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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7대구강의16-"티끌보다못한주제에"(정재현)을읽고2자유게시판[신학]

07대구강의16-'티끌보다못한주제에'(정재현)을읽고2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7 대구강의 16 -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2 정재현 저, 분도출판사(왜관:1999)

07,11,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번에 이어서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는 책에 대해서 계속해서 강의하겠는데, 먼저 교재 2페이지를 보자.

** '인간이 무엇이냐?'로 질문을 던졌던 것으로 인해서 절대적 보편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이러한 '보편적 인간'이란 같음의 대표단수성(單數性)을 거부하고, '개별적인 사람들'이라는 다름의 복수성(複數性)을 외치게 된 것이다. 이 개별실존은 사건이고 행위이기 때문에 명사(名詞)적이 아니고 동사(動詞)적이다. 즉 개념화에 의한 명사의 고정화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 인간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인간이 무엇이냐?" 라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니까, 이 '무엇' 이라고 하는 것 속에 모두를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다양하니 말이다. 시간마다 다르고, 공간마다 다른데,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즉 "인간이 무엇이냐?" 라는 것을 인식하는 '내'가 다른 것을 배제하고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 이렇게 유아실에 들어섰을 때, 무엇부터 먼저 보이는지, 느낌이 어떠한지, 그것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아, 나는 따뜻한 난로가 보이더라" 아니면, "아, 나는 커피가 눈에 확 들어오더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이 커피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혹은 차별화해서,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에 '저리로 가' 라고 해서, 즉 쫓아서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해놓고 보니, 사람마다 다들 다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이냐?"에서 인식론으로 바뀌게 되는데, "'어떻게' 무엇을 아느냐?" 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가면, "니가 '왜' 그것을 알아야 하는데?" 라고 하는, 이 '왜' 라는 문제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왜' 알아야 하는가?" 라는 것을 통해서, 먼저 이 '무엇'은 대상인데, 이 대상은 나중의 문제로 뒤쳐져버리고, 인간본질에 관한 문제로 넘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 질문을 하는 그 질문 속에서 답변이 !!

다시 말해서, "내가 왜 그것을 알아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대상이 있을 때는 '나'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다보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 질문을 하는 대상에서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질문을 하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으로 바뀌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화가 난다고 해서 발길로 벽을 차니, 그 벽이 아픈 게 아니라 벽을 찬 당사자가 아픈데, 이와 마찬가지로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 질문을 하는 대상에게서는 나오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하는 그 질문 속에서 답변이 나온다는 것이다. 진정한 진리가 바로 질문을 하는 자기 자신 속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진리라고 하는 것은, 대상에서 대상을 끌어 모아서, 즉 "야야, 멍멍이들아 이리와" 라고 하면서 전 세계의 개들을 모두 총집합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개' 라는 관념을 삼고자 하는, 즉 그렇게 '개' 라고 확증을 짓는 것이 도대체 자기 어느 구석에 그런 것이 들어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을 신학과 교회로 적용을 시키면 이러한데,

* A : 예수님이 누구인가요?
* B : 니가 왜 궁금한데?
* A :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천국에 간다던데?
* B : 니가 뭔데, 죄 용서를 받고 천국에 가야 하는데?
* A : 그래도?
* B : 니가 그럴 자격이라도 되나? 건방지구로...

이것은 교회에 와서도 마찬가지인데, "목사님, 철학을 왜 공부해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철학으로 둘둘 감겨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는 말이,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시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나는 죄와 상관없는 상태에서 !!

무슨 말인고 하니, 죄와 연관된 '나'는 제쳐놓고, 즉 죄와 관련되지 않은 '나'를 상정해놓고는, 자기는 그런 죄와 상관없는 상태에서 죄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인간이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강조하는데 말이다.

아무튼지 간에 자기는 그런 죄인이 아니라는 것인데, 가끔 죄를 짓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웃기는 이야기인데, 그래도 자기는 전적으로 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착한 것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성경이 거짓말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상 '서양역사' 라고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까?" 라고 하는 것과도 동일한 역사인데, 그런데 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2페이지를 다시 보자.

** '인간이 무엇이냐?'로 질문을 던졌던 것으로 인해서 절대적 보편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이러한 '보편적 인간'이란 같음의 대표단수성(單數性)을 거부하고, '개별적인 사람들'이라는 다름의 복수성(複數性)을 외치게 된 것이다.

◈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져야 !!

"인간이 무엇이냐?" 라고 질문을 던졌던 것이 이제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 "질문하는 질문자 속에 해답이 있다" 라고 하는 기대 속에서, 즉 질문자의 관심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누구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하는고 하니, "저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질문을 하기 이전에, 먼저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가 몇 개인가? 두 개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 라는 것이 분열이 되어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물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를 모르니까 "내가 누구인지?" 라고 하면서 묻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쪼개졌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분열이 되어서 하나의 통일체가 되기 전까지는, 인간 주위에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물을 자격도 없어져버렸다는 것이다.

◈ 분열된 너부터 먼저 해결해 !!

무슨 말인고 하니, "신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신이 말하기를, "분열된 너부터 먼저 해결해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신에 대해서 묻고 난리를 피우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을 할 때는, 반드시 자기가 현재 느끼고 있는 것 말고 다른 것은 일단 배제를 하고서, 무슨 말인고 하니, 요것이 관심이 있으니 요것을 보자는 쪽으로 나갔을 때,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진리라고 할 수 있는지, 그렇게 통합적으로 포함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진리라는 것은 포기를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현상론' 이라고 하는데, 이런 현상론은, 대상이 나타나면 그 대상이 자기에게 무엇을 자극 주는지, 즉 그 대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가 대상이 있음으로서 자극을 받아서 그 둘 사이의 연결 속에 있다는 것이다.

◈ 어떤 대상과,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 !!

그래서 "무엇을 아는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모두 때려치우고, 진짜로 온 몸에 확 느껴지는 의식, 그 의식만 딱 바라보면 달랑 두 개가 나오는데, 먼저 어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 그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때그때 달라요 !!

그렇다면 결국은 이 둘 밖에는 다른 것은 없는데, 물론 다른 대상이 있으면 또 다른 의식이 생기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종잡을 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이다.

◈ 알랭 바디우, 하이데거, 그리고 들뢰즈 !!

여기에서 이것(?)을 '사건' 이라고 하고, 요것(?)을 '생성' 이라고 하는데, '알랭 바디우' 라는 철학자는 이 사건을 진리하고 하는데, 즉 진리라는 것은 있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사건을 의미화할 때 그것이 자기에게만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것이 너무나 찜찜하니까, 진리의 풀장이 따로 있다고 보았는데, 즉 존재에서 존재자가 사건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풀장을 없애버리자고 했는데, 그것은 들뢰즈도 마찬가지인데, 들뢰즈의 철학은 이러한 의미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따른 것으로서, 이 세상은 신이라는 곳에서 하나의 의미에서 와서 다양성을 가지고, 여기에서 파장이 나오는데, 이 파장을 욕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욕망의 파장이 춤을 춘다는 말이다.

◈ 들뢰즈의 철학 - 강도(閣度, strength) !!

분자의 수준에서, 인간을 쫙쫙 쪼개면 분자가 남는데, 이 분자수준의 에너지 장에서 팍팍 튀게 되는데, 이것을 밀도의 세기, 즉 '강도(閣度, strength)' 라고 하는데, 들뢰즈의 철학은 바로 이런 '강도' 라는 것이다. 바로 이 강도가 차이를 낳고, 그 차이가 반복이 되면, 그것이 곧 온 우주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속이 아니고 강도라는 것인데, 이 강도가 차이를 빚어내고, 그 차이와 차이가 서로 결속과 새로운 계열의 차이가 서로 무작위로 만나고 만나면, 그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2페이지를 다시 보자.

** 이 개별실존은 사건이고 행위이기 때문에 명사(名詞)적이 아니고 동사(動詞)적이다. 즉 개념화에 의한 명사의 고정화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름'을 억지로 조성해서 기어이 '자기 같음'에 매몰되고 싶어한다.

◈ 명사적과 동사적이 어떻게 다른가?

여기서 명사적과 동사적이 어떻게 다른가? 명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구획을 정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여기까지' 라고 말이다. 마치 카스테라 빵을 칼로 자르듯이 그렇게 자른다는 것이다. 즉 "이것 이것은 같은 속성이야. 너는 이 옆에 오지마" 라고 구분할 때, "자, 같은 것끼리 모여라. 원숭이는 저리 가고 개만 이리와" 라고 하면서, 이렇게 동질성을 가진 것끼리 모을 때 명사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 DNA는 어디에서?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 같은 마이크로시대에서는 이런 것이 불분명해지는데, 이것이 죽은 것이지 살은 것인지 말이다.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동물이지 식물인지, 그야말로 박테리아 수준에 들어가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DNA가 어디에서 나왔다고 하는가?

이 DNA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인간이 진화를 하면서 세포가 되기 이전에 세포보다 더욱 작은 것들이 와서, 이것이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미토콘트리아 속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곧 DNA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는 하나의 작은 생물인데, 그것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즉 하나의 작은 괴물이 들어왔는데, 그 괴물이 확장을 해서 지금의 인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괴물의 원리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데, 인간의 질병 80%는 DNA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고, 환경의 영향은 20%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내려오는 그 내림을 막을 수가 없는데, 제 아무리 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쇼를 해도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현대철학은 이런 '존재철학'의 오류를 찾아내어서 '동사화'된 '생성철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전환에는 타자(他者)의 역할이 요긴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도리어 나에게 없는 것과 모르는 것을 발생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린 관계성'이다. '열린 관계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서 '열린 가능성'이 나온다.

◈ 화이트헤드의 생성철학 !!

현대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생성철학'의 대가가 누구인고 하니, 그 유명한 백두선생, 즉 화이트헤드인데, 김용옥 교수가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말이다. '합생(合生)' 이라는 용어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생성철학은 무엇인고 하니, 흐름자체가 생성을 만드는, 즉 흐름자체가 존재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흐름과 흐름이 서로 만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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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생(concrescence) - 합생이란 임의의 어떤 현실적 존재인 하나의 과정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것은 <개별적 존재자의 실재적인 내적 구조>이다. 합생은 다자가 일자의 통일 속에 결합해 들어가는 것이다. 합생의 초기 위상은 문제되는 현실적 존재의 현실적 세계를 구성하는 다수의 이접적 존재들에 대한 별개의 여러 느낌들로 이루어진다. 그 이하의 위상에서 이러한 별개의 여러 느낌들은 그 현실적 존재의 만족이라 불리는 느낌의 통일 속에 하나로 결합해 들어가게, 곧 합생하게 된다. <'합생'이란 다수의 사물들로 구성된 우주가, 그 다자의 각 항을 새로운 일자의 구조 속에 결정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개체적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만족에 도달하면서 현실적 존재는 완결되어 소멸한다. 즉 그것은 합생의 새로운 사례들을 위한 여건이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 화이트헤드 철학 용어 해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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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여기서 라이프니츠의 철학도 좀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이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무엇인고 하니, 작은 세밀함을 엮어서 신을 증명하는 것인데, 흔히들 큰 것을 신으로 보려고 하는데, 라이프니츠는 정반대로 나갔다는 것이다. 작은 것이 왜 이렇게 많은지, 그러니 그것이 바로 신의 솜씨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신을 찾아간다는 말이다.

라이프니츠가 왜 그렇게 주목했는고 하니, 영혼과 물질이 어떻게 서로 교류가 되는지, 바로 그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만나는지 말이다. 그렇게 만나서 어떻게 흡수가 되는지 말이다. 마치 물에 스펀지를 담그면 물을 머금듯이 그렇게 머금을 때, 사실은 구분이 되는 그러한 머금는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정신이 물질이 되고 물질이 정신이 되느냐고 하는, 바로 그 관계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이 딱 들어 붙는가? 아니면 본드로 붙였는가? 아니면 상관이 없는가? 상관이 없다면 몸이 아프면 왜 정신이 혼미한가? 그러니 상관이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해서 물질과 정신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교류하게 되었느냐는 말이다.

◈ 영혼은, 주름이 펼쳐지는 힘 !!

라이프니츠는 라로 이런 것을 연구했는데, 이것을 제가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에 대해서 쓴 '주름' 이라는 책에서 서평을 하면서 적어놓았는데, 작년에 이 시간에 강의도 했고 말이다. 사실 제법 어려운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라이프니츠는 주름이란 펼쳐지는 힘을 영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름은 앞으로 될 가능성인데, 그 잠재성이 미리 다 담겨있다는 것이다.

부채도사가 가지고 있는 부채는 '좍' 하고 펼쳐지지만, 또 접으면 막대기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막대기처럼 되어있는 것을 펼치면 그것이 물질이 되는데, 그 펼치는 힘을 가지고 정신, 혹은 영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펼치는 힘인데, 사람마다 다들 다른데, 많이 펼치면 키가 크고 적게 펼치면 키가 적고 말이다.

그러니 모든 현상은 동일한데, 펼치는 힘에 의해서 반 정도만 펼치는 사람이 있고, 다 펼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계통으로 펼치는 사람이 있고, 또는 노란색이나 혹은 빨간색으로 펼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 인간은 정신이 위주인가?

그렇다면 정신이 위주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교통사고가 나서 기절하면 심장이 뛰지 않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이 기절해도 몸인 심장은 여전히 뛴다는 것이다. "어, 여기가 어디지? 얼마나 이렇게 있었지?" 라고 하면, "응, 병원인데, 3일을 기절해있었어"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3일 동안 어떻게 있었는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지, 3일 동안 심장은 뛰고 숨은 쉬고 할 것은 다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정신이 물질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는, 신께서 만들 때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함께 간다는 것이다. 물질은 사라져도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고 말이다. 정신은 좀 희박한 반면에, 물질은 조밀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 희박한 것이 조밀한 것과 결합하면 사람이고, 혹은 원숭이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름'을 억지로 조성해서 기어이 '자기 같음'에 매몰되고 싶어한다. 현대철학은 이러한 '존재철학'의 오류를 찾아내어서 '동사화'된 '생성철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전환에는 타자(他者)의 역할이 요긴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도리어 나에게 없는 것과 모르는 것을 발생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린 관계성'이다. '열린 관계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서 '열린 가능성'이 나온다.

◈ 존재철학의 오류는 무엇인가?

그러니 이러한 존재철학의 오류는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인데,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경계를 만들어서, 여기까지는 개이고, 여기까지는 원숭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여기까지는 신의 일이고, 여기까지는 인간의 일이라고 경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까지는 나쁜 사람이고, 여기까지는 좋은 사람이라는, 그런 경계도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사람이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유발되면 그 어떤 누구도 흔히 말하는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빵을 훔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무슨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예수님도 아니고 말이다.

여자들이 명품 가방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자들은 그것을 한번 보면 환장을 하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도둑질을 하든지, 아무튼 손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에서 자기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니 말이다. 남자들은 자동차이고, 여자들은 가방이고 말이다.

◈ 생성철학과 열린신학 !!

이 생성철학에서는 명사적이 아니기 때문에 '나' 라는 것은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타자(他者)를 불러오자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철학에서 나왔고, 오늘날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즉 '열린신학' 인데, 자기 이야기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말고 활짝 열어놓자는 것이다.

말은 이렇게 간단히 하지만, 그 내막에는 이런 생성철학의 기초가 들어있는데, 또 이것은 나중에 환경운동으로까지 연결이 되는데, 생태시나 환경시가 나오고, 또 지구온난화가 등장하고 말이다. 그리고 '열린관계' 라고 해서, 과거에는 후진국과 선진국이 따로 따로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것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200국이 넘는 전세계 나라가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생태보존을 위한 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물론 다국적으로 말이다.

'국경없는 의사회'도 일종의 그런 모임인데, 그러니 이제는 국경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국경은 폐쇄적인 것이고, 동사적이 아닌 명사적이니 말이다. 이제는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그렇게 명사적이 아닌 동사적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같음'으로 묶어내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

이렇게 같음을 묶어내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처음에는 '니편, 내편'으로, 그렇게 나누다가, 그런데 계속해서 만나보니, "내편 중에서 적이 있고, 니편 중에서 내 편이 있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그런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면, 언제까지 적이고 동지라고 구별을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이 말이 엄청나게 중요한데, 인간은 '내'가 아니고, 그와 반대로 타인이 '내'가 되는 세상, 즉 "남이 곧 나이다" 라고 보자는 것이다. 완전히 성철스님인데, 아무튼 타인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내가 나를 주체로 설정하려는 경향에 대해서, 타자가 원리적으로 장애로 등장할 때 비로소 관계적 개체성을 통한 잉여지대의 본격적 개시가 이루어지며, 이 잉여지대(여분)야 말로 바로 실체의 자기 충족성이 지니는 폐쇄성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이 선포되는 '다름=차이'의 자리이다.

여기에서 '잉여지대'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잉여' 라는 것은 무엇을 하고 넉넉하게 남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자기가 챙기고도 남는 과잉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말이다. 아무튼 그 여분의 본격적 지대를 이제는 서로 공유하는 시대가 되어야 하는데, '너와 나' 라고 해서 딱딱 나누지를 말고 말이다.

◈ 전체는 곧 부분이고, 부분은 곧 전체이다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집들이 이렇게 다들 있는데, 자기 집에만 틀어박혀만 있지 말고, 이렇게 공동의 만남의 광장을 만들어서 문을 열고 다들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전에 집에 있을 때는 그 영역이 자기 집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문을 열고 나오면, 심지어 저기 맞은 편에 있는 남의 집조차도, 즉 그 집주인을 광장에서 만나서 그의 사정을 이제 자기가 다 알게 되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전체가 모두 자기 것이 되는데, 물론 동시에 자기의 것도 전체의 것이 되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전체는 곧 부분이고 부분은 곧 전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운동의 모토가 되는데, 물론 두레마을은 지금 다단계가 되어서 좀 그렇지만 말이다.

◈ 누가 열린 마음으로 !!

결국에는 이렇게 되면,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무엇이 무엇인가, 누가 누구인가" 라는 것 등을 묻지 않는, 그런 새로운 도덕으로 나아가는 세계, 그런 도적이 지배하는 세계인데, 즉 '너와 나'의 주체를 묻지 않는 세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지역출신이고, 어느 학교출신인지, 그리고 집안은 어떠한지, 아버님을 무엇을 하시는지, 그런 것은 묻지 않기로 말이다. 다만 "누가 이 일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는가?" 라는,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회사에서 채용을 하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묻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자는 말이다.

유난히 오늘따라 제 입에서 좋은 소리가 많이 나오는데, (마시는 음료수라도 좀 없나?) 그렇게 되면 서로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차이점을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말이 참 어려운데, 모두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즉 그런 차이점을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괘씸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주자는 말이다.

◈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와 반복' !!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이라는 책을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동안은 사람들이 같은 것만을 모으고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되면 다른 것은 배제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서, 난을 키우는 취미를 가졌다면,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동호회를 만들고 해서 같이 모이는데, 그러면 집에서 개를 키우는 취미를 가진 사람은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된 화제가 난초에 관한 것인데, "야, 이번에 문경에 가니 참 좋은 것이 있던데, 한 200만원 정도 하겠더라", "나는 설악산에 가니까 있던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전부가 다 그런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러니 개를 키우는 사람은 대화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개는 집에서 난을 물어뜯지 않는 착한 놈이라고 자랑할 수도 없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동일성을 갖게 되는데, 다르면 나가라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취미단체에 그치면 괜찮은데, 이것이 전체로 확대가 되어버리면, 즉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것 때문에 다른 쪽은 악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윤리와 도덕이 나오는데, 이 윤리와 도덕이 무엇인고 하니,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가 같음과 다름을 편가름하는 것인데, 즉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가 말이다.

◈ 윤리 - 주도권을 쥔 자의 편가름 !!

예를 들어서, 김일성이 북한의 주도권을 쥐고 난 뒤에는 누가 악한 자인고 하니, 김일성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북한의 윤리이고 도덕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윤리와 도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케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가라는 것인데, 즉 악함이라는 말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을 쓰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나는 악한 자라고 지목 당하는 그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악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배제한 사람의 행위자체가 악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동일성을 없애고 차이성으로 나가는 것이다. 즉 반대로 나간다는 말이다.

◈ 들뢰즈와 헤겔 !!

하지만 헤겔은, 뭔가 이렇게 있다면, 이것이 정(正)이라면 그 반대의 검은 그림자는 부정, 즉 반(反)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정의 약점을 보완해서 합(合)으로 나가자는 것인데, 이것을 '변증법(辨證法)' 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부정(不正)에 의미를 두는데, 즉 모순이 되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모순을 이야기해야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논리를 부정법(不正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모순은 없고, 단지 차이만 !!

이것은 정도(正道)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인데, 그러나 들뢰즈는 주장하기를, 모순이 되는 것은 없고 단지 차이가 나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는 누구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강도(閣度)' 인데, 즉 우연적인 연합이나 결합에 의한 것인데, 그러니 이렇게 강도가 서로 다를 뿐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은 추운데 필리핀을 왜 더운가?" 라고 하면서, 한국은 나쁘고 필리핀은 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온도의 강도에 의한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신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면서, 그런 신의 행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도 신이 아니고 '너'도 신이 아닌 이상은, 다만 차이만 있을 뿐이지, 어느 누가 최고라고 하면서, 그렇게 돗대처럼 설치지 말라는 말이다. (담배도 못 피면서 무슨 돗대는 무슨 돗대, 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차이가 곧 관계성의 지평이며 자유의 실현가능성의 터전이다. 이로서 타인에 대해 상호동격임을 알 때, 비로소 진리는 그 가운데 피어난다는 것이 현대 철학의 '참다운 인간'에 대한 결론이다.

이렇게 차이를 인정해주니 자유가 나오는데, 즉 "나는 불교신자, 너는 기독교 신자이다" 라고 인정을 해주니, 그동안 저기와 다른 상대방을 잡아먹지 못해서 난리를 치던 부담이 줄어들고, 이제는 상대를 잡아먹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오는, 기존의 자기가 느끼지 못했던 '잉여' 즉 여분의 자유를 더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룸메이트로 불교신자가 왔는데, 이상하게도 하는 짓마다 다 밉고 좀 두드려 패고 싶은데, 그런데 이 차이를 인정하고 나니 저 보살을 두드려 패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이전에 그 차이를 몰랐을 때는 마음이 괴롭고 좋지 못했는데, 그런데 이제 그 차이점을 인정하고 그 부담감에서 벗어나니까, 그것이 누구에게 좋은 고하니, 자기가 전에 느끼지 못했던 잉여의 자유마저 보너스로 주어지니,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라는 것이다.

◈ 당신의 건강을 위해 들뢰즈 보약을 !!

그 다음부터는 그 보살에게 가서 억지로라도 전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는 너에게 좀 배우고 싶어" 라고 나오니, '내'가 어려울 때는 그 보살이 도와주고, 그 양반도 전에는 부담스럽게 지나다가, '내'가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니, "어, 그렇게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하더니만, 이제는 아니네' 라고 해서, 그렇게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이다. 혈색도 좋아지고, 건강도 좋아지고, 우울증에도 걸리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자유의 세계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잉여의 자유를 그동안 왜 그렇게 무시했는가? 그것은 차이를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차이가 있음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차이가 있다면 그 있음을 인정해야지, 그런데도 그렇게 차이를 밀어붙여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렇게 억지로 동질성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런 부담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반칙을 일삼는 인간들을 향해서 들뢰즈가 외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신학적인 인간 탐구는 인간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들어간다. 하나는 피조성이요, 다른 하나는 죄성이다.

◈ 가을에 낙엽이 왜 떨어지는가?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 싶은데,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는데 왜 떨어지는가? 이렇게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통해서 뉴턴 같은 경우에는 중력의 법칙을 설명하는데, 그러면 그동안 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잎사귀와 줄기 사이에 있던 결합력보다 밑에서 잡아당기는 힘보다 더 세기 때문인데, 그런데 날씨가 추워지면서 그 결합력이 약해지니 당기는 힘에 의해서 그만 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무의 입장에서 본 것이고,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다른 각도에서 보는데, 원래 이 나뭇잎은 지구, 즉 대지에 속한 것인데, 이 나무가 그것을 붙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구에서 뿜어내는 냉기에 의해서 주인이 그 나뭇잎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뭇잎과 대지가 원래대로 다시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갈리레오가 말한 상대성 원리인데, 거기에 시간을 더한 것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고 말이다. 그러니 상대성 원리가 아인슈타인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바라보는 관점에 의해서 서로가 다르니, 누가 틀리고 누가 옳다고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유한하다', '타락했다' 라고 말들은 하지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타락이 아니라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도, 신의 무한함에 푹 잠길 수가 있는 어떤 희망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피조성이란 인간의 유한성을 의미하고, 죄성이란, 타락성을 의미한다. 인간의 피조성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성격이 담겨 있다. 하나는, '인간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 정재현 씨가 주장한 것인데, 계속해서 보자.

** 무(無)로부터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뜻하고, '신의 형상 부여'는 인간의 초월성을 가리킨다.

◈ 인간은 악마인가? 천사인가?

이것이 인간 속에서 모순을 일으킨다는 것인데, 즉 "인간은 악마인가? 아니면 천사인가?" 라는 것이 헷깔린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천사와 같이 하나님을 향하고, 또 어떤 때는 짐승처럼 마구 행동하고 말이다. 이렇게 서로가 섞일 수 없는 것이 같이 들어있으니 혼란만 계속해서 가중된다는 것이다. 인간내부에서 말이다.

◈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 !!

그래서 현대신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상태를 두 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긴장'(tension) 이라고 하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들은 소리가 교수들이 입에 달고 있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 라는 것인데, 그게 무슨 뜻인지 교수들도 모르면서 지껄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신학용어가 아니라 철학용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철학도 모르면서 철학용어를 끌어당겨서 이야기를 하니, 하는 놈도 모르고 듣는 놈도 모르고 말이다. '이미'도 아니고 '아직'도 아니고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긴장을 하느냐는 것이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 그 놈이나 긴장을 하지 말이다.

아무튼 서로가 잡아당긴다는 것인데, 팽팽하게 말이다. 그렇게 잡아당기면 한 쪽으로 치우치든지 해서 결판이 나야 하는데, 도대체 어느 쪽이냐는 것이다. 이미 쪽인가? 아니면 아직 쪽인가? 둘 다 어중간하게 되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말이다.

◈ 긴장상태는 결국 '아직'의 상태 !!

이러한 '긴장관계' 라는 것은 철학에서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인간의 중심이 뭔가 완료된 때에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아직까지는 '미완료'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긴장관계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은 이미가 아니라 아직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학교 교수들이 "이미가 아니고 아직입니다" 라고 말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또 욕을 얻어먹을까 싶어서 그냥 머뭇거린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말이다.

그리고 '이미와 아직'은 서로가 대립되는 관계이기 때문에, 같은 동일 선상에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긴장상태라는 것은, 이미가 아니라 아직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미가 되었다면 그것은 화목상태라는 것이다.

◈ 화목이란? - 긴장의 반대말 ??

그렇다면 이 '화목' 이란 무슨 뜻인가? 이 화목이란 말도 사실 '긴장' 못지 않게 엄청 어려운 말인데, 쉽게 말하면, "우리는 이미 합의를 했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더 이상 죄에 대해서 묻지 않기로 합의를 본 상태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화목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니 긴장상태는 아직 합의를 보지 못한 아직의 상태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에게 있어서 비록 '없음'으로부터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없음'은 여전히 살아있다. '없음'은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 '다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늘 신비적인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다. 이미 아는 것으로부터 알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지(無知)의 지(知)'이다.

◈ 분명히 없는데 왜 있는가?

여기서 저자의 고민이 있는데, "없는데 왜 있는가?" 라는 말이다. 분명히 없었는데 왜 있게 되었는지, 그 매카니즘을 인간이 과연 알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없음에서 있음이 되었다면, 즉 없음의 요소가 과연 있음의 요소에 들어있느냐는 말이다.

이것도 몹시 어려운 것인데, 이렇게 없는데서 있었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서, 여기에 물통이 이렇게 있다고 한다면, 이 있음을 가지고 제 아무리 연구해도 없음이 보이는가? 보이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없음은 이미 지나갔으니 말이다. 그러니 있음에서는 없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피조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피조물이라고 하면 안 되고, 그냥 '있다' 라고 말해야지 말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없었을 때가 있었으니, 그런 요소는 빼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차라리 "있는데, 어떻게 있는가?" 라고 해야지 말이다. "이렇게 물이 있는데, 이 물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인간은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데,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있으면 있음으로 계속해서 나가야 하는데, 그런데 없음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왜 살아가는가? 열심히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밥 먹고 살기 위함인데, 그러면 밥 먹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식한 것인가? 자기가 없어진다는 것인데, 사람이란 세월이 가면 아무리 탤런트이고 영화배우라도 모두가 다 할매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매가 되면 사진도 제대로 찍을 수가 없는데, 무슨 괴물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자기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있었는데 왜 없어졌는가? - 피조성이기에 !!

아무튼 "있었는데 왜 없어졌는가?" 라는 것인데, 즉 있음이 있음이 아니라, 그 속에 없음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피조성'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피조성을 이야기하려면, 죽음에서 되돌려야만 피조성을 느끼게 되는데, "야,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구나. 누군가가 다 가지고 가는구나" 라고 말이다.

이렇게 예를 들면 실감이 좀 나지 싶은데, 커다란 세탁비누 덩어리를 대패로 밀어보면 잘 깎이는데, 참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깎이는 세탁비누의 입장에서는 아파서 환장하는데, 우리가 바로 그 세탁비누 신세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그야말로 미치는데, 계속해서 깎고 또 깎여버리니 말이다. 잘라든 못나든 깎아버린다는 것이다.

◈ 도둑질도 젊었을 때 !!

교도소에 가면 무기소로 환갑이 지나도록 복욕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이들이 젊었을 때는 강패짓을 하고 도둑질을 하면서 그렇게 날아다녔는데, 나이가 드니 도둑질을 하라고 해도 못한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나라에서 하지 말라고 그렇게 해도 몰래 몰래 하더니만, 시간이 지나서 나이가 드니 다리에 힘이 없어서 아파트 벽도 오르지 못하고 담을 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도소를 나가도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어서 집에 그냥 누워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피조성인데, 그러니 젊은 놈들에게 이런 피조성을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야 알지 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아직 팔팔하니 말이다. 축구를 할 때 보면, 다리가 아파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발목 인대가 끊어지고 난리를 피우고 말이다. 아무튼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인간들이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 됨'을 모른다는 말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 됨은 쉽게 말하면 '양심' 인데, 이 인간의 초월성, 프로이든 주장하기를, 인간은 자기의 초월성 때문에 인간내부에서 협상을 하고 타협을 하는데, 하지만 나중에 자기 몸이 피곤해지면 그런 협상과 타협도 포기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은 선을 향하지만, 육체는 죄를 짓고 말이다. 그렇게 하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욕망대로 끌려가는 식으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인간은 늘 신비로움 찾아서 !!

그러므로 "인간은 늘 신비로움 속에 둘러 쌓여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중요한 말인데, 왜 남자가 가을이 되면 바바리 깃을 세우고 우수에 잠기고 슬픔에 잠기는데,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그리워하는 것이, 물론 돈도 좋고 명품가방도 좋고 승용차도 좋고 여자도 좋지만, 사실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비'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종의 마법의 성인데, 인간은 이렇게 뭔가 아직 탐험하지 않은 미답의 공간, 자기가 접근하지 못한 공간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자의 경우도, 이미 답사를 다 끝마친 자기 마누라 말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말이다.)

◈ 한비야의 흥분된 자기 심장 !!

그렇게 신비가 남아있는 공간을 계속해서 찾아가고, 그런 신비가 남아있다고 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벌써부터 흥분된다는 것이다. (왜 여성탐험가 한비야는 그런 흥분된 뛰는 자기 심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오지를 생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닌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인간인데, 그런 신비함이 있는 일에 흥분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 아이들이 회사에 취직을 할 때 얼마나 좋아하지, 그렇게 기쁘다는 것이다. 엔돌핀이 마구 돌고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들어가는 날에 과장이 두 명 사표를 내고 들어가는데, 이미 그 회사에는 이미 신비감이 없으니까 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대부분 잘려서 나가지만 말이다.) 아무튼 사람은 이런 신비로움이 있다는 것만으로 흥분하는데, 그것이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는 말이다.

왜 이민을 가고 선교사로 나가는가? 그곳에 신비로움이 있으니 말이다. 왜 아이를 낳고 또 낳는가? 물론 사고로 낳는 수도 있지만, 그렇게 아이를 낳을 때마다 기대하는 그런 신비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신비를 인간은 자기 평생을 살아가면서 지울 수가 없는데, 나중에는 그 신비로움에 천국도 포함이 되는데, 자기가 아직 답습하지 못한 공간이니 말이다. 그러한 천국을 내다보는 신비로움, 그것이 곧 '초월성' 이라는 것이다.

◈ 여보, 미안해요 !!

어릴 때 걸었던 골목길을 가보고, 젊었을 때 가보았던 그 다방을 다시 가보면, 그러 지금 현실은 그런 신비성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서 한번 가보고 나면 실망만이 더 크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사귀었던 그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되면, 얼마나 실망이 큰지 말이다. "아, 그때는 참 예뻤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번은 제가 제 아내와 버스를 탔는데, 너무나 놀란 것이 우리 집사람이 젊었을 때 그 예쁜 모습을 한 아가씨가 앉아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진짜 마누라는 이제 쭈글쭈글해져서 옆에서 졸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결국 어떤 대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비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리던 신비를, 혹은 유사한 신비를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는 말이다. (신비? 신지?)

◈ OLDS BUT GOODS !!

자기가 옛날에는 폴앵카나 엘베스의 노래를 좋아했다고 하면, 그것은 그 노래 자체라기보다는 자기가 그 노래를 들을 당시에는 신비감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신비감을 그대로 느끼려고 하면, 물론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느끼려고 하면 그 노래를 다시 듣는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추억의 팝송' 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옛날에 놀았던 낙엽이 지는 골목길을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에 듣던 노래를 다시금 들으면서 걸어가면 그 신비를 다시 느끼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좋아하던 복희나 진주는 다 떠나버리고 없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대통령을 왜 하려고 하는가? 아직 차지하지 못한 신비이니 말이다. 에베레스트를 등산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신비를 찾아서 헤매는데, 그것을 초월성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신비는 논리적으로 해명이 되지 않는데, 여기서 나온 것이 '미학'이고, 곧 '예술'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야, 예술적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예술적이라는 것이다.

◈ 일을 해도 예술적으로 !!

그러므로 이 예술은 이성을 초월하는데, 이것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보면 나오는데, 그래서 직장에서든 어디서든 일을 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고 하니, 예술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신비감을 주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서, 교사를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월급날만 기다리면서 하면 제대로 가르치지를 않으니 아이들이 손해를 보지만, 그러나 그 가르치는 일이 재미가 있어서 하면, 즉 신비로움을 가지고 하게 되면, 아이들도 즐겁고 교사도 즐거운데, "아이쿠, 얼마나 그렇게 재미있게 가르칩니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이 재미가 있어서 신비롭게 가르치니까, 아이들이 신비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것이 '묶기(?)' 인데, 교사가 천직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직장에 다녀도 자기 적성에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힘들어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좋다는 대기업에 취직을 해도 적성에 맞지 않아서 다시 나온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말이다. 30%정도가 2년 안에 다들 그만 둔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린 것이 아니라 적성에 맞지 않아서, 즉 자기 즐거움이 없으니 자기 일거리가 아니더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즉 인간은 늘 신비적인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다. 이미 아는 것으로부터 알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지(無知)의 지(知)'이다.

여기 나오는 '무지(無知)의 지(知)'가 무엇인고 하니, 모르는 것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지혜라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모르는 것이 남아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 그 자체가 참된 지혜라는 말이다. 그러니 일종의 겸손인데,

** 반면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이레네우스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은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이해하면서, '형상'과 '유사성'을 구별했다. 즉 신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타고난 이성과 정신적 자유'로, 그리고 신의 유사성은 '신의 은총에 의한 완전을 위해 인간이 이루어야 할 과제'로 이해하였다.

여기 '유사성' 이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의 원본과 모방에 기초한 것인데, 원래 그 원형(아르케)은 하늘에 있는데, 그래서 인간은 모방을 할뿐이니 그만큼 갭이 있기에 결핍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결핍은 인간이 행동할 수 있는 동기를, 즉 추진력을 제공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에 근거해서 이레네우스는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를 거역하여 죄인이 되었지만, 이것은 주어진 형상의 영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루어야 될 유사성의 영역에서 일어났으며, 죄로 인해 '신의 닮음'은 상실되었지만 창조의지에 의한 '신의 모습'은 파괴되지 않고 존속한다고 주장한다.

◈ 죄 - 신의 형상을 많이 잃어버린 것 !!

이 형상의 영역은 유사성의 영역이기에, 진짜 원본을 찾아가는 일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신의 모습을 닮기 때문인데, 그러나 닮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 즉 원본과 만나게 해주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 라는 말이다.

◈ 죄는, 불가능성이 아닌 타락이고 가능성 !!

그러니 '죄' 라고 하는 것은, 신의 형상에 입각해서, 이 신의 형상을 많이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니 죄는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떨어졌지만, 그러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주교의 정통적인 죄관이고, 기독교 역사에서 이야기하는 정통적인 하나님 형상론이라는 말이다.

◈ 그러니 굳이 십자가가 아니더라도 !!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십자가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 굳이 십자가를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론을 펼칠 근거가 아예 기존의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자기 속에 있으니 이미 신이고, 그런 신을 닮아갈 과제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신의 형상을 죄와 분리시키는 이레네우스의 이러한 초월주의적 견해는 중세 스콜라 신학에 이어졌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에덴 동산의 아담에게 자연적 능력을 가리키는 형상뿐 아니라 초자연적 선물인 유사성도 주었는데 범죄로 인해서 초자연적 선물은 소실되었지만,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의미하는 자연적 능력, 즉 신과 관계할 능력은 남아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 칼빈은 신의 형상이란 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광의와 협의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전자는 신이 창조한 삼라만상의 피조물을 뜻하고, 후자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관련된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육체적 특성에서도 신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형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니,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인간이 있다는 것 자체를 하나님 형상이 있다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아마도 칼빈이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야고보서에서 찾았지 않았나 싶은데,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네가 왜 모독하는가?" 라는 부분 말이다.

(약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 칼빈 - 사람은 신의 형상이다 !!
◈ 성경 - 신의 형상이 있을 때만 사람이다 !!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데는 조건이 있는데, 칼빈의 경우에는 "사람은 신의 형상이다" 라고 주장했고, 하지만 성경은 "신의 형상이 있을 때만 사람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데, 즉 분명하게 조건이 붙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 9장 6절에 나오는데, 한번 찾아보자.

(창 9: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 노아홍수 때부터 복수의 하나님 ??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을 죽인 자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에게서 생명의 피를 찾겠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그 살인자를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기 창세기 노아의 홍수 때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적극적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이 처음 나온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그래서 독이 든 사과를 먹었으면 그 독이 퍼지듯이 죽는데, 선악과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죽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죽이는데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붙인다는 것이다. 즉 조건에 맞지 않아서 죽인다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니가 인간이냐?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라는 것이 아니라, 즉 "조건에 부합될 때만 인간으로 간주해주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으로 간주해주지 않겠다" 라는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 신의 형상이 아닌 예수님을 사랑해야 !!

그러므로 성경은 어디까지나 언약중심인데, 언약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러니 언약 속에 있으면 인간이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으로 취급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기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저주받을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형상인데, 그러므로 그 형상을 머금지 않으면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론이라는 말이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그런데 칼빈은 그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또한 협의의 의미에서 형상은 그것이 사람의 거울이니, 그 거울을 본받아서 동물과는 다른 형태로,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인간만의 특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몰트만은 신의 형상에 대해 이러한 전통적인 실체 유비와는 달리 관계 유비로 접근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는 신의 형상에 대한 실체적 이해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특징에서 시작한다고 보면서, 이러한 출발점은 인간 중심주의적 편향성을 지님으로써 온당치 못한다는 견해를 취했다.

계속해서 살펴보자.

** 그에 의하면 신의 형상이란 인간론적 개념이기 전에 신론적 개념이므로,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형상은 먼저 '인간에 대한 신의 관계'를 말하며, 그 다음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저자 정재현은 이 견해를 따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본질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 몰트만, 바르트, 정재현 -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를 통해서 !!

몰트만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까, 신의 형상은 인간에 대한 신의 관계를 말하고, 그리고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칼바르트와 마찬가지로 형상을 '누구인가?'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가지고서 형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관계를 말이다.

그러니 언약하고는 조금 다른데, 이 책의 저자도 이런 몰트만과 바르트의 견해를 따르는데, 지금 말이 조금 복잡한데, 간단하게 쉽게 말하자면, "내가 형상이라고 나서지 말고, 제대로 인간답게 살아봐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을 보고 나서, "아하, 당신이 그렇게 제대로 사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있구먼. 그러면 인정해줄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교인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이 입었으니 복을 달라고 하지 말고, 그래도 성도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성도답게 말씀대로 살면, 그럴 때만 형상이 회복되었다고 해주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취지에서 현대신학이 교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까 짐승하고는 다르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가난하고 부유하고 하는, 그런 것을 따지지 말고 모두가 다 한 형제임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시는, 그런 형상의 회복단계라는 것이다.

◈ 결국은 민중신학 !!

이렇게 말을 어렵게 고상하게 돌려서 해놓았지만, 따지고 보면 민중신학인데, 다시 말해서, "나는 없고 누가 나에게 들어가는고 하니까, 타인이 내 안에 들어와서, 타인과 내가 폐쇄가 아닌 개방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다" 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저자인 정재현 교수가 하고 싶은 주장이라는 것인데, 성경과 신학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런 관계, 즉 선이 그어진 관계, "기독교가 아니면 안 되고, 예수가 아니면 안 되고"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원한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 손에 손잡고 !!

그러니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 형상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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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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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