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02b 울산강의-창세기 33장
20080502b 울산강의-창세기 33장
이름 : 한윤범(IP:59.6.189.184)
20080502b 울산강의-창세기 33장
(강의:이근호 목사)
정식으로 태어났든 그러니까 정실부인 서열이 종의 자식은 제일 낮고, 그 다음에 낮은 것이 레아, 그리고 라헬과 그 자식은 서열이 제일 높아요. 그렇게 해서 라헬과 이쪽은 축복 쪽에 가깝고 그리고 종의 자식들은 저주 쪽에 가까운. 이 말은 뭐냐? 종은 어떤 경우라도 이미 정실부인의 자식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종의 자식은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정실부인들의 자식에 딸려가는 종속되는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정식 자식과 종을 철저하게 분리함으로 말미암아 뭘 표현하느냐 하면, 저주받는 쪽과 그리고 축복받는 쪽을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그런 식으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자식이 되어야지 종이 되면 안 된다 하는 그런 것을 이걸 보여주지요. 이것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쭉 나가는데. 한 가지 이건 다 아시니까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이건 지우고.
민수기 2장에 보면, 법궤를 할 때 위치가 나옵니다. 민수기 2장에 보면 법궤 이동할 때 제일 위에 북쪽, 동쪽, 남쪽, 서쪽에서 동서남북에서 여기에 열두 지파가 각 측면에 세 지파로 나누어서 법궤를 움직일 때 보좌해서 움직입니다. 어떤 식으로 배치가 되느냐 하면, 여기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유다 깃발 하에 잇사갈, 스불론 종속되고, 르우벤 깃발 하에 여기에 시므온과 그 다음에 갓이 종속 되고, 여기 서쪽에는 에브라임 깃발 하에 여기에 므낫세와 베냐민 지파가 종속 되고, 북쪽에서는 단 깃발 하에 아셀과 납달리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 열두 지파를 배치한 걸 ,두 가지 교체가 되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종의 자식이냐, 정실부인의 자식이냐로 나누고, 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레아 쪽이냐, 라헬 쪽이냐? 어느 쪽이냐? 레아는 라헬보다 못하거든요. 같은 시녀라도 레아 쪽에 속한 실바 쪽이냐, 여기는 빌하 쪽이냐? 여기에 따라서 다 배치가 이렇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 므낫세, 이런 것은 완전히 라헬 쪽 아닙니까? 에브라임은 요셉 지파거든요. 순수 정실 라헬 쪽이 서쪽을 다 차지해 버린 거예요. 잇사갈, 스불론 이것은 바로 레아 쪽에 속한 거고. 이거는 단 이라는 라헬 쪽에 있지만 다 종의 자식들. 여기는 레아와 종의 자식들 같이 섞여 있지요. 이런 식으로 자꾸 의식적으로 라헬 쪽이 정실이고, 레아는 아무래도 이거는 하나의 부록이다, 이거는 뒷전이다. 항상 배치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축복과 저주가 바뀌는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배치를 하는데.
에스겔 48장에 보면, 하나님이 마지막에 여호와 삼마 성전을 지을 때 새 성전에 열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문마다 이름이 다 하나 있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그 열두 개의 문이 에스겔 48장에서는 문이 하나님의 열두 지파로 돼있습니다. 지파로 배치하는데 마찬가지에요. 레아와 라헬이냐, 안 그러면 종이냐, 정실부인 자식이냐? 그런 걸로 나누고 있어요.
하지만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열두 지파의 문이 열두 지파로 돼있지 않고, 열두 사도로 돼있습니다. 열두 예수님의 제자로 돼있습니다. 결국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야곱의 열두 자식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야곱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시고, 그건 어디 나오느냐? 요한복음 1장에 나오지요. 야곱 위에 인자가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한 것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하나의 그림자, 모형이죠. 실제는 뭐냐? 예수님의 머리 위에 인자가 오르락내리락함으로써 야곱조차도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모형물로써 사용되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그림자란 말에 그림자에 보면 기미나 주근깨가 그림자에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림자 자체는 형만 있지 세세한 표면에 이런 게 없어요. 그래서 그림자를 붙들면 오해할 소지가 많아요. 부흥사들 그리 하잖아요. 야곱을 봐라. 하나님께 갖다 바쳤잖아. 야곱이 복을 받았잖아. 바쳐야 복을 받지. 바로 야곱이 별미를 바쳤더니만 바로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축복을 해줬잖아. 우리는 별미를 바쳐야지.
이게 뭐예요? 하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되는데. 이건 그림 하나 그려야 돼. 말로 해서는 안 돼. 부흥사들 그 사람들 정말 사기꾼들이에요. 야곱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은 실제는 뭐냐? 그림자거든요. 그림자는 십자가의 그림자입니다. 야곱의 모든 행동을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려면 뭘 반드시 통과해야 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통과해서 이렇게 와야 돼요.
십자가에서 통과해서 이렇게 와버리면 야곱이 만약에 재산이 많았다 하면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이게 풀면 거꾸로 돼서 야곱이 재산이 많았으니까 복이다 이래 되지만, 그까짓 것 돈 없어도 복이다. 이래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십자가가 뭐냐 하면, 그림자 속에서 인간은 육신이니 때문에 죄로 죽어야 되고, 오직 살아있는 생명이 예수님 생명밖에 없다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안다 말이에요. 우리의 목숨은 그림자로 사용될 뿐이지 그 목숨은 중요한 목숨이 아니에요. 여기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그림자 역할 했을 뿐이지, 우리 생명을 없어질 생명이고 후패할 생명이고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죠. 그냥 십자가 복음을 사용하기 위해서 이런 걸 사용해서 하는 겁니다.
십자가 이후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로다?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이쪽 그림자, 이쪽 그림자라니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은 변동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십자가 이후에 증거하고, 이쪽은 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더라도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이미 죽어도 산 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아브라함은 누굴 기다렸습니까? 누굴 보기를 원했어요? 예수님 보기를 고대했다고 보고, 그 다음에 뭡니까? 기뻐했다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양 많고, 소떼 많은 걸 기뻐했습니까? 아닙니다. 양과 소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의 천국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거예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그런 거대한 멋진 세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양과 소가 주어진 겁니다.
양, 소 보고 하나님 믿은 게 아니에요. 그거 상관없이 아브라함은 만나고 기뻐한 겁니다. 그 만나고 기뻐했듯이 우리는 일어나는 일상의 일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구나, 생명 얻었구나 하는 그런 것을 증거하라고 우리는 십자가 뒤쪽의 그림자로써 우리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구약을 설명할 때 십자가를 통과해서 봐야 돼요. 그런데 십자가 통과 안 하고 봐버리면 어떤 거냐 하면, 야곱이 이렇게 해서 복 받았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면 복 받는다. 자꾸 복이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 없이 복이 와버렸어요. 이거는 뭘 모독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말라기에 뭐라 합니까? 십일조해라. 네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나 안 주시나 시험해보라 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걸 십자가를 통과시켜야 될 텐데 십자가 없이 그냥 무작정하니까 진짜 십일조 내면 창고 넘치도록 채우는 줄 알고 있어요.
참 이거는 제가 말은 웃으면서 하지만 울화통 터지는 겁니다. 람보가 와서 자동소총으로 작살내도 괜찮아요. 한국교회 완전히 두두두둑 갈겨도 괜찮아요. 말라기를 그렇게, 말라기 자체가 그림자입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뭐냐? 구약은 모든 것은 뭐고? 그림자요, 실체는 뭡니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가지고 뭘 보였습니까? 예수님의 몸 가지고 뭘 보여줬습니까? 그 몸은 네 죄 때문에 내가 죽는 게 이게 몸이라. 이걸 보여줬잖아요. 주님의 몸은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몸이다 이 말이죠.
안식일 그런 걸 율법을 도말해 찢어버려라. 그런 것은 다 그림자니라. 이제는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 몸이 뭐냐?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승리하셨느니라. 그 말은 십자가 믿으세요, 십자가대로 하시오가 아니고, 그 말은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뭡니까? 우리가 뭘 할 필요도 없이 하기도 전에 이미 창세전에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 받기로 작정돼있음을 차후적으로 통고받은 거예요. 통고받았다는 이 여유만만하기 때문에 우린 이런 것에 얽맬 필요 없단 말이에요. 율법에.
여러분 사시면서도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그런 사태를 잘 극복했더니만 구원받았다는 하는 그런 건 없어요. 그런 사태는 이미 일어난 상황을 그냥 추가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자 역할로써 그런 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니가 집구석에 이런 일이 있더라고 사랑은 변치 않는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온갖 집구석에 일 다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 집에도 많이 일어났어요. 개미가 얼마나 나오는지. 컴패트 붙였습니다. 붙여도 또 일어나요. 그런데 개미 나왔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 안 받습니까? 개미하고 구원하고 관계없잖아요. 관계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집에 개미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집에 개미가 나오는 이유를 복음적으로 설명하라. 정답은 ‘관계없음’입니다.
신학교 만들어서 강도사 시험칠 때 그 시험을 내야겠어. 봄비가 오는 것과 복음과 연관시켜 설명하라. 창가에 봄비가 내리는 것하고 복음과의 관련성을 설명하라. 참 문제 굉장히 어렵다. 정답은 뭡니까? 관계없음입니다.
그럼 관계없어도 그 이유를 설명해야지요. 밑에서 우리가 모르는 창세전에 있던 밑에서 이제 올라오잖아요. 야곱 인생을 통해서 밑바닥에 있던 창세전에 있던 그 내용이 야곱이라는 인생을 통해서 밑바닥에서 올라온다고요. 올라오는 그 사건이 부상이 되니까 올라오니까 야곱에게 온갖 사건들이 다 보여지는 거예요.
요셉이 죽은 아들이 돼버리고, 죽은 아들에서 나중에 요셉이 뭡니까? 살아서 돌아오지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죽은데서 사는 것을 바로 밑에서 올라오는 야곱도 미처 모르는 창세전에 예정된 야곱의 사랑받기로 작정된 그 언약이 야곱에게 온갖 일들을 그 가정에 일으킨 겁니다.
그때마다 야곱은 그걸 하나하나 받아서 뭡니까? 사랑받는 자는 사랑받게 돼있고, 미움 받는 자는 미움 받게 돼있는 것을 나는 요셉을 통해서 또다시 아는 거예요. 버림 받은 자가 세상에 버린 자를 다 용서하잖아요. 그게 바로 요셉에게 일어난 사건 아닙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이 미워할 자는 미워하고, 사랑할 자는 사랑하는 이 모든 것을 다 증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을 주느냐?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야곱이라는 인생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는 겁니다.
하루는 티비를 보는데 김득수 사물패가 나오는데 김득수가 장구만 잘 치는 게 아니고, 이것도 돌리고 징도 잘 치고 다 하는 거예요. 북치고, 장구치고 우리 예수님이 다 해버립니다. 다해서 우리가 살았어요. 우리가 구원받았어요. 우리는 그냥 북이 되시고, 장구 되시고, 징 되시면 되는 겁니다. 좀 많이 얻어맞기는 얻어맞지만. 징징 소리 내면 되거든요. 토닥토닥 소리 내면 되고.
그 다음에 에스겔 48장인데 하나님의 새 성전, 천국이죠. 천국의 배치가 북쪽부터 르우벤 나오고, 유다, 레위 나와요. 전부다 정실부인 레아 자식이죠. 그 다음에 이쪽에 동쪽에 요셉 나오고, 베냐민 나오고, 단 나와요. 이건 전부 라헬에 속했죠. 여기 남쪽에서 뭐냐 하면, 시므온 나오고, 잇사갈 나오고, 스불론 나와요. 전부다 뭡니까? 레아에 속한 종의 자식들이죠. 그 다음에 갓, 아셀, 납달리. 여기도 마찬가지죠. 여기는 같이 섞여있죠.
자꾸 정실부인하고 종하고 레아 쪽과 라헬 쪽을 나눠버려요. 나누는데 그렇게 나누어서 뭘 이룬다? 하나님의 천국을 이루는 거예요. 천국이란 무슨 개념이냐 하면, 천국이라 하는 것은 달랑 나 구원받아 천당 갈래. 이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 나는 미움 받아도 될 인간이 어떻게 해서 난 이렇게 사랑을 받았느냐?
도대체 어떤 자는 미움 받고, 어떤 자는 사랑받느냐? 라는 그런 구조가 완전히 계속해서 영원히 돌아가는 그런 운영이 되는 하나님이 어떤 자는 사랑하고, 어떤 자는 미움 받는다는 그 시스템이 계속 엔진처럼 돌아가는 그 가운데서 우리는 주여, 모든 면류관은 주께서 받아야 됩니다. 제가 받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받아야 합당합니다. 저는 이렇게 긍휼을 입었군요. 그래서 그게 천국이에요.
천국은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도대체 구원받기 전에 주님께서는 어떤 일들을 벌이셨는가? 내가 구원받기 전에 이렇게 지옥 가는 사람들은 왜 지옥 가는가? 그 내막을 그 온전한 뜻이 다 이루어지는 속에서 모든 영광과 모든 공로는 제가 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 모든지 알아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다 돌아가야 마땅합니다. 그걸 몽땅 다 드리는 그 나라가 인간의 나라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하나님, 자기 자랑밖에 안 돼요. 오직 하나님 하는 솜씨 자랑. 천국의 복도에 가면 전부다 사진과 그림과 작품들이 있는데 전부다 뭐다? 예수님 자랑하는 것이다. 쭉 돌아가면서. 쟤가 지옥 가는데 왜 지옥 가느냐? 내가 보냈다. 잘 했지? 하고 붙여놓고. 쟤가 천당 가는데 왜냐? 내가 했어. 전부다 그런 걸로.
다시 이야기합니다. 버림 받음이 없으면 구원받은 게 고마운 줄 몰라요. 버림 받은 쪽이 있어야 거저 구원받는 것이 이게 빛이 나요. 잘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거저 구원받는 게. 그게 로마서 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오직 긍휼하심에 의해서만 긍휼함을 불쌍히 여기는 자에게만 구원하게 함이라. 하고 뒤에 나오는 게 바로 한쪽은 자비의 그릇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으로 그렇게 짜여 있는 세계, 그것이 바로 창세전에 숨겨진 비밀입니다.
그 비밀이 창세기 33장에 야곱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33장 봅시다. 그래서 천국의 열두 문에 보면 이름이 열두 사도라 했지요. 그러니까 사도라 해놓고 그것이 천사들이 측량을 해보니까 그냥 측량이 아니고 무슨 숫자다? 사람의 숫자다. 천국에는 열두 사도 같은 사람이 될 때만 천국에 온다.
열두 사도가 뭐냐? 열두 사도가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미움 받으면 지옥 가게 돼있고, 하나님께 사랑받으면 천국 가게 돼있다. 따라서 니가 잘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간다. 이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 열두 사도고, 거기에 따르는 후계자고 제자들이다.
33장 7절에, 5절에 보면,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4절에 보면 서로 입 맞추고 웁니다. 형 보고 울어요. 하나님께서 마음을 그렇게 바꾼 거죠. 하나님께서 여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입니다. 해놓고 절을 하고. 9절에 보면,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하는데 아닙니다. 내가 은혜를 얻었으면 이 예물을 받아야 됩니다.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까 하나님의 얼굴 본 것 같아오니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렇게 해서 야곱이 완전히 전에 하고 반대지요. 전에는 뺏으려고 했는데 이거는 그냥 주려고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미 게임은 끝나버렸어. 게임은 끝난 게임이란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자가 왜 에서한테 찾아오지 않고 얍복 강에서 누구한테 왔다? 왜 야곱, 나한테 왔느냐 말이죠.
이게 뭔 뜻입니까? 그것도 아주 못돼먹은 성질 더러운 붙으면 싸우려고 하는 나에게 왜 찾아왔습니까? 니, 마. 창세전부터 구원받았어. 그러니까 그냥 주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식으로 그냥 주는 겁니다. 교인들이 교회 헌금할 때 그 마음으로 해야 돼요.
그래서 12절에 보면, 에서가 가로되 내가 인도할 게. 하니까 야곱이 핑계 대죠. 우리는 지금 가축들이 어리기 때문에 가면 다 죽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16절에 보면 세일 산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이란 곳에 한 이 년을 머물고, 세겜에 팔 년간 있어요.
숙곳이란 동네 있는데 숙곳이 어디냐 하면, 여기 이스라엘 이래 있으면 아까 바다가 두 개 있다 했지요. 남쪽에 있는 바다가 무슨 바다? 사해. 위에 북쪽의 바다, 갈릴리. 흐르는 강이 무슨 강요? 요단 강. 요단 강 저 남쪽에 얍복 강. 요단 강 근처에 숙곳이 있고, 그 옆에 서쪽으로 약간 돌아가면 세겜이라. 나중에 세겜에 있다 더 내려가서 여기 헤브론에서 남은 인생을 다 보냅니다.
여기 세겜에서 팔 년간 있어요. 팔 년간 있으면서 여기 뭐냐 하면, 19절에 보면, 세겜에 있으면서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이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서 쉬지 않고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아까 울산서 정낙원 목사님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게 멈추지도 않고 쉬지도 않아요. 그런데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이 지가 전도 안 되면 하나님의 일이 안되는 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그 하나님이 소문이 났어요.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일해요. 우리는 좀 했다하면 이리 꼬고 저리 꼬고 안 할란다 하지만 주님은 쉬지도 아니하시고 일을 하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여튼 하나님은 대따 부지런하시고 쉬는 일이 없어요.
그 쉬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듣고 주의 길로 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을 우리한테 맡겨놓으면 우리는 아침, 저녁마다 조석마다 달라서 벌써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일 안 됩니다. 구원 안 됩니다. 기분 좋다하면 성경 몇 절 보다가 기분 나쁘다 하면 교회 안 나온다고 버티고. 그래가지고 구원이 뭡니까? 천국이고 뭐고 소용이 없습니다.
주께서 부지런 떨면서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의 출입을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을 다 세시면서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그 어려운 영생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걸 갈 때마다 이스라엘은 알고, 갈 때마다 모든 공로를 누구한테 돌립니까? ‘엘엘로헤 이스라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살아계시는구나. 이래 되지요.
사람의 복이 뭐냐 하면, 사람의 행복이 뭐냐? 주님 살아계시잖아. 그게 문뜩 깨달으면 세상에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행복해요. 지금까지 나만 살아있어서 길길 뛰었는데 나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계시잖아. 나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걸 알 때 세상에 모든 시험과 걱정과 두려움 같은 것은 다 언제 있었느냐 할 정도로 다 없어져버려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가끔 보지 말고 늘 보고 싶어서 차라리 아예 이 몸을 떠나서 이사를 가서 주님과 함께 늘 거하고 싶은 소망이에요. 뭐,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그럴 게 아니라 계시구나, 안 계시구나 이럴 게 아니라 늘 계시네. 그걸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데 못 떠나는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아직도 봉사해야 될 게 많기 때문에 제대를 미루고 있어요.
그걸 말뚝이라 하는데. 제대해도 되는데 말뚝 박아 가면서 죽어질 때까지 제대 못하고 아직도 고생 그만큼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이 계신 게 분명한데 이 인간들이 안 믿어주거든요. 얼마나 답답해요. 에이, 믿지 마라. 나 혼자 믿을 게. 하고 가면 좋은데 그 안 믿는 사람들 갈구고, 다양한 사람들한테 얻어맞고 욕 얻어먹어가면서도 있데이, 있는 기라. 알겠나? 십자가 지는 것 눈앞에 안 보이지. 나는 보이는데. 계속해서 달려갈 길을 달려가잖아요, 그걸. 느긋하게 하잖아요.
그래서 안 믿는 사람 게을러서 안 믿는 게 아니고, 저주받게 돼있어서 안 믿고, 믿는 사람 부지런해서 믿는 게 아니고 사랑받게 돼있기 때문에 주께서 부지런 떨어서 우리가 믿은 거예요. 지금까지. 그걸 가는 곳마다 고백할 때 엘엘로헤 이스라엘, 하나님 살아계시는군요.
그 다음에 34장에 들어가면, 레아가 세겜에 팔 년 동안 있으면서 세겜 땅에서 일어난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어요. 이것은 뭐냐? 아버지가 아는 수준하고 아들이 아는 수준하고 마치 무엇과 무엇의 수준이냐 하면,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만나기 전의 수준은 아들 수준이고, 압복 강가에서 하나님 만나고 난 뒤의 수준은 현재 엘엘로헤 이스라엘,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는 야곱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34장 이 말은 뭐냐? 자식들은 반드시 아버지가 겪었던 이 경험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축복이 눈에 보이게 돼있다 이 말이죠. 오늘날 우리하고 마찬가지에요. 야곱이 얍복 강에서 받았던 그 경험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통과를 하는데 어떻게 통과하느냐? 피곤하시니까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뭘 통과하느냐? 죽음을 통과해요. 성도가 언제 예수님이 생각나느냐 하면, 자기 힘으로 할 때는 예수 생각 안 합니다. 자기 팔다리 건강하겠다, 몸 좋겠다 뭐 하는데 예수 믿습니까? 지 일 지가 알아서 할 텐데.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젊은 사람들 교회 나온다는 게 수상하다고. 아직도 전부다 펄펄 살았거든요. 저도 그랬어요. 저도 젊을 때 예수 믿었는데 왜 믿었느냐? 하나님의 예언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다 말이죠. 약속을 왜 안 믿어? 하나님 약속한 것 왜 안 믿습니까? 보통 사람 약속해도 믿는데. 하나님이 약속한 거기 때문에 하나님 약속을 왜 안 믿어, 믿지요.
하지만 그 약속이 우리 내면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뭐가 들어온다? 니, 죽는 데이. 니, 이제 골로 간 데이. 죽음을 통해서 전적으로 힘을 다 빼야 돼. 우리의 가진 힘이 말짱 소용없다는 걸 경험을 해야 됩니다. 내가 노력한 것, 내가 열심 낸 것, 내게 누적돼있는 신학적인 체계, 지식, 교인들 많은 것, 아직까지 내 펀드에 은행에 저축 많은 것 이 모든 것이 전혀 나에게 행복도 안 되고, 나에게 즐거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나에게 허무만 가중돼있으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그야말로 내가 왜 사나 싶을 정도로 절망 속에 죽음이 찾아올 때 주님이 가까이 온 줄 아시기 바랍니다. 완전히 모든 힘을 다 빼버려요. 야곱의 경험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믿음 좋아도 자기가 펄펄 살아있으면 꼼지락꼼지락 무슨 일을 하려고 해요. 나중에 나이 팔십 넘어서 아이고, 안 됐다. 자식도 평생 못 얻고. 참 고생 많았다. 치매현상 일어날 때. 이제 그 단계 지나면 뭐 합니까? 똥, 오줌 못 가리고. 그 단계 지나면 아파트 뛰어내리고. 그러면 귀신인지, 인간인지 잘 경계선에서 모호해요. 때로는 귀신됐다, 때로는 유령됐다, 이거. 나이 연세 많으면 그래요. 아들 자고 있으면 새벽 두 시에 벌떡 일어나서 야야, 하고 들어옵니다. 그런 경험까지 하면 기가 막히지요.
모든 가능성 할 때 우리가 의지할 때 누구밖에 없습니까? 자기 은행에 돈, 통장 있는 것, 남편, 자식? 아닙니다. 나도 의지 못하는데 누굴 의지하겠어요. 오직 누구밖에 의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약속, 성경말씀 약속밖에 의지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걸 미리 앞당겨서 우리한테 주어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니, 나밖에 없지. 주님밖에 없습니다. 왜 돈 좀 믿고 힘 좀 믿지. 아닙니다. 그게 말짱 소용없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들 때 주님께서 방금 다녀가신 거예요. 방금 왔다 갔습니다. 계속 있으려면 사도바울처럼 자기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으면 되는데 우린 육신이 있기 때문에 자주 있지 못하고 방금 다녀갔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살게 했다는 그것이 행복이고 나머진 다 삭제가 돼요. 나머지 행복이란 게 삭제돼요. 자식 잘 되고, 자식 결혼하고, 남편 잘 되고, 승진하고, 진급하고 그거 돌아서면 허무해요. 그게 나의 행복이 될 수 없어요. 그런 게 없어지고 아이고, 남편이고 뭐고 간에 나는 주님만 있으면 최곱니다. 라고 생각 들 때 방금 왔다 갔어요. 잠시 왔다가 돌아가는데 그거 몇 초 안 간다고요.
죽음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자식들에게. 언제? 창세기34장에. 자식들이 유발한 게 아니에요. 절대 유발한 게 아닙니다. 아까 다시 로마서 7장이 뭡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법이 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 것은 뭐가 뭐 되게 한다? 죄가 죄 되게 하는데 지금 자식들은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있어요.
아버지 이야기 들어보면 아버지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자기는 자동적으로 뭐 된다? 구원받고, 이삭이 복 받으면 야곱도 복 받듯이, 아버지 야곱이 복 받았으니까 자기도 뭐 받습니까? 자동적으로 축복 받은 사람으로 여기지, 자기 속에 어떤 죄가 있는 줄 몰라요. 더불어 묻혀 가면 천당 가겠지 이런 식이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흔든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일으켜서 죽음의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자기 여동생이 세겜 족장한테 족장 이름도 나와 있어요. 하몰이라. 요새 같으면 인권옹호 차원에서 이렇게 가려야 할 텐데 이름도 밝혀요. 하몰이란 족장 그러니까 재벌 2세지요. 하몰이란 아버지가 재벌이고 아들 이름이 하몰의 자식인데 그게 강간을 했잖아요. 겁탈을 했다고요.
분명히 누가 나쁩니까? 저쪽 나쁘잖아요. 나쁘지만 그런 사건을 통해서 열두 아들이, 열한 아들이죠. 베냐민 안 태어났으니까. 열한 아들이 복수심이 그렇게 강력한 복수심이 있을 줄 자기도 몰랐었는데 자기 착한 여동생이 하나님 모르는 그런 인간한테 당했을 때 니, 이제 죽었다. 죽여 버린다. 극한의 죄악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뭐가 뭐한다고요? 우리 속에 숨겨진 죄가 죄로 드러나는, 이 일 평생 갑니다.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져서 우리 속에 나한테 이런 요소가 있었나? 그거 죽을 때까지 발각돼야 돼요. 성질, 나한테 이런 성질 있었네. 아아, 이거 좀 심하다. 그런 것들이 나는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아주 점잖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있어요.
사람이 여유 있고 생활에 안정이 돼있으면 천심이라 합니다. 편안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누구나 성격 좋다 하는데 그 성격 좋은 것 돈이 아쉬워 보세요. 성격 좋은 것 치사해지고 추접해집니다. 그 성격, 돈이 만든 성격입니다. 돈 없으면 성격도 없어집니다. 남은 것은 악밖에 안 남습니다.
직장생활 하면서 참 사람 좋아서 뽑았구나 하지만 직장생활 십 년, 이십 년 해보세요. 그 다음부터는 후배 똑똑하면 밟아버리고, 선배 간섭하면 선배 욕합니다. 뭐, 인간성 좋아서 뽑았다고요? 안 그렇습니다. 자기는 돈 보고 들어간 거고, 돈 보고 뽑은 거고. 그런 겁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요.
그래서 사건을 보면, 갔는데 2절에 보면, “세겜이 그를 보고 강간하여” 돼있지요. 새로 번역하면 강간이라 하지 말고 성폭행이라 해야 될 거예요. “강간하여 욕 되게 하고 그 마음을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여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이거 합의금 제시했습니다. 합의보자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의 열한 아들이 얼마나 못 됐는지 합의를 봐줍니다. 그런데 위장 합의라. 합의를 보는 조건이 돈으로 한 게 아닙니다. 뭐로 하느냐? 패물로 한 게 아니고, 상당히 영적인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가지고 합의 봤습니다. 그게 뭐냐? 우리의 말씀에 의하면 할례 받지 않으면 우리 식구 될 수 없기 때문에 할례 받는다는 조건 하에 니 잘못한 것을 무마해 줄게. 이래 나왔습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어떤 거룩한 성경을 거론해서 어떤 법을 강요하는데 그거 법 지킨 게 아닙니다. 그거 목사 지 사람 만드는 거예요. 장로 뽑을 때 장로 뽑힌 사람들 잠시 잠깐 오해를 하지요. 내 장로 돼 봐라. 목사 집사일 때 집사라고 무시했지. 장로 돼보라. 가만 안 둔다. 라고 은근히 장로 쯤 되면 목사 간섭할 줄 알았지요. 천만의 말씀. 목사가 장로 시킬 때 그거 교육 다 시켜서 지 사람 만들어서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이용해서 지 사람 만든 겁니다.
수석 장로가 뒤에 장로 도와 줄 때 도와준 게 아닙니다. 수석 장로 할 때 니, 나를 선배라고 깍듯이 모시라는 조건 하에 장로 시켜줍니다. 그래서 뒤에 장로 된 사람은 더러워서 못 하겠다. 장로라고 같은 장로인 줄 아나. 이래 나옵니다. 아하, 이 동네도 이렇구나. 직장만 그런 줄 알았더니 어느 세계에 조직 세계에 하여튼 서열문제, 텃세문제 없는 데가 없습니다. 참, 그게 인간의 죄에요.
그래서 젊은 대학생 하다가 직장생활 해서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바로 조직적인 범죄에 본의 아니게 동참해야 된다는 거예요. 조직적인 범죄에. 인격말살이죠. 그런데 그 일이 인격말살에도 할 수밖에 없는 게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한 자로? ‘돈’ 때문에. 돈 때문에 인격을 말살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번만 들어주면 다음에 안 그러지. 웃기지 마세요. 이번 들어줘도 그 다음에 더 심한 게 또 나옵니다. 술 한 잔 먹였는데 다음엔 안 먹이겠지. 천만의 말씀. 다음에는 소주 먹입니다.
세상이라 하는 것이 탁류, 탁류 하지 마세요. 그 탁류에 한번 발 들여놓으면 탁류가 홍수가 됩니다. 같이 쏵쏵 휩쓸려갑니다. 더러워서 못하겠다. 신학교 가서 목사 되겠다. 목사 되면 그 동네는 탁류 아닐 줄 압니까? 어딜 가도 질 더 낮은 탁류 없고 못한 탁류 없고 어디 가도 마찬가지에요. 더러워서 못살겠다. 라고 한 그 사람이 나중에 조직 만들어놓으면 지가 더러운 주동자가 됩니다. 지가 더러운 짓을 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세뇌시켜버려요.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결국 항상 자기 성깔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이게 세상보기 아닙니까? 자기 성깔 중심으로 보기만 하면 괜찮게요?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행동에 옮긴다니까요. 야곱의 열두 아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법을 빙자해서 뭘 푸느냐 하면, 자신의 속내를 풀어요. 자기의 더러운 성질을 하나님의 거룩한 할례 이용해서 도용해서 성질을 다 풀어버려요.
그 하몰의 추장 아들만 조진 게 아니에요. 그 세겜 땅 모든 남자들 조져놨습니다. 얼마 조져놨는지 봅시다. 여기에 25절에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그 다음 뭡니까? “모든 남자를 죽이고” 속 시원하시겠습니다.
근데 복수는 끝이 없어요. 죽여도, 죽여도 복수 끝이. 왜냐하면 처음에는 상대방을 용서 못해서 복수 하지만 나중에는 복수한 본인이 미워요. 사람이 제일 힘들 때가 뭐냐 하면, 남이 미운 게 아니고, 나라는 인간이 그것밖에 못하나 하는 자기 자신이 미울 때 우울증 걸립니다.
여자들이 산후조리 우울증 걸린 이유가 뭡니까? 애 하나 키우고 둘 키우는데 오년 걸립니다. 오년 동안 다른 사람들은 승승장구 발전, 사회에 대해서 무슨 하는데 아 둘이 집구석 처박혀서 애 둘 키운다고 아무것도 못했던 자기 자신이 미워요. 내가 미워요. 자기 꼬라지가 밉다고. 전업주부가 미워요.
아 낳아도 밖에 활동하면 우울증 잘 안 걸려요. 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어요. 그쪽 조직의 말 들어야 되니까. 그런데 애 쳐다보고 둘이 맨 날 같이 자고 같이 밥 먹고 맨 날 이것만 하다가 살 푹푹 찌고 허리가 어디가 어딘지 다리가 구분도 안 되는 할 때 내가 뭐고? 나란 존재가 뭐냐? 존재감이 없어. 내가 왜 살지? 남편은 겉돌고. 피곤하다고 자버리고. 아 키우는 걸 놀은 걸로 취급하고 일도 아니고. 도대체 나한테 발전 된 게 뭐 있으며 성장된 게 뭐 있으며. 남편 돈 번다고 위세 떨지, 아 키우는 것은 노동 아니라고 간주하지.
또 여자가 직장 없으면 온데 다 걸립니다. 친정에서 부르지요, 시집에서 부르지요. 논다고. 더러워서 나가야지. 집구석만 있으면 새벽부터 전화 와서 야야, 사촌이 함 지는데 같이 안 갈래. 온데 다 돌아다녀요. 우울증 걸릴 수밖에 없지요. 무슨 이야기하는데 이카노?
자기하는 짓이 자기가 미운 거예요. 남 미우면 욕이나 하지, 자기 미우면 어디 가서 욕을 합니까? 세상에 딴 건 잘 풀어도 자기가 미운 것은 풀 수가 없어요. 노래방에 노랠 불러도 풀 수가 없어요. 지가 지를 안 죽이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믿음 없는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여러분들, 남들 믿음 없다하지 마세요. 제일 위험할 때가 뭐냐 하면, 내가 스스로 쳇, 예수 그거 소용 있나? 이거는 십년 믿고, 이십년 믿고 목사 됐다고 이건 예외가 없어요.
아이고, 돈이 최고지. 네기 돈 없는 핑계로 예수 들이대지 사실은 돈 없는 주제에 예수 댄다고 해서 누가 돈을 주나, 떡을 주나 아이고, 참 쓸데없는 짓하고 있다. 여러분 예수 믿으세요. 이런 사기에 아직도 넘어가는 사람 있나. 아이고, 참. 어리석은 교인들, 이것도 진짜라고 나도 안 믿는데 너거들 왜 믿느냐? 언 놈 가봤나? 천당이, 지옥이 있는지. 이런 생각이 목회를 십년, 이십년 해도 올라온다니까.
교인들 교회 안 나오면 그래, 잘 생각했다. 현명한 판단했어. 나도 안 믿는데 당신 왜 믿노 그래? 이제 늦게 정신 차렸구나. 제가 이 말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믿음을 주지 아니하면 자력으로 믿음 유지가 안 된다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질대로 한 사람이 야곱의 열두 아들입니다. 성질대로 했어요. 야곱이 한 일을 언급하면서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인간 좀 죽였다고 그게 뭐가 나쁩니까? 이래 나와요. 하지만 그건 핑계고 진짜는 뭐냐? 자기가 성질이 안 죽은 거예요. 겉으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지 성질 하나도 안 죽였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은 알아요. 내가 성질 안 죽일 때가 가장 믿음이 좋을 때다 이 말입니다. 참 이상한 말 한다, 지금.
야곱이 성질 안 죽일 때가 언젭니까? 하나님이고 뭐고 없어요. 누구든지 날 건드리고 달려들면 이거는 누구하고든 간에 싸우다 보니까 그분이 누구였습니까? 자기한테 하나님의 예정된 뜻을 전하러 온 축복하러 온 축복이 뭡니까? 주의 예정된 뜻 아닙니까? 하나님 사자하고 싸웠다고요. 자기 성깔 그대로 드러날 때 그 순간이 하나님하고 만나서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에요.
주님 사랑 안하면 저는 주님 사랑 안 하는 인간입니다. 주님 사랑 안 했으면 저는 큰 일 날 뻔했습니다. 그걸 노골적으로 고백하는 순간이 언제냐? 자기가 더러운 인간인지 다 들통 날 때.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는 내 힘으로 신앙생활 안 되며, 나는 하나님 안 도와주고 인도하지 않으면 내 힘으로 천국에 찾아갈 길도 못 찾고, 그런 버림받은 인간밖에 안 됩니다. 근데 창세전부터 이미 사랑했기 때문에 그분 찾아왔고, 찾아온 그분 때문에 인도받고 있습니다. 하는 그런 고백을 야곱은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뒤에 야곱이 어떤 일이 벌어져도 진짜 주께서 지금까지 온 것도 내 힘으로 안 왔듯이 이런 일도 아마 주께서 성실하신 우리 주님께서 나는 게을러서 못하지만 하실 거라 하는 것이 그게 믿음으로 아들들은 그걸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아들들은 나중에 요셉이 꿈꿨을 때 뭐랍니까? 또 성질 나오지요. 니가 잘났나. 아버지가 좋은 옷은 동생한테 다 입히고 우리는 뭐고? 요셉만 아들이고 우리는 아들 아니가? 이런 식으로 저기 온다, 죽여 버렸잖아요.
이것이 평소의 야곱의 성질입니다. 야곱의 성질이 아들한테 가지 어디 가겠습니까? 엄마 성질, 아빠 성질 합해서 못된 성질 자식한테 물러준 거예요. 야곱이 안다고요. 나도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야곱이 믿은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지금은 십자가란 조치가 확실히 있어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에는 십자가를 대신하는 십자가 그림자 같은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줘야 돼요.
그 십자가 일을 하신 사람이 누구냐? 요셉 아니에요, 요셉. 버림받은 자가 도리어 버린 자를 구원해버리잖아요. 양식 없으니까 구원해버리잖아요. 그게 바로 우리가 싫어하는 예수님이 우리가 미워해서 나, 이제 예수 안 믿는다고 헤어졌던 저희를 또다시 찾아오고, 또다시 찾아오고 십자가 들이대고 십자가 들이대면서 니는 나를 버리지만 나는 너를 못 버린다. 왜? 약속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계속 일깨워주는 그 사랑, 바로 그것이 우리가 왔다 가신 주님과 만나는 순간이 그겁니다. 나는 죄인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했다는 걸 느끼는 것, 그게 바로 성도만이 누리는 복이에요.
집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목숨이 부지된다는 것, 사람이 아플 때는 건강하고 싶어도 건강해놓으면 감사가 안 나와요. 또 다른 욕심 챙기기 바쁘거든요. 평소에 우리가 모든 게 감사할 거리밖에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게 감사한데 심지어 지금 치매가 안 걸려도 감사하고, 치매 걸려도 감사하지만. 평소에 우리 자신에게 감사보다도 뭡니까? 욕심이 먼저 생긴다고. 그게 뭐냐? 숨겨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야곱의 열한 아들은 내 딸, 여동생은 겁탈 당하지 않고 깨끗해야 된다는 그런 욕심을 가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뜻에 의해서 망가져요. 왜? 하나님은 지 자식이거든요. 오빠 여동생이 아니고, 하나님 여동생이에요. 국민 여동생처럼, 하나님 여동생이라니까. 강간시켜서 강간을 통해서 야곱과 열한 아들의 성질을 다 들춰내게 합니다.
들춰내서 그들이 할례 행해서 혼인조건 합의를 봤는데 할례 잘 하게 해서 한 사흘 쯤 되서 고통 속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꼼짝도 못할 때에 칼 가지고 모든 남자를 다 죽여 버렸어요. 그들은 죽이면서 뭐라고 핑계 대겠습니까? 신의 심판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칼을 받아라. 이랬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아버지 입장에서 뭡니까? 정말 옛날 지 모습 보는 거예요. 나도 저랬었었지. 내가 우리 형한테 이렇게 했지. 형은 또 나한테 그렇게 했었고.
31절에 봅시다. 이제 아버지가 아들 보고 나무라지요. 네가 왜 이렇게 말썽을 일으키느냐? 괜히 분란을 일으켜서 그들이 같은 족속들이 쳐들어오면 우에 할래? 그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데 왜 그렇게 화를 자초하느냐? 이렇게 하니까 31절에 하는 말이,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합니까?” 그들이 나쁜 짓 했잖아요. 우린 당하기만 하면 됩니까? 우리도 복수를 해야 되잖아요.
자기가 보는 세계밖에 야곱이 알았던 아버지가 알았던 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창세전에 이미 사랑받고, 미움 받았다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떻게 일하는지, 그 열한 아들은 지 성질만 듬뿍 내면서 자기 정의로움, 자기 거룩함, 자기 옳고 그름 가지고 세상을 전부다 판단하면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야야, 도망가자. 도망가 버립니다. 그래서 세겜 땅을 피해서 남쪽으로 피신하게 되지요.
이 사건을 왜 하나님께서는 주셨는가? 그것은 바로 야곱이 알았던 그 세계를 이제는 누구까지 알아야 된다? 야곱만 알면 안 되고 이제는 열한 아들, 조금 있다 열두 아들까지 전부다 야곱이 알았던 이 하나님의 새로운 면을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그게 야곱언약의 완성으로 되어진다 하는 것을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열두 아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앞으로. 야곱은 됐고, 열두 아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제는 바깥 싸움이 아니고, 누구 싸움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내부적인 싸움으로 벌어지는데 여기에 요셉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 이제는 하몰의 세겜 족장이 아니라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형제가 형제를 팔아먹는 그러한 내부적인 죄의 본색이 드러나는 그 시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다음 달에 계속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다, 사랑이다 말은 하지만 우리 자신이 펄펄 살아있기 때문에 모든 일을 내가 알아서 하고 모자란 것은 하나님께 달라고 그렇게 요청합니다. 감사가 없이 불만밖에 하나님 원망만 하고 있는 우리 언제쯤 철이 나겠습니까? 늘 감사하고 늘 기뻐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