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8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의 인격
20080408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의 인격
이름 : 한윤범(IP:59.6.189.184)
20080408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의 인격
(강의:이근호 목사)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이 책에 보면, 이 책은 항상 읽어 오셔야 되는데 이 책에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 해놓고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용어, 주라는 용어, 하나님 아들이라는 용어, 인자라는 용어는 왜 안나오느냐? 그런 용어에 대해서 쭉 나와 있거든요.
근데 생각해봅시다. 용어에서 능력이 나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용어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주, 주, 주 한다고 주님이 구원하는 것 아니잖아요. 어떤 용어를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그걸 외운다든지 그걸 목소리로 발성해서 그 용어를 끄집어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이고, 니가 그 용어를 사용하는구나. 구원해줄게. 이런 경우는 없다 이 말이죠.
뭔가 성경에서 용어가 나오면 이 용어에서 구원의 능력이 되려면 뭔가 중간과정이 거쳐야 되겠지요. 그런데 용어를 부를 때 용어 부르는 것은 누가 부르느냐 하면, 인간입니다. 인간이 발성한다 이 말이죠. 인간이 발성해서 인간이 어떤 용어를 불러서 그래서 인간이 구원받는다. 이렇게 한다면 이거는 어디서? 밑에서 노는 아래층의 인간들에서 노는 행함의 층에서 나오는 논의거든요.
이러면 남묘호랭개교와 똑같다 이 말이죠. 어떤 용어를 부르면 내가 용어를 불렀단 이유 때문에 어떤 능력이 임해서 구원을 받는다. 이런 것은 인간 층에서나 통할 이야기다. 이거는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분명히 인간이 주 예수 이름을 부른다 이 말이죠. 주 예수 이름을 부를 때 또는 바울서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뭐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용어를 우리가 어떻게 감당을 해야 되느냐? 어떻게 우리가 사용을 해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 그것은 어떤 용어를 부를 때 이쪽 인간 차원에 머물지 말고, 영적 차원으로 진입을 해서 영적 차원에 이미 마련 돼있는 능력에 합일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 없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의 능력이 우리가 뚝 떼서 내 것 만들 순 없다 이 말이죠. 이미 있는 구원의 능력에 우리가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그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바로 주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시작을 여기서부터 주 예수 이름을 것부터 시작해서 주의 영적인 영역에 진입을 해서 그래서 거기 있는 구원의 능력에 합일한다면 출발도 어디서 합니까? 밑에 있는 인간 층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것도 영 이건 아니죠. 기다리세요. 내가 갈게요. 이런 식으로 구원될 순 없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위에서 영적인 차원에 우리를 데리고 가야 되죠. 여기 있는 인간을 체포하듯이 영적인 세계로 진입을 시켜줄 때 아하, 에베소서 1장에 말씀, 창세전부터 우리가 예정되었구나. 구원받기로 작정되었구나. 라는 것이 무슨 형식이냐? 고백형식으로 나오지요.
그래서 래드는 인격할 때 이 용어가 무슨 용어라 하느냐 하면, ‘고백의 용어’라고 사용하는 거예요. 뒤에 이런 논리 때문에. 고백의 용어란 말은 이걸 배워서 구원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고백의 용어는. 고백의 특징은 강요나 억지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최면걸 때는 강제로 예수, 예수 해보세요. 하게 되면 예수 이야기하니까 구원받았습니다. 최면은 되는데, 고백이라 하는 것은 천 번을 강요를 하고 되풀이 하고 백날 이야기해봤자 그거는 흉내와 시늉이 나오지 자기고백이 안 나온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 있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우리가 성경적으로 제대로 복음적으로 논할 때 용어문제가 나왔으니까 용어가 고백으로써 그리스도의 인격을 표시한다. 이래 돼있는데. 그러면 문제는 점점 더 간단해지지요. 윤곽이 드러나지요.
그리스도의 어떤 고백을 할 때는 내가 고백을 할 수 없을 때는 예수님의 인격이 하늘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 인격이니까 어떤 어르신, 인물 아닙니까? 인물이 지상까지 파급이 되어서 덮쳐야 가능하잖아요.
우리가 보통 이장우 목사님 계시지만 내가 여기 있고 거리가 한 일 미터 떨어져 있잖아요. 여기 있다고 해서 제 심정을 이장우 목사님이 공유하는 게 아니죠. 이장우 목사님 따로 있다고. 그런데 이건 육적인 세계에서는 너 따로, 나 따로에요. 그걸 철학으로 ‘개별자’라 하는 거예요.
이 개별자란 용어가 상당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개별자로 등장해서 이것이 공동체를 이루어서 동일자로 만들 때 여기 개별자에서 동일자로 합치할 수 있는 논리가 없어서 고민입니다. 철학자들이. 으샤으샤해서 일 번 밀어줍시다. 돈 먹고 일 번 찍어줬지만 일번 찍고 난 뒤에 다시 어디로 헤어집니까? 개별자로 헤어져버리는 거예요.
우리교회 부흥합시다, 전도합시다, 할 때는 우르르 모였는데 막상 집에 가서 무슨 개인적인 부동산 사적인 거래관계 다 깨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개별자이면서도 집단을 이룰 수 있느냐? 그 방법이 없습니다.
고백을 하면 되잖아요. 하는데 고백이라 하는 것은 어제 고백이 오늘 유효기간이 끝나버려요. 고백할 그 순간만 있지, 그 뒤에 고백했다고 해서 그 다음 한 두 시간 동안 고백 안 해도 고백한 걸로 쳐주는 그런 법은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래드가 제목을 잘 달은 거예요. 그리스도의 인격은 보통 책 같으면 우리가 이렇게 고백해서 구원받읍시다. 이렇게 나올 텐데 그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인격이란 말은 기존의 우리들의 인격하고는 판이하게 달리 활동하고 달리 역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겁니다.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교인들, 집사들 대할 때 하는 인격 대 인격 대하는 그런 방법 으로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를 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믿듯이 하나님은 사랑이다. 서로 친하게 지냅시다. 교제합시다. 이런 교제, 사랑이 성경에서 오류지요. 그런 식으로 나간다면 성경해석을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 대하듯이 그렇게 대할 수 없어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또는 마태, 마가복음과 그리고 바울서신과의 큰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요한복음,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예수님은 항상 우리한테 개별자로 등장해요. 예수님이 식사하신다고 우리가 배부른 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서신은 예수님이 식사하시면 우리가 배불러요.
그러니까 이게 아주 희한한 이야기를 한다고. 바울서신이,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기쁘면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생각한 것, 제자들이 생각 못해요. 어제도 이야기했잖아요. 베드로가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해 못한 거예요. 오지마라. 니는 니 생각밖에 모르는구나. 오지마라. 못 온다는 거예요. 아니 제가 죽기까지 따라가면 되는데. 니는 안 된다. 니하고 나하고 개별자가 되는 겁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는 그 개별자가 나중에 하나로 뭉쳐지는 암시를 주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때는 니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니 있다. 요한복음 차원에서 그걸 문자로 보는 사람들은 이해 불가능합니다. 철학자들에게 물어보세요. 김용옥한테 요한복음 물어보세요. 니 안에 내 있고, 내 안에 니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철학자들한테 못 알아듣는다는 말은 오늘날 교인들도 못 알아들어요.
여러분 안에 예수 있고, 예수 안에 여러분 있습니다. 하면 그따위 소리하지 말고 어떻게 빌면 돈 버는가 그것만 이야기해 달라. 나는 개별자로 남고 싶지, 누구하고 섞이기 싫다는 거예요. 현대인들이 교육의 주체거든요. 나는 개별자로 남고 싶고 구원받아도 나 혼자 달랑 구원받고 싶지, 더불어 구원받는 건 찝찝하다 이 말입니다. 저런 인간하고 구원받는다는 건 기가 차다 이 말이죠.
그걸 어제 대구강의에서 무슨 자리라 했습니까? 목사님? 그걸 자기 자리라 했지요. 자기 자리가 뭐로 바뀌어야 된다고 했습니까? 누구의 자리로? 주의 자리로 바뀌어야 돼요. 자기 자리를 대변하는 것을 가지고 이름이라 하고, 주님의 자리를 대변하는 걸 가지고 이걸 주님의 이름이라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이걸 오늘 본문에 들어가면 내용에 의하면 이것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이라 하는 것은 니 안에 내 있고, 내 안에 니 있다가 가능케 하는 인격이 되는 겁니다. 근데 이 인격은 지상에서 인간들끼리 이 인격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이에요. 교회 오는 사람들은 가능성이 유지되면 안 돼요. 항상 자기 속에 불가능성만 남아 있어야 돼요.
이게 신앙생활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한번 예수 믿었다고 그 다음부터 전에 믿었던 것이 계속 가능성으로 작용이 안 돼요. 전에 예수 믿은 것, 지금 예수 믿어야 돼요. 전에는 불가능성을 믿어서 구원받았으면 지금도 여전히 불가능성으로 남아 있어야 돼요. 에이, 일 년 전에 믿었던 것 가지고 써먹으면 안 되냐? 이러면 불가능성이 갑자기 내 안에서 뭐가 돼버려요? 계속 작년에 해먹은 가능이 돼버려요.
그리되면 이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 개별자가 돼버려요. 바울서신에서는 예수님의 개별자만 인정하지 다른 개별자는 개별로 개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속성으로 인정해요. 예수님의 그리스도 몸만 인정하고 나머지 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뭐냐? 그게 종말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종말로 넘어왔을 때는 그 다음부터는 모든 고백과 용어가 종말을 함유하고, ‘함의(含意)’라고 하는데 함의란 뜻을 함유하는 것.
종말에 이미 세상 끝장났잖아요. 끝났으니까 더 이상 너한테 기대하지 마라. 그러니까 끝장난 입장에서 그 뜻을 함유하고 포함한 채 믿음, 소망, 사랑, 율법 이런 용어가 막 터져 나온다 말이에요. 모든 용어가. 어떤 용어든. 만약에 요한일서에 보면 죄가 없다는 그 용어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뜻을 함의하고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리스도의 인격에 이런 점에 대해서 제목을 잘 달았습니다만 래드가 이점을 파헤치지 못했어요. 래드는 지금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학을 하게 되면, 오류가 뭐냐 하면, 신학을 하게 되면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이게 엄청난, 나는 개별자가 아니라 하나의 주님에서 나오는 바람이구나. 속성이구나. 이게 신학에서 나타나지 않아요. 자기 부인이 되질 않습니다.
신학을 하면 지식이 차곡차곡 차여서 신학을 모를 때보다 자기가 우수한 자기, 훌륭한 자기, 위대한 자아로 개별자로 나아가버리지 그리되면 개별자 돼버리면, 내가 개별자란 말은 좀 어려운 말인데, 내가 개별자가 되면 나머지 모든 예수님이 되든, 집사님이 되든, 장로가 되든 전부다 개별자가 돼버립니다. 절대로 한 몸이 될 수 없어요.
집사님, 우리하고 한 몸입니다. 이게 자기가 개별자로 인식하고 있는 이상 이건 불가능한 겁니다. 내가 만약에 개별자가 되면 집사님 우리 한 몸 되기로 애씁시다. 라든지 노력합시다. 이건 돼요. 우린 원래부터 한 몸이잖아요. 이 고백은 될 수가 없습니다. 왜? 자기라는 것이, 이런 건 어렵다. 개별자란 용어가 어려워요.
개별자란 하는 것은 뭐가 있느냐 하면, 윤곽이 있는 거예요. 윤곽이 뭡니까? 자아를 둘러싼 뭐가 있어요? 철조망이 있지요. 철조망 있을 때만 이게 자아가 되는 거예요. 철조망 바깥에는 자아입니까, 자아 아닙니까? 아니지요. 여기까지 모아놓은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타인, 타자. 개별자가 성립돼버리면 나머지는 따로 다른 영토, 다른 영역이 돼요. 이거는 타인의 영역이 된다고요.
그러면 이쪽에 둘이 어떻게 결합합니까? 결합할 재주가 없어요. 흔히 오픈 된 마음, 개방된 마음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개방해봤자 경계를 허무는 개방이 아니고, 윤곽의 폭을 내 영토를 확장시키는 정복욕의 개방이지요. 잡아먹고, 잠식하고, 잡아먹고 저 놈 것도 내 것 만들 때, 내 것을 키워나가는 그러한 영토확장으로써의 개방이지, 내 것을 깨워나가는 개방은 아니란 말이죠.
늘푸른교회 만약에 교인 새로 오면 제일 묻는 게 뭡니까?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 어느 영토에 계셨습니까? 우리 한 몸이죠. 그런 이야기 안 나온다 말이에요. 어느 교회 다녔습니까? 이래 되지 우린 원래부터 다른 교회 다녀도 한 몸이죠. 라는 개념은 와서 복음에 충실하고 복음이라는 걸 통해서 개별성 자체가 죄라는 거예요.
개별성이 되면 누구 고백입니까? 주님에 대한 고백이 아니고 누구 고백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나의 고백밖에 안 나오잖아요.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인격하고 니 안에 내 있고, 내 안에 니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줄창 나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교회 가짜 아닙니까? 이게 아무리 교회가 되고 뭐 사랑 안에 한 몸 된다 백날해도 노회가 만들어서 한 몸이라고 해도 고백 자체가 사기성 고백들이 막 나와요. 우리는 한 몸입니다. 사기성 고백이 막 나온다니까.
진짜 고백은 성령 안에서 난 고백인데, 이건 나중에 나옵니다. 용어에 따라서 나옵니다만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 속에 계속 뭐가 남아있어야 돼요? 불가능성이 계속 유지되어야 돼요. 사람이 불가능성이 될 때 누구한테 실망하느냐 하면, 불가능성밖에 할 줄 모르는 자아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고, 자아에 실망할 경우에만 이 사람이 탕자가 되고, 이게 주님께 늘 돌아오는 사람이 돼요. 자기한테 실망해요.
내가 돈 관리했더니만 털어먹어 버렸잖아요. 우리는 내가 개별자로 털어먹어요. 오년 전에 은혜 받아도 오십 분 만에 다 털어먹는 사람이에요. 기도원에 은혜 받고 내려오면서 다 털어먹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다시 똑똑한 자아로 내려온다고. 산 위에선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예수님 계신 곳이 어느 가나 하늘나라~ 이렇게 찬송가 불러놓고 찬송가 끝나기 전에 벌써 개별자로 되돌아옵니다. 이제는 주님은 저 산 위에 놔두고 오고 산 밑에 자기밖에 오지 않아.
모든 게 성경의 용어 하나하나가 우리한테는 네가 불가능했단다. 라는 이름으로 능력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뭐냐? 우리 안에 능력 올 때 우리 안에 뭘 남기는 능력입니까? 불가능성을 남기는 능력,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들어온 주님의 능력입니다.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뭐가 된다?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진다. 예수 믿고 이것 실시한 사람입니까? 없지요. 없어야 돼요. 왜? 주님이 나를 속성으로 간주해서 껍데기죠. 다른 말로 사지, 팔다리죠. 주님께서 어떻게 사용할 주님의 몫이지 그 몫은. 내가 실천한다 하면 내가 하면 뭐가 돼요? 난 개별자가 된다고요. 예수님 따로고 난 따로가 되는 거예요. 주님, 가라 해요. 제가 알아서 겨자씨 믿음해서 올릴게요. 지가 이명박도 아니고 포크레인 파서 옮길 겁니까? 정주영도 아니고. 항상 우리 속에 불가능성으로 남는 거예요.
그렇다면 산이 옮겨서 바다에 빠지는 게 불가능하죠. 그것만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내가 꼴까닥 죽었습니다. 죽은 인간이 부실부실 일어나서 자기를 일으켜 세웁니까? 아니지요. 죽었는데 어떻게 부활됩니까? 이건 여전히 우리한테 뭐가 돼요? 불가능성으로 남지요. 우리가 죽으면 죽어서 지옥 보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왜? 죽은 사람은 어, 지옥 가면 안 돼. 라고 이미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반응할 수 있는 저항력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안 죽어도 죽은 인간으로 간주해주는 겁니다. 성령께서 데려가는데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바로 우리에게 불가능한 천국으로 데려갑니다. 그 가는 길을 무슨 길이라 합니까? 좁은 길이라 하지요. 좁은 길은 한 발자국도 우리가 옮기기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안 찾는 길로 갑니까? 미쳤습니까?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어떻게 지가 자진해서 좁은 길 미쳤다고 갑니까? 좁은 길 한 두 발자국 가고 수고했다고 넓은 길 복 달라고 기도하는 게 인간인데 좁은 길 가다가 넓은 길 나오기를 원하는 우리의 심성인데 무슨 좁은 길 갈수록 태산, 갈수록 좁은 길, 그거는 안 됩니다.
그래서 강의하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희망을 줍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에 우리가 도전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불가능한 것에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안 가기 위해서 발버둥칩니다. 우리는 백 명이면 백 명, 주님의 길을 절대로 안 갑니다.
개별자는 주를 안 따라가게 돼있어요. 미안스러우니까 고백만 할 뿐이죠. 아침에 새벽기도만 나올 뿐이지 절대로 안 갑니다. 미안스러워서 주일 날마다 교회 와 줄 뿐이지 절대로 주님 가신 곳에 안 갑니다. 속성이고 우리 본성이에요. 본성이 넓은 길 좋아하게 돼있고, 우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전부다 주님과는 거리가 먼, 성경말씀과는 거리가 먼 자기 영광만을 위해서 자기 영광된 자리로 우리는 자동적으로 옮겨가게 돼있습니다.
이런 본성을 꺾어버리는 것이 우리 속에 들어온 십자가의 속성입니다. 십자가의 속성이 오게 되면 우리의 본성은 죄로써 그야말로 탕자의 죄인으로써 드러나게 되죠.
신직수 씨가 글을 올렸는데 오해할 소지가 많은 글을 올렸어요. 십자가마을에다. 자칫하면 제2의 손무성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글을 오해의 소지 있는 글을 올려놨다 말이죠.
글을 쓸 때 개별자가 아니고 주의 고백이 되면 항상 누굴 증거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느냐? 이렇게 나와야 되죠. 내가 어떻게 지키느냐 되게 되면 갑자기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느냐? 개별자 나한테 두게 되면 거기서 나오는 고백들이 나는 불가능합니다. 라는 고백이 안 나오고, 야, 이제 예수 믿고 가능합니다. 죄를 짓지 아니한 자마다 죄 안 지을 수 있습니다. 라는 자기 가능성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여지가 있다 이 말이죠.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거 대신 나도 믿잖아요. 라고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그 사람은 자기 인격이지 무슨 인격은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인격이 아닌 거예요. 제목은 아주 잘 달았습니다만 이 사람은 전혀 이런 내용은 빼버리고, 신학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고백했는가? 고백을 통한 인격을.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중계방송을 하고 있는 거예요. 래드는 성경 속에 들어가서 사랑을 보여주는 게 아니고, 중계방송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총신이나 신학교교수들의 특징이 그겁니다. 학교에 취직했거든요. 취직했기 때문에 개척교회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하는 학문을 중계방송하면 끝나는 거지, 교수님은 가르치신 대로 사십니까? 물으면 그 학생 퇴학당해요. 공부나 하지, 공부 나. 이래되지 그런 거 묻는 게 아니야. 이래 돼있죠.
학생들 가운데 철이 없는 사람은 교수를 가지고 성자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의 기능인인데. 변호사가 성자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의 학문을 다루고 이런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고, 지식을 팔아먹는 기능인인데 그것을 마치 성도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교수 가운데 지가 성자라고 착각하는 사람을 그때는 구박을 줘야 하는데. 학생들은 평소에 기능할 때는 받아 챙기면 그만 이에요. 데모할 필요도 없고.
그러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 해봅시다. 여기에 몇 가지 용어가 나옵니다. 뭐냐 하면, ‘주’ 용어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용어 나왔지요. 지금 래드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복음서와 바울서신의 차이점이 그리스도라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라는 것을 직함으로 보고, 바울서신은 고유명사로 본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래드가 이런 이야기했는데 읽어보니 그래 되지요. 이 책 사서 읽어봐야 돼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신학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여기 읽어보면 삼위일체 이론까지 나와요. 신성과 인성까지 막 나온다고. 그런 건 전부다 중계방송한다 하지요. 그걸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주, 그리스도 또는 여러 가지 예수그리스도라 할 때 직함이란 말과 고유명사란 말로 차이를 뒀는데 저는 차이가 없다고 본 겁니다. 이 사람이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은, 이 사람이 중세철학부터 철학을 공부 안 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장님하고 이근호하고 다르지요. 제가 만약에 어떤 회사 사장이라면. 이근호는 고유명사라 하고, 사장님은 이 세상에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많은 것은 직함이고, 고유명사라 하는 것은 니밖에 없어. 라는 게 고유명사거든요. 딱 집어서 니밖에 없다. 할 때는 고유명사 이름을 붙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은 바울서신에서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서 이게 고유명사가 됐고, 복음서에선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하나의 기능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얼른 보면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성경 자체가 이러한 인간들 상식선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공박하는 책이라는 것을 이 사람은 몰라요. 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했지? 예. 그러니까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다. 그러니까 그게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공관복음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라 할 때 이 그리스도를 입을 다물라. 말하지 말라 했어요. 그리스도는 제가 말하는 걸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은데. 봅시다. 내가 개별자 있고, 개별자 뜻은 알겠지요. 다시 이야기할까요? 개별자란 뭐가 있다? 윤곽이 있어요. 윤곽밖에 나가면 개별자가 아닙니다.
어린애들 한 육 개월 된 애들 자아성이 없다 하지요. 엄마가 울면 지도 울어요. 왜? 같이 보기 때문에. 그런데 애가 이 년 쯤 지나면 엄마 따로 자기 따로에요. 엄마 시장가도 자긴 안 따라갑니다. 한 몇 년 더 지나면. 점점 더 분리되잖아요.
개별자는 뭐가 있다 했습니까? 윤곽이 있어서 윤곽밖에 나가면 내가 아니죠.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볼 때 뭘 보느냐? 자기 윤곽을 가지고 나와 똑같은 윤곽을 가지고 예수님이 계실 거라고 착각을 하면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사람들이. 심지어 제자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서신은 이런 걸 이미 알기 때문에 이걸 다 깨부숴서 윤곽을 부셔버리는 작업을 해요.
뭐냐 하면, 창세전에, 칼 바르트가 이걸 잘 몰랐는데 창세전에 뭐 안에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 돼있지요. ‘예수 안에서’라 하니까 칼 바르트나 모든 신학자들이 이 말을 굉장히 부담스러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가 누굽니까? 윤곽을 가졌잖아요. 그럼 나는 윤곽 없습니까? 있잖아요. 내 윤곽, 예수님 윤곽 같이 윤곽을 하니까 이걸 창세전부터 시간을 초월해서 한 뭉치로 묶으려고 하니까 이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말이죠.
그래서 뭐냐 하면, 창세전에 예정했지만 나는 아직 안 태어났기 때문에 아직 예정 안 받았지요. 아마 창세전에 계획했을 걸. 창세전에 계획을 했다는 거예요. 실시는 안 했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감리교에서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감리교에서 뭐와 뭐로 나눕니까? 예지와 예정. 예지하고 예정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지는 구체화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구체화될 때를 예정이라고 보는 거예요. 앞의 ‘예’자는 무슨 예자입니까?
그래서 성경이 예상 외로 어려운 거예요. 성경이 어렵다 보니까 너무 쉽다고 생각해버리면, 쉽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봐버리면 가짜 교인들이 자꾸 와요. 그 가짜 교인들이 진짜 교회를 삼켜버려요. 완전히 이만희, 신천지 전략 아닙니까? 몽땅 삼키는 전략 아닙니까? 설득도 없지. 몽땅 비율로 승부 거는 것 아닙니까? 자기 사람 많으면 몽땅 통째로 다 넘어가니까.
사람들은 예수를 볼 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여자가 와서 옷깃을 만질 때에 누가 봐도 그거는 여자라는 개별자가 예수님의 옷을 개별자를 만진 걸로 돼있어요. 누가 만졌느냐 하면서 뒤돌아보며 뭐라 합니까? 많은 개별자가 예수님이란 개별자 옷을 만졌다는 거예요. 그것 말로 믿음으로 만진 사람이 누구냐? 그 다음에 뭐라 합니까? 내 뭐가 나간다? 내 능력이 나간다.
성령 안에서는 개별자라는 것은 인정이 안 됩니다. 그 과부란 여자의 자존심을 위해서 병을 고쳐준 게 아니고, 그 여자의 딸이 예수님이 안 다가가도 죽은 딸이 방장, 당장 살아나는 것이 누구 솜씨에요? 여자의 솜씨가 아니고 누구의 솜씨에요? 지금 개별자로 안 갖다 붙은 직접 가서 안수 안 해도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거리가 있어도 이쪽에 있는 예수님이 저쪽에 있는 딸을 낫게 하니까 전부다 이거는 뭡니까? 한 영역 속에 있어버리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는 속성의 증거자가 누구냐? 과부란 말이죠.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었잖아요. 얼마 전에 지붕 뚫어서 금은방 털다가 걸렸는데. 지붕을 뚫는데 사람들 생각에 전부다 지붕 뚫는 열심에다 초점을 맞춰서 설교해버려요. 얼마나 믿음이 좋으면 믿음은 뚫는 거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다른 말로 하면, 까라면 까라. 그걸 믿음으로 보는데, 지붕을 뚫었다고 해서 죄가 수위가 엷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열성을 본 게 아니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해서 이미 중풍병자는 자기가 뚫던 안 뚫던 죄인인 것을 아는 그런 관점이거든요. 그러니까 더 놀라운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내 죄를 용서할 줄 아는 이거 뭡니까? 고백이죠. 그런데 인간은 강의 다시 하면 지루하니까 간단히 이야기해서,
인간은 개별자는 자기 윤곽을 확장하기 때문에 항상 자기 의가 남아 있고, 이 의를 확장시키는 공로는 항상 자기 의로 누적이 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뭐로 본다고요? 죄로 본다는 이거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열심히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열심히 구원받겠다 하는 구원의 의지는 자체는 이걸 인간은 의로 본다 하니까.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니까 구원받겠다는 게 뭐가 나쁘냐 하는데 그것도 죄라니까. 그게 죄에요. 구원받겠다는 게 죄라니까요.
어떻게 죕니까? 그게 죄 아래 있으니까 죄가 된다니까. 참 이런 게 이해가 안 돼요. 주일 날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참 비좁은데 교회까지 오는 건 할 수 있어요. 가능성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누구도 예수께 올 수 없다. 이거는 계속 뭐로 남아있어야 돼요, 우리 속에? 불가능성으로 남아있어야 돼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나는 예수께 올 수 없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 안에 예수 없지. 이런 뜻이거든요. 우리는 교회 앉아있으면 주님께서 만약에 설교하시면 네가 교회까지 왔지만 예수는 없지. 이런 뜻이란 말이죠. 예수가 없는 걸 어떻게 있게 합니까? 없는 채로 집에 가야지.
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한다는 생각은 이거는 고백이란 형식으로 나오지, 지식이란 형식으로 이걸 흉내 낸다고 시늉한다고 공개석상에서 외운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침례교회에서 나와서 인사하고, 나는 하나님 믿습니다. 전부다 흉내입니다. 고백이 아니고.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고백이 나오면 할 수없지만 그걸 고백화 시켜서는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계속 불가능성 속에 있어야 돼요.
창세전에 영원히 예수 안에서 창조될 때 칼 바르트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곤란한 게 예수가 개별자고, 예수를 왜 개별자로 보느냐? 지가 개별자거든. 아마 개별자라면 나는 나밖에 못 나가죠. 내가 내밖에 나가면 내가 안 되니까. 그래서 교회 오는 교인들이 어쨌든 기도하는 것은 계속 나는 나이기를 원하면서 기도해요.
주여, 내 것 뺏어가지 마세요. 그리고 기도했으니까 내 것 빼어가지 말고 추가적으로 증가되게 하옵소서. 전부다 자기 것 사수하기, 자기 것 확장하기 그것 위해서 기도합니다. 옆에 김 집사 딸 서울대학 가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내 딸 서울대학 가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밖에 나가면 내가 없잖아요. 내가 없는 상태를 뭐라 하느냐 하면, 두 자로 이걸 ‘죽음’이라 하는 거예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거기에 바짝 마른 해골들이 나오지요. 그 해골들 특징이 각자 이름이 없어요. 그런데 일괄적으로 다 나오고 나니까 이름이 붙지요. 그런데 일괄적인 이름이 ‘하나님의 군대’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치우라 합니다. 니는 기도할 때 이근호 치워라.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니가 내가 되지 아니하면 니는 내가 될 수 없다. 이상한 말입니다만 니가 내가 되지 아니하면 니는 나하고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에게 이름을 하나밖에 안 줬어요. 흰 돌 위에 뭘 새긴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내 이름이 아니에요. 예수의 이름이라고. 생명책에 있는 모든 이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이름이라니까. 그래서 그 이름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에 무슨 이름이냐 하면, 세상에 자기 이름이 없고 지파 이름으로 말합니다. 열두 지파 이름으로. 그걸 다른 말로 무슨 이름이냐 하면, 언약의 이름이다 말이죠.
그 언약의 이름이 누구냐? 그럼 이근호란 이름이 있잖아요. 뒤에 붙지요. 아브라함 있잖아요. 아브라함 뒤에 붙습니다. 아브라함 구원 못 받아요. 이름이 붙어요. 뭡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총괄한다면 누굽니까?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차원에서 개별자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어요. 인간은 지 새끼라. 모든 이름의 한 가지 이름은 바로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우린 누구 이름입니까? 아담이잖아요. 우리는 아담이고, 우릴 구원하는 이름은 한 가지 이름밖에 없어요. 마지막 아담,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공관복음에서는 개별자 나옵니다. 인정합시다. 나오죠. 과부 나오고, 베드로 열두 제자 나오고, 가룟 유다 나오는데 바울서신 로마서 5장에 의하면 저걸 일괄적으로 하나의 무슨 이름? 아담으로 쳐버리고, 이쪽 이름은 뭡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가지 이름 대 한 가지 이름. 아담 대 마지막 아담. 아담 대 두 번째 아담, 그런 식으로 처리해버린단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종말이 돼버리면 인간이 어떤 인간이 되든지 간에 죽은 자는 이름이 없어요. 그냥 죽은 자죠. 새로운 이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명찰에 박혀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것을 바로 로마서에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함의, 약속이죠.
어떤 설교든 약속을 보여줄 때 그게 바른 설교가 됩니다. 약속을 보여줄 때 이걸 고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약속을 보고. 약속이 안 보이는 사람은 뭐로 나옵니까? 개별자로 왔다가 예배 마치고 개별자로 돌아가죠. 이 사람은 항상 자기 이름밖에 생각할 줄 몰라요. 자기 이름이라 하는 것은 윤곽이 있어서 저 사람이 될 수 없는 나만의 것. 그러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아니라 항상 나만의 것. 나만의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의 것을 약간 떼서 내 것으로 첨가시켜서 첨가시킨 그것도 내 것, 나만의 것.
이것이 바로 바울서신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제가 조금만 더 안에 더 깊이 들어가면 지금까지 대략 그 정도입니다. 이 말은 결국 쉽게 말해서 목회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은 자아의 개별자의 가능성으로 살아가지만 감사한 것은 성도로 하여금 남들이 가능성에 살든 우리는 불가능성을 바라보면서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이에요.
탕자가 집에 올 때 아버지 가락지 낀다는 가능성 없었습니다. 자기 머리에. 그런데 와보니까 가락지 꼈어요. 가락지는 자기 안에 뭐로 남아있습니까? 불가능성의 증거로 남아있지요. 어디가도 아버지 자랑하지, 내가 탕자였던 자랑 안 하잖아요. 항상 불가능성으로 완전무장해요.
불가능성으로 무장한 자만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마귀를 이깁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가 니 마, 기도한다 해놓고 기도 못해. 항상 우리한테 가능성대로 못한 것 갖고 지적하죠. 그래서 마귀를 가지고 뭐라 합니까? 고발자, 고소자. 그때 우리의 대처는 뭐냐? 나 못하는 자다. 난 원래 안 되는 놈이거든.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에 예정할 때 이 말은 뭐냐? 성도여, 모든 책임을 니가 지지 말고 나한테 다 맡겨라. 약속한테 다 맡겨라. 이런 뜻입니다. 창세전부터 있었던 계획이거든요. 창세전에 예정한 것에 다 맡겨버려라. 니가 니 인생 책임지라고 하지 말고. 제발 부탁이다.
니가 니 개선하려고 한다든지 니가 니 인생 질을 높이려고 하지 말고, 모든지 다 맡겨라. 내가 다 맡아줄게.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너를 위해서 내가 몸까지 바쳤기 때문에 그걸 믿고 그 피와 살을 믿고, 모든 걸 니한테 시비 거는 놈 다 나한테 다 온나. 내가 처리해 줄게. 누가 끊으리요, 그 사랑을
그런데 제가 방금 강의한 것을 녹취를 해버리면 이게 하나의 용어가 되고, 용어의 사설이 되고 문자가 돼요. 문제는 용어와 사설이 결코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신학 책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성경책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울산에서도 그런 이야기하고, 대구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이게 성경이 있으면, 이걸 수평 대 수평으로 보지 말고 입체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께서 돌아다닌다고 보고, 내가 하지 말고 돌아다니면서 약속이죠. 성부, 성자, 성령이 왜 설칩니까? 이때가 무슨 때기 때문에? 종말이기 때문에.
종말은 우리에 뭐가 되기 때문에? 개별자 까부는 놈, 다 죽은 놈이거든요. 죽은 자는 가만있고, 산 자만 돌아다니는 거예요. 산 자가 누굽니까? 성부, 성자, 성령 아닙니까? 그분이 이 약속대로 이뤄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도 선물이고, 소망도 선물이고 다 은사로 줘요. 사랑도 선물이고.
남들 들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죠.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우리 쪽에서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사나 죽으나 당신의 것이 아니데 주의 것인데. 주의 것이 되면 성경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될 겁니다. 어렵지 않고 이해가 돼요. 그런데 이게 내 것으로 여기면 성경말씀 하나하나가 안 어려운 게 하나도 없어. 다 어려워요. 내 것으로 그냥 남아있습니다.
사람이 자아가 생기면 타인과 늘 비교하잖아요. 비교한 이유가 잡아먹기 위해서 비교해요. 사람이 타인을 생각하는 것은 걱정해서 생각하는지 압니까? 잡아먹기 위해서. 자기 우월, 자기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거는 현대철학이 잘 이야기해놨습니다. 자아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누가 옆에 있으면 그때부터 자기가 비로소 발견된단 말이죠.
그래서 연예인들이 이혼하면 그렇게 고소할 수 없어. 속이 시원해. 까불다가 잘 됐다. 왜? 지금 이혼 안 한 내가 얼마나 감사한 줄 몰라. 그런데 그게 연예인들만 그런 게 아니에요. 모든 만나는 사람마다 다 마찬가지에요. 아이고, 사모님 수술했는데 쌍꺼풀 수술이 망가졌습니다. 아이고, 기도하세요. 얼마나 안 됐노. 돌아서서 아이고 속이 시원하다. 그거 왜 신자가 왜 하노. 평소에 말렸는데 지 돈 내고 지 한다는데 못 말렸는데. 은혜라. 아이고, 속이 시원하다. 까불다가 잘 됐다.
사람은 내가 얼마나 우수하냐를 타인을 통해서 검증하고, 나보다 우수한 사람 있으면 하나의 목표가 되고 비전이 되고 꿈이 돼요. 그래서 예수를 믿을 때 문제는 지금 래드가 삼위일체 거론하며 치명적인 실수를 했어요. 뭐냐 하면, 예수를 라이벌로 봐버렸어요. 빌립보서 2장 11절 설명하면서 물론 다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중간에 괜찮은 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래드가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데 인격을 설명하면서 사도바울 시대 때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의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했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했다는 말은 맞는데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했다는 것 때문에 이 지상에 우리 자신이 뭐가 깨지고 뭐가 허물어졌다는 걸 이야기 안 하고 있다고, 이 사람이. 왜? 성경 속에 삶이 아니라 중계방송하기 때문에. 신학을 중게방송하고 있거든요. 예수님은 주시거든요. 이러고 말아요. 나는 이렇게 삽니다가 없어요.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이 말은 진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 속에 들어가면 들어가야 돼요. 왜냐? 지가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지가 주체하면 안 되는 이유가 불 속에 살아남는 것이 그리스도의 속성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어가라 하는데, 지금 들어가면 믿음 좋습니다. 또 지 생각하고 들어가면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만들어주고 어떤 목회를 하든지, 이사를 하든지, 교회를 옮기든지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불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 불가능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약속이 이렇습니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옮겨놓은 것이지, 자존심 높이려고 옮기는 것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일을 주께서 시키면서도 우리 속에는 계속 우리의 비교, 우열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옵니다.
본론에 들어가야 되는데 아직 제가 본론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용어가 아니고 살아있는 인격이 나오려면, 많은 전제들이 많은 이건 아니요, 이건 아니요, 아니요 할 이야기가 많이 있어요. 그 이야기 안 하고 인격이 이렇습니다. 하면 저 그것 믿는데요. 이리 되면 곤란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란 창세전에 있었던 모든 그게 구체화, 실제가 현실이 나한테 그냥 한 여름에 물 붓잖아요. 완전히 샤워하듯이 갖다 퍼붓는 거예요. 그게 인격이에요. 아주 우리를 발라버려요. 나는 어디어디 바르느냐 하면, 십자가 지는 것 우리 안 됩니다. 역시 불가능성이에요. 안 되지만 안 되는 것 되게 하십니다. 십자가 지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지게 하시면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능력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 빼먹을 생각 마세요. 예수님의 능력과 겸해서 뭐냐 하면, 나는 곧 죽었다. 나는 안개다. 내일 살지 못 살지는 주님에 달렸지 내 손에 아니다. 자기가 이미 죽은 몸이라 하는 것을 겸해서 능력이 나오기 때문에 어떤 성경말씀도 내가 지킨 게 아닙니다. 나는 그저 죽어있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는 주님의 공로만을 등장하면서 이게 나오게 돼있어요.
이게 뭐냐? 그 사람의 인격 속에 있기 때문에. 니 안에 내 있고, 내 안에 니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이 의식되어 세상이 겁나서 도망갔던 열두 제자가 주님 찾아오고 난 뒤에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맨 고기 잡으러 갔어요.
그런 인간들을 주께서 사도로써 복음을 전할 때에 사도바울이 그들이 전하면서 깨지는 거예요. 전하면서 깨지고 박살나고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마지막 하이라이트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 죽는. 결국 이거는 나를 왜 죽이십니까? 할 때 나가 빠지도록 죽이면 죽이는 거지. 거기서 나를 왜 죽이는데. 니가 어디 있는데?
사도바울은 아예 마음먹고 들어가죠. 주여, 빨리 죽게 하옵소서. 겁나서 미리 마음먹고 들어가요. 주여, 빨리 죽게 하옵소서. 우리가 뻔하거든요. 예수님 가는 코스가 뻔하다니까. 이 코스가 창세전부터 확정되었기 때문에 변경 안 돼요. 우리는 그 코스를 불가능성과 더불어 가게 됩니다. 우리는 살려고 해요. 이것 잘 했습니다. 맨 날 살려고 하는 인간을 가지고 불가능한 좁은 길로 가게 하셔서 기어이 예수님은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주님인 것을 순간순간 남한테 증거하면서 그렇게 이끌어 가시죠.
그 인격이 그리스도 인격에서 이제 나옵니다.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은 그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어떤 것 때문에 그런 인격이 지금 우리에게 덮쳤느냐?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