용하죠. 뭐가 나오도록? 예수님의 공로만 나오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조절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과 예수님은 두 분만이 아시는 게 있어요. 뭘 아느냐? 창세전의 이야기를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기껏 수명이 팔십, 길어도 구십밖에 안 되기 때문에 창세전의 내용을 몰라요. 우리는 빌 바를 몰라요. 뭘 빌어야 될지 몰라요. 성경말씀을 맨 날 나 위주로 곡해해요.

그래서 성령의 창세전의 이야기가 뭐냐? 아까 고린도전서 15장에 뭐라 합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어야 한다? 죽은 우리를 살려내는 영이 돼야 돼요. 그래서 성령님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 염려하지 마라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속에 가지고 와요. 성령께서.

성령께서 말씀 바깥의 성령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제가 차영배 교수한테 잘 배웠어요. 성령께서 일할 때는 기록된 말씀 바깥에 일하지 않는다고. 그게 바로 칼 바르트하고 차영배 교수하고 차이점이에요. 칼 바르트는 성경 따로 있고, 성령께서 하는 말씀 따로 있다.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오직 고지식하게도 기록된 그 말씀 이외는 없어요. 따라서 예수님이 행하신 비디오가 있더라도 그 비디오 보고 일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많은 편지가 있더라도 그 편지를 고려해서 성령은 일하지 않습니다. 그 점을 오늘날 자유주의가 아무리해도 그걸 못 믿어요.

자유주의는 예수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성경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든. 이거는 미신이라 합니다. 성경책을 믿으면 미신이라 해요. 예수님이 구원하지 성경책이 구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함부로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나 성경책만을 하는 것은 우리란 뜻이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해요. 일반교인들까지 성경책 무시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죠.

성령께서 예수님 하신 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물론 여기에서 이야기 하나 빠져있는데 그것까지 하면 골치 아파. 뭐가 빠졌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이미 그전부터 성령께서 역사했다 그거는 우리가 아니까 생략하고요. 예수님의 진리 된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데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계획된 대로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원수를 사랑하라든지,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라. 이거는 우리가 죽었다 깨나도 못해요. 먹는 것 입는 것 왜 족한 줄 알아요. 미쳤나? 우리가 딴 거 욕심도 많은데. 욕망의 기곈데.

그런데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뭘 보느냐 하면, 피를 보게 해요. 십자가 피. 거기에 보면 우리가 뭐라 돼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피를 흘린 이유가, 피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죽음이 생명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피는 예수님 죽음이에요. 그런데 피해자가 있다는 말은 가해자가 있다는 말이죠. 그 가해자가 누굽니까? 죄의 종에 팔린 우리가 가해자에요.

그러니까 제가 피를 가지고 이야기해줘야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 편이 아니고, 누구 편이었다? 사탄의 종이었다. 사탄의 종이었고 우리는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사탄으로 말미암아 우린 예수님을 걷어찼고 모멸했고 무시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예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죄의 의가 아니라 바로 죄 속에 팔렸음을 그 당시 유대인뿐만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21세기 예수 구경도 못한 십자가 구경도 못한 우리조차도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담한 자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당신, 그거 증거 대라. 증거 댈게요. 사울이란 사람이 십자가 죽을 때 돌멩이 던졌습니까? 돌멩이 던진 것은 중국유학생밖에 없지. 사도바울이 십자가 있을 때 그때 현장에 있었습니까? 없었지요. 우리 인간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사도바울이 해코지 한 것은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누굽니까? 예수 믿는 작자들이었지요. 소위 교회였습니다. 예수 멱살 잡고 안 흔들었어요. 이 나사렛 목수 아들아. 이런 적 없습니다.

그는 스데반 죽이는데 찬성하는 표를 던졌고, 옷도 맡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 잡아다가 죽였습니다. 물론 직접 죽인 건 아니겠지요. 자기가 집행자가 아니니까. 다만 이 사람은 죽어 마땅합니다. 하고 찬성표를 던진 거예요.

그거는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자기 다메섹 이야기를 세 번 이야기하는데 세 번째 그 이야기해요. 두 번째는 뭐냐? 예수 죽였다고 이야기하고 세 번째는 죽이는데 내가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이 말입니다. 검사가 사형집행인은 아니잖아요. 검사나 판사는 뭡니까? 이 죄인은 사형! 라고 찬성하듯이 자기가 그렇게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집행인이니 집행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나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는 말이 맞는 말이에요.

사울이란 사람은 예수 구경도 못했어요. 구경했어도 안 믿었겠지만. 단지 그가 해코지한 것은 예수님이 있다고 여기는 그런 예수 믿는 자를 해코지했는데 막상 예수님이 하는 말은 뭐냐? 니가 나를 직접 해코지했다. 이렇게 평가를 해석을 해버려요, 예수님께서. 니 참 고생이다. 니가 맨 발로 가시채를 치려고하니 니만 힘들지 나는 하나도 힘 안 든다. 이래 나왔거든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때부터 사도바울이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야, 이거 보세요. 너무 오바 아닙니까? 자기는 십자가 구경도 못했어요. 그런데 십자가가 그 당시 십자가로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십자가가 계속해서 이게 하나의 좁은 종이가 아니라 두께가 마지막 끝에까지 계속 가는 그러한 시간의 두께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 십자가가 영원한 십자가다.

그래서 자기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남들까지 소개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어리석도다. 십자가가 어디 앞에 보이니? 눈앞에 밝히 보이니. 무슨 말이. 목걸이 십자가 말합니까? 뭘 밝히 보여. 뭐 있는데 뭐 있어야지. 그런데 말하기를 밝히 보이거늘 어찌 너희가 자기 행함을 주장하느냐 말이죠. 아직도 율법, 율법 하고 있느냐 이 말이거든요.

사도바울의 말이 너무 어려워. 보는 것만 이야기하자는 쪽이에요. 우리 쪽은 세상에서 인간 쪽은. 어이, 아저씨. 보이는 것만 합시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도 한 때 그랬었었다. 보이는 인간만 조지면 끝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그 뒤에 뭔가 연결된 것이 있었다. 뭐냐? 그들이 예수 믿는 것은 그들의 신념이 아니었다. 오기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주님께서 신자를 믿게 하신 믿음을 줬기 때문에 그렇게 믿은 거예요. 공장이에요, 공장. 그러니까 사울에 의해서 해코지 당하는 신자들은 뭐다? 그 사람 건드리면 누굴 건드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장가서 해코지하면 누굴 건드린 거예요? 공장 사장 건드린 거죠. 믿음이 이런 거라는 걸 보여주는 공장이었고, 사울의 눈에는 공장장은 안 보이고 뭐가 보인다? 공장 돌아가는 것만 보이는 거예요. 그럼 저것만 조지면 공장 사장은 안 나타나는 줄 알았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불신자에게 당하면 당합시다. 고난 없이 십자가 길 없이 천당 가는 길 없거든요. 하늘나라 갈려면 우리가 많은 환란을 겪어야 된다 했잖아요. 그 환란을 겪으려면 우리 소망이 아닙니다. 환란 겪으려고 설칠 필요 없어요. 그건 공장장 소관이라고. 우리는 공장이고. 공짜로 영생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산기구, 바로 우리 아닙니까? 어떤 환란이나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만 상관없이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함을 보여주는 그 이야기하다가 그 사람들이 사울한테 맞아 죽고, 잡혔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거꾸로 돼서 사울이 그 길을 가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뭐라 합니까? 저놈은 살려줄 자가 아니다. 보세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든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에 나오지요. 피의 언약이죠. 피를 모독하는 자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무섭겠느냐? 피를 냈다. 이 외에 희생이나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고 왜 피냐 하면, 너희가 죽였잖아. 우리가 죽였잖아. 육신에 있는 우리가 죽였잖아.

히브리서 11장 35절, 36절에 보면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기 쉬운데 우리 목사 입장에서는 교인들을 힘들지 않게 해주려고 많은 배려를 해요. 우리 목회자 입장에서는 배려를 해요. 같이 있을 때는 함부로 하지만 실제로 많이 배려를 하는데, 히브리서 11장 35절, 36절에 보면 거기 신앙의 표준이 나옵니다.

뭐냐 하면, 톱에 켜는 것과 돌에 맞는 것과 구차히 살기를 원치 아니하고 이게 표준이 나온다고요. 우리가 옆에서 배려해주고 그냥 대충 넘어가자 해도 성경자체가 다른 말로 하면 성령자체가 다른 말로 하면 주님 자체가 자기 공장을 본인이 관리하는 거예요. 목사가 좀 쉬었다 하세요. 하더라도 너무 교인들이 힘드니까 좀 봐줄라 해도 헌금 안 해도 됩니다. 라고 하고 싶어도 너무 힘들게 예수 믿지 마세요. 쉬었다 하세요. 하고 싶어도 공장장 주인 되시는 분이 자기 백성을 조져버립니다. 그렇게 인도해요. 성경밖에 인도하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일들은 성경대로만 인도해요.

그러니 우리 목사 입장만 난처해지죠. 우리가 훼방꾼이 되며 결국은 교인들 봐주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목사질 해서 오래 밥 먹고 살려는 노림수가 아닌가 하는 그런 혐의를 공장장 되시는 주님한테 받을 수가 있죠. 그럼 우린 말씀대로 했는데 다 따라가 버립디다. 이래 나오지요.

떠나는 게 겁나느냐, 말씀대로 전하는 게 더 중요하냐? 이래 나오겠지요. 왜냐하면 그러니까 이거는 전하는 자나 받은 자나 전부다 말씀의 주인 되시는 주님에 의해서 대화하고 교류해야 될 문제고 지시할 문제지, 사람들의 반응에 시시콜콜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흥분하거나 좋아하거나 낙담할 일이 아니다 이 말이죠.

대속이고, 구속이고, 화목제물이고, 속죄고 간에 공통점이 있어요. 이걸 래드는 못 발견해냅니다. 이 공통점이 뭡니까? 한 자로 뭡니까? 피였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떤 식이든 간에 우리는 주님에 대한 피를 내게 된 하나님을 죽인 가해자임을 거꾸로 역으로 소급해서 보여주는 그런 기능들, 용어들이 뭐다? 대속이고, 속죄이고, 화목제물이고 그리고 구속입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박형룡이라든지 이런 보수주의자들은 야, 구속받았다, 구원받았기 이것 가지고 기뻐하지만 우리는 구속 될 때마다 주의 피가 생각나서 주여, 내가 이제 주의 것이군요. 지옥 가도 마땅한 인간을 이렇게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런 구속, 대속, 예수의 피를 증거할 수 있는 증인된 것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내가 전도하는 이 자체가 상급이고, 내가 복음 아는 자체가 복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겠죠.

그런데 보수주의 박형룡 저쪽은 뭡니까? 여러분, 구속이란 법적으로 구원받았고, 칭의적인 법적인 뭐라 합니까? 법적 칭의에 의해서 의로 받았고 자꾸 챙기려는 거예요. 많이 챙기면 생명이 많이 얻겠다는 겁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그의 분량대로 만들어가니까 챙긴 사람은 만들어갑시다. 이카고 있다고.

교인한테 또 부담 주는 거예요. 그럼 구원받은 게 끝이 아니고 봉사하란 모양이구나. 과제가 또 남았어. 아이씨, 이만큼 챙겼는데 멀었나? 어디까지 야. 도대체 어디까지 챙겨야 돼. 그럼 톱으로 켜는 것과 돌에 맞는 그것까지 챙겨야 됩니까?

내 구원주의가 예수님에게 피를 내도록 죽인 겁니다. 내 위주의 구원주의가. 나는 무조건 구원받아야 돼. 라는 그 생각 자체가 바로 속죄와 피 앞에서는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자기는 믿습니다하는 그 믿음 자체가 뭐가 돼요? 행함이 되죠. 믿음=행함이 돼버렸어요.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잖아.

진짜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안 믿어도 되는데 예수님의 속죄를 믿게 한 것은 나로 하여금 주의 것이 되기 위해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 값으로 산 것이 되니까 너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는 그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럼 대속, 구속 차이는 없단 말인가? 차이는 있어요. 대속, 구속, 화목제물 그리고 속죄 이 모든 것은 피에서 나오고 있고 피의 기능이 분류가 되죠. 분류라 하면 전공자 따로 있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결국 이 기능들은 전부다 우리 새로운 피조물 안에 몽땅 다 보여줍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이 죽어서 산 사람으로 하여금 오직 누굴 위해 살게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한다. 이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을 살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생산은 뭐냐? 사수가 아니고 우리는 뭐냐 하면, 결국 봉사죠. 봉사와 희생으로 산다. 내 것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내 것을 내게 들어있는 것을 나누어주는 그 재미로 세상을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 될 때 그 사람은 바로 주님의 대속의 삶이 나오고, 주님의 속죄의 삶이 그 사람에게 나오고, 주님의 구속의 삶이 그 사람에게 나오고, 그 사람의 화목제물의 삶이 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너희들은 누굴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원수 갚는 것은 누구한테 맡겨라? 아버지한테 맡겨라. 이게 뭐냐? 서로 될 수 있는 대로 누구하고 화평하라. 이게 뭡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화목제물 되시는 분이 우리를 통해서 화목제물답게 나오고, 속죄답게 나오는 거예요. 너의 말 듣는 것은 나의 말 듣는 것이니 용서받을 것이다.

이게 신부나 목사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든지 성도에게, 빌립이 어디 신부였습니까? 빌립이 집사였잖아요. 스데반이 집사였잖아요. 그래도 복음 전했잖아요. 입이든 코든 전부다 그거는 바깥에 나오는 하나의 돋아난 것이고, 안에는 뭡니까? 입으로 튀어나오든, 코로 튀어나오되 나오는 것은 동일하게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나오면, 이게 속죄가 나온 것이고, 대속이 나온 것이고, 구속이 나온 것이고, 이게 화목제물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용어 쓸 때는 꼭 그 용어가 아니라 번갈아 섞어가면서 그때그때마다 필요할 때마다 내 입으로 구원받는다 할 때는 대신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죄 지어 낙담 할 때는 이미 다 끝났다는 이야기할 때는 딴 걸 또 화목제물 이야기하고. 그렇게 해서 그때그때마다 활용한 거예요.

근본적인 건 뭐냐? 우리가 챙기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우리를 챙겼다는 사실을 이미 산 사람이라는 것을 살려준 영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면서 날 위해 사는 게 아니고, 주를 위해서 의의 종으로 살게 함이라.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까지 우리가 자기 구원받은 것만 챙기고 희생과 봉사는 없이 남한테 비교, 승리하려고 쾌감을 느끼는지 그 생활 이제 청산하고 예수님이 어떻게 활용하든지 간에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것이 되었음을 예수님만 자랑하고 나 자랑하지 않고 주님만 자랑할 수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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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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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