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5월 6일 조지래드18 그리스도의 사역 - 속죄
부산 5월 6일 조지래드18 그리스도의 사역 - 속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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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06 그리스도의 사역 - 속죄
우리교회(IP:124.♡.85.92)
08-05-0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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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14 19:17
부산080506a조지래드18신약신학-속죄a
20080506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속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31과 그리스도의 사역, [속죄]에 대해서 해봅시다. 속죄에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대속’이고, 두 번째는 ‘화목제물’이라는 것, 세 번째는 ‘구속’이라는 것 속죄에 이 세 가지가 있다는데 신학자들이 분류한 거죠. 제가 분류한 것 아닙니다. 이 책에서 분류한 거예요.
속죄 안에 세 가지가 있는지, 대속 안에 세 가지가 있는지, 화목제물 안에 이게 다 모여 있는지 그거는 마음대로 하세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 정의해 놨어요. 속죄에는 대속과 화목제물, 구속 세 가지가 있다 돼있고.
‘대속’이라 하는 것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그것이 강조돼있고,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랑으로 전환시킨 거예요. 사랑 더하기해서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생산 되는 것, 또 세 번째 ’구속‘이라 하는 것은 값을 치루고, 이렇다는 거예요. 이게 31과의 긴긴 내용은 쫙 하고 압축시키면 달랑 이 세 개만 남아요.
그런데 이게 맞느냐 하는 겁니다. 상당히 은혜롭게는 들리는데 은혜롭다고 맞는 건 아니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직신학자나 성경신학자 하여튼 보수진영에 속한 사람은 다 이걸 주장하고, 보수진영이 아니고 자유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속죄, 대속, 화목제물 이것을 뭐로 대체하느냐? ‘희생’ 다른 말로 하면 ‘사랑’ 이걸로 다 전체를 ‘희생했다’ 이 한 마디로 다 넘겨버리자. 그냥 희생했다.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비우시고 하는 그런 빌립보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 챙기기 안 하고 남 챙기기 하는 이웃사랑을 실현시키는 좋은 사례다. 우리 그걸로 넘어갑시다. 하는 식이 자유주의고,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우리가 확실하게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챙기겠다는 겁니다. 내가 확실하게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널 구원해 줄게. 라고 확실한 구원의 원리원칙을 적용시키는데 이 모든 속죄는 대속과 화목제물, 구속있다 하는 이 전체 구조는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이 한계가 뭐냐 하면, 법으로 돼있다는 겁니다. 법의 형식으로 돼있다는 게 문제에요.
그러면 자유주의에서는 이러한 보수주의 모든 원칙을 뭐로 보겠어요? 주님은 사랑으로 구원한다 해놓고, 너희들이 신학으로 조립해보니까 이건 뭐냐 하면, 법적인 조치를 한 게 돼요. 사랑의 조치를 한 게 아니고, 법적인 조치를 안 거예요. 자유주의에서는 그냥 사랑인데 이쪽은 법적인 조치다 말이죠. 보수주의 입장에서 볼 때 자유주의에서 사랑이라 하는 것은 말은 사랑이지만 말이 좋아 사랑이지만 이게 쉽게 하면 두루 뭉실 이거든요.
두루 뭉실이 뭐예요?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 있잖아요. 생명 있는 것은 다 사랑한다. 교회 밖에도 구원 있다. 불교신자도 나중에 결국에는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왜? 착실하게 살았으니까. 이게 보수주의에서 두루 뭉실인 거예요.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하는 것은 너무 심했다. 주님께서는 날 안 믿어도 십자가가 졌는데 너희들은 십자가를 어떤 법적인 조치로 간주한다 이 말이죠.
자유주의 이야기를 잠깐 해야 돼요. 자유주의 이야기는 예수님은 인간이다 이 말이죠. 인간 중에서도 아주 지혜가 뛰어난 인간이다. 어느 정도 지혜가 뛰어난 인간이냐 하면, 신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우리보다 정신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죠. 훌륭하다는 말은 우리하고 예수님이 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칸막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쉽게 말하면 공부를 더 잘한 거예요. 많이 아는 사람이에요. 많이 안다는 말은 떨어져있다는 것이 아니고, 연결돼있는데 우리가 그 수준에 안 이르렀지 조금만, 조금만 노력하면 그 수준에 이르는 거예요.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는 등산가들이 잘 올라가지요. 그러나 우리는 헉헉거리면서 못 올라가잖아요. 한다고 해서 그 등산가가 우리가 못하는 걸 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도 직업 다하고 등산 연구하면 산에 올라갈 수 있다 말이에요. 그 사람처럼 팔천 미터 뛰어다니진 못하지만 이천 미터 정도는 애쓰면 할 수 있거든요. 이천 미터 갈 수 있으면 이천일 미터 가고, 이천일 미터 가면 이천이 미터 가는 거예요.
자유주의에서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은 뛰어난 스승이 되는 겁니다. 스승의 말을 참고로 듣는 거예요. 그 스승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법이 아니고 뭐다? 사랑이다. 수준 높은 사람만 사랑한다가 아니라 헉헉거리면서 등산도 못해서 빌빌 기고 있고 지밖에 모르는 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먼저 하나님을 만났던 그 위대한 지혜가에 의하면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은 뭐다? 사랑이다.
마태복음 5장 봐라 이 말이죠. 선인과 악인에게 뭘 주죠? 햇빛과 공기주시잖아. 봐라. 하나님은 자비로운 사랑이에요. 원수까지 사랑하라 했잖아요. 왜? 너거들 수준에는 원수가 있니, 적이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뭐가 없다? 원수고 뭐고 없다. 그런 칸막이가 없다는 거예요. 너희들 생각을 좁게 가져가니까 낮게 가져가니까 저놈은 나의 원수고, 저거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인간의 티격태격은 뛰어넘는 그 높은 수준에 이르면, 아이고, 자식들. 또 둘 다 똑같은 인간끼리 흑백 나누어서 어디 바둑 두나? 뭐, 싸우고. 내 봐라. 사랑 다해줄게.
이것이 바로 수준 높은 인간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수준 높은 인간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안 되지요. 예수님한테 한 수 배워야 되죠. 배우게 되면 뭡니까? 그 칸막이도 점차 엷어지고 사라지고, 이제는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는 겁니다. 개혁주의가 바로 머뭇거리고 있는 중에 개혁주의의 성화론이 머뭇머뭇 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개혁주의는 소위 보수주의 아닙니까? 보수주의면 뭘 해야 돼요? 법을 유지해야 되겠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개혁주의는 취지가 뭐예요? 날마다 뭐 해야 돼요? 날마다 개혁해야 되고 신학이 발전해야 되지 않습니까? 발전하는 게 어딥니까? 법에서 벗어나서 사랑으로 발전하려면 이쪽의 주장을 어느새 성화란 이름으로 닮아가야 돼요.
결국 오늘날 시대에는 옛날 20세기 초에는 메이첸이라든지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서 자유주의를 원수로 취급하고 보수주의 이야기했는데 그것도 한 때라. 그것도 한 때고 보수, 보수했던 사람이 스스로 정치적으로 돈 싸움 때문에 갈라져 신학교 세우고 난 뒤에 전부다 그게 다 뭐로 변했습니까? 이제는 신학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어떤 습관이나 사적인 인식의 범주 안에서 탈피를 못하니까 이제는 신학, 신학 니가 옳고, 내가 옳다 해봐야 니 선에서 니가 옳고, 내 선에서 내가 옳은 거니까 니가 잘했니 그런 것 때려치우고 어쨌든 간에 둘 다 공통점 찾아보자.
그건 뭐냐? 신은 살아계시고 사랑의 증거로써 예수님 보내주셨다. 그러면 그것 하나를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 보수, 자유라는 것을 우리끼리 싸우는 걸 멈추고 이제는 이슬람교에 대처해서, 불교에 대처해서 이렇게 나갈 때 자본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그야말로 복음이 되지 않겠느냐? 라고 그들은 손을 잡은 겁니다.
손을 잡고 보니까 그땐 20세기 중반이거든요. 현대 21세기 들어와서 뭐냐 하면, 이렇게 기독교가 그런 쪽으로 나오니까 일반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하, 기독교가 저렇게 사랑으로 원수 취급하는 인간끼리 싸웠구나. 그러면 불신자들이 다들 불신자지만, 교회를 원래 불신자는 뭐까지 요구하느냐 하면, 야야, 이제는 불교, 기독교 너희 내부에만 화평을 이루게 하지 말고, 이제는 뭐까지 화합해라? 달라이라마 하고도 이야기해라. 불교하고 이야기해서 이제는 코스모폴리턴이 되죠. 전 세계가 한 형제라 하는 것은 한 울타리에 있는 한 가족, 한 마을이라 것을 좀 인정해 달라.
이제는 종교인들끼리 이야기하고 종교인들이 하나가 된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가 종교인들에게 밥값 한다고 헌금 좀 낼게. 그리고 돈 좀 낼 테니까 종교인들이 단합하라! 이래 나온다 이 말이에요. 종교인들이여,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할 때 인류의 미래는 밝게 피어난다는 이런 주장은 결국 밑바탕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현재 전 세계가 하나의 단일 종교체제에 놓여있습니다.
이슬람교하고 기독교하고 자꾸 싸우면 기름값이 올라가요. 그러니까 이거는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위해서는 종교는 뒷전으로 밀려나야 돼요. 뒷전으로 밀린다는 것은 지금 중요한 게 에너지인데 그거 왜 싸우느냐 이 말이죠. 중요한 것은 하나의 국가가 대통령 뽑을 때 종교 지키라고 대통령 뽑은 게 아니잖아요. 잘 먹고 잘 살라고 한 거라고.
세상의 권력이라 하는 것은 분산되면 힘이 누수가 생기니까 하나가 되서 경제가 돌아가야 되잖아요. 중국 보세요. 중국이 아프리카에 월드컵 경기장 세워줍니다. 왜 그런 짓해요? 원 광물 그리고 원유, 중국의 10억이 살기 위해서는 구리, 망간, 마그네사이트, 철강 이런 걸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막대한 돈을 미국인들이 투자한 그 돈을 국내에 투자하기도 바쁜 그 돈을 가지고 아프리카 가서 나이키 신발 사주고, 월드컵 축구장 세워주는 이유가 에너지 확보 아닙니까? 거기에 무슨 당신은 이슬람교기 때문에 개종하라. 이런 소리 안 나온다 이 말이죠.
보수주의들이 이런 법적인 조치를 취해서 우리는 때려 죽여도 법으로 나간다 하면 결국 뭐가 안 들어오느냐 하면, 세계 대다수가 그리로 흘러가는데 이래 주장하면, 여기는 교인도 떨어지고, 특히 젊은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죠.
왜냐? 이 이야기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해가 되는데 젊은 사람들은 지금 경제현장에서 종교를 초월해서 돈 하나 이윤을 위해서 뛰는 사람인데 갑자기 그런 사람들이 교회 와서 이슬람교는 나쁜 놈이고, 자유주의는 나쁜 놈이고, 우리 보수주의는 옳다 하면 사고에 갑자기 뭘 쳐야 돼요? 자기 사고에 칸막이를 쳐야 되니까 얼마나 부담됩니까? 지금 사귀는 애인이 유대교인데 결혼해도 됩니까? 이런 문제. 여자친구 엄마가 알라신 믿는데 그럼 결혼할까요? 이런 문제. 옛날에는 묻기나 했지 지금은 묻지도 않잖아요.
시대가 격변하게 되면 기존에 옹고집으로 폐쇄적으로 짜였던 모든 조직들은 도태가 되게 돼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신 다윗주의’라 합니다. 신 다윗주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오픈되지 않으면 망한다. 이게 ‘신 경영주의’까지 막 나갑니다. 폐쇄는 정체되고 개방은 살아남는다 이 말이죠. 은행 간의 결합도 마찬가지고, 회사도.
그런데 하루에 스물네 시간 가운데 거의 스무 시간을 그런 직업에 종사하고 있어요. 그런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주일날 교회 와서 아직도 보수, 자유 이야기하면 나, 안 나온다. 안 나오면 돈 안 나오죠. 그럼 너희 구닥다리 노인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말이죠.
사상이, 종교란 사상만 따로 이건 종교분야, 이래 되면 참 좋겠는데. 사십 대만 되도 지금 모든 사람이 사는 게 이것이 종교분야라고 따로 방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두뇌에서 자꾸 섞이면서 어느 것이 나한테 이득이냐 하는 쪽으로 반드시 목적은 이득이냐 하는 쪽입니다. 어떻게 처신하면 이득이냐 그것만 목적이고, 나머지는 언제든지 혼재가 가능한 섞임이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현대 사람들은 설교할 때도 ‘이거다’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이럴 수도 있습니다’라고 해서 융통성을 우리한테 넘겨라 이 말입니다. 구득영 목사님이 우리교회 와서 교인 권면했잖아요. 그게 인기 짱이에요. 젊은 사람들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했어요. 어떤 권위의식 이런 게 없잖아요. 우리 진주도 야, 마음에 드는 목사님이다. 독일에서 동영상 다 보면서 야, 진짜 완전히 마음에 든다.
이겁니다. 이거니까 강요한다는 뜻이 아니고, 나 이건데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면 그 고난은 융통성은 누구한테 가져갑니까? 듣는 교인들 몫으로 바통을 주도권을 넘겨주는 거예요. 안 편할 수 없지. 마음 편하지. 주도권을 넘겨주는데. 눈치를 볼 필요를 없다니까. 이거는 옳습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이래 하는 게 아니라 마음대로 하세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 다음부터 마음대로 하세요. 하여튼 칼자루를 상대방에 넘겨주는. 그러한 시대에 도래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나 종교라 하는 것은 사실은 종교 밑바닥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종교 밑바닥에 돈이 있다 했어요. 돈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야 돈을 내놓거든요. 그렇다면 종교 밑에는 사람들이 뭘 가지고 기쁘냐? 기쁨조죠. 기쁨을 제공하지 아니하면 종교도 살아남을 수 없다.
사람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흐름인데 그 흐름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 도태된다. 하는 사회도 그렇게 교회도 그렇게 마찬가지 시대가 됐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옛날에는 보수하고 싸우다가 질려서 지금 어디 가있느냐 하면, 불교에 가고.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불교도 옛날엔 부처를 믿으라고 부처 섬기라 했잖아요. 이제는 당신이 부처에요. 당신이 부첩니다.
둘 다 잘 만났어요. 둘 다 우리는 기독교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믿으라가 아니고, 니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제는 너희도 나처럼 그렇게 살아라. 그걸 불교가 듣고 아이고, 우리 부처님 말씀하고 똑같네요. 둘 다 똑같은 거예요.
어떤 사람을 니 자리를 떠나서 예수 자리에 오너라가 아니라, 기다려라. 나, 예수가 니 자리에 갈게. 이게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지녔다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자유주의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나한테 건너오지 마라. 내가 니한테 건너갈게. 그리고 이 건너감이 곧 뭐다? 사랑이다. 이게 바로 희생이다.
만약에 법을 이야기해버리면 이쪽에 기본 인간들이 갖고 있는 법에 이런 게 없잖아요. 속죄라 하는 것은 일, 대속, 이, 화목제물, 삼, 구속 이 세 가지 돼있다. 이게 하나의 법적으로 체제를 잡혀버리면 이런 생각 태어날 때 없잖아요. 태어날 때 어느 쪽입니까? 자유주의 쪽 아닙니까? 아이, 누구 날 무조건 사랑해주고, 무조건 위로해 줄 사람 없나? 누가 날 위로해주지? 이게 인간 아닙니까?
만약에 법으로 해버리면 누가 날 사랑해주지에서 뭐로 바뀌어야 돼요? 새롭게 형성된 법 체제에 들어가야 되니까 이건 뭐, 들어가야 하니까 어중간하고, 다 들어갔다고 누가 확정해 줍니까? 확정해 줄게 있어야지요. 확정해 주기 위해서 법을 했는데 이 법이라 하는 것이 나 지켰다, 나 지켰다 해서 지켜지는 게 아니고, 지켰다, 지켰다 하더라도 한 십 년 지켰다 십오 년째 엉뚱한 짓 하면 법에 의해서 다시 어떻게 됩니까? 울타리에서 벗어난 게 되니까 도대체 이 법을 지금 이랬다가 치매 걸려서 법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 있어요. 법이기 때문에.
전에 이야기했듯이 법이라 하는 것은 경계 아닙니까? 경계선. 법이라 하는 것은 경계선이거든요. 경계선을 왔다 갔다. 이 경계선 선 그어놓고 이 안에 들어오면 법으로 합당함, 의로움, 이 밖에 나가면 뭡니까? 죄인 됨. 죄인과 의인을 가름하는 그 경계선을 법이 동원돼야 쳐져요. 그런데 자유주의는 뭘 철폐했습니까? 이 법이 없어요. 니가 오지 마라. 내가 갈게. 사랑으로 널 덮어줄게. 이게 자유주의다 말이죠.
그야말로 자유 아닙니까? 자유를 찾아서가 아니라 내가 니 자리로 가는 게 아니고, 그동안 있었던 것도 자유였구나. 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거예요. 플라톤의 연상이라 하는데. 새삼스럽게 배우는 게 아니고, 인간은 이미 잠복돼있는 어떤 게 있는 누가 와서 깨우쳐주면 아아, 내가 옛날부터 그런 것을 알았었구나. 깨우쳐줌으로써 비로소 안다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추가적으로 뭘 집어넣는 게 아니고. 아, 전에 몰랐었는데 이제 알았다 하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오늘 속죄 문제, 예수님의 사역문제가 래드의 책에 보면 자유주의를 얼마나 의식하는지 그건 아닙니다. 이건 아닙니다. 이래야 됩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이래 됩니다. 해서 쫙쫙 짜 맞춰서 내린 결론이 뭐냐?
속죄에는 대속과 화목제물과 구속이 있는데, 대속이라 하는 것은 항상 우리가 있는데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데, 그 이야기하면서 뭘 공격합니까? 세상에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하고 말이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는데, 아니야. 분명 하나님의 진노가 있어. 하지만 그 하나님의 진노에 사랑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세 번째 구속이라 하는 것은 값을 치른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관련될 때 속죄를 이룬다는 겁니다. 똑똑한 자유주의가 가만있겠습니까? 어이, 래드 아저씨. 손들고 질문 있습니다. 대번 이래 나올 거예요. 무슨 질문이요? 두 가지만 알고 하나 빠지면 속죄 됩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밑에 것 두 개 알고, 대속 안 믿으면 어떻게 돼요? 세 가지를 다 믿어야 되는 거예요. 김밥 속에 햄 들어가고, 미나리 들어가고, 그 다음에 다꽝 들어가는데 그러면 다꽝 안 들어가고 두 개 들어가면 김밥이냐, 김밥 아니냐 하는 그 문제에요. 언제까지 김밥을 먹어야 되나 하는.
근본적으로 제가 이야기하면 자유주의에서 이런 것을 시비 걸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는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고, 구세주가 아니란 말을 여러분 잘 알아야 돼요. 구세주란 말이 뭐예요? 구원자, 구세주, 메시아가 아니란 말은 뭐냐? 구세주라 하면 반드시 선입관이 뭡니까? 우리는 안 벗어나면 그대로 저주받고 지옥 간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거기서 건져 줄게. 라는 게 뭐예요? 구세주 아닙니까?
그럼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말할 만한 것은 뭐냐? 예수 안 믿으면 어떻다? 그냥 그대로 지옥 가는 존재라 하는 것을 누가 싫어해요? 자유주의가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속죄 이런 것을 없애버리란 말이죠. 사람 자체가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과 천당 가는 사람이 구분 돼버리면 이거는 인격의 존엄성 있잖아요. 그걸 무시하잖아요.
어제 박경리 씨 죽었잖아요. 박경리 씨가 팔십여 년 동안 살면서 그 사람 머리 속에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생각이 있겠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으니까 그 사람 나오고 난 뒤에 모든 작가의 성향은 뭐냐? 인간의 존엄성이라 하지요. 생명의 존엄성인 거예요. 그러니 천주교하고 불교하고 자유주의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 사람이 아마 원불교 믿는가 모르겠어요. 금관문화훈장 받으면 뭐 합니까? 죽은 자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아마 기절초풍할 거예요.
그래서 우선 제가 강의 들어가기 전에 내막을 설명하기 전에 성경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뭐냐를 설명하기 전에 이것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본적인 전체적인 인식 자체가 지금까지 우리 이천 년 신학이 이거 왔다 갔다 했었어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성경을 모릅니다. 양쪽 다를 다 취해야 됩니다.
양쪽 다를 다 취하려면 양쪽 다를 다 알아야 돼요. 공부를 래드 이야기 다 듣고, 자유주의 다 들어서 양쪽 주고받고 폭탄, 곡사포 쏘고 미사일 쏘고 하는 쏘는 무기들을 다 알아야 된다고. 로이드 존스 책을 다 읽어야 되고, 몰트만, 불트만 그런 책들도 읽어야 돼요. 심지어 그것보다 더 아주 험악한 자유주의, 심지어 불교. 한스 퀑 정도가 아니고, 한스 퀑은 아주 보수라 해요. 그것보다 대단한 사람들, 곡사포 서로 쏘는 그걸 알고 있어야 돼요.
이런 인식을 우리가 밀어버리고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두 노선입니다. 두 노선이 성경에 보면 세상에 두 노선이 있어요. 이거는 인간에서 두 노선이 나오질 않습니다. 이게 첫 번째 우리 인식의 변화가 돼야 돼요. 우리 인간이 두 노선 가운데 어느 노선을 결정할꼬? 이런 법은 성경에 없어요. 왜냐하면 두 노선을 제가 그림으로. 파이프인데. 두 노선은 한쪽에서 두 노선이 우리에게 특징이 뭐냐, 모습이 뭐냐,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하면, 두 노선 둘 다 뭔가 생산한다는 거예요.
보수진영에서는 속죄사상을 생산의 개념이 아니고 뭐냐 하면, 목사님, 제가 성경 중에서 어떤 교리를 믿으면 내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자기 사수입니다. 자기 지킴이에요. 나는 죽어서 좋은 천국에 가야 되겠다. 뭘 챙겨서 집어넣고 그걸 아주 자물쇠 잠가서 나는 이제 죽어도 구원받는다. 어떤 비법 같은 것, 그런 것을 챙겨 넣는 거예요. 이거는 뭐가 아닙니까? 생산이 아니지요.
이거 집어넣는 것하고 내가 공장이 되어서 뭔가 제품을 생산하는 것하고 다르잖아요. 이거는 백화점이나 이마트에 가서 물건 사는 거잖아요. 아, 이런 속죄 교리 있었네. 이건 대속이고, 이건 화목제물이고, 이건 구속이고. 아, 나는 오늘도 챙겼다. 챙겨 넣는 것이지 내 자체가 하나의 기계가 되어서 자꾸자꾸 뭔가 바깥으로 생산 되는 건 아니란 말이죠. 인식이. 인식이 챙기자는 인식이지 나는 하나의 기계인데 공장인데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생명을 생산한다는 그런 인식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보수주의 다 그래요. 박형룡 보면, 박형룡 책도 누리끼리 하지만 그 내용도 누리끼리해요. 챙겨 넣기에요. 이것 밖에 나가면 지옥 가고, 이것 알면 보수고, 천당 가는 거예요. 전통 개혁주의신학이라는 거예요. 챙기기에요. 주께서 나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서 자꾸만 생명이 쏟아져 나온다는 그런 개념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배에서 뭐가 흘러나오리라? 샘물이 흘러나오리라 했어요. 챙기기가 아니고, 우리는 하나의 호두과자나 만드는 기계 있잖아요. 칙칙 찍어내면 또 나오고 붕어빵 찍어내듯이. 주님께서 저, 하나님. 니 뭔데? 붕어빵 기계인데요? 저 구원받았습니까? 붕어빵 기계가 구원받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너를 찍어서 계속해서 남들에게 줄 수 있는 생명을 나를 통해서 계속 찍어내는 기계로 사용할 뿐이죠.
그 관계성, 그게 바로 그 관계가 메시아의 속죄 방법입니다. 래드에는 전혀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챙기기입니다. 왜? 자유주의하고 싸워야 되니까. 뭐든지 자꾸 생산돼야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니까 마태복음에 나오지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다른 말로 하면 챙기려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너희들을 섬기기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하심이라.
그렇다면 아까 얘기한 속죄 안에 대속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속이라는 일을 생산하시죠. 대속도 생산하시고, 속죄도 생산하시고, 화목제물도 생산하시고, 구속도 생산하시고 그리고 모든 영광과 모든 공로를 예수님은 누구한테 돌리고? 하나님의 뜻에 돌리고. 하나님의 예정된 예언의 뜻에 돌리고.
그래서 구약에서 불임여성과 자녀생산이 그렇게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자녀가 없는 쪽이 많은 자녀를 낳는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자녀가 없으면 없는 것이지, 자녀가 없는 쪽이 왜 많은 생산을 하게 되며 더 어려운 것은 결과적으로 자식이 많으면 자식을 낳아서 많든지, 왜 자식이 없는 여자로 만들어서 자식이 많게 하느냐 말이죠. 우리 인간들 헷갈리게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성경 볼 때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왜 그렇게 어렵게 해요.
이근호 목사는 잘도 쉽게 하는데 왜 주님은. 제가 쉽게 하는 게 아니고, 성경보다 제가 오히려 더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성경이 진리니까. 저는 진리가 아니니까. 더 어려울 수 있다 이 말이죠. 성경에선 최대한 쉽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스럽게 쉽게 하면 쉽게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지네.
여러분, 이런 게 있습니다. 집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보세요. 두루마리 화장지 보면서 제가 느낀 게 있는데 두루마리 화장지가 화장지 몸통이 있고 있잖아요. 삐져나온 화장지를 잡아당겨보세요. 절대로 몸통이 딸려오는 게 아니고, 화장지만 계속 늘어나죠. 몸통을 잡아버리면 화장지를 감을 수가 있는데 이미 삐져나온 화장지 도로 감을 수 있는데 화장지를 잡아당기면 점점 더 멀리 가잖아요.
사람들은 챙기려고 속죄도 챙기고, 대속도 챙기고, 화목제물 교리도 챙기고, 구속되는 교리를 챙겼는데 챙겨봤자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점점 멀어져가는 거예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나는 또 주님 덕분에 이거 챙겨서 오늘밤 죽으면 천당 간다. 맨 날 이러고 있는 거예요. 두루마리 화장지만 하면 점점 떨어져가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두 노선이 어떻게 다르냐 하면, 두 노선이니까 쉽게 하면, 넓은 길, 좁은 길 있는데 두 노선 있는데 좁은 길에서는 저쪽에서 뭔가 이쪽으로 와요. 생명이 우리가 생명을 두루마리 화장지를 갖고 가는 게 아니고 생명이 이쪽에서 몰려온다고. 생명을 다른 말로 하면 속죄요, 대속이고, 구속이요, 화목제몰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속죄를 챙기라가 아니고, 니는 이제부터 속죄의 기능을 해야 된다. 화목제물 챙기는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죽으나 사나 주의 것이로다. 화목제물 기능을 평생 동안 해야만 한다. 니는 공장 기계다 이 말입니다. 대속을 챙기는 게 아니고, 대속이 너를 챙길 것이다. 대속이 나를 엄습할 것이다. 대속이 엄습한다, 이러면 자유주의하고 틀리죠. 자유주의는 뭡니까? 하나님이 날 사랑해서 챙기는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 지밖에 모르잖아요. 그게 아니고 아예 삼켜버린다는 말은 일방적으로 예수님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한다는 거예요.
리브가가 아 못 낳았잖아요, 그죠? 그래 놓고 나중에 계시 줘서 에서, 야곱 생겼지 않았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특히 리브가도 그렇게 또 불쌍한 여자 있어요. 라헬이란 여자는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죽잖아요. 그것도 세상에 아기 낳는 기쁨도 못 누리고 아기는 낳아 놓고 지는 죽고. 그래서 얼마나 슬펐든지 이름을 ‘베노미’라 안 합니까? ‘슬픔의 자식’이라. 그런데 아빠는 뭐라 합니까? 니가 기쁨의 자식이다. 반대로 이야기하죠.
한나도 마찬가지죠. 진작 아들 줄 것 같으면 좀 애간장 덜 태우고 주면 되는데 애간장 다 태우고 술 먹었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왜 자꾸 하나님은 우리를 왜 애를 먹이는 거예요? 가만 생각해 보면 화나지 않습니까? 줄 거 딱딱 챙겨주면 되는데 왜 애를 먹입니까? 이미 우리의 노선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찾아가는 노선입니다.
예를 들면 뭐냐? 자기가 찾아가요. 챙기면서 찾아가요. 나는 속죄교리 알았다. 나는 대속교리도 알았다. 나는 화목제물이 뭔지 알지롱. 자꾸 챙기면서가는 거예요. 챙기면서 가니까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체가 됩니까?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이 자기 의를 보수주의는 전도하신 겁니다. 자기 의를. 나도 십자가 안다. 부활 안다. 전부다 자기 의에요. 니는 얼마만큼 챙겼노? 아이, 나보다 더 챙겼구나. 더 챙겨야 되겠다. 이런 자기 의 챙기는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예수님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면 죽여 버리고. 이 챙기기가 보수주의만 한 게 아니고 예수님 당시에 누가 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했잖아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얼마나 바리새인들이 사람들 자기들끼리는 그야말로 자유주의 말로 하면 신의 지혜를 많이 아는 그런 사람인데 백날 알면 뭐 합니까? 그 안에 쓰레기만, 자기를 위한 쓰레기만, 교리란 종교에 관한 쓰레기만 잔뜩 들어 있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을 말하기를 십자가라 하는 것은 지금까지 법적인 체제의 경계선을 허물어버리는 게 십자가다. 자유주의는 그 말 또 오해하는 거예요. 거봐. 우리 말 맞잖아, 그래. 사랑이라 하는 건 율법을 초월한 거니까 율법으로 의로운 인간이 없기 때문에 사랑으로 의롭다 했으니까 우리는 바로 하나님 의를 공짜로 챙겼잖아. 챙겼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나 보수주의나 공통점이죠. 둘 다 뭐냐? 둘 다 노선은 넓은 길 노선. 자기가 챙겨서 신에게 도달한다는 그러한 본성을 발휘하는 데는 둘 다 똑같은 겁니다.
그러나 제가 아까 이야기한 리브가나 구약에 있는 많은 하나님한테 애를 먹는 그런 사람들, 에스겔, 이사야, 많은 사도들은 생산기계입니다. 들뢰즈가 아주 이야기했죠. 인간의 욕망의 공장이라고. 인간은 기계라 하지요. 머신적이요. ‘기계’라는 말은 뭐냐 하면, 차 엔진을 투명하게 보면, 피스톤이 막 굉장히 활발하게 움직이죠. 마치 근육이 울뚝불뚝해서 피스톤이 움직여서 차가 움직이잖아요. 그처럼 우리 안에 욕망이라는 피스톤이 움직이는 거예요. 욕망이 가끔 만들어낸 게 자아현상이지, 자아는 원래 없어요. 자아를 깨보면 안에 뭐가 있느냐? 욕망만 불뚝불뚝 있는 거예요.
욕망의 증거는 뭐냐? 세포 자체가 백혈구 이런 것 보면, 무조건 세포 내에 이물질이 들어올 때는 이유도 없이 본성적으로 거부하게 돼있습니다. 사수하게 돼있고 저항하게 돼있죠. 그런 세포가 우리 몸에 200조입니다. 그런 세포들이 모였어요. 그 세포 안에 제일 오야봉이 있어요. 오야봉을 DNA라 합니다. 이게 도킨스는 말하기를 DNA라. 오양봉이거든요. DNA는 자기 새끼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새끼 깔 때 항상 어느 것이 내 새끼를 유리한 쪽에서 까느냐 그것밖에 몰라요.
DNA가 원래가 그래요. DNA는 무생물 아닙니까? 천만에 말씀. DNA에 박테리아에 들어가면 살아요. 이게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사람하고 코끼리하고 돌하고는 분명히 생물, 무생물이죠. 이게 원생동물까지 점점 내려가 보세요.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도대체 이게 죽은 거야, 살은 거야? 어떤 기관은 살아있고, 어떤 데는 생물, 무생물 이래돼요. 광물인데 살았고, 건드리면 생물 되고, 안 건드리면 광물 되고. 삶과 죽음이 이게 경계가 끊어지는 거예요.
이걸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윈의 진화론밖에 없다 이 말이에요. 뭐냐 하면, 자기가 되고 싶어도 안 되고, 환경 따라서 적응하다 보니까 지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이거 요한복음 21장. 이게 진화론입니다. 자기가 원치 않게 된 거예요. 현재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은 뭐냐 하면, 이 대자연이 본인이, 자아라 하는 것은 나중에 생산물이 자아고, 자아가 있어서 환경 하는 게 아니고, 자연이 움직이면 적응하다 보면 자기가 원치 않는데서 적응하려고 애쓰다보면 그 적응에 맞는 존재가 된다. 그래 가르치는 거예요.
사람 속에는 이러한 철학까지 나오다 보니까 신학이란 것이 얼마나 누구 위주냐 하면, 자기 구원에 몰두하는 폐쇄적인 그런 안목에서 그동안 신학이 사람들에게 집단 세뇌를 주고, 전 국민을 세뇌주고 전 국민을 신자로 만들어서 집단으로 했는데 이게 21세기에 들어와서 온 지구가 하나의 마을, 하나의 빌리지처럼 이렇게 된 입장에서는 종교라는 문제보다도 같이 공존하느냐, 같이 공멸하느냐? 에너지문제, 환경문제 이게 더 종교답지, 이제는 종교는 하나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그냥 무시하자. 그런 분위기를 젊은 애들부터 다윈주의부터 배워서 학교에서부터 직장에서 됩니다.
앞으로 삼만 불, 사만 불 넘어가면 교회는 나이 많은 사람은 오고, 젊은 사람은 교회 나올 틈이 없어서 안 나오고, 나올 시간 줘도 놀러간다고 안 나오고 배낭여행 간다고 안 나오고. 점점 더 교회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아직도 신을 인정하는 곳으로 선교지를 바꾸는 겁니다. 아직까지 신과 돈을 연관시키는. 우리나라는 신과 돈은 이제 끝났거든요. 돈은 돈이고, 신은 신인데 아직도 신이 돈과 연관되어 있는 곳으로 피신해서 그리로 가서 옛날 60년대 해먹었던 그대로 전파시키는 세뇌시키는 그런 작업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정리하면, 지금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이야기한 게 없어요. 뭐냐 하면, 속죄, 대속 이것이 어떻게 좁은 노선, 새로운 노선을 통해서 저쪽에서 이미 노선을 타고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게 자유주의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우리를 삼키려고 오는 거고, 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삼켜나가려고 예수가 왔다 하지만 이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일방적으로 찾아온다는 말은 나라는 인간은 이미 죽었다. 하나님은 딴 건 못해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게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항상 일할 때는 너는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너는 죽은 자다. 항상 그 점을 암시하면서 옵니다. 없는 이삭이 태어났잖아요. 근데 그걸 누가 믿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믿었으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칠 수 있는 겁니다.
없던 시절로 구득영 말씀대로 혼돈으로 도로 환원시켜버린 거예요. 질서? 웃기지 마. 질서는 뭐가 와야 돼요? 질서가 오게 되면 법이 되니까 전부다 없는 시절로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날마다 나는 죽는다. 하나님이 날마다 나를 죽이는 거예요. 날마다 나를 죽이는 그 작업이 나로 하여금 나에게 속죄, 대속, 화목제물 이 소식이 날마다 내 속에서 생산되어서 퍼가라고, 그냥 막 샘솟듯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은 물 마셔야 되지만 마셔봤자 목마르잖아요.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고, 니가 아예 샘이 되라. 니가 물 뜨러 가는 것이 아니고, 니가 움직이는 샘물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네 배에서 생수가 나오리라. 우리 힘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그렇게 해내고야 말리라.
박영선 목사님은 해내고야 말리라 하는 것을 너는 거룩해서 반드시 구원되고야 말리라. 그래 이야기하잖아요. 그거는 또 뭡니까? 또 챙기기에요. 아, 나는 구원받는구나. 내 구원받았느냐 그 문제 되면 ‘내가’가 돼요. 내가 구원받는 천당 가는 내가. 내가가 여전히 남아 있어요. 주님의 이런 노선은 중간에 내가 나왔다가 뭐로 바뀌어야 돼요? 내가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어야 된다 말이죠.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구속’이란 거예요. 구속이란 뜻이 뭐라 했습니까? 돈 주고 값 주고 샀다 했지요. 고린도전서 7장 한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7장 22절, 23절 읽어볼까요? 같이 시작,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스톱. 말이 어려운데. 여기 자유라 하는 것은 나 자유가 아니고, 이건 엉터리고요. 부르심을 받은 관계가 뭐다? 두 자로 자유란 말이죠. 빼도 박도 못한 거예요. 그 뒤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뭐가 돼요? 종이 곧 다른 말로 두 자로 자유가 되는 거예요. 자유, 그리스도 종. 그리스도 종 다른 말로 하면 자유. 빼도 박도 못해요. 우리 운명이.
그 다음에 23절. 너희는 뭐로? “값으로 사신 것이니” 구속입니다. 구약에서.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취직하지 말라는 건지 백수로 살라는 말인지 얼마나 어려운 거예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참, 사도바울 지는 장가도 안 갔으니. 제 말이 아니고, 자유주의에서 이야기해요. 사도바울은 예수님보다 단계 낮은 지혜자에요. 시건이 아직까지 없다 이 말이죠. 지도 장가는 안 갔으니 함부로 툭툭 내뱉어서 사람들을 부담 준다 이 말이거든요. 사람의 종이 되지 마라. 그럼 자유주의에서 대번에 나오는 소리가 사람들의 종이 안 돼야 구원받느냐? 이래 나온다고.
그러니까 자유주의나 보수주의나 챙기는 게 뭐냐 하면, 내 구원 챙기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한테 어떻게 해줘야 된다는 겁니다.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니가 뭔데? 전 살았거든요. 너는 죽은 자요, 너는 없는 자, 없는데 예수님이 종이란 이름으로 비로소 새로운 피조물로 생긴 것이 바로 너라는 겁니다. 인식 자체가.
왜냐하면 우리 이름은 사실은 이름은 있는데 없는 이름이에요. 이름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최초로 이름을 가졌어요. 무슨 이름이냐? 그리스도 이름을 가졌어요. 기도를 해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해야 되고, 봉사를 해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해서 그럴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 두 노선 가운데 노선입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이 아니고 노선입니다. 두 노선만 있어요. 노선에서 저쪽의 주님 쪽에서 생명이 흘러들어오게 되면 여기서는 없는 존재가 있게 되었고, 죽은 자가 살게 되고. 이쪽의 노선은 뭐냐? 자꾸 지가 살았데. 살은 인간 더 살고 싶어서 뭔가 교리라도 챙기고, 예수도 알고, 예수도 믿고, 열심히, 열심히 방종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한다는 거예요.
제가 요새 글을 하나 쓰는 게 있는데 진짜로 힘들어서 [복음의 회복]할 때도 힘들었는데 그 이후에 이만큼 힘든 건 처음이었어요. 너무 힘들어요. 힘든데 그 글에 뭐냐?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기 절제에 철저하고, 자기 생각이 독선적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다룰 때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뤘는데 결론이 뭐냐 하면, 쓸모없다. 그리고 어떻게 죽일꼬, 의논합니다. 굉장히 모든 것이 금식할 정도로 자길 낮추고 그래서 독단적인 생각을 의논하고, 거기 비해서 예수님은 지 생각만 주장하고, 남 의견 듣지도 않고.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주님 안에 하나님의 생각이 자꾸 생산됐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 하는 것은 하나님을 죽인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속죄, 구속, 화목제물, 대속 이런 것이 윤곽이 잡힙니다. 그 윤곽에 대해서는 구약과 연관을 시켜봐야 돼요. 그래서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는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해서 생산이란 의미가 없이는 구약 자체가 해석 안 된다는 것, 없는데서 생산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사도바울의 메시아 사역이 어떻게 이뤄지는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교회(IP:220.♡.176.141)
08-05-14 19:19
부산080506b조지래드18신약신학-속죄b
20080506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속죄 (강의:이근호 목사)
이 책이 래드의 책에 보면 구약과 연관시키는 걸 보면 잘 했습니다. 특히 속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구약의 법궤, 증거궤 뚜껑을 언급한 것은 래드가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지요.
래드가 자유주의를 반박하면서 구약에 분명히 하나님의 그 무서운 속죄, 법궤라 하는 것은 만지면 죽게 돼 있잖아요. 저주받아서. 그 근처도 못가요. 못가기 때문에 레위지파가 둘러싸서 운반해야 되지 아이고, 같은 이스라엘인데 같은 홍해 건너왔는데 같은 인간 아닌가? 민주주의 방식으로 나가면 큰일 납니다. 구약은 민주주의 아니에요.
거룩이냐, 속되냐? 속하냐, 거룩하냐? 이 두 가지 노선이 가게 돼있지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냐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거룩한 인간 아니면 인간 취급을 안 하니까. 애굽 군사들 홍해 빠진 것 보세요. 같은 인간인데 빠져 죽었잖아요. 어디를 약속의 땅을 넘봐, 이것들? 하고서 홍해 바다에 몰려서 다 죽지요.
이스라엘만 구원하는 홍해만 아니라 뭐도 보여주는 홍해다? 약속이 없는 자는 이렇게 망하도록 돼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홍해였습니다. 열 가지 재앙도 마찬가지에요. 열 가지 재앙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재앙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이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열 가지 재앙입니다.
상당히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독단이죠. 근데 그 하나님의 독단을 이스라엘도 이해 못하고 애굽도 이해 못했어요. 이스라엘도 이해 못한 상태에서 계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받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결국 그들이 정작 이해를 해야 될 것은 홍해를 건너왔다, 열 가지 재앙에서 우리는 빠졌다, 기분 좋다. 뭐, 우리는 광야의 전쟁에서 여호수아가 칼로 이겼지만 모세가 손들어서 이겼다.
전부다 나, 나 이게 아니라 피에 관한 겁니다. 언약의 피. 누군가 희생을 해서 피를 흘려야 이것이 뭐로 이어지냐 하면, 이게 거룩으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히브리서에 보면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이걸 ‘모형’이라 하고, 달리 이야기하면 이걸 가지고 ‘그림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히브리서에 의하면. 모형이요, 그림자로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또 골치 아픈 논리가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형과 그림자하고 반대에 뭐가 있겠습니까? ‘실체’가 있겠지요.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대해서 어느 신학자도 제가 보기에는 규명한 사람이 없어요. 모형과 그림자와 실체, 이걸 연결시킨 그 관계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모형입니다. 아시지요? 예수님이 실체입니다. 아시지요? 넘어 갑시다. 이래 되는 거예요. 이건 그림자입니다. 아시죠? 그럼 넘어갑시다. 그 관계가 사람마다 지 마음대로 모형과 실체를 하는 거예요.
문제는 이게 ‘연속성’이냐, 아니면 뭐냐? ‘불연속성’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요. 연속성일 경우와 불연속성일 경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에 모형과 실체가 연속성이라면, 연속성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가 이게 모형이잖아요. 맞지요? 율법은 모형이니까. 모형은 폐기처분돼야 되니까.
그런데 십일조라는 모형과 신약의 헌금과 연속돼있다고 한다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구약에는 10% 했지만 신약에서는 그것보다도 더 하라고 10%만 했다는 거예요. 최소한이 10%고 신약에는 10%가 아니고 다 바쳐야 되죠. 그런 의미에서 불연속성이 아니고 연속성이라고 주장을 하는 이론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내가 묻지요.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았잖아요. 그건 모형이죠. 그러면 신약에서 양을 몇 마리 잡아야 되겠습니까? 구약에 사람들이 여호와를 믿었잖아요. 여호와께서 요구한 것이 어린양이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어린양을 받기는 하나님이 받지만 바치는 자는 누굽니까? 아직까지 인간이란 말이죠.
연속성이란 말은 뭐냐 하면, 십일조도 마찬가지에요. 십일조가 10%에서 다 바쳐야 된다 하는 것은 바치는 주체가 누굽니까? ‘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연속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그림자 시대든, 실제 시대든, 어떤 시대든 뭘 해야 된다? 인간이 뭔가를 꼼지락거리면서 해야 된다를 가지고 모형과 실체를 연결시키지요.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구약 때는 양 바쳐서 하나님께서 받았는데 신약에서는 뭘 바칩니까? 이래 물으면, 그들은 말라기 십일조 말한 게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바쳐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바치는 겁니까, 어이 되는 겁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바칠 수 있습니까? 점점 더 나가면 해괴망측한 일이 나오지요. 양은 늘 잡았지만 우리는 한 번만 예수님 바치면 된다. 두 번 다시 예수님 바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히브리서에 의하면 ‘단번’에 했으니까.
단번에 라든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누가 바친다? 내가 예수님을 바쳐야 된다는 그런 이론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결국 이런 연속성을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너무 십일조에 대해서 연연하다 보니까 지금 무리수를 뒀어요. 오바한 거예요. 오바만 하면 괜찮은데 문제는 이래돼서 문제지. 오바해서 예수님을 양처럼 생각해서 우리가 바치는 주체자로 생각했다는 자체가 문제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동의할 수 없다면 간단하지요. 모형에서 모형 대목, 구약 대목에서 주체는 인간 맞습니다. 그건 우리 인정합시다. 양 바친 사람들, 하나님이 양 뚝 떨어져서 준 게 아니고 양 바친 사람, 제사장 있어요. 주체가 누굽니까? 인간 맞습니다. 그런데 실체에서는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하고 그 당시 구약하고 예수님하고 같은 아담에 속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연속성이 있는데 로마서 8장 3절, 참 이 대목을 제가 중요시 여기는데. 거기 보면 같은 인간이란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같은 인간이란 말을 한 것이 아니고,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죄 있는 육신’이란 말을 써요. 죄 있는 육신으로써의 연속성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뭐냐 하면, 저주 받는데 대해서 연속성이라.
구약의 제사장들은 양 바쳐서 뭐 받고? 저주 받고. 예수님은 자기는 뭘 받았어? 죄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육신의 몸을 버림으로써 아버지한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저주 받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 이 대목에서 아주 강조하고 있는데, 십자가에 달린 자는 뭘 받는다? 예수님은 우릴 위해서 저주 받았어요. 저주를 받아야 돼요. 저주 받는데서 연속성이에요.
그 다음에 축복을 받은데 연속적이 아닙니다. 이걸 이 책에선 이야기를 못하고 있어요. 저주 받는데 연속적인데 이 사람 책에 보면, 고린도후서 5장 13절,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이야기해놓고 그 다음에 자유진영에서 적극적으로 내놓는 미사일이나 곡사포에 이 사람이 대응을 못하고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 죽으실 때 모든 사람이 죽었지요. 그죠? 그러면 자유진영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났을 때 모든 인간이 살은 겁니까? 어때요? 래드는 여기서 실력이 딸려서 말을 안 한 거예요. 그걸 찾아보니 말을 안 해요. 말을 못하고 있어요. 흐지부지 넘어가 버렸어요. 주제를 갑자기 딴 데로 넘겨버려요.
고린도후서 한번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그 다음에 뭡니까? “대신하여 죽였은즉” 자, ‘대신’이란 의미가 뭔 뜻이냐를 이해해야 돼요.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이 뭔 뜻이냐? 이 말은 한 사람이 죽었는데 모든 사람이 죽었느니라. 왜냐하면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결국은 자유진영에서 특히 칼 바르트가 그렇게 주장해요. 칼 바르트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죽은 것이다. 그 대표했다는 말이 대신, 대속이란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유일한 선택받아서 살았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이 주님 앞에서는 사실은 산 것이다.
어떤 학생이 질문하기를 그러면 칼 바르트 교수님은 보편구원설을 주장하는 겁니까? 라는 질문을 했지요. 책에서. 그거는 하나님 소관이지 내가 말할 성질이 아니다. 학생이 논리가 그런 식이 아닙니까? 대신했다는 말은 한 사람의 운명이 전체 운명을 대변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대변했던 분이 죽었다가 축복 받아서 영생을 얻어서 다시 살아났다면 이것은 지옥 갈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지옥 간다는 말은 허풍이든지, 위협이든지, 여호와증인 말대로 잠시 위협했다가 나중에 스스로 철거하자는 이야기인지, 지옥이란 부처 말대로 결국은 모든 인간은 다 환생을 하든지 간에 구원받는다는 그런 뜻입니까? 하니까 나는 보편구원론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이건 박영선 목사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구원될 자를 예정했다. 박영선 목사 보고 그러면 지옥 갈 사람을 예정했습니까? 그런 것은 성경에 안 나와 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안 했습니다. 안 하고말고 본인의 이야기가 뭡니까? 나는 이야기 안 하기로 했습니다. 성경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기계라는 사실을 하나의 공장이라는 사실, 뭔가 생산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무엇과 얽히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자꾸 자기 문제와 얽혀 들어가니까 주님의 관심사는 그쪽이 아닌데 내 구원이 아닌데 어떻게 사용한다는데 자꾸 자기 자신의 욕망,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을 자꾸 거기다 섞어 넣는 거예요.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욕망이 아무짝도 소용없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죄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죄 있는 육신의 입장에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욕심에 불과하고 사탄의 욕망에 불과하지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쨉이 못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자기 구원을 이야기한다면 제가 분명히 단언합니다. 지옥 간 부자가 자기 빼내 달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자기로선 정당합니다.
주여, 제가 잘못했다 안 합니까? 내가 예수님이 구주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지옥 갔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날 빼 주이소. 지옥 가운데 물 한 방울 아쉬워서 힘듭니다. 그러니까 빼 주이소.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부자가 뭐라 합니까? 이미 난 조진 몸이다. 하지만 동생 다섯 명이 있는데 걔들은 아직 희망이 있으니까 좀 봐주소. 이래 한다고.
그 말은 뭐냐 하면, 이미 부자마저도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조치가 아님을 지옥 가서 비로소 알고 자기 처지를 그냥 인정해버리는 거예요. 지옥 와야 된다는 처지를 인정해버리는 거예요. 죽어서 안 거예요. 모든지 산 자나 죽은 자의 주가 되신다는 개념을 그때 안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점을 두고 이렇게 하잖아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면 좋을 뻔 했다고 한 이야기가 너무나 측은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이 그걸 측은하게 본다고 해서 지옥에서 가룟 유다가 천당 가고, 부자가 천당 가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한 취지가 뭡니까? 니 자리는 그게 니 자리다 이 말입니다. 미워하게 받을 예정된 것은 끝까지 지옥 가서 미움의 대상이 돼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가 사랑할 사람을 내가 만들 권한이 있음을 온 우주에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미워할 사람을 내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권한이 나한테 있다, 왜? 인간들아! 라고 큰 소리 치지는 그 권한을 우리가 인정해줘야 됩니다.
그러니 자유주의 이런데서 이걸 아주 싫어하고, 보수주의에서 이 이야기하면 그걸 하이퍼칼빈주의. 더 노린다면 울트라슈퍼칼빈주의. 칼빈주의의 특징은 자기 구원을 자꾸 연계를 한다는 거예요. 구약의 언약을 몰라요.
홍해가 갈라졌을 때 아, 이 사람이 가서 좋다. 이렇게 보지 말고 왜 애굽 군사가 따라와서 죽느냐를 염두에 둘 때 우리와의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위해서 새롭게 지음 받은 존재다. 라는 사실이에요. 그만한 재주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한테 그만한 재주가. 그만한 실력이 있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실력이 좋은지 없는 인간도 만들어서 오직 언약을 위하여 새롭게 만들 그런 재주가 있고, 그 재주가 발휘된 것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불신자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사도바울이 했잖아요. 이 나의 복음을 기뻐하는데 왜냐? 망할 자에게는 망하도록 복음이 있고, 복음을 자꾸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생각하지 말고 망할 자를 망하도록 있고, 구원될 자는 구원으로 복음이 있는 건데 자꾸 구원받는다는 생각 말고 망할 자는 왜 망하는지 망해야 될 이유를 보여주는 거에 복음을 딱 깨어놓으면 아, 이래서 망하는구나. 복음 안에 그게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걸 왜 누락해요. 그걸 왜 빼먹어요. 복음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속죄, 대속, 구속, 화목제물 이 모두는 뭐냐? 지금까지 보수주의는 뭡니까? 우리는 이래서 구원받는다. 이런 내용만 이야기했는데 저는 거기서 탈피해서 이래서 지옥 갈 자는 지옥 간다는 내용이 거기서도 뽑아내야 그게 합당하다 이 말입니다. 속죄, 대속 구약에 있는 그런 개념에서 왜 지옥 갈 자는 지옥을 가야만 하느냐? 그 내용도 뽑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어떻게 뽑아내는가? 궁금하지요.
그게 이번에 [피]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십자가 사랑도 아니고, 십자가 희생도 아니고, 피입니다. 왜 누가 피를 흘렸느냐? 이 문제에요. 지금까지 관심사는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느냐 인데 제가 촉구하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겁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했다고요? 피 흘려서 돌아가셨다에 그것이 성경 전체의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 말이죠.
내 피 났다. 내가 피 나서 아파할 때 그때 뭐가 사라져요? 주님께서 피 흘렸다가 사라지고, 주여 왜 내 손가락에 피 흘리게 하셨습니까?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죄 있는 육신의 몸에 이게 내용물입니다. 속 내용물입니다.
고린도전서 한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기록된바 첫 사람은 아담은 산 영이” 되었지요. 마지막 아담은 무슨 영입니까? 살려주는 영이잖아요. 살려주는 영 아닙니까? 이 말을 자유주의나 불교신자 들으면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왜? 내가 죽었단 말인가? 살려주는 영이 누구라고요? 예수님이다. 살아있는 나를 또 살려주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예수는 없어요. 늘 살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못 사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보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잖아요. 이 말은 뭐냐? 사도바울이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부활이 한 때 부활이 아니라 늘 살려주는 그 기운, 에너지, 그런 영역, 그런 통치, 작용 그 속에 놓여있단 말이에요. 이 말을 다른 말로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