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대구강의14-"티끌보다못한주제에"(정재현)을읽고1
07대구강의14-'티끌보다못한주제에'(정재현)을읽고1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7 대구강의 14 -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1 정재현 저, 분도출판사(왜관:1999)
07,10,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 라도 !!
오늘은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는 책에 대해서 하겠는데, 이 책제목은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거기에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가운데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양쪽에는 두 명의 천사들이 보디가드로서 나오고 말이다. 이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사실에 대해서 실사를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롯을 생각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데, 그리고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데로 찾아오시는데, 식사를 대접받을 정도로 말이다. 마치 친구처럼 그렇게 밀접한 관계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기 기도의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기를 더욱더 낮춘다는 것이다. 즉 "저는 티끌만도 못한 주제이지만, 감히 기도합니다" 라고 말이다.
이런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정말 티끌만도 못한 주제라면 기도도 하지 말고 그냥 찌그러져 있어야지, 기도는 무슨 기도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가 티끌만도 못한 주제인 줄 알지만 기도를 하는데, "의인 50명만 있으면 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 18: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 하지만 심판은 차질 없이 !!
결국은 창세기 18장과 19장이 보여주는 것은,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심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가?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심판은 사전에 협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감행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래서 50명에서, 40명으로, 30명으로, 20명으로, 그리고는 10명으로 점점 줄여 가는데,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이 심판은 차질 없이 그대로 감행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은 그대로 진행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거기에서 구원이 진행되느냐는 것인데, 유황불이 그렇게 내리는 가운데서 말이다.
◈ 소돔과 고모라, 과연 그 대비책은?
우리가 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유황불을 떨어뜨려서 심판을 하는데, 그런데 과연 천사가 직접 오지 않고 그냥 심판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대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①방공호를 판다. ②교외로 잠시 대피한다. ③물을 충분하게 준비한다.
사실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감행될 때, 그런 하나님의 심판행위는, 거기에서 구원될 수 있는 인간적인 가능성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행위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라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즉 "심판만 알려주시면 그 나머지 대피하는 것은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조차도 사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는 깜깜 !!
따라서 십자가로 구원이 된다고 할 때, 즉 구원문제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런 심판행위에 대해서도 ①심판과 ②구원을 전혀 우리가 모르는데, 여기서 1번을 안다고 해도 2번은 우리 인간들의 머리에서 전혀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1번과 2번이 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고 할 때, 그런데 신약에서는 십자가로 구원한다고 2번에 대해서 그 해결책이 나왔는데, 그렇다면 1번은 어떻겠느냐는 말이다. 지금 1번은 어떻게 되었기에 2번으로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로만 구원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을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방식으로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심판에 대해서 인간이 그 어떻게 대처를 해도 대처가 되지 않는데, 그러니 처참하기 이를 때 없는 심판이라는 말이다. 도저히 그 심판 앞에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종이나 자유자나 전부가 다 하는 말이, "바위야 내 위에 덮쳐라. 하나님의 진노에서 누가 피하리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는 납득할 만한 그런 구원론이 전혀 허락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는 말이다.
(계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계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계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 왜 아브라함은 말꼬리(?)를 달았는가?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왜 이러한 발언까지 하면서 까지 자꾸 하나님의 심판행위를 저지하려고 했는지, 정말로 자기가 티끌만도 못한 주제라면 그냥 꼬꾸라져 있으면 되는데, 왜 자기가 티끌만큼도 못하다고 분명히 말은 하면서도, 그렇게 뒤에 말꼬리를 달면서 참견하듯이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바로 아브라함이 생각한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방식이 달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생각한 심판방식은 무엇인가? 의인만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의인이 어떻게 악인과 함께 심판을 당하는 것이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에게 합당하느냐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생각에는 그런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말하는 그 의인이 누구인고 하니까, 약속의 사람이 바로 '롯' 인데, 즉 롯이 엄연히 있는데 왜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내려야만 하는지, 그러니 제발 그 심판을 연기하든지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나님께 무려 6번이나 간청을 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말이다.
◈ 과연 '의인' 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참 의외의 방식인데, 하나님은 소위 아브라함이 말하는 그런 의인과 악인을 함께 심판하시면서 그 중에서 의인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까, 이것이 더욱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데, 즉 "저는 의인입니다" 라고 우긴다고 해서 의인이라고 간주하지 않겠고, 이런 심판행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인은 오직 하나님이 제공하는 것에 의해서 의인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저는 의인이 맞습니다" 라고 우긴다고 해서 심판에서 빼주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의 반응을, 어느 정도로 심판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나야 하는고 하니, 순순히 그 심판에 대해서 순응할 정도가 되어야만 의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심판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정말이지 합당합니다" 라고 말이다.
◈ 의인과 악인의 동시심판을 통해서 !!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롯에 대한 의견수정에 들어가는데, 즉 "의인이니까 악인과는 함께 망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롯의 생각이고,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망하는 식이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란 말이다.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망하면 안 됩니다" 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생각이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생각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망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의인이 의인다움이 거기에서 피어난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대로 된 심판을 이야기하게 되면, "의인인데 왜 심판을 합니까?" 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맞습니다. 옳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의 심판을 합당하게 여기는 마음자세를 가진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의인이라는 말이다.
◈ 왜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인가?
그런 의미에서 정재현 씨의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는 제목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내용도 맞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이 양반이 창세기 18장에서 그런 제목을 따온 이유는, 인간이 제 아무리 자기가 죄인이라고 해도, 즉 인간이 티끌만도 못한 주제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그렇게 대들 수(?) 있는 권한까지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제목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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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현 - 연세대학교 철학과 문학사. 미국 Emory University 신과대학원 MTS, 문리대학원 종교학부 Ph.D.를 마쳤다.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공회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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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과 주제도 그러한데, 주제가 바로 '인간론' 인데, 사실상 440페이지를 넘어가는 두껍고도 굉장히 어려운 책인데, 얼마나 어려운지 앞으로 공부를 해보면 알겠지만, 저자가 철학과 신학을 모두 전공한 사람이기에, 그것들이 다 농축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가 말하는 신학도 철학의 연장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 저자, 복음도 모르고 십자가 신학을 어떻게?
하지만 저자는 나름대로 기존신학을 극복하려고 하는데, 이 책은 1999년도에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다음으로 나온 두 번째 책이고, 이것 말고 '신학은 인간학이다' 라는 것을 비롯해 그 뒤에 계속해서 나온 책들이 있는데, 아무튼 그의 책들을 읽어보면, 이렇게 안경을 쓴 이 저자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이 한국에서 자기 신학을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한국에서 말하는 신학들이 이미 철학에서 모두 다루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신학의 상황에서, 자기는 이미 그런 것을 다 마스터한 상황에서 새로운 신학을 첨가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누구도 자기 신학을 능가할 수 없다는 자신만만함으로 이러한 글을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철학이고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고, 외국으로 나가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십자가 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책의 뒷부분은 그가 말하는 십자가 신학인데, 즉 복음을 모르는 인간이 십자가 신학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흥미진진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교재를 살펴보자.
** 이 책은 '사람됨'을 대해서 철학적인 탐구와 신학적인 탐구를 시도한 책이다. 철학적인 탐구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어떤 이해가 가능한 지를, 그리고 신학적인 탐구란, 신으로 인해 생겨난 피조물인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로 맺어져 살아가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 철학, 신학, 복음 ??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학과 신학의 차이점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인간학이란 것은, 즉 철학이란 인간이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고, 그리고 신학은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학은 신을 먼저 우선하는데 비해서 철학은 인간을 우선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것은, 신을 우선으로 여기지만, 그러나 그 신 개념을 철학적으로 따져서 해체를 시켜버리면 다시금 인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 ①인간에서 인간, ②인간에게서 신, ③신에게서 인간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에서 인간으로 가는 것은 철학이고, 신에서 인간으로 가는 것은 신학인데, 그런데 이렇게 인간에서 인간으로 다가가면서, 그 인간에게 무엇이 있는가? 그 인간에게 신이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①인간에서 인간, ②인간에게서 신, ③신에게서 인간인데, 그러면 결국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철학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첫째는, 이렇게 신에게서 인간으로 나가는데, 그래서 인간 속에 있는 신을 규명하고 말이다. 그리고 둘째는, 인간 속에 있는 신을 끄집어내어서 인간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는데, 거기에서 인간은 바로 티끌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철학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높이는데, 그것이 어디까지인고 하니까, 신의 경계에까지 나아간다는 말이다. 굳이 성경에 나오는 용어대로 하면, 드디어 인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 인간이 그렇게 높여졌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높여졌는데,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제대로 된 철학을 공부해보고 또 신학을 공부해보니까, "아하, 인간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이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도대체 인간이 신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대답하기를, ①'인간에서 인간'을 철학으로 보고, ②'인간에게서 신'을 신학으로 보고, ③'신에게서 인간'을 복음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반은 그야말로 자신만만한데, 자기는 여기 있는 이 1,2,3번으로서 그 질문에 대해서 모두 다 설명했다는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철학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신학도 아니고 복음이 아닌, 그냥 철학이라는 말이다.
◈ 목사님, 여기 아침햇살 1박스 !!
그러니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인데, 물론 너무나 어려워서 탈이지 말이다. 얼마나 어려운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한 문장 한 문장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을 A4 7페이지 분량으로 노축해서 요약하다보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저는 나름대로 쉽게 하려고 무진장 애를 섰으니 그 노고를 좀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ㅋㅋ)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겠는데, 다시 교재를 보자.
** 여기서부터 철학은 '참'과 '있음'을 연결시키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
◈ 고대철학의 시발점 -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이렇게 철학은 '진리'와 '존재'를 연결시키는 작업인데, 즉 자기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인간다움인지, 그것이 바로 고대철학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인간에게 맞닥뜨리는 것이 신이 아니고 대자연인데, 자연은 인간보다 강하다는 말이다. 즉 태풍에 인간은 허약하고, 가뭄에 인간은 목말라하고, 거센 파도에 인간은 도저히 대항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한 수 배워야 할 어른이 누구인고 하니, 곧 '대자연' 인데, 그렇게 자연에게서 한 수 가르침을 얻으려고 하면 대자연의 원리를 끄집어내어야 하는데, 이 자연의 원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정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 대자연 - 고정과 변화, 어느 것에 우선권이 !!
이런 "고정이 우선인가, 변화가 우선인가?" 라는 싸움에서, 그 두 가지 흐름이 나란히 가는데, 그 주도권은 '고정' 쪽이 쥔다는 것이다. 그 고정됨을 '존재' 라고 하고, 변화됨을 '운동'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존재와 운동이 어느 것에 우선권이 있느냐고 할 때, 존재의 방향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선풍기가 이렇게 돌아갈 때는 변화하는 것 가지만, 그러나 끄게 되면 프로펠라가 선풍기 몸체에 고정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에도, 낮에 활동할 때는 마구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밤에 잠을 잘 때는 고정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움직이는 것이 인간다움인가? 아니면 고정되어있는 것이 인간다움인가?
사실은 그 두 가지 다가 나름대로 인간다움이 있는데, 그 원인과 결과를 따질 때, 사람이 잠을 자야 원기를 회복하고, 그 다음에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의 경우에는 "휴식에서 노동으로, 그 노동에서 휴식으로", 그렇게 돌아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역시 인간에는 고정된 존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자연도 인간도 존재에 합당하게, 변화를 무시하고 존재를 우대하는 쪽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리에 가장 근접하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의 철학이고 말이다.
◈ 아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뭐예요?
이런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저께 우리 집에 있는 사랑스러운 딸 진주가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와서는 "아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한 마디로 뭐예요?" 라고 하면서, 아주 부담스러운 질문을 던졌는데, 그 엄청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로 말해달라는 것이다.
◈ 진주야, 그것은 바로 '개별자' 란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개별자' 인데, 이에 반해서 플라톤은 개별자를 무시하는데, "이 모방체가 어디서 까불어?" 라고 말이다. 즉 인간이 중요하지 철수나 영희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수나 영희는 죽으니 말이다. 그렇게 죽으면 남아있는 것이 인간의 모상(模像)인데, 즉 인간의 본질이 중요하지, 개별자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일단 그것은 안다고 치고 더 연구해보니 개별자를 따로 더 알아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즉 인간자체보다도 개별자를 하나 하나 연구해서, 이것을 다시 종류별로 구별하는데, 성질 급한 놈, 더러운 놈 등등으로 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귀납법적 방법을 사용해서, 그렇게 진리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논리적으로 연역적 방법을 사용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와 개별자 !!
이렇게 개별자를 강조하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데, 왜냐하면 교회에서 성경말씀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러나 민중들은 인쇄술이 발달되지 못해서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고, 설령 성경이 있다고 해도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리고 라틴어로 된 성경을 어떻게 보겠느냐는 것이다. 프랑크의 토속 민족들만 있으니 말이다.
◈ 기억하자, 플로티누스 !!
그럴 때는 교회가 전체적인 교인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개별자로부터 출발을 해서 하나밖에 없는 하나의 존재, 즉 신플라톤주의인 플로티누스의 주장처럼 하나의 절대신에게 향하는 그 여정을 사다리처럼 서열화시킴으로 말미암아서, 지금의 이데올로기인 정치적 통치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즘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목사, 장로, 집사", 이런 식으로 해서, 목사의 권한과 절대권위가 이렇게 서열화를 시킴으로서 더욱 더 굳어지는 것을 정치적으로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 중세에서도 당연히 환영을 받았는데, 이런 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서양의 고대나 중세 철학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참'이라고 간주했고, 다른 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라고 분류했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원을 그려도 다 조금씩 틀리는 원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완전히 둥근 원은 따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그 생각하는 완전한 원은 '참' 즉 '진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인데 그를듯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조금씩 다른데, 도대체 누가 가까운가? 역시나 성경을 독점하고 있는 성직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히 아니까, 그들의 말을 들어야 질서가 잡히고 나중에 구원받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 이제는 복음으로도 구원받지 못한다 ??
오늘날 목사들이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복음으로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겁 없이 함부로 점점 더 강조하는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으로 안 된다는 말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모호하기 때문에 어느 놈이라고 안다고 하는 자체가 건방지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사도바울이 욕을 듣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내가 전하는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말을 하니까, "아니, 우리도 모르는 것을 니 혼자 어떻게 아는가?" 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에게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 갖다 붙이자는 말이다. 복음도 믿어야 되고, 행함도 있어야 하고, 성령의 삶도 있어야 하고, 열매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모두 가져다 붙이면, 설마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을 붙여놓았으니, 아마도 한 개보다는 두 개가, 또 세 개가 더 진리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듣는 교인들이 헷깔리든 말든 그것은 관심도 없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잖아" 라고 하는, 자기 정당성과 자기 변명에 치중해서, 자기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 십자가의 복음만으로는 안 된다 ??
이것이 중요하니,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렇게 "십자가 복음만으로 안 된다" 라고 했을 때, 이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십자가의 복음을 철학으로 다 변질시켜놓았으니 말이다. 우리가 저자에게 "당신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습니까?" 라고 하면, "나는 믿기는 믿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의 복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을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그 통과한 과정을 조사해보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안다고 했으니, 자기 딴에는 통과를 했을 것이란 말이다. 즉 어떤 십자가로 간주하고 통과했기에, 십자가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즉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100%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자기가 구원을 받고자 하는 그런 의지가 말이다. 즉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이라야만 옳은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한 것이 십자가에서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 무인도에 떨어진 성경책 한 권 !!
제가 서울에서 첫 번째 시간에 이런 강의를 했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 섬이 하나 있는데, 이렇게 야자수가 있고 물이 있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따다다다' 하면서 헬기가 한 대 떴는데, 거기에서 성경책이 하나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러한 장면을 지켜보면서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했을 때, "예, 성경대로 됩니다" 라고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무인도에 성경책이 떨어지고 난 뒤 2년쯤 후에 그 근처를 지나던 어선이 그만 커다란 파도에 난파가 되었는데, 한 사람이 겨우 헤엄을 쳐서 이 무인도에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때 그 양반이 마침 이 성경책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누군가가 2년 전과 동일하게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했을 때, 그 대답은 어떠해야 하는가? 역시나 "예, 성경대로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나의 구원과 말씀성취가 무슨 의미가?
지금 여기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 점인데, 인간이 성경책을 보던 말던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이 세상은 성경말씀에 있는 그대로 모두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니, 무인도에 어떤 인간이 겨우 상륙해서 목숨을 부지해서 성경책을 본다고 한들,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말씀에서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의미가 없다고 하는 이런 사실을 아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을 통과해야 안다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복음이 성경의 중심이고, 그래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눈다는 말이다.
그렇게 성경의 중심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냐는 것이다.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데,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십자가를 통과했다면, 더 이상 자기 구원은 !!
그러니 이런 십자가를 정말로 통과했다면, 과연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구원한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나' 라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즉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라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지난주에 서울에서 이 무인도를 한 예로 던지고 두 시간을 강의했는데, 아마 이것이 의존교회 교인들에게 상당히 어려웠던 것 같은데, 끝까지 이것을 처음 것과 연관시키는 게 힘들었다는 말이다. 사실 이것이 상당히 난해한 문제인데, 제가 그것을 예상하고 강의 중간 중간에 헬기를 다시 띄우고 했는데, 사람이 자기를 전적으로 상실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말이다.
교인들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잘못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보기에 첫 번째 있는 이것을, 즉 무인도 사건(?)을 성경전체에 들어맞게 이해를 했는지 말이다. 물론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아무튼 의구심이 좀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알아들었을 줄로 인정을 합니다만.
그러니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그것보다 먼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무인도에 헤엄쳐온 인간의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즉 "신은 왜 여기에 왔을까? 아하, 나를 구원시켜주려고 왔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했으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더 어려워졌습니까?
"아하,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주신 것은, 그것을 내가 읽고 구원받으라고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하는 것이 오해라는 것이다. 자기가 없어도 이 세상은 십자가 중심으로 잘 돌아가는데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도중에 물레방아에 '나' 라는 것이 그 하나로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구원 위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이장우 목사님의 명설교 !!
어제 이장우 목사님이 설교한 것을 들어보니 얼마나 제 마음에 쏙 들든지, 너무나도 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좀 남기고 싶은데, 그 내용이 어떠한고 하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불을 던지러 왔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고, 아버지가 자식과 싸우는 대목을 설교하면서 제일 먼저 무엇을 띄우는고 하니, 프란체스카의 '평화의 기도'를 도입부로 삼았다는 것이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설교자 모습인데, 평소에 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운을 띄워서, 거기에서 동의를 얻어낸다는 것이다. "제가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이것은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동의하는 부분인데, 그런데 성경본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둘을 딱 대입시켜서 교인들이 믿는 예수님을 다시 한번 점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장우 목사님의 설교는 육에 대한 견해를 충분히 실어주고 있는데,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냥 성경본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육에 대한 부분을 먼저 끄집어내어서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힘은 좀 들겠지만 말이다. 제가 그렇게 원했던 것이 바로 꼭 맞게 나왔다는 것이다.
'평화의 기도'를 먼저 실어줌으로 말미암아서, 교인들로 하여금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잘못된 하나님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가정에 불화를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그들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그동안 안일하게 교회에 그냥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닌지 말이다. 그러한 하나님을 수정하지(?) 아니하고 그냥 밀어 부치려고 한 것이 들통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워도, 당연합니다 !!
그러니 불화를 좋아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모두가 다 평화를 선호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예수님처럼 불화하게 하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게 되고, 예수님이 그렇게 불화하게 하는 것을 두고 박수를 친다는 말이다.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싸우게 하신 것도 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시어머니와 친할 뻔했네. 아비가 자식과 싸우는 것도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를 부셔버리는 것인데, 그러니 십자가는 설교를 하면서 먼저 자기 자신의 선입관을 박살내는 것인데, "역시 하나님은 결코 내 말을 듣지 않고 일하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철학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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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 For Peace
- St. Francis of Assisi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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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지만 근대 철학에 들어서서는, '그 진리가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 문제가 대두된다. 즉 '무엇이냐?'에서 '어떻게?'로 물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근대철학이 중세철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철학에서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 아는 것이고, 그 기본에다가 더 첨가할 것이 없느냐고 연구를 해보니, '어떻게' 라는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라는 것이 없었는데, '무엇이냐' 라는 것이지 말이다.
◈ 어떻게? - 근대주체사상의 시작 !!
그러니 이렇게 '무엇이냐?'에서 '어떻게?'로 물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되면, 즉 그동안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과거 중세철학이라면, 이제는 달을 알기는 아는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달을 알지?" 라고 한다면, 즉 그 동안은 달을 보다가 이제는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본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근대주체사상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이 책이 그런 이야기를 잘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니 '어떻게'라고 묻는 그 주체가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영역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 대상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주객관계에서 '무엇'의 객관성과 '어떻게'의 주관성을 상호 연관시키는 방식을 갖게 되었다.
◈ 근대 - 주체가 객체로, 객체는 주체로 !!
이제 '무엇'이 대상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아주 중요한데, '무엇' 이라는 것이 그동안 진리였는데, 이것이 그만 주체에서 객체가, 즉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객체이었던 '나' 라는 것이 주체가 되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내가 아는가?" 라는 '내'가 또 하나의 객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객체가 몇 개인가? 신과 하나가 되었던 시대에서, 신이 객체가 되는 순간에 뭐도 객체가 되는고 하니, 또 '나1', '나2'가 따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이 객체가 되면서, 즉자존재가 되고 대자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즉자(卽者), 즉 '나'로서의 '나'와, '나'의 대상으로서의 '나'가 분리된다는 것이다. (어휴!)
이렇게 되면 신에게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데, 왜냐하면 신은 따로 여기(?)에서부터 다시금 출발해야 하는데, 또 다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귀찮다고(?) 그런 것도 하지 않는데, "신은 알 수 없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Cusanus - Bewusstsein des Nichtwissens !!
15세기 사람으로 대주교인 쿠자누스(Nicolaus Cusanus)는 말하기를, "무지(無知)의 지(知)를 알아야 한다" 라고 했는데, (원래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서, Bewusstsein des Nichtwissens), 즉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이다" 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이 신을 모른다고 하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신을 아는 것과 같은데, 그것이 최고의 앎(知)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부정신학(否定神學)' 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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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신학 [否定神學, negative theology] - 무신론이나 반신론(反神論), 불가지론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규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그리스도 신학의 한 분야. -두사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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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과 무슨 상관이 !!
이것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사도바울은 한 마디로 말하면 '언약' 인데, 즉 새언약으로서, 옛날에 약속했던 바가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해서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 무지의 지가 어떻고 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이 신학으로 들어오니, 예수의 복음은 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려면 자기가 어떻게 해야 믿는지, 다시 자기의 인식론 문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교회가 인식론 문제로 들어가야 하는가? 한 놈이라도 더 꼬셔서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러한데, "이렇게 하시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말이다. "믿음은 그 정도면 되었고, 삶을 조금만 더 추가하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이광호 목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그런 것인데,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적인 사랑은 말고, 성령에 의한 사랑을 하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정말 두 가지 사랑에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개입으로 나온 것이 사랑이지, "여러분, 성령의 참된 사랑을 합시다" 라고 해서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랑합시다' 라는 행위 속에 자기가 절대화되어서, 즉 자기가 신이 되어서 존재하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가 부인된 상태에서 해야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긍정되는 가운데서 백 날 사랑을 이야기해봐야, 그 사랑을 쪼개보면 그 안에 자기 절대화가 그대로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사랑이 거절되면, "아니, 내 사랑도 몰라주고" 라고 대번에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나를 불신자로 만드는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 안에 '나'가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리고 '무엇'이 대상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주객관계에서 '무엇'의 객관성과 '어떻게'의 주관성을 상호 연관시키는 방식을 갖게 되었다.
저는 나름대로 쉽게 쓴다고 했는데, 이것보다는 더 쉽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아무튼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교재의 다음 부분을 보자.
** 나아가 칸트에 이르러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적 우위를 선언하는 선험성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 칸트 - 인간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칸트철학을 굳이 한 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인간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라는 것을 조사하는 것인데, 곧 그것이 그 유명한 칸트의 3대 저서로서 잘 알려진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비판' 이라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의 인식에 관한 문제이고, '실천이성비판'은 인식으로 되지 않으니까 실천으로 나가자는 것인데, 여기서 '비판'은 평가하는 의미가 아니라 한계를 지운다는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판단력비판'은, 이것저것보다 더 숭고한 것은 현상계에서 예지계로 넘어갈 수가 있는 방법은 차단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한계'이기 때문에 말이다. 조금 전에 말한 비판 말이다.
◈ 칸트 - '예술'이 곧 우리에게 남아있는 신적 요소 !!
따라서 현상에서 나온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지계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숭고의 미(美)' 라는 것이다. 정의로움의 미, 즉 예술인데, 이 예술이 바로 우리 속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신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술은 이성의 한계밖에 있어서 따질 수가 없는데, 칸트에 의하면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저 장미는 빨갛다" 라고 한다면 이성인데, 왜냐하면 이성은 빨갛지 않은 것과 대비를 하니 말이다. 장미가 노랗지 않고, 파랗지 않고, 하얗지 않기에, 그래서 빨갛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저 장미는 빨갛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주관적인데, '아름답다' 라는 것은 본인이 아름답다고 느끼면 아름다운 것이고, 아니면 말고 말이다. 즉 아름다움이 그 주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 김태희는 이뻐, 최진실은 저리가 !!
김태희를 보고 "아, 예쁘다" 라고 하면, 옆에서 "이쁘다고 하지마" 라고 하면, "알았어. 이쁘다고 하지 않을게. 그래도 김태희는 이뿐데" 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최진실은 인간성도 그렇고 별로 이지만, 그러나 김태희는 너무나 이쁘다는 것이다.
"목사님, 연애를 신자하고만 해야 합니까? 불신자하고 해도 됩니까?" 라고 한다면, 신자든 불신자이든 사랑이란 주관적인 것이 주체이고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설령 아슬람이라고 해도, 그 누구이든지 간에 이 사랑 앞에서는 아무도 당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땡기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 프로이드 - 의식보다 우월한 게 땡기는 무의식 !!
프로이드는 이러한 인간의 참을 수 없는 땡김을 두고서, 즉 의식보다 우월한 '무의식' 이라는 것이다. 이 무의식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의식이 나오고 말이다. 그러니 이미 중세와 근대에 다 나온 것을 현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더 세밀화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백 날 철학을 해도 플라톤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는 말이다.
◈ 지금 우리는, 진실은 없고 모방만 춤추는 세대에 !!
이것이 미메시스(mimesis), 즉 모방의 다양체인데, 모방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 네 개, 그렇게 늘어나는데, 거기서 모방만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즉 진실은 없고 모방만 춤추는 세대인데, 이 모방이 우리의 창조력을 자극하는 세대, 그 새로운 모방이 등장함으로서 자극을 받는 세대, 그 세대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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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메시스(mimesis) - 플라톤에서 이데아와 개물(個物)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 모방(模倣), 흉내와 함께 예술적 표현도 의미하는 수사학(修辭學), 미학 용어다. BC 5세기경 피타고라스파(派)에 따르면 음악은 수(數)의 미메시스(모방물)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플라톤에 이르러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플라톤은 여러 가지 개체(個體)는 개체가 되도록 한 형상(形相: idea)을 흉내낸다고 하여, 이에 의해서 현상계(現象界)의 열등성을 증명하는 이유로 삼았다. 플라톤에 따르면 현상계는 원형의 모방이다. 그는 주요저서 《국가론(國家論)》에서 목수나 화가나 작가가 모두가 집을 짓지만, 목수의 집에 비교해서 화가나 작가의 집은 허구(虛構)이며, 이것을 가상(假象)이라 하여 예술을 소극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을 플라톤으로부터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詩學)》에서 오히려 예술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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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가 넘실거리는 세대 !!
그렇게 자극을 받는 세대의 힘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즉 돈이고 권력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이런 힘에 의해서 농락을 당하고 있는데, 즉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이다. 그런 세대를 두고 저는 감히 '자아가 넘실거리는 세대' 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데 십자가가 바로 그 자아를 박살내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아니라면 무엇이 그 자아를 그렇게 부셔버리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아직도 복음인데,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께서 이야기하는 기적은 바로 요나의 기적으로, 즉 '십자가' 라는 것이다.
◈ 우리는 낙담케 하는 메시야 !!
이 요나의 기적은 그야말로 수치와 절망감뿐인데, 민중들이 원했던 그런 영웅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아주 수치스럽고 처참하고 비참한, 그리고 죽어버림으로서 우리를 실망케 한 메시야라는 것이다. 같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조차도 실망을 해서, "당신이 먼저 내려가서 우리를 구원해라.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메시야라고 믿을게" 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한없이 낙담하도록 만드는, 바로 그런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밉상을 받던 요나가 3일만에 다시 물고기 배속에서 튀어나오는데, 우리는 아직도 물고기 배속에 있고 말이다. 주님만이 먼저 튀어나왔는데, 우리는 컴컴한 물고기 배속에서, 즉 자아가 넘실거리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거기에서 건져내는 힘은 넘실거리는 우리 자아를 박살낼 수 있는 유일한 해머(?)인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욕과 육체를 못박는 그런 십자가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어떻게 보는가? 나중에 끝에 가면 재미가 있는데, 얼마나 십자가를 교묘하게 이용하는지, 철저하게 인간을 깔아뭉개면서도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전형적인 철학자들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자기 딴에는 "이 정도면 낮아졌겠지" 라고 하는데, 물론 엄청나게 낮추는데, 그러나 그렇게 낮추기는 하지만 포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 있으면 촛대뼈(?)라도 그냥 까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이다. 아직도 젊은 나이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인간의 주체적 부상과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피히테와 쉘링을 거치면서 존재론적으로 세계 구상적 자아로서의 위치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헤겔에 이르면 '있음'과 '앎'이 같다는 것을 선포하게 된다.
◈ 칸트, 피히테, 쉘링, 그리고 헤겔 !!
이것을 좀 설명해보면, 여기 피히테와 쉘링이 나오는데, 먼저 피히테는 자아 절대성인데, 이 세상은 자아가 구상한 것인데, 우리 교재에 나오는 대로 '세계 구상적 자아'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자아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즉 "자아는 자아다" 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오늘은 오늘 치의 세계를 구상하고, 내일은 내일 치를, 그리고 모레에는 모레 치를 구상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 김 권사님이 혈압이 조금 높은데, 아마 어제는 고혈압이 낮아지는 세계를 구상했지 싶은데, 그렇게 혈압이 좀 낮아지면, "우리 어디에 놀러가지?" 라고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구상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그 입원한 세계가 있을 것이고, 퇴원할 때는 또 새로운 세계를 구상한다는 것이다.
◈ 피히테는 절대자아, 쉘링은 대자연의 합의 !!
그러한 구상에 대해서 쉘링은 주장하기를, '대자연의 합의' 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피히테는 '절대자아' 라고 하면, 쉘링은 거기에서 나아가서, 자아는 대자연에 소속되어서 그렇게 대자연과 합의를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대자연과 합의를 하는데 절대이성으로 끌어오려고 한 것이 헤겔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 헤겔 이후 철학은 없다 !!
그래서 서로의 연도가 비슷한데, 즉 "칸트, 피히테, 쉘링, 그리고 헤겔"의 순서인데, 이 헤겔에 와서는 자연과 인간은 절대이성 앞에서 모든 것이 다 통일된다는 것이다. 정반합(正反合)으로 통일이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헤겔 이후에 철학은 없다" 라고 하는데, 이미 다 끝을 내었다는 말이다.
◈ 헤겔이 말하는 절대이성은, 바로 '성육신' !!
그렇다면 헤겔이 주장하는 절대이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제가 부산에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헤겔의 절대이성은 자기를 곧 성육신(?)화 하는 것인데, 즉 자기를 내어주고 다시 회수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곧 성육신이 아닌가?
바로 그 이론이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는 책에 나오는데, 하지만 제가 보기는 이 책이 제 아무리 뭐라고 해도 헤겔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너무나 어려워서 오늘은 다 못하지 싶은데, 아무튼 다음 시간에 헤겔과 하이데거를 공부해서 연결을 제대로 한번 시켜보자는 것이다.
◈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
아무튼 이 다음부터는 모든 철학들이 헤겔에게 시비를 거는 방향으로 전개가 되는데, 즉 헤겔이 변증법을 주장하니, 이에 반대해서 '아도르노' 라는 철학자는 부정변증법을 주장했다는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은 인간이 구상할 때 구상하기 위해서 짜투리로 내버려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만두피를 만들 때 보면 작은 둥근 그릇을 가지고서 동그랗게 찍어내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짜투리가 생기는데, 그것은 수제비를 만들든지 하고 말이다.
◈ 짜투리, 짜투리, 짜투리 !!
바로 그것인데, 사람은 이렇게 뭔가를 할 때, 즉 자기 세계를 구상할 때 배격해야 할 사건들이 있는데, 그것을 배제하면서 자기는 신과 함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아도르노가 보기에는 반칙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아도르노가 주장하기를, 이렇게 자기 입장에서 쓸데없다고 내버려둔 사건들이, 자기가 구성한 세계를 반대로 부정해버리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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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도르노 [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9.11~1969.8.6] - 독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로서 프랑프푸르트 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체계성을 거부하고 근대문명에 대하여 독자적인 비판을 제시하였다. 주요 저서로는《부정적 변증법(否定的辨證法)》등이 있다.
프랑크푸르트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에는 빈에서 음악에 종사하였으나, 1931년 모교의 철학강사로 취임하였다. 1934년 나치스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49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다시 독일로 귀국,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사회조사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950년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파시즘연구를 주제로 한 《권위주의적 인간》을 간행하는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체계성을 거부하고, 각 이데올로기 영역에 내포된 정신의 변질적 경향을 날카롭게 분석해내는 데 특색이 있으며, 근대문명에 대하여 독자적인 비판을 제시하였다. 또 현대음악성격에 대해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주요저서로는 위에 기술한 것 외에 《현대음악의 철학》(1949), 《Soziologica》(1962), 《부정적 변증법》(1966) 등이 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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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예수님은 배척을 당했는가?
저는 이런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십자가 사건이 문뜩 문뜩 떠오르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왜 배척했는가? 예수님은 자기 이스라엘의 질서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로마를 정복하면 메시야로 인정해줄 텐데, 그것이 예수님이 당한 광야에서의 두 번째 시험인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안 죽으면, 로마와 싸움을 할 때도 칼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능력 같으면 충분히 로마를 정벌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처럼,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 먹여 살릴 수 있다면, 그 기술(?)을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펼치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제일 중요한 경제문제가, 즉 생존의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이웃사랑과 구제가 다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따라다녔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들이 구상하는 세계에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비켜 가는데, 이렇게 비켜감으로 결국엔 버림을 받았고, 그러나 버림받은 그것이 부활로 다시 찾아왔을 때, 그래서 버림을 받게 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정죄를 받고 저주를 당할 때, 과연 그러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계관을 어떻게 믿을 수 있고, 인정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 아도르노와 하버마스 !!
아도르노가 이렇게 주장했을 때, 하버마스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아도르노를 반대하고 나오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해버리면 도대체 무엇을 내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요즘은 기억이 나지 않아서 환장하겠는데) 그렇다면 이 하버마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짜투리로 떨어져나간 사람들이 있을 때, 이러한 짜투리를 모으면 세계구상에 기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의 논리' 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현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 인데,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나 전두환을 배제시키지 말고, 그런 배제된 사람을 참여시키면 더욱 더 진리에 접근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즉 의사에 참여함으로서 새로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사회를 긍정하는 이론이 또 하나 등장했다는 말이다.
◈ 들뢰즈와 니체 !!
거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인간은 그렇게 참여해서 운동을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런 참여된 것에서 벗어나는, 즉 탈영토화 작업을 한다는 것이 들뢰즈의 철학이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있는 '권태' 라는 것을 왜 무시하느냐는 것이다.
◈ 사람은 진리가 아니라,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
이것은 니체가 발견한 것인데, 사람들이 사회이니, 교회이니, 병원이니, 국가이니, 가족이니, 말들은 다 그렇게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인간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권태' 라는 것이다. 의외로 진리는 그런 권태에 있다는 것인데, 사람은 결코 이 지루함을 이기지를 못하는데, 즉 사람은 진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에서 좋은 말이 참 많이 나오는데,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진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심심해서 일하는데,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서 말이다. 아무리 복음적이라도 같은 설교를 3번만 해보라는 것이다. 다들 자고 있지 말이다.
보통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기도를 하면 교인들이 왜 자는가? 물론 장로님의 기도가 길어서 그런 면도 있지만, 매주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다. "주여, 주일학생에서부터 장년부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라고 하니 그냥 모두들 다 잔다는 것이다. 언제 아멘을 할지 대충은 아니 그때 맞추어서 눈을 뜨고 말이다. 아무튼 지루하다는 것이다.
◈ 항상 새로운 소재를 찾아서 !!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왜 힘이 드는가? 새로운 소재를 개발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번에 히트를 쳤다고 해서 다음에도 히트를 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야 하는데, 그것을 그들은 아주 고상하게 말을 하는데, '창조' 라고 말이다. 다른 말로는 '창작' 인데, 창작이 없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의 말이 맞다는 것이다. 우리가 니체 강의를 언제 했지요? 아마 또 잊어버렸지 싶은데, 안개(?)에서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그것까지는 밝히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지만 헤겔 이후 현대철학에 와서는 "인간이 왜 '참'을 묻는가?"라는 실존을 해부하기 시작한다.
◈ 헤겔의 복음은 십자가가 아닌 성육신 !!
이것이 일리가 있는 말인데, 이 헤겔의 제자가 누구인고 하니 키에르케고르인데, 그것이 바로 지루함인데, 헤겔이 이렇게 다 이루어놓으니까, 이 헤겔을 공부할 때 알겠지만 이 헤겔은 빈틈이 없고 완벽하다는 것이다. 왜 완벽한고 하니, 철학에 복음을 집어넣으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은 복음이 아니지만 말이다.
◈ 신이 인간이 되었기에,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 !!
헤겔이 말하는 복음은 십자가가 아닌 '성육신' 이라는 것인데, 즉 신의 인간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신의 인간됨, 즉 존재론적인 복음으로, 이 복음을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언약이란 말은 없고, 다만 "신이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