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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4월 21일 강의 칸트의 윤리강의[신학]

대구 4월 21일 강의 칸트의 윤리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421 칸트의 윤리

첨부파일 : 칸트의 윤리.hwp (24.5K), Down:21

우리교회(IP:124.♡.85.92)

08-04-21 19:46

우리교회(IP:220.♡.176.141)

08-06-18 17:28

대구080421칸트의윤리

08 대구강의 - '칸트의 윤리'에 대해서

08,04,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교회가 전하는 말씀 대신에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칸트의 윤리'에 대해서 하겠는데, 1724년에 태어나서 1804년까지 활동한 독일 철학자인데, 그 당시는 유럽에서 과학기술이 부상하면서 신이 주신 인간의 가능성이 대단하다고 활개치는 동시에, 교회의 권위는 급속도로 폭락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폭락이 종교개혁 이후 독일의 경건주의가 일어나기 전에, 사실은 처음부터 진리를 얻기 위한 교회가 아니었고, 자기 신분의 상승과 전제군주를 뒤엎어 보자고 하는 모임을 통해서 교회가 커왔기 때문에, 즉 교회가 순수하지 못한 목적을 가지고 유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그런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교회는 그야말로 '토사구팽(兎死狗烹)' 인데, 즉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는 말이다.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고 하니, 칸트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가는데 있어서 더 이상은 교회의 도움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제 인간 이성의 시대인데, 그래서 이성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가 있는데, 왜 교회가 과거의 천주교처럼 그렇게 교회나 목사의 권위를 가지고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로부터의 자유인데, 그렇게 해야 완전한 자유라는 말이다. 물론 천주교도 그렇게 되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신과 자기 자신이 일대일의 만남인데, 즉 교회가 아니라 이제는 자기가 신의 뜻을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 도대체 바르게 산다는 것은?

이렇게 되면 윤리적인 문제가 야기되는데, 즉 신의 뜻대로 살지를 못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떻게 해야 제대로 사는 것인지, 도대체 인간이 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칸트가 이야기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공부를 해보면서, 성경말씀을 보지 않고서도 과연 인간이 신 앞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완전한 거룩을 이룰 수가 있는지, 그런 방법을 제시한 것이 바로 칸트의 윤리라는 것이다. 성경이 없더라도 말이다.

◈ 진리가 중요한가? or 내가 중요한가?

여기서 칸트의 윤리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칸트의 약점을 미리 이야기하면, 그것을 제가 적어볼 테니, "진리가 중요한가? 아니면 내가 중요한가?" 라는 것인데, 과연 어느 쪽이 중요한가? 분명하게 진리가, 즉 무엇이 제대로 된 현실인지가 중요한데 말이다. 그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스데반 집사의 경우에도 자기가 사는 것보다 진리가 중요했고 말이다.

◈ 칸트의 윤리가 자꾸 '나, 괜찮지'로 몰려버리니 !!

그런데 칸트의 이성에 있어서 이 윤리를 공부해보면, 이상하게도 참되고 아름답고 옳은 것을 추구하면서도 이 윤리가 전체적으로 어디로 몰려가는고 하니, 그 분위기가 "나는 괜찮지. 나는 훌륭해" 라는 쪽으로 몰려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몰려가게 되면 그만 자기 자신이 중요하게 되는데, 그래서 칸트 이후에 피히테와 셀링이 나오는데, 주체사상, 즉 자아 중심의 그러한 사상으로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즉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지" 라는 쪽으로 말이다.

성도라면 당연히 교회에 나오면서 진리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와야 하는데, 즉 "진리가 이러하니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라는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그런데 "오늘도 내가 왜 중요한지 확인을 하려고 왔다" 라고 하면서, 그러니 교회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삐치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대해서 점점 멀어지고 말이다.

◈ 근대국가 - 시민들의 의식까지도 !!

관심이 진리에 대해서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에게 관심을 둔 그것이, 지금 우리가 칸트의 윤리를 공부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칸트의 주체의식이 근대 국가관에 연결이 되고, 1789년에 말이다. 그러한 근대의 국가관은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영향을 주어서, 고대의 동양의 국가관마저 산업혁명에 의해서 서구의 근대 국가관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근대 국가' 라고 하는 것은 행정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국민들의 사고방식도 근대 국가관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칸트가 말하는 윤리로 그 사고방식이 바뀐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칸트의 윤리는 단순히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말하는 그런 윤리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말리아나 카메룬 등이 언제 국가가 제대로 있었는가? 2차 대전 이후에 독립을 했지 말이다. 그러니 국가가 하나의 독립적으로 움직이려면 거기에 따르는 행정적이고 법적인 체제를 이미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하고 있는 것을 수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드디어 고문관의 등장 !!

다시 말해서, 외교나 교육 등을 이야기하고, 물건을 하나 수입을 해도 다 그런 법적인 체계들이 필요하고, 그런 것들이 다 행정적인 법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까지도 일일이 다 가르쳐 주는 것을 두고서, 흔히들 군대에서 이야기하는데, '고문관'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1945년에 해방이 되고 나서 누가 이런 고문관 역할을 했는가? 미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제의 앞잡이들을 그렇게 욕을 해도, 미국에서 파송한 군정에서 그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행정적인 서류를 작성하는 법까지도 그들이 이미 근대국가의 맛을 보았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총을 쏘고 군대조직은 좀 알지 몰라도, 이런 외교나 행정적인 것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도로는 어떻게 내어야 하고, 신호등은 어떻게 달아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런 것이 근대국가에 합당한 '근대시민 만들기' 인데, 이것이 바로 칸트의 주체윤리의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교인들은 칸트의 윤리로 중무장한 체로 !!

그리고 오늘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 대한민국의 근대시민으로서 살아가는데, 그 말은 어릴 때부터 그런 칸트의 윤리교육을 좋든지 싫든지 간에 받으면 자랐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칸트의 주체윤리로서 완전무장이 되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이러한 공부가 얼마나 중요하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윤리관을 가지고서 성경말씀을 들었다고 하면, 그러니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에 관심이 없고, "내가 얼마나 훌륭한가?" 라는 쪽으로 성경말씀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틀을 공부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또 이것을 멀리 인천의 원당에서 구 목사님이 돈까스 집을 하면서도, 하루종일 그렇게 배달을 하고 피곤할 텐데 이렇게 녹취를 해주니까, 한 편으로 부담이 되면서도 마음을 푹 놓고서 강의를 하는데, 아무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같이 느끼는 보람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목회도 한다고 하는데, ㅋㅋ)

이제 우리 교재 첫 부분을 보자.

** 칸트의 윤리는 인간이 유한하고 불완전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실 이것이 중요한데, "인간이 유한한 것이 꼽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인간이 이렇게 유한하고 불안정한 것을 죄라고 여기는가? 여기에는 죄라는 개념은 없고, 그냥 아쉬울 뿐이라는 것이다. "잘 할 수가 있는데, 잘하면 신이 될 수 있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너무 욕심을 내지 말고 신에 가까이 가자는 것이다.

◈ 다만, 아쉬울 뿐 !!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즉 "저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라는 것은 없고, 마냥 아쉬워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짐승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천사처럼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인간의 어떤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나온 윤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최선을 다하면, 노력한 만큼 성숙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우리가 흔히 듣던 '성화론' 인데, 정말로 닮지 않았는가? 이런 것들이 현대에 들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다 있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만약에 인간이 신이라면, 억지로 통제해야 할 충동이 전혀 없음으로 '자기 강제' 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신이라면 자기 강제, 즉 자기 통제가 필요 없지만,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인간 스스로 통제를 해야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성은 쉽게 말하자면, 따져서 분석하고 다시 한번 반성하는, 즉 이렇게 이성에는 반드시 반성하는 기능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옳고 그런 것을 따져서 나쁜 것은 제거하고 좋은 것은 더욱 더 장려해서, 그 다음에는 보다 더 나은 발전된 성품과 인격을 고양하고 갖추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이 땅에서 신의 자녀로서 해야할 마땅한 도리라는 것이다.

◈ 목사님, 저는 근대시민인데요?

아무튼 여기에는 죄에 대한 관념은 없는데, 소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근대국가에서의 시민인데, 바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교회에 나왔다면, 그렇다면 이 교회에서 목사의 말씀을 통해서 한 수 배워서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려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장부정리(?)를 통해서, 자기의 장점은 점점 더 늘이고, 단점은 줄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이 보다 더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떤 설교가 먹혀들겠는가? 그러니 "당신은 가면 갈수록 추잡한 인간입니다" 라는 소리를 하면 안 되는데, 즉 "당신은 죽은 자입니다" 라고 하면 말이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면 할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사실상 그런 소리가 아니라면 그런 사람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말이다.

여기서 칸트의 윤리를 다시 정리해보면, 이성에 의해서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 통제, 즉 자기 절제를 해야 하는 윤리, 그것이 바로 근대국가가 요구하는 근대시민으로서의 바람직한 상(像)이라는 말이다. 그런 시민이 되지 않으면 근대국가는 무너진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칸트는 법(法)과 덕(德)을 구분하면서, 법은 오직 형식적 조건에만 관계하지만 덕은 선택 내용, 즉 대상에 관계한다고 한다. 따라서 법은 순전히 외적 자유에만 관계하지만, 덕은 선택의지의 대상에 관계하므로, 덕은 내적 자유, 즉 목적의 설정을 자신의 영역으로 가진다.

무슨 말인고 하니, 법은 형식뿐이고 실제로는 내용이 덕스러워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 이렇게 칸트를 공부해보면 하나하나가 옳은 소리이고 바른 소리라는 것이다. 그에게서 틀린 것을 끄집어내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래서 칸트는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서 계속 분류에 나서는데, 나중에는 분류를 너무 많이 해서 헛갈려서 그림으로 그려야할 정도라는 것이다.

◈ 분류하고, 또 분류하고 !!

칸트는 이렇게 철저하게 분류를 하는데, 그러면 왜 그렇게 분류를 많이 하는고 하니, 칸트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고 하니까, 그렇게 법은 형식이라고 해놓고는 실제로 그가 윤리를 대체하는 모든 과정과 방법을 보면, 모두가 다 법적이라는 것이다.

제가 말하는 것은, 칸트에게 있어서 이 법이 형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좋아하는 법의 성품이 모든 내용 속에 분류작업을 통해서 다 정리단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이라고 하는 것이 법 조항만이 법이 아니라, 그런 법 조항이 나오기까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즉 그렇게 칸막이를 치는 합리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법적인 인식에서 나왔다는 것을, 그것을 칸트는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칸트가 왜 이렇게 분류를 시키는가? 그것은 섞이면 안 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섞여버리면 선과 악이 구분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매일같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데, 이것이 칸트의 바로 주장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칸트는 '윤리학 원리론'에서 자신에 관한 의무와 타인에 관한 의무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분류가 시작되는데, 하도 분류가 많기 때문에 하나 하나 정리를 해보면, 첫째는 자기를 위한 의무인데, 이렇게 칸트의 윤리는 의무라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위한 것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는 섞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가 타인을 위한 의무인데, 이 의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라' 라는 것인데, 즉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라는 것이다. 요즘 박근혜가 매일같이 하는 말이 이런 '실천하라' 라는 것인데, 이명박 파와 박근혜 파가 없다고 그렇게 말로만 하지 말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자신에 관한 의무는 다시, '자기 자신의 완전한 의무에 대하여'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불완전한 의무에 대하여'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또 분류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런 분류가 어디까지 가는지 궁금한데, 아무튼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는 와전한 의무와 불완전한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벌써 이것만 이렇게 해도 우리가 기분이 나쁜 것이 왜 자꾸 이렇게 쪼개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쪼개는 저의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칸트가 이렇게 쪼개고 세분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즉 자기는 깊이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있음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쉽게 예를 들어서, 엄마가 아이를 야단치는데,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엄마 : 야, 너 잘못했지?
* 아들 : 예, 잘못했습니다.
* 엄마 : 그러면 무엇을 잘못했지?
* 아들 : 그냥 잘못했습니다.
* 엄마 : 하나하나씩 이야기해봐?
* 아들 : 그냥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 엄마 : 아니, 조목조목 이야기를 해보라니까?
* 아들 : ? ? ?

사실은 이렇게 무조건 잘못했다는 것은 반성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인데, 그냥 그 순간만을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지 말이다. 진짜 반성을 하게 되면, 조목조목 따져서 반성을 하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 이성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칸트에 의하면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그렇게 두리뭉실하지 말하지 말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제 누구하고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그런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모두 다 밝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요구하신다는 말이다.

* A : 무엇을 잘못했지?
* B : 예, 어제 사람을 만나서 실수를 했습니다.
* A : 무슨 실수인데?
* B : 예, 그 사람에게 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 A : 그러면 그 사람에게만 잘못된 것인가?
* B : 예, 그 사람에게만 그런 잘못을 했습니다.
* A : 그렇게 나쁜 말을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닌가?
* B : 예, 그렇군요.

그렇게 남에게 욕을 한다는 것은 남에게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자기에게 해야할 자기 책임,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깨닫는, 그렇게 해서 한층 더 깊이 있는 반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지고 들어가면 말이다.

칸트는 이렇게 계속해서 따지고 또 따지고 들어감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해야될 의무를 그렇게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해야할 일이 그렇게 많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제대로 다 해주어야, 그렇게 해야만 근대시민으로서 훌륭한 자질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 분류를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이렇게 머리가 아파 오는데, 왜냐하면 일단 이렇게 쪼개 놓으면 어디에 해당되는지가 헛갈린다는 것이다. 이미 벌써 4개나 되는데, 자기와 타인의 의무, 또 각각의 완전한 의무와 불완전한 의무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리고 자기 자신의 완전한 의무는 다시 '동물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오직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로서 나누고 있다.

이렇게 또 나누고 있는데, 즉 인간의 완전한 의무에는 동물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윤리도 하면서 또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것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를 통해서, 즉 "인간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되고 이러 이러해야 한다" 라는 것까지 밝혀내고 있는 작업에, 거기에 칸트는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칸트가 보기에, 이러한 철학이나 윤리도 공부하지 않고 텃밭이나 가꾸면서 밥이나 먹고사는 인간은 어디에 속하는고 하니, 타인의 의무나 이런 것을 전혀 모르니 거의 동물에 가깝다는 것이다. 즉 인간답지 못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 이제는 윤리가 교회를 대체 !!

그러니 그 당시에 교회에서 목사나 신부가 하던 것을, 이제는 윤리를 가지고서, 즉 철학이나 인문과학 등을 가지고 자기 양심대로 살면, 더 이상 교회라는 것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이제 양심 것 살아가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근대국가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그 어떤 신적인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가 알아서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더 나아가면 자기가 신이 되고 말이다. 칸트가 살고 있는 독일의 경우에 종교개혁이후에 태어날 때부터 세례를 받으니 다 신자인데, 하지만 이런 근대국가와 시민에 대한 개념 등이 등장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출석숫자는 급속도로 추락하듯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1900년 중반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 일하기 바빠서 교회에 나오는 숫자가 더 떨어지고 말이다. 독일의 이진주 특파원(?) 보고에 의하면, 요즘 독일에서는 예배당에 가면 건물을 커다란데 노인네들만 몇 명만이 앉아 있고, 그리고 교회당의 대부분은 장사가 되지 않아서 임대를 주어서 나이트클럽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목사님, 동물적인 의무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적인 것을 말하지 싶은데요?

물론 그러한데, 그리고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보다도 못하고 무지하니 말이다. "아이쿠, 목사나 신부 꼬라지들 한번 봐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전부가 다 개판인데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배우겠느냐는 것이다.

이슬람교이든 불교이든, 그 어떤 종교이든 간에 종교의 특징은 칸트가 말하는 그러한 윤리와 도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빌면 부자가 된다" 라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고상한(?) 칸트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복을 달라고 비는 그런 천박함이 말이다.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자기처럼 그렇게 윤리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리고 자기 자신의 완전한 의무는 다시 '동물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오직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로서 나누고 있다. 전자에는 자살, 욕정, 부절제 등을 피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후자에는 거짓말, 탐욕, 비굴 등을 피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 내 속에는 순결한 천사가 !!

여기에서 동물적 의무라는 것은, 자기는 짐승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항상 살아가면서 "나는 짐승이 아니야. 나는 결코 짐승이 될 수 없어" 라는 것으로, 그러므로 자기는 매춘부와 같은 그런 여자와는 같이 놀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원숭이들이나 하는 짓이니 말이다. 매일같이 짝짓기나 하고 말이다. (원숭이에 대한 폄하발언?)

그리고 도덕성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 신이 있다는 것인데,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가 있다는 것인데, 즉 자기가 천사라는 말이다. 나쁜 천사가 아닌 순결한 천사라는 말이다. 이것을 항상 염두에 주고 살아야 그것이 바로 신자다운 것이란 말이다.

◈ 역시 칸트님이 최고야 !!

이런 칸트의 주장을 가지고 요즘 사경회를 하면 교인들이 엄청 좋아하지 싶은데, 평소에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적인 본성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을 해주니 말이다. "나는 짐승이 아니야. 그래서 저런 짓을 하면 안 돼. 음란비디오도 보면 안 돼. 길에 침을 뱉어도 안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는 누구인가? "나는 순결한 천사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천사가 있다" 라고 하면서 돌아다닌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만 다니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가씨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그 남자에 대한 충격으로 심지어 우울증까지 걸리곤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천사처럼 살았는데, 그래서 남자라고 하면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되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처럼 굳이 천사까지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짐승과 같은 남자가 와서 자기와 함께 산다면, 도대체 자기의 품위는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추락된 자기의 품위를, 즉 자기 자존심을 무엇으로 보상을 받느냐는 것이다. 이미 결혼을 했기에, 그래서 빼도 박도 못하고 말이다.

◈ 결혼할 생각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

과거에는 "결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결혼할 생각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라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알겠지요? 너무 어려운가? 이제는 결혼이라는 말 자체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말이다. 즉 이제는 결혼이라는 것이 아예 중요하지 않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리고 자기 자신의 불완전한 의무는, 자신의 자연적 완전성의 발전과 증대에 향한 의무와 더불어서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을 고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여기 불완전한 의무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러한 존재이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사람은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인데, 즉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지 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의 의무가 불완전한 의무, 혹은 불완전한 윤리인데, 즉 "너는 태어날 때부터 짐승은 아니야. 천사이어야 해" 라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를 다, 즉 자기를 위한 의무를 제대로 감당을 해달라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 더더더더더더 !!

그러니 인간은 이렇게 끊임없이 갈등하는데, 여기서 칸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만하면 되었겠지"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계속해서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더더더더더더" 라고 하면서 완전을 행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성화론이 아닌가? 더더더더더 완전을 행해서, 즉 진선미를 향해서 말이다. 그러니 "제가 나아갈까요?" 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나아가야 한다" 라는 것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무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의무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자유의지로 도덕적 의무를 수행할 때 !!

그렇다면 그 자유의지를 누가 주었는가? 신이 주었는데, 그러한 자유의지를 "이만하면 되었겠지" 라고 여기라고 준 것이 아니라, "더더더더더더" 라는 것 때문에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의 도덕적 의무를 수행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상세계, 즉 천국이 말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천국을 목적적 나라, '선의 나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러한 칸트가 교회에 가서 목사의 말을 듣겠는가? "빌면 복을 준다" 라고 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소리나 하는데 말이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하는 미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인에 대한 의무를 좀 살펴보면, 그것이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는데, 왜 그런고 하니 나중에 자기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수습한다고 칸트가 애를 먹고 말이다. 이 타인의 의무에는 위배가 되지 않지만 자기에 대한 의무에 위배가 되는 경우가 있고, 물론 그 반대도 있고 말이다. 칸트 자신도 헛갈려서 나중에 골치 아픈 문제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타인에 대한 덕 의무에 대하여는 '오직 인간으로서 타인에 대한 의무에 대하여'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의무에 대하여'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보면 이렇게 또 둘로 나누어지는데, 타인에 대한 의무는 타인 자체를 향하여 의무를 행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타인에 대해서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반면에, 자기와 타인 사이에 서로가 행해야 될 공통적인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니가 어떻게 하든 간에 내가 해줄게" 라는 것이고, 후자는 "내가 너에게 해준 만큼, 너도 나에게 해줘" 라는 것이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이 되는 상방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맞선을 보는데, "상대방에 나오든 말든 간에 나는 무조건 나간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선을 보는 것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둘이 만나야만 퇴짜를 놓던 말던 간에 선을 보는 것이 되지 말이다. 아니, 자기 혼자 덜렁 나가서 TV나 보고 있으면 되는가? 그러니 아무튼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전자의 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 '타인에 대한 존경의 의무'로 나누어지는데, 이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란 친절, 감사, 동정의 의무를 말하고, 그리고 후자는 오만, 험담, 비굴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가 여기에 속한다.

여기에서 또 타인의 의무가 사랑의 의무와 존경의 의무로 나누어지는데, 사랑의 의무는 "니가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내가 사랑해줄게" 라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존경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이쿠, 불쌍한 것, 내가 해줄게" 라고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존경의 의무는 무엇인가? 사랑의 의무처럼 그렇게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쿠, 존경스러워라" 라는 것으로, 그렇게 존경할 때는 자아를 잊어버리게 되는데, 그것은 앞에서 말한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에게 해주는 의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아직도 분류가 계속되는데, 교재를 보자.

** 대체로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타인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라고 할 수가 있고, 타인에 대한 존경의 의무는 '완전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의무의 성격을 말하는 것인데, 사랑의 의무는 불완전한 의무이고, 존경의 의무는 완전한 의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존경이라는 것은 자기를 의식해서 하는 것이 아닌데, 상대방을 존경할 때는 자기를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잊어버리니까 더 줄 것이 없는데, 존경하니 말이다.

그런데 사랑의 의무는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상대방에게 뭔가를 자꾸만 해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해주어도 항상 모자란다는 느낌이 드는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그러한 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말이다. 뭔가를 해주어도 항상 미흡하다는 것이다. 자식들은 그것도 모르고, "부모가 되어서 그것도 못해주나" 라고 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맞벌이를 한다고 했을 때, "엄마, 왜 늦게 들어와?" 라고 하면, 엄마는 "아이쿠, 미안하다. 앞으로는 일찍 들어올게" 라고 하면서 아이를 챙기고 또 챙긴다는 것이다. 부모는 그렇게 항상 퍼주어도 모자란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부모가 자식을 보고서 "아이쿠, 존경한다" 라고 하겠는가? 그러니 존경이 아니라 사랑의 의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사랑의 의무와 존경의 의무가 충돌을 !!

나중에 나오지만 이런 의무가 무엇과 충돌이 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피아니스트의 경우에, 자기가 피아노를 연주를 잘해서 이번 연주회에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의무가 강하겠는가? 아니라면 그 피아노 연주회 연습을 한다고 자기 자식을 숙제를 봐주지 못했다고 했을 때, 이 둘 중에서 어느 의무가 우선이 되느냐는 것이다. 자기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학교에 불려가고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 연주회를 들으려고 돈을 5만원이나 주고 온 관객들에 대한 의무와, 자기 자식에 대한 그런 의무와, 도대체 어느 의무가 우선시 되느냐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다한다고 관객들에게 수준이 낮은 연주를 했다면, 도대체 사회에 대한 그런 책임은 어떻게 지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일종의 충돌인데, 도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해결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한 해결방법이 나와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에 대한 불완전한 과정 속에 들어가는 것인데, "신이시여, 미안합니다. 이번에는 가정에 신경을 썼는데,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게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점차 점차 나아간다는 것이다.

◈ 아무튼 난 죄인은 아니야 !!

이렇게 계속해가면 결코 "제가 죄인입니다" 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데, 좀 모자라서 그렇지 말이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인간은 유한하고 다 알지 못해서 그렇지 죄인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튼 죄인은 아니고,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대체로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타인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라고 할 수 있고, 타인에 대한 존경의 의무는 '완전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는 각각 '완전한 의무'와 '불완전한 의무'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이것은 그냥 넘어가고, 이것 말고 넓은 의무와 좁은 의무가 또 나오는데, 아무튼 사랑의 의무는 불완전한 의무로서 퍼주고 또 퍼주어도 모자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만약에 덕 의무를 넓고 불완전한 의무라고 한다면, 이 덕론에 완전한 의무들이 포함되어야만 하는 이유와, 개별적인, 즉 달리 말해서 '좁은 의무'들이 주어져야 하는 이유와, 또한 넓은 이유에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여지'와 '융통성'이 허용되는지를 밝혀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 불완전한 의무가 인간의 덕 속에 포함이 되어있는데, 즉 제 아무리 완전을 외치고 이야기해도 이 불완전한 의무가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불완전한 의무를 빼버리면 안 되고, 왜 완전한 의무가 되지 못하고 불완전한 의무가 포함이 되어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융통성이 개입된다는 말이다.

** 완전한/불완전한 의무의 구분이 의무의 수혜자에 따른 구분이라는 말은, 이 완전한 의무는 의무의 수혜자가 모든 특정한 개개인인 반면, 불완전한 의무는 의무의 수혜자가 특정 개개인이 아니라 특정되지 않는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타인에 대해서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자기 자식만 사랑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수혜자가 많아지니 말이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사랑을 하고 존경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 따라서 완전한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그 의무의 수혜자인 특정한 개인이 잘못 대우받는 반면에, 불완전한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잘못 대우받는 특정한 개인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행위자의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갖지 못할 뿐이다.

◈ 박근혜, 사람을 차별하냐?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박근혜의 지지자가 천 명이 있는데, 박근혜가 와서 고맙다고 악수를 하는데 900명과는 했지만 나머지 100명과는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이 아파서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100명이 "에이 씨, 누구는 악수를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나?" 라고 하면 되겠는가? 칸트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박근혜는 천하장사도 아니고 그야말로 불완전하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수혜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에게 해달라고 하면 안 되는데, "악수를 해주면 고맙고, 안 해주면 그만이다" 라고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 따지기는 뭘 따져?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누구는 천국에 보내고 누구는 지옥에 보낸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따질 수 있겠는가? 따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원해주시면 고맙고, 안 해주면 지옥에 가는 것이지 말이다. 이렇게 수혜자의 입장에서 "당신이 왜 그렇게 나오는가?" 라고 따지지를 못하는 것이, 수혜자가 '넓은 의무' 에서는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인데 소홀히 해서 지옥에 갔다고 한다면, 만약에 말이다. 그때는 택한 백성은 따질 의무가 있는데, "아니, 창세 전에 예정을 해놓고 왜 저를 지옥에 보냅니까?" 라고 말이다. 이런 것을 '좁은 의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해가 됩니까?

◈ 그래도 틀은 미리 짜놓아야 !!

이렇게 살펴보니 칸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고 하니, 인간은 모든 것을 천사처럼 완전하게 행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즉 자기가 비록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고 해도, 인간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인간인지, 그것만은 파악을 해서, 그 틀만큼은 미리 짜놓자는 것이다. 그러면 짜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당연한 도리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가 보기에는 말이 안 되는데, 바리새인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그들은 말은 맞는데 전혀 행동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말이 맞다고 해서 옳다고 해달라면 안 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아니, 율법을 안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가? 오히려 이런 율법을 아는 것이 더욱 더 죄인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런 것을 전혀 모르는데, 바리새인들도 그렇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자선의 의무는 불완전한 의무이고, 특정한 사람에 대한 의무가 아니므로 언제 누구를 도울지 결정할 '여지'를 갖고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제 아무리 자선을 베푼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 베풀어 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은혜를 받는, 즉 수혜자가 따질 입장이 되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불완전한 의무라는 것이다.

** 완전/불완전한 구분과 달리, '넓고/좁은' 의무의 구분은 의무가 요구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넓은 의무, 달리 말해서 '넓은 구속성의 의무'는 내적 행위를 실행해야 할 의무이다. 준칙 채택의 의무가 넓은 이유는, 특정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결정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한 마디로 말해서, 대충 틀은 짜놓았으니 나머지는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넓은 의무라는 말이다.

** 반면에 좁은 의무는 항상 실행되어야 할(또는 하지 말아야 할) 특정한 외적 행위가 지정되어있다. 예를 들어서, 약속을 지키는 것은 좁은 의미인 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넓은 의미이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윤리적 의무는 준칙 채택의 의무이기 때문에 넓은 구속성을 갖는다.

그러니 좁은 의무라는 것은, 예를 들어서, 다방에서 만나자고 했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좁은 의무이고, 여기에 반해서 "착하게 삽시다" 라고 하면 넓은 의무인데, 즉 융통성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융통성'과 '여지'가 들어가는 것은 넓은 의무라는 말이다. 그런 것이 없으면 좁은 의무이고 말이다.

◈ 칸트의 윤리 - 까라면 까 !!

하지만 넓은 의무이든, 좁은 의무이든 간에, 즉 융통성이 있든 없든 간에 아무튼 뒤에는 '의무' 라는 것이 붙는데, 그러니 이유는 어떻게 되던지 간에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칸트가 말하는 윤리는 무조건 까라고 하면 까야만 하는, 그런 윤리라는 말이다.

이렇게 강의를 하다보니 옛날에 교회에서 부흥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제가 그대로 옮기고 있는 꼴인데, 우리가 그런 인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 "아니, 헌금을 하라면 하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라는 것이다.

십일조의 경우에, 그것은 지정이 되어있으니 좁은 의무라는 것이다. 주일성수도 좁은 의무이고 말이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구제하는 것은 넓은 의무이니, 자기가 알아서 하는 넓은 의무이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딱 두 가지인데, 십일조와 주일성수는 좁은 의무로 융통성이 없고, 즉 강제로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리고 선교나 구제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그런 융통성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래도 저는 칸트의 말씀이 좋아요 !!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무엇인고 하니까, 목사가 성경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할 때, 이런 이야기만을 교인들이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복음은 간단하지만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반면에, 칸트의 이야기는 복잡해도 알아듣는다는 말이다. 물론 목사의 입에서 복음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가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의 반응은, "그러면 목사님, 제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알아서 하라구요.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니, 그 얼마나 쉬우냐는 말이다. 그 다음에는 목사가 좁은 의무를 행했을 때의 그 보상에 대해서 설명해주면, 그 좁은 의무는 반드시 행해야 될 의무로서 머리 속에 각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기본적인 적인데, 그런데 이런 십일조와 주일성수 말고, 건축헌금과 같은 것을 따로 복이 주어지기 때문에, 즉 융통성이 주어지기 때문에 보너스를 받고 싶은 사람은 더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그렇게 추가적인 복을 받은 경우를 예로 들어주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목회가 얼마나 간단하냐는 것이다.

◈ 장인어른, 제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

그러니 천 목사님의 경우에, 아픈 장인어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면 되는고 하니, 일단 몸이 아프니까 하루에 1시간 기도는 기본이고, 그것은 좁은 의무이고, 더 넓은 의무로서 기도시간을 늘이면 보너스로 좀 더 빨리 나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마 장인어른도 좋아하지 싶은데, 왜냐하면 같은 의사소통의 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같이 기도를 해주면 좋아하고 말이다. 하지만 "장인어른, 당신은 죄인입니다. 죽으면 끝입니다" 라고 하면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정말이지 복음을 아는 사람은 속이 터지는데, 굳이 칸트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이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그래서 복음이 아닌 이런 칸트의 윤리를 이야기해주어야 졸지도 않고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날 신학을 공부하고 학교를 다녀도 소용이 없는데, 이런 칸트의 윤리가 신학을 대신해서 다 하니 말이다.

** 윤리적 의무(즉, 덕 의무)의 범주에는, '넓고 완전한 의무'와 '넓고 불완전한 의무'를 가지며, 그 대신 '좁고 완전한 의무'는 법리적(法理的)의무에 속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싶은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앞에서 보았듯이 칸트에 의하면, 덕 의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의무는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 '타인에 대한 존경으로부터의 의무'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의무'에는 자기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로 나누어지고, 또 타인의 의무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 존경의 의무로 나누어지고, 그리고 이 의무들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지고 말이다.

** 사랑의 의무에는 자선과 감사와 동정의 의무가 있다. 존경의 의무는 소극적으로 표현되는데, 타인을 오만하게 대하지 않을 의무, 타인의 잘못을 조롱하지 않을 의무 등이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타인을 단순히 수단으로 대하지 말하는 의무이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경의 의무에는 다음과 같은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들 의무에 해당하는 덕들은, 자선( 타인을 도와 그들의 가능한 목적을 달성하게 하려는 성향), 감사, 동정(타인의 운명에 공감하는 성향), 겸손, 존경심 등이다. 이런 덕에 반대되는 악덕은 질투, 배은망덕, 악의, 오만, 험담, 조롱 같은 것이 있다.

이렇게 질투, 배은망덕, 악의, 오만, 험담, 조롱 등을 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자기의 의무인 "나는 천사이다" 라는 것에 위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타인에 대한 의무를 행하면서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고 하니, 자기의 의무가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자기가 상대방을 욕하면 상대방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도 맞지만, 자기 안에 있는 천사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양쪽을 다 고려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칸트의 윤리라는 말이다. 지금 이 칸트의 윤리를 강의하면서 교회에서 주장하는 성화론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데, 지금 영성훈련을 하는 기분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그것이 덕 의무이므로, 넓은 의무구속성을 가지며 따라서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행위의 준칙(본인의 기본 원칙)'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사람이 "당신, 사랑을 했지?" 라고 하든지 말든지 중요한 것은 자기가 사랑을 했느냐는 것이다. 단지 이것이 불완전한 의무이고 말이다. 지금 하도 분류를 해서 혼돈이 되는데, 즉 불완전한 의무라는 것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가?" 라고 요구할 의무가 불완전한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다만 사랑을 해주는 사람이 "아이쿠, 퍼주고 또 퍼주어도 모자라는구나" 라고 하면서, 더 주고 말고 하는 것은 본인이 알아서 할 사항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식은 "엄마, 왜 나를 더 사랑해주지 않아요?"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사랑의 의무는 선의의 준칙을 채택하도록 요구하는데, 이것은 실천적 인류애로서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이다. 이때 그 타인이 사랑을 받을만한지 그렇지 않은 지와 상관없다.

이 사랑의 의무는 불완전한 의무이고 또 넓은 의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사랑을 받을 만한지 따지 필요가 없이 사랑을 하는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저 사람은 얼굴이 못생겨서 사랑을 하지 못하겠다" 라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 타인을 사랑하고 있는 한에서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일은 쉽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위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쉽지가 않고, 이런 경우에 자신이 하려는 일을 심사숙고하게 된다.

그러니 조건부로 사랑을 할 때, 그런데 그 조건이 없어졌을 때도 사랑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때 우리는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심사숙고를 해야 하는고 하니, 우리는 신이 아니고 과정 속에 있으니 말이다.

서로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해놓고는, 남편에게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 나왔을 때, 저런 인간과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그렇게 심사숙고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결혼 자체를 완전한 게 아닌 불완전한 것으로 보도록, 그렇게 깨우치기 위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자기 식구를 돕기보다는 구호 프로그램에 기부를 하려고 할 때, 혹은 자신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보다 자신보다 모자라는 사람을 과연 존경해야만 하는지를 놓고 주저할 때, 그 사람의 도덕적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아이티 공화국은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진흙으로 케익을 만들어서 먹는데, 그렇게 하면 3시간은 버티는데, 포만감 때문에 말이다. 그것을 MBC의 'W' 라는 프로에서 방영했지 싶은데, 그때 그들을 도우려고 방송국에 성금을 내었는데, 그때 아내와 과연 의논했느냐는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 자기도 아이의 공납금 때문에 고민인데, 그런데 자기 아이는 공납금이 없어도 죽지 않지만 그러나 아이티의 아이들은 죽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과연 자기 아내와 한번 의논을 해서 성금을 보내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 아이티 공화국 아이들을 사랑은 해주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데,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랑의 의무는 불완전한 의무가 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윤리적 의무인 까닭은, 그들이 지닌 인간성이라는 인류적 보편성이 무조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치는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상관없이 그들이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덕 의무는 우리에게 타인의 내재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 가치에 준해서 그들을 대할 것을 요구한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렇다고 해서 사랑에 따른 선호나 구별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의무가 불완전하다는 의미는, 이 의무가 각각의 모든 특정한 개개인에 대한 것(이것은 완전한 의무이다)이 아니며, 한 의무의 준칙이 다른 준칙에 의해 제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사랑의 의무는 불완전한 의무이기 때문에 각 개개인에게 요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를 들면, 이웃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이 자기 부모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제한될 수가 있는 경우이다. 따라서 덕 의무인 자선의 의무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각각의 모든 사람을 다 도우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에게, 얼마나, 무엇을 도울지 결정할 '여지'를 갖는다.

지금 이웃이 어려운 처지에 있어서 도와주어야 하는데, 하지만 자기 엄마가 아파서 가지를 못했다고 하면, 그 이웃이 뭐라고 하겠는가? "당신은 당신 엄마밖에 모르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몸은 하나이고 자기 엄마가 아픈데 말이다.

칸트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당연히 알고 있는데, 왜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쓰러졌는데, 제사장과 율법사가 그냥 지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지나간 이유가 있는데, 보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도와주고 치료비까지 다 대어주었는데, 이것을 두고 예수님을 "누가 너희의 이웃인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 근대시민의식 - 중요한 것은 주체인 '나' !!

이것하고 지금 칸트가 하는 말이 서로 맞는가? 맞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누구 입장인고 하니, 사랑을 하는 주체의 입장이란 것이다. 제가 처음에 강의를 시작하면서 '사실'과 '나' 중에서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가? 분명히 이 '사실'이 중요한데, 하지만 칸트의 윤리를 보게 되면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 '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주체사상' 이라는 말이다. 근대시민의 사상이고 말이다.

교인들이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니, 하나님의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무슨 사랑만 남는고 하니,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교회가 재미없고 설교가 시시하다고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데, 도대체 주님에 대한 사랑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는 것이다.

◈ 십자가님, 고맙습니다 !!

복음을 알면 당연히 십자가의 그 아픔이 스며들어가야 하는데, 하지만 "십자가님(?), 고맙습니다" 라고 하고는, 즉 자기는 구원을 받았으면 되었다고 하면서 입을 닦고는 도망쳐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그 아픔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 라고 아무리 해도, 전혀 그럴 마음이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의 가치성만 담으면 끝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골라서 듣는데, 그런 고를 것이 없으면 설교가 잘못되었다고 하고 말이다.

목사가 만약에 강제로 뭔가를 하려고 하면 그것이 법리적이 되는데, 즉 완전하고 좁은 의무가 되면 형식이 되어서 진짜 칸트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것을 했다" 라는 것으로, "나는 법을 지켰는데, 왜 너는 지키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인데, 그런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내가 나의 자녀와 나의 부모를 우선적으로 돕기로 했다고 해서, 나의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나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는 아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 자선이나 동정이라는 불완전한 의무가 행위자가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때 마치 완전한 의무(특정한 사람에 대한 의무)로 간주되어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를 들어서, 한적한 길을 산책하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보았다면,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산책하던 사람의 완전한 의무이다. 만약 아이를 구하지 않고 지나친다면, 그 아이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아이가 한 명일 경우에는 사랑의 의무가 불완전한 의가 아니라 완전한 의무로 변하는데, 물론 100명이라면 불완전한 의무이겠지만 말이다. 모두 다를 구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물에 빠진 자들은 "아니, 누구는 구해주고 누구는 구해주지 않는가?" 라고 나오는데, 물에서 건져주었으니 자기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꼴이라는 말이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 보건복지부에 불을 내려고 한 사람이 잡혔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왜 자기에게는 생계유지비를 다른 사람들보다 적게 주느냐는 것이다. 공짜로 주면 고맙게 생각하면 되는데 말이다. 물론 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것이 인간인데, 자기에게 당연히 이렇게 주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칸트가 하는 말이, 그런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베풀어주면 고마운 것이지, 반드시 그렇게 사랑을 받아야 할 입장은 아니라는 말이다.

◈ 주님, 제 사랑은 어디 있지요?

그런데 요즘 인간들은 교회에 와서 하는 꼴이 어떠한가? 마치 예수님이 자기를 반드시 구원해주어야 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 먼저 희생하고 봉사할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고, 자기가 먼저 사랑을 받으려고만 한다는 말이다.

아니,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바쳤는데, 그렇다면 자기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가 이렇게 교회에까지 왔는데, 왜 목사가 되어서 인사도 제대로 해주지를 않고, 좀 알아주지를 않느냐고 하면서 삐친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 인간들이 하는 꼴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더 쉬운 예를 들면, 개인적인 사랑의 감정과 상관없이 자신의 어린 자녀와 늙은 부모를 보살피는 것이 의무이고, 도움 받을 곳이 전혀 없는 친척을 돕는 것도 의무이다. 이런 의무들이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는 해도, 아직도 불완전한 의무가 되는 이유는, 행위자가 어떤 한 내부 준칙으로 다른 내부 준칙을 어떻게 제한할지 결정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도움 받을 길 전혀 없는 친척보다 자신의 자녀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기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먼저 도울 것인지 친척을 먼저 도울 것인지 하는 문제인데, 당연히 자기 자식부터 먼저 도와주는데, 그런데 이것이 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친척은 지금 먹을 것이 없는데, 자기 자식은 유학자금이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친척의 입장에서 보면 옳으냐는 말이다. 친척의 경우도 그런 유학자금이 없다면 자기 자식부터 도우면 말이 되는데, 그러나 지금 친척은 당장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이처럼 만약 윤리적 의무가 '넓은 의무'로서 목적의 준칙의 채택을 요구할 뿐 특정한 외적 행위의 실행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개별적 상황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상이한 목적의 준칙들을 올바르게 형량하는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이런 형량들은 불완전한 의무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데, 완전한 의무는 절대적인 우선권을 갖기 때문이다.

여기서 '넓은 의무'는 꼭 집어서 뭔가 하기가 곤란할 때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반면에 '좁은 의무'는 해야할 것이 딱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칸트가 말하는 것은, 이 넓은 의무에서는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 학문적 성취를 위해 자녀 돌보기를 일정 정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자녀를 돌보기 위해 학문적 성취를 포기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고려되는 사항들의 형량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자식을 낳았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우리교회에도 그러한 분이 계시는데, 유학을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그만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유학을 포기했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칸트는 우리 안에 동정의 느낌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것을 '융통성' 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이 융통성은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칸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면, 융통성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과정 속에 있으니 융통성의 범위가 좁지만, 나중에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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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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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