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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08. 4. 25) 2강 녹취록자유게시판고린도후서

광주강의(08. 4. 25)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4. 25) 36-2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데, 욕심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사망이라는 어떤 인격체로부터 오는 거예요. 물론 마귀지요. 그 욕심이 만드는 게 자아입니다. 자아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강물처럼 순간마다 변신이 됩니다. 13살 때 자아하고 20살 때 자아가 달라요.

그런데 20살 때 자아를 이야기하는 순간 또 달라지죠. 강물처럼 흘러간다고요. 그래서 제가 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자아는 항상 자신을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거기다가 법을 집어넣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글을 쓸 때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등교하는 어떤 아이는 숙제를 했다는 자아가 있어요. ‘나는 선생님이 내 준 숙제를 다 했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고 정당하고 떳떳하다.’ 그런데 그날 히로시마의 하늘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어요. 그 폭탄 앞에 나의 정당함이 소용이 있습니까?” 소용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 딴에 교회 다니고, 정기적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고 등등의 자기 법을 동원해서, 법을 동원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법이 없으면 자아가 형성이 안 돼요. ‘나는 이렇게 훌륭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딴 사람은 버려도 나는 버리면 안 돼. 다른 사람의 기도는 응답이 안 돼도 내 기도는 응답이 되어야 해. 왜? 나는 신앙생활 너무 순수하게 잘 하니까.’ 라고 우겼던 그것이 어떤 사태가 터져버리면 아무 알아주는 사람 없이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려요.

그러니까 애초부터 누군가 날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할 필요 없어요. 이 말이 뭐냐? 주님의 약속 앞에서는 자기규정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해도 소용없고. 뭐가 닥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어떠한 인간이 되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내가 어떤 인간이라고 정립을 했다면, 그 때 2008년 4월 25일 그 때뿐이지 내일되면 또 바뀝니다.

장마철에 갑자기 장맛비가 쏟아지는데 지금 내가 빨간색 옷을 입었느냐 노란색 옷을 입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산 색깔이 어떤 것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 안 맞으면 됩니다.

사람들이 사고, 팔고, 시집, 장가가고 이런 것이 아주 큰일이지요. 요즘 여자들 나이 30넘어서 시집 안가면 그 집안의 걱정거리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온 가족이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지요. 결혼식 할 때 부케 던지고 그것을 누가 받느냐 이런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결혼을 하는 그 순간에도 인자가 임하면 부케고 케이크 자르는 일이고 말짱 소용없이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집니다. 이것을 누가 알았느냐? 롯이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오늘날 교회는 농담 따먹기 하는 곳입니다. 성경책을 펴는 목사도 농담하고 있고, 듣는 교인들도 농담하고 있고. 자기부인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진담으로 듣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1시간 놀려고 오는 거예요. 노인들은 가서 점심 먹고, 다음 달 차 대절해서 어디에 놀러 가는지 그것만 관심이 있어요.

유황불을 생각하고 주님의 심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떠한 삶이 되어야 마땅한지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 외에 직업이 어떠니, 한 달 수입이 얼마니, 애가 어떤 대학에 들어가고 이런 것은 주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그 약속에 비하면 그런 것 은 기도할 내용도 이야기할 거리도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은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옵소서.’(롬8:30)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에게 뭘 퍼 붓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우리가 디모데전서 2장을 보면서, 이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지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재수 없게 디모데가 걸렸어요. 그런데 재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땡 잡은 겁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진리가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여름에 구청에서 모기약 뿌리듯이 온 천지에 복음의 모기약이 뿌려지기를 원합니다. 모든 이에게.

그러면 망할 자는 망하고.

고린도후서 2장 14절을 봅시다. 이 대목이 너무 좋아서 나는 스트레스 받을 때 이 대목만 보면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여기에서 ‘냄새’는 뭡니까? 복음의 모기약이죠.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누가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그렇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 다음 15-16절을 보세요. “우리가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는 이 대목이 너무 좋아요. 이 대목이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요. 왜 좋아하는지 여러분 이해되십니까?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 아닙니까.

이 대목이 왜 좋으냐를 설명해 드릴게요. 복음이 왜 사망에 이를 자에게 악취가 되는가? 사실은 복음을 악취로 여기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성경만 보면 잠 오잖아요. 예배시간에 설교 듣기 싫어해요. 연속극 보기를 원하지 주일날 예배 참석하는 것 좋아 안 하잖아요. 우리 자체가 주님의 복음을 악취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이야기해 주는 것이 이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봅시다. 분명히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인데 그 다음에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분명히 악취로 볼 수밖에 없고, 태어날 때부터 복음이나 예수에 대해서는 싫어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이 농담이 아니고 진담으로 들리면서 생명의 냄새로 왔다는 자체가 이것은 복 받은 것이고 땡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겁니다. 분명히 내 힘으로 안 되는 불가능한 일이 내 인생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일이란 말이지요.

사모님 말씀대로 돌아서면 또 악취로 들리지만.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해 줍시다. 왜? 우리도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망하는 자에게는” 이라는 말은, 복음을 전해야 ‘이런 인간은 망하는 자구나.’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께서 창세전의 뜻을 들어 올리니까 망할 자는 다 떨어지고 남는 자는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이 복음의 말씀에 남게 되는 이 현상이 바로 성령께서 빌 바를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를 위한 복음이 아니고 복음을 위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5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지금 고관대작이든지 미천한 사람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할 복음의 핵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왜 이 말은 했는가 하면, 사람이 100이면 100 다 하나님이 달라요. 그런데 바울은 인간 쪽에서 어떤 신을 믿을 것인가 그것을 편집하고 종합해서 하나의 신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분일 수밖에 없는 어떤 분이 오는 것을 통해서 너의 신도 아니고 나의 신도 아니고 처음부터 한 분밖에 없었구나 하는 것이 드러나는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복음인데, 중보자가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자가 아니라 어떤 중보자를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마10:37).”고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그 말 하신 분을 믿습니까?

사람들이 중보자라고 할 때 무슨 욕심이 있는가 하면,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는데 중보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던 간에 하나님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성급해서 중보자가 예상 밖에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쏘아대는데도 그런 것은 못 들은 척 하고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가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 다 달라요. 자기 기분대로 타고난 성격대로 전부 하나님이 다 달라요. 문제는 진짜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데, 감춰진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이 누구만 앞장세워 일한다? 예수님만 앞장세워 일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 사람과 타협조로 일을 하시면 좋은데 사람들이 알아먹지 못할 일만 골라서 하십니다. “네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구나(요9:41).” 이런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너희들이 산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제자들이 “죽으시면 안 됩니다. 같이 삽시다.”고 하니까 “사단아 물러가라!(마16:23)”

예수님 이야기가 하나도 알아들을 이야기가 없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마13:14).”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는 깨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에요. 못 깨닫는 게 정상이고 깨닫는 게 비정상입니다. 그렇게 하러 오셨단 말이지요.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복되도다.” 이것은 너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완전히 미쳤어요. 한 술 더 떠서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요1:30).”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그분에게 종속되었다는 말 아닙니까. 세상에 어떤 인간이 종속되기를 원해요? 그런데 어떤 분이 나보다 앞섰다는 것은, 나는 어떻게 살아도 나보다 앞선 사람의 쫄다구 밖에 안 된다는 그 이야기를 아주 자랑스럽게 한단 말이지요. “나는 쇠해야 하고 그분은 흥해야 한다(요3:30).”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흥하면 같이 흥해야지.

제가 이번에 늘푸른교회에서 강의를 했는데 초반에 이런 강의를 했어요. 이런 강의를 하니까 사람들이 의아해하면서도 상당히 즐겁게 듣는 모습을 보고 기뻤습니다. 뭐냐 하면, 그곳이 창원인데 산도 있고 공장 건물도 있고 교회도 있단 말이죠. 여기 밑바닥에 있을 때는 서로서로 심각한 일이 많아요. 그런데 약 10m정도 올라와보니까 약간 넓게 보여요. 100m 올라가니까 창원 시내가 많이 보여요. 500m 산에 올라가니까 도시가 다 보인단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천국은 성경 없이는 못 들어가는데, 천국을 가기 위해서 성경을 봐야 하는데, 성경은 이 지상에 묻혀서 축복밖에 모르는 우리를 뭐로 봅니까? 더욱더 넓게 보지요. 좁게 볼 때는 안 보이든 주님이 넓게 보니까 주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그것 때문에 이런 이야기 했구나.’ 이게 넓게 보면 다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끌어올리는 이 상태에 대해서 이게 복된 거예요. 높은데서 보면, 우주여행을 한 이소연이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본다면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 이해가 안 되지요. 박근혜파 이명박파 나눠서 서로 싸우는데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낮은 곳에서 가까이 보니까 굉장히 심각하고 자살할 상황이고 하지만, 높이 주님 앞에 가까이가면 이 땅에서의 일은 아무 쓸데없고 시시하고 사소하고 아무 문젯거리도 안 되는 것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염려하고 있단 말이지요.

우리는 누구 일찍 죽으면 ‘재수 없다’고 하고 실패한 인생으로 보잖아요. 예수님은 33살에 죽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실패자로 봅니다. 그러나 나이 90이 넘은 사람을 보면 ‘아이쿠 복된 어른이네.’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보는 인식은 성경 말씀으로 주님께 가까이 안 가니까 지상에서 기껏 생각하는 것이 그따위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교인 수 몇 명이고, 한 달 수입이 얼마고, 자식은 어디에 취직하고 이런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성경을 보면 ‘열심히 성경 읽으면 내 소원 들어주렵니까?’ 만날 교회 와서도 이러는 겁니다.

우리를 들어 올리는데서 오는 복, 우리가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나마 우주유영을 할 수 있는, 그렇게 해 주시려고 성령께서 창세전부터 예정된 뜻에 의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는 것이 남들 보기에는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지만 세례요한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거예요. 자기보다 앞선 분이 계셨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것은 남이 5m 올라갔는데 자기는 5Km 올라가 있는 거예요. 시간마저 초월해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그러니까 목이 잘려 쟁반에 담겨도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도 두렵지 않았단 말이지요. 이렇게 높이 올라가 있는데 무서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사랑을 받았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요일4:8)

지금 중보자가 왜 하나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보자를 사람이 고른다면 10여명 골라야 됩니다. 자기 입맛대로 골라야 하니까. 그런데 중보자를 하나로 모아놓고 모두에게 이 중보자의 말이 이해된다, 안 된다? 아무도 이해 안 되는 그런 점에서 중보자는 한 사람 밖에 없어요. 왜? 그래야 모든 인간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고, 하늘의 깊은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것이 중보자가 하나라는 증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대구의 어느 목사가 하는 말이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밖에 모른다.”고 해요. 이걸 ‘고맙다 친구야!’ 하고 감사히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조롱으로 들어야 할지? “부활도 있고, 성령의 능력도 있는데 그런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십자가만 이야기한다.”고 해요.

위에 올라가 보세요. 위에 올라가면 내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나’에 관한 것은 엷어져요. 위에 올라가면 전부 안개로 보입니다. ‘나’도 안개의 일부에요. 그래서 창원에서 강의할 때 죄 문제를 이야기 했어요. 사람들은 자꾸 자기가 죄 없이 그냥 성경 해석하려고 하는데, 중보자가 뭘 지고 갔습니까? 피를 흘리고 갔거든요. 이 말은 뭡니까? 버림받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 없이 그냥 십자가를 이해하려고 해요. 십자가 목걸이 달고 천당 가려고 하는데, 십자가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죄가 뭐냐? “네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것이 야고보서 4장에 나오지요. 어느 도시에 가서 이익을 보는 게 왜 죄입니까?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합니까?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인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한테 관심이 있어요? 나로부터 와서 결국은 나에게 돌아가는 것.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뭘 하겠다고 하는 그 주인공이 누구예요? ‘나’잖아요. 그 때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주의 뜻이면 내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약4:15).” 우리는 뭐다? 안개. 정훈희 노래 [안개] 있지요. 현미 노래 [밤안개]도 있고. A라는 안개와 B라는 안개 중 어느 안개가 예쁩니까?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둘 다 관심이 누구한테 있어요? ‘나’에게 관심이 있지요.

지금 내가 30살인데 40이 되면 뭘 하고, 50이 되면 뭘 하고 --.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60되면 안 그렇겠습니까? 70되면 달라집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뜻이면 뜻대로 하겠나이다.’ 하는 자기 부인. 이것이 창원 도시위에 붕 떠서 넓게 보게 되면 ‘나’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난 뒤에 창원 시내에서 부도를 만나든지 애가 가출을 하든지 개척교회하다 망해서 아내의 저주를 듣든지 이것조차도 창세전에 예정된 주의 뜻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듣고 난 후에 내린 결론이 뭐냐? “목사님 말씀이 맞기는 맞는데 사람이 따로 해야 될 일이 빠져 있잖아요. 목사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된다고 하면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냥 손 놓고 놀기만 하면 되겠네요?”

1945년 8월 6일 아침 10시 10분 히로시마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원자폭탄이 떨어졌지요. 숙제한 것 가방에 넣고 학교 간다고 애가 길을 건넜을 때, 제가 하는 말이 “숙제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폭탄 맞아 죽지요.” 그러면 원자폭탄은 B29에서 떨어지다가 상공 1000m 지점에서 멈췄습니까? 아니죠. 계속 떨어졌지요. 학교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떨어져서 그 아이는 산산조각이 나고 없어졌지요. 이게 바로 성령의 폭발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놀았습니까? 예수님이 놀았습니까?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지요. 사람들이 ‘내가 일 안 하면 일이 안 된다.’고 여기는 그 사고방식이 바로 자기중심에서 오는 죄의 버릇입니다. 죄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님이 일한다는 생각을 못 믿기 때문에 ‘내가 일해야 일이 된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그 믿음에 주님의 믿음이 들어올 여지가 없어요.

그러니까 강의 다 듣고 하는 말이 “이근호 그 사람은 뭐든지 주께서 하신데. 우리는 가만 있어도 주님께서 다 하신데. 말은 좋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방종해서 나중에 노숙자 되고 술주정뱅이 되면 그것도 창세전의 주의 뜻이라고 핑계되면 되겠네.”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중보자께서 6절 보세요.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이것은 사도바울도 포함되지만 이 편지가 누구에게 보낸 편지입니까? 디모데지요. 그러면 디모데가 이 말씀을 받을 때 “나는 놀면 되겠네.” 이렇게 나왔겠어요, 안 나왔겠어요?

이렇게 되겠지요. “나의 나 된 것은 주님 은혜다.” 지금까지는 내가 일해야 일이 된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바로 죄였고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다. 내가 일한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하신 분이 주님이고,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고 일거리 주시고 또 이끄시는데, 그것은 내가 전파하는 것,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중보자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예수님 밖에 없고 우리는 그분께 복종하게 하신다는 고백이 나오지요. 만약 고백이 안 나오면 그는 디모데 같은 사람이 아니고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 아니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말을 감히 솔직하게 고백을 못하기 때문에.

그 다음 7절을 봅시다.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이렇게 말할 때에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도취에 빠진 놈이라고 하겠지요. ‘놀고 있네. 네만 믿음 좋으냐? 나는 믿음 없단 말이지’ 이렇게 나올 것이고, 또는 ‘너만 사명 받았나? 누구는 사명 없나?’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너, 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좀 피곤하시지만 어려운 것 해 봅시다. 원래 이런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뭐로 만든다고 했습니까? 법으로 만들죠. 법으로 칸막이를 쳐서 자아가 생겨요. ‘나는 이것도 할 줄 알고 이것도 할 줄 안다.’고 하는 그 안에 뭐가 담깁니까? 자아가 담기죠. 왜? ‘나는 저것은 못해. 하지만 이것은 할 수 있어. 나는 하루에 성경 3장 읽지만 5장은 너무 버거워. 너는 5장 읽어. 나는 3장 읽는 게 나야.’

그래서 자아라고 할 때는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표준으로 정해놓은 이것이 법이에요. 나름대로의 법을 정해놓고 자아를 만드는데 이 자아는 흐름입니다. 다음에 되면 또 바뀝니다. ‘나도 드디어 성경 5장 읽었다.’ 또 바뀌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법이 경계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경계선을 만들어요. 뭐냐 하면, “이것까지는 내 영역이고 저것까지는 네 영역이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만드는데 법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불신자들의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예수님은 여기 계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따라서 김집사, 최집사가 있다면 둘 다 열심히 하는데 더 열심히 하는 김집사는 더 복을 받고 조금 나태한 최집사는 덜 복을 받아야 한다. 왜?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 주시지 안 지키는 사람에게 복을 줄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 김집사와 최집사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경계가 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뭘 없애버렸습니까? 이 경계선을 없애 버렸어요. 없애 버리는 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와요. 한 사람은 눈의 역할을 하고 한 사람은 발이 되는데, 문제는 발과 눈을 비교할 수 있는 경계선을 각자가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얼레리꼴레리 무좀 걸린 발 보래요. 나는 고상한 눈이 있는데.” 라고 비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주님께서 주신 적이 없단 말이지요.

법을 없앰으로서 경계선을 없애는 거예요. 법이 없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무법’으로 알아요. 제가 욕먹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법이 없는 자리에 뭐가 있습니까? 사랑이 있다고 그렇게 성경에서 이야기했건만 사람들은 사랑이 아니라 법이 있어야 안심을 해요. 그리고 법이 있어서 경계선이 생기면 그 경계선을 놓고 서로 경쟁이 벌어지고, 서로 경쟁을 해야 교회에 헌금이 모이고 뜨거운 열기로 움직이게 되지요. 서로 이기려고 하니까. “김집사 당신 뭐하노? 최집사는 헌금 했는데.” 자꾸 목사가 경쟁을 붙이고 자극을 줘야 교회가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면 주차장도 넓히고 주차장이 넓으면 사람들이 교회 와요.

법이 있으면 경쟁이 생기고 경계가 생기지만, 사랑이 있으면(고린도전서 13장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 온유하고 화평하고 ---. 온유하고 화평하면 회사에서 승진시켜 줍니까? 안 시킵니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 받은 증거는 뭡니까? 교회 다닌 후에 그 사람 수입이 갑자기 늘어나면 그 사람은 복 받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김집사가 만약에 수입이 늘고 십일조를 만이 하면 누가 기죽어요? 최집사는 기죽겠지요. 여기서 경계가 생기고, 목사는 ‘김 집사를 본받으라. 저렇게 열심히 하니까 복 받잖아. 너는 언제 정신 차릴래’ 이렇게 나온다고.

예수님은 법을 없애고 사랑으로 바꿔서 심지어 최집사가 창녀 짓을 해도 천당 간다고 하십니다. 강도가 되어도 천국 간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이번에 제가 창원에서 그런 소리 했습니다. 오버했는데 오버한 것은 아니고 “27세 때 사람 죽인 죄를 예수 믿고는 뒤에 찾으려고 해도 찾지를 못해요.” 분명히 살인죄가 있는데 찾아보아도 없어요. 찾아도 찾아도 찾지 못하는 것이 뭡니까? 내 죄. 이게 뭐냐? 사랑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사람을 죽였고 김집사는 사람 죽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같이 사랑을 받을까요? 오늘 공부 했으면 압니다. 주님께서 한 아담에게 모으기 때문에 그 아담의 분신들이 어떤 놈은 간음죄를 어떤 놈은 살인을 해도 주님 보시기에는 아담의 후손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그들의 자질을 보는 것이 아니고 바깥쪽에 있는 마지막아담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와 관련된 사람, 이것을 믿음이라고 했지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벨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삽니다.’라는 표시로서 제사를 드렸더니 주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은 자기 잘난 맛에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제사는 거절하셨지요.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살지만 안 믿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고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릅니다. 다 자기 잘났고, 교회 가서 기도해도 다 자기 잘 되기 위해서. 그것밖에 모릅니다.

한 가지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죄가 무엇인가? 이건 중요한 거니까 잘 들어보세요. 창원 강의에서 ‘이 밑바닥에서 죄라고 하는 것은 같은 이웃끼리 비교해서 좀 나으면 의가 되고 못하면 죄가 되는 거예요.’ “너는 간음했지? 나는 간음 안 했다.” 간음한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죽이려고 했잖아요.

마귀가 죄를 깔아놓았어요. 이 죄는 인간이 열심히 하면 지킬 수 있는, 안 범해도 되는 그런 죄를 깔아놓았어요. 그런데 이런 죄를 깔아놓았다는 자체가 죄가 됩니다. 높이 올라가면 죄는 딴것이 죄가 아니고 하나로 모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예요. 너, 나 없이 모두 죄인이란 사실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모르니까 똑같잖아.’ 이것이 아니라, 똑같이 우리는 저주 받을 수밖에 없고, 심지어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우리는 악마의 말을 들어요. 불순종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한테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아니면 누가 가르쳐 주겠습니까?

에베소서 2장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고집 센 인간들이 ‘나는 다른 이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하지만, 성경에 보면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요? 마귀의 말을 듣고 산데요.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마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든 안 하든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다 죄인으로 드러나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들어오면 갑자기 탐심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자기는 담배 피우면서 학생들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비웃겠어요. ‘담배가 나쁜 것 같으면 선생님부터 먼저 끊을 것인데 나쁘다고 하면서 피우는 것을 보니까 나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런 생각 안 하겠어요?

죄라는 것은 뭐냐? 주께서 우리를 아담으로 몰아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것. 이러한 작업을 주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내가 나에게 뭔가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주님을 섬기고 이것으로 자아를 구축하려는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것과 상관없이 주께서 십자가에서 거저 주시는 “너는 백날해도 아담이야.” 라고 지적하면서 거저 주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 관계가.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내가 너에게 와서 죄라고 지적하기 전까지는 너희가 죄가 없었다. 이제 내가 지적한다. 너희들은 몽땅 죄다.” 그러면 죄가 되는 거예요.

이제 결론을 맺어봅시다.

도대체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뭡니까? 주께서 까라면 까는 거예요. 그냥. 죄라고 지적하면 그냥 죄가 되는 거예요. 그 정도로 주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수용할 때, 거기에 목숨 걸고, 비록 내 사정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별로 안 중요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이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이게 중요하단 말이지요.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는데 올라가니까 엘리야, 모세, 예수님이 변했습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산 밑에서(창원시내에서, 광주시내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는 관심도 없어요. 뭐라고 합니까? “우리 내려가지 맙시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읍시다.(마17:4)” 이것을 가지고 ‘재개발, 뉴타운 건설’이라고 합니다. 변화산 위에서 뉴타운 건설하자고. 우리가 그 정도로 높이 올라가야 돼요. 올라가서 산 밑에서 ‘수입이 얼마냐, 장래 어떻게 먹고 살까?’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주님 십자가의 용서를 만끽하고 누리면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오셔서 하신 말씀을 아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떠밀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걸로 끝나줄 알았는데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성령 보내주셔서 십자가가 이처럼 중요하고 귀한 복음이고 사랑인 것을 저희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 5. 8. 09:5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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