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대구강의18-현대신학의단초1(하이데거)
07대구강의18-현대신학의단초1(하이데거)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7 대구강의 18 - 헤겔과 하이데거 1
07,12,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이데거 - 헤겔 이후 최고의 철학자 !!
이제 시작d,f 하겠습니다. 헤겔(1770-1831)과 하이데거(1889-1976) 중에서 하이데거를 먼저 하겠는데, 이 분은 80세를 훨씬 넘게 꽤 오래 동안 살았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 헤겔 이후의 최고의 철학자로 이 하이데거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헤겔 이후인가? 헤겔을 포함하면 안 되는가?
왜냐하면, 헤겔이 가는 노선과 이 하이데거가 가는 노선이 서로 다른데, 헤겔은 존재론에서 인식론, 그리고 인식론에서 이성론(?)으로 넘어가는데, 과거 중세시대의 신과 인간, 즉 신과 존재에 대해서 정리하던 철학의 시대가 무엇으로 넘어오는고 하니, 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신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 데카르트 이후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발달 때문인데, 과학의 발달은 에너지 효용성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인구가 많고 또 인구가 많으면 에너지의 효율, 즉 얼마나 자연에 대해서 효율적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 신이 주시는 것을 효율적으로 !!
그렇다면 신이 은혜를 주시는데, 물론 그것은 인정하지만, 그 주시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활용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효율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과학이 신학과 충돌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즉 신학은 신학이고, 그리고 과학기술은 따로 발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 이성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인간이 알 수 있는 한계가 도대체 어디냐는 것이다. 신과 영혼과 자유에 대해서는 사실 모르겠고, 다만 인간이 알 수 있는 그런 범위 안에서는 확실히 알자는 것이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계몽' 인데, 이것은 '깨우친다' 라고 하는 의미인데, 즉 빛이 와서 어둠을 밝힌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개발하자는 것인데, 이것이 스피노자 이후로부터 그렇게 했는데, 그게 신의 뜻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과 루터가 말한 종교의 자유와 관련이 있는데,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이 신의 소명에 합당한 것이고, 그러한 능력을 방치하면 신이 주신 소명에 게으름을 피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의 발달은 합리주의가 되고, 이 합리주의는 과학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다 합리성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병참기지를 비롯해서 보병을 앞장세우고 하는 것이 상당히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합리성은 중세신학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 철학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직접 가지고 오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하게, 즉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덜어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세철학에 기초한 인간의 능력개발이, 그것이 칸트철학에 있어서 인간 이성의 한계와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는, 즉 인간의 주체정신이 굳어졌다는 것이다.
◈ 헤겔 - 칸트형님, 그것이 아니고 !!
이러한 칸트에 대해서 헤겔이 여러 가지 불만을 가지게 되는데, 우리 교재에도 나오지만, 칸트는 신에 대해서 포기하자는 쪽으로 나가는데, 그런데 헤겔은 말하기를, "아니, 포기할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인간의 절대이성은 신에 이르는 것인데, 그러니 신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면서 우리 인간끼리 무엇을 하자는 것은, 그야말로 눈감고 야옹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방식으로 대충 대충하고 감춘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헤겔 -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
인간이 아무리 인간 위주로 나가려고 '인간 따로, 신 따로' 라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결국에 인간은 신에게 나아갈 수밖에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신과 인간 사이에 '이성'으로서 다리를 놓는 그 모든 작업이 헤겔에서 마무리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은 헤겔 이후에는 그보다 더 뛰어난 철학자는 아직까지 없다는 것이다.
오늘 하이데거를 할 것인데, 이 하이데거의 노선은 무엇인고 하니, 먼저 헤겔은 '변증법'인데 반해서, 이 변증법은 일종의 논리에 관한 것으로서, 즉자존재와 타자존재가 있는 정반합인데, 즉 정(正)이 있으면 그 모순에 의한 반(反)이 있고, 모든 변화를 다 수용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빠지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합(合)에 이르는데, 이 합은 절대이성이고 말이다.
◈ 하이데거는 변증법이 아닌 현상학 !!
헤겔은 이런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서 신에 이르게 되는데, 그런데 하이데거는 변증법이 아닌 '현상학'으로서, 그것을 현상학적 논리라고 하는데, 이런 현상학적 논리를 알려고 하면 먼저 현상학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 이란 무엇인가?
◈ 후설 - 과학이 너무 설치잖아 !!
이 현상학은 하이데거 이전에 '후설' 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것인데, 이 후설이란 분이 현상학을 주장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고 하니, 소위 과학이라는 것이 너무 설치고 돌아다니더라는 것이다. 과학기술이라는 것이, 자기가 진리도 아닌 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너무 까불더라는 말이다.
과학에는 의미라는 것이 없는데, 그냥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약을 하나 만들어도 수천 수만 번을 되풀이해서 나오고 말이다. 합리적인 것 같이 보여도 전혀 합리적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무턱대고 그냥 해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도자기를 굽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도자기를 얻기 위해서 이런 온도에서 한번 굽어보고, 저런 온도에서도 한번 굽어보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합리적이냐는 것이다. 그냥 되는지 안 되는지 한번 해보는 것에 불과하지 말이다.
그러니 인생이란 의미가 단지 자기 코앞에 있는 그 목적 하나 때문에, 자기가 왜 살아가는지 인생의 목적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설에 의하면, 인간이 이렇게 자기 눈앞의 이익에 의해서 놀아난다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이익'은 과학적인 이익이고 양적 개념인데, 더 많은 것이 좋고 진리라고 하는 말이다.
◈ 땅 속을 보물을 보다 효율적으로 !!
이것을 조금 더 설명하면, 그 당시의 각 나라들이 무역을 통해서 국가적인 부를 축적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무지무지 양산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별난 것이 아니라 땅속에 있는 에너지를, 즉 석탄이나 철강석 등을 캐내는 것인데, 깊이 있는 것을 더 많이 효율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고급무기가 되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1960년대의 새마을운동처럼 말이다.
이렇게 과학기술에 사활을 걸어서 국력을 키우게 되고, 그 국력을 통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로 식민지 개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코앞의 이익이고 재물이고 돈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노예와 금과 은을 누가 획득하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이익이 왔다갔다하니까, 그렇게 상호경쟁체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 철학자들 - 하지만 너무 심하지 않는가?
온 나라가 이렇게 돈을 벌기에 혈안에 되어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도저히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은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위 신흥귀족들이 극도의 사치를 부리는데, 인도에서 가지고 온 고급 양탄자를 자랑하고, 중국에서 도자기를 가져오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온 집을 꾸미고, 옷을 화려하게 치장해서 입고 말이다.
그러니 세상이 너무나 퇴폐적이고 물질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사회가 계속해서 이렇게 되어서는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고,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니, 그러니 다시 한번 더 과학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과학이 분명히 진리가 아닌데, 도대체 진리행세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과학은 "왜 사는가?" 라는 것을 묻지 않는데, 그런 진리와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돈을 잘 버는가?" 라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진리가 말이다.
◈ 참된 앎이란? - 후설은 '의식'으로 !!
그것은 바로 칸트 이후에 인식론을 통해서 진리를 규명하는 것인데, 존재론을 통해서 진리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즉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 "참된 앎이란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어떤 것을 아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든 무엇을 알든 간에, 도대체 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후설은 그것을 '의식'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
하지만 과학에 있어서는 자기들이 "2000M를 팠다", 혹은 "3000M를 팠다" 라고 주장을 하면서 새로운 기술공법을 동원하고 난리를 피우는데, 1800년대 중반에 가면 왜 '노벨' 이란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가 무엇을 발명했는가? 다이너마이트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필요한가? 굴을 파고 땅을 파는데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이 다이너마이트를 합리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수십 수백 번의 실험을 무턱대고 하다가 뭔가 하나 제대로 걸렸다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것은 결과적이지, 이렇게 공식대로 하면 뭔가가 나온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실험을 해보다가 안 되는 것은 치우고 되는 것만 골라서, 그것을 발전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 과학 - '대상' 밖에 난 몰라 !!
과학은 이렇게 대상밖에 모르는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이너마이트보다 강력한 폭탄을 만들고 싶다", 혹은 "자전거보다 더 빠른 운송기구를 만들고 싶다", "증기를 이용해서 배를 만들면 어떨까?" 라는, 그런 목적만이 있을 뿐이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생활에 편리하고 말이다.
인간의 대상을 향한 지향성 - 의식 !!
그러니 "노를 젓는 배에서 왜 증기로 가는 배를 만들려고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즉 과학을 왜 그렇게 하고자 하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 후설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어떤 대상을 지향하는 '지향성' 인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식' 이라는 것이다.
◈ Noema or Noesis !!
이런 의식을 '노에마(Noema)', 혹은 '노에시스(Noesis)' 라고 하는데, 후설이 헬라어를 동원해서 만든 용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진리이다, 진리가 아니다, 존재이다, 존재가 아니다" 라는 판단을 모두 중지하고, 이것을 '포카'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정말 남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예를 들어서, "저것이 꽃나무이다" 라고 했을 때, 그 꽃나무를 지향하는, 즉 그 꽃나무를 바라볼 때 '노에마', 혹은 '노에시스' 라는, 그런 의식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후설은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외가 없이 무엇이든지 다 그러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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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에마 [Noema] - E. 후설의 현상학에서 노에시스에 대해 의식 내면에서의 객관적 측면. 노에마적 내실(內實)이라고도 한다. 의식의 대상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은 이것이 결코 초월적 존재가 아닌, 지향적(志向的) 객관, 지향적 대상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노에시스 ·노에마는 의식의 가장 구체적인 상관자(相關者)이며, 노에시스는 반드시 노에마를 갖고 노에마는 반드시 노에시스에 의해 사유(思惟)된다. 노에마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층으로 이루어진다. 곧 노에마의 핵심은 대상 그 자체를 지시하고 대표하는 노에마적 의미이며, 노에마적 대상 자체, 노에마적 대상 ×라고 부른다. ×란 불가지(不可知)의 실재의 뜻이 아니라 노에마의 중심적 결합점의 뜻이다. 이 불변적 핵심 주위에 변화적 층이 모인다. 완전한 노에마는 ‘그것의 규정방법을 포함해서 본 대상’이라고 한다. 노에마는 초월적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내재적이며 동시에 실재가 아닌 점에서 노에시스와 구별된다. 그것은 관념적인, 구체적으로는 의미적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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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러한 후설이 주장한 '현상학'에 대해서 반발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존재가 무엇인가?" 라고 했는데, 그러나 그렇게 되면 존재는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마는데, 그러므로 "존재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은 의식뿐이라는 것이다.
◈ '의식'이 먼저이고 '나'는 하나의 대상 !!
그러니 "왜 묻는가?" 라는 것은 의식자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인데, 그러니 "나는 왜 의식하는가?" 라는 질문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라는 것을 집어넣으면 안 되는데, 즉 '의식'이 먼저이고 '나는' 이라는 것은 하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나는 누구이지?" 라고 할 때, "나는 목사이다", 혹은 "나는 의사이다" 라고 할 때, 그렇게 목사이고 의사라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진리가 무엇인고니, "내가 누구인가?" 라고 묻는 것은 '의식' 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이 그렇게 묻는 것이라는 말이다.
◈ 현상학 - 확실한 것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의식뿐 !!
그렇게 '의식'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데, 물론 그 지향성이 처음에는 다른 것을 질문하다가, 즉 "꽃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서 나중에는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꽃'이든, '나'이든 간에, 그것이 무엇을 묻는지 간에, 확실한 것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의식뿐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후설의 '현상학' 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해답을 얻고자 하는데, 기름이 떨어지면 기름을 더 넣어야 하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진짜로 질문해야하는 것은, 그렇게 "기름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누가 물었는가?" 라는 것을 물어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식이 기름이 떨어진 것을 아는데, 그래서 자기가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집에서 전화가 오기를 아이가 아프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름을 넣는 것보다 먼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이다.
◈ '나' 라는 의식이 대댕키는 대로
후설이 말하기를, 기존철학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어떻게 아는가?" 라고 질문하는 것인데, "나는 누구이며, 나는 왜 살며,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자체를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그렇게 없애고 나서, 그렇게 묻고 있는 '나' 라는 의식이 그냥 마주치는 대로, 갱상도 말로 대댕키는(?) 대로, 그렇게 묻는다는 것이다. 노에시스가 노에마를 하는 하나의 지향성, 즉 방향성인데,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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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댕키는 - '들키는' 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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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과학기술이 국가경제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런 단순한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옛날에는 과학자들이 엄청 가난했는데, 요즘 발명가들이 가난하듯이 말이다. 돈을 벌지 못한다고 마누라에게 이혼을 당하고 말이다.
◈ 불쌍한 라부아지에 !!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발견했지만 자기에는 돌아오는 것도 없었는데, 사실 그 산소도 우연히 발견했는데, 물론 나중에 산소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산소를 발견하도록 그렇게 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대상을 향한 '나의 의식' 뿐이라는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발견했다기보다는 산소의 정체를 규명하고 최초로 산소를 명명한 화학자로 알려짐)
바로 이러한 주장을 후설의 제자가 하이데거인데, 후설은 존재문제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서 '치워버려라' 라고 했는데, 즉 존재가 무엇인지, 신이 무엇인지, 그 자체를 치워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고 의식만 생각하라는 말이다.
◈ 진정한 존재는 현상으로서 비로소 밝혀진다 !!
여기서 하이데거가 엄청난 힌트를 얻어서, "야, 저거다. 존재를 치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철학이 '존재란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존재중심으로 왔던 것을, 이제 후설의 현상학에 의해서 폐기처분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존재는 현상으로서 비로소 밝혀진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승인 후설은 "존재, 그런 것을 다 치워라" 라고 했는데, 그의 제자인 하이데거는 그런 방식으로 제대로 된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이데거가 어디에서 존재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했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시간' 인데, 즉 현상학적 시간에서 존재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현상학적 존재론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이데거가 시작하는 존재와 시간에서 나온 시간은 현상학적 시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현상학적 시간이 존재론과 합쳐져서 하이데거의 철학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 하이데가 말하는 현상학적 시간론은?
그러니 우리가 하이데거의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면 먼저 이 현상학적 시간론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거기에 앞서 하나님에게 영향을 준 후설이 말하는 현상학적 시간은 어떤 것이지, 이제 그것부터 먼저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론부터 따져보면, 그의 시간은 무엇인고 하니까, 사물의 운동이 곧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물의 변화이고 운동인데, 이렇게 사물의 변화운동에서 시간이 나오는데, 그러므로 사물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즉 물질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요즘 말하는 시계개념(?)으로 준 것이 4째 날에 허락한 해와 달과 별인데, 그때부터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창세기 1장 14절을 한번 살펴보자.
(창 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창 1: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창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창 1: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창 1:18)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 '벌써 있음'과 '아직 있지 않음' !!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사물이 없으면 시간이 없는데, 즉 사물은 시간을 이루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구를 해보니까, '벌써 있음'과 '아직 있지 않음', 즉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항상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론은 무엇인고 하니, 현재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쪼개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벌써 있네" 라는 말은 무엇인고 하니까, 과거부터 있어온 것인데, 즉 "벌써 있네" 라는 것은 현재인 동시에 과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직 있지 않다" 라는 것은, 그것은 현재를 기초로 해서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현재가 없는 미래는 없으니 말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시간은 현재밖에 없다 !!
제가 하는 말이 맞지요? "그러면 목사님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이야기할 때 현재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몇 시 입니까?" 라고 묻는 것은, 현재를 위한 것이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시간이라는 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현재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시간이 있는 것은 '벌써 있음'과 '아직 있지 않음'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시간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사물의 변화하는 운동으로 아는데, 그런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이,
◈ 내가 한 이틀쯤 갇혀 있었나?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가 나서 두뇌에 충격을 받아서 누워 있다가 나중에, "어, 여기가 어디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일주일인가 이주일인가 있다가 구조된 양반이 뭐라고 했는가? "한 이틀쯤 갇혀 있었나?"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생체리듬은 이틀 정도 굶으면 일어나는 현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밖에는 이미 이주일이 넘게 지났다는 말이다.
왜 그때 그렇게 해서 아가씨와 한 남자가, 그렇게 두 명이 구출이 되고 했는데, 혹시 기억이 나세요? 그래서 시간을 새롭게 고치자고 하는 주장도 나왔는데, 인간의 몸이 느끼는 시간과 시계가 계산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차이가 많이 나니 말이다.
그러니 이 시간이라는 것은 4계절을 가지고 은연중에 습관화된 것인데, 그런데 백화점이 무너져서 그 밑에 깔려서 그런 변화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자기 생체리듬에 의한 시계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겨우 이틀인가 삼일 정도만 지만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묻는다고 하는 것은, 현재에서 '벌써 있음'과 '아직 있지 않음'의 두 가지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라고 하는 것은 없는데, 과거와 미래를 나눌 때 발생하는 그 시점이 바로 현재라는 말이다.
◈ 어거스틴 - 인간의 영혼이 바로 시간 !!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즉 어거스틴의 시간관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사물의 운동을 없애버리는 것인데, 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 운동을 하던 말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이 바로 시간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어거스틴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어거스틴은 인간의 영혼을 신의 형상으로 보았는데, 그러면 신 안에서는 시간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것이다. 신은 알파와 오메가인데 무슨 시간이 있느냐는 것이다. 신의 세계는 묵시의 세계이니 말이다.
◈ 인간은 시간전체를 보는 눈이 !!
이렇게 어거스틴은 신의 형상이니까, 인간 속에 약간이라도 신의 형상이 남아있는데, 이렇게 영혼이 신의 형상이라는 증거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이 시간전체를 자기가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과거를 느끼며, 물론 지금은 현재인데, 미래를 느낀다고 하는 것, 그러니 마치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보는 관점이, 우리 인간 속에도 '시간의식' 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들여다 볼 수 있으니,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영혼이 그렇게 느낄 뿐이란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영혼 속에서 자기가 그렇게 느끼는 것에 따르는 것이지, 그러니 시간이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고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이 있는 이상, 즉 영혼이 인간의 모든 행동의 주인공이 된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 사랑은 영혼에 속한 문제 !!
예를 들어서, '사랑' 이라고 할 때, 이 사랑을 만질 수 없다고 해서 없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했을 깨, "아니, 사랑이란 것이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가?"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영혼에 속한 문제이니 말이다. 그렇게 영혼에 관한 문제라면, "실제로 사랑은 없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것이니 치워라"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신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면, 그 신의 사랑을 물건이 아니라고 해서 내동댕이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이러한 난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신이 주신 것이기,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는 사랑도 있지만 역시 시간도 있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 써라", 혹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라고 하는 시간을 이야기하는 성경말씀이 그만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말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에 아리스토텔레스와 어거스틴의 차이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하기를, "시간을 느끼는 것은 사물의 운동이다" 라고 하고, 어거스틴은 "그것이 아니다. 시간은 영혼에 속한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도 영혼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신의 형상을 입은 영혼이 보는 것이기에 영혼은 귀한 것이고, 그것을 놓쳐버리면 신과 접촉하는 것을 놓치는 것이니, 이 시간론을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물질보다도 감각보다도 영혼 속에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후설 -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평적인 시간론을 수직적으로 !!
그런데 이 후설의 시간론은 무엇인고 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평적인 시간론을 수직적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론에는 수평적 시간론이 있고, 그리고 수직적 시간론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후설의 수직적 시간론이 어떤 것인고 하니,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골때리는 삼각형 A-B-C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삼각형이 있는데, 여기가 A이고, 또 요기가 B인데, 이것이 현상학인데, 이 현상은 무엇만 생각하는고 하니, 아까 이야기를 했는데, 위의 사물은 모조리 대상이 되고, 즉 노에마가 되고, 그리고 무엇의 흐름인고 하니, 의식인 노에시스의 흐름인데, 그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고 하니,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있다는 것이다.
◈ 테테테테텔미 !!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가? 예를 들어, 어떤 음악이 들린다고 할 때, 지금 라디오에서 "테테테테텔미" 라는 음악이 나오는데, 요즘 인기가 엄청난 '텔미'가 말이다. 이렇게 '텔미' 라는 음악이 흘러나오다가 이 음악이 끝이 났다면, 그렇다면 '텔미' 라는 노래는 과거의 음(音)인데, 즉 이 음악이 A에서 "테테테테텔미" 라고 하다가 B에서 끝이 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음악소리는 끝이 났으니 음은 없는데, 그렇게 되면 음이 없어져야하는데, 그런데 방금 자기가 "테테테테텔미" 라는 음악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텔미' 라는 노래는 드디어 끝이 났는데, 그런데 2초 뒤에 다른 방송국에서 또 다시 이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이것이 현상학이니까 인간의 의식을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의식 속에서 시간이 하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대상을 '노에마' 라고 하고, 의식을 '노에시스' 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서, 이 '노에시스' 라는 의식이 '노에마' 라고 하는 시간을 어떻게 분석하느냐는 것이다.
◈ 과거는 없고, 과거의 기억만이 !!
그러므로 이제 과거는 없는데, 그렇게 해서 과거는 없지만 과거의 기억은 남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기억은 과거의 것인가? 아니면 지금 현재의 의식인가? 아까 이야기한 지금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텔미' 라는 노래는 지금의 의식인가? 아니면 과거의 의식인가? 물론 정답은 당연히 둘 중에 하나인데, 그것은 바로 지금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변형' 이라고 하는데, 즉 과거의 것을 현재가 변형해서 '나'의 기억의 창고에다 집어넣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과거는 다행스럽게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말이다. 자기가 과거에 나쁜 짓을 하든 무엇을 하든, 그런 과거는 다 없다는 것이다.
◈ 과거의 복희는 없다 !!
예를 들어서, 자기가 과거에 사귀는 여자가 있었다면, 그러나 과거에 사귀던지 말았던지 지금은 현재인데, 그래서 그런 여자는 없는데, 그런데 길에 만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 저 여자는 과거에 내가 사귀었던 여자인데" 라고 하면,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지금 자기가 조작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현상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기의 의식이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서 과거를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에 맞게 조작하고 변형시킨 것이란 말이다.
◈ 과거 - 현재의 의식이 조작한 것 !!
그러므로 A는 A'가 되는데, 이럴 때 이것을 기억이라고 하는데, A에서 B로 올 때는 그것이 수평적으로 흐르는데, 그러나 그것이 시간을 하나의 노에마, 즉 대상으로 보았을 때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B 밑에는 A'가 있는데, 이 A' 라고 하는 것은, 즉 과거는 없는 것이니, 다만 과거의 기억을 근거로 해서 현재가 조작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여기에 이 지점을 C 라고 한다면, 이제는 '텔미' 라는 노래가 끝나고 비틀즈의 '렛잇비'가 흘러나오다가 그것도 끝이 났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 '텔미' 라는 노래가 A에서 시작해서 B로 끝이 났는데, 그런데 그 노래를 전부 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테테테테텔미" 라는 부분만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분명히 과거에 노래 한 곡을 다 들었는데, 그런데 B 부분에 와서 기억나는 것은 "테테테테텔미" 라는 소절만 기억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이 C 지점에 나와서는 "테테테테" 라는 부분만이 기억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B는 B'가 되어서 C 밑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A는 A2'가 되어서 C 밑에 들어가고 말이다.
◈ 현상학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시간의 실체를 !!
그렇게 되면 시간이라는 것은, 수평적인 시간이 있는 반면에 수직적으로 계속해서 누적되는 시간이 있는데, 이 시간은 사실은 C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서 계속해서 변형하고 조작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실체라는 말이다. 현상학이 아니라면 이런 것을 누가 밝혀내었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냥 과거의 짜투리만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현재의 의식이 조작한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텔미' 라는 것을 무심코 들으면, "아하, 저 노래이구나" 라고 하지만, 만약에 그것을 부른 소녀들에 대해서 나쁜 감정이 있다면, 물론 그런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 노래를 거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의식이 섞이니 말이다.
◈ 만약 원더걸스에게 실연을 당했다면?
이 '텔미'를 부른 가수가 뭐지요? 아, 원더걸스라구요? 원더우먼이 더 좋은데, 아무튼 이 원더걸스에 대해서 특별히 나쁜 감정이 없으니까 그렇지, 만약 그 원더걸스의 삼촌에게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면 이 노래는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현상학적으로 보게 보면, 이 현상학 이후에 프로이드가 나오게 되는데, 아무튼 현상학적으로 보게 보면 인간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전까지는 "시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기억하는 것이고 어쩌고" 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의식이 자기 마음대로, 프로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 꼴리는 대로" 인데, 그렇게 조작하고 변형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수 천 가지의 의식이 나오는데, 왜 그런고 하니, 노에마가 수 천 가지가 넘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본 대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 이근호가 동화사가 주지도 아닌데 !!
이렇게 철학자들이 예리한데, 이근호하고 여기 있는 '동화사' 라는 절의 주지 선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근호가 동화사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화사의 신도라면 어떻겠는가? 서로 싸우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부터 계속 다녀온 그쪽 환경의 노에마들이 의식의 흐름을 이루고, 우리는 교회에 다닌 것들이 의식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똑같은 2007년을 살아도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쪼가리들은 다들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설은 주장하기를, 그 '존재' 라는 것은 아예 찾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현상학적으로 단지 남는 것은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의식과 그 지향성, 그것으로 끝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 많은 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설은 존재를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PD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이데거가 뛰어난 최고의 철학자인데, 분명히 안 되는데 되게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끄집어내는지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말이다.
◈ 어이쿠, 또 삼각형 !!
(다시 삼각형으로 와서) 아무튼 이렇게 여기에 C가 있는데, 이 C 밑에 뭐가 있는고 하니, 이것이 중요한데, 이 과거가 옳은 것이 아니라, 현재가 조작한 과거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과거도 아닌데, 현재의 과거지향인데, 이것을 '시간제한'(?)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 B 라는 것이 있기 전에 B-1이 있어서 A는 B를 기대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계속 강조되는 '벌써 있음'과 '아직 있지 않음' !!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벌써 있음'과 '아직 있지 않음' 인데, 여기서 '아직 있지 않음'이 미래인데,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현재밖에 없지만 말이다. 이 '아직 있지 않음'이 B 인데, 그러니 A 라는 지점에서 B 라는 지점의 '아직 있지 않음'이 생기는데, 그렇게 B 라는 지점에 도착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렇게 몸을 흔들면서 "테테테텔미" 라고 노래를 하루 종일 부르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저 노래는 곧 끝나고, 다른 노래가 곧 나올 걸" 이라고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아직 있지 않음'을 기대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것이, 사람은 그렇게 기대하게 되어있는데, 즉 '벌써 있음'은 확인하게 되어있고, '아직 없음'은 기대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시간론이 상당히 중요한 것이, 이것이 나중에 하이데거에 가면 그대로 나오는데, 그러니 이 B1이 A 위에 있다가 나중에는 B1이 B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B'로 가고 말이다. 그러면 A에는 B만 있는 것이 아니라, C1도 있고, 또 B 위에는 C-1이 있고, 또 A 위에는 는 C-2가 있는데, 그러니까 이것이 B에서는 C-1이 되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사선으로 죽죽 내려가는데, 이것이 바로 후설이 말한 시간론이란 말이다. (아휴, 두통, 치통, 생리통, ㅋㅋ)
◈ 후설 - 모든 시간은 현재의 '내'가 조작해서 !!
이 후설의 시간론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시간은 누가 조작하는고 하니, 현재의 '내'가 하는데, 그렇게 해서 없는 과거가 '내' 의식 속에서는 있는 과거가 되고, 없는 미래가 미리 앞당겨져서 있는 미래가 되는데, 즉 성취된 미래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론이라는 것이다.
후설은 여기서 존재론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하이데거는 천재적인 기질을 가지고 존재론을 끄집어내는데, 하이데거는 도대체 "시간이 어디 있는가?" 라고 묻는데, 그런데 후설에 의하면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물음만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전체가 노에마가 되는데, 즉 하나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즉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고 의식만 있다는 것이다.
◈ 시간과 존재는, 의식과 상호 소통을 한다 !!
그런데 하이데거에 있어서 시간이 대상이 되는 것은, 다른 것은 다 하나의 대상이 되는데, 이 시간과 존재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대상이 될 수가 없고, 의식과 상호 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재에도 나오는데, 질문을 하는 그 질문자는, 그 대답하는 것이 이미 질문자에게 유도하는 식으로 묻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그 물음의 원천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태' 혹은 '사건' 이라는 말이다.
"왜 갑자기 시간에 대해서 묻는가?" 라고 하이데거는 물어보는데, 왜냐하면, "나는 이러한 아가씨가 참 좋다" 라는 것은 장가갈 때가 되었다는 말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후설은 존재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존재가 아닌 존재자인데, 이렇게 존재가 빚어낸 존재자는 그 배후에 존재가 만들어내는 사건들에 의해서 현상학적인 질문과 답변을 서로서로 주고받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에게 다른 노에마가 즉 대상이 많이 있는데, 여기에 의자도 있고 또 마이크도 이렇게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저 꽃에 대해서, 그 꽃을 대상으로 삼아서, "저 꽃은 무엇일까?" 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 울렁거리는 생명과 그 밑바탕인 생명 !!
그러니 그런 의식을, 즉 노에시스를 만들어내게 만드는 보다 근원적인 사태, 혹은 사건, 즉 보다 바탕이 되는 파도치는 울렁증(?), 존재의 활기참을 바로 '생명'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생겨나는 기운들 말이다. 바로 그런 생기를 유발시키는 존재자를 존재케 하는, 생기고 또 생기고 생기게 하는 바탕을 두고서 '존재'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시간으로 존재를 안다 !!
그렇다면 존재가 존재자로 생겨나게 하는 그 원동력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하이데거에게 묻는다면, 즉 "존재자의 배후에 존재가 있다는 것을 하이데거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라고 한다면, 그러면 여기 존재자를 인간으로 본다면, 그러면 "인간 배후에 또 인간을 만들게 한 그 무엇이 있다고 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라고 할 때, 하이데거는 그것을 바로 '시간'으로 안다는 것이다.
지금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니까 정신을 좀 바짝 차리시고, 아무튼 이렇게 시간이 등장할 때 시간은 어디 있는고 하니, 이 존재자가 퍼덕거릴 때 존재자가 존재로 인하여 생기가 나와서 존재자가 존재가 될 때, 즉 그렇게 퍼덕거릴 때 함께 나오는 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시간론' 인데, 이렇게 되면 "시간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자가 무엇인가?" 라고 해야 하는데, 그때 시간을 가지고서 존재자를 설명해서, 그렇게 시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 존재가 존재자를 때, 시간과 함께 등장 !!
그런데 하이데거 이전에는 무엇인고 하니, "시간이 무엇인가?", "시간이 어떻게 나오는가?" 라고, 이렇게 시간을 따로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어떻게 등장하느냐에 따라서 시간을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은 없는 것인데, 그러면 시간은 언제 생기는가? 모든 존재, 즉 모든 이런 물건들인데, 이 존재가 존재자를 만들기 위해서 생기가 나올 때, 그때 시간과 함께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와 시간을 따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어떤 분이 오는데, 왜냐하면 시간은 존재자마다 각자 다 다르니 말이다. 이렇게 어떤 존재가 등장할 때 시간을 몰고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몰고 오는데, 그러면 인간은 존재자이니 이 인간을 예로 들면, 인간은 시간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존재가 아닌 존재자이니 말이다. 지금 존재는 어디에 있는지, 사실 어디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시간이 나오는 것을 봐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배후에 존재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위한 그 흔적이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간이 아니면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시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서 이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 - 경이로움이 아닌 절박함으로 !!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에 어떻게 아는가? 인간은 자기가 죽는 것을 아는데, 철학에 있어서 하이데거 이전까지는 철학을 할 때 놀라움과 경이로움인데, 칸트의 경우에도 말이다. 즉 "야, 이런 진리가 있었구나" 라고 나오지만, 그러나 하이데거는 사람이 진리를 알 때 '절박함' 인데, 칼야스퍼스의 경우에는 이것을 '위기'로 보는데, 마치 사도행전 2장의 '어찌할고' 라는 것과 비슷한데 말이다.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죽음이란, 그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의 그 발걸음 자체 !!
이 하이데거를 보면 마치 성경신학자 같은데, 즉 죽음이라는 그 절박함 속에서 과감하게 죽음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죽음을 향하여 책임감 있게 달려가는 것, 존재자에게 추진하는 것, 이것을 던진다고 해서 '귀투(歸投)'(?)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죽음을 알고 그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의 그 발걸음 자체를 '미래'로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벌써 있네" 라고 하는 과거에 대해서, 즉 이렇게 벌써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책임을 느낀다는 것인데, 존재의 책임을 말이다. 즉 "벌써 있네"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는 '터잡음'(da sein) 인데, 즉 터가 잡혔다는 것이다.
◈ 만약 시간이 없다면, 그러면 인간은 왜 죽는가?
지금 하이데거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두고서, "치워라. 무슨 그런 쓸데없는 주장을 하는가?" 라고 한다면, 아마 하이데거는 그 양반에 이런 질문을 하지 싶은데, "당신의 주장처럼 지금의 이 터잡힘이, 즉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만약 시간이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죽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누가 만들었는가?", "누가 있게 했는가?" 라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이라면 계속 살고 싶은 것이지, 자기는 그렇게 살고 싶은데 왜 늙어 죽느냐는 것이다.
◈ 수평선도 지평선도 아닌, '시평선(時平線)' !!
그러니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고 하는 사실을 미래로 보고, 그리고 "벌써 있다" 라고 하는 것을 과거로 본다면, 현재라는 것은 "터잡혀 있음" 이라는 말이다. 즉, 이렇게 "벌써 있음" 이란 것을 과거로 보고, "터잡혀 있음"을 현재로 보고, 또 "언젠가 죽음" 이란 것을 미래로 본다면, 인간에게는 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원래 시간은 없는데 다만 인간의 존재를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간적인 설명만 있을 뿐이란 말이다. 이것을 어려운 개념으로 '시평선(時平線)'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까 후설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의식만 달랑 남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 의식이 시간을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조차도 이 의식보다 못한 죽는 순간이 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죽는 순간이 있으니까, 그렇게 영원한 의식이 죽어가는 의식이라면, 이 죽어가는 의식인 미래가 의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그런 의식을 하고 있는 존재로서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있다가 없어지게 힘은 어디에서? - 존재 !!
마치 해가 떴다가 중천에 있다가 지는 것처럼, 여기서 해가 떠는 것은 "벌써 있음"이고,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이 "터잡혀 있음"이고, 그리고 해가 지는 것을 "언젠가 죽음"으로 본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있다가 없어지는, 그것을 하게 하는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 힘이 두고서 바로 '존재'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인데, 각자 각자의 존재가 이러한 현상학적인 시간관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관과 지금 우리의 시간관이 같은가? 당연히 다른데, 왜냐하면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실 때의 시간하고 지금 우리의 시간하고는 어떠한가? 역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존재에서의 시간관에 얽매여야 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존재자들이 서로 배려해준다고 묶어준 존재자의 세계, 이것을 '생활세계'(?)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은 존재자의 세계에 푹 빠져서 제대로 된, 참된 존재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불만을 터트리기를 말이다.
◈ 12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
다시 말해서, 이렇게 각자 각자 시간이 서로 다른데, 이렇게 다른 것을 서로가 배려해서 시간을 맞춘다는 것이다. "우리 12시에 만나자"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시간이 남아돌아서 일찍 온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겨우 온 사람도 있고, 또 10시를 넘어서 온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각한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는데,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각자 각자 시간이 다 다른데,
◈ 존재자인 주제에 존재의 시간과 비교를 하니 !!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기를, 진짜로 잘못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존재자들끼리 비교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비교하니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시간은 무엇인고 하니, 창세 전에 이미 시작이고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데, 즉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시간이란?
예수님의 시간이란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가 과거의 메시야의 약속이고, 두 번째가 십자가의 죽으심이고, 그리고 세 번째가 미래가 예수님 자신의 오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다 나오는데,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 않는가?
예를 들어서, 애인과 약속이 있으면 애인을 만나고 싶지 누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겠는가? "주여, 어서 오세요" 라고 하면서 애인을 만나느냐는 말이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것은 누구를 만날 때인가? 예수님이 아니고 자기 애인인데, 그런데 이 애인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존재이지만 말이다. 존재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 바로 존재자라는 말이다.
◈ 불트만과 하이데거 !!
그런데 애인은 무엇인가? 존재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자가 존재자를 만날 때는 무엇만 배려하면 되는고 하니, 존재의 시간이 아닌, 존재자의 시간인 상대방의 시간만 배려하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바로 그 따위로 살아가니, 즉 자기의 존재도 모르면서 살아간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이데거가 주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불트만이 왜 하이데거에 심취했는지 이해가 되는데, 불트만이 보기에 하이데거 주장은 성경신학자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사람은 왜 생겨났으며, 왜 죽으며" 라는 문제를 이야기하니 말이다.
그러니 이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은 "인간은 왜 죽는가?"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인데, 그래서 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르를 존경하는데, 사람이 백날 "철학이 무엇이며", "우주가 무엇이며", "과학을 발전시켜야 하는데" 라고 해도,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서 그 따위로 생각하고 설친 놈이 어디 있느냐고 찾아보면, 그만 죽고 없다는 것이다.
◈ 존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인간인 존재자가 제 아무리 까불고 해도, 우리를 죽게 하는 그 존재에게는 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가 "아니, 목사님은 자꾸만 존재, 존재라고 하는데, 그 존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없는 것을 만들어서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 까불지마 - 시간이 왜 있는데 !!
만약 그렇게 하이데거에게 질문을 한다면, 하이데거는 뭐라고 답변을 하겠는가? "이 양반아, 시간이 왜 있는데, 이렇게 시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존재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존재도 있으니, 그래서 시간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그 유명한 책이름이 무엇인고 하니까, '존재와 시간'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기존의 시간들은 엉터리라는 것인데, 왜 엉터리인고 하니, 존재자들 자기들끼리 입맞추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배려' 라고 하는데, 존재자들 자기들끼리 입맞추기를 해서 진짜 자기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으니, 이번에 대선에 나가서 입도 좀 맞추고 잘해보자. BBK인지, BBQ인지도 좀 알아서 처리하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아무리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고, 의사들이 병을 제 아무리 잘 고친다고 해도, 제일 중요한 것은 놓치고 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 자기가 왜 죽는지, 정작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 존재의 '내어줌'과 '내뺌' !!
아무튼 존재는 존재자인 자기가 밝히려고 하는데, 그것을 '내어줌' 이라고 이야기하고, 이렇게 존재는 '내어줌' 인 동시에 '내뺌' 이라는 것이다. 존재가 자기를 내뺀다는 말이다. 용어도 참 거시기(?) 한데, 이것을 '현존'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존재의 현존이 무슨 말인고 하니, 왜 후설의 현상학에서 수평적인 시간이 있지요? 그것을 두고서 '현존' 이라 하고, 그리고 수직적인 것을 현상학적 존재의 시간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가 자기를 내어줄 때 그것을 수평적이라고 하고, 즉 사태이고 사건인데, 그러한 사태이기 때문에 우발성인데, 이렇게 분명히 우발성인데, 여기서 하이데거 철학의 어려운 점이 무엇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아기가 태어날 때 부모가 예상을 하는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부모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지, 똑같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 시간의 우발성이 아닌 역운성(歷運性) !!
그래서 우발성인데, 그런데 이것이 존재의 시간에 와서는 우발성이 아니라 운명성인데, 이것을 어려운 말로 '역운성(歷運性)' 이라고 하는데, 역사성이 아니고 말이다. 굳이 풀이하면 역사의 운명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게 숙명적이라는 것이다.
◈ 뭔가 흔적을 남기고 숨는 존재자 !!
이렇게 존재는 내어주고 난 뒤에 그것은 은폐해버리는데, 존재자를 '팍'하고 엎질러놓고는(?) 존재는 숨어버린다는 것이다. 다만 흔적은 남기는데, 그 흔적이 바로 영원하지 못한, 즉 존재자는 언젠가는 죽는다고 하는 사실이라는 말이다. 그것만 남기고서 존재는 그만 숨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내뺀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기를 '발현'(?) 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계시' 라는 것이다.
◈ 존재자의 평균율이 과연 존재인가?
이렇게 계속해서 존재는 숨어있으니 존재자는 존재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존재자들끼리 서로 협상하고 타협하고 배려하고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존재는 실제로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를 평균을 내어서, 즉 존재자들의 평균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간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요소를 모두 더해서 평균을 내면 그것이 인간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이데거가 보기에 참으로 기가 찬데, 아무리 그렇게 해도 모두가 다 죽으니 말이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미래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무슨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존재의 특징이 무엇인가? 여기서 성경 이사야 45장 15절을 보자.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 숨어 계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이렇게 숨어 계시는데, 만약에 드러나면 우상이 되는데, 즉 존재자가 되면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이데거가 보기에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면 그 신은 다 우상이라는 말이다. 무슨 신을 믿어야 하는고 하니, 존재자에게 들키지 않는 신이라야 진짜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숨어있는 신이라야 진짜 신이니, 드러나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 우발성인가? 숙명적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숨어있는 신이 드러날 때는 어떻게 드러나는고 하니, '우발성'으로 드러나는데, 이런 것이 어려운 점인데, 이렇게 우발성으로 드러나는데, 그런데 실제로는, 즉 존재의 시간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우발성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드러나야만 하는 '숙명적'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선택론이고, 그렇게 예정된 대로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존재자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파편을 쥐고 있기 때문에, "어, 내 동생은 내가 생각했던 동생이 아니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막 태어난 자기 동생을 보고 말이다. 그래서 "엄마 엄마, 내 동생은 내가 예상한 것과 좀 달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예상했다는 것은 그 존재자에게서 나오는데, 그러니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존재와 존재자 !!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이란 존재자는 시간을 뿜어내는데, 맞지요? 왜 아까 후설에서 이야기했잖아요? 밑으로 이렇게 내려가는 그림을 그 그림을 다시 그려볼까요? (아뇨, 그만 하세요. 머리 아파요. ㅋㅋ) 존재자는 무엇을 한다구요? 시간을 뿜어내는데, 그러니 이것이 존재자의 시간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존재의 시간은 존재자의 덩어리 자체가 시간으로 움직이면서 펄럭이면서 움직일 때, 이것이 존재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아시겠어요?
예를 들어서 "아, 시간이 진짜 안 가네. 왜 이렇게 안 오지?" 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시간이 아니라, 아까도 말했지만 인간의 모든 의식은 모두들 각자가 다르다고 말이다. 자기에게 누적된 것이 말이다. "테테테테텔미" 라는 노래에 환장한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만들어내는데, 그 시간은 결국 어떻게 끝나는고 하니, 미래에 가면 죽음으로 모두가 다 없어질, 헛방 같은 시간이니, 그러니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인간들아, 제발 존재와 연관이 되어야지, 왜 존재자들끼리 노는가? 소위 철학을 한다는 놈들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칸트와 헤겔도 전부 다 쳐버리는데, 헤겔이 그렇게 연구하고 주장한 것도, 이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기껏해야 존재자로서 생각한 절대이성이고, 그렇게 해서 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존재가 아닌 존재자로서 말이다. 이 생활세계에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