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섭 목사님 부탁한 글 이제 찾아 올립니다
이창섭 목사님 부탁한 글 이제 찾아 올립니다
이름 : 관리자(IP:220.81.176.141)
[ 구약을 한 눈에 ! ]
1997,4,2, 97총신구약학회 / 강의 (이근호 ), 정리 구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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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파일은 우리교회 신학강의 1에 1994년 기타강의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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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176.141)
08-05-01 08:08
[ 구약을 한 눈에 ! ]
1997,4,2, 97총신구약학회 / 강의 (이근호 ), 정리 구득영
* ‘언어의 직공이 되어라’ 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를 했다면, 이런 말은 하나의 테크닉임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술(言語術)을 가질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인간과 기술은 항상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지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니 빼버리면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다시 가지려면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칠 수가 있는데, 김소월의 진달래나 김춘수의 꽃을 해석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詩)를 민족 해방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개인의 연애 시로 보아야 하는가? 이런 것은 하나의 테크닉이고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술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러한 기술을 가지고자 하는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위기’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는 바로 이런 위기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 만약에 우리가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술을 더 추가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김 판사를 만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법정에서 피고로 김 판사를 만난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사기를 쳐서 피고가 되었으니 말이다. 죄인으로 김 판사를 만난다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힘이 될 수가 없고 (안면이 있으니까 봐줄 수도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죄를 지어서 만나니까 말이다), 오히려 부끄러운 일에 불과한 것이다.
* 하나님을 소유함으로 나에게 힘이 된다는 것은 종교학에서 튀어나온 것인데, 종교학이라고 하면 너무나 막연하고 어려우니, 이런 것은 가나안 민족의 이방종교에서 나왔다고 하면 될 것이다. 이방종교는 남편과 아내사이라는 것이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나의 남편으로서의 바알이라는 것이다.
* 이방종교라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고 테크닉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술이란 ‘반복’ 인데, 10년을 교회에 다니면 제직회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훤히 다 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의 기술인데, 기술은 반복해서 습득한다는 것이다. 추가적으로 보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직회는 하나의 위기가 아니라 나에게 보탬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그것이 나에게 보탬이 되는, 그러한 하나의 도구로 여길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루터나 칼빈을 비롯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폴 틸리히, 본 회퍼, 하비 콕스 등 신학에 관심을 가졌던 모든 신학자들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결같이 하는 말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위기라는 것이다.
* 즉,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표적인 신학자가 바로 칼 바르트라는 것이다. 위기인데 어떻게 언어의 직공이 되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지식을 추구함으로 말미암아서 내가 새로운 자아를 가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위기이다 !!
* 블로허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흔히 소망의 철학자라고 하는데, 몰트만이 블로허에게 배웠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고로 했겠지만 배웠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블로허에 의하면, 인간의 현재 상태를 ‘A1’ 이라고 했고, 미래의 상태를 ‘A2’ 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 사이에 미흡함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결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결핍함으로 말미암아 현재 상태에서 박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 내가 목사가 되었에 비젼이 생기는데, 그런데 이 비젼으로 말미암아 지금 현 상태에서 불만이 생긴다는 것이다. 앞서있는 나의 새로운 비젼으로 말미암아서 지금 내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항상 만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소원이 무엇이었던가? ①필리핀 선교 ②총회장 ③죽는 것
* 도대체 몇 번인가? 그의 소원은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의 비젼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가니까,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가보니까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는고 하니, 졸지에 자기가 나그네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이란, 다름이 아니고 약속을 보여주는 땅이라는 것이다. 그 약속의 가나안 땅에 서서 보니까 약속이 보이는데, 그 약속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비로소 보인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만이 나그네가 아니고 이삭도 야곱도 역시 나그네였다는 것이다. 자기가 이 땅에 있으면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의 비젼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었다는 것이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거지 나사로가 앞집에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같이 죽었다는 것이다. 부자가 지옥에 가고 난 뒤에 보니까 부자로 살았던 것이 후회가 되고, 오히려 거지 나사로가 부럽다는 것이다.
◈ 언어학은 종교의 틀을 완전히 부수어 버리고 인간과 과거를 직접 연결시켜주는데 큰 공헌을 했다 !!
* 그러나 총신의 유학을 갔다온 신참 교수가 이렇게 언어학을 가지고 새바람을 일으키는데 대해서 한가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조주의(언어학)가 도입되어서 긍정적인 면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과 인간을 대할 때 종교의 틀을 완전히 부수어 버리고 인간과 과거를 직접 연결시켜주는데 대해서 너무나도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 지금 우리가 신학생이 아니고 집사라고 한다면, 그럴 때 나에게 성경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경말씀은 나에게 도구가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전도사이고 설교를 해야 하니까 나에게 도구가 되기에 나에게 침투가 안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그냥 인간이라고 할 때, ‘성경말씀은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언어학의 큰 공로인 것이다. 종교적인 모든 틀을 깨어버린다는 것이다.
* 세미나에서 누군가가 방언에 대해서 말하면서, ‘신약 때의 방언은 목사가 설교하는 것이 방언이다’ 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내가 그런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한번 들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고 하니, 이사야서에 보면, 이 방언이라는 것은 장차 새언약 시대에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모든 계시를 가지고 방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목사의 전하는 말만이 아니고 말이다. 누구나 다 복음을 전하면 그것이 방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분은 자기의 체험을 가지고 자꾸만 우기는 것이다.
* 그런데 사실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구별하기가 그렇게 싶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에 똥을 눈다고 할 때, 어디에서부터 똥누는 체험이냐는 것이다. 화장실의 문을 열 때부터인가? 아니면 변기에 앉아서 끙끙거리는 순간부터인가?
* 체험을 강조하고 기적을 원했던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지식을 원했던 사람들은 헬라인이었고 말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던가? 자기는 오직 십자가만을 전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무엇을 치는가? 지식을 치고 체험을 친다는 의미에서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고전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사도바울이 방언을 몰랐고, 성령의 열매를 몰랐고, 예수님의 재림을 몰랐고, 교회감독의 직분을 몰랐던가?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다 십자가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목사라는 제도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목사가 목사 자신을 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체험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가능성을 치는 십자가를 말이다. 교인들은 자꾸만 목사를 중간매체로 보려고 하는데, 그럴 때 목사는 자기를 부인해야하는 것이다. - 나는 쇠해야 하고 그는 흥해야 하리라 !!
* 언어학의 긍정적인 면은 인간과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지금까지 100여 년을 넘게 버텨오던 한국교회의 종교적인 성향을 완전히 다 때려부수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볼 때, 목사나 전도사의 어떤 테크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인간으로서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그 말씀의 충격적인 면을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즉, 내가 말씀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말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 내가 말씀을 전하는 차원이 아니라, 내 속에서 말씀이 출렁거릴 때, 그때 나의 모습 하나 하나가 선교요, 전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선교란 바다 건너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다 물을 양수기로 다 빼버리면 육지가 아닌가?
* 내가 지금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에서 파송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러한 ‘바다 건너서’ 라는 말은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나의 선교지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꾸만 선교를 오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단지 이곳에서는 그냥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다.
◈ 선교사의 특징 - 누구 날 좀 사랑해줄 사람 없소 !!
* 대한민국을 본국으로 여기고 다른 나라로 떠난다는 사고방식은 전혀 하늘나라가 본향인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무슨 돈줄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심심하면 전화해서 돈을 붙여달라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선교사는 이 땅에서 사랑을 못 받으니 ‘사랑 찾아 삼 만리’ 라고 하는 것이다. 선교의 거룩한 소명과 비젼은 다 하나의 구호에 불과하고 ‘누구 날 사랑해줄 사람 없소!’ 라는 것이다.
* 이런 이야기를 하면 유독 열을 받아서 항의를 하고 날 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다 자기를 숨기려고 하다가 들켰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반응을 보이겠는가?
* 인간을 생각해볼 때, 인간이란 좀 못 먹고 못 살아도 누군가가 사랑을 해준다면 다 참고 견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척교회를 하면 마음이 아닌가? 과연 불타는 사명감에서 그렇게 하는가? 누구 나를 좀 알아 달라는 것이다. 더러워서 더 이상 이러한 조직에 못 있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義)를 구현하는 자기 발현이고 자기 확산이라는 것이다.
* 우리가 구약성경을 볼 때,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에서, 주님의 노예로, 다시 세상의 노예로 바뀐다’ 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종교생활의 결과이고, 이런 종교는 모든 것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예레미야가 무엇을 공격했는가?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고 하면서 이런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은 도외시하고 ‘나’ 라는 존재 가치를 발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런 자기 삶의 존재를 포기하고 오직 죽기를 소원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 이사야는 팬티바람으로 3년을 보냈는데, 이 3년이 얼마나 긴가? 한국 남자들은 3년 동안을 납치 당해서 다들 얼마나 고생을 하는가? 군목과 군종들의 비리를 그때에 다 보았다는 것이다. 골프나 고스톱을 치면서 돌아다니고 말이다.
* 선지서를 비롯해서 성경은 분명히 치유와 위로의 목회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면, 지금 이스라엘의 역사가 선지자도 있고 성전도 있고 다 있는데, 선지서라는 철도가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있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양과 가축들의 축복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그 의미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지서를 통과하면서 외양간에 소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이 바로 새로운 복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 선지서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간이역이 아니다 !!
*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선지서를 뛰어넘어서 바로 예수님에게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을 방해한다는 그런 개념을 놓쳐버린다는 것이다. 선지서를 그냥 점프해서 지나가 버리니까 말이다.
*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니까 제자들도 어리둥절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물으니까, 제자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시몬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육(肉)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 여기서 육(肉)이란 어떤 차원인고 하니, 겉모습을 보고서 판단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겉으로 바른 소리나 눈물을 흘린다든지 하는 것을 두고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 육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학의 주장은 무엇인가? 예레미야가 이런 소리를 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 언어의 직공이 되어서 그것을 분석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오직 성령이 임해야만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직공이 되면 믿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니고데모처럼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으로 시작하면 육밖에 나오지를 않기 때문에 말이다.
* 신약에 보면 구약을 인용해 놓았는데, 그것을 구약으로 가서 그 본래의 모습으로 한번 보라. 전혀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경우에 ‘이것은 성전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을 하겠는가? ‘아, 이제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 구원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겠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인간이 언어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 한계라는 것이다.
* 유대인들은 이레에 한 번씩 금식을 하고 구제를 하는 것은 바로 자기들이 한번 말씀을 이루어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를 죽였는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 해석이 예수님을 죽이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란 인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받을 수가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받을 수가 없음을 보여준다 !!
* 그런데 언어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인간이 그래도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순종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義)를 지켜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런 것이 안 되기에 성령을 받은 자가 성령을 주시기 위함인데, 그래서 오직 성령이 와야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만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가 할 수가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 이렇게 언어학을 공격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목사님, 성경해석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된다’ 라고 하면 그것은 내숭을 떠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든지 해야지 안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데, 다만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은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고 예수님의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주일학교 유치부도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
*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구약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본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구약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처음부터 인간은 생명나무를 먹도록 되어있는데, 그런데 출발을 선악과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야 죄를 지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켰는데, 그 이유는 왜 따먹지 말라고 한 나무를 따먹었느냐는 것이다.
*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아무런 생각이 안 났으면 괜찮을 텐데,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래서 지식의 나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러한 지식이 확보되니까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키고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 시험을 치는데, 시험관이 하는 말이 이름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쓰는 것이 정상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쓰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낙제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가만히 있겠는가? ‘성적이 나빠서 낙제라면 이해가 되겠는데, 이름 때문에 왜 낙제를 해야 되는가?’ 라는 것이다.
* 비록 선악과를 먹었지만, 그래도 선과 악을 알아서 구별해서 악은 물리치고 선을 행하면 되지 않겠는가? 선과 악을 알았으니 우리들의 힘으로 그렇게 하면 되지를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를 않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치워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선악과인 윤리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선과 악을 우리가 알았으니 우리들이 알아서 지킬 것은 지키고 행할 것은 행하고, 버릴 것은 버리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것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를 가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악과를 처음부터 따먹지를 말아야 했다는 것이다. 먹고서 잘하면 안 되지 않느냐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나무의 틀(패러다임)을 가지고 선악의 틀인 윤리의 틀을 부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짜로 생명나무를 준다는 것이다. 진짜 공짜로 이것을 받은 사람은 ‘나 잘했지요’ 라는 말은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되고, 그래서 오직 생명나무만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인데, 이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다 부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교사가 30분 늦게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렇다면 헌금에 1000원이 더 추가가 된다는 것이다. 늦게 와서 아이들을 못 가르쳐서 미안스럽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새벽기도를 40일을 연속으로 나갔는데, 왜 내가 교통사고가 나서 이렇게 50만을 손해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증거라는 것이다.
* 본인의 [죽은 세상, 산 성도] 라는 책에 보면, 사람이 성불(성화)할 때에 지금까지의 축적된 선악과적인 사고방식인 윤리와 도덕이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쇼트트랙에서 뒤에서 밀어주듯이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선과 네가 믿었던 선을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선이 더 좋다면 내신성적이 좋아서 천국에 가깝다는 것이다.
* 장로들이 뭐라고 하는가? ‘네가 이 교회 세울 때 벽돌을 날랐나? 벽돌도 나르지 않고 무슨 말이 많노?’ 라는 것이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전도사님, 설교한다고 수고가 참 많지요, 오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역시 새로운 교수님 밑에서 잘 배웠군요. 열심히 하십시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돌아서서 하는 말이 ‘넌, 오늘 잘렸어!’ 라는 것이다.
* 지금 교회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것이다. 복음이 문제가 아니고 밥 먹고살기에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총신에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라고 배웠는데, 그러면 부교역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목사님, 이것은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런 뜻이 아닙니까?’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역자가 제대로 말씀을 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교역자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심방가방을 들어주고, 자동차 시동을 걸어주는 것이 할 일이 아니고 말이다. 아닙니까?
* 물론 잘리지요. ‘이 바닥에서 네가 그런 식으로 해서 살 수가 있을 같아? 네가 너를 보호해주려고 얼마나 애를 많이 썼는지 아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목회는 윤리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비윤리적으로 나오면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사무엘상 17장 28절을 한번 보도록 합시다.
(삼상 17: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 이것은 다윗의 형인 엘리압이 하는 말인데,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안다’ 라고 하는 것이다. 다윗이 어려서부터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살았는데, 그런데 이것이 형과 형제들의 눈에는 교만과 완악함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데 형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다윗의 행동이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기에 비윤리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고난’ 이라는 것이다. 구약을 보면,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데, 그러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조직세계에서 선악체제로 말미암아 그렇다는 것이다. 조직세계에서 선악체제라는 것은 내 조직을 보다 강하게 해주면 선이 되는데, 이것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조직에 있어서 윤리란? - 자기 조직에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 총신이라는 조직의 선악체제는 무엇인가? 총신에 유익이 되면 선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악이라는 것이다. 총신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총신이라는 말이 없는데 말이다. 총신이 말씀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총신을 위해서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다윗의 집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만을 의지하는 집단을 이스라엘로 보고 있는데, 지금 사울과 다윗의 형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그 집단을 이스라엘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으니 이유 없이 말이다.
*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것이,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내가 속한 교회는 좋은(?) 교회이다’ 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이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자기 집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건방지다고 하면서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 그러면 그 당시 사울의 한계는 무엇인가? 왜 하나님이 골리앗을 붙이셨는가? 그것은 기존의 장대와 같은 수구세력인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기존의 이스라엘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린 소년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접근도 못하는 골리앗을 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이스라엘은 어린아이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시편 8편에서, 젖먹이와 어린아이의 힘으로 원수를 치는 것을 하나님께 찬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젖먹이가 동원이 되는가? 분유 광고를 찍는가? 젖먹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어린아이의 도시락으로 5천명을 먹였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시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 그래서 구약성경은 항상 그 밑에 선악체제를 고수하는 쪽과 생명체제를 고수하는 쪽이 대결을 벌이는데, 누가 고난을 받는가? 선악체제로부터 생명체제가 끊임없이 고난을 받는데, 결국은 어디에까지 가는고 하니, 십자가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 욥의 경우에, 욥은 무엇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는가? 친구들은 욥을 보고 욕을 하는데, 네가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니 너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욥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보다 더욱더 죄를 많이 지은 너희들이 멀쩡한 것을 보면 이 고난은 나의 잘못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여기에 대해서 친구들이 뭐라고 하는가? ‘네가 어찌 그리 교만한가?’ 라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네가 회개하면 ‘너의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많이 듣던 말이 아닌가? 그 유명한 성경구절이 바로 욥의 친구인 수아 사람 발닷의 말이고, 바꾸어서 말하면 마귀의 말이라는 것이다.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같은 성경말씀을 인용해도, 선악에 속한 쪽은 자신의 죄를 감추고 가능성을 자꾸만 내세운다는 것이다. 자기가 죄를 지을 경우에만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나무에 속한 쪽은 원초적으로 내가 모친의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구제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이 다 죄라는 것이다. 찬양과 예배를 드려도 말이다. 예배를 잘못 드려야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기 위해서 금식을 했는데, 그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세리와 함께 한잔 들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 새 술은 새 부대에 !!
* 이것은 과거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죄 사하시는 권세로 말미암아 그 능력을 입은 사람은 이유 없이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과거 행함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말이다. 이것이 문둥병자에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바로 문둥병자이고 말이다.
* 명령법과 직설법 -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걸어서 가라’ 라고 했는데, 이것을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성경에서의 명령법이라고 하고, 그리고 직설법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것을 둘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직설법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명령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이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가라’ 라고 명령을 했을 때, 과연 여기에 대해서 거역할 수가 있겠는가? 이 ‘가라’ 라고 하는 것은, ‘이미 너는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을 다른 말로서 표현했다는 것이다. 명령을 지켜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라는 것은, 네가 성령에 취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너는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을 명령법의 형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했는데, 과연 그러한 인간이 있는가? 이것이 지킬 수가 있는 것인가? 열심히 노력하면 잘 봐주겠다는 것인가? 황수관 박사처럼 항상 웃는 표정을 지으라는 것인가? - ☺
* 이 말씀은 ‘너는 놀랍게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그런 인간이 이미 되었다’ 라는 것이다. 환난과 핍박이 저주가 아니고, 그것은 구약시대이고, 이제는 어떤 일을 당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기에 말이다.
* 이것이 바로 생명나무에 속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자꾸만 선악을 유효한 것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 변명밖에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처럼, 십자가에 달린 한 편의 강도처럼, 오늘밤에 나와 낙원에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이 생명나무는 차별이 없는데, 로마서 3장에 하나님의 의(義)는 차별이 없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공로로 되었기에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공평하게 말이다.
* 그런데 하늘나라에 무슨 상급에 차등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선악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인데, 그러면 왜 이런 사고방식이 생겨나는가?
* 지금 한국교회 교인이 1200만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600만도 안 되지만, 이들이 믿기는 잘 믿는데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해서 지금 이 나라가 이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믿음은 되었으니 2단계 작업으로 제자훈련과 같은 교육을 잘 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성경에 분명히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라고 했으면, 이러한 주님에게만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당신은 신자가 아닙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이왕에 온 손님인데 잘 훈련을 시키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의 사고방식이고,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욕심쟁이인가?
* 이번 부활절 설교제목이 ‘그리운 예수님’ 이었는데, 교인들에게 ‘과연 예수님이 그립습니까? 아니면 군에 간 아들이 그립습니까?’ 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아니면 금강산인가? 우리들이 얼마나 이 땅을 생각하는가? 예수님이 아니라 말이다. 예수님이 제일로 그립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서 추방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면 스스로 자수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 그렇게 해서 교인이 없어서 굶어죽는다고 해도, 오늘 죽어서 천당에 간다면 얼마나 좋은가? 이러한 사고방식이 없이 살아간다면 무슨 신학생이고, 성도냐는 것이다. 중국 선교에 대한 비젼을 왜 가지는가? 자기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아닌가? 성경이 과연 자기에게 가치를 두라고 하든가? 선교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선교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교는 이미 유대교라는 것이다.
*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언어학이 들어오기 이전의 한국교회 상황이다. 그런데 이 언어학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서 지금까지 종교 티를 내었던 모든 것들이 다 무당이었음을 고발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가진 자들의 오락단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 목회자의 사회가 얼마나 조직화가 되었는지, 소위 동역자라고 하면서 서로 밀어주고 당겨준다는 것이다. 전문 종교단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가 전문 종교오락 단체가 되어서, 누가 교회에 충성하는고 하니, 억지로 일요일에 노는 사람들, 즉, 교사들이나 공무원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를 꽉 잡고 있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믿음이 매우 좋아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이 전부가 다 ‘허상’ 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일부에서 이런 것들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성경과 인간이 직접 만나야 된다고 하면서, 소위 언어학적 성경해석을, 구조주의적 성경해석을 시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은 구조주의자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말이다.
* 그러나 이런 구조적 성경해석이 얼마나 유대교적이며, 즉, 예수님을 살해한 그러한 성경해석이었는지를 안다면 기절을 할 것이다. 지금부터 바로 그런 면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 성경을 시간으로 보면 언어를 통해서 이것이 언젠가는 환유가 되어서 하나의 의미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글을 쓸 때는 처음에는 서술적이 되다가, 여기서 한 단계가 더 올라가면 시(詩)적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조주의자들은 이미 소쉬르부터 나왔던 언어학을 성경에 적용을 했다는 것이다.
◈ 소쉬르의 언어학은? - 변별성과 차별성이다 !!
* 그러면 소쉬르의 언어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변별성(차별성)인데, 언어라는 것은 기의(記意)와 기표(記票)라는 기호로 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서, 마이크라고 할 때에 ‘마이크’ 라는 세 글자는 기표가 되고, ‘소리를 크게 한다’ 라는 것은 기의가 된다는 것이다.
* 물론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상식적으로 다 알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빠롤’ 과 ‘랑거’ 라는 것이 있는데, 랑거는 언어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법칙이 있듯이 말이다. 여기서 빠롤이라는 것은 약속에 준해서 내가 한가지를 골라서 한국말로 표현해놓은 것이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여기 ‘대추’ 라는 말을 있는데, 이것을 미국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말로 대추라는 표현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람들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공시성(共時性)이라고 하고, 과거를 뛰어넘는 것은 통시성(通時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 ‘히브리 문학’ 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 당시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하나의 문화적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상황을 분석해서, 그들은 그 당시의 어떤 언어의 틀(랑거)을 사용했는가를 알아야 성경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성경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가? 인간은 언어적 동물이기에 언어를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인간과 언어가 분리가 되어서,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언어를 해석할 수가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언어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어설프게 공부를 해서 이런 결과가 생겼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때, 그러면 이 인간이라는 것을 누가 규정을 하는가? 이것을 고민한 사람이 훗설인데, 그의 현상학이 유명한 것이다. 적어도 언어학을 하려고 하면, 훗설과 가다머와 리꾀르와, 그리고 이전의 칸트와 하이데거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공부하려면, 그 언어의 밑바탕을 이루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샤르트르까지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이런 것을 공부해보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신이든지 누구든지 내가 하는 일을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 본 강의를 시작하면서, 인간의 모든 말씀(?)들은 선악과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그러면 생명나무에서 나온 말씀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놓았다는 것이다. 길은 동쪽으로 나 있지만 막혔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지상에 옮겨놓은 것이 성소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그러나 레위지파가 함께 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것이다.
* ‘인간이 언어를 해석할 수가 있다’ 라는 사고방식이 어디에서 나왔는고 하니까, 이것은 바로 선악과에서, 인간의 지식에서 나온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바로 하나의 어떤 체계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코에 걸면 코걸이고, 목에 걸면 목걸이라는 것이다.
* 김춘수라는 사람이 꽃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출판사에 다니면서 탁상 위에 있는 꽃을 보면서 지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나에게 다가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고, 내가 의미를 주어서 꽃이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 언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 구성원들이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신이 되어, ‘인간은 선하다,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은 가능성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든지 비젼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아담 안에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신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새로운 아담이고, 제 2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나름대로의 새로운 언어학이 있고 해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저쪽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인정하지를 않지만 말이다.
*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이 모든 말씀은 ‘내게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밝혀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가셨는데, 그런데 호세아서의 어떤 구절을 인용하시는가? 분명히 애굽으로 가셨는데, 애굽에서 불러내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방향이 거꾸로 되었다는 것이다.
*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반발을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와, 떫나, 내 마음 대로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열을 받아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도 맞아 죽을 짓을 했고 말이다.
(마 2: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쳐가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가? 완전히 ‘돈 놈’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나라가 어려우니까 예수가 독선적으로 자기의 입장에서 구약을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죽는 것을 가지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 세례요한과 사도바울 등도 다같이 동조를 한 미친놈들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부활을 한 적이 없는데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울종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와 바울서신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전승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 말이 그 말인 것이다.
◈ 쓰레기 봉투를 들고 오신 예수님 ??
* 어제 실천학회에서 강의를 하면서, 과연 ‘환경 생태학’ 이라는 것이 복음이냐고 공격했는데, 그러자 어떤 여학생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주신 창조적 관점에서 환경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답한 말이, ‘예수님이 쓰레기 봉투를 들고 와서 분리수거를 하러 왔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러 오신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려고 왔다는 것이다.
* 1950년을 기점으로 해서 전승이 두 개가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전승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폰 라드의 구원사적 전승이라는 것이다. 폰 라드는 구약의 역사를 케리그마의 연속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체의 경험을 하나님의 신앙고백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 그런데 감리교 쪽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니다. 그것은 다양성을 무시한 것이다. 성경에는 단일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양함이 있다’ 라는 것이다. 단일성에서 다양성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언약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언약은 여러 가지 주제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 구약에는 여러 가지 전승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만을 잡아버린다면 옳은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구원사적 전승과 창조적 전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이미 베스트만이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레비스토루스의 구조주의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특징이 중심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하나만을 말하지 말고 이것저것을 다 말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아니라고 강하게 이미 못박아 놓은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사도바울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며, 오히려 이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사람이 하나만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말이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 듀이나 제임스 등이 주장한 실용주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이러한 다양성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부정 당하는 것이며, 또한 십자가로 다 모인다는 것이다.
* 그래서 통합 측의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구약에는 다양한 주제가 있는데, 땅에 대한 주제, 그리고 율법, 약속, 창조에 대한 주제도 있다. 그런데 이 창조는 구속사와 상관이 없는 지혜문학으로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시편 2편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 당시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공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할례라는 것도 가나안 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계시가 두 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 동의를 하는고 하니 바빙크라는 것이다. ‘언어의 직공이 되라’ 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이 바빙크와 한통속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계시가 두 개가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계시는 반드시 충돌을 하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이들은 서로 조화가 잘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둘이 있다면 하나는 사랑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미워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기본인데, 그런데 이들은 이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모르든지 말이다. 성경에도 분명히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되어 있는데, 그런데 이들은 둘을 똑같이 내세우는 것이다. 반드시 한 사람이 앞서게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에서 공동 목회를 해서 당회장이 둘이 있다면, 교인들은 뭐라고 생각하는고 하니, ‘둘 중에서 누가 더 큰 당회장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같다고 설명을 해줘도, 그러나 교인들은 ‘그래도 이름이라도 쓸 때에 먼저 쓰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다.
* 이것을 ‘데릴라’ 라는 철학자가 강조를 했는데, 인간은 제아무리 해도 순서를 지키게 되어있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나 자식이라도 자기보다 더 사랑한다면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운 금강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것이 이렇게 죽 내려와서, 이것을 전부다 구원사적으로 하나로 묶어버리고, 창조를 따로 하나를 분리해내는데, 그것을 십자가로 모은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데, ‘창조가 십자가와 연결이 되는가?’ 라는 것이다. 그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신 분이, 처음부터 십자가를 들고 와서 ‘보아라, 내가 십자가를 진다’ 라고 해서 진 것이 아니고, 이 십자가는 반드시 적대세력과 연결되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적대세력이란, 적이 있음으로 당했던 사건인 것이다.
*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적을 나의 보겠습니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적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이고, ‘내가 선악적인 체계를 통해서 뭔가를 한번 해보겠다’ 라고 주장을 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들이 노력해서 의(義)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율법으로 마쳤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훈련시키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증거하라는 것이다. 안 믿으면 그것은 남의 자식이니까 신경조차 쓰지 말라는 것이다.
*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마지막 신약 때에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서 둘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한 쪽에서 다른 쪽의 죄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기도하라’ 라고 하면, 신약에서는 ‘주님께서 기도하신다’ 라는 것이다. ‘전도하자’ 라고 하면, ‘성령께서 전도하신다’ 라는 것이다. 금식도 주님이 공짜로 주신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적인 테크닉을 다 버리고, 오직 구원의 능력인 주님의 십자가 피만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 구약은 문제지이고, 신약은 정답지이다 !!
* 자 그러면, 여기서 땅의 의미를 한번 살펴보자. 처음의 땅은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 약속은 언약에서 나오는데, 언약이란 노아언약의 경우에를 보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중에서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더러운 것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이것을 셈이 알고 있었고 야벳이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 선한 것에 의해서 악한 것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함이 몰랐고 야벳이 몰랐다는 것이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잤을 때, 한쪽은 얼레리 꼴레리 했고, 다른 한쪽은 그 수치를 덮어주었다는 것이다.
* 구약에서 이 수치개념은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수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처음 느끼는 경험인데, 그 수치를 덮어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선악체제가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생명은 바로 이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다양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이 땅에 들어갔다는 것은 창조에 대한 회복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청소했는가? 그들은 억지로 끌려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변함없이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언약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땅 중심이 아니고 말이다.
◈ 새언약 - 네 대신에 내가 죽는다 !!
*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자기 피를 강조했는데, 이것을 새언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간단한데, 네 대신에 내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좋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뭐하다 살까’ 가 아니라, ‘뭐하다 죽지’ 라는 것이다.
* 이러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와 전도 등의 어떤 특별한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면,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어린양의 증인이고 말이다.
* 우리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나의 모습임을 제대로 깨닫는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사를 통해서 이렇게 엉터리로 살은 사람들이 다 담겨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사 공부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 천주교는 인간과 생명의 이항대립이지만, 개신교는 죄인과 의인의 이항대립이다 !!
* 천주교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인간으로 보는데, 즉, 인간은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존엄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낙태 반대, 인간복제 반대 등을 주장하는 것이다. 생명 자체가 의(義)라는 것이다.
* 그러나 개신교는 의(義)와 죄의 이항대립으로, 심판이 있고, 지옥이 있고, 유황불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마귀 자식이고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