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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411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9강자유게시판에베소서

20080411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9강

이름 : 오용익(IP:59.3.147.59)

에베소서 제 9강 (이 근호목사, 2008년 4월 11일 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비하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대로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않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강조했습니다. 제발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것, 어린애가 태어나는 것, 다 예정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놓쳐버리면 우리는 아무리 애써도 절망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10km를 달려와도 그 지점에서 절망이고 100km를 달려와도 역시 그 자리에서도 앞이 캄캄하고 절망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없으면 열심히 노력은 하는데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하면서 백날 노력해 봤자 그것은 소용이 없는 짓 아닙니까?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갉아 먹는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편하지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창고에 그득한데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이런 것도 예정하셨네. 이런 것도 예정하셨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갉아 먹는 그 재미, 하나님이 준비 한 것을 획득하는 그 재미. 그래야 우리에게는 실패라는 것이 아예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실패라는 것이 아예 없지요.

이래 보시면 됩니다. 내 쪽에서 하나님께 다가서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하나님 쪽으로 내가 다가가면 100km를 달려가면 나는 여전이 앞이 캄캄한 실패가 됩니다. 아무리 접근해도 그것은 실패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 있는데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먹구름처럼 몰려와서 나를 잡아당기고 또 예정하신 뜻이 몰려와서 나를 잡아당겨서 “그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게 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내 등을 자꾸 미는 거예요. 자꾸 밀게 되면 전에는 잘 모르던 성경 말씀들이 ‘아,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하나님의 깊은 뜻이 점점 더 알아지는 겁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1:17에 보면 나옵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이것은 잡아당긴다는 말이죠.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이 얼마나 세상 것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점점 더 알아가는 것이 예정된 뜻입니다. 여러분이 예정된 뜻인지 아니면 혼자 착각했는지의 구분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한 것은 별로 생각이 들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생각이 들어 갈 때는 그게 예정하심에 속한 사람 맞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사람은 ‘내가 이만큼 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만큼 하셨구나’ 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이끌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느껴질 때 그 때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대해서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동물원에 가게 되면 원숭이만 보고 돌아오는 것은 안 되지요.

비싼 입장료를 냈으면 원숭이만 보지 말고 그 옆에 있는 기린도 봐야 하고 그 옆에 있는 코끼리도 봐야 되고 타조가 달리는 것도 봐야 되고 무서운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도 봐야 되잖아요. 뱀만 보고 무섭다고 집에 가자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코끼리나 뱀만 예정하신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참 많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유람하고 관람하는 그 재미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뱀 본 것 실패야. 코끼리 본 것 실패야.’ 거기에다 실패라는 말을 쓰면 안 됩니다. 동물원에 가면 코끼리 있고 그 옆에 하마가 있는데 코끼리 보다가 그 옆에 있는 하마 보는 것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실패 한 겁니까? ‘아, 인생 실패다’ 그겁니까? 그냥 빠뜨린 것뿐이죠. 도로 와서 마저 보면 되는 겁니다. 실패라는 것은 내가 뭔가 이루고자 할 때 그것이 성취가 안 되면 그때는 실패지만 관람하는 사람이 관람하다가 한 두 빠뜨린 그것이 뭐 그리 큰 일 입니까? 자기 동물원도 아니고 주님의 동물원인데 그걸 가지고 왜 자기에게 실패를 적용할 수 있습니까?

“너는 공부도 못하니까 내 아들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윽박지르지 마세요. “그 애는 천천히 관람하는 애구나. 속도가 좀 늦는 애구나”라고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다른 애들이 두 과목 볼 때 얘는 한과목 본다는 식으로 느긋하게 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정하사” 안에는 실패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예 실패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두지 마세요.

“예정하심” 안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만약에 ‘예정하심’을 걷어 치워버리면 우리는 매일 같이 ‘나는 오늘도 성공했을까, 오늘은 실패했을까, 오늘도 바른 삶을 사는데 성공했을까, 죄지은 것은 아닐까?’ 매일 혼자서 혼나는 거예요. 혼자서 자기를 벌세웠다가 혼자서 자기를 칭찬했다가, 이것은 마귀의 시험에 드는 겁니다.

심지어 마귀의 역사도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마귀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마귀야, 네 할 일을 해야지.” 얼마나 여유 만만 합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귀신이 오거든 “귀신아, 네 할 일을 하고 가라. 마귀야 네 할 일을 하면 돼. 너는 네 할 일을 하고 가고 나는 내 할 일 하고 주님 곁에 갈 테니까”라고 하면 마귀가 날 다루고 싶은 맛이 떨어질 겁니다.

겁이 나고 깜짝 놀라는 맛이 있어야 되는데 ‘볼일 보고 집에 가라’는 식으로 나오면 재미 없잖아요. 여러분이 예정하심을 놓쳐버리면 다 놓친 것이 됩니다. 다시 한 번 당부 드립니다. 하나님 예정하심 안에 있는 우리의 인생이 쟁취하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고, 유람하고 관람하고 동물원 구경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이렇게 이것저것 다양하게 보면서 ‘아하, 주님께서는 날 위해서 이것저것 다 준비 하셨구나’라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인생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누가 와서 사기를 치더라도 ‘이런 것이 바로 사기 구나’ 하고 구경시키기 위해서 사기침을 당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예정하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오늘 공부의 초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정하심 속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가? 그것을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약속은 일종의 고무풍선이라고 보면 됩니다. 고무풍선 안에 여러 약속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 약속이 탁, 깨어지면 고무풍선 안에 있는 것들이 마구 튀어 나오겠지요. 바늘가지고 약속을 탁, 튕기면 여기서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 축복들이 막 쏟아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하신 약속이란 간단히 말하는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서 천국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17)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천국은 이 고무풍선 같은 약속 안에 들어 있지 이 세상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천국이 없는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천국을 빛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도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오매 어둠이 어둠으로 시커멓게 드러난 겁니다. 여러분이 전등을 껐을 때, 여기 방안에 커피 잔이 빨간색과 하얀색이 있는데, 어느 것이 빨간색인지 어느 것이 까만색인지 구분이 될까요, 안될까요? 구분되지 않습니다. 다 검은 색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남하고 비교하면서 ‘아, 나는 못났다. 나는 저 애보다 공부도 못해’라고 자꾸 실망을 하는데 약속에서 보면 모두 다 똑같은 색깔입니다.

무슨 색깔? 검정색. 모두 다 검정색입니다. 이건희 회장도 검정, 나도 검정. 알록달록이 아니고 다 검은색인데 피차 검은색끼리 서로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러면 안 돼지요. 오다 보니까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연극 한다고 붙여 놨어요. 백설 공주는 무슨 색깔입니까? ‘백설’이니까 하얗다고 해야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백설 공주도 검은색, 일곱 난쟁이도 검은색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기에 다 검은색이 될까요? 약속에서 보면 다 검은색이 됩니다. 우리나라 이소연이라는 여자 분이 무거운 우주복을 입고 소련 상공의 대기권밖에 나가 있습니다. 우주인들이 다녀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에서 보니까 지구는 마치 공과 같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 은 아무것도 아닌데 왜 서로 싸우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우주에서 보면 똑같고 도토리 키재기인데 서로 잘났다고 싸우더라는 겁니다. 우주에서 보면 똑같은데 하나님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말로 싸울 가치도 없습니다. 다 검은색끼리 다 못났기에 더 잘난 사람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이라는 고무풍선이 다가오게 되면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새로운 기준과 새로운 시선과 약속의 관점이 오게 되는 겁니다.

지구인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서로 싸우는 그 기준, 그 생각 말고, ‘누가 공부 잘하나, 누가 돈 더 많이 벌었나, 부자 나라인가, 가난한 나라인가’ 이렇게 서로 다투고 있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고 우리에게 예정된 대로 다가오는 이 약속의 세계는 그것을 깡그리 무시해 버립니다. 심지어 예수님 하신 말씀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다가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가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례 치르게 하고 너는 거기서 빠져라’고 합니다. 이런 말은 굉장히 섭섭한 말이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지금껏 지구상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준은 내 앞에서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천국에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그 기준을 가지고 나를 따라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구상에서 우리끼리 누가 잘 났냐, 그게 아니라 현재 다가오는 저쪽 나라에서 이쪽 우리의 나라를 어떤 식으로 보느냐, 그런 관점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큰 교회 보고 ‘대견 하구나’ 하고, 작은 교회 보고는 ‘시시하다’는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준입니까? 아예 기준 자체가 없습니다. 기준 하나 만들어 주면 또 그 기준을 가지려고 애를 쓸 테니까 아예 기준이 없습니다. 아무런 기준이 없는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이 내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며 이 기준에 따라서 세상을 심판 하겠다’고 내미는 기준은 ‘피’입니다. ‘피’를 내세우면서 ‘이것이 바로 천국 갈거냐, 지옥 갈거냐’를 결정하는 하나밖에 없는,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니고 오직 한 기준이라고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용서가 없고 반대로 피 흘림이 있는 자에게만 용서가 주어져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행 20:28)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피는 여러분의 피 입니까? 제 피 입니까? 누구의 피 입니까? 예수님의 피 입니다. 예수님은 이쪽분이 아니고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끼리의 어떤 기준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나 잘났다. 나를 따르라’ 이런 것은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도 많이 하니 나를 본받아라’는 이런 것도 소용없습니다. 너, 나 기준도 아니고 남자, 여자 기준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기준은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기준이 없다, 혹은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런 소리를 들어도 너무 피곤들 하시니 이것이 기쁘다는 것이 잘 감지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힘든 이유가 ‘누구를 본받아라’ 하는 것 때문에 제일 힘듭니다. 아예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예 기준조차 없습니다. 기준! 그러면 따라가야 되는데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은 안 따라가도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가지 마세요. 아무도 따라 갈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가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피 흘렸습니다. ‘누구처럼 따라 하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따라가려면 피만 주장하는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우리 가운데 기준이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한 경직 목사쯤 되면 기준이 될까’ 하는데, 아예 그런 기준 자체가 없고 표준, 모델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세우는 기준도 인정 안 해줍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식으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네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검은 색이다.”

어떻게 살든 검은 색입니다. 지금 다가오는 약속의 세계를 봐야지 이 지상에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는 식으로 자기를 내세우면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속하지 않은 거예요. 죄가 무엇인가? ‘죄란 예언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오늘 드신 저녁 식사의 메뉴가 이사야에 나옵니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콩나물, 시금치, 두부 같은 것이 민수기에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러니까 ‘하나님, 오늘 저녁식사 어때요?’ 라고 하면 그것을 아예 보지도 않지요. 예언된 것만 따지는데 우리는 예언되지 않은 것을 자꾸 심각하게 생각해서 ‘오늘 달랑 한 점 남은 고기를 딸에게 줬어야 했는데 나 혼자 먹어서 참으로 미안한데 ….’ 그런 것은 미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저녁식사 메뉴가 뭔지, 그걸 혼자 먹었는지 나누어 먹었는지 그런 것을 아예 묻지를 않습니다.

‘나는 쌍꺼풀 수술을 안 해서 이것이 죄일지 싶다.’ 천만에 소리, 쌍꺼풀 수술은 성경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하냐, 마냐 그 자체에 신경 쓰지 말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 봅시다. 예정된 것만 이루시려고 다가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준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정된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그 기준이 뭐냐, ‘피’입니다.

예수님이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기준이 정해졌기 때문에, 우리 피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라는 말은 일체 예수님을 빼놓고 다른 사람의 기준은 모르는 체 하고 듣지 말고 일체 인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간증집회라는 것,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진짜 간증은 예수님만이 하지 다른 사람은 못해요. 왜? 예수님만이 기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간증이 뭡니까? 요나의 기적이 아닙니까? ‘내가 너희에게 기적을 이야기 해 줄까? 내가 죽었거든, 그런데 사흘 만에 부활했거든.’ 이게 간증입니다. 다른 어느 누가 그런 간증을 합니까? 사람이 간증을 하게 되면 그것을 모델삼고 모범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모든 예언과 말씀은 누구에게 초점이 집중되는지 아십니까?

성경의 모든 예언은 예수님에게 모아져서 예수님만이 예정된 분이고, 예수님의 몸만이 예정된 몸이며 우리는 그의 지체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그냥 ‘맞는 소리네요’라는 식으로 그치고 말 것 같은데 왜 이이야기 중요한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죄란 예언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의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것이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으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근데 선악과 따먹는 죄가 어떤 죄인가? 따먹기는 따먹어 놓고 그것을 인정 안하는 죄가 되었습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 이것이 이중적인 죄입니다.

따먹은 것도 죄인데, 죄를 지어놓고 죄 안 지었다고 우기는 죄를 또 짓습니다. 죄가 죄를 부릅니다. 선악과의 주인이 와서 ‘왜 따먹었느냐’고 하니까 ‘따먹으면 좀 어떤가’라고 하니까, 따먹은 것도 죄고 안 따먹었다고 우기는 것도 죄입니다. 주인의 것을 따먹고 왜 따먹었느냐고 따지니까 따진다고 죽입니다.

죄란, 뭔가 행동을 잘못한 것이 죄가 아니라 이미 죄라는 기준이 바뀐 그것이 죄가 되는 거요. 돈을 훔쳤다면 그것이 죄 맞습니다. 그런데 돈을 안 훔치면 그게 죄입니까, 아닙니까? 돈을 안 훔친 그것도 죄입니다. 돈을 훔친 것은 죄고 돈을 안 훔친 것은 죄가 아니라는 기준을 제가 뭔데 제 맘대로 세우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그런 기준을 세울 자격이 없는데 돈을 훔치면 죄고 돈을 안 훔치면 죄가 아니라는 기준을 권리와 자격 자체가 없는 제가 왜 세우냐’는 겁니다. 그게 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죄란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무엇으로 변경시키느냐 하면, 이제는 자기가 하는 것, 자기가 결정한 것이 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쉽게 해 봅시다. 여기 돈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안 훔쳐도 훔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죄인가? 돈을 훔치면 이 돈이 어디에 모입니까? 자기 것으로 모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것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 것이 있기 때문에 돈을 훔쳐서 ‘나’라는 자기 창고에 축적하기 위해서 돈을 훔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훔치는 것만 죄라고 여기고 내 것을 따로 가질 수 있다고 우기는 그것이 죄인 줄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안 훔쳤다면 ‘나는 돈을 안 훔쳤으니까 나의 착함, 나의 의로움에는 손상이 가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고 자기의, 자기착함이 있다는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하여튼 모든 죄는 내 것이 있다는데서 발산됩니다. 내 교회, 내 식구, 내 새끼, 내 아들, 내 딸, ‘나’가 붙는 것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어디에 쌓입니까?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면 어디에 쌓입니까? 내 창고, 내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차곡차곡 쌓이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죄가 안 됩니까? 죄입니다.

신학을 해 보세요. 그게 옆 사람 머리에 들어갑니까? 내 머리에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신학을 하는 것이 죄라니까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그러면 죄 아닌 것이 없잖아요.”

“죄 아닌 것이 없지요.”

“죄 아닌 것이 뭡니까?”

“죄 아닌 것은 우리 외곽에 우리 바깥에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피 아닙니까! 왜? 모든 말씀은 피에 쏠리니까!”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쏠리는데 그 말씀의 물꼬와 방향을 틀어서 나의 것, 나의 명예, 나의 위신, 나의 가치성 여기에 틀어서 ‘주여, 저 착하죠’라고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전에서 기도한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세리인데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판정은 누가 내리겠습니까? 판정은 세리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옆에 있는 바리새인이 내리는 것도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말하기를 옆을 슬며시 보면서 ‘주여,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아니하고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도 하고 구제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기도할 때, 둘 중에 누가 의인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판정은 약속되신 분이 합니다. 세리를 의인이라고 하고 잘난 체 하는 바리새인을 심판받고 저주받을 죄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판정했습니다. 그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구제등 모든 성경말씀을 나의 것을 더 확장, 확대하는데 적용시켜서 자기한테 투자한 겁니다. ‘이만큼 투자했으면 하나님이 양심이 있다면 나같이 착한 인간을 버릴 리가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한테 한 겁니다.

그러니까 행동을 반듯하게 했다, 남에게 해코지를 안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너의 것이 없어야 되는데 왜 너의 것 이라는 것이 있느냐’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나의 것’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백지가 있습니다. 이 백지위에 여러 가지 선을 긋습니다. 이것이 관계망입니다.

어린애가 태어날 때 밑에서 고개를 쑥 내밀어 보니까(구멍 뚫린 종이위의 관계망의 그물로 올라와서 걸치는 모습) 옆에 엄마, 아빠, 삼촌 다 있는 겁니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 아빠, 삼촌 안 챙겼습니다. 이미 있는 엄마 아빠의 관계망, ‘우리 집은 부잣집인데 내가 부잣집에서 태어났구나’라고 되는 거예요.

이렇게 나라는 것은 구멍이 뚫려서 톡 튀어 나와서 관계망 속에 걸쳐 있는데 그 때부터 이 아이는 커 가면서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이 모든 관계를 자기 것으로 다 돌려 버립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이제는 엄마도 아빠도 내 뜻대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2세부터 자아정체성이 성립 되는데 그 자아정체성이 있어서 두리번거리면서 다 끌어 모읍니다.

어디로 끌어 모으겠습니까? 자기에게로 끌어 모읍니다. 전부 다 내 것으로 가져옵니다. 누나의 것을 빼앗으려 들고, 형에게 안 지려고 하고 좋다는 것은 전부 다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드는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미 성립된 관계를 끌고 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뭘 해야 되는가? 선악과 따먹지 말고 생명나무만 따먹으라고 아담을 세운 겁니다.

그런데 아담이 못하니까 누가 했습니까? 결국에는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님이 다 한 겁니다. 그러나 아담은 두리번거리면서 ‘선악과 이것 따먹어 볼까?’ 하고 결국 따먹고 나니까 하나님이든 뭐든 전부 다 자기위주로 가는 겁니다. 돈이 있으면 그 돈을 자기 것으로 집어 넣고 ‘나는 부자다’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이미 버린 몸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삼촌, 누나, 엄마 이런 관계가 아니라 사랑, 자비, 용서, 긍휼 이런 관계망을 그물처럼 쳐 놓고 우리 죄인을 뚫어 버립니다. 뚫어서 들어 올리니까 동쪽에도 자비고 서쪽에도 긍휼이고, 북쪽에는 용서고, 남쪽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의입니다.

완전히 횡재 한 겁니다. 이미 마련된 용서의 체제, 용서라는 그물망에 고개만 쑥, 하고 튀어 나온 거예요. 자기는 죄밖에 안 짓거든요. 그런데 사랑은 뭡니까?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평생토록 우리는 나밖에 모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아빠는 왜 돈 못 벌어? 엄마는 왜 만 날 몸이 비실비실?’ 엄마 아빠가 자기를 낳았는데 자기가 엄마 아빠를 조정해야 되는 것처럼 굽니다.

태생적으로 자기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것을 이용해서 이 새로 뚫린 관계망 속으로 올라오게 하는 것처럼,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이미 용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피가 용서와 자비의 그물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튀어 나온 사람끼리 교회로 모이니까 교회는 누구만 자랑합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만 자랑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튀어 나오지 않고 그냥 지식만 배운 사람은 ‘나는 사랑 받았다’ 하면서 사랑조차 전부 다 자기 창고에 집어넣습니다. ‘용서 받았다’를 집어 넣은 자기가 잘났습니다. 자기가 돛대인 양, 자기혼자 예수 피 믿는 것처럼 굴어요.

그물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람은 항상 생각을 내 중심으로 해서 ‘내가 실패했을까, 성공했을까’ 하는데 그 ‘실패 했을까, 성공했을까’ 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왜? ‘예정하심’은 예수님을 예정했지, ‘내가 실패했을까, 내가 성공했을까’라는 것은 에스겔에 안 나오고 예레미아에 안 나옵니다.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그냥 불도우저로 밀어 버립니다. ‘네가 이근호야?’ 그냥 밀어 버립니다. 그 밀어버리는 것이 한글자로 피, 예수의 피입니다. 예수의 피로 밀어 버립니다. 피 앞에서 ‘네 존재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 피 앞에서, 그 존재가 대단하면 피를 흘렸겠는가? 바보야! 네가 그렇게 똑똑하면 피를 흘렸겠는가?’

피를 흘린다는 그 말은 ‘저 어때요?’라는 말을 일소에 부치는 겁니다. ‘어때요’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권리조차 아예 우리에게는 없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버릇을 더럽게 들여 놓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자기 밖에 모르는 일종의 괴물처럼 태어났으니까 그것이 나이가 40이 되건, 60이 되건, 심지어 나이가 90이 되어도 그 성격 어디 안 갑니다.

제가 어떤 경우에는 오해를 했었습니다. ‘80이 넘은 여러분은 인생의 여생을 편안히 보내면서 인생은 별것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요?’라고 했는데, 80이 넘은 우리교회 권사님 왈, ‘목사님, 80이 되어 보시면 그때에 새로운 자아가 또 새싹처럼 피어오릅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고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 밖에 모릅니다.

나이 90되었다고 인간 되는 것 아닙니다. 태어나면 차게 되면 기저귀도 부모님이 다 마련해 준 것이고 그 애는 그냥 사용하기만 할 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부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못하지요. 제 말은 고맙다는 소리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는 고맙다는 소리도 할 자격조차 안 됩니다.

왜? 그것조차 다 ‘예정하심’입니다. 무슨 예정입니까? 죄인으로 태어나서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증거 하는 예정입니다. 그게 바로 예정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예정하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입니다.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겁니다. 모든 아담은 죄 아래 있기에 죄가 왕 노릇 하고 결국 죽음이 왕 노릇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현재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 약 62억 정도 되는 전체를 한명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한명의 아담으로 축소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이쪽 천국의 백성들이 많이 있지만 이쪽도 한명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쪽은 예수님의 용서, 사랑이 왕노릇합니다. 사랑이 뭐라고 했습니까?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기 시커먼 죄가 있다면 사랑이란 ‘똑바로 해!’, 그게 아니라 그냥 확 덮어 버리는 거예요. 이게 사랑입니다. 너무 과격했습니까? 사랑이란 ‘반듯하게 살아야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지’가 아니라, 그냥 다 덮어 버립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숨이 막혀야 됩니다. 숨이 막혀야 사랑만 이야기 합니다. 숨이 안 막히면 자기 이야기 합니다.

‘나는 이렇게 사니까 상 받을 만하지’ 이렇게 꼭 자기 공로를 내세웁니다.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교회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예정된 교회만이 교회라는 겁니다. 예정된 교회라는 말은, ‘말씀에 의해서 예정된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누구에게 집중되었는가? 예언대로, 말씀대로, 성경대로 된 분이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그 집단이 바로 교회입니다.

왜? 우리는 죽는 것 외에는 예정된 일이 없으니까. 지금 죽어 가고 있음, 그것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안산에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만, 사람이 부끄럽다, 부끄럽다 하지만 진짜 부끄러운 것은 자신이 늙어 죽어가고 있다는 그 사실이 정말 부끄러워요. 그런데 그리되면 안 부끄러울 사람이 없습니다.

머리 희어지면 염색 하죠. 왜 합니까? 부끄러우니까 가리고 싶은 거죠. 그런데 어린애들도 태어나면서부터 늙어가고 있습니다. 늙어가는 얼굴을 아무리 뜯어고쳐도 늙어가는 이것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끄럽게 느낍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몸 가지고는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사랑이 있으면 다시는 수치를 당치 않는 것으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죽는 것이 우리는 부끄럽습니다. ‘젊을 때는 예뻤는데 그래서 잘나갔는데 나이 먹고 이게 뭐냐.’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은 사진을 안 찍으려고 합니다. 자기 사진을 보고 자기가 놀래요. ‘헉! 왠 귀신이 여기 있나?’

아무리 앵글을 잡아 봐도 내가 생각했던 내 모습의 각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세월 따라 내 모습이 자꾸 해골이 되어가지 제 모습은 영영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자기 모습을 보고 무서워하고 놀라겠습니까? 그러나 바짝 마른 해골에도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면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공부하는 것은 지식이나 몇 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고 있는 겁니다. ‘이럴 수가 없어. 이것은 엉터리고 사기야. 이럴 수는 정말 없어.’ 그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기에 우리가 도전할 맛이 납니다.

“피로 구원받아? 영생 얻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 너희들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그러나 그 있을 수 없는 그 일이 우리에게는 사는 재미다.”

이게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항상 불가능성, 사람이 가능한 것, 내가 가능한 것은 없애버리고 불가능성만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자신을 안 믿고 예수님의 약속, 이 성경만 믿게 됩니다. 가능성을 믿으면 안 됩니다. ‘기도하니까 감기 낫더라. 아프면 기도해야지’라는 이런 가능성을 믿으면 안 됩니다.

가능성을 쏙 빼버리세요. ‘지난번에는 기도해서 감기 나았지만 이번에는 안 될거야.’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교인들에게 참 무서운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 올 때에 예수 안 믿어도 되는 열 가지 이유를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과대망상증이며 예수님이 돈 인간이라는 열 가지 이유를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타성에 젖으면 안 되거든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이야기가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왜? 사람의 몸무게를 구름이 지탱하지 못하니까. 구름타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교회에 오시라는 말이죠. 그래도 믿거든 여러분 속에 아직도 불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꾸 믿을만한 이유를 갖지 마세요. 올무에 빠집니다. 믿을 만한 이유를 대지 말라고요. ‘내가 기도 안 할 때는 몰랐는데 기도하니까 자꾸 좋은 일이 생기더라’는 식으로 자꾸 그런 가능성을 만들지 마세요. 그것은 마귀의 시험이 드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겠지요. 그리고 그때 은혜 받는 방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되면 그 불가능성이 갑자기 가능성이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누굴 믿느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잘 믿었던 나를 믿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되어서 덮어씌우는 사랑이 답답해요. ‘사랑은 그만 치우세요. 이제 내 믿음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되어 버리면 그야말로 그것은 믿음에 파선한 사람입니다.

믿는 게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잘났는데 뭘 믿습니까?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자기 것이 있습니다. 어떤 교육학자는 말하기를 ‘자아란 자기 것의 집합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아를 뜯어보면 전부 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이 자아, 또는 나의 것, 이것은 전부 다 허구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이 신체가 내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때리면 내가 화냅니까? 화 안내지요. 그런데 남이 스쳐만 지나가도 화가 나지요. 신체가 내가 아닙니다. 신체를 내 중심으로 해서 자아를 따로 만들어 놓아서 내가 나를 때려도 화가 안 나는데 남이 때리면 그 자아가 화를 내는 거예요. 이해가 잘 안가지요?

엄마와 딸이 있는데 엄마와 딸이 같은 인간입니까, 다른 인간입니까? 다른 인간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자기 딸이 욕을 얻어먹으면 자기가 화를 내는 거예요. 딸이 시집갈 나이가 되어서 남자친구를 데려오면 엄마가 화를 내면서 ‘그것도 남자라고 그런 것을 데려 왔느냐’고 합니다. 딸이 뭐라고 할까요? ‘엄마하고 사나? 나하고 살지.’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뭐든지 걸치기만 하면 전부 다 집어넣어서 자아를 만들어 버립니다. 자아란 자기 것을 자아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은 없습니다. 없는데 죄가 만들어내는 것이 자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잖아요. 자기 것이 있으니까 자꾸 창고역할을 해서 집어넣는 겁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잘나서 계속 집어넣고 집어넣은 그것을 괴물처럼 확대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사람은 자아가 없으면 뭐가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담깁니다. 예를 들면 들풀이 자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들풀은 자아가 없어도 누가 기르십니까? 하나님이 기르시죠.

참새도 누가 기르십니까? 참새가 자아가 있어서 창고 짓고 길쌈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참새 입장에서는 누구를 의존합니까? 자기를 기르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죠. 그런 관계 때문에 하나님이 기르시는 참새만 있고 하나님이 기르시는 들풀로서만 있는데 인간만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해서 ‘나는 나다’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너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들풀 봐라. 참새 봐라. 들풀은 하나님과 관계있고 참새도 하나님과 관계있는데 너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잖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하나님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지 ‘예수 내가 믿겠다’고 자기 창고에 예수 집어넣고, 성령 집어넣고 성부 집어넣고, ‘내가 성부 성자 성령 믿었으니 천당 간다’고 하면 누가 넣어줍니까? 천국에서 안 넣어 줍니다. 예수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한테 빨려 들어가야 됩니다. 포도나무, 내가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따로 있고 나는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 불과한 겁니다.

‘만일 너희에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밖에 버리워 살라진다’(요 15:6)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는 죽은 놈이다’는 말이죠. 산 사람 되도록 하기 위해서 너와 나의 관계를 다시 이으려고 하는데 그 잇는 방법이 뭐냐? 우리 쪽에서는 안 됩니다. 왜? 무슨 관계이든 다 내 것으로 집어넣기에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죽었다. 가만히 있거라’해서 피를 흘리는 겁니다. 피를 흘려버리면 ‘아하, 저쪽에서 알아서 하시는구나. 내가 구원을 받을 자격은 안 되는구나. 내가 설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관계망으로 뚫고 나오니까 그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관계망입니다. 그 자비의 그릇, 용서의 그릇, 사랑의 도구,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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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