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5월 9일강의 고후 7장 3절
안산 5월 9일강의 고후 7장 3절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509 고후 7장 3절
관리자(IP:112.♡.81.50)
10-12-10 09:51
안산080509고후7장3절 / 이근호 목사
오늘은 고린도후서7장2절부터3절, 3절 한번 봅시다.
『고후7: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돼있죠? 갑자기 사도바울이 하는 이 어투나 내용이 단호하고 심각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함이라」이 말은 결국 너희들이나 우리나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지금 죽을 지경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자, 이렇게 나오잖아요. 요즘 우리나라에 예수 때문에 죽을지경이 되지는 않죠?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과 현실감이 떨어지는 걸로 봐요. 이게 문제예요. 이게 바로 마귀의 역사인데요,
예수님을 마귀가 시험할 때 뭐냐 하면, ‘현실감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마라,’ 이 말이죠. 지금 세상이 평화하고 질서 잡혔는데 예수의 하는 모든 것이 과격하고 상당히 극단적이고 도발적으로 들린 겁니다. 그 당시의 예수님 발언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서 처단되었지만 조용한 세상에 왜 설치냐 이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교회시대나 예수님 당시의 시절의 이들 초대교회와 오늘날 요새 교회는 교회가 그게 아니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죽기 살기로 한 거예요. 예수 믿는 것을. 학원에서 기술 하나 배우는 게 아니고, 천당 가는 기술 배우는 게 아니고, 거기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본문3절 다시 읽어보면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말하기를 “ 우리 죽을지경이 됐는데, 그래 좋다! 우리 죽더라도 나 혼자 안 죽고, 나와 같이 죽자. 나와 같이 죽으면 너희들 나와 같이 산다. 함께 죽고 함께 살자, 이 더러운 세상 더 살면 뭐하노!” 이런 식이라니까요 지금.
예수 믿는 게 굉장히 심각해요. 진지하고. “하시는 일은 잘 되십니까?”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고물(?)이야기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말은, 이제는 죽었다. 하지만 죽어도 살잖아. 우리 그 힘으로 삽시다. 완전히 큰 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이야기한 겁니다. 오늘날처럼 안일하게, 여가삼아 취미삼아 문화 활동삼아 심심풀이 땅콩 먹듯이 교회 오고 말씀 보는 게 아니고 실제상황, 성경에 나오는 이 세계가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문화생활이 아니고 실제 영적세계가 여기에 침투돼 있다고 보는 거예요. 실제로.
마귀가 역사하는 이 세상에 예수님 나타날 때 마귀가 예수님보고 ‘너 죽인다’ 이런 식으로 달려들 듯이 진짜로 성령받은 사람이 활동할 때는, 이 세상이 그냥 두지 않고 ‘너 죽인다’ 식으로 나오고. 당시 고린도교회도 그랬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교회 같은 경우 방언 같은 게 있었거든요? 방언이 있었고 은사가 활발했습니다.
따라서, 은사를 받는다는 말은 이제는 은사 받았으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지, 이것 받아 어디 개척교회나 해서 목회 성공해볼까? 이런 생각 없었어요. 모든 것을 예수님이 가르쳐준 세계에 모든 것을 걸어버렸어요. ‘아이고, 됐다 이제, 나는 살았다’ 이런 식으로요.
사람이요, - 뒤에 근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만 - 사람이 생각해야 될 듬직한 게 있으면 나머지는 별로 안 중요하게 여깁니다. 생각해야 될 듬직한 게 있으면. 만약에 비행접시가 떴다 하면, 지금 내 발톱이 아프다. 그런데 비행접시가 떠버리면 발톱 아픈 걸 잊어버리잖아요. 비행접시가 떴는데…중요한 문제 아니죠.
다니엘과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갈 때, 촌에 땅 사놓은 거 생각 않겠죠. 그죠? 지금 불 속에 들어갔을 때 과연 살겠느냐 하는 그런 문제에 있을 때 다니엘 세 친구가. 그처럼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불과 몇 십 년 전에 일어난 사건 아닙니까. 실제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거든요.
세상에 이런 일은 없다, 말이죠. 사람이 죽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일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기적이 눈앞에 나타났다고 봤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걸어버린 겁니다. 모든 것을 다 거니까 세상이 거기에 대해서 반작용이 나오지요. ‘예수는 부활 안 했다! 사도바울이 사기친거다’ ‘너희는 그런 이단의 말에 현혹되지 마라’ 강한 반발도 강했습니다. 사울도 그랬던 사람이고.
그런데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난 뒤에, -사도바울이 더 심하게 대했죠. - 그때부터 세상은 듬직한 현실이 따로 있고, 나머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은 시시한 껍데기, 아무것도 없어. 아무런 의미 없는 그런 시시한 세상이었죠. 얼마나 시시한 세상이었냐면 고린도전서7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재산 있는 자는 그거 다 못 쓰는 것처럼 하고, 장가 안 간 사람은 가려고 애쓰지 말고, 시집 안 간 사람도 가려고 애쓰지 말고,」지금 다른 현실이 있는데 그런 시시한 현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 정도로 사도바울은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강한 현실감 속에 그들은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성경을 보고 있는데, 만약에 이 성경과 우리가 괴리가 벌어진다면, 고린도후서 현실과 오늘날 우리 현실과 벌어져있다면, 지금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비현실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남들 다 그리 산다는 이유만으로. 예? 나 빼놓고 남들 다 달리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진짜 현실인 걸로 간주되고 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외치고 있는 ‘우리 함께 죽자! 함께 살면 되잖아!’ 심각하고 진지한 현실은 온데간데없고, 지금 에너지 석유값 올라가는 문제로 온 국민이 쏠려 있잖아요. 쇠고기, 광우병 등
사람들이 성경을 덮어버리니까 마귀가 가만두지 않고 중요하지 않는데 중요하다고 마귀가 세뇌시키는 문제들이 자꾸만 터지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아휴, 바빠가지고 성경 볼 시간 없심다” “ 아이고~ 집안에 심각한 일 있어가지고 성경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무슨 심각한 일이 성경보다 심각한 일이 어디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현실보다 더 심각한 현실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데! 예?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데 그보다 더 희한하고 진지하고 놀랍기 짝이 없는 그런 현실. 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없어요! 그런 현실 자체가 없다고요.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1장 한번 봅시다. 『고린도후서1장8-9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여기 하나님 의지한다는 말의 조건이 뭐에요? 누구를 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지 말고」
현재 21세기가 돌아가는 우리나라 분위기가요,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 아닙니까. 이거는 21세기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고린도교회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예요. 믿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자기 안 믿고 누굴 믿는다는 말입니까. 누가 보아도요. 여러분이 봐줍니까? 아무도 안 봐주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방법이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어느 방법이냐면, -이런 말하기 여러분께 미안합니다만 -자기 자신을 의지하다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의지할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그 다음에 고린도후서1장9절의 말씀을 지금 이대로 21세기 이 자리에서 그게 부각되도록 하시는 방법.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우리를 성경 덮습니다. 안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구원 못 받죠. 왜냐면 넓을 길로 가기 때문에.
그럴 때 하나님 방법이 뭐냐면, 우리는 덮은 성경을 하나님은 펼치시고 고린도후서1장9절을 가지시고 이걸 그대로 ‘성도에게만’ 자기 백성에게만 적용되도록 유발시키시는 하나님. 그래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고 누구를 의지하도록? 지금도 살아계시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만 의지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전 세계 곡물 값 올라가면 전 세계에서 제일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못 사는 나라부터 타격을 입어요. 모든 식물 수입이 안 되면, 그야말로 흙으로 만든 케이크를 먹고 4시간 동안 배를 불려야할 정도로 물로 아까워! 물도 아까워서 수돗물이 없어가지고, 팩에 흙탕물 넣어 날씨 더운 나라에 네 시간 놔두면 이게 정화가 되어 먹을 수 있다 했어요. 밑에는 흙이 고여 있죠. 그것까지 흔들어 먹지 말고, 흔들어 드시면 안되요. 맑은 물만 마시면 된답니다. 못 사는 나라, 도미니크나 아이티라든지 소말리아라든지 이런 못사는 나라는 현실이 되거든요.
그리고 한 나라에서도 잘 사는 사람 외에 못 사는 사람은 타격이 있습니다. 기름 값 올라가면요. 예를 들어서 트럭을 몰아야 장사를 하는데 기름 값 올라가면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까. 그럴 때 이 현실에 대해서, 동일한 현실 속에서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못사느냐, 왜 나는 여유 있게 못사느냐’ 라고 근심하고 걱정한다면 그럴 때 사람들은 ‘오! 신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잖아요.
평소에 우리가 ‘우상은 안 섬긴다,’ ‘우리는 참 하나님 섬긴다,’ 하지만은 사람이 사정이 어려우면요, 경제사정이 어려우면 본인이 섬긴 것이 우상이었다는 걸압니다. 평소에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하나님이 실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만든 우상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이 경제가 어려워져서 수입이 적을 때 그 때 이게 드러나죠.
왜냐면 개인이 성경을 효율성 없다고 밀치니까. 더 쉽게 말합니다. 사람이 먹고살기 힘들수록 성경을 보는 게 아니고, ‘역시 내가 세상을 잘못 생각했어!’ ‘성경 속의 세상이 진짜 세계인데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생활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성경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성경은 배부를 때 보지 배고플 때는 볼 책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면 배고플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되니까. 그런데 성경을 펼치면 뭐가 나옵니까?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시니라.」
그 성경말씀이 무슨 보탬이 됩니까. 안 되잖아요. 그거 외운다고 하늘에서 돈이 툭 떨어집니까? 안 된다 이 말이죠. 이거 한다고 남편이 어디서 복권 당첨돼가지고 몇 천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아니잖아요! 그러니 갈수록 성경을 천대받고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누굴 공격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공격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예수님은 이미 한물 간 과거 인물이기 때문에 공격대상이 안 되고, 누굴 공격했냐 하며는,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공격했지요. 그 예수 믿는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교회 교인들 같은 사람입니다. 고린도교회 같은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경제가 어려워도, 자기 먹을 것 없어도 ‘주께서 구름타고 오십니다.’는 약속.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걸 한결같이 믿으면서 그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에 대한 기쁨을 소멸시키지 않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누가 핍박했습니까? 사울이란 사람이 공격했다고요. 사울은 예수님을 공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뭐라 합니까? 「네가 왜 나를 공격하느냐」이렇게 돼있죠? 지금 길에 가는 사람들이 성경공부나 말씀에 관심이 없다. 그러면 여기 3층에 예수님이 계시면 관심을 가질까요? 아니다 말입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예수를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 것은요, ‘기존 세계관’이 엄청 다른 거예요.
지금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고, 소위, 복음 안다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자기 세계관을 부셔야 돼, 이건 상상이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성경을 대하면 결국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결국은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을 욕하게 되요. ‘당신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냐!’ ‘예수를 알았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 당신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냐!’ 이렇게 하고, 예수를 모르면 모른 대로 예수에게 관심이 없고.
이러나저러나 이 ‘세계관’이 안 깨지면, 예수 믿는 거 다 우상 믿는 거예요!! 적어도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려면 사도바울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되요. 그래야 비로소 성경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어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아!” “예!” “우리 같이 죽고 같이 살자!” 이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 이야기 하지 말고, 돈이나 몇 억씩 풀지!(ㅋ) 돈 주면 좋아하고 예수 잘 믿을 건데. 그 이야기 아니고 뭐라 합니까. “내가 돈 풀어줄게, 하나님께 기도해서 돈 줄게”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뭐랍니까? “우리 같이 죽자, 같이 죽어야 같이 사는 거야!”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21세기에 우리에게 무슨 위로가 되고, 무슨 기쁨이 될 수 있어요 이게!
이런 이야기했던 사도바울도 결국은 고린도교회에게 짤립니다! 배척받아요. 그래서 화가 잔뜩 나있어요 사도바울이. ‘내가 매를 들고 갈까? 내가 매를 꼭 들고 가야 되나?’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뒤에 보면 나와요. 「책망할 것을 얻기를 원하노라!」이 말은 책망할 게 많다, 이 말 아닙니까.
세계관이 부셔져야 되고, 세계관이 달라져야 될 건데, 우리는 자기 세계관을 고이고이 간직하면서 거기다가 예수만 달랑, -마치 소스 찍어먹듯이- 칼국수에 간장 넣듯이, 예수만 뿌리고 간 맞춰서 먹으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이건 뭐 ‘**교회’ 교인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존 세계관이 부서져야한다는 생각은 않고 예수님으로 간을 맞추려 하네. 예수님으로 간 맞추면 그 예수는요, 진짜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뜨거운 칼국수 갖다 버릴 사람들이에요. ‘칼국수 먹는데 왜 너 방해하노!’ 이러면서 말이죠. 우리가 고린도후서7장을 하면서 전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이나 이 모두가 21세기 속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있어요.
예수 이름으로 21세기를 달라지기를 바라요. 이 세상 자체가 부서져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지금 세상을 괜찮은 세상으로 바꾸는데 이 성경이 어떤 기여를 하며 어떤 도움이 되며 우리 가정 형편 나아지는데 얼마나 도움 되는가? 그걸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배척할 사람이 딴 사람이 아니고 우리가 배척할 사람입니다.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그런 것은 ‘노동당’에서 국회의원에 나오는 사람이나 하지,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그거는 노동운동하는 그 사람이 할 일이고, 예수님은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그런 거 안 해요. 현제 네가 그동안 안 놓고 있는 세계관은 마귀가 만든 세계관이고 거기에 만약에 예수를 끼워 넣는다면 그거는 마귀가 지어낸, ‘마귀가 조작해낸 예수를 지금 신봉’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어쩌란 말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사도바울의 세계관이 겸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의 세계관이.(가르치는 목사님 세계관이 이 말씀을 듣는 자에게 주어지게 돼있음-녹취자)
사도바울의 세계관이 뭐냐! 고린도후서1장9절을 봤지만 1장6절을 한번 봅시다. 『1장5절6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 고난을 없애는 게 아니고 우리가 고난 속에 예수님이 십자가 졌던 고난이 오게 되면, 우리는 어떤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뭐로 기뻐한다? 예수님이 주신 위로만으로도 우리가 ‘기뻐하는’ 그런 세계관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우리에게.
쉽게 말해서, “돈 없어도 예수만으로 기뻐하십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주여! 믿음 주소서) 아주 간단해요. “집구석에 돈 한 푼 없어도 예수만으로 기뻐하십니까?” “예!” “그러면 함께 죽고 합께 삽시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 세계관이니까 OK! 그러면 사도바울과 여러분이 함께 죽고 함께 삽니다. 하는 발언을 고린도전서7장3절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참, 어느 인간이 21세기에 어느 인간이 예수 믿으면서 이렇게 믿겠어요. 아마, 성령께서 특별히 역사하사! 그야말로 자기에 대해서 더 이상 의지할만한 모든 것이 없어지는 순간… 아내는 가출하고, 자식은 사고 쳐 교도소에 가 있고, 사고당한 가정에서는 2천만원 합의보자고 하고, 가게는 부도나고 집은 불났고, 본인은 당뇨에다 길 가다가 힘없어 엎어져 반신불수 되어 요양원에 있고, 거기다 기초생활보조금도 잘리고, 늙으신 부모님 치매 걸려 자식 찾고 있고, … 이럴 경우에(완벽한 처참 자체 ).
그래서 화딱질 나서리, 운전하다 졸음운전 해 신혼여행 가는 두 사람 죽게 만들고.… 한번 상상해보세요. 뭐,' 자기에 대해서 의지할 게 있어야 의지하지. 그런데도 나는 주님 때문에 살았구나, 하는 기쁨이 있습니까? 이랬든 어쨌든, 어쨌든 살았잖아. 어쨌든 예수님 십자가로 살았잖아! 라고 하신다면 이 고린도후서7장3절이 비로소 이해되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성도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너희들이 단 한 가지 본받기를 원하는 게 뭐냐면, 내「가 당한 고생 그것만 빼놓고 나머지는 다 닥치기를 원한다!」사도바울이 환난 중에서도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나는 항상 기뻐한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환난을 당하면서 그런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노니 비로소 하늘나라가 보이는구나! 이렇게 했다면 우리는 환난 그것만 없고, 환난 없고 나는 주의 나라가 보이니 기쁘구나, 이렇게 살라는 거예요. 사도가. 그 환난만 빼놓고. 자기가 너무 고생했으니까. 환난이 너무 힘드니까.
4절에 봅시다.『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해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여유만만’ 그게 담대죠. 쉽게 말해서 사도는 믿음 좋으니깐 그렇게 용감한 말을 하지, 우리는 믿음 없심다. 우리 믿음에 너무 오버하지 마시와요. 라고 할 정도로 사도가 담대하게 말하고 있다. 라는 걸 이해해달라는 거예요. 왜냐면 정답은 정답이니까.
위로 한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 비위맞추는 식의 정답이 아니고, 진짜 위로는요, 정답을 위로하는 게 위로 아닙니까!
강의 다시 해봅시다. 지금 세상은 지금 상상의 세계 꿈속에 있어요. 마귀가 만든 세계라고요. 마귀가 만든 그 세계관을 우리가 안 부셔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과 관계없이 돈, 돈, 돈, 돈밖에 몰라요! 왜? 세계관이 그 세계관이니까! 예수님이 죽었든 말든 성경 보지도 않아요. 돈 버는데 보탬이 안 되는 성경 왜 봅니까!
성경의 엉뚱한 세계관 때문에 성경이 싫어요! 넓은 길로 쫒아가는 그 세계관이 우리는 맘에 들어! 호감이 가고. 같이 쫒아 가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펼쳐보면 「같이 죽어야 같이 산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 이 말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얼마나 담대한 이야기예요? 정답이잖아요! 정답이지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느냐, 그것 때문에 위로라 해놓고, 그 다음에 ‘위로’라는 말 계속 나와요.
5절에,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지시와 명령을 쫒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이 있으면 환난 같은 건 없어야 한다,’ 는 생각 아닙니까? 그게 우리 세계관이 잘못 됐다니까요. 암튼 우리 세계관이 다 잘못 됐어요. 무조건!
우리는 하나님이 시킨대로 하면 편안히 할 수 있다, 라는 선입관 갖는 이 자체가 잘못 된 거예요 이게. 한두 군데 고장 난 게 아닙니다. 우리 정신상태가. 우리가 언제 사도바울처럼 따라붙습니까! 걱정 되요. 우리는 처음부터 엉터리에요. 전부 다. 전부 다 자기 편한 거. 자기 배부른 거, 아무 탈 없고 아무 일 없는 거! (주여,)
그것이 공짜로 주어져야 좋아할 타입이에요. 우리 세계관이.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환난 하면 남의 이야기라, ‘지금 무슨 소리 하심까?’ 남의 이야기라. 예수님께서 고생고생 하면서 십자가 졌다 이야기를 들어도 ‘그거 무슨 이야깁니까?’ 남의 이야기예요.
예수님의 고난이 너희한테 온다 해도, 그건 저한테 오면 안 되죠, 저는 그런 예수 싫습니다. 자꾸 타인의 이야기. 그런데 그거는요, 우리 속에 있는 영생의 능력이 얼마나 귀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주께서 알려주기 위해서 환난을 주시는 겁니다!(아멘)
환난을 줄 때, 우리는 ‘아~! 내가 귀한 것 받았구나!’ 내가 연연하는 목숨보다도 더 귀한 생명이 이미 내 안에 들어왔구나! 라는 데서 오는 기쁨이 우리에게 생기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극한 환난 속에 있게 합니다. 내가 살려고 하는 그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 말고! 살려고 하는 목숨은 목숨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하게 들어오는 생명이 진짜 내 목숨이다. 이걸 알려주려고 그런 환경을 통해서 알려줘요.
제가 지금 살았다하는, 기쁘다 하는 말은 뭐냐 하면, 내 목숨이 살아서 기쁜 게 아니고, 내가 죽어도 산 것 때문에 기뻐한다, 이 말입니다. 이 성경대로. 그게 바로 성경 속의 세계관이에요. 그래서 6절에 보면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비천하다’는 것은 돈 푼이나 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위로하는 게 뭐가 있어요? ‘비천하냐?’ 내가 부자 되게 해줄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부자 되게 해주면 될 텐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비천한 자에게’ 뭐한다? ‘위로한다.’ 여기에 화내는 사람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아닙니까! 지금 오빠가 죽었잖아요. 주님이 위로하러 온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여기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화가 난 겁니다.
위로하지 마시고 안 죽을 때 오셔가지고, 안 죽게 하면 되지, 죽고 난 뒤에 사후 처방전. 사람이 죽었는데, 약 이렇게 쓰시기 바랍니다. 한약 두 첩 달이시고…(ㅋㅋ) 죽고 난 뒤에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사후 방문하니까 뭐라 합니까? 그걸 요한복음11장에서 예수님이 그런 소리 들었다니까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요. 죽고 난 뒤에 왜 뒤늦게 와가지고, 위로가 왜 오느냐 말이죠.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위로한 것은 너희들이 예상한 위로가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주는 위로는 어느 정도의 위로냐 하며는, ‘너네 오빠가 죽어도 죽은 게 아니고 살았다!’ 라는 것을 위로하기 위해서 온 가란 말이죠. 여러분 그 위로 받습니까? 여러분 그 위로로 삽니까? 「내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이미 살았다」는 그 위로가 지금의 마지막 위로가 되느냐 말입니다. 마지막 위로. -마지막 위로? 말이 좋다 -
사람들이 교회에 와도 성경 안 보고, 교회서도 목사가 성경이야기 않고, 또 성경에 관심이 없는 것은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합니다만, ‘세계관’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그 세계관은 가꾸어서 우리가 스스로 심은 세계관을 부셔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엉터리 세계관을 갖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성경말씀대로 괴리, 성경말씀 따로 우리 따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성경말씀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어요. 사도바울이 갔던 그 길로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사도바울이 살았던 그 세계로 우리를 집어넣어요.
집어넣을 때 우리는 겁납니다. 화나죠. 불만이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딱 집어넣고 보니깐 내 세계관은 그동안 내가 내 힘으로 살려는, 나를 의지하려는 나의 세계관이 문제가 됐었는데, 그게 아니라 내 속에 누가 함께 있다? 주님이 함께 있어 내가 미처 몰랐던, 주님의 세계관을 내가 내 힘으로 살려고 했던 그 세계관이 비로소 내 속에서 꽃이 피는 거예요.
내 세계관은 죽고, 주님의 세계관, ‘죽어도 너는 살았다’는 이 기쁨의 세계관이 내 속에서 피어나는 그런 일들을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해주고 있습니다.
많은 신학생들이나 목사들이 이근호 목사가 복음을 전한다하니까, 그 복음 배워가지고 한 수 목회에 써먹으려는 생각하고 많이 오셨는데, 그 세계관이 잘못 됐는데 복음이라 하는 것은 지금 죽어도 예수만으로 기뻐하는 것이 복음 아닙니까? 난 그리 알고 있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평소에 말씀 안 보면, 절대로 그런 세계관 누가 이야기해줄 사람 없습니다!
어디서? 어느 동네에서? 어느 지방에서? 세상이 이렇게 급박하고 돈밖에 모르는 세상이 된다 할지라도, 그 어떤 경우라도 이 말씀을 봐야 되는 이유가 내 세계관에 내가 놀아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이 이야기해주는 그런 엉터리 같은, 악마가 만든 세계관에 내가 놀아나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신자가 아니잖아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힘들면 힘들수록, 성경을 계속 공부하고 성경을 봐야 될 이유가 진짜 예상도 못한 세계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죽어도 좋다’는 그런 세계관이 있다 이 말이죠. 주님이 주는 위로가 그런 위로예요. 주님의 위로가. ‘어렵나? 돈 몇 푼 더 줄게,’ 이런 위로가 아닙니다! “어렵나?” “어렵심다” “얼마나 어렵노?” “죽을지경임다” “죽자!” “같이 죽고 우리 같이 살자” 이게 고린도후서7장3절 아닙니까!
7장3절 본문 가지고 설교하면, 개척교회 하나도 안 남습니다. 이렇게 어렵더라도 성경을 봐야 될 이유가 이미 우리가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주는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은 마귀에게 놀아나는 거예요. 이미 내 속에는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살기 바빠 가지고 질식시켜 버려요. 다른데서 기쁨을 찾으니까. 다른데서 기쁨 찾는 건 부자들이 다 가져가버렸으니 우리에겐 없지요.
세상에 돌에 맞으면서도 얼굴은 천사처럼 된다는 게, 이걸 성경에 없는 소리 같으면 제게 욕하세요. 스데반집사는 돌에 맞으면서도 얼굴이 어떻게 됐다? ‘천사처럼’ 됐어요. 천사처럼. 그거 성형한 거 아니고 마사지 받은 거 아니에요. 강남 아줌마들은 성형 받아 천사처럼 됐지만, 사도바울은 돌에 맞아서 천사처럼 됐어요. 돌에 맞아서 천사처럼 된다면 강남 아줌마들 돌에 맞아서라도 천사처럼 될 거예요.
얼마나 세계관이 달랐으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얼굴이 천사처럼 될까요? 얼마나 세계관이 달았으면, 우리와 달랐으면. 아직까지 우리에게 돌 던지는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의지하라는 말입니까? 그 말이 아니고, 스데반집사는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할 필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뜻이에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우리가 자신을 의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알겠지요?’ ‘저 보세요, 저는 돌에 맞아도 이렇게 기쁘잖아요.’ 라는 뜻으로 이야기한 겁니다. 성경은 그걸 위해서 있는 겁니다. 성경의 위로가.
그게 안 되니까, 8절에 보면, 그게 안 되니까 근심하는 거예요 사도가.『고후7: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
세계관이 다르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고, 담대한 편지를 읽고 근심에 빠진 거예요. 무슨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 다 있냐? 기도하면 들어주고 응답해주고, 아쉬운 것 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그런 예수님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사도바울이 편지하는 것을 보니까 세상에 우리가 원하는 건 하나도 않고 같이 죽고 같이 살자,는 엉뚱한 소리나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으라, 이런 소리나 하고, 하나님께 위로 받을 게 없으면 우리는 근심만 하면 되겠네, 하고 잠시 근심하다가
‘아하! 우리가 지금 사도의 편지를 받고도 우리가 기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세계관이 잘못 되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그 회개죠. 회개하고 난 뒤에 우리가 지금 그전까지는 엉뚱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을 들어도 기쁘지도 않고, 좋아하지 않았구나! 우리가 엉뚱한 곳을 바라봤구나!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할 때는,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야되는데, 우리가 엉뚱한 길로 가면서 그 길로 가는데 만족스럽게 안 도와준다고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했으니까,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우리가 가는 길이 생명길인데, 우리는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생명 길로 빼달라는 엉뚱한 소리를 했으니, 아하, 잘못이 우리에게 있었구나! 우리 속의 기쁨이 우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미 사는 단계, 살았다는 생각은 못하고, 왜 자꾸 살려고 했을까? 이 심적인 부담이 우리를 괴롭게 했구나! 라는.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되요, 기독교란! 복음이란 것은 뭐냐, 하나님이 어떤 남자를 죽인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남자를 죽였는데 남들 보기에는 그건 하나도 기쁜 소식이 아니에요. 그런데 십자가의 영이 온 사람에게만, 어떤 남자란, 하나님께서 내 대신 죽였다, 그래서 나는 살았다. 그 자체로 인하여 이 세상의 억만금을 준 것보다 더 기쁨이 오게 돼 있습니다.
이거는 누가 속여도 속일 수 없는, [십자가에 예수님의 죽음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남자를 죽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모든 뜻이 어디 있다? 이젠 딴데서 찾지 말고 어디서 찾으라? 하나님께서 어떤 남자를 죽였다는 그 사실에 진짜 하나님 뜻이 거기에만 있고 나머지는 뜻이 없어요. 오직 거기에만 하나님 뜻이 담겨있어요.
왜 죽였습니까? 잘못된 세계관 속에 죽어가는 우리를 어떻게 하기 위해서? 영생 주시기 위해서 어떤 남자를 죽여 버렸다 말이죠. [그분이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사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사는 것이 되겠지요. 이게 바로 십자가 복음이며, 이것 말고 다른 복음 전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런데 방금 제가 한 이야기, 이 이야기가 당시 고린도교회 환난이 있을 때 처음엔 위로가 안 돼가지고 많이 근심을 했다는 거예요. ‘에구~ 안다, 다 안다, 아는 것 또 하냐? 그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 이런 식으로 많은 반발을 했었는데 사도가 또 그럴 줄 알고 근심을 했는데 지금은 사도가 어떻게 합니까? 기쁘다! 이 말이죠. 왜? 분명히 근심할 게 없는데, 근심이 있었어도 길지 않고, 짧게 근심하고 회개해서 다시 주의 뜻대로 돌아오니까, 내가 기쁘다. 하는 소식을 듣고 기쁨의 편지를 또 보낸 겁니다. 이게 두 번째 편지예요.
10절에 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사도는 말을 해도요, 제3의 여지가 없어요. 극단적이에요. 극단적! 과격해요. 게, 걸, 윷이 없어요. 뭐라합니까?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금심은 뭐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디 이룬다? 구원! 영생에 이르고, 세상 근심은 어디를 이룬다? 사망을 이룬다.
이 말을 간단히 얘기하면, ‘너희들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이 말이에요. 너희들이 스스로 너희를 지옥보내려고 환장했구나! 그래, 많이 해라 세상근심.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해? 지옥가려면 무슨 짓을 못해? 많이해라! 이 말이에요. 근심을 하려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세계관이 잘못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근심을 해야지! ‘나는 괜찮은데 왜 안 채워주느냐!’ 고, 쌀 독에 쌀 떨어졌는데 왜 안 채워주느냐고! 은행에 잔고 없는데 왜 안 채워주느냐고!
이런 식으로 근심하게 되면, 그게 바로 세상 근심입니다. 목사 개척교회 하는데 교인 안 온다고 근심하고, 목사 월급 안 올려준다고 근심하고, 오는 교인 둘이 나오다 다음 주에 하나 나와 근심하고,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60도 안돼서 돌아가시면 이런 이야기 했어요. ‘참 안됐다! 나는 이렇게 일찍 주님 부름 받아 천국 가서 쉬는데, 아이고, 이 사람들 생각하니 안됐다, 세상근심 하려고 더 살아야 하니 불쌍해서 못 보겠다, 지질이 복도 없지, 왜 저리 오래 사나? 80넘어서 더 살려고 수술한 거 보면 기가 차다. 참 지질이 복도 없이. 인사하는데도 복 없는 소리만 해! 복 받아 오래 사이소! ’ 세상근심 많이 하소, 이 말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세상근심 많이 하소, 이런 뜻이에요(고린도후서7:10). 」
사도바울은 생각이 다르니까, 사도바울은 삼층 천 까지 올라갔잖아요. 천국을 봤잖아요! 세계관이 다르니까 하는 짓거리 보면 전부 다 엉터리라, 제가 새로 쓴 책에 이런 글이 있어요. 인생실패! 인생실패! 하지만, 죽음이 자기 목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국회의원, 대통령 돼도 실패작입니다. ‘죽음이 나를 쥐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이 죽게 되면, 어떤 옷을 입어도 개악(경상도 말) 한데, 사람이 죽게 되면 어떤 옷을 입어도 촌스럽게 됩니다. 제 딴엔 화려해도 죽으면 색이 바래지죠. 바래지면 색깔이 떠나죠. 우리의 목숨도 색깔처럼 똑같습니다. 안개처럼 기온 올라가면 없어집니다.
사망에 이른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은, 다시 얘기합니다. 세계관이 바뀌면 되요. 무슨 세계관으로? 사도바울의 세계관, 예수님의 세계관. 세계관만 바뀌면 이미 우리는 산 사람이에요. 그리고 일찍 죽는 게 복입니다.(어떤 목사는 저주라고 하던데 ㅋ) 세상근심에 세월 보내지 마세요. 그 귀한 세월을 왜 다 보내십니까. 그래서 11절에 보면 사도가 분통이 나옵니다. 한번 읽어봅시다.
『고후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
하나님의 뜻이 임하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한다고요? 순수하게 만들어요. 순수하다는 게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뭡니까,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다 나오지요. 변명하고 간절하고 분하고 두렵고, 사람 속에 있는 더러운 벌레, 바퀴벌레 딱정벌레, 더러운 벌레들 있잖아요. 이게 하나님께서 손대니까, 뚜껑 열리니까 속에 이런 더러운 것들이 있으니까 세상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더러운 욕망들이 우리 속에 이었던 거예요.
뱀이 열 댓 마리 들어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징그럽지요? 천하 징그러운 게 뭐냐, 뚜껑 덮인 우리 마음 아닙니까. 이걸 하나님께서 뚜껑을 여니까 그 속에서 뱀 같은 우리의 욕망들이 여과 없이 다 튀어나옵니다. 이런 것들이,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이런 것들이 이 땅에 있는 우리를 힘들게 했습니다.
사도바울 보세요. “우리 죽자” 이거는 회충 요충 다 빠졌어요. 깨끗해졌어요. 주님의 소망의 나라, 보이지 않은 주님의 천국밖에 없어요. 깨끗한 거예요. 12절 봅시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간절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다. 이 말 아닙니까.
14절에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
디도를 보낸다 하는 이 말은 뭐냐 하면, 디도란 사람이, 사도바울이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다 아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고생한 가운데서도 사도바울은 기쁨으로 살았던 것을 디도가 고린도교회에서 다 증거하고, 고린도에 있는 디도가 누구에게 오고? 사도바울에게 오므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이 또 ‘너희들이 회개에 이른 것’을 보고 기뻐하고.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디도가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떤 기쁜 소리를 전했습니까? 세계관이 달라졌고, 세상 사람처럼 세상 근심 때문에 살아간 것이 아니고, 이제는 우리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라는 회개하는 기쁜 소식이 오고가고 하니까 이게 바로 환난 가운데 있는 사도가 신앙생활에 있는 큰 위로가 아니고 뭐냐 말이죠.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 생활 하고 있습니다, 하는 그 위로만큼 늘 주님을 향해 소망을 갖고 있고 하늘나라에 소망 두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 두지 않습니다. 라는 삶 자체가 형제들끼리 얼마나 큰 위로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이 성경이.
15절 봅시다.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내가 너희에게 바른 소리 한 것, 지금 와서 후회하지 않고, ‘내가 바른 말 했다, 내가 옳은 말 했구나,’ 내가 처음 말할 때 너희들 상처 입을까 싶어서 걱정했는데 디도를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사도님이 그런 얘기해가지고, 오히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회개를 해 고맙다, 고 이야기 하더라, 그 소리 듣고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이런 뜻이에요. 이 편지 자체가 쭉 보게 되면, 현재 기름 값 오르고 사료 값 오르고 살기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이것보다 더 궁핍하고 기근이 심했었어요.
지금은 경제가 농사 안 지어도 땅 가지고 먹고 사는 시대예요. 그 당시에는 비 안 오고 기근 들면 농사 안 되면 모든 게 망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바로 예수님의 복음은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 더 빛이 나고, 죄인이 공짜로 영생 받은 것이 어떤 경우라도 없어지지 않는, 진짜 귀한 은혜를 받았구나. 그걸로 서로 위로했듯이 우리 안산모임도 이미 살았다는 사실로, 위로 받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초대교회에 사도가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성경을 덮어버리면 남의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성경을 펼치고, 성령을 통해서 그 때의 현실이 지금의 현실로 주어진 것을 보면, 우리가 쓸데없는 세상 근심 가지고 쓰레기만 담겨있는 우리마음으로, 시커먼 마음으로 근심을 자초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마귀에게 속아 넘어갔던 이러한 잘못된 세계관을 깔끌하게 벗어버리고, 환난가운데서 기뻐하고, 주님 주신 그 용서하심을 감사하는, 그러한 천국의 소망을 가진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아디. 아멘.
관리자(IP:112.♡.81.50)
10-12-1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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