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8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의 인격
20080408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의 인격
이름 : 한윤범(IP:59.6.189.184)
20080408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의 인격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보다 둘째 시간이 좀 더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오지 않으면 우린 개별자로 남아요. 분명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덮치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삽니다. 신학을 하든 믿음을 하든 전부다 궁극적으로 내 몫으로 나는 믿음 있다. 전부다 내 몫으로 돌아오게 돼있어요. 따라서 그리스도 인격 속에 뭐가 포함 돼있느냐 하면, 그걸 때려 부수는 속성이 있어야 그리스도 인격이에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돌아오는 그것을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려놓는 그러한 작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게 바울서신의 그 작업, 그 기능이 뭐가 되느냐? 이게 인격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아까 래드의 말이 틀렸다 이 말입니다.
기능하고 인격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기능이 구체적으로 인격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상식은 뭡니까? 여기 인격이 있고, 어떤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이런 일을 하네. 그 다음에 인격에 합당한 일을 하잖아요. 기능이 나오잖아요. 이게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철학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있고, 존재 다음에 기능이 있어요. 기능을 가지고 현대 19세기에 보면 이걸 ‘실존’이라 해요. 존재로서 기능을 발휘한다. 이걸 거꾸로 해서 실존은 미확정돼있고, 그때그때 기능마다 실존이 재조립된다는 것이 사르트르 이후에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죠. 주류에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어제 ‘나’하고 오늘 ‘나’하고 같다? 같다고 본 것은 옛날의 중세철학입니다. 뭐냐 하면, 같은 인간인데 잠재돼있는 것이 새삼스럽게 튀어나온다. 이래 보는 겁니다. 이거 이해되시죠. 같은 이장우 목사님인데 어제는 그런 일을 안 하다가 오늘은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이게 뭐냐? 중세철학입니다. 존재가 있고, 존재에서 나오는 존재가 쏟아내는 본질은 시간 따라서 쏙쏙 빼먹듯이 나온다. 이래 본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런 거짓말하지 마라. 왜냐? 어떤 이가 이런 일을 하니까 이런 기능을 하니까 그걸 소급해서 보니까 니는 이런 인간이다. 이게 맞지, 처음부터 나는 이런 인간인데 이래 나온다면, 그런 거짓말 하지 말란 말이죠. 예를 들면 훌륭한 목사님인데 추잡한 짓을 했다. 목산데 왜 추잡한 짓을 하냐? 옛날엔 그렇게 욕을 했는데 지금은 그래 보지 말고, 추잡한 짓을 해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게 얼마나 위로 되느냐 이 말이죠.
어떤 일을 통해서 다시 재조립하면 그런 인간이 나오지, 어떤 인간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게 나온다 하면 그 사람이 얼마나 부담되느냐는 거예요. 부담되니까 전부다 뭐가 돼요? 위선자가 돼요. 가식자, 위선자 하잖아요. 집에 가면 행동 다르고, 교회 와서 행동 다르고 다 다르잖아요. 이게 머리 속에 뭐가 박혔기 때문에 그럽니까? 나는 이런 존잰데 존재답게 해야 된다. 나는 신자기 때문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된다. 그게 아니란 거예요. 그래 하면 위선자가 돼는 거예요.
좀더 어려운 이야기 해볼까요? 들어보면 쉬울 거예요. 옛날에는 한국에는 농사만 졌고, 서양에서 농사만 졌습니다. 그 당시는 기독교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옛날에는 농사 잘 짓고 선비가 되면 훌륭한 인간이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관계의 중심이 농경사회기 때문에 하나만 나와요. 지금은 뭐냐 하면, 전부다 겹쳐 나와요. 교회 올 때는 훌륭한 집산데 막상 돈 거래해보니까 개판이더라. 사기꾼이더라.
이러면 어떻게 돼요? 하나의 인격이 아니고, 그 사람이 소속된 조직마다 변신하는 각자 딴 인간 돼버려요. 같은 교회 있을 때 집사님 하면서 좋아하다가 둘 다 시의원 선거하니까 둘이 죽으라고 약점 캐내고 완전히 딴 사람 되더란 말이죠.
오늘날 다원사회 아닙니까? 이 모든 걸 통합하는 게 있어요? 한 자에요, 한 자. 뭡니까? 돈이에요. 교회와도 돈이 최고고, 가정에 돈이 최고고. 옛날 같으면 아들 열 명 중에서 손가락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것이 농경시대라면 지금 시대는 뭡니까? 아들 열 명에서 돈 벌어주는 아들이 좋고, 용돈 잘 주는 아들 최고로 좋고.
전부다 모든 다원도 하나로 묶이죠. 이게 돈,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뭡니까? 자본이죠. 그래서 이 시대를 무슨 시대라 합니까? 자본주의시대. 자본 위주, 돈 위주의 사회입니다. 돈 위주의 사회는 그 사람을 뭐로 보느냐? 모든 인간을 뭐로 취급받느냐 하면, 장사꾼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목사도 장사꾼, 교사도 장사꾼, 학원 강사도 장사꾼, 전부다 장사꾼. 이 목사님은 여러 장사꾼 중에서도 여러 개 겹쳤어.
옛날엔 농사지면 하늘의 복을 받느니 이래 하지만 지금의 농사는 뭐냐? 농협에서 대출해서 시설투자해서 얼마나 남느냐에 따라서 농사져야 돼요. 농사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고, 돈으로 환산될 때 즐거워요. 돈이란 관계 안 들어가면 즐거움이 아니에요.
난 농사짓는 자체가 좋아. 이러면 안 돼요. 농사졌는데 얼마를 남겨야 즐거워요. 나는 예수 믿는 게 고마워. 이러면 안 돼. 이런 시대가 아니에요. 예수 믿고 난 뒤에 한 달 수입이 늘어나야 주님께 고마운 거예요. 마지막 돈으로 바꿔주는 가치를 바꿔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돈이라 돈.
이런 시대의 인간형은 뭐냐? 아무리 인간이 지금은 부모 말 안 듣고, 학교도 엉망이고 성적도 나빠져도 나중에 돈만 벌면 훌륭한 자손이고,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겁니다. 최진실이 공불 그렇게 못 했데요. 최진실이 돈이 수십억이 넘는데 누가 욕합니까? 돈만 벌면 공부 못한 게 아무 탈이 없어요. 장로, 믿음 좋다? 그것 필요 없어요. 돈만 헌금만 많이 하면 장로투표 일 등입니다. 일 순위잖아요.
자본주의사회에는 모든 인간이 뭐라고요? 제각기 전부다 뭐다? 장사꾼이다. 장사꾼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장사꾼과 장사꾼의 대화의 요지는 뭡니까? 주고받는 건 뭡니까? 복음, 십자가의 약속? 아니에요. 십자가 아니고 뭡니까? 돈. 저 사람 만나서 얼마나 돈 되느냐 그것만 따지는 거예요.
이러한 시대에서 존재에서 기능이 나온다는 이것은 존재에서 어떤 인간이 있기 때문에 이런 기능이 나온다는 이런 생각은 여기서는 완전히 무너져버렸어요. 현재도 무너지고 있고 인정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적인 생각이라면 주님 앞에서 허물어지요.
예수님의 인격이 어떻게 해서 우리를 허무느냐? 지금 둘째 시간에 그런 이야기한다고 아까 예고했지요. 예수님의 인격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허물어버리느냐? 요한복음 봅시다. 요한복음 7장 29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그 다음에 39절요.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래 돼있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한테 절대로 포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자체가 불가능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왜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면, 아까 한 것 다시 해봅시다. 자아가 뭐가 있다 했습니까? 윤곽이 있다 했지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내가 불뚝불뚝 내 것이 내가 예수 믿기라 하는 것은 내 행동이 아닙니까? 우리는 존재에서 기능이 나오잖아요.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되면 그 일한 범위만큼 내가 더 침범하게 되죠. 그럼 내 윤곽이 늘어나잖아요.
만약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잡아먹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내 편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아무리 해도 무엇에서 떠나지 못합니까? 자아라는 중심체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심지어 나를 부인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백날 소리쳐도 자기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을 때 내가 죄를 몰랐을 때의 나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난 뒤에 죄인 맞구나. 라고 해도 역시 남아있는 건 뭡니까? 역시 죄인 된 내가 남아 있잖아요. 자기는 자기를 떠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계속 내가 나를 바깥으로 파견하는 거예요. 이걸 대구에서 ‘자기 자리’라 했지요.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꼭 반대로 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쪽에 보냈다 해요. 보내는데 보냈으면 하나님 따로, 예수님 따로 이래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이나 보면 자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분명히 보냈다 해놓고는 안 떨어져요, 이게.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떨어지질 않아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자꾸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이 더 어려워.
방금 요한복음 7장에 뭡니까?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이게 내가 어디서 왔는가 증거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하는 일을 지금 확장시켜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해요? 예수님이 하는 걸 통해서 여기 있는 것을 이쪽으로 안으로 하나님 쪽으로 잡아당기는 끌어당기는 일을 누가 하느냐?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복음 6장 44절 했지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나에게로 올 수 없다. 네가 다가가는 이것은 전부다 일체 인정을 안 하는 거예요. 인정을 안 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의 존재에서 기능이 나온다 하는 이것조차도 일체 인정을 받지 못하게 돼있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중요한 것 합니다. 이건 아까 첫째 시간에 했으니까. 이제부터 핵심이 풀리게 돼요. 신약에 뭐라 돼있지요? 주, 그리스도. 주는 여호와 아닙니까? 그리스도는 뭡니까? 메시아죠. 여호와께서 일하시는 그 일이 너희에게 덮친다 할 때 이것은 바로 처음부터 이 세상은 누구 것이냐 하면, 주님의 것이었다 말이죠.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하는 일 중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렇게 혀를 날름거리면서 표현이 그렇습니다만 혀를 꾸불꾸불 움직이면서 전부다 하나님의 약속이 덮쳐오지요.
덮쳐올 때 이쪽에 예수님이 하는 말은 이쪽에서 이해 못하고, 예수님이 하는 일은 이쪽에 이해하고 그래요. 우리는 하나의 존재로 본다 말이에요. 여기서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존재로 본 것을 덮친다 하면 참 쉬운데 그게 아니고 이 존재가 그냥 덮쳐버리면 여기서 장악해서 구원되는 겁니다. 이러면 성경적이 아니에요. 그거는 하나의 신비론이 되고 영지주의가 돼버려요. 뭐가 와서 덮쳐버리고 구원한 거 없어요.
뭐냐 하면, 철저하게 이쪽의 죄를 드러내요. 이쪽의 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주께서 덮쳐서 구원해야 된다 말이죠. 사람이 강제추행을 하게 되면 추행당한 사람이 뭐를 모릅니까? 자기 죄를 모르게 돼요. 오히려 자기는 피해자로 보잖아요. 그런데 성경이 어려운 게 뭐냐?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추행을 당해놓고도 진짜 나쁜 놈이라는 걸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용을 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의 계획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정말 어려운데. 악이 무엇이고, 죄가 무엇이냐를 죄인인 우리가 몰라요, 지금.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게 이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쉽게 말하면 죄인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아직 몰라요. 하나님이 아는 만큼 우리 죄를 우리가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소원이 하나 있어요. 그리고 주님의 소원인데. 주님의 소원은 뭐냐? 우리가 우리 죄를 낱낱이 아는 게 주님의 소원이라면 성도도 그 주님의 소원을 닮아서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게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게 되죠.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내가 착한 사람이 됩니까? 이러면 자기가 힘들어져요. 사는 게 힘들어져요. 부담이 되고, 완벽해야 되고, 철저해야 되고, 술 취하면 안 들켜야 되고, 남한테 내세울 게 있어야 돼요. 힘들어요. 주님 보시기에도 성도가 그렇게 살면 기가 막혀요.
그런데 바꿔보세요. 아직도 우리가 소원이 있는데 내 죄를 아직도 몰라요. 주여, 소원이 있는데 내 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주께서 피를 흘려야 됩니까? 따라서 이 피를 흘린 만한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옵소서. 라는 식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세상에 주어진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거리밖에 없어요.
세상에 죄인인데도 자식 주고, 죄인인데도 애 공부도 잘하고, 죄인인데도 교인 있게 하고, 세상에 이래 가지고 죄를 모르는데, 주여, 더 망해야 됩니다. 이래 가지고 교만해서 안 되니까 더 망하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생각을 마음가짐을 거꾸로 해버리면,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요소가 하나님 인격 속에 포함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예수님 하는 일과 보통 우리와의 차이점이 한 마디로 대라 하면, 바로 항상 예수님은, 나는 성경대로 이루려하심이라. 어떤 일을 할 때 성경대로 이루려하심이란 말은 뭐냐? 나는 네 말 안 듣는다. 예수님께서 이근호 니 말 안 듣는다. 오직 나는 성경대로 이루려하심이라.
이 말은 우리에게 뭘 의미합니까? 너도 너한테 관심두지 말고 성경이 어떤 내용인지 관심 좀 두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책 보고 있는데 우리는 날 보라고 찝쩍거려요. 주여, 날 좀 봐주소. 내가 한을 품은 게 있는데 풀어주소. 내가 가정에 어려운 것 풀어주소. 시끄럽다. 난 지금 성경보고 있다. 난 성경대로 이루려함이라. 성경보지 말고 답답한 양반, 참. 나 좀 보라고. 산후우울증 걸렸다고.
요새 산후우울증 걸린 사람 많아요. 젊은 사람 굉장히 많아요. 산후우울증이 왜 걸리느냐 하면, 옛날에 농사 질 때 애 낳을 때 산후우울증 없습니다. 그게 왜냐하면 뭐가 없기 때문에? 자아가 없기 때문에. 옛날엔 밥만 먹여주면 시집갔어요. 요샌 시집갈 때 단단히 마음 각오하고 갑니다. 시집가서 행복하지 않으면 무르기를 작정하고 오기 때문에. 이게 생리적으로 자식 키운다는 게
여러분, 희생을 한다는 말 자체가 이게 문제가 있는 게 희생을 하게 되면 반드시 대가를 기대하고 희생합니다. 그런데 생리적으로 여자는 애 키울 때 대가 없는 희생을 하게 돼있어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존심을 위해 살아가지만 실제로 자본주의사회에 사는 여성의 몸은 자식 키울 때 보면, 대가 없는 그냥 희생만 하는 거예요. 계속 희생만, 희생만 하면서 대가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뭡니까? 교육 받은 게 뭡니까? 반드시 희생하면 언젠가는 대가는 돌아온다. 그걸 강조하다 보니까 그 비현실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우울증 걸리는 이유가 뭐냐? 내가 애 키운다고 대학 공부를 물 먹었느냐? 이것 한다고 친구도 못 만나고, 내가 애 키운다고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젖은 축 늘어지고, 뱃살은 나오고 도대체 뭘 찾을 수가 없습니까? 자아를 못 찾지요. 자아를 못 찾는 걸 두 자로 뭐라 했습니까? 죽음이죠. 죽음을 자진해서 해야 된다는 것이 여자의 길이거든요. 창세기 3장 15절 아닙니까?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거예요. 여기서 발작을 하고 거부를 하는 거예요. 거부도 하다보면 나중에는 바깥에다 거부하는 게 아니라 남편한테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것도 안 되면 결국 누구한테 거부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거부해서 아파트 창문 열고 뛰어내려버려요. 아이하고 같이. 그게 바로 현대라는 병입니다.
옛날에 농사 질 때는 그저 자아가 없어요. 배틀하는 여자처럼 밥 한 끼 줄이려고 식구하나 줄이려고 밥만 먹여주면 시가 집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애 낳으면 애 낳고, 딸 낳으면 쫓겨나고, 씨받이 하고 뭐든지 다 했어요. 그때 우울증 없었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자 하는 게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우리는 희생을 요만큼 해놓고 반드시 뭘 바랍니까? 대가를 바라는데 이거는 예수님 하고 아무 상관없고 자아 찾기, 자아 뽐내기에 불과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이루어진다는 건 우리한테는 무지무지하게 냉정한 거예요. 더 다른 말로 하면, 정말 비정해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불가능한 겁니다.
성경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우리 정낙원 목사님 글 잘 썼지요. 성경 안에 선악과의 실체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뭐가 담겨있는가? 생명나무의 실체가 담겨있습니다. 인간이 망가뜨린 이 선악과, 생명과와 인간이 망가뜨리면, 성경말씀 망가뜨렸다고 주께서 우십니까? 인간은 망가뜨려도 선악과 심은 그 이유, 목적, 생명나무 심은 목적, 이유는 하나님이 손에 의해서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 이것이 바로 냉정하고 비정하고 우리한테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악과가 뭐냐 하면, 선과 악에 대한 지식 아닙니까? 맞지요. 그러면 악이 뭔지를 누가 알아야 돼요? 성도, 너는 알아야 된다. 선이 무엇인지를 누가 알아야 돼요? 성도, 너는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생명이 뭐냐? 성도, 너는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기독교란 뭐냐 하면, 주님만이 아시는 그 일에 자기 백성을 데려다가 니 하나님은 이런 것 알거든. 라고 자기 아는 것에 우리를 집어넣는 아주 냉철한 과정, 그 세계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게 이 성경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욕을 해요. 어떤 사람 하는 게 사실은 처음 나온 것도 아니고 목사고 장로들인데, 예정, 하나님께서 그럴 리 없다는 거예요. 누구는 지옥 가도록 예정돼있고, 아예 아무리 애써도 그 사람은 지옥 가야 되고, 어떤 사람은 천국 가도록 예정돼있어서 아무리 타락해도 그 사람 천당 가야 된다. 라고 그렇게 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여기 보면 그래서 래드 말대로 지금 바울서신에서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고유명사로 구분한다는 그 말은 맞아요.
여기 주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제가 주가 된다는 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주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포함해서 지옥 갈 사람까지 합해서 주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 나만 생각하는 나의 주, 나만 구원하는 나의 구세주 자꾸 이것만 생각하니까 예수 믿는 자기가 잘나서 이게 문제야. 예수 믿어주는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지 몰라. 남들은 교회 안 가는데 이 바쁜데 교회 나왔으니까 얼마나 대견스러우냐. 이렇게 봐요.
이게 뭐냐? 우리가 죄에요. 그게 죄에요. 그걸 줄여서 이야기하면 더 어렵지요. 예수 믿는 게 죄에요. 예수 믿는 게 죄라는 말은 기존에 책 쓰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너희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데 예수 믿는 게 죄라면 도대체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주 개념이 우리하고 안 논다는 개념이에요. 주께서 구부리든, 우리를 쪼개든, 우리를 돌에 맞아 죽게 하든 주께서 하실 것이다. 나귀 좀 쓸까요? 내 나귀 왜 씁니까?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가져가세요. 그게 주라니까요.
무화과나무가 있는데 쪼다 같이, 쪼다 아니지, 무화과나무는 대자연 속에 속한 무화과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자기가 뭐 할 수 없어요. 대자연의 변화 속에 같이 움직여요. 과실 맺을 때가 안 되면 과실 맺으면 안 돼요. 그럼 지가 돗대가 돼요. 지가 주가 되는 거예요. 과실 맺을 때 안 되면 과실 안 맺어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고픈데 과실 없다고 저주해버렸어요. 누가 놀라느냐? 제자들이 놀랬어요. 왜냐하면 제자들도 대자연 속에 제자에요. 기껏 안다는 게 뭐냐? 대자연에 함께 움직이고, 함께 살아가는 이게 인간이라고 알고 있는데 자기와 똑같이 처지에 있는 무화과나무가 세상에 때가 안 됐는데 과실 없다고 저주 받았으면 그럼 졸지에 저거들은 뭡니까? 저주 받아도 할 말 없다는 존재인 것을 본인들이 인정을 못하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지옥 가도록 작정되었다는 것을 자신들이 인정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 인정 못하겠다는 것이 뭐다? 그게 선악과에 감추어진 뭡니까? 악에 해당되는 것, 악의 실상이다, 악의 내막이다 말이죠.
주님이 주가 아니고, 평소에 누가 주가 돼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주가 된 게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바보같이 선악과 따먹으면 그 선악과 위에 있습니까? 성경은 선악과 따먹으면 선악과에 복속이 되지 예속이 돼버리지, 선악과 따먹었다고 선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선악과 따먹으면 선악을 지배하는 하나님이 된다는 거예요. 마귀가. 그 마귀의 소리는 지금도 계속 울립니다. 예수 믿는 것 니 알아서 믿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뜻이 아니고, 하나님 뜻은 뭐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올 수 없다. 결국 남는 죄가 뭡니까? 아버지께서 이끌어서 예수 믿느냐, 내가 알아서 예수 믿느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의 차이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예수님께 왔다가 썰물처럼 가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기름때밖에 없어요. 불가능에 도전해요. 지금 예수님이 하는 일은 전부다 불가능입니다. 그 불가능이 우리한테 매일같이 남아있어야 돼요. 불가능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 신자 아닙니다. 그래서 불가능이 있기 때문에 우린 믿습니다. 나를 안 믿고 주님의 주 되심을 믿습니다. 이게 인격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이게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고백이에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게 말, 문자로 때운다고 되는 게 아니고, 그 고백을 위해서 주께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성을 일으키지요. 성령께서. 불가능성을 자꾸 일으켜요.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 경험상 이렇게 해요. 사람 사는 게 지 마음대로 안 됩디다. 가끔가다 그런 괜찮은 고백해요. 맞습니다. 심방한다고 교회 더 오는 것도 아니고, 심방 안 한다고 교회 떠나는 것도 아니고, 교회 부흥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지 하나님이 해서 안 되는 게 없더란 말이죠. 하나님 뜻대로.
자, 여기서 지금 선악과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선악과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을 통해서 뭐가 나타나야 되느냐? 선이 무엇인지 나타나야 되고, 예수님을 통해서 악이 무엇인지를 나타나야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권이 있어서 악은 지옥 보내고, 모든 사람이 때가 있는데 그 때는 무슨 때냐 하면, 성경대로죠.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어려워서. 예수님은 뭐밖에 모른다? 성경대로밖에 모르죠. 그러면 예수님의 모든 때 성경대로 되죠.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아들의 음성을 들을 뭐가 옵니까? 들을 때가 오나니. 일산의 성폭행 미수자가 어디서 잡혔어요? 목욕탕에서 잡혔지요. 목욕탕 사우나 가면 안 잡히는 줄 압니까? 목욕탕에 마이크 있어서 다 불러내지요.
죽으면 예수 안 믿어도 됩니까? 무덤 속에 있는 자, 목욕탕 속에 있는 놈들도 반드시 현재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들을 때가 오나니. 마지막에는 기어이 선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이유가 우릴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의 주가 되시고 생명나무의 주가 되시는 주의 자신의 숙제를 자기 과제를 자기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거예요. 아주 침착하게, 아주 냉정하게, 비정하게.
성경 그래보면 다 보입니다. 성경을 예수님이 돌아다니며 설치는 것 다 보여요. 내가 보니까 하나도 이해 안 되는 거예요. 주여, 이것 못 합니다. 이것도 못 합니다. 좀 있다 할게요. 믿음 좋을 때 할게요. 맨 날 내가 한다고 하는데 내가 하는 게 못 되고 주께서 성경말씀, 아까 했잖아요. 성경대로 이루려하심이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어느 놈이 지킵니까? 아무도 못 지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돈을 못 벌어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인 속성 아닙니까? 돈을 벌고 안 벌고 관계없이.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사랑하지 않는 사람 어느 있습니까?
CF에 이런 게 있어요. 자기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서 활주로에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막은 사람 있어요. 자기 아내를 비행기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여자 내려서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요? 돈 좀 빌려 줄 수 있겠나. 그랬더니 그 남자 난처해하면서 솔로몬에서 그래하는데. 난 몰랐는데, 솔로몬금융대부업체 선전입니다.
부자되었다 이 말이 아니고, 부자 안 되도 망해도 돈을 사랑하는 속성은 평생을 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이 많다? 한 물 갔다? 천만에 말씀, 돈만 있어 보세요. 할머니란 할머니 다 달려듭니다. 돈 많은 영감, 어디 가도 인기 있고, 돈 없는 영감은 젊을 때도 인기 없고 늙어서도 인기 없고. 돈 없는 자식 어디 가도 자식 우세한다고 말 꺼내지도 않고, 돈 있는 자식 어디 가도 자랑합니다.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주세요. 우리가. 왜? 우리의 소망은 뭐라고요? 내 죄가 무엇이냐를 아는 것이 그게 곧 주의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성경 보니까 이것도 못 지키고, 저것도 못 지키니까 이게 우리의 기도할 제목이죠. 우리에게 들이닥친 주님의 인격입니다.
마귀는 자꾸 쑤셔대죠. 왜냐하면 마귀가 쑤셔 대서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애야, 속에 양심 있잖아. 니가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선도 알고 악도 알잖아. 폼으로 선 아나? 악을 빨리 이기려면 선을 행해야지. 니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빛과 소금의 역할 해야 될 것 아니야. 예수를 본받아 될 것 아니야. 왜 너는 선을 행하지 않아. 그러니까 니가 저주 받아서 집안 꼴 그래 됐지. 앞으로 잘해 봐라. 더 잘되지.
그러니까 집안 꼴이 잘 되고, 못 되고를 마귀는 뭐로 측정합니까? 돈 벌면 복 받은 거고, 아무리 착해도 돈이 안 생기면 저주 받은 걸로 간주하는 이것이 이 자본주의사회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마귀의 통치 하에 있기 때문에 진짜 복이다, 저주를 뭐로 환산입니까? 돈, 한 달 수입으로 환산합니다. 교회 같으면 교인수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꽉 박혀있어요.
어제 대구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중요한 거기 때문에 한 번 더 해봅시다. 자식이 태어날 때 자식은 자기 존재가 태어나는 거지만 그게 아니에요. 자식이 태어날 때 관계망이 있어요. 관계망에 보니까 여기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동생 삼촌도 있고, 누나도 있고, 오빠도 있고, 여기 엄마 친정집이 있어요. 여기 빈 자리에 자기가 태어난 거예요.
태어난 동시에 나는 태어났다 이래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그물망에 잡힌 거예요. 제가 울산에서 그런 얘기했잖아요. 어떤 여자가 형수 되려고 결혼하지 않잖아요. 어떤 남자의 아내 되려고 결혼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까 시동생 하는 말이, 형수님이 우리 엄마한테 그러면 안 되지요. 우리 어머니 섭섭하게 하면 형수로서는 가치가 없죠. 술 먹고 한다 말이죠. 누가 형수 되려고 했나?
그런데 형수란 자리는 자기가 선택한 자리가 아니라 태어나니까 얽힌 자리에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꾸 자기만 생각하는데 그거는 오산입니다. 내 자리라 하는 것은 나한테 얽혀있는 수십 가지의 관계가 만들어낸 그것을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자아’라 합니다. 이놈한테 얽히고, 저놈한테 얽히고, 얽히고설킨 관계망 속에서 비로소 ‘나’가 된다.
그러니까 엄마, 왜 날 이렇게 낳았어? 말을 못하죠. 엄마, 아빠를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이 자리가 중요한 이유가 이것 모르면 성경 안 돼요.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을 때 바보같이 아담은 이걸 따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선악이란 실체의 관계에 놓인다는 생각을 못하고. 로마서 5장에 뭡니까? 죄를 따먹으면 무슨 관계? 죄의 아래에 놓인다는 걸 모르고.
마귀는 알아요. 이왕 지는 망한 몸 아닙니까? 예수여, 우리를 망하려고 왔습니까? 이왕 망할 것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도 지 망할 그물망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자기는 맛있다고 따먹었는데 하나의 덧이었습니다. 따먹고 나니까 하나의 관계 속에 들어갔어요. 그 관계 속 빼도 박도 못해요. 관계가 자리를 만들어요. 뭘 해도 죄가 돼요. 빼도 박도 못해요. 그러니까 그 관계는 바로 악의 관계, 악의 자리죠.
그래서 주님께서 성경을 볼 때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는 어떤 우리 옆에 얽힌 관계 전체를 보고서 말씀하는데 바리새인들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왜 나를 질책하느냐? 자기 존재로 달랑 예수님이 자기 한 몸하고 따지는 줄 알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가 전체가 시커먼 어둠에 속했거든. 우리가 왜 어둠인데, 우리는 죄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인데 이러거든요. 너희 아비는 마귀거든. 이렇게 하죠.
용서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십자가 피 믿고 용서받았다. 또 존재라. 교인들 마찬가지 아닙니까? 얘는 예수 안 믿는데 지금 예수 피 믿고 나 구원받았지요. 목사님, 저 구원받았지요? 이러고 저 세례 받을 랍니다. 구원받았으니까. 예수 믿고 또 자기한테 오는 거예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렇게 한다고.
예수 믿는 것은 옛날에 선악과 따먹고 죄의 지배 아래 있다면, 예수를 믿게 되면 의의 관계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의가 죄를 지어도 용서란 이름으로 계속 용서가 퍼부어져요. 이제는 용서받은 자 입장이지 나라는 입장이 아닙니다. 나는 없어지고, 내 속에 용서란 그물 고리만 여기 있을 뿐이에요.
용서, 죄 사함 받는 것 그걸 로마서 9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긍휼’ 그래서 우리는 무슨 그릇이다? 긍휼을 다른 말로 하면, 자비죠. 우리는 자비의 그릇이죠. 자비의 그릇이고 저 사람은 무슨 그릇? 진흙. 둘 다 공통점은 관계망 속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
재미있는 것은 선악과의 실체나 생명나무의 실체를 예수님이 혼자 하시는 게 아니고,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죄 많은 자기 백성과 지옥 갈 사람들을 동원해서 선악과의 실체, 생명나무의 실체를 비정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뱀의 자손은 있어야 돼요. 마귀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도 있어야 됩니다. 전체가 뭘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자리, 예수님이 보여줄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내막을 감춰진 비밀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야 됩니다. 아주 냉정하고, 냉철하고, 비정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개인적인 한풀이 가지고 도와주세요. 주여 어렵습니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정말 예수님은 성경대로밖에 안 해요. 성경만.
이 기능이 마지막 때에 이 기능만하다가 드디어 실체가 드러나는데 그 실체가 오늘 강의 제목 뭐지요? [그리스도의 인격] 기능 안에 누가 필요하다? 지옥 갈 사람도 필요하고, 누가 필요하다? 천국 갈 사람도 필요한데 그것이 그대로 기능이 뭉쳐져서 마지막 때 사람이 오시니까 인격이니까 인격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저쪽은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격입니다.
그래서 인격 안에는 예수님, 거기 계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이게 아니라 인격 자체가 덩어리죠. 인격 자체가 우리를 덮치는 발휘하는 인격이죠. 그래서 꿈에 예수님 봤다. 키가 180이다. 소용없는 거예요. 그 인격은 현재 우리 인격을 확대한 거예요. 예수님의 인격은 우리한테 항상 기능으로 나타나지, 여호와의 기능으로 나타나지 어떤 실체로 나타나는 게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고기 먹었잖아요. 그때는 뭐냐? 이런 게 어려운데. 예수님께서 부둣가에 앉아 있었다고. 공원지기이십니까? 나, 예수다. 분명히 실체 맞지요. 엠마오 내려갈 때 뭐였습니까? 두 사람은 갔는데 한 사람 옆에 가지요. 세 명이 갔지요. 밥 먹고 난 뒤에 사라졌어요. 도마가 있을 때 문 닫혔는데 들어왔지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목적은 인간이 갖고 있는 실체 개념과 존재 개념, 이런 것을 능가하면서도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해요. 이걸 사용해요. 창자국 봐라. 이거 못자국이다. 사용해요. 나는 영이 아니고 실제로 살아있다. 할 때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해요.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완전히 사람들의 용어를 그대로 써요. 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자아라는 한계를 벗어버리기 위해서 그쪽 한계에 들어와서 벗어버려요.
그러니까 그냥 낚시로 구원하시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간다고. 이 말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난과 질곡과 아픔을 아시고 가요. 아시면서도 비정하게 한다고. 제가 예수님이 성경대로 비정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거예요.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그렇게 이성적이 아니라 감정도 있고, 슬픔도 있고 아픔도 있다고.
있지요. 근데 슬픔과 감정에 호소했습니까? 안 그러면 성경에 호소했습니까? 주님께서 감정대로 그때그때마다 아, 그거 두 시간 뒤에 할 걸. 미리 당겨서 하고 그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슬픔과 감정조차도 어디서 나온 감정이에요? 인간과 접촉하기 위한 슬픔과 감정이죠.
주와 그리스도에게 만약에 인간적인 감정만 남아있다면 그야말로 불교신자 하는 말처럼 예수가 자기가 만든 인간 피조물이 지옥 가도 그걸 즐긴다? 이거는 인간 말종이야. 그건 예수 이전이 인간이 안 됐어. 이러거든요. 어떻게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지옥 가서 영원히 못 빠져나오는데, 그걸 보고 아무런 느낌이 없이, 또 예레미야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너희들이 벌 받으니까 속이 시원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 말이죠. 그래놓고 그게 뭐가 자비냐 말이죠. 이렇게 주장하잖아요.
현재 인간들의 감정, 인간들의 모든 이성 누구 중심입니까? 이미 선악과 따먹고 모든 사고방식이 선악체제에서 못 벗어나잖아요. 선을 행해야 되는 악밖에 없구나.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해서 악을 보충할까? 이것밖에 모르는 그게 뭐라고요? 그게 죄에요. 우리의 감정이 죄고, 우리의 기쁨이 죄고, 우리의 슬픔이 죄고, 우리의 후회가 죄고, 우리의 반성이 죄고, 우리의 회개가 되는 겁니다.
진짜 죄가 아닌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지, 자기의 회개를 믿는 건 죄가 되는 것, 자기의 반성을 믿는 건 죄가 됩니다. 나 이렇게 반성합니다. 죄가 되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라 이 말입니다.
자기감정과 이성과 그걸 떠나버려야 되는 거예요. 근데 이것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뭘 보여준다? 죄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죄를 보여줘야 돼요. 죄를 보여주고 성도는 여기에 뭐가 들어갑니까?
죄는 죄대로 보여주면서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죄 맞습니다. 라는 고백하게 함으로써 진짜 선악과의 주체는 진짜 선과 생명의 주체는 오직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선이고, 어떤 사람을 지옥 보내는 것도 아이고, 잘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천당 보내는 것도 아이고, 잘하셨습니다. 하고 모든 공로를 예수님께 잘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가 해야 될 예수님 증거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격이 있는 사람은 우리의 소망은 하루하루 살면서 성경보시면서 아, 이래서 우리가 예수님 피를 흘려야 되는구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서 왔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분을 땅에 있는 같은 보통 사람 취급해서 내 사람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는 위에서 났다고 했는데 땅에서 난 사람인 줄 오해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성경대로 말씀대로 하는데 우리는 내 뜻대로 안 해 준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예수님 하신 일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는데 그중에 우리가 휩쓸려간다는 이러한 기쁨, 이러한 고백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사랑인 줄 깨달을 수 있는 저희들 만들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