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4월 11일 강의 엡2장11절 피만 예정
서울 4월 11일 강의 엡2장11절 피만 예정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411 엡2장11절 피만 예정
우리교회(IP:124.♡.85.92)
08-04-12 15:06
우리교회(IP:220.♡.176.141)
08-04-20 16:38
서울080411a엡2장11절a
에베소서 제 9강 (이 근호목사, 2008년 4월 11일 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비하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대로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않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강조했습니다. 제발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것, 어린애가 태어나는 것, 다 예정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놓쳐버리면 우리는 아무리 애써도 절망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10km를 달려와도 그 지점에서 절망이고 100km를 달려와도 역시 그 자리에서도 앞이 캄캄하고 절망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없으면 열심히 노력은 하는데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하면서 백날 노력해 봤자 그것은 소용이 없는 짓 아닙니까?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갉아 먹는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편하지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창고에 그득한데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이런 것도 예정하셨네. 이런 것도 예정하셨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갉아 먹는 그 재미, 하나님이 준비 한 것을 획득하는 그 재미. 그래야 우리에게는 실패라는 것이 아예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실패라는 것이 아예 없지요.
이래 보시면 됩니다. 내 쪽에서 하나님께 다가서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하나님 쪽으로 내가 다가가면 100km를 달려가면 나는 여전이 앞이 캄캄한 실패가 됩니다. 아무리 접근해도 그것은 실패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 있는데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먹구름처럼 몰려와서 나를 잡아당기고 또 예정하신 뜻이 몰려와서 나를 잡아당겨서 “그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게 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내 등을 자꾸 미는 거예요. 자꾸 밀게 되면 전에는 잘 모르던 성경 말씀들이 ‘아,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하나님의 깊은 뜻이 점점 더 알아지는 겁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1:17에 보면 나옵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이것은 잡아당긴다는 말이죠.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이 얼마나 세상 것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점점 더 알아가는 것이 예정된 뜻입니다. 여러분이 예정된 뜻인지 아니면 혼자 착각했는지의 구분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한 것은 별로 생각이 들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생각이 들어 갈 때는 그게 예정하심에 속한 사람 맞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사람은 ‘내가 이만큼 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만큼 하셨구나’ 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이끌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느껴질 때 그 때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대해서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동물원에 가게 되면 원숭이만 보고 돌아오는 것은 안 되지요.
비싼 입장료를 냈으면 원숭이만 보지 말고 그 옆에 있는 기린도 봐야 하고 그 옆에 있는 코끼리도 봐야 되고 타조가 달리는 것도 봐야 되고 무서운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도 봐야 되잖아요. 뱀만 보고 무섭다고 집에 가자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코끼리나 뱀만 예정하신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참 많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유람하고 관람하는 그 재미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뱀 본 것 실패야. 코끼리 본 것 실패야.’ 거기에다 실패라는 말을 쓰면 안 됩니다. 동물원에 가면 코끼리 있고 그 옆에 하마가 있는데 코끼리 보다가 그 옆에 있는 하마 보는 것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실패 한 겁니까? ‘아, 인생 실패다’ 그겁니까? 그냥 빠뜨린 것뿐이죠. 도로 와서 마저 보면 되는 겁니다. 실패라는 것은 내가 뭔가 이루고자 할 때 그것이 성취가 안 되면 그때는 실패지만 관람하는 사람이 관람하다가 한 두 빠뜨린 그것이 뭐 그리 큰 일 입니까? 자기 동물원도 아니고 주님의 동물원인데 그걸 가지고 왜 자기에게 실패를 적용할 수 있습니까?
“너는 공부도 못하니까 내 아들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윽박지르지 마세요. “그 애는 천천히 관람하는 애구나. 속도가 좀 늦는 애구나”라고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다른 애들이 두 과목 볼 때 얘는 한과목 본다는 식으로 느긋하게 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정하사” 안에는 실패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예 실패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두지 마세요.
“예정하심” 안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만약에 ‘예정하심’을 걷어 치워버리면 우리는 매일 같이 ‘나는 오늘도 성공했을까, 오늘은 실패했을까, 오늘도 바른 삶을 사는데 성공했을까, 죄지은 것은 아닐까?’ 매일 혼자서 혼나는 거예요. 혼자서 자기를 벌세웠다가 혼자서 자기를 칭찬했다가, 이것은 마귀의 시험에 드는 겁니다.
심지어 마귀의 역사도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마귀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마귀야, 네 할 일을 해야지.” 얼마나 여유 만만 합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귀신이 오거든 “귀신아, 네 할 일을 하고 가라. 마귀야 네 할 일을 하면 돼. 너는 네 할 일을 하고 가고 나는 내 할 일 하고 주님 곁에 갈 테니까”라고 하면 마귀가 날 다루고 싶은 맛이 떨어질 겁니다.
겁이 나고 깜짝 놀라는 맛이 있어야 되는데 ‘볼일 보고 집에 가라’는 식으로 나오면 재미 없잖아요. 여러분이 예정하심을 놓쳐버리면 다 놓친 것이 됩니다. 다시 한 번 당부 드립니다. 하나님 예정하심 안에 있는 우리의 인생이 쟁취하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고, 유람하고 관람하고 동물원 구경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이렇게 이것저것 다양하게 보면서 ‘아하, 주님께서는 날 위해서 이것저것 다 준비 하셨구나’라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인생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누가 와서 사기를 치더라도 ‘이런 것이 바로 사기 구나’ 하고 구경시키기 위해서 사기침을 당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예정하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오늘 공부의 초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정하심 속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가? 그것을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약속은 일종의 고무풍선이라고 보면 됩니다. 고무풍선 안에 여러 약속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 약속이 탁, 깨어지면 고무풍선 안에 있는 것들이 마구 튀어 나오겠지요. 바늘가지고 약속을 탁, 튕기면 여기서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 축복들이 막 쏟아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하신 약속이란 간단히 말하는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서 천국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17)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천국은 이 고무풍선 같은 약속 안에 들어 있지 이 세상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천국이 없는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천국을 빛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도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오매 어둠이 어둠으로 시커멓게 드러난 겁니다. 여러분이 전등을 껐을 때, 여기 방안에 커피 잔이 빨간색과 하얀색이 있는데, 어느 것이 빨간색인지 어느 것이 까만색인지 구분이 될까요, 안될까요? 구분되지 않습니다. 다 검은 색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남하고 비교하면서 ‘아, 나는 못났다. 나는 저 애보다 공부도 못해’라고 자꾸 실망을 하는데 약속에서 보면 모두 다 똑같은 색깔입니다.
무슨 색깔? 검정색. 모두 다 검정색입니다. 이건희 회장도 검정, 나도 검정. 알록달록이 아니고 다 검은색인데 피차 검은색끼리 서로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러면 안 돼지요. 오다 보니까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연극 한다고 붙여 놨어요. 백설 공주는 무슨 색깔입니까? ‘백설’이니까 하얗다고 해야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백설 공주도 검은색, 일곱 난쟁이도 검은색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기에 다 검은색이 될까요? 약속에서 보면 다 검은색이 됩니다. 우리나라 이소연이라는 여자 분이 무거운 우주복을 입고 소련 상공의 대기권밖에 나가 있습니다. 우주인들이 다녀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에서 보니까 지구는 마치 공과 같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 은 아무것도 아닌데 왜 서로 싸우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우주에서 보면 똑같고 도토리 키재기인데 서로 잘났다고 싸우더라는 겁니다. 우주에서 보면 똑같은데 하나님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말로 싸울 가치도 없습니다. 다 검은색끼리 다 못났기에 더 잘난 사람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이라는 고무풍선이 다가오게 되면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새로운 기준과 새로운 시선과 약속의 관점이 오게 되는 겁니다.
지구인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서로 싸우는 그 기준, 그 생각 말고, ‘누가 공부 잘하나, 누가 돈 더 많이 벌었나, 부자 나라인가, 가난한 나라인가’ 이렇게 서로 다투고 있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고 우리에게 예정된 대로 다가오는 이 약속의 세계는 그것을 깡그리 무시해 버립니다. 심지어 예수님 하신 말씀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다가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가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례 치르게 하고 너는 거기서 빠져라’고 합니다. 이런 말은 굉장히 섭섭한 말이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지금껏 지구상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준은 내 앞에서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천국에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그 기준을 가지고 나를 따라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구상에서 우리끼리 누가 잘 났냐, 그게 아니라 현재 다가오는 저쪽 나라에서 이쪽 우리의 나라를 어떤 식으로 보느냐, 그런 관점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큰 교회 보고 ‘대견 하구나’ 하고, 작은 교회 보고는 ‘시시하다’는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준입니까? 아예 기준 자체가 없습니다. 기준 하나 만들어 주면 또 그 기준을 가지려고 애를 쓸 테니까 아예 기준이 없습니다. 아무런 기준이 없는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이 내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며 이 기준에 따라서 세상을 심판 하겠다’고 내미는 기준은 ‘피’입니다. ‘피’를 내세우면서 ‘이것이 바로 천국 갈거냐, 지옥 갈거냐’를 결정하는 하나밖에 없는,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니고 오직 한 기준이라고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용서가 없고 반대로 피 흘림이 있는 자에게만 용서가 주어져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행 20:28)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피는 여러분의 피 입니까? 제 피 입니까? 누구의 피 입니까? 예수님의 피 입니다. 예수님은 이쪽분이 아니고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끼리의 어떤 기준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나 잘났다. 나를 따르라’ 이런 것은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도 많이 하니 나를 본받아라’는 이런 것도 소용없습니다. 너, 나 기준도 아니고 남자, 여자 기준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기준은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기준이 없다, 혹은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런 소리를 들어도 너무 피곤들 하시니 이것이 기쁘다는 것이 잘 감지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힘든 이유가 ‘누구를 본받아라’ 하는 것 때문에 제일 힘듭니다. 아예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예 기준조차 없습니다. 기준! 그러면 따라가야 되는데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은 안 따라가도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가지 마세요. 아무도 따라 갈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가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피 흘렸습니다. ‘누구처럼 따라 하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따라가려면 피만 주장하는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우리 가운데 기준이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한 경직 목사쯤 되면 기준이 될까’ 하는데, 아예 그런 기준 자체가 없고 표준, 모델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세우는 기준도 인정 안 해줍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식으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네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검은 색이다.”
어떻게 살든 검은 색입니다. 지금 다가오는 약속의 세계를 봐야지 이 지상에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는 식으로 자기를 내세우면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속하지 않은 거예요. 죄가 무엇인가? ‘죄란 예언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오늘 드신 저녁 식사의 메뉴가 이사야에 나옵니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콩나물, 시금치, 두부 같은 것이 민수기에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러니까 ‘하나님, 오늘 저녁식사 어때요?’ 라고 하면 그것을 아예 보지도 않지요. 예언된 것만 따지는데 우리는 예언되지 않은 것을 자꾸 심각하게 생각해서 ‘오늘 달랑 한 점 남은 고기를 딸에게 줬어야 했는데 나 혼자 먹어서 참으로 미안한데 ….’ 그런 것은 미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저녁식사 메뉴가 뭔지, 그걸 혼자 먹었는지 나누어 먹었는지 그런 것을 아예 묻지를 않습니다.
‘나는 쌍꺼풀 수술을 안 해서 이것이 죄일지 싶다.’ 천만에 소리, 쌍꺼풀 수술은 성경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하냐, 마냐 그 자체에 신경 쓰지 말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 봅시다. 예정된 것만 이루시려고 다가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준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정된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그 기준이 뭐냐, ‘피’입니다.
예수님이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기준이 정해졌기 때문에, 우리 피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라는 말은 일체 예수님을 빼놓고 다른 사람의 기준은 모르는 체 하고 듣지 말고 일체 인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간증집회라는 것,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진짜 간증은 예수님만이 하지 다른 사람은 못해요. 왜? 예수님만이 기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간증이 뭡니까? 요나의 기적이 아닙니까? ‘내가 너희에게 기적을 이야기 해 줄까? 내가 죽었거든, 그런데 사흘 만에 부활했거든.’ 이게 간증입니다. 다른 어느 누가 그런 간증을 합니까? 사람이 간증을 하게 되면 그것을 모델삼고 모범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모든 예언과 말씀은 누구에게 초점이 집중되는지 아십니까?
성경의 모든 예언은 예수님에게 모아져서 예수님만이 예정된 분이고, 예수님의 몸만이 예정된 몸이며 우리는 그의 지체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그냥 ‘맞는 소리네요’라는 식으로 그치고 말 것 같은데 왜 이이야기 중요한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죄란 예언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의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것이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으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근데 선악과 따먹는 죄가 어떤 죄인가? 따먹기는 따먹어 놓고 그것을 인정 안하는 죄가 되었습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 이것이 이중적인 죄입니다.
따먹은 것도 죄인데, 죄를 지어놓고 죄 안 지었다고 우기는 죄를 또 짓습니다. 죄가 죄를 부릅니다. 선악과의 주인이 와서 ‘왜 따먹었느냐’고 하니까 ‘따먹으면 좀 어떤가’라고 하니까, 따먹은 것도 죄고 안 따먹었다고 우기는 것도 죄입니다. 주인의 것을 따먹고 왜 따먹었느냐고 따지니까 따진다고 죽입니다.
죄란, 뭔가 행동을 잘못한 것이 죄가 아니라 이미 죄라는 기준이 바뀐 그것이 죄가 되는 거요. 돈을 훔쳤다면 그것이 죄 맞습니다. 그런데 돈을 안 훔치면 그게 죄입니까, 아닙니까? 돈을 안 훔친 그것도 죄입니다. 돈을 훔친 것은 죄고 돈을 안 훔친 것은 죄가 아니라는 기준을 제가 뭔데 제 맘대로 세우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그런 기준을 세울 자격이 없는데 돈을 훔치면 죄고 돈을 안 훔치면 죄가 아니라는 기준을 권리와 자격 자체가 없는 제가 왜 세우냐’는 겁니다. 그게 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죄란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무엇으로 변경시키느냐 하면, 이제는 자기가 하는 것, 자기가 결정한 것이 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쉽게 해 봅시다. 여기 돈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안 훔쳐도 훔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죄인가? 돈을 훔치면 이 돈이 어디에 모입니까? 자기 것으로 모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것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 것이 있기 때문에 돈을 훔쳐서 ‘나’라는 자기 창고에 축적하기 위해서 돈을 훔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훔치는 것만 죄라고 여기고 내 것을 따로 가질 수 있다고 우기는 그것이 죄인 줄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안 훔쳤다면 ‘나는 돈을 안 훔쳤으니까 나의 착함, 나의 의로움에는 손상이 가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고 자기의, 자기착함이 있다는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하여튼 모든 죄는 내 것이 있다는데서 발산됩니다. 내 교회, 내 식구, 내 새끼, 내 아들, 내 딸, ‘나’가 붙는 것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어디에 쌓입니까?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면 어디에 쌓입니까? 내 창고, 내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차곡차곡 쌓이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죄가 안 됩니까? 죄입니다.
신학을 해 보세요. 그게 옆 사람 머리에 들어갑니까? 내 머리에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신학을 하는 것이 죄라니까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그러면 죄 아닌 것이 없잖아요.”
“죄 아닌 것이 없지요.”
“죄 아닌 것이 뭡니까?”
“죄 아닌 것은 우리 외곽에 우리 바깥에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피 아닙니까! 왜? 모든 말씀은 피에 쏠리니까!”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쏠리는데 그 말씀의 물꼬와 방향을 틀어서 나의 것, 나의 명예, 나의 위신, 나의 가치성 여기에 틀어서 ‘주여, 저 착하죠’라고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전에서 기도한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세리인데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판정은 누가 내리겠습니까? 판정은 세리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옆에 있는 바리새인이 내리는 것도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말하기를 옆을 슬며시 보면서 ‘주여,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아니하고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도 하고 구제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기도할 때, 둘 중에 누가 의인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판정은 약속되신 분이 합니다. 세리를 의인이라고 하고 잘난 체 하는 바리새인을 심판받고 저주받을 죄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판정했습니다. 그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구제등 모든 성경말씀을 나의 것을 더 확장, 확대하는데 적용시켜서 자기한테 투자한 겁니다. ‘이만큼 투자했으면 하나님이 양심이 있다면 나같이 착한 인간을 버릴 리가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한테 한 겁니다.
그러니까 행동을 반듯하게 했다, 남에게 해코지를 안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너의 것이 없어야 되는데 왜 너의 것 이라는 것이 있느냐’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나의 것’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백지가 있습니다. 이 백지위에 여러 가지 선을 긋습니다. 이것이 관계망입니다.
어린애가 태어날 때 밑에서 고개를 쑥 내밀어 보니까(구멍 뚫린 종이위의 관계망의 그물로 올라와서 걸치는 모습) 옆에 엄마, 아빠, 삼촌 다 있는 겁니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 아빠, 삼촌 안 챙겼습니다. 이미 있는 엄마 아빠의 관계망, ‘우리 집은 부잣집인데 내가 부잣집에서 태어났구나’라고 되는 거예요.
이렇게 나라는 것은 구멍이 뚫려서 톡 튀어 나와서 관계망 속에 걸쳐 있는데 그 때부터 이 아이는 커 가면서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이 모든 관계를 자기 것으로 다 돌려 버립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이제는 엄마도 아빠도 내 뜻대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2세부터 자아정체성이 성립 되는데 그 자아정체성이 있어서 두리번거리면서 다 끌어 모읍니다.
어디로 끌어 모으겠습니까? 자기에게로 끌어 모읍니다. 전부 다 내 것으로 가져옵니다. 누나의 것을 빼앗으려 들고, 형에게 안 지려고 하고 좋다는 것은 전부 다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드는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미 성립된 관계를 끌고 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뭘 해야 되는가? 선악과 따먹지 말고 생명나무만 따먹으라고 아담을 세운 겁니다.
그런데 아담이 못하니까 누가 했습니까? 결국에는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님이 다 한 겁니다. 그러나 아담은 두리번거리면서 ‘선악과 이것 따먹어 볼까?’ 하고 결국 따먹고 나니까 하나님이든 뭐든 전부 다 자기위주로 가는 겁니다. 돈이 있으면 그 돈을 자기 것으로 집어 넣고 ‘나는 부자다’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이미 버린 몸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삼촌, 누나, 엄마 이런 관계가 아니라 사랑, 자비, 용서, 긍휼 이런 관계망을 그물처럼 쳐 놓고 우리 죄인을 뚫어 버립니다. 뚫어서 들어 올리니까 동쪽에도 자비고 서쪽에도 긍휼이고, 북쪽에는 용서고, 남쪽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의입니다.
완전히 횡재 한 겁니다. 이미 마련된 용서의 체제, 용서라는 그물망에 고개만 쑥, 하고 튀어 나온 거예요. 자기는 죄밖에 안 짓거든요. 그런데 사랑은 뭡니까?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평생토록 우리는 나밖에 모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아빠는 왜 돈 못 벌어? 엄마는 왜 만 날 몸이 비실비실?’ 엄마 아빠가 자기를 낳았는데 자기가 엄마 아빠를 조정해야 되는 것처럼 굽니다.
태생적으로 자기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것을 이용해서 이 새로 뚫린 관계망 속으로 올라오게 하는 것처럼,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이미 용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피가 용서와 자비의 그물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튀어 나온 사람끼리 교회로 모이니까 교회는 누구만 자랑합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만 자랑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튀어 나오지 않고 그냥 지식만 배운 사람은 ‘나는 사랑 받았다’ 하면서 사랑조차 전부 다 자기 창고에 집어넣습니다. ‘용서 받았다’를 집어 넣은 자기가 잘났습니다. 자기가 돛대인 양, 자기혼자 예수 피 믿는 것처럼 굴어요.
그물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람은 항상 생각을 내 중심으로 해서 ‘내가 실패했을까, 성공했을까’ 하는데 그 ‘실패 했을까, 성공했을까’ 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왜? ‘예정하심’은 예수님을 예정했지, ‘내가 실패했을까, 내가 성공했을까’라는 것은 에스겔에 안 나오고 예레미아에 안 나옵니다.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그냥 불도우저로 밀어 버립니다. ‘네가 이근호야?’ 그냥 밀어 버립니다. 그 밀어버리는 것이 한글자로 피, 예수의 피입니다. 예수의 피로 밀어 버립니다. 피 앞에서 ‘네 존재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 피 앞에서, 그 존재가 대단하면 피를 흘렸겠는가? 바보야! 네가 그렇게 똑똑하면 피를 흘렸겠는가?’
피를 흘린다는 그 말은 ‘저 어때요?’라는 말을 일소에 부치는 겁니다. ‘어때요’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권리조차 아예 우리에게는 없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버릇을 더럽게 들여 놓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자기 밖에 모르는 일종의 괴물처럼 태어났으니까 그것이 나이가 40이 되건, 60이 되건, 심지어 나이가 90이 되어도 그 성격 어디 안 갑니다.
제가 어떤 경우에는 오해를 했었습니다. ‘80이 넘은 여러분은 인생의 여생을 편안히 보내면서 인생은 별것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요?’라고 했는데, 80이 넘은 우리교회 권사님 왈, ‘목사님, 80이 되어 보시면 그때에 새로운 자아가 또 새싹처럼 피어오릅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고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 밖에 모릅니다.
나이 90되었다고 인간 되는 것 아닙니다. 태어나면 차게 되면 기저귀도 부모님이 다 마련해 준 것이고 그 애는 그냥 사용하기만 할 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부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못하지요. 제 말은 고맙다는 소리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는 고맙다는 소리도 할 자격조차 안 됩니다.
왜? 그것조차 다 ‘예정하심’입니다. 무슨 예정입니까? 죄인으로 태어나서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증거 하는 예정입니다. 그게 바로 예정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예정하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입니다.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겁니다. 모든 아담은 죄 아래 있기에 죄가 왕 노릇 하고 결국 죽음이 왕 노릇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현재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 약 62억 정도 되는 전체를 한명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한명의 아담으로 축소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이쪽 천국의 백성들이 많이 있지만 이쪽도 한명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쪽은 예수님의 용서, 사랑이 왕노릇합니다. 사랑이 뭐라고 했습니까?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기 시커먼 죄가 있다면 사랑이란 ‘똑바로 해!’, 그게 아니라 그냥 확 덮어 버리는 거예요. 이게 사랑입니다. 너무 과격했습니까? 사랑이란 ‘반듯하게 살아야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지’가 아니라, 그냥 다 덮어 버립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숨이 막혀야 됩니다. 숨이 막혀야 사랑만 이야기 합니다. 숨이 안 막히면 자기 이야기 합니다.
‘나는 이렇게 사니까 상 받을 만하지’ 이렇게 꼭 자기 공로를 내세웁니다.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교회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예정된 교회만이 교회라는 겁니다. 예정된 교회라는 말은, ‘말씀에 의해서 예정된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누구에게 집중되었는가? 예언대로, 말씀대로, 성경대로 된 분이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그 집단이 바로 교회입니다.
왜? 우리는 죽는 것 외에는 예정된 일이 없으니까. 지금 죽어 가고 있음, 그것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안산에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만, 사람이 부끄럽다, 부끄럽다 하지만 진짜 부끄러운 것은 자신이 늙어 죽어가고 있다는 그 사실이 정말 부끄러워요. 그런데 그리되면 안 부끄러울 사람이 없습니다.
머리 희어지면 염색 하죠. 왜 합니까? 부끄러우니까 가리고 싶은 거죠. 그런데 어린애들도 태어나면서부터 늙어가고 있습니다. 늙어가는 얼굴을 아무리 뜯어고쳐도 늙어가는 이것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끄럽게 느낍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몸 가지고는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사랑이 있으면 다시는 수치를 당치 않는 것으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죽는 것이 우리는 부끄럽습니다. ‘젊을 때는 예뻤는데 그래서 잘나갔는데 나이 먹고 이게 뭐냐.’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은 사진을 안 찍으려고 합니다. 자기 사진을 보고 자기가 놀래요. ‘헉! 왠 귀신이 여기 있나?’
아무리 앵글을 잡아 봐도 내가 생각했던 내 모습의 각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세월 따라 내 모습이 자꾸 해골이 되어가지 제 모습은 영영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자기 모습을 보고 무서워하고 놀라겠습니까? 그러나 바짝 마른 해골에도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면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공부하는 것은 지식이나 몇 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고 있는 겁니다. ‘이럴 수가 없어. 이것은 엉터리고 사기야. 이럴 수는 정말 없어.’ 그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기에 우리가 도전할 맛이 납니다.
“피로 구원받아? 영생 얻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 너희들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그러나 그 있을 수 없는 그 일이 우리에게는 사는 재미다.”
이게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항상 불가능성, 사람이 가능한 것, 내가 가능한 것은 없애버리고 불가능성만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자신을 안 믿고 예수님의 약속, 이 성경만 믿게 됩니다. 가능성을 믿으면 안 됩니다. ‘기도하니까 감기 낫더라. 아프면 기도해야지’라는 이런 가능성을 믿으면 안 됩니다.
가능성을 쏙 빼버리세요. ‘지난번에는 기도해서 감기 나았지만 이번에는 안 될거야.’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교인들에게 참 무서운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 올 때에 예수 안 믿어도 되는 열 가지 이유를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과대망상증이며 예수님이 돈 인간이라는 열 가지 이유를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타성에 젖으면 안 되거든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이야기가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왜? 사람의 몸무게를 구름이 지탱하지 못하니까. 구름타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교회에 오시라는 말이죠. 그래도 믿거든 여러분 속에 아직도 불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꾸 믿을만한 이유를 갖지 마세요. 올무에 빠집니다. 믿을 만한 이유를 대지 말라고요. ‘내가 기도 안 할 때는 몰랐는데 기도하니까 자꾸 좋은 일이 생기더라’는 식으로 자꾸 그런 가능성을 만들지 마세요. 그것은 마귀의 시험이 드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겠지요. 그리고 그때 은혜 받는 방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되면 그 불가능성이 갑자기 가능성이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누굴 믿느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잘 믿었던 나를 믿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되어서 덮어씌우는 사랑이 답답해요. ‘사랑은 그만 치우세요. 이제 내 믿음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되어 버리면 그야말로 그것은 믿음에 파선한 사람입니다.
믿는 게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잘났는데 뭘 믿습니까?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자기 것이 있습니다. 어떤 교육학자는 말하기를 ‘자아란 자기 것의 집합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아를 뜯어보면 전부 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이 자아, 또는 나의 것, 이것은 전부 다 허구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이 신체가 내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때리면 내가 화냅니까? 화 안내지요. 그런데 남이 스쳐만 지나가도 화가 나지요. 신체가 내가 아닙니다. 신체를 내 중심으로 해서 자아를 따로 만들어 놓아서 내가 나를 때려도 화가 안 나는데 남이 때리면 그 자아가 화를 내는 거예요. 이해가 잘 안가지요?
엄마와 딸이 있는데 엄마와 딸이 같은 인간입니까, 다른 인간입니까? 다른 인간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자기 딸이 욕을 얻어먹으면 자기가 화를 내는 거예요. 딸이 시집갈 나이가 되어서 남자친구를 데려오면 엄마가 화를 내면서 ‘그것도 남자라고 그런 것을 데려 왔느냐’고 합니다. 딸이 뭐라고 할까요? ‘엄마하고 사나? 나하고 살지.’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뭐든지 걸치기만 하면 전부 다 집어넣어서 자아를 만들어 버립니다. 자아란 자기 것을 자아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은 없습니다. 없는데 죄가 만들어내는 것이 자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잖아요. 자기 것이 있으니까 자꾸 창고역할을 해서 집어넣는 겁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잘나서 계속 집어넣고 집어넣은 그것을 괴물처럼 확대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사람은 자아가 없으면 뭐가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담깁니다. 예를 들면 들풀이 자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들풀은 자아가 없어도 누가 기르십니까? 하나님이 기르시죠.
참새도 누가 기르십니까? 참새가 자아가 있어서 창고 짓고 길쌈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참새 입장에서는 누구를 의존합니까? 자기를 기르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죠. 그런 관계 때문에 하나님이 기르시는 참새만 있고 하나님이 기르시는 들풀로서만 있는데 인간만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해서 ‘나는 나다’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너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들풀 봐라. 참새 봐라. 들풀은 하나님과 관계있고 참새도 하나님과 관계있는데 너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잖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하나님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지 ‘예수 내가 믿겠다’고 자기 창고에 예수 집어넣고, 성령 집어넣고 성부 집어넣고, ‘내가 성부 성자 성령 믿었으니 천당 간다’고 하면 누가 넣어줍니까? 천국에서 안 넣어 줍니다. 예수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한테 빨려 들어가야 됩니다. 포도나무, 내가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따로 있고 나는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 불과한 겁니다.
‘만일 너희에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밖에 버리워 살라진다’(요 15:6)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는 죽은 놈이다’는 말이죠. 산 사람 되도록 하기 위해서 너와 나의 관계를 다시 이으려고 하는데 그 잇는 방법이 뭐냐? 우리 쪽에서는 안 됩니다. 왜? 무슨 관계이든 다 내 것으로 집어넣기에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죽었다. 가만히 있거라’해서 피를 흘리는 겁니다. 피를 흘려버리면 ‘아하, 저쪽에서 알아서 하시는구나. 내가 구원을 받을 자격은 안 되는구나. 내가 설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관계망으로 뚫고 나오니까 그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관계망입니다. 그 자비의 그릇, 용서의 그릇, 사랑의 도구,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교회(IP:220.♡.176.141)
08-04-20 17:28
서울080411b엡2장11절b
에베소서 제 10강 (이 근호목사, 2008년 4월 11일 b, 서울의존교회)
언약밖에 있고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 그리고 소망이 없다고 사도바울이 단정을 지었습니다. 이것을 실망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언약밖에는 하나님이 없고 언약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말은 곧 언약 안에는 하나님이 있고 언약 안에는 소망이 있다는 그런 이야기 되는 겁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자기들 딴에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으로 얼마나 으시댔는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오해를 했습니다. ‘말씀은 우리 육신의 힘으로, 우리의 몸으로 지킨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지켜낸 우리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있고 소망이 있다. 그런데 개 같은 이방인들아, 너희들은 율법이 없고 언약도 없고 따라서 약속이 없기에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그들은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유대인을 옹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유대인을 욕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육신의 힘으로 자기능력으로 언약을 지키니까 참 하나님도 있고 소망도 있다, 라는 그런 생각에 의해서 애매한 여러분, 이방인들이 그 동안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방인들은 언약도 없고 하나님도 없기에 소망이 없는 것이 맞습니다. 맞는데 여기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소위 소망도 있고 하나님도 있다고 여기는 너희도 똑같이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유대인들이 어디서 오해를 했을까요? 자기들은 약속을 받았기에 소망도 있고 하나님도 있다고 자부를 했었는데 사도바울 보기에는 둘 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 가운데 유대인들의 어떤 해석이 잘못된 겁니까? 바로 여기입니다. ‘내 힘으로 언약을 지키고 약속을 지키니까 그러니까 언약이 있는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고 개 같은 너희는 지옥 간다.’ 그렇게 본 겁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육체의 힘으로 언약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완벽한 사람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했고, 자기가 지금까지 고상하게 알고 해왔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해서 ‘너희들은 못하지? 우리들은 지킨다’라고 약 올리고 으스대던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육신이 있는 이상은 둘다 똑같은 사정에 놓여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이 있어야 하나님이 있고 언약이 있어야 소망이 있다는 그 말은 맞잖아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것을 지켜야 될 것이 아닙니까? 방금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못 지킨다고요. 그러면 약속이 있어도 우리는 소용이 없네요. 여기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언약과 약속을 누가 지켰냐,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에베소서 2:13에서 말씀하는 바 ‘피’입니다.
에베소서 2: 12, 13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언약과 약속을 다 지킨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밑에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 둘 사이를 양쪽 다 똑같다고 박치기를 시킨 겁니다. 그렇게 해 놓고 진짜 말씀을 지킨 것은 예수님뿐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 모든 말씀을 다 지킨 것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말씀을 지켰다는 말은 우리 피가 아니기에 우리 외곽에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소망이 있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으려면 우리 외곽에 있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우리 내부의 피로 전환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피가 우리를 용서해주는 사랑으로써 역사할 때, 그 사랑이란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으니까 우리에게도 모든 율법을 이룬 것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외부에 있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 내부의 용서하는 피가 되느냐? 이것이 아주 궁금할 겁니다. 로마서 8:3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도록 십자가 밑에 깔때기를 놓겠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뭐가 흐릅니까? 피가 흐릅니다. 깔때기에 피가 흐릅니다.
로마서 8: 3, 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좆지 않고 그 영을 좆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달렸습니다. 십자가가 뭐냐? 죄 있는 육신의 몸이 하나님 앞에 저주받고 형벌받는 그 일이 바로 십자가의 일입니다. 십자가의 일이란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버림받은 사건입니다. 그것도 목숨까지 바쳐 가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목숨까지 바쳐가기 위해서는 그 몸이 죄없는 몸이 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죄 없는 몸을 심판하면 안 되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몸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누구든지 이렇게 당한다는 것,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십자가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 있는 육신의 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는 분인데 로마서 8:3에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죄 없는 육신의 몸이 죄 있는 육신의 몸이 되었다면 그 죄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이 ‘나는 이 몸 가지고도 율법을 지키고 약속을 지키고 언약을 지켜서 나는 소망이 있고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알아주신다’고 나온 것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뭐가 된다는 겁니까? 그 자체가 바로 ‘죄 는 놈이 무슨 하나님, 무슨 소망을 기대해?’라고 죄 있는 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
제가 아까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를 박치기 시킨다고 했습니다. 박치기를 시키는데 무엇을 가지고 시키는가? 예수님의 피를 가지고 박치기를 시킵니다. 이 말은 율법은 예수님만 지키지 결코 인간들이 지킬 수 없다는 것, 그것을 십자가에서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율법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한다고 했습니까? ‘내 힘으로 지킨다.’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다고요? ‘언약도 없고 소망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있다, 없다를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 몸이 어떤 몸입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그 몸이 어떤 몸이라고요? 죄 있는 육신의 몸이라는 말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니까 아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박치기 시킬 때는 자신이 매달린 십자가의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 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피 앞에서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둘 다 죄 있는 육신의 몸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몸이 무슨 하나님이 있고 죄 있는 육신의 몸이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로마서 13: 9, 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여기 보면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을 대표해서 그것을 해결했다는 것 그 자체가 ‘네 몸으로 안 되고 내가 준 사랑으로 되는데 그게 뭔 줄 아느냐? 그 사랑이란 대신해서 죽인 아들의 몸, 죄 없으신 분이 죄있는 몸을 대신해서 죽었으니까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큰 사랑이 있다면 모든 율법을 이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피가 있는 사람은 소망이 있고 피가 없는 사람은 소망이 없는 거예요.
에베소서 2: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율법을 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전체를 다 찢어 버릴까요? 여러분 성경을 율법으로 보지 마시고 사랑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나아고 십자가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사랑이 나오고 십자가가 나온다는 말은 우리가 유대인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하나님, 제가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네 죄를 알아라. 죄 있는 육신의 몸이 어떻게 이 말씀을 지키는가?’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들이대시는 이유는 내가 성경말씀을 지키겠다고 율법적으로 바라보는 모든 율법적인 기능을 십자가가 다 찢어 버리고 폐해 버리는 겁니다. 없애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말씀 전체는 뭐냐?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보여줍니다.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했구나, 사랑의 책이 되는 겁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버려요. 사랑이 사랑다우려면 덮을 죄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만약에 사랑의 윗도리라면 그 사랑의 윗도리에 덮여야 될 우리는 뭐가 되어야 합니까?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뭡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몸.
다시 정리합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덮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율법을 폐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똑같은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는 것, 소망이 있게 하는 것, 참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큰 횡재입니다. 너무나 큰 사랑을 주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잘 믿지를 않습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너무 큰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전혀 말씀을 못 지키는 너무 큰 저주받은 죄인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먼저 아시는 사람에게만 그 사랑이 진정 큰 사랑으로 받아 집니다.
그렇지 않고 ‘나도 뭔가 좀 할 수 있는데, 나도 가능성이 있는데’라고 되어 버리면 그것은 본인부터가 자신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간주하지 않고, 또 예수의 피를 이용해서 구원받으려고 시도하는 그런 시도가 됩니다. 그리되면 피 앞에서 너나 나나 똑같은 것이 아니고 자기 자랑하는 유대인 행세가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했느니라,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했느니라’고 이렇게 십자가를 여러 번 이야기 하는 것은 제발 우리 자신이 유대인 같은 행세를 되풀이 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자꾸 성경을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하면 예수님의 피, 윗도리같이 덮어주는 사랑이 뭐가 됩니까? 그러니까 덮어준 사랑이 고마운 줄 알면 푹 덮여서 나 그 안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만이 진정 사도바울처럼 십자가만 증거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돌아서면 다시 그 사랑의 윗도리 밑에서 그냥 있으면 될 텐데 그 안에서 또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죄 있는 육신의 몸이 얼마나 자기 위주인지 자기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사랑의 윗도리를 다 잊어버리고 또 향상된 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이 십자가 피가 믿어진다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항상 우리에게 불가능성으로 남아 있어야지 내가 가능한 믿음으로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항상 가능한 것은 뭐냐? 육신의 몸에서 죄만 나온다는 그것만이 가능합니다. 그것을 덮어주는 사랑이 믿어진다는 것은 믿음의 선물인 주님의 공로이지 우리의 가능성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피로 인하여 진정한 사랑에 들어가게 되는데 보통 관계라는 것은 내가 먼저 있고 그리고 내가 그 관계를 넓혀가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를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에베소서를 보게 되면 이방인이든 헬라인이든 그들의 관계를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제 삼의 관계,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 ‘너희들은 이 십자가 피와 어떤 관계에 놓여져 있는가’ 하는 그런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2: 15의 내용입니다.
에베소서 2: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여기에 보면 둘을 용납하지 않고 하나만을 용납하는데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모으는 식으로 하나가 아니라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제 삼의 한 사람을 지으십니다.
그 내용이 16절에 이어집니다.
에베소서 2: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여기에 십자가 피가 들어갑니다. 십자가 피로 인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한 몸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고, 우리가 착한 사람이라서 남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도 착하기에 날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너 나 할 것 없이 너 나의 관계는 없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등장해서 그 십자가와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 하는 식으로 새로운 인간이 등장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으로 세상 모든 관계를 다 집어넣어서 자기위주의 세상관, 자기위주의 몸을 주장하는데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공중의 새 봐라. 창고 짓느냐, 길쌈하느냐.’ 새가 무슨 자아가 있어서 창고를 짓습니까? 새는 하나님이 창고를 지으십니다.
그 관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새, 새와 하나님, 그 관계에서 새가 언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까? 기르시는 대로 길러지는 겁니다. 들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그냥 기르시니까 길러지는 거예요. 그 들풀과 참새와 우리 인간과의 차이를 보세요. 참새와 들풀은 완전히 하나님께 의존적이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독단적으로 나왔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그 나라와 의와 연관되어 있는 관계, 참새라는 것이 주께서 기르시는 것을 보여주는 용도라고 본다면, 또 들풀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입히시는 것을 보여준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나라와 의를 보여주는 그 관계 때문에 새롭게 맺어진 인간, 그 인간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에베소서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써만 그 관계가 정립이 됩니다. 그동안의 모든 인간관계, 얽히고설킨 관계, 나 중심에서 너를 보고 너 중심에서 나를 보는 너 나의 관계는 다 없어지는 겁니다. 없어지고 위에서 내려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죽은 인간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죽은 인간끼리 관계를 맺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 아니냐 하지만, 새로운 관계 예수님의 나라와 십자가의를 보여주는, 증거하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 중심의 새로운 인간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상관없이 살아지게 되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저 언약, 약속, 율법 있고 그 율법대로 하면 하나님이 있고 소망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잘못입니다. 이방인들은 아예 약속이고 언약이고 간에 아예 없습니다. 없으니까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이 둘 다 육신에 속했다는 것, 죄 있는 육체의 몸, 육신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지켜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