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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502a 울산강의-창세기 33장자유게시판창세기

20080502a 울산강의-창세기 33장

이름 : 한윤범(IP:59.6.189.184)

20080502a 울산강의-창세기 33장

(강의:이근호 목사)

로마서 한번 봅시다. 창세기 33장하기 전에 로마서 9장 12절에 보게 되면, 다같이 읽어볼까요? 12, 13절. 시작.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서 참, 우리가 해석하기 곤란한 게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약속하기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라고 돼있고,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이래 돼있거든요. 이 말 자체가 연결이 얼른 우리한테 와 닿지를 않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제가 적어 보겠습니다. ‘큰 자’가 큰 자니까 크게 쓰겠습니다. 덩치 큰 것, 큰 자가 ‘어린 자’ 어린 자니까 덩치 작은 자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작은 자가 위에 올라가고, 큰 자는 밑에 내려가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라는 것이 리브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다 이 말이죠.

그게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말라기 1장 2절에 나오거든요. 어린 자니까 야곱 아닙니까?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이래 됐다 이 말이죠.

우리가 성경해석의 일관성을 여기서 얻으려고 한다면, 여기서 일관성이 있어야 돼요. 성경해석을 이것만 해석하는 게 아니고, 다른 성경도 해석할 때 아, 이 원칙 가지고 하면 다 딱딱 맞아떨어지는구나. 하는 그런 원칙을 찾아야 되는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해놓고 기록된바 야곱은 어린 자다. 이래 나오면 참 좋겠는데. 그럼 야곱은 어린 자고, 에서는 큰 자다. 큰 자 해도 되고, 장자 또는 먼저 태어난 자, 이건 나중에 태어난 자. 큰 자와 그 다음에 어린 자니까 나중에 더 어린, 나이가 적다든지 그렇게 볼 수도 있고.

하여튼 간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 이래 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야곱과 우리가 하나님 입장이 돼봅시다. 약간 건방 떨지만 우리가 하나님 입장 돼서 야곱과 에서가 아예 없던 그 시절에, 없다고 봅시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입니다.

뭐만 남아 있느냐 하면,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 이 말씀만 딱 들어있고, 또 한 가지는 두 개가 뭐냐 하면, 한 쪽은 사랑하고 한 쪽은 미워한다. 그것만 지금 하나님 테이블에 그 두 구절만 있다고 해봅시다. 이 두 구절을 동시에 두 개를 다 성취할 수 있는 어떤 인물을 만든다면 어떤 아이디어가 좋을까요? 아이디어 회의하는 거예요. 어떤 인물을 해놓으면 이 두 가지가 다 될 수 있느냐 말이죠.

이게 우리가 하나님 아니니까 무척 어려워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따라서 야곱은 나중에 태어나고, 에서는 먼저 장자로 태어난다. 이러면 안 어려워요. 이러면 쉽다니까. 아, 동생이 형한테 섬김을 받는구나. 이러면 전혀 우리가 어려울 게 없는데. 여기에 사랑한다가 들어가고 미워한다가 들어가 버리면, 큰 자, 어린 자 하고 사랑, 미움하고 네 가지가 서로 교체가 돼야 하니까 이게 우리 인간들 수준에선 연결이 잘 되질 않는 거예요.

큰 자가 섬긴다고 해서 이걸 꼭 미움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그러한 안목이 우리 인간사회는 없고요. 섬김을 받는다고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그러한 원칙도 우리 인간사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하려면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느냐 하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이렇게 출발을 하면 이것이 어려워서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니까 사랑부터 시작할게요.

사랑부터 해보면 해결돼요.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미움 받는 사람이 있어줘야 사랑이 사랑 값을 하는 겁니다. 상당히 약간 얄궂은 이야기지만. 부모가 애 둘이 있는데 애야, 내가 니 사랑한다. 이렇게 말로 해서 안 되고, 몽둥이 들고 미움 놈 마구 치는 거예요. 미움 놈을 마구 침으로써 안 맞는 자식은 자동적으로 사랑한다가 되도록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주 희한한 하나님이죠.

사랑한다 할 때 내가 사랑한다. 이러면 될 텐데 사랑이라는 것은 반드시 아무리 해도 미운 놈, 무슨 짓을 해도 미운 놈, 제사를 드려도 밉고, 전도해도 밉고, 헌금해도 밉고, 교회 나와도 밉고, 태어날 때부터 듬뿍 미움이란 온통 세상의 미움을 다 짊어지고 등장해야 하는 인물이 있어야 되는 이유가 뭐냐?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니는 미워져야 돼.

그래서 예정론 하면 미움 받게 돼있습니다. 인간적인 어떤 관계 이런 것은 완전히 그런 사람한테는 욕 얻을 소리 밖에 못 됩니다. 박영선 목사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천국 가도록 예정된 것은 인정하겠는데, 지옥 가도록 예정 되었다 하는 그거는 좀 모르겠다. 박영선은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것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맞지요. 저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무슨 짓을 해도 지옥을 가야만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될 이유는 사랑을 말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의 경우에 이게 야곱과 에서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건. 야곱과 에서와의 풀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창세기 33장하면 이것부터 해결돼야 33장 풀려요. 안 그러면 풀리지 않아요. 창세기 33장 보면, 야곱하고 에서가 서로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지요. 그렇지 않아요? 아까 읽어 보고 했잖아요.

주님이여, 일곱 번 절 받으소서. 얘가 와 이카노. 절하지 마라. 아닙니다. 절 받아야 됩니다.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받을 자격이 되나? 받으셔야 됩니다. 서로 친하게 지낸다고. 왜 친하게 지내야 되느냐 하면, 야곱이 뭘 알았느냐 하면, 누가 사랑받아서 천국 가는 거나, 누가 미움 받아서 지옥 가는 것이 우리 인간과 인간들 문제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우리끼리 티격태격 싸운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이건 윗선에서 이미 해결난 문제에요.

전 이 이야기할 때 전율을 느낍니다. 보통 교인들이 교회 와서 주님한테 사랑받으려고 얼마나 알랑방귀 뀌고 주님한테 겸손의 티를 냅니까? 그거 말짱 소용없다니까요. 아무 소용없어요, 그거. 야곱이 그걸 안 거예요. 하나님 만나고 그걸 안 거예요. 전에는 야곱은 누굴 의식하고? 형을 의식하고. 형은 누굴 의식하고? 동생을 의식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면서 자기들의 행동에 따라서 운명도 달라질 것이다, 결정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받을 자와 미움 받을 자는 윗선에서 청와대보다 더 윗선입니다. 청와대보다 더 위쪽 선에서 이미 결정이 난 상태입니다. 그 결정이 난 상황을 알아채는 사람은 불신자한테도 엎드려 절할 수 있는 그런 여유만만이 있더라. 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창세기 33장의 내용입니다. 얼마나 그게 자유로운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너희들이 어떤 것을 구원받는 자유를 얻었느냐? 오케이. 그 말 맞다. 그런데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라 했습니까? 그 자유를 행세께나 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는데 그걸 쓸 때에 비로소 니가 윗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된 것을 진짜 믿는 성령 받은 사람이다. 윗선에서 결정된 것을.

내가 현재 사랑한다고 구원받는다고 것도 아니고, 내가 남 미워한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윗선에서 그것도 창세전에 윗선에서 다 결정됐다는 사항을 성령을 통해서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 받은 그 자유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사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윗선이 되려면 아랫선에 자기 자신의 그러한 육신적인 그런 요소가 있지 않겠습니까? 육신적인 정와 욕심은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고 돼있어요. 그건 죽은 놈이 죽은 짓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오늘 창세기 33장 깊이 들어갈 텐데 너무 깊이 들어가기 전에 뜸을 들이면서 여러분들이 아시는 이야기 몇 가지 전하고 깊이 들어가겠어요.

로마서 7장 오늘 내용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제가 조심스럽게. 로마서 7장 13절에 보면,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찾았습니까?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 하여튼 하나님은 우리하고 이야기를 안 해요. 우리를 사용을 하되 우리 허락도 안 받고, 마음대로 우리를 사용해요. 저와 여러분을 사용합니다.

우릴 어떻게 사용한다고요? 죄를 뭐하게 한다고? 죄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누굴 사용해요? 우릴 사용한다니까요. 목적이 우리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숨어있는 죄를 드러내는 죄로 만들기 위해서 누구와 누구의 만남이냐 하면, 거룩한 그것인데 거룩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누구와 만나느냐? 우리 자신들과 만나서 율법도 날아가고, 우리도 날아가고 남는 것은 죄가 뭐로 드러난다?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 율법과 우리를 하나님은 자기 목적에 부합되도록 율법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사용권을 활용해서 그렇게 사용하신다 이 말입니다. 죄를 죄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우리에게 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러냐 하면, 14절 끝에 보면,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우리는 뭐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 뭐에 속했습니까?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죄로 하여금 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왜 율법과 우리의 만남이 죄로 드러나느냐 하면,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그래요.

왜 육신이란 말이 뭐가 문제냐 하면, 바로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예수님마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 우리가 육신으로 태어났다. 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죄 아래 팔린 몸으로 출현했다. 이 말입니다. 그냥 하나의 사람이 태어났는데 하다보니 죄졌다. 이게 아니고 육신으로 태어났다 이 말은 또 죄 아래 팔린 놈 하나 ‘으엥’하고 또 태어났네. 이 말입니다.

모든 말씀은 거룩한 말씀은 여러분, 사도바울의 권면이 거룩한 말씀이에요, 거룩한 말씀이 아닙니까? 사도바울은 이렇게 했어요. 이게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누가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권면, 명령이 무슨 말입니까? 거룩한 하나님 말씀이죠. 그 거룩한 말씀을 우리한테 왜 줬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죄를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육신이 안고 있는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전에 알았던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저한테 딱 쳐다보고 따지듯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사도바울의 명령과 권면도 율법적 기능이 있다고 봅니까? 자기는 없다 이 말이거든요. 저는 있습니다. 라고 했어요. 왜 있습니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죄 되게 드러나기 위해서. 분명히 맞지요. 그러면 십자가가 뭐냐 하면,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거지요. 맞지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지요. 그 다음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을 저주 받을 걸 알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알았던 그 모든 말씀은 뭘 통과해서 들어온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말씀 주신 거예요. 로마서 5장 1절 같은 경우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왜? 너희는 용서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너희는 서로 용서하라. 주님께서 용서한 게 어디서 드러납니까?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아하, 우리가 용서 받았구나. 라는 걸 알고, 그렇게 용서받은 자만이 뭘 할 수 있다? 남을 용서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또 다른 구절에 보면,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을 받았으니 서로 사랑하라.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서 한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말씀은 결국 우리가 왜 성령이 아니고 육신의 힘으로는 왜 그게 안 되는가? 왜 우리는 그 말씀을 못 지키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죄가 육신에 태어날 때부터 간직하고 있어요. 자,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육신이라는 게, 어떻게 예를 들면 쉬울까? 육신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육신 안에 우리도 모르는 죄가 듬뿍 담겨 있어서 죄는 육신을 통해서 죄를 드러내고 있고, 율법은 우리 육신을 통해서 죄를 고발하고 있고, 우리는 중간에 낑겨 있어요.

우리는 낑겨서 율법에 의해서 낑기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하, 이게 선한 건 줄 알고, 아는데 우리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죠. 죄의 법이 있는데 선한 줄 아는데 그걸 못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 쪽으로 율법이 안 선한 거예요. 선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미처 모르는 죄의 죄 됨을 중간에 낀 우리를 통해서 마음껏 주님께서 보여주기 위해서 점잖기 짝이 없는 저를 사용하십니다. 아주 점잖고 순결하고 고상하고. 저와 여러분들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소위 성화론이라 하는 게 뭐예요? 중간에서 어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사용됐다는 걸 생각 안 하고, 성화론은 딱 끼어서 난 착할 수 있다. 독립 선언하는 거예요. 이거는 관계로 봐야 되는데 우리는 뭣을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증거하기 위해서 의에 대해선 하나님 앞에 산 자로 증거하기 위해서 그런 관계망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단 생각을 안 하고, 딱 나와서 아하, 나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구원받았네. 지가 나서서 새롭게 해보겠다고 설치는 것, 그게 무슨 신잡니까? 지 자랑하는 거지요. 이거 개혁주의 신학의 치명적인 허점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잘 몰라요. 로마서 7장 봐도 모른다니까.

그래서 제가 처음부터 강의한 핵심이 뭐냐 하면, 내가 주체가 아니고, 예수 믿고 난 뒤에 주체가 누구냐 하면,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이 주체고, 예수 믿기 전에는 누가 주체였습니까? 우리는 어디 팔렸어요? 죄에 팔렸으니까 죄가 주체가 되고, 예수 믿던 안 믿던 어디 가든 우리는 주체 된 적이 없고, 관계망 속에서 주님의 하시는 그 하나님의 예정된 뜻을 위해서 우리는 사용되어질 뿐이다 말이죠. 어디에도 주체는 없어요. 한쪽은 전에는 죄에 팔렸고, 이제 우리는 의에 팔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야곱이 창세기 32장을 거쳐서 33장에 오면서 야곱이 알게 된 것은 뭘 알았느냐? 그전까지는 내가 장자가 되기 위해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라이벌을 누구를 적으로 봤느냐 하면, 형을 적으로 봐서 하나님 말씀들을 자기가 이루어서 기어이 형으로부터 굴복시키고 자기가 섬김을 받겠다는 여기를 향하여 목표를 향하여 전력질주를 했던 본인이 이제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그렇게 내가 말씀의 주체가 되어서 내가 한다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 말씀과 아무 상관없는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가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죄라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내가 성취해보겠다는 이것, 이게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 죄가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 자신이 지키지 마세요. 지키려고도 하지 마시고. 이미 지켜진 상태에서 주의 말씀이 성취된 상태가 나를 어떻게 다루느냐? 평생 동안 그것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이루느냐? 형한테 절해도 지옥 가게 돼있습니다. 얼마나 신납니까? 그게 신나는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형한테 절해도 자기는 뭐가 되겠어요? 천국가게 돼있어요.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형은 미움을 받기 위해서 있고, 자기는 사랑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사랑을 위하여 내가 있는 거예요.

‘사랑을 위하여’ 하니까 김종환 생각나네. 이른 아침에~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내가 있는 거예요. 주례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만 얼마나 비난이 들어오는지. 주례할 때는 신랑, 신부를 위해야지 어떻게 사랑을 위해서 서로를 양보하라하느냐? 가만 들어보니 칭찬 같기도 하고, 씨.

주례할 때 뭐냐? 여러분 자신들을 위해서 지금까지는 결혼식을 했지만 그건 결혼 잘못하는 겁니다. 둘이 만난 것은 서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둘이 못난 인간 만난 것은 사랑을 위하여 총각, 처녀 때 몰랐던 새로운 사랑을 위하여 사랑의 버전을 위하여 둘이 만난 겁니다. 둘이 나한데 얼마나 이익이냐, 손해냐 따지지 말고, 사랑을 위해서 우린 얼마나 내가 희생돼야 되는가를 새삼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깊이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래 주례했어요. 욕 많이 얻어먹습니다. 안 믿는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한테. 축복 안 해준다고.

신자한테 복이라 하는 것은 예수만 알면 그게 복입니다. 예수 믿고 대가 얻으려고 사람들 교회 오는데 뭐가 대가인줄 알아요? 대가 없어도 된다는 마음이 생긴 것, 이것이 대가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대가가 뭐냐 하면, 나 이제 대가 같은 것 안 밝혀도 괜찮아. 라는 마음이 새롭게 생긴 것, 이게 바로 대가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어떤 관계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위하여 나를 부리시고, 나는 주님 부리심 가운데서 이렇게 사랑 받았다는 것을 이렇게 알게 되었다는 그것보다 더 큰 대가가 없어요.

지난 수요일 날 제가 했잖아요. 예수님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 알았다는 말은 이미 살은 거예요. ‘살았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 일상에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았다는 것이 변동이 안 된다는 뜻에서 기분 좋은 흐름 아닙니까? 어떠한 참혹한 사태가 벌어져도 산 사람이 도로 죽지는 않아요. 산 사람은 계속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온갖 전에 같으면 우리가 당황스러운 일들을 일으켜도 살았다는 이 신분은 변함이 없다니까. 얼마나 그게 신납니까? 살았다는 게 변함이 없으니 얼마나 신나요. 다 이게 윗선에서 어른께서 다 알아서 한 것 아닙니까? 이걸 아니까 야곱은 아주 기꺼이 형에게 예물 드리고, 형에게 일곱 번 절하면서 형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의 주여’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미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이 말은 내가 애쓰지 않더라도 이미 이 시스템이 하늘나라로부터 굳혀진 채 이미 우리한테 그냥 체제가 시스템이 주어진 거예요. 콘크리트 틀 만들 듯이 콘크리트 틀 만들어놓고 콘크리트 부어넣잖아요. 우리가 콘크리트라면 틀은 하나님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 틀에 들어가기만 하면 틀로 된 그 구조는 완전히 굳어져 버린 거예요. 이미 굳어진 운명을 내가 행동 개차반 한다고 바꿔집니까? 안 바꿔지지.

[밀양]이라는 영화 보면 사람을 죽여서 사형선고 받은 어떤 죄수가 교도소 가서 예수를 믿었어요. 그래서 활짝 기뻐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하, 내가 사람을 죽여도 주님께서 사랑받기로 돼있는 그 시스템 속에 있으면 나는 천국 가는구나. 기뻐했어요. 전도연이 그걸 보고 사람 죽여도 저렇게 구원받는데 저런 불공평한 하나님이 있나. 해서 거기서 약간 돌아서 집회하는데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씨디 틀어버리고, 방해하고 그러잖아요. 하나님 방해하겠다고.

모든 게 이미 우리는 사는 것도 내 선에서 처리한 게 아니고, 윗선에서 처리한 거고요. 이미 사랑받기로 돼있는 것도 내가 어떻게 변동이 안돼. 내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이게 변함이 없는 그런 운명으로 콘크리트처럼 굳어져버렸어요. 여기 콘크리트 건물 민다고 밀립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운명은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하죠. 이게 변동이 안 돼요.

그러한 구조 속에서 야곱은 자기에게 준비돼있는 것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시스템 속에서 전부다 다시 재해석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게 창세기 33장입니다. 여러분한테 다시 이야기합니다. 에서라는 게 왜 나한테 있느냐? 야곱의 입장에서. 에서라는 저 형이 왜 나보다 먼저 태어났고, 나와 라이벌 경쟁에 있었고, 서로 잡아 못 죽여서 그렇게 난리를 치고, 아버지의 하나님의 축복권 얻기 위해서 그렇게 투쟁했던가?

그것은 바로 형이 미움 받기 위해서 그렇게 된 거고, 형이 미움을 꼭 받아야 될 이유는 놀랍게도 못난 형보다 잘난 것도 없는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뭘 받기 위해서?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뭘 해도 미움 받는 인간이 우리 주변에 꼭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참, 하나님께선 일을 하셔도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일을 하십니다.

거기 하나 더 봅시다. 로마서 9장 28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완전히 박세리 마지막 유에스 오픈에서 끝내듯이 끝내 이기기라. 끝내버려요. 거기 27절에 보면,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은 바다의 모래 같으면, 바다의 모래가 전부다 구원받는 줄 알아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래 약속했거든요.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그 사람들 다 구원받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고 여기 보니까 같을지라도 뭐만 구원받는다?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 그리고 그걸 주께서 끝내신다.

사도바울에서 사도바울이 마음이 편한 것은 이미 자기가 하나님의 그 약속된 굳어진 시스템에 의해서 자기가 산 사람이기 때문에 살아있기 때문에 무슨 짓을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게 상관없잖아요. 그런 아주 느긋함, 그런 느긋함 가지고 어딜 보고 합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상관없지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미 살았으니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주께서 끝내버립니다.

이것을 바로 인간의 성실하다든지 착하라가 아니라 이것을 뭐라 합니까? 사랑이란 말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사랑은 우리의 착함하고 관계없잖아요. 우리가 착하다고 더 사랑받는 게 아니지요. 사랑, 미움이란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사랑, 미움은 사랑받는 사람, 미움 받는 사람 선에서 사랑, 미움이 결정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받을만해서 사랑받는다든지,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랑, 미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랑의 무슨 짓을 해서 받는 것 같으면 그거는 무슨 차원이냐 하면, 그게 바로 율법 차원이에요. 율법에서는 법적 지키기 때문에 하는데. 율법은 분명히 피곤하기 때문에 자기 때문에 자 버릴 거야. 율법을 왜 줬다했습니까? 율법을 준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전도사님, 율법을 준 이유가 뭐라 했어요?

죄로 하여금 더욱더 왜 우리가 육신이냐?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만난 거예요. 새삼스럽게 우리의 잘못 따지는 게 아닙니다. 따져서 천당 갈 사람 없어요. 다 아담의 자손은 다 지옥 가는데 뭘 따져요. 우리를 따지는 게 ,사용한다니까요. 따지는 것은 우리한테 책임추궁 하지만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형편이든지 그냥 사용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런 관계망 속에서 우리에게 왔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뭣에 사용 받아요? 집사님, 우에 사용 받아요? 사랑받는데 사용돼요. 이렇게 해야지 집사님, 잘났어요? 이렇게 물으면 안 돼요. 개인적인 역량과 자질을 물으면 안 돼요. 어디에 사용되십니까? 사랑이요. 저도 사랑인데요. 우린 형제네. 이래 돼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아직도 이걸 지키겠다. 이래 나오는 사람은 그 사람은 미움 받기로 미움에 사용 받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보고 우리는 ( ) 왜? 어차피 갈 사람인데. 아, 저렇게 미움 받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사랑이 값을 하는구나. 나도 저런 인간이었었는데 행함도 없이 거저 구원받는다니 웬 자비하심인가, 긍휼이 웬 떡이냐 이 말이죠. 웬 축복이냐? 아이고, 참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라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주위에 많이 깔아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렇게 쉬운 것 했거든요. 이제부터 어려운 것 들어갑니다. 야곱이 자기 주변에 있는 아내와 재산 이런 것을 전부다 해석을 다시 합니다. 하나님의 창세전에 있던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 주변 인물이 있다. 그렇게 보거든요. 그러면 다같이 여기에 2절 읽어봅시다. 1, 2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 라헬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이 순서 보세요. 이 순서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 자식들을 레아와 라헬을 두 종에게 맡기는데 여종과 자식들은 일 번. 에서가 이리 옵니다. 에서가 이리 온다 하지 말고 지도 그려서 봅시다. 에서는 세일 산에 살던 사람인데 이 사람은 팔레스타인이에요. 예수님 당시나 아브라함 사는 데나 같은 땅이니까.

물 길던 데가 두 군데 있어요. 밑에 길쭉한 데가 이걸 가지고 사해, 위에 물 있는 데가 이게 갈릴리 바다입니다. 이쪽에 서쪽이 지중해에요. 여기에 갈릴리 바다에서 흐르는 강이 있어요. 이 강이 여러분 유명한 강입니다. 이게 무슨 강이냐? 요단강입니다.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이해가 안돼. 요단강 건너서 뭐 있는데요.

지금 여기 세일 산 이 근처에서 살던 이삭이 이 근처 살았는데 도망갔잖아요. 야곱이. 형이 죽이려고 하니까. 어디로 갔어요? 옛날 아브라함이 있던 하란으로 도망갔어요. 하란은 저 북쪽, 터키 이쪽에 말이 이렇게 썼지만 거리가 멉니다. 이것보다 다섯 배 멀어요. 하란에 이렇게 가고 있는데 그 소문 듣고 세일 산에서 사해로 돌아서 이렇게 갑니다. 이게 뭐냐? 이게 얍복 강이에요. 여기서 만나요.

이쪽에서는 북쪽에서 내려온 거고, 에서는 세일 산에서 올라간 거고. 여기서 만나요. 만나니까 소문 다 들었지요. 사백 명이 잡아 죽이려고 온 거죠. 여기서 야곱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백 명 끌고 왔으니까 자기를 죽이려고 한 것밖에 안 되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 에서가 보낸 형이 보낸 자객인 줄 알고, 몰래 죽이려는 줄 알고, 안 죽으려고 단지 안 죽으려고 했어요. 사실 나중에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너는 창세전부터 사랑받게 돼있어. 라는 축복을 해주려고 오신 하나님이에요. 창세전에 있었던 일 알려주려고 온 사람이라고. 이 분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이 분이.

여러분, 성령이 찾아오면 성령 붙들고 귀싸대기 때리고 싸움할 랍니까? 성령은 뭐냐 하면, 전에 광주에서 그런 강의했는데.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여기 창세전에 사랑받게 돼있고, 미움 받게 돼있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받는 사람만 뜻이 아니에요. 자꾸 오해하지 마세요. 반드시 사랑받는 사람 앞에 뭐가 있어야 된다? 니 들었잖아, 광주에서. 반드시 미움 받는 사람이 있다 했지요.

그 다음에 성령께서는 개인적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창세전의 뜻을 알지요. 우리는 창세전의 뜻을 몰라요. 왜냐하면 천구백 몇 년도에 태어났기 때문에 창세전부터 몰랐던 거예요.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해요.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모든 걸 알았기 때문에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뜻을 위해서 밑에서부터 흔들어버려요.

흔들어버리면 창세전에 예정돼있지 않은 건 떨어져 나가버리죠. 미움 받게 돼요. 뭐만 남습니까? 창세전에 사랑받게 된 사람만 남지요. 이걸 흔드는 이 작업을 성령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의 여호와의 사자가 하신 일을 성령이 그대로 한다 이 말입니다. 보통 조직신학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하는 일을 예수님만 한다고 이렇게 돼있는데, 예수님만 하는 게 아니에요. 성부, 성자, 성령 다 하셔요. 구약은 신약에 나오는 삼위일체 전부 다를 이야기한다니까. 예수님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일을 다 해요.

이렇게 밑에 흔들어버리면 사랑받기로 된 사람만 남고, 미움 받는 놈 떨어지고. 사실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 뜻이니까 딱 구분이 되지요. 성령과 우리의 만남은 성령은 창세전의 모든 걸 다 알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밖에 모르는 자기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니까 둘이 만나보세요. 맨 날 싸우고 있지, 성령님하고. 야곱하고 똑같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줘도 더 달라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다. 난 이런 걸 기대 안했는데 이런 걸 합니까? 내가 그것밖에 안 됩니까? 딴 것 주세요. 맨 날 하나님 주셔도 맨 날 티격태격 그것만 하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걸 족한 줄 알라. 하면 싫습니다. 요새 그래 사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맨 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있던 성경말씀을 주셨는데 우리는 맨 날 그걸 거부하고 있어요. 그게 싸워야 돼요.

야곱이 에서가 오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만나서 너는 창세전부터 사랑받게 돼있고, 에서는 미움 받고 있다는 그 사실을 내막을 이야기해줘 버립니다. 이야기해줬을 때 야곱은 지금까지 잘해왔던 것이 자기가 죄라는 것을 알고, 야 하나님의 뜻은 내 힘으로 이루는 게 아니구나. 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한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창세기 33장에 보면, 에서가, 내가 널 인도해줄게. 할 때 야곱이 거절합니다. 형님이여, 절 인도해주시는 분 따로 있습니다. 그리는 안 하렵니다. 형 인도받고 가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형은 세일 산 도로 가버리고, 야곱은 어디 가느냐? 세겜 땅에 가서 창세기 34장에 보면 거기서 일을 벌여요. 사건이 터진다고.

34장의 사건이 뭐냐? 디나라는 딸이 있었는데 겁탈당하지요. 겁탈당해서 오빠들이 우르르 가서 그 동네 세겜의 족속의 남자들을 조져 놔버려요. 많이 죽였지요. 완전히 작살내놨어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아버지 야곱이 알았던 그 하나님을 아직도 열두 아들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밟아도 그래 밟을 게 아닌데 얘들은 내 복수는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지가 알아서 지가 성질난 대로 지가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감정이나 이런 게 신앙생활에 인간의 감정이 없을 수 없지요. 기분 좋을 때는 믿음 좋고, 기분 나쁠 때는 믿음도 없고 그런데. 인간의 감정이나 신비로운 것, 그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창세기 34장 보세요. 이거 하나의 역사 아닙니까? 하나님은 실제로 어떤 일을 일으키지, 우리의 개인적인 감정가지고 하나님께서 다루시고 그런 것 아니에요.

십자가가 뭡니까? 실제 사건 아닙니까? 실제 사건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내가 오늘 아침에 은혜 받았다고 은혜 받은 것 갖고 구원받고 그런 것 없어요. 될 수 있는 대로 자기감정에 놀아나지 마세요. 자꾸 감정, 감정 하는데 술 한 잔 먹으면 감정 떠요. 술 한 잔 먹고 믿음 좋고, 술 대신에 부흥회 해서 신경에 마찰시켜서 붕 뜨는 방법 있어요. 황홀 상태에 빠지는 것, 옛날에 많이 해봤지요. 전도사님 많이 해봤지요. 목사는 살살 쳐도 교인들은 더 친다니까.

그런 감정 같은 것보다 역사적 사건이 중요한 겁니다. 에서가 어디서 만나고, 그 역사 하나가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창세전에 확정됐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까지 쉬운데 뭐가 어려우냐? 어렵기 때문에 이제는 저 혼자 할게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첫 번째 하는 게 여종과 플러스 그 자식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정실부인과 그 자식들, 맞지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두 번째 먼저 했구나. 두 번째가 레아와 그 자식들, 세 번째가 뭡니까? 라헬과 그 자식들. 이렇게 구분지어서 자기에게 쳐들어오는 에서를 맞이합니다. 자기는 제일 앞에 있어요.

왜 같은 열두 자식인데 열두 명 전부다 어느 자식 안 귀한 자식 없다 하잖아요. 왜 이렇게 열두 자식을 삼 층으로 차별화시키느냐? 왜 차이를 두느냐? 이 차이가 뭐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결론부터 미리 드립니다. 너무 어렵게 하면 골치 아프니까 미리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 주신 언약 안에는 사랑과 미움이죠. 로마서 봤죠. 다른 말로 하면 축복과 저주 아닙니까? 하나님은 날 사용하되 하나님의 장차 일어날 하나는 사랑하고, 하나는 미워한다는 그 양면성이 나라는 사건을 통해서 양쪽을 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은 에서와 만나고 자기한테 주어진 열두 명의 자식과 많은 재산과 에서와 만나는 모든 관계는 뭐냐 하면, 나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누구는 사랑받고, 누구는 미움 받는다는 그 언약체제의 내용물이 지금 모든 사태의 관계를 통해서 나에게 주어져있다는 거예요. 그럼 내가 할 일은 그걸 표현하는 것, 어떤 것이 사랑받고 어떤 것이 미움 받느냐? 그걸 표현해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나에 대한 일으키는 하나의 반응들이다. 하나님이 나한테 일으키는 일의 내용들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것 같은데 사실은 과정이 다 있어요. 잠깐만 하고 쉽시다. 여러분 많이 피곤하시니까. 사랑과 미움이라 했는데 창세기 식으로 하면 축복과 저주 아닙니까? 축복과 저주 받는 것이 어떤 사람은 축복 받고 어떤 사람은 저주 받느냐를 보여주는 기능을 남이 아니라 내가 해야 된다는 것을 야곱이 알고 있었다 이 말입니다.

저는 목사 입장에서 교인들에게 관심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교인이 몇 명이냐 관심 없어요. 저 교인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냐? 목사의 임무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건 하나님께 맡기고, 제가 이런 것 아시면 천국 갑니다. 그 내용을 담아주는 거예요. 목사의 설교라 하는 것은. 이것 아시면 천국 통과됩니다. 라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 세상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직업이 없어요. 사람을 천국이냐, 지옥이냐? 지옥이냐, 천국이야? 그런 것을 관여하는 직업이 목사란 직업입니다. 이거는 천사도 사모할 직업이에요.

그 사람이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돌아가시면 천국 가겠습니까? 하는 그 내용, 어떻게 하든지 천국 가는 사람, 목사가 욕 얻어먹어도 좋은데 뒤에서 무슨 소릴 들어도 좋은데 다만 이것 아시면 천국 갑니다. 하는 천국 제발 가 주세요. 빕니다. 천국이나 가세요. 그런 마음으로 그 내용을 설교에 담아요. 설교자는. 정 목사, 서 목사 다 그렇게 하시겠지만. 관심이 그것밖에 없어요.

야곱이 축복과 저주가 자기 내에서 양쪽 다 있다는 걸 압니다. 다 구원받으면 참 좋겠지요. 그런데 누가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두 가지 기능을 다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종 플러스 자식. 원래 야곱의 첫 번째 아들이 뭐냐 하면, 적어보겠습니다. 이거는 이번 시간 끝날 때까지 안 지우겠습니다.

레아 자식이 있죠. 르우벤이라 합니다. 그 다음에 누구죠? 시므온. 그 다음에 레위, 그 다음에 유다. 번호로 매겨야겠어. 르우벤 1, 시므온 2, 레위 3, 유다 4. 그 다음에 언니가 아기 낳으니까 시기가 나서 라헬이 자식을 낳으려 하는데 뭐가 없습니까? 라헬은 하나님이 은총을 아직 주질 않아요. 안 줘서 뭐 하느냐 하면, 라헬의 시녀였지요. 빌하죠. 빌하가 뭘 낳느냐 하면, 단이 다섯 번째 태어났고, 그 다음 여섯 번째 납달리가 태어납니다.

그 다음에 아하, 여종으로 되는 그걸 알고, 안 지려고 레아의 여종 실바가 일곱 번째 갓을 낳지요. 그 다음에 아셀이 여덟 번째. 그 다음에 누가 하느냐 하면, 이번에는 실바가 낳고 난 뒤에 아홉 번째, 열 번째 누가 낳느냐 하면, 레아가 낳았지요. 아홉 번째 잇사갈, 값을 쳐놨다. 그 다음에 스불론, 이제는 끝내자, 내가 이겼지.

그래 하고 난 뒤에 라헬이 진짜 열한 번째 아기를 낳지요. 누굽니까? 유명한 요셉, 요셉은 나중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둘로 나눕니다. 그 다음에 나중에 헤어지고 난 뒤에 따로 베냐민 열두 번째. 그래서 자식이 열두 명 됩니다. 나중에 요셉 지파가 둘로 나눠지지요. 그러면 열세 지파 되는데, 그 대신 레위의 지파가 대표가 한 명 빠져서 열두 지파가 됩니다.

여기서 신명기 27장에 보면, 저주 쪽에 속하는 쪽과 축복 쪽의 축복을 표현할 때 열두 지파를 여섯 개, 여섯 개 나누어서 저주를 선포하는 지파는 어떤 지파냐 하면, 여기 저주를 선포하는 지파를 내가 한번 뽑아볼게요. 대표자로 르우벤, 저주니까 이건 빨간 걸로. 르우벤, 그 다음에 갓, 그 다음에 아셀, 그 다음에 스불론, 그 다음에 납달리, 단 이게 저주에 속하고.

그 다음에 축복에 속하는 것은 나머지 시므온, 레위, 유다, 그 다음에 요셉, 베냐민,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잇사갈이 포함되는데 왜 잇사갈이 포함되느냐 하면, 원래 종으로 다 해버리면 더 돼요. 하나가 많다니까. 잇사갈 이게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원래 누구 자식이냐 하면 라헬에 속한 자식이에요. 그래서 잇사갈도 여기에 속해서 6:6 숫자를 맞추어서 하나는 저주, 축복이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열두 지파, 야곱도 그래 생각하는데 야곱이 열두 지파를 생각할 때 반드시 내 안에는 무슨 구조, 무슨 구조? 사랑받기로 돼있는 구조와 저주 받기로 된 구조가 다 자기 안에 있다는 겁니다. 제 말을 이렇게 오해하지 마세요. 열두 지파 가운데서 이 지파는 지옥 가고, 이 지파는 천국 간다. 그 말이 아니고, 이 사람들은 하나의 기능인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의 기능인, 천국 가는 기능인, 지옥 가는 짓을 해도 천국 가요. 다만 일의 역할에 그런 역할을 한다니까. 엠비씨 탤런트는 다 탤런트에요. 그렇지만 탤런트 가운데 좋은 역할 탤런트 따로 있고, 나쁜 역할 탤런트 따로 있잖아요. 다같이 엠비씨 탤런트라니까요. 나쁜 역할 한다고 케이비에스 탤런트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다같이 축복 받은 사람이지만 축복 받았다는 게 뭐냐 하면, 축복 받았다는 말이 내가 구원받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자는 사랑하기로 작정했고, 어떤 자는 미워하기로 작정했단다. 라는 내용을 표현해 주는 대상이 될 때 그게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아하, 이러면 지옥 가는구나. 이래서 구원받는구나. 양쪽 다를 아는 사람은 성도고, 지옥이고 천국이고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은 지옥 가는 거고 그렇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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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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