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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7대구강의15-가짜이스라엘2,주님의전쟁1자유게시판열왕기상

07대구강의15-가짜이스라엘2,주님의전쟁1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7 대구강의 15 - 지옥의 하나님 23

07,11,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가짜 이스라엘 2 !!

이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가짜 이스라엘'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보겠는데, 먼저 교재 77페이지를 살펴보자.

**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와 미가야 선지자가 맞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인데, 누가 거짓인가를 판가름 낸다. 미기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상 22:19)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왕상 22: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왕상 22: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왕상 22:22)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왕상 22: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 숫자가 아닌, 과연 하나님이 어느 편에 !!

여기에 미기야 선지자가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맞대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리고 엘리야가 850명의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진리는 숫자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어느 편에 속해했는가?" 라는 것이다.

◈ 복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

이렇게 나가면 그 표현이 극단적이고 과격해질 수 있는데, 물론 저는 그런 극단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즉 "복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전체의 인간론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제대로 표현한 것인데, 목사나 장로이든 신학자이든 대통령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아주 간단명료한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고, 하나님도 이런 방향으로 일을 하시는데, 인간들은 "하나님, 하나님" 이라고, 그렇게 하나님을 외쳐 부르면서도,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은 쏙 빼버리느냐는 것이다.

사실은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는데, 하나님께서 인간과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이 바로 이 선악과인데, 인간이 그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마치 하나의 선악과나무처럼 행세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가 인간 속에 흡수된다" 라든지, 혹은 "인간이 선악과에 흡수되었다" 라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유혹자가 !!

이 선악과가 바로 유혹인데, 즉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유혹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회나 도시의 출현이고, 즉 자기들의 이름을 하늘까지 높이자는 말이다. 배울 것이 서로에게서밖에 없다는 것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땡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땡기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즉 생명나무가 아니라 선악과나무의 성질을 품고 있는 이상, 자기와 동질의 선악과와 그런 유혹자를 찾고 서로가 땡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서 움직이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림받은 인간이 곧 우리를 유혹하는 유혹자로서 행세하는 세계가 바로 이 세상이라는 말이다.

◈ 왠지 벗어나기 싫어 !!

그리고 이 선악적인 사고의 유혹이란 것은, 항상 우리 머리 위에 맴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지배를 벗어날 수가 없는데, 즉 이 세상의 악한 신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뭔가 부추김을 받는데, 이상하게 그 부추김이 좋고, 그 부추김에서 괜히 벗어나기가 싫다는 말이다. 이 세상이 주는 유혹에서 괜히 벗어나기가 싫다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몽둥이로 패고 성령께서 목을 끌고 가니까, 할 수 없이 좁은 길로 가기는 하지만, 하지만 옆에 있는 그 넓은 길이 좋다는 말이다. 그냥 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면 하고 말이다. 그리고 "복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라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은데, 아무튼 그냥 복음이 없더라도 유혹자가 된 자체로서 인간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천 목사님, 혹시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오늘 여기 교재에 나오는 열왕기상 22장의 미가야 선지자의 경우에 400명의 기존 선지자들과 대결을 하는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 목사 400명이 모인 모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요? 총회는 총대로 뽑혔을 리가 만무하니 가보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노회라면 아주 큰 노회가 되어야 400명 정도가 모이는데, 장로까지 포함해서라도 말이다. 혹시 천 목사님 경험한 적이 있는지요?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거기서 손을 들고 과연 복음적인 발언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돌맹이가 날아오는데, 교회당에 안에 돌이 없으니 물 컵이나 욕설이 날아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욕을 하는 인간들이 주로 큰 교회의 당회장들인데, 그들에게 잘못 찍히면 대구시내에서 이단이 되는 것은 한 시간이면 족한데 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400:1로 싸울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엘리야의 경우는 자기 혼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도 싸웠는데 말이다. 지금 상대한 자들이 시장에서 회사에 다니고 장사하는 평범한 일반인들이 아니라, 소위 교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지도자급 400명이라는 것이다.

◈ 복음이 있는 싱글과 복음이 없는 무리들과의 맞닥뜨림 !!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일부러 맞닥뜨리도록 하시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일부러 하시는 이유는, 그것은 바로 복음이 없는 인간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혀 자기들 주제파악이 되지 않는데, 그들의 주제파악은 복음이 있는 사람을 마주치도록 함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없는 인간들이 서로 유혹하고 유혹을 받는 대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기들이 그러한 집단의 일원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복음이 있는 자는 홀로 나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싱글로 말이다.

이렇게 그 어떤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음으로서, 즉 동일한 집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진리가 작용하는, 그렇게 복음으로부터 지시함을 받는 인간이 복음이 없는 인간과 맞닥뜨리도록 함으로서, 복음이라는 것이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밉상을 받으면서 다가오는지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이것을 자진해서 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 하지 못하니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 내 증인이 되리라 !!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 언제이냐고, 혹 지금이냐고 묻는데, 지금 이 지상에서는 때를 기다리는데, 즉 시간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때가 아닌 인격을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때와 기한은 몰라도 된다는 말이다.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행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임한 사람, 즉 어떤 인격이 된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달라지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이지, 어떤 때를 파악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인격이 되는데, 그 인격자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인격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인격은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즉 완료된 상황에서의 일이고, 앞으로 할 일은 복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그런 것을 까밝히게 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조리 다 순교자가 되라는 것인데, 스데반 집사부터 시작해서 전부가 다 말이다.

◈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죽은들 어떠하리 !!

그래서 야고보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 둘씩 다 죽어나가는데, 거기에 따라서 신약성경에 보면,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나, 하늘나라에 상급이 있다는 말씀이나, 베드로전서에 있는 예수 이름으로 핍박을 받으면 성령이 머리 위에 있다는 말씀이나, 욥이나 롯이 마지막 때에 받는 그런 큰 고난을 같이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나,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데, 베드로나 요한이 결국 자기들이 원치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도 그렇고 말이다.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러한 모든 것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죽어도 좋다고 하는, 즉 복음으로부터 지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갔을 때, 앉은뱅이가 나은 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렇게 복음으로 지시를 받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지시를 바지 않으면 그 다음부터는 행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 얼마나 위로부터 지시를 받지 못했으면 자기가 행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지시를 받지 못하니까, "목사님,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목사는 전혀 지시할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 해도 돌고, 달도 돌고, 바쁘다 바뻐 !!

하지만 직접 지시를 받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아, 바쁘다 바뻐" 라고 나오는데, 그런데 그런 지시를 받지 못하니, 자꾸만 자기가 무엇을 행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티를 내려고 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이트에 보면, 이근호 목사의 신앙은 상대방의 신앙을 피폐케 한다고 하는데, 본인이 지시를 받은 것이 없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죽어도 좋다" 라고 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아무튼 이 미가야 선지자가 해야할 일은, 뺨도 얻어맞고 결국 욕을 바가지로 듣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77페이지에 나오는 열왕기상 22장의 말씀을 다시 보자.

(왕상 22:19)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왕상 22: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왕상 22: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왕상 22:22)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왕상 22: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 천상회의를 잠시 엿보면 !!

여기 19절에 보면 미기야 선지자가 천상회의에 참석해있는데, 예레미야도 그런 적이 있고, 에스겔도 가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여기 천상회의에서 하는 내용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꾀어야겠다고 하니, 한 영(靈)이 나아와 자기가 그렇게 하도록 아합왕을 꾀겠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상 천상회의 내용치고는 좀 그러한데, 무슨 정치인들이 하는 말도 아니고 말이다. 누구를 꾀고 말고 하니 말이다.)

◈ 신이 있다면 왜 악이 있는가?

하지만 이 이야기가 들뢰즈나 칸트나 헤겔을 그야말로 박살을 내는 내용인데, 하나님 앞에서 사단이 꾀겠다고 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가만히 듣고 계시고, 또한 그것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 세상에 왜 악이 있는고 하니, 지상에서 복음이 없는 인간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풀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신이 있다면 왜 악이 있는가?" 라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천상회의를 보면 이것이 단박에 풀리는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 하나님 : 어이, 마귀. 이리와 봐.
* 마 귀 : 예. 부르셨습니까?
* 하나님 : 불렀으니까 왔지. 가서 꾀이라.
* 마 귀 :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악이 왜 이 세상에서 설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 지시가 바로 '선'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악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이유는 바로 자기가 선하다고 여기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 선악을 아는 것이 선은 아니다 !!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선과 악을 안다" 라고 이야기해야 할 텐데, "나는 선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은 오직 하나님만이 선인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누가 선하다고 하느냐? 오직 아버지만 선하시다" 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선과 악을 아는 것이지, 이렇게 선악을 아는 것을 두고서 선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선을 안다고 해서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성경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성경을 아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우리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능력이 아는 것이 선(善)이고 의(義)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전혀 의를 행할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이 곧 의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의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선을 행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없음을 아는 상태가 이미 구원받은 상태라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선이 없음을, 그러한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안다는 말이다. 이미 구원이란 능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말이다.

◈ 걱정과 근심은, 그분의 지시 없이 일을 시작할 때 !!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고, 또한 그런 걱정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 걱정이 되는고 하니까, 아무런 지시도 없이 자기가 무슨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라는 것이다. 그분의 지시도 없이 말이다.

◈ 그분의 피가 보이지 않으면, 자기 노력만 !!

어제 설교시간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성경을 피해서 돌아가 버리면 그리스도의 피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이는가? 자기 노력만이 보인다는 것이다. "아이고, 인생을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이 아무리 여기에 있어도, 만약에 피해서 돌아간다면, 자기 자신이 그대로 생생이 살아서 돌아가 버리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도 얻은 것도 하나 없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성경을 직통으로 들어가면 그분의 피가 보이는데, "아하, 난 그분의 희생으로 사는구나" 라고 말이다.

◈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밖에 !!

아무튼 누가 뭐라고 해도 복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닌데,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혹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지시를 받아서 살아가는 인간과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사는 인간, 이 두 종류의 인간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대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알곡과 가라지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밖에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희생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소유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렇게 구별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78페이지 '에스겔에게 나타난 주의 이름'을 살펴보자.

** [에스겔에게 나타난 주의 이름] - 에스겔에게서도 하나님의 심판성은 하나님께서 역시 불 가운데 역사하신 모습에서 진행된다. 범죄한 성전에 대한 심판의 징조인 것이다.

(겔 5:4)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 중요한 것은, 에스겔이 아닌 '주의 이름' !!

먼저 이 '에스겔에게 나타난 주의 이름' 이란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고 하니, 에스겔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주의 이름이 에스겔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에스겔이란 인화지에 주의 이름이 어떻게 담기는지 말이다.

에스겔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불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탱크를 몰고 다니는데, 그 탱크가 불덩어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불은 무엇인가? 이것은 신명기 5장 4절에 나타나는데, "나는 소멸하는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신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 아, 토마스 아퀴나스 !!

토마스 아퀴나스가 여기서 작살이 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이 양심화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인간 속에 집어넣은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소멸해버리면 어떤 모순에 빠지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가 심어놓고는 자기가 태워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불신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심판하면 자기 형상을 심판하는 모순에 빠져버리는데, 그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법에 해당하는데, 인간이 자연을 통해서 보았는데, 그것을 또 인간들이 신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 도와줘요, 배트맨 !!

어제 오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소위 '배트맨' 이야기인데, 누군가가 배트맨의 도움이 필요하면 하늘에다 그의 로고인 박쥐그림을 조명으로 비추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명을 받은 것이 신이 되는데, 그런데 여기 이 조명이 없어지면 여기 하늘에 비친 그림도 함께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배트맨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인데, 옆에 있는 친구 배트맨이 또 다른 신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에서 신을 이야기할 때는, 여기 신1, 신2, 신3를 전부 모아서 평균을 낸다는 것이다. 25점, 50점, 32점을 다 모아서 평균을 내는데, 그렇게 하면 그 학과의 평균점수가 나오듯이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뭐냐고 할 때, 이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마다 다들 다르니 평균을 내자는 것이다. 좀 황당(?)하다는 표정들인데,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어요?

그러니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형상론이 수학적으로 평균을 낸 형상론이라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미처 이런 사실을 제대로 모르는데, 그러니 누구를 데리고서 형상론을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이 화를 내는데, 예를 들어서, 주기철 목사를 가지고 형상론을 말하면, 주기철 목사보다도 더 착한(?) 사람이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인가?" 라고 하면서 화를 내는데, 자기가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 플라톤의 모방성과 유사성 !!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된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너무 어려워서 조금 망설여지는데, 플라톤의 철학에 의하면 모방성과 유사성이 있는데, 이 말은 원판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즉 원판이 따로 있기 때문에 유사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사성은 진품이 아니라는 소리인데, 진품이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모방으로 본다면, 그것은 형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지' 라고 하는데, 그 이미지는 가짜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의 이미지가 물에 비친다면, 그 물 속의 달은 분명히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진품으로 보느냐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진품 같으면 소멸하면 안 되는데 말이다.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에스겔에게 나타난 주의 이름'을 계속해서 보자.

**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있었다.

(겔 5:4)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겔 36: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겔 36: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 주의 이름 - 소멸하는 불 !!

에스겔에서 나타난 주의 이름은 사람을 죽이는, 즉 소멸하는 불로 나타나는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기의 이름을 위함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역시 "복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염두에 두고 에스겔을 보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에스겔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데, 이렇게 복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닌데, 무슨 하나님의 형상이 어쩌고저쩌고 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이 없으면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 자꾸만 인간존재론으로 출발하니 !!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고 하니까, 자꾸만 인간론을 할 때 인간존재의 정당성에서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인간을 그냥 버림받은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죄로부터 출발을 해야 인간이 제대로 되는데, 즉 참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그분만이 인간이지 다른 인간(?)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인간대우를 받는 것이지, 밖으로 나가면 짐승이고, 그냥 움직이는 흙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이름으로 들어가는데, 그 거룩한 이름이 하는 일은 '창조행위' 라는 말이다. 구원행위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창조행위가 곧 구원행위라는 것이다. 이렇게 창조행위가 바로 구원행위라고 하는 것은, 서서히 주의 이름이 신약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일치가 된다는 것이다.

◈ 창조는 창조이고, 구원은 구원인가?

십자가 사건 이전까지는 창조는 창조이고 구원은 구원이었는데, 좀더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창조를 회복하기 위한 구원조치라는 말이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구약에서는 창조를 회복하기 위한 구원행위였다면, 즉 창조위주의 창조를 손대지 않기 위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 구원을 위해서 창조를 포기 !!

그런데 그것이 신약에 들어오면 구원을 위해서 창조를 포기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만든 만물을 불로 태워버린다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모두 불살라버리겠는데, 누가 감히 시비를 거느냐는 것이다.

◈ 드디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

그러니 우리의 장막은 없어져야 하고, 우리의 몸은 후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구원됨을 위하여 말이다. 기존 창조의 허물을 벗어버리면 진짜 창조가 드러나는데, 껍질을 벗고 하나님의 참된 창조인 구원이, 즉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솟아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로켓 발사대에서 로켓을 발사하면 그 지지대가 하나둘씩 떨어져서 로켓은 드디어 자유롭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털어 내어버리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진짜 알맹이를 뽑아내기 위해서 우리의 겉 사람을 없애버리는 말이다. 허물을 벗듯이 그렇게 벗어버리도록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죽으면 죽을수록 더욱더 속이 빛나게 되는데, 아무리 시련과 환난이 닥쳐와도 말이다. "죽어도 좋다" 라는 말은 속을 드러내기 위해서 껍질을 버려야 하는데, 성도는 그런 껍질에 연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많으면 껍질이 정신까지 혼미케 하는데, 치매에 걸리면 예수에게도 마구 욕을 퍼붓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껍데기가 문제인데, 그래서 몸이 피곤하면 교회에도 나오지 못하고 말이다. 교회이고 뭐고 다 귀찮은데, 만사가 다 귀찮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새창조를 위해 마귀는 반드시 필요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에스겔을 통해서 창조를 없애고 새창조를 끄집어내는지, 그런 관점에서 에스겔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죄를 지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필요했고, 죄를 지은 유다나라가 꼭 필요했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이단이 필요하고 사단이 꼭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새창조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서인데, 그래서 그들이 이 땅에서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은 하나님께만 맡겨야 하는데, 이것이 말이 쉽지 그야말로 그렇게 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말이다.

◈ 복수혈전, 나의 칼을 받아라 !!

이것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말이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것인지 모르는데, 복수는 자기가 직접 시원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자기가 당해놓고서 복수를 주님에게 일임한다는 것은 보통 신앙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의 경우에도 자기가 당한 일의 복수를 주님에게 맡겼는데,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겠는가? 성령이 사로잡혀야 하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사야 6장에서도, 이사야는 성전에서 나온 숯불에 의해서 입에 지짐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곧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한 선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사야의 체험은 나중에 구원받는 남은 자들에게도 필히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숯불이 나오는데, 아무튼 하나님은 불이 아니면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워버리는 말, 없애버리는 말, 껍데기를 확 벗겨버리는 말, 즉 껍데기를 껍데기라고 알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사 4: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됨이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즉 불과 같이 태우는 힘으로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신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불로서의 심판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소멸의 속성에 의해서 진행되는 당연한 심판형태이다.

(욜 1: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거친 들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밭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욜 1: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이 말씀이 신약에서 성취가 되는가? 안 되는가? 분명히 성취가 되는데,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지구 체질(體質)이 불에 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말씀이 하나라도 헛되이 성취가 되지 않고 없어지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는 계단에서는 쉴 새 없이 하나님께서 진노의 불꽃으로 내밀고 계시다. 이것은 새성전에서도 유효하다. 옛 성전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아예 성전 자체를 하나님께서 소멸시켜버리시고 말았다. 하늘의 성전에서 쏟아진 진노의 불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불꽃을, 그 무서운 혀를 날름거리고 계시는데, 아무튼 새성전에서 유효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레미야 9장 25절과 26절을 보자.

(애 2:3)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 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
(애 2:4) 원수 같이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를 살륙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애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이것이 예레미아애가의 내용인데,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 성전을 불태우면서, 그 나라전체를 불바다로 만드는데,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예언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서서 일을 하시는데 그의 백성이라고 해도 말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기 민족을 벌하시는 이유는,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민족에 대한 징벌이라는 아브라함의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9장 25절과 26절을 보자.

(렘 9:2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렘 9: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 아, 어쩌란 말인가?

이스라엘은 이렇게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는데, 그래서 불사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슬슬 반항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렇게 마음의 할례를 인간이 하지 못하고 주님만이 하시는데, 아니 주님만이 하시고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을 두고서 이렇게 불살라버리면, 도대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는 것이다.

그런 반발이 충분히 예상되는데, 하나님이 복음을 주셔야 복음대로 살든지 할 것인데, 우리에게 복음을 주지도 않고 복음을 받지 않았다고 닦달을 내면, 우리는 이렇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도대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신약에 가면 답변이 간단한데, "너희는 버림받기로 작정이 되었기에 버림받는데 있어야만 하고, 이들은 구원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기에 구원받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로마서에서는 그렇지만, 하지만 구약에서는 이렇게 하는 의도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너희들을 사랑했잖아" 라고 하는, 사랑의 근거를 가지고 그 이유를 들이대는데, 즉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이렇게 사랑을 했는데, 너희들은 그 사랑을 준 분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온통 관심사가 사랑이 없는 쪽으로 가버렸다" 라는 것이다.

(롬 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과연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주지 않았는가?

좀 어려운가요? 쉽게 하자면, 아까 제가 인간들이 뭐라고 반발한다고 했는가? 뭘 주지도 않고 닦달을 내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무엇을 주어도, 그것이 우상에게 자꾸만 가도록 되어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주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상에게 받았으면 받았지 말이다.

그러므로 말라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에서는 미워했지만 야곱은 사랑했다. 그런데 야곱, 즉 이스라엘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대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딴 곳에 팔고 있는데, 사랑은 이쪽에서 받아놓고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다는 말이다.

(말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따지는데, 그렇게 교회에 가지 말라고 외칠 수 있도록 심장과 생명과 햇빛과 공기를 누가 주었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말이 받은 것이 있어야 고맙다고 하다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주었다는 말이다.

다른 민족들은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서 저주의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셨는데, 은총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앗수르가 쳐들어 왔을 때도 그렇고, 계속해서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이 오는 족족 엄청난 핍박을 하고 결국은 죽이기까지 하고 말이다.

◈ 받기는 하나님께 받고, 감사는 마귀에게 하는 인간 !!

그러니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개판인지, 무엇을 주면 주시는 분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 기본적 상식인데, 받기는 하나님께 받아놓고 감사는 우상에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돌아서서 "하나님, 언제 주셨는데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강력한 '소유성' 인데, 아무리 주었더라도 일단 받았으면 '내 것' 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욥은 반대로 말했는데, "주신 자로 하나님이고,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주신 자는 하나님일지 몰라도, 거두신 자는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점점 더 자신의 유혹자가 !!

아무튼 인간은 일단 받으면 자기 것이 되는데, 그래서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자기에게 유혹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신봉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배트맨인데, 자기가 점점 더 굳혀져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에, 광야에서 아무리 만나를 주고 아무리 메추라기를 주어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이다. 하나님은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주었는데, 그런데 인간은 엉뚱한 곳에 가서, 즉 마귀에게 기서 빌면서 고맙다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신약의 성도들은?

그러면 신약 때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가? 신약 때 인간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들도 디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어도 매일같이 자기 구원밖에 생각하지 않는 인간들인데, 그런데 고맙게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불쌍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원을 받는데, 그래서 성도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즉 예수님의 공로로 돌린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마음의 할례가 없으면 이방인 !!

** 하나님이 이처럼 자기 민족을 벌하시는 이유는,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민족에 대한 징벌이라는 아브라함의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육신에 새긴 할례는 무용지물이다.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면 이방민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적이 된다.

(렘 9:2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렘 9: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에스겔에 나타난 주의 이름은 무엇인고 하니, 불로서 심판하셔서 인간이 얼마나 심판을 받아서 마땅한지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는데, 그러면 다니엘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지, 이제 우리 교재 79페이지에 나오는 '다니엘이 본 최후의 전쟁'을 통해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다니엘이 본 최후의 전쟁] -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누가 가리고 있는가? 인간들이 가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서서 자기 공로와 권리와 주장을 떠벌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가리는 이런 사탄적인 사태를 그냥 보고 계시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격에 대항해서 인간들이 자기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힘을 집결해서 끝까지 반항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도대체 인간의 배후에는 누가 있어서 인간세계에 이런 심성을 심어놓았는가? 이 점에 대해서 다니엘 선지자가 알려주고 있다.

◈ 다니엘이 본 최후의 전쟁 !!

도대체 인간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마귀는 천사인데, 물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마귀가 이 지상에 업적과 실적을 남기는데, 그런 업적과 실적이 바로 막강한 '세상나라' 라는 것이다. 그것이 다니엘서에서 처음으로 밝혀진다는 말이다.

◈ 하나님 이름에 대항한 지상나라를 고발 !!

에스겔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없으면 작살이 난다는 내용이고, 그런데 이 다니엘에 들어오면, 그렇게 작살내시는 하나님이 대해서 인간들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항해서 이 지상에다가 자기 나라를 굳건하게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음을, 그것을 고발하는 것이 바로 이 다니엘서의 취지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틈바구니에게 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인데, 오도가도 못하고 완전히 치이게 된다는 말이다. 이 '치인다' 라는 말이 적당한데, 아무튼 그러한 하나님과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그렇게 치이고 또 치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스겔에게 있어서 바벨론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에 불과한데, 그런데 다니엘에 들어가면 이 바벨론 자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덤벼드는 독자적인 지상나라가 되는데, 즉 지상제국을 건설하는 주체로 등장한다는 말이다. 미리 앞당겨서 보는 요한계시록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 인자의 고난, 고난받는 메시야 !!

그러한 이 지상의 막강한 힘과 주의 이름의 틈바구니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고난을 받는데, 그것이 무슨 고난인고 하니, 바로 '인자의 고난' 이라는 것이다. 그 인자의 고난이 그대로 오려져서 장차 오실 메시야에 그대로 상표를 부치듯이 그렇게 붙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그 메시야는 바로 고난받는 메시야라는 말이다.

이렇게 고난받는 메시야가 되면서 다니엘에 나오는 국가, 즉 짐승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지는데,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는 이유는 이 세상 자체의 정체를 까밝히기 위해서, 그것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다니엘서를 성취해야 하니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누군가가 질문하기를,

* A : 목사님, 예수님은 왜 자기를 인자라고 했습니까? 간단하게 한 마디로 말씀해주세요.
* B : 예, '고난받는 자'이기에 인자라고 했습니다.
* A : 그렇다면 그게 무슨 뜻인가요?
* B : 예,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되기 위함입니다.
* A : 그렇다면 다니엘에는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 B : 먼저 계신, 즉 영원하신 천상에 계신 분이 인자라는 명칭으로 오되, 이 땅에서 다니엘처럼 고난받는 인자로 오십니다.
* A : 그러면 목사님이 하시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 B : 고난을 받거든 그분이 다니엘의 인자라고 보면 되는데, 그 고난받는 분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 A : 왜 꼭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 B : 메시야가 고난을 받지 않으면 이 세상이 짐승의 나라라는 것이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입장만 생각해서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안 되는데, "저는 교회에 잘 다니니, 힘들게 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사용할 때 고난받는 인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고난받음을 드러내는데, 편안하게 드러낼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 주님의 숙제 - 이 세상이 짐승의 나라임을 !!

우리가 주님의 숙제를 좀 이해를 해주어야 하는데, 주님은 누구보다도 자기 숙제에 충실하신 분임을 말이다. 그러니 "주님, 우리의 행복을 좀 지켜주세요" 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분명한 자기의 숙제가 따로 있으니 말이다. 그 숙제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이 짐승의 나라임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은 교회에 나올 때 자기 자신밖에 모르니, "나는 중요해, 나는 중요해, 나는 중요한 존재야" 라고 하면서 온다는 것이다. 100%가 말이다. "하나님, 오늘도 중요한 이 존재가 더욱더 중요함을 인정받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라고 말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속해있는 세상나라의 정체를 밝히는 일까지 하시니까, 목회자는 그것까지도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런 세계 속에 놓여있는데, 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가 아니라, 그 일을 하시는 그분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 행복이란, '나' 라는 존재가 중요하지 않아 !!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말이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처럼 마음 편한 것이 없는데,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너무 중요시하기 때문인데, 우울증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자기에게 너무 집착하기에 생기지, 그렇지 않으면 우울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뛰어내릴까? 아파트 꼭대기에서" 라고 하면, "니가 뛰어내리던 말던 알아서 해" 라고 하면 그만인데, 그러니 얼마나 가뿐하냐는 것이다.

◈ 다니엘서 - 하늘과 땅의 시간이 만나기에 !!

지금부터 하려는 것이 좀 중요한데, 다니엘에서의 시간 개념이 참 어려운데, 이것이 다니엘서에 등장하면서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니엘이 기도하기를, "주여, 70년의 기간이 언제 끝나서 우리가 행복하게 본토로 되돌아갑니까?" 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일은 없는데, 그것은 니가 생각하는 시간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시간층이 서로 다른데, 지상에 있는 시간층이 있고 하늘나라의 시간층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시간층을 이 지상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지상의 시간층은 인간들의 자기 몸이 만들어내는 시간층인데, 그것이 확대된 것이 지상의 시간층이란 말이다. 즉 인간의 자기 몸의 욕구가 요구하는 시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아, 이 지루한 시간이 빨리 끝나고 놀러갔으면 좋겠다" 라고 말이다. 이것이 자기만의 시간인데, 옆에 있는 사람은 모른다는 것이다.

◈ 하늘의 시간 - 인자를 보여주는 시간 !!

이렇게 사람은 각자 각자 자기 시간이 있는데, 그 빠르기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같은 장소에 앉아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자기는 지루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빨리 가고 말이다. 우린 인생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우리의 시간들은 각자 자기 몸을 위한 시간이지만, 그러나 하늘의 시간은 인자가 되신 분을 위한, 즉 인자를 보여주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시간은 자기 몸을 드러내기 위한 시간이라면 하늘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시간이란 것이다.

◈ '70이레'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다니엘이 "70년이 언제 끝납니까?" 라고 물었는데, 하나님은 "끝나기는 개뿔(?)로 끝이 나나. 끝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70이레' 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그런데 이 70이레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70이레는 이 지상의 시간대가 아니니 말이다.

70이레이니, 70곱하기7인데, 그러면 490년이 되는데, 이 490년을 기다리는 것이 누구인고 하니, 인간 자기 자신의 몸, 즉 다니엘 자신의 몸인데, 하지만 490년을 지나가 봐야 마냥 그 몸이 그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시간은 안 되고, 인간의 몸은 사라지고, 주인공인 예수님이 등장하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시간이 되어도, 자기 몸이 살아있는 한 그 시간은 지상에 속한 시간이지, 하늘에 속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몸이 살아있으니 자꾸 엉뚱한 시간을 !!

무슨 말인고 하니, 시간이라는 것은 그 시간을 몰고 다니는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즉 시간이라는 것은 '째각째각' 하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째각째각' 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째'와 '각'으로 나누어지는데, 누가 나누는가? 자기의 몸이, 즉 인식이 나눈다는 말이다. 이런 것은 오류인데, '째'와 '각'의 사이가 몇 초인가? 그러니 그런 것이 의미가 없는데, 다만 자기가 그렇게 느꼈을 뿐이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는 누가 있는가? 자기가 살아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시간은 자기 몸을 위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몸의 빠르기와, 자기 몸의 리듬과 관련된 시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490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인데, "아, 이번 주일날 은혜를 받아야 할 텐데" 라고 해도, 그 주일날에는 자기 몸이 가는데, 그렇게 몸이 교회에 앉아있는데, 이렇게 자기 몸이 은혜를 받는 것 때문에 토요일과 금요일에 은혜를 받는 것을 다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관심사가 자기가 주일날 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토요일과 금요일에 받은 은혜는 은혜도 아니고, 목요일 받은 햇빛은 감사하지도 않고, 그리고 수요일에 받은 빗물은 고맙지도 않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시간을 몰고 다니는 주인공이 자기 몸이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하늘에서 내려오는 시간으로 !!

진짜 제대로 된 하늘의 몸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서 나오는 시간인데, 아까 말한 것과 같이 "때와 기한은 너희가 알 바가 아니요, 너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인격이 되어야만 하는데, 하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그런 인격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기존의 인격을 가지고 매일같이 시간을 계산하는데, "주여, 1999년 9월 9일에는 주님이 재림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몸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그렇게 시간을 계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제 아무리 이장림처럼 숫자를 계산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70이레 - 아이쿠, 감사합니다 !!

성경이 참 어려운데, 70이레가 다가왔을 때 다니엘서의 경우에는 "아이쿠,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끝을 내어버렸다는 것이다. 너무나 좋아서 말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시간은 완료된 상황인데, 이렇게 완료된 상황이라는 것은 자기가 실행에 옮기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인데, 저쪽에서 알아서 다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다. 마치 이사를 할 때, 자기가 직접 짐을 꾸리지 않아도 맞춤이사를 부탁하면 일군들이 바구니를 가지고 와서 다 알아서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약속이 먼저 '내' 속에 침범하게 되면, 물론 사람들은 나름대로 각자 자기 시간이 다 있는데, 그래서 다니엘이 "주님, 언제 돌아가야 합니까? 이미 70년이 다 되었지 않습니까?" 라고 다리를 벌벌 떨면서 기도를 하니, 거기에 뭐가 침투하는고 하니, 그럴 필요조차도 없는 새로운 약속의 시간이 침투해버리니, 다니엘이 벌벌 떨다가 "에이, 인자의 나라가 오면 끝난 이야기인데, 난 그것도 모르고 기다렸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시간대가 와서 자기를 묵사발을 만들어버리니,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던지, 설령 목 베임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죽어도 좋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먼저 다 보았으니 말이다.

◈ 변화산 사건 - 미리 보는 예수님의 별세 !!

이것을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변화산 사건' 인데, 이 변화산에서 시간을 미리 당겨보았다는 것이다. 거기서 주님께서 해같이 빛났는데,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는데, 즉 자기 시간대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아직 남아있다" 라는 것인데, 한 가지 무엇이 더 필요한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별세' 라는 것이다. 이미 완료된 약속이지만,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아직 지상의 시간이 또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완료된 것을 위해서 미완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제자들은 산밑으로 내려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증거하고 나서, 다시금 해같이 빛나는 엘리야도 만나고, 모세도 만나는, 그러한 세계로 다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베드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 예수님을 미리 보고 즐거워한 아브라함 !!

우리가 아브라함을 공부해보면서 느끼는 것이, 아브라함은 참으로 못나고 변변치 않은 인간인데, 물론 다른 인간들도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천국에 가서 있는데, 거기에서 거지 나사로와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와버리면, 그 사람은 못나도 이미 천국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알아서 그를 다루신다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에도, 정작 본인은 약속의 땅에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무엇이 그렇게 잘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변화산에 보니까, 모세도 이미 와있고, 엘리야도 와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고 말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러니 먼저 믿은 신앙인들이 거기에 다 모여있는데, 그 다음이 우리 차례인데, 그런데 이렇게 우리 차례라고 말하려면, 이미 완료된 상황이 우리를 지배해서 우리의 개인적인 시간을 완전히 박살내고, 주님의 자기 시간만을 고집하는 현상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완료된 시간 말이다.

그래서 사람이 얼마나 오래 동안 건강하게 살았는지 하는,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주께서 자기의 의를 위해서 우리를 죽인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것도 감사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80페이지를 보자.

** 다니엘 선지자는 이스라엘마저 삼켜버린 막강한 힘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그런데 거기서 막상 알고 깨달은 것은 이 나라들이 짐승의 나라라는 점이다.

◈ 주께서 꿈을 꾸도록 !!

어제 오후설교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을 마주치도록 하셨는데, 아니 다니엘이 도대체 무슨 힘으로 그 바벨론을 이기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꿈을 꾸도록 해서, 그 느부갓네살이 꿈의 해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니엘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즉 "다니엘아, 내가 꾼 꿈을 좀 해석해다오" 라고 하도록 말이다.

요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무슨 빠삐용도 아니고 어떻게 감옥을 탈출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직접 왕에게 작용하는데, 왕이 꿈을 꾸게 해서, 그 꿈 해석을 위해서 잡아서 가둔 자가 도로 요셉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국무총리까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셉은 그냥 가만히 있다가 들어갔다가, 또 가만히 있다가 나왔다가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말이다. 즉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모두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운짐다는(애타는) 것은 불신자들인데,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놓고 우리는 복음만 전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복음만 전하면서 살아가면, 불신자들이 운짐이 달아서 도와달라고 하고, 살려달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다 알아서 처리를 하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도넛츠 안에 초코릿 덩어리가 들어있는데, 이 조그마한 초코릿 덩어리가 자기가 도넛츠가 될지 안 될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죽을 휘휙 젓고 하는 것은 모두 요리사가 알아서 하고, 자기는 그 안에 가만히 들어있으면, 도넛츠에 초코릿이 박혀서 나온다는 것이다.

◈ 세상 만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

다시 말해서, 이 세상 만사가 복음위주로 돌아가는데, 그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마치 여기에 이렇게 소용돌이가 친다고 하면, 여기에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있다면, 우리 성도들은 같이 소용돌이와 따라서 흔들리지만 그와 반대방향으로 흔들리며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흔들려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하여 빨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 있어서 조금의 흔들림이 있다고 해도, 그 모든 방향이 주님의 소용돌이로 나가는 것이니까, 아무리 사업이 망하고 밥먹듯이 병원에 입원을 해도, 지금 빨려들어 가고 있는 쪽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방향으로, 즉 주의 이름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그것이 곧 행복이 아니냐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바로 이 그림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 그림만 있으면 에베소서가 다 뚫리고, 물론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인데, "아하, 소용돌이구나. 그리스도로 통일이 되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 여기 그림에 있는 A라는 사람은 창세 전부터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위해서 선택이 되었는데,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기능인데, 그것을 위해서 선택이 되어서 그 소용돌이 속에서 2007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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