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5월 9일 강의 엡 2장 15절, 16절
서울 5월 9일 강의 엡 2장 15절,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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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09 엡 2장 15절,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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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15 10:36
서울080509a엡2장15절
에베소서 제 11강 (이 근호목사, 2008년 5월 9일-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2:15 “원수된 것은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있는 같습니다. ‘나는 십자가 안 믿고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과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과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몰라도 예수는 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누군가를 알면 그 사람이 내 대신 숟가락 들고 밥도 대신 먹어주고 이발도 해주고 목욕도 해 주고 그렇게 하는 겁니까?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해서 그가 내 대신 숙제도 해주고 내 대신 돈도 벌어주고 내 대신 다 살아주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알더라도 일은 내가 해야 되는 겁니다.
교인들이 여기 있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면 교인들이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거기 계시면 우리가 필요할 때 마다 호출해서 얻을 것 얻고 챙길 것 챙기는 겁니다. 그냥저냥 살다가 힘들어지면 복이나 따내기 위해서 ‘나는 부처를 안 믿고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압니까?”
“압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인생이 당신속에 들어오면 당신은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그렇게 물으면 사람들이 상당히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가신 길은 가시밭길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은 고생길입니다. 고생하신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와 버리면 나도 예수님과 같이 고생할 것이 뻔하고 예수님과 같이 가시밭길로 갈 것이 뻔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장가를 안 갔습니다. 그러면 나도 같이 예수님처럼 장가 안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전세방조차 제대로 없어서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들어와 버리면 나도 전세방도 없이 전전하면서 노숙자 생활 할 것이 아주 농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그저 세상사람 누군가를 안다는 것처럼 ‘내가 그 사람을 잘 알지.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아봐서 잘 알아’라고 약간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고 필요할 때 아쉬울 때 찾아가서 상담한다는 식으로 안다 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이 근호 목사를 안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대구우리교인들도 이 근호 목사를 다 압니다.
알지만 저 대신 인생을 살아주는 사람, 저 대신 설거지를 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전화를 해서 상담은 하지만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한글로 되어 있지만 의외로 어렵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기 힘이 듭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냥 계시고 내가 필요할 때 찾아가서 얻고 싶은 것을 얻어 챙기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알려주면서 우리보고 하는말이 ‘너희들은 예수님이 하신일을 아는가’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아느냐,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떻게 일을 하셨는가? 그것을 네가 알고 인정하고 신뢰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거예요. 얼마 전에 서해안 해변가에 낚시 하는 사람들이 죽 있었습니다. 해변가에 바위가 있었는데 갑자기 파도가 밀려와서 사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기서 낚시 하던 사람들이 바다를 잘 압니다. ‘저것은 산이고 저것은 바다다’라고 잘 압니다. 그런데 설마 그 바다가 낚시하고 있는 자기 인생을 덮쳐서 완전히 자기를 물고기 밥이 되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바다에 빠져 죽을 것 까지 알고 바다에 낚시하러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 바다는 나에게 즐거움과 유쾌함과 고기 잡는 기쁨을 줄 것이다’라고 하면서 바다에 갔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시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바다가 그 사람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 전에 알고 있던 바다는 엉터리 바다였습니다. 나를 삼키는 바다의 무슨 맛을 봤습니다. 맛보자마자 죽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만.
예수님은 바다 같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도 알고 성경도 안다, 하는데 막상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바다의 해일처럼 파도처럼 우리를 덮쳤을 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그전에 알았던 예수는 엉터리구나’라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엉터리냐 하면, ‘나도 살고 예수도 삽시다’하는 식의 동업자 의식으로 대하면서 서로 자기 영역을 침범 안하는 그런 식의 예수, 나를 도와주기는 해도 내 것을 빼앗아가지는 않는 예수, 그런 예수를 원했는데 오늘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런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 예수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예수를 생각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기 구미에 맞도록 자기 맘대로 지어낸 예수입니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 음식이 맘에 안들 때는 짜다든지, 싱겁다든지 자기 아내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을 경우에 맘에 안들 때는 말하기가 참 곤란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얼른 먹고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나도 어느 정도는 예수님을 안다’고 예수님을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전혀 다른 내가 예상치 못한 예수님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예수님보고 수정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평소에 다른 예수를 신봉했구나, 라는 자기반성, 자기회개, 자기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됩니다.
우리가 성경 에베소서 2장 15절을 몰랐다고 했을 경우에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 예수와 에베소서 2장 15절에 있는 예수하고 제발 틀렸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틀리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6절입니다.
히브리서 11:36-38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우리가 다 같이 예수를 믿는데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는 식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과연 그래도 예수를 사랑하시겠습니까?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고 나를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예수님이라는 내 외부의 어떤 분으로 인해서 막상 내가 곤란에 처하게 되는데 그래도 예수 믿겠습니까?
예수와 우리가 언제부터 무슨 아는 사이라고 그렇게 합니까? 그분이 나에게 보증을 서 준일이 있습니까? 내가 그분을 보증 서 준일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으로 인해서 우리가 이런 수모를 당해도 좋다는 말입니까? 제 전에 시골에서 사역할 때 교인들에게 세례를 줄때 마다 이 히브리서 11:36-38을 펴 놓고 제가 물었습니다.
예수를 믿되 이렇게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 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해도 예수를 믿겠습니까? 예수를 사랑하시겠습니까?’ 아니라고 하면 세례 안 줄것 같으니까 억지로라도 대답을 합니다.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세례 안주는 것은 아닌데. 그런데 그분들이 이목사가 사적인 견해를 가지고 이렇게 신앙하라고 하면 그것은 당신 신앙과 내 신앙이 서로 다르다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히브리서 11장의 성경을 들이대면서 이야기 한 겁니다. 설마 세례를 받으면서 나는 성경을 무시한다고 나올 수는 없을 겁니다. 무시할 수 없는 성경을 펴놓고 무시할 수 없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신앙은 이래야 된다고 할 때 건성으로 대답은 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꼭 받아야만 구원되는지 알고, 또 세례 안 받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으로 대답은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라고 답해놓고 그 뒤로 교회 나온 사람들 못 봤습니다. 대답은 해 놓고 그 사람들이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주로 청소년들, 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바다라는 것은 먼발치의 바다입니다. ‘바다야, 너는 여기이상 올라오지 마라. 나에게 고기나 주고 여기까지는 내 영역이니 침범할 생각하지 마.’ 이러면서 바다가 아름답다는 식으로 생각을 한 거예요.
나의 조건이 유지되는 한에서만 예수를 아는 척 하고 인정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때 바닷물이 내 키를 넘도록 덮쳐 와서 내가 바닷속 물고기의 밥이 되고 나라는 인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예수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여기에 적어 보겠습니다. ‘내 육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때 바다의 맛을 알듯이 예수님도 내가 흙이 되고 없어질 때 그때 제대로 안다.’
‘예수님, 당신은 누구시길래 나를 죽이십니까? 내가 이렇게 당신에게 죽어야 할 그런 존재였다는 말입니까?’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하게 될겁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살아 왔는데,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해서 칭찬해 줘야 할 주님께서 내 힘으로 살아온 그것이 그렇게 못마땅해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죽여 버리고 내가 신봉할 만한 내가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당신이 나보다 더 우선이었고 먼저였군요’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였습니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먼저 계시다”고 했습니다. 먼저 있다는 말은 그분으로 인하여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먼저 없었으면 나도 없다고 할 때 나보다 그분이 먼저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분이 없었으면 내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없어지는 그 순간에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비로소 다 드러내시겠죠. 내가 없어지는 순간에 그분은 자신의 전부를 다 드러내고 만약에 내가 있다고 여기는 그 순간은 그만큼 그분의 모습은 삭제되고 그분의 모습은 가리워져서 엉터리 예수를 신봉하게 되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인정해 준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흙일뿐인데 누가 그것을 몸이라고 우겼느냐 하면 내가 자꾸만 우기는 겁니다. ‘나는 몸이 있는데 사지가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다 있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고 따라서 이 몸은 귀한 것이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래서 나는 귀하다’고 자기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겁니다.
일단 내가 살고보자는 욕망이 앞서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를 몸으로 간주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의 사람으로, 인격자로 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죽을 안개로 보지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보다 먼저 계신 분이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자기를 보이는 도구로서 어떻게 사용하느냐,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관계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이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고 단독으로 ‘나도 사람이다. 신이면 다인가?’라고 이렇게 주장하지만 그것은 헛소리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가 살고 있었는데 둘 다 죽었습니다. 즉으면 그만인줄 알았는데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거지도 죽어서 간곳이 있습니다. 천사들이 받들어서 하늘로 데려갔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를 끄는 것은 부자가 자신이 지옥에 와 있음을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지가 천국에 갔다는 그 사실도 이미 부자가 알고 있더라는 겁니다.
나는 지옥에 와 있고 내가 무시했던 거지가 천국에 갔다면, 우리가 부자인데 지옥에 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부자고 뭐고 지금부터는 없고 주위가 온통 솟구치는 불덩이 뿐이고 물한방울이 아쉽고 영원히 목말라서 고통하는 지옥에 왔습니다. 그렇게 지옥에 왔을때 그때의 예수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때의 예수님의 가치는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부자라도 알 것입니다. ‘아하, 인생이란 내가 결정하는 것이 나보다 앞선 분의 결정에 따라서 결정되는구나’라는 것을 그 부자는 지옥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거지는 비록 거지였지만 자기가 거지였지 예수님은 거지가 아니었습니다. 나보다 앞선 분이 중요하지 내가 지금 거지냐, 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KTX에 달라붙은 열차가 14개나 15개쯤 됩니다. 청소를 좀 안해서 그런지 맨 앞의 기관차는 말끔한데 뒤에 붙어 있는 열차들에는 먼지가 묻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먼지 묻은 객차는 안가고 깨끗한 기관차만 달리는 겁니까? 기관차가 가면 뒤에 달려 있는 객차도 함께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울 가면 같이 서울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지는 내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나보다 앞서신 분의 인생이 전부이고, 단독적으로 끊어서 내가 누구라고 말할 필요가 없고 가치도 없고 항상 나를 당기는 분이 저분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서 내가 그분에게 붙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에베소서 2장 뒷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교회가 뭐냐, 성전이 뭐냐 할 때, ‘나도 성전되어야지. 교회 되어어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되어야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자리에 가담되어 있느냐? 동참되어 있느냐? 이끌리고 있느냐?’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성전이 되어간다’고 할때 제일 설명하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3: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벽돌과 벽돌을 연결할 때 무엇으로 연결합니까? 시멘트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벽돌도 물질 덩어리고 저쪽 벽돌도 덩어리고 그것을 연결하는 것도 시멘트 덩어리입니다. 다 손에 만질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붙어서 됩니다. 그런데 육체와 육체의 결합이 아니고 육에 영이 와서 결합한다고 하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신체가 붙지 않더라도 한 몸이라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 설명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 설명이 너무나 어렵기에 그 전에 이것부터 하는 겁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알 때 ‘예수님이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먼저 계신다는 것은 그분 때문에 내가 뒤따라 나왔지 그분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 그분을 위하여 내가 만들어졌고 그분을 위하여 내가 있다는 것, 그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것을 알게 되면 어렵다는 그것도 이해가 되고 설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거지 입장에서는 내가 거지라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분이 나에게 중요하지 어떤 형편이든 구원된다는데 내가 왜 중요합니까? 여기 학생들 중에 안경 쓰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눈이 나쁘니까 고생은 되는데 안경을 썼다고 해서 ‘너 안경 썼으니 천국 못가고 지옥 간다’고 할 그런 주님입니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람을 흙이라고 봅니다. 여기 열사람이 있다면 흙이 몇 덩어리가 있습니까? 흙이 열 덩어리입니다. 열 덩어리인데 그 열덩어리 한군데 합치면 한 덩어리가 된다는 그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볼 때 천명이든 만 명이든 그것을 다 한 덩어리의 흙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볼 때, 00아무개, 00아무개 따로 따로 보시는 것이 아니고 흙이라는 형상으로 형상되시는 하나님이 형상으로 다루시는 겁니다. 너무 어렵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앞장세워서 사람을 다루기도 하고 사람과 결합하기도 하는데 형상과 형상을 비교해 보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하늘에 속한 형상인데 비해서 인간은 흙에 속한 형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형상, 인간은 흙에 속한 형상이 되는 겁니다. 흙에 속한 형상은 흙의 그 본성대로 없어지고 바람에 날려지고 사라집니다. 누구든간에 바람에 날리면 다 없어집니다. 제가 죽었다고 치고 ‘아이고…’ 하는데 바람이 훅, 부니까 바람에 다 날려갔습니다. 그러면 동네방네 날려간 것 찾아서 다 따라가야 합니까? 그럴 수 없잖아요.
어린이들에게는 너무 허무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허무하지 않은 영원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흙이 나이가 먹는다고 해서 더 영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바다 이야기를 해 봅시다.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서 사람이 죽을 때 46살 먹은 사람도 있고 5살 먹은 아이도 나옵니다.
그럴 때 46살 먹은 사람은 안 아까운데 세상에, 5살 먹은 애가 죽었다면 그 애가 아깝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 다섯 살밖에 안 먹은 애를 죽이십니까?’ 하는데 하나님은 5살, 46살 그런 것을 몰랐어요. 왜? 둘 다 흙이니까. 하나님은 흙을 흙 되게 하시는 재주가 있습니다. 50살 살다가 죽으나 5살 살다가 죽으나 흙으로 돌아갔으면 하나님은 잘못 없습니다.
흙으로 난 자식이 흙이요, 흙으로 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로만 흙이 아니라 흙답게 결국 우리가 흙일 수밖에 없는 종말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말씀대로 말씀대로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 대목에서 아멘이 나와야 되는데 전부 다 흙으로 사느라고 피곤합니다. 지금 내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하시는지 봐야 됩니다.
낚시하는 우리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다를 생각해야 됩니다. 바다가 낚시하는 사람을 보면서 ‘어? 저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잖아. 조금 있다가 덮쳐야겠다’라고 하는 그런 바다는 없습니다. 낚시를 하고 있든지 오줌을 누고 있든지 바다는 중력의 힘에 의해서 그냥 밀려와서 덮쳐버립니다. “미안하다. 낚시하고 있는 것, 내가 못 봤다.” 이런 바다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봤으면 ‘왜 우리 애는 다섯 살 때 죽이십니까?’ 하는데 다섯 살짜리 애는 흙이 아닙니까?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지요?(눅 13:4) 만일 “왜 죽이십니까?” 한다면 이것은 질문이 잘못되었지요? 망대에서 죽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흙이고 땅에 속한 존재인데 어떻게 하늘에 속한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결합하는가?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온 목적입니다.
안 찾아오면 그냥 흙으로 죽으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찾아오고 나는 안 찾아오고, 이렇게 섭섭하게 여길 인간 없습니다. 우리는 흙이기에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이지 거기에 무슨 욕심을 부립니까? 예수 믿겠다고요? 세상에 그런 욕심이 어디 있습니까? 안 믿어지는 예수를 왜 믿습니까? 안 믿어지면 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주 깔끔합니다. 5월초가 되면 온 거리와 산을 뒤덮는 매혹적인 냄새가 있습니다. 무슨 냄새입니까? 아카시아 향기입니다. 그 냄새는 코에 이상생긴 사람 빼놓고는 누구나 다 맡을 수 있습니다. 아카시아가 왜 냄새를 피웁니까? 아카시아에게 물어 보세요.
“아카시아 아저씨, 왜 이렇게 향기가 아름다운가요?”
“나? 아카시아거든.”
그러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아카시아가 향기를 품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그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는 흙입니다.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애달프고 슬프고 통곡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진짜 슬퍼하고 통곡할 일은 지옥에 가서 ‘내가 나밖에 모르는 그 자신을 보고 통곡하라’고 합니다.
앞서가신 분을 모르고 나밖에 몰랐다는 그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이왕 흙으로 태어난 것 인생 성공이 어디 있고 실패가 어디 있습니까?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실패입니다. 어떤 인생도 실패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늘의 형상과 결합이 되었으면 그것이 바로 성공한 인생이지요. 거지보세요. 성공했잖아요.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겁니다. 중간이 좋은 것은 소용없습니다. 중간시험 칩니까? 기말시험으로, 마지막시험으로 끝내버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생각할 때 자기는 멀쩡하게 있고 예수님에게서 자기 필요한 것을 가지고 오는 것처럼, 기도하면 복이나 주는 그런 예수를 찾으니까 문제가 되는데 예수님이 어떤 시선으로 어떤 안목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지 그것을 눈치 채야 그게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냥 흙으로, 흙에 속한 형상으로 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 안하셔도 될 수고로운 일을 하셨는데 그게 사람들에게 율법을 준 겁니다. 율법을 주나 안주나 인간의 운명은 바뀌어 질것이 없습니다. 율법 주나 안주나 인간은 죽습니다. 율법이 안주어질 때도 사람은 죽었고, 율법이 주어져도 사람은 죽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낫게 한다든지 개선하는일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이왕 흙이 되고 이왕 죽어가는 인간이 어떻게든 ‘내가 왜 죽지? 왜 저주받지? 왜 흙이 되어야 하지? 왜 하늘나라 못가지?’ 그런것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그것 없어도 저주 받지만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 받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아, 이래서 저주를 받는구나’를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음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이 성경전체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달달 외운다고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왜 예수님께서 쳐들어 와서야 우리가 구원되는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성경을 준겁니다. 성경은 이것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이유로 인해 왔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책에 준해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을 준겁니다.
그러니 이 성경을 누가 다루어야 됩니까? 성경책은 예수님이 다루어야 할 책입니다. 우리가 다룰 책이 아니고 우리는 성경책의 혜택을, 성경을 다루시는 예수님의 혜택을 입을 뿐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서 너희들은 성전이 되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가만있는데 저 바닷물이 500미터, 400미터, 300미터, 200미터, 100미터 죽 밀려와서 덮쳐버리니까 구원받는 겁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저벅 저벅하는 발자국 소리, 예수님의 다가오는 소리를 우리로 하여금 크게 들리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내가 예수다. 내가 구세주다.”
“왜 우리는 매일같이 죽어야 됩니까?” “너는 흙이잖아.” 성경이 우리에게 붙여준 이름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준 운명을 어느 누구도 변경하고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이것이 기쁘지 않습니까? 경주에서 국회의원 출마했다가 교도소에 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옥중에서 단식하고 있습니다.
돈 돌렸다고 선거법위반으로 당선도 무효 되고 교도소에 갔는데 단식하다가 병원으로 이송 했다든가 하는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안 믿어서 그게 안타까워서 단식하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단식하는 겁니까? 어떻게 따낸 국회의원인데 그것을 날릴 생각하니까 살맛 입맛 다 떨어져서 단식하는 것 아닙니까?
단식하면 흙에서 훌륭한 흙 됩니까? 그 사람은 날 때부터 자기가 국회의원 하기로 하고 태어난줄 아는 모양인데 그게 아닙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흙이고 하나님께서 날 어떻게 하시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뭐되고 싶다는 그것은 별로 안중요합니다. 또 제가 청소년들의 꿈과 비전과 희망을 꺽어 버리는 소리를 했는데, 꿈과 희망과 포부, ‘다른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나도 빨리 저렇게 따라 붙어야지’라는 꿈과 포부 소망이 누구는 없겠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하는 말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 사람이 언제 즐겁고 기쁜가 하면 모든 해답을 다 알아버렸을 때, 모든 결론을 다 쥘 때 가장 행복합니다. 답이 나와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 답이란 흙에 속한 나와 하늘에 속한 형상인 예수님이 결합해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다는 그것이 결론이고 정답입니다.
다른 정답은 없습니다. 요지부동입니다. 우리가 흔들어 대도 그 정답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숫대야에 담긴 물위에 뜬 달이 밉다고 그 형상을 작대기로 막 흔들어보세요. 처음에는 어그러지는 듯 보여도 한 10초만 기다리면 다시 달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성경을 찢는다고 성경이 달라집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못 지키는 성경, 나보다 앞선 분인 주께서 지켜서 우리는 그 뒤에 달린 객차로 붙여 주십니다.
우리가 붙이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그 완성된 의 뒤에 우리가 딱 들어 붙는데, 이게 우리의 육체로 붙인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붙었기에 떨어지지 않고 딱 들어붙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흙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게 했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 말을 안 믿을 것이 아닙니까? ‘나는 흙이다, 나는 죽을 운명이다’ 하는 것을 이미 안다는 그 자체는 ‘그것을 일러주신 분의 통보, 그것을 일러주신 분의 주장을 다른 이는 몰라도 저는 인정하겠습니다’라고 이미 결합이 되었기에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뒤에 있는 객차에게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었기에 우리는 기쁜 거예요.
내가 흙이기에 비전도 소망도 없어졌다는 그것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내 소망 같은 것은 다 없어져도 괜찮을 정도로 앞에 계신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고 그 해답과 결론이 나와 있고 그것이 요지부동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쁜 겁니다. 내가 믿는 분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더 기쁜 것은 없습니다. 가장 큰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시집갔는데 구박받고 친정으로 쫓겨 나왔다는 것, 그런 것은 별 문제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난처하고 힘든 일을 당할 때 그런 것은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장 못 견디는 것은 남들이 나를 힘들게 한 그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을 힘들게 한 그 때 참 견디기 힘듭니다. 졸음운전 하다가 신혼부부를 치어서 죽게 했을 때 얼마나 미안합니까?
사람은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안든지 상관없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게 되어 있고 피해준 것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미안해하려면 이 땅에서 자살을 백번해도 모자랄 정도로 남에게 미안스러워 해야 됩니다. 젊을 때 아무리 자식을 잘 키워 놓아도 늙으면 자식들한테 짐이 되기 마련입니다. 냄새 나죠. 성격 까탈스럽죠. 아침에 전화 드려도 짜증내죠.
심지어 어버이날 같은 날도 짜증을 막 내면서 “그러면 이 부모가 칵 죽었으면 좋겠나?”하고 나옵니다. 옛날 자식들 같으면 “어머니, 죽으시면 안 되지요” 하고 나오지만 요새는 “맘대로 하세요”라고 나옵니다. 자식이 미운 것이 아니고 아무에게도 특히 자식들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면서 아직도 살아 있다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미운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다면 미안스러워 해도 되는데 내가 살고 싶어서 삽니까? 먼저 계신분이 이 세상 살면서 더 고생하라고 살려주는데, 이 세상 더 살면서 우세 당하고 얼마나 남에게 피해만 안겨주는 나쁜 흙의 본성을 알려주기 위함인 운명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빨리 죽는 것이 소망이지만 그런 혜택은 아무에게나 돌아갑니까? 혜택 받는 사람은 빨리 죽겠지요. 정 소원이거든 서해바닷가에 서있든 지요. 제일 좋은 것은 비행기 사고 나서 떨어지면 보험금 타먹으면서 죽으니 제일 좋겠지요? 어쨌든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이 다 했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다 해야 되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에 대해서 조금도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한다고 해서 주님의 행동이 바뀌어지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몽땅 삼키고 결론을 몽땅 다 삼켜버리세요. 이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원수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릅니다. 일부러 하나님한테 악감정 품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다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 나보다 앞선 분이 있다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몰랐단 말이죠.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나만 생각하고 신경 쓰다 보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보니까 하나님의 원수지간이 된 거예요. ‘원수지간이 되었구나’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수지간이구나!’라고 한다면 그냥 죽어야죠.
그런데 아무 이유없이 버림을 당해도 마땅한 우리를 우리보다 앞서신 분이 이번에는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처할 성전의 벽돌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시멘트로 발라버리기 위해서 그 시멘트가 발릴 하나의 벽돌로서 우리를 채택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거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에베소서 2:15,16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새사람이 뭔지 우리는 모르지요. 새사람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새사람인줄 알지 새사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금식하면서 기도한다든지 혹은 성경 세장 읽다가 갑자기 네 장씩 읽는다든지 그러지는 않습니다. 다만 내 마음속에 느끼는 것은 ‘아, 새 사람이구나’ 하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새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새사람을 만드신 그 취지가 들어오겠구나. 새사람에 합당한 삶, 새사람이 필요한 곳에 하나님께서 들어서 쓰시겠구나’라는 것만 여러분이 각오하시면 됩니다. KTX를 탔는데 마지막 18번 열차에 탔습니다. 맨 앞에 기관차를 보니까 전라도 쪽으로 가지 않고 서울 쪽으로 가게 되면 ‘아, 서울 쪽으로 가는구나’하고 아는 것처럼,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앞에 있는 분이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거처할 성전으로 쓰시려고 하나의 벽돌로서 나를 동원시키고 쓰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저 뒤에 달린 18번 열차에다 기내방송 하듯이 통보하는 겁니다. “아아, 서울까지 모시게 된 이 열차의 차장 000입니다. 이 열차는 30분 후에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이렇게 소개해 주는 겁니다.
따로 내 인생 목표, 따로 내 인생 계획 이것을 안 해도 되도록 짐을 덜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교회(IP:220.♡.176.141)
08-06-15 10:39
서울080509b엡2장16절
에베소서 제 12강 (이 근호목사, 2008년 5월 9일-b,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2:16-18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방금 읽은 대목에서 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원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보통 세상에서 죄라는 말은 ‘아,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내가 실수 했구나’라는 자기자책을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 원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상대가 있습니다.
원수라는 것은 ‘너는 우리 집안과 원수 집안이야’ 하든지 혹은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한 번 해보자’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저주하고 공격하고 밀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나를 해코지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내가 있고 상대방이 있는데 그 상대방을 적으로 삼고 밀치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죄 있다, 죄 있다 하는데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아이고,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구나’라는 말은 잘 안합니다. ‘아이고,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구나’라고 생각을 안 하고 ‘아이고, 내가 실수했고, 내가 잘못했고, 내가 바보였고, 내가 조금만 잘했으면,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사람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는 내 사정 나만 안다’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인간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 나가. 난 하나님하고 안 놀아. 나는 내 것만 있으면 돼. 누가 내 빵을 먹어?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을 해? 저리가!’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만든 겁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 드릴까요?’ 이것이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 드릴까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예,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제가 어떻게 따먹겠습니까?”
이렇게 나와 줘야 그것이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에 부합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람이 죄를 짓고 난 뒤에는 ‘나는 나다. 누가 감히 내 영역에 간섭하는가?’라고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좀 어렵지만 쉽게 하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우리의 몸이란 우리의 거처입니다. 내 몸이 나의 자리인데 이 자리가 하나님보시기에 원수의 거처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나만의 거처, 자리, 영역, 이것을 ‘단자’라고 하는데 나만의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 합니다. 사람은 나만이 절대화되는 자기만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국가도 그렇고 스포츠의 세계도 그런 것을 잘 보여줍니다. 롯데자이언트가 부산 팀이죠. 그 팀 응원한다고 ‘부산 갈매기’부르고 난리 납니다.
부산 사람들은 롯데프로야구팀이 경기를 하면 부산사직구장이 그득 찹니다. 부산갈매기를 부르면서 응원하는 동안은 너, 나가 없고 전부 하나고 한편입니다. 왜 가족을 사랑하느냐 하면 자기만의 영역이기에 가족을 사랑합니다. 내가 낳은 내 새끼, 내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철통같은 수비를 해서 외부에서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벽을 뚫고 들어옵니다.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6,37)고 나옵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왜 내 영역을 침범하느냐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개인적인 영역이란 없어야 됩니다.
하나님만이 거기서 우대를 받아야 되고 하나님만의 거처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원래 이 목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빵을 드시다가 갑자기 빵 속에서 쇳조각이 나오면 기분 좋아요, 나빠요? 기분 나쁘죠. 빵이라는 것은 내가 먹으면 입속에서 살살 녹아져야 되는데 갑자기 쇳조각이 나오면 먹을 수 없잖아요. 그러면 그 빵은 먹을 수 없는 빵이니까 갖다 버려야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이부자리가 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창문이 되고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옷걸이가 되고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자개농이 되고, 그처럼 모든 인간이란 하나님을 모실만한 가구 같은 배치물로서 인간을 만들어 놓았는데 사람들은 죄짓고 난 뒤에 그것을 자기거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입니다. 여기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웬 아저씨가 술을 먹고 자기 집에 떡 앉아 있습니다. “아저씨, 남의 집에 왜 와 있습니까?” 그 술 먹은 아저씨가 와서 “내 집이다!”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럴 때는 주거침입죄로 119에 신고해서 그 아저씨를 쫓아내야지요.
“아저씨, 이것은 아저씨 집이 아니고 내 집입니다.” 지금 그 일을 하나님이 우리보고 하는 겁니다. “이 웬수야, 이것은 네 집이 아니고 내 집이야. 네 몸은 네 집이 아니고 내가 거할 몸이야!”
강의를 새로 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안다고 할 때 일단 뭘 생각 하느냐 하면 내 거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혹시 도움받을 데 없는가 하고 두리번 거리다가 ‘옳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내 수입은 늘어나고 도둑놈도 지켜줄 테니까 내 거처는 아주 행복한 거처가 될 것이다,’
나의 거처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기도하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객이 바뀌었습니다. ‘이 거처는 제가 쫓겨나고 주님께서 거처해야 될 주님의 몸입니다’라고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있고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내가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주 비참하게 사셨습니다. 비참하게 사셨어도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민하고 걱정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참해도 마땅히 아버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면 그것으로 대만족 한 겁니다. 누가 나를 사용한다는 것, 누가 내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 대환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맘대로 사용해 주소서’가 아니라 ‘어느 놈이 내 것을 빼앗아 가?’ 하고 바짝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몸이라는 것이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좆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말을 따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마귀 말이라면 껌뻑 죽고 마귀의 말이라면 거기에 엎어지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님이라면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말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식으로 우리가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반대로 살아가니까 뭘 하더라도 내 것을 하나라도 더 챙기고 내 것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것을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흙에 속한 인간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만드는지 지금부터 그것을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주인 노릇하는 이 천한 몸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거처할 몸으로 전환시키는가?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여기 우리가 있는데 우리 안은 시커멓습니다.
안산에서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우리 몸안에 뱀이 한 열 마리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있는데 이런 말이 죄송합니다만 자기는 냄비에 돼지고기를 삶는다고 삶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까 뱀이 한 열두마리쯤 들어 있다고 하면 기겁을 하겠지요. 너무 엽기적인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라는 뚜껑을 열어보면 더 놀랍니다.
우리 안에 뱀이 열 댓마리,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귀신이 들어 있는 겁니다. 평생 가도록 들춰보면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공중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우리 안에 뱀이 들어 있습니다. 요즘 애들은 잘 모르는데 요충, 십이지장충 이런 것으로 합시다. 밥맛은 좀 떨어지겠지만 이런 것이 들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자기를 대속물로 주심으로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뱀을 노리고 마귀에게 잡히기 위해서 들어와 버립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예수님은 희생제물이 되어서 죽어야 되고 일단 우리 속에 들어와서는 누가 죽이는가? 우리가 죽이고 마귀가 죽이는 겁니다. 이 전체를 보면 누가 죽이는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죽이십니다.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였다. 이로서 세상은 끝났다. 하나님의 뜻은 더 이상 없고 남김없이 다 알려져 버렸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 예수님이죠,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외에 하나님은 다 엉터리 하나님입니다. 감사헌금하면 복준다, 사업이 잘된다는 것은 전부다 가짜 하나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남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남자를 죽였는데 우리 안에 들어와서 보면 누가 죽였다? 뱀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한 남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면 인간 안에서는 누가 이겼습니까? 인간이 승리했고 그 인간 배후의 악마가 승리했습니다.
언제까지? 삼일동안만. 삼일동안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동안 승리한 겁니다. 그것은 죽음의 승리, 죄의 승리, 율법의 승리, 뱀의 승리, 악마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삼일이 지난 새벽, 여명도 없던 캄캄한 밤, 어느 여자 분이 예수님의 시체를 얻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있어야 될 시체가 없었습니다. 한 돌 위에 웬 아저씨가 앉아 있다가 여자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여자여, 누구를 찾고 있나요?”
“여기 누워 있던 시체를 찾는데요?”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지고 전 세계를 심판해 버립니다.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면 그것은 산 것이 아니고 헛산 겁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율법의 심판에 대해서, 저주에 대해서 이미 살아나 버린 거예요. 이게 기관차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객차가 되기 위해서 그 살아나신 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딱 들어붙어 있는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우리 몸은 진짜 몸이 아니고 땅에 속한 흙에 불과하고 진짜 몸은 우리의 몸을 하늘의 형상 만드는 그 예수님의 몸이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새로운 형상의 몸이며 그 몸을 우리가 입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들이 쓸데없고 지어낸 것이라면 십자가도 지어낸 것입니다. 십자가가 지어낸 것이라면 제가 지금 하는 말들이 쓸데없고 지어낸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2000년 전에 한 남자가 죽었고 그 남자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면 방금 제가 한 그 이야기 말고 다른 진리는 없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이 교회는 기존의 한국교회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문화센터입니다. 젊은 사람들 불러 모아서 봉사하게 만들고 나이 많은 사람들 불러내서 교인 만들어서 문화센터 사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모릅니다. 그전에 절에 다녔던 심성을 그대로 가지고 절 같은 교회를 찾아 온 겁니다. 빌면 복 받고, 자기의 영역이 더욱도 확장되고 높아지고 성공하는 것, 끝까지 내 영역이 네 영역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높다는 그것을 자랑하고 싶고 자기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서 온 겁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그런 교회는 없습니다. 세상에, 예수 믿어서 내 영역이 확장된 그것을 복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야기 한 적이 없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불교라는 전통에 연결해서 이어붙인 객차처럼 기독교라는 이름의 절간을 또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그저 정성스럽게 빌면 복 받는 것, 자기 잘되기 위해서 하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새벽기도 하면 애들 좋은 대학에 가는 것, 그런 것뿐입니다. 거기서 말하는 천국은 다 거짓말입니다. 얼마 전 설교에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광주강의 마치고 난 뒤에 PD수첩을 보니까 피자재료에 들어가는 치즈가 있는데 몸에 해로운 모조치즈를 만들어서 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모조치즈는 고발하면서 모조 복음은 왜 고발 안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지도 못하고 천국 가지고 못하는 복음들, 그것은 왜 고발 안하느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반도체 칩처럼 심어 버립니다. 부활이 여기, 우리 몸 외부가 아니라 우리 몸 안에서 부활이 일어나게 만들어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은 마귀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율법의 모든 저주를 이겼다는 그 이김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대신 죽으심입니다.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시면 무엇이 부활되는가? 우리는 아직 흙에 속해 있어서 몸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엇이 부활되는가?
대속물의 의미, 대속물의 가치가 부활합니다. 악마한테 걸려서 맥도 못추고 흐지부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속과 대속과 속죄와 화목제물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다 이루었음을 부활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구속이라는 것은 값을 주고 샀다는 것이 완성되고 대속이란 대신 죽어서 완성되었다는 말이고 속죄란 죄 그 전체를 씻어준다는 말이고 화목이란 이제 너와 나는 한 몸, 같은 한통속이 되었다는 겁니다.
원수지간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용하시는 분이 어떻게 사용하시는가에 따라서 사용되고 안하고 하는 것이지 그릇이 깨끗하게 된다고 해서 사용을 더하고 덜 하는 그것은 아닙니다. 사용하시는 분이 사용하려다가 ‘아유, 더러워서 사용 못 하겠다’는 이런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이고 부활하신 분이 찾아오신다는 말은 죽은자인줄 알고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우리 힘으로 죄도 못 이기고 우리 힘으로 마귀도 못 이기고 우리 힘으로 율법을 못 지키는 것을 이미 아시고 그 자리에 자비와 사랑, 구속과 대속과 속죄와 화목의 가치를 담습니다.
여기 쟁반에 곰보빵 두 개와 카스테라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그릇에 무엇을 담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분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 그릇에 뭘 담든지간에 예수님의 구속과 대속과 속죄와 화목제물이 담겼다는 그 자체로 그 내용물이 그릇을 가치 있게 간주해 주는 겁니다.
거지인데 만약에 화목제물이 담겼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피, 용서하심의 피가 담겨 있기 때문에 거지는 천사에게 받들려서 천국에 갔어야 했고, 천국에 가면 그 거지를 시찰하면서 ‘봐, 내가 사랑으로 건져낸거야. 쟤도 봐, 내가 용서하니까 여기 왔잖아’라는 식으로 하나 하나 시찰하면서 모든 구석구석을 자신의 공로와 자신의 피의 은혜성을 드러내는 찬양을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거하시는 거처가 되는 겁니다.
이런 비밀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되도 않는 소리로 들리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없으면 제가 사기치는 겁니다. 노인들 불러 모아놓고 쇼하면서 3만원짜리 건강식품 가져다가 68만원에 팔아먹는 사기꾼같이 될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었다면 내가 하는 소리가 다 거짓말’이라고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더운데 금요일 날 직장 다녀와서 쉬어야 할 텐데 이 무슨 짓이며 이 얼마나 불쌍한 짓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안 죽었고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는 것은 다 놀이고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에베소서에 보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밖에 모르는 원수된 자,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받으셔서 이제는 하나님이 거하는 거처,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거처라는 것이 더 이상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제는 나의 거처가 나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점을 다 함께 즐거워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나저러나 이제는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그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면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인가? 주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입니다.
원수라는 것이 왜 생겼는가?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율법 때문에 생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줄 몰랐었는데 율법이 주어지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 것이 들통 났고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의도적으로 위배하는 불순종하는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율법을 폐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율법의 완성이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시는 분만 있으면 사랑이 성립이 됩니다. 부부의 사랑은 서로가 사랑해야 성립이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한쪽만 사랑해도 성립됩니다. 그게 구약의 아가서에 나옵니다. 아가(雅歌)란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인데 거기에 보면 남자가 여자를 죽자 사자 따라 다닙니다.
계속 따라다닙니다. 지난 오후설교에서 삼손의 여성행각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삼손은 아내를 사랑했는데 아내는 삼손을 필요로 했지 삼손을 사랑하지를 않았어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한쪽만 사랑하니까 그 여자가 삼손을 차버렸습니다. 자기 여자 아버지는 삼손을 미워했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기분 나빠 하는 것은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는 그것이 가장 기분 나쁩니다. 완전히 처가에서 자기를 가지고 논 겁니다. 삼손이 거기에 화가 나서 여우삼백마리 붙들어서 꼬리에 횃불 붙들어 매서 처갓집과 그 동네까지 전부 다 태워버립니다. 그것도 분에 안차서 나귀턱뼈로 천명이나 죽여 버립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일방적인 그것으로 그만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끝까지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자만 있으면 사랑의 대상은 사랑하는 자로부터 멀리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붙잡혀서 사랑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요.
그 사랑은 어느 정도 사랑하느냐 하면 죽어도 사랑합니다. 상대방이 죽어도 끝까지 따라붙어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지독한지 심지어 자기 목숨을 버리도록 사랑하잖아요. 세상에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 봤습니까? 말로는 사랑한다는 많이 있지만 자기 목숨을 버리도록 까지 사랑하는 사람 봤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 가끔씩 있습니다만 그런 것을 객기라고 합니다. 서울 철교에 올라가서 “선녀야! 네가 날 사랑안하면 나는 죽어버리련다!” 그때 선녀가 “죽어라. 나는 다른 사람 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다”고 하면 끝나버립니다. 인간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고 안 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의 목숨을 담아서라도 죽어가는 자기사랑의 대상을 다시 터뜨리면서 이끌어냅니다. 그게 바로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되어 있는 그런 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갑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고 싶어서 태어나게 만들어서 끝까지 사랑하셔서 끝까지 자기 품으로 데려가시는 그 일관된 경륜, 하나의 과정, 그것을 에베소서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3:9-11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를 예정하신 뜻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의논된 바가 있습니다. ‘누구누구를 만들어서 사랑하겠다’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그 인간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폭발시켜서 기어이 자기 사람으로 삼아서 천국에서 오직 주님 주신 사랑만 영원토록 찬양하도록 일괄적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진행에 하등의 차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내가 이 말씀을 못 지켰다고 자꾸 우왕좌왕 하면 마귀만 좋아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이룬 것을 흐지부지 하게 만들면 최고로 좋아 합니다. ‘봐라. 예수 믿어도 소용없잖아. 너 자신을 믿어야지. 예수를 왜 믿나?’하는데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꽂히게 되면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그 어떤 것도 안 끊어지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만큼 질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환란, 곤고, 핍박등이 오는 겁니다. “거봐! 안 끊어지잖아. 그치?” 자꾸 ‘네 안에 나 있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난처한 일을 자꾸 만듭니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자꾸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거봐. 네가 원망해도 불평해도 내 사랑은 그냥 있잖아. 내가 원망하면서 나에게 달려들어도 나는 내 십자가 사랑에서 너를 버리지 않는다니까!” 이게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시장 통에서 어린애를 데리고 가는데 그 애가 장난감 안 사준다고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