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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08. 3. 21) 1강자유게시판디모데전서

광주강의(08. 3. 21)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3. 21) 35-1

강의 시작합시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 “미쁘다(믿음직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말’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현재 없는 것.

에릭 프롬은 사람을 [소유와 존재]로 나누는데, 뭔가 끌어당겨 내 것으로 만들어야 사는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소유 지향적이고,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숭고하다. 경이롭다.’ 있는 그대로에 감탄하는 것을 가지고 존재 지향적이라고 하는데, 현재의 서구사회나 모든 세계가 소유 지향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자본주의 사회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 어떤 것이 있으면 ‘저것은 얼마냐?’고 묻지요. 신부가 오면 “혼수 얼마나 들었어요?” 하고. 항상 가치를 매길 때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항상 돈으로 환산합니다. 심지어 사랑이란 것, 사랑하는 것도 ‘얼마짜리 사랑인가?’ 라고 물어야 대화가 됩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 돈을 매개로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라고 합니다. 10명이 모였는데 돈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 대화가 될까요, 안될까요? 안 됩니다. 돈 안 되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 시장경제의 특징입니다.

“아이 공부 잘 해?” 이렇게 묻는 것은, 결국 공부 잘 하면 나중에 돈 많이 벌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잘 해. 그런데 미술대학을 가려고 해서 내가 골치 아파.” 이 말은, 순수미술은 돈 버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죽은 후에는 그 작품이 돈이 되지만 살아있을 동안에는 돈 벌기 힘들지요. 그러니까 골치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머리도 좋고 공부를 잘 하기에 돈 버는 학과로 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돈을 매개로 해서 대화가 됩니다. 소유를 매개, “나는 얼마 가졌는데 너는 얼마나 가졌어?” 라고 서로 가진 거 꺼내 놓아야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성형수술을 한다면 성형수술 하는 이유가 그냥 “내 코가 낮다.” 존재 지향적인 것은 뭡니까? 코가 낮다면 낮은 것 자체를 아름다움으로 보는 거지요. 그러나 내 코에 내가 만족해도 막상 그것이 신부 시장이라든지 또는 취업할 때 코 낮은 것은 돈이 안 됩니다. 면접관이 하는 말이 “너는 거울도 안 보나?” 이렇게 나오면, 취직이 안 되고, 스스로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취직이 안 돼 소득이 없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삽니다.

지금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불이 되었다는데, 세 식구라고 하면 6만 불이죠. 그런데 (어린이 빼고)한 사람이 3만 불을 벌고, 다른 한 사람이 1만 불을 번다고 하면, 그 사람이 2만 불을 더 벌어야 평균이 된단 말입니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돈을 안 벌면 그만큼 주위 사람들이 힘들이요.

얘를 많이 낳으면 친척들이 안 좋아해요. 왜? 그 아이들이 대학갈 때 돈 보태줘야 할 경우가 생길까봐 그래요. 본인들이야 여러 아이들 재롱 보면서 즐거울지 모르지만. 만약 아이를 5~6명 낳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른부터 주위에서 말리지요. 왜냐하면 그 집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 가난하고 못살면 아는 천척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거든요. 뭔가 보태줘야 된말 말입니다. 하다못해 장난감이라도 사 줘야 하고, 옷이라도 한 벌 사 줘야 되고, 학교 가는데 등록금이 없다면 등록금도 보태야 하고. 이러면 자꾸 신경이 쓰이니까 많이 낳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소유 중심의 사회와 존재 중심의 사회. 소유 중심의 사회는 자꾸 가져야 사는 보람을 느끼고, 존재라는 것은 없으면 없는 데로 그것을 아름답게 보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나면 얼마나 귀엽고 아름답습니까. 이 아이가 기어 다니고 방긋 웃고 하면 엄마로서 기쁨을 느끼지요. 그런데 언제 실망스러운가 하면 다른 아이들 한글 다 뗐는데 아직도 말도 제대로 못할 때. ‘이놈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밥 먹고 살겠나?’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처음에 태어날 때 그렇게 아름답던 아이가 나중에 골칫거리가 됩니다.

MBC에 [누구세요?] 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아빠는 체육관을 운영하는데 손님이 없고, 아들은 주먹질해서 돈 받아먹는 그런 일을 하는데,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둘 다 골치 아프다.”고 합니다. 자식이지만 자식의 존재 자체를 아름답게 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소유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못 벌면 하나도 아름답지가 않아요.

그런데 성경은 소유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에요. 뭘 느낍니까? 결핍을 이야기해요. 모자람을 이야기 합니다. 그 모자람이 15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하는 말은 정말 중요하다.” 이유가 뭐냐 하면, 이 현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거예요. 이게 결핍이죠. 모자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좋은 것을 왜 안 믿나?’ 이 말입니다. “그저 주겠다는데 왜 안 받아들이느냐. 이 어리석은 자들아!”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데? 예수님께서 건져주러 왔는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은 자진해서 자기가 의사로 온 거예요. 치료하러 온 의사를 총 쏴서 죽이면 안 되잖아요. 아프면 누가 고칩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픈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의사를 보냈단 말이지요. 그러면 의사가 왔으면 자신이 환자인 것을 알고 그 의사를 반기면(찾아가면) 구원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기분 좋은 말입니까? 새삼스럽게 본인이 건강식품 먹고 스스로 챙기면 뭐가 필요 없습니까? 의사가 필요 없잖아요.

지난 수요일 탕자이야기 들어보셨지요? 탕자가 가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푸짐하게 뭘 들고 왔습니까? 아니에요. 빈 호주머니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채워줄 여기가 많은 거예요. 왜?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 털어먹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나는 이만큼 가지고 있으니까 나답다. 나는 이런 재산을 소유했기에 나답다.’고 했는데, 그 재산이 없어지고 난 뒤에는 ‘나’가 없어졌어요. ‘나’가 없을 그 순간을 아버지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자기의 소유가 한 꺼풀 두 꺼풀 다 날아가서 이제는 ‘나’가 없지요. 빈 주머니가 있는데 그 빈 주머니에 아버지가 주신 것으로 채워지잖아요. 가락지도 아버지 것, 소고기 먹고 배부른 것도 아버지의 은혜, 좋을 옷을 입은 것도 아버지 은혜.

이제는 이 탕자가 동네방네 인사하면서 뭘 자랑하겠습니까? 그 전까지는 누구 자랑했어요? ‘나는 이만큼 가졌습니다.’ 이것을 자랑하다가 그 다음은 ‘이것은 아버지가 주신 것. 이것도 아버지 것.’ 전부 다 공로를 아버지께 돌리지요. 이것을 저는 ‘기쁨으로 포기한다.’고 합니다. 기쁨으로 포기할 때 이것이 신앙이잖아요. 포기 현상이 일어나요. 그것도 억지가 아니고 기쁨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안 쓰도 된다는 기쁨으로 자기에 대해서는 포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만 갑니다. 참 죄송한 이야기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한 사람만 천국 갑니다.

건져줄 때는 그냥 건지는 것이 아니라 죽여 놓고 건져 줍니다. 망치로 때려서 퍼졌을 때 그 때 잡아당깁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현재 여러분들이 가진 재산이나 어떤 것이 있더라도 지금 등기를 주님 것으로 바꾸어놓으세요”라고. 왜? 그것이 탕자의 모습입니다. 괜히 내 것이라고 하지 말고 주님 것으로 바꿔 놓으세요. 그래서 누구에게 이야기할 때 “이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비록 옷을 우00 집사님이 만들어 주셨지만(강사 목사님께) 이미 주님의 것으로 등기 이전했습니다. 이번 달에도 옷이 있는가 모르겠네? 어하하하 ---

탕자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큰 아들은 자기가 잘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버지께 늘 충성했으니까. 그런데 동생(탕자)한테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니까 완전히 돌아버리겠어. 아버지가 기대했던 아들은 형이 아니었어요. “아버지. 나는 아버지 잘 모셨습니다. 나는 가출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아버지가 원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단 말이지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것으로만 채원진 자를 하늘나라에서 원하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라는 인간은 하늘나라 못 들어갑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원이란 것이 그 사람에게는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운 것은 구원한다는 행위가 하나님보시기에 흐뭇해야 되는데, 그 맏아들은 너무 잘났어. 건져줄 것이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것이 담길 자리가 없어요. 그런데 탕자는 빈 털털이로 왔으니까 빈 것에 아버지 것만 차곡차곡 쌓여요. 모든 구석에 아버지 것으로만.

그래서 작은 아들은 어디를 가도 아버지 자랑만 하는데 큰 아들은 제 자랑밖에 안 할 거란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동안 가출한 적 없고, 철저하게 아버지를 섬겼으니까 제 자랑 외에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오해한 거예요. 완벽하면 천당 가는 줄 안다니까. 목사 시키는 대로 하면 천당 가는 줄 알아요. 말씀 잘 지키면 천당 가는 줄 안다고.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구원한 흔적이 있어야 돼요. 나는 죄인이며 구원했다는 흔적이 있어야 돼요.

안산 강의에서 제가 그런 공식을 사용했는데, 여기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공식은 하늘나라 가도 여전합니다. ‘구원 = 죄인 +용서’입니다. 구원이란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해요. 의인되면 큰 일 납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몫으로 죄인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죄인이라야 용서가 돼요.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이 공식 외에 다른 공식은 없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바꿀 때 무슨 방식이 동원되는가 하면 ‘기쁨으로 자기 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지켜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함으로써 내가 구원 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저것 돈 가지고, 자식 가지고 하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의까지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 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의를 소유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칭의 개념’, ‘법정 개념’ 이거 소유개념 아니에요. 의를 소유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용서 속에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 포함되어서 구원 받는 거예요. 주님의 용서하심 속에는 용서하신다는 자체가 말씀을 성취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이게 의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오용익 목사님을 내가 용서하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는 ‘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의인을 누가 만들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우리는 못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없어요. 의인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뭘 지켜서 의가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의’중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그 의를, 건지는 것은 예수님이 건지는 거예요. 건지신다는 그 자체에 걸려든 죄인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의’고 우리는 그 ‘의’안에서 의인된단 말이지요.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게 아니고. ‘나는 의 가졌다.’ 하고 자랑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에 우리가 포섭이 되었어요. 함락되고 말았어요. 내가 손으로 물건을 잡는데, 내 손이 예수님의 의라면 의가 죄인을 그냥 삼켜버린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는 거예요.

잡혔는데 팔딱팔딱 하지요. 팔딱팔딱하는 것은 죄인이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잡혀 있는 죄인이 의인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독립을 한 것이 돼요. “나도 의 가졌다.” 예수님만의 의가 “나도 의인이다. 전에는 죄인이어서 말씀 못 지켰는데 이제는 의인이기 때문에 이 말씀 내가 지키겠다.” 이것은 독립 선언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말씀을 그렇게 오해해요. ‘이제는 율법으로 모든 의를 이루리라’고.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데, 이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사는가? 탕자가 돌아와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버지가 끼워주신 가락지 끼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누구 자랑했어요? 아버지 자랑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다. 탕자 같으면 ‘나는 개판이었는데 아버지는 훌륭했었다. 아버지는 자비로웠다.’ 이게 바로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 자랑이고 이게 성도의 삶이란 말입니다. 이게 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이 된단 말이지요.

여러분 자신을 잊어주세요. 잊어달라고 한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왜냐하면 지금 시대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기를 잊을 수가 없지요. 항상 자기는 돈으로 가치가 매겨지니까. 나는 몇 점짜리 인간이고 당신은 몇 점짜리 인간이고 점수가 돈 되고 하는 시대이기에 잊을 수는 없지만, 그러한 죄인이 주님의 구원 앞에서는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놓아 주어야 합니다. 자신을 너무 붙들고 있지 말고 “그래. 너는 내가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안 고쳐진다. 나는 너한테 포기 먹었다.”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를 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 살아계신 주님의 용서가 절대로 그 사람을 포기 안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미쁘다(믿음직하다)’는 것입니다. 너는 너를 포기해도 믿음직스럽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포기 안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지는 작업이 계속되기 때문에 나는 나를 못 건져도 건지시는 전문가가 나를 건져주시기 때문에 내가 나를 너무 닦달하고 질책하지 마세요. “나는 왜 이렇게 살지?” 원래 그렇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안 해야지.” 앞으로 그런 소리 100번도 더 합니다.

끝까지 우리가 보여줄 것은 ‘아버지가 나를 용서했다.’ 이것을 이야기해야지 ‘나는 끝까지 실수를 줄여 나간다.’든지 ‘나는 최선을 다 했다.’든지 ‘실수했지만 곧장 돌아서서 회개해서 완벽을 유지했다.’든지 이런 자기 솜씨 자랑하지 맙시다.

처녀 때는 청순가련형으로 코스모스도 함부로 못 꺾고 코스모스를 보면서 눈물 흘리던 그 아리따운 처녀가, 아이 둘 낳고 셋 낳고 키우면서 애들 말 안 듣는다고 쌍스런 욕하며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그렇게 변합니다. 이게 ‘아줌마의 힘’ 아닙니까. 처녀 시절에는 꽃잎만 떨어져도 슬프다고 울던 사람이 나이 들어서는 남편 죽어도 안 울어요. 이게 자신의 껍데기가 벗겨진 것입니다.

껍데기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사람은 사람의 본질이 있고 실존이 있어요. 실존은 껍데기입니다.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은, 여기 [비타 500]이 있는데, [비타 500]의 내용물이 본질이라면 병은 실존(껍데기)이 되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은 이렇게 된다.’ 고 했는데,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본질은 제가 만들기 나름이다.’ 고 했습니다. 어떻게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본질이 새롭게 채워진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미확정 되었다는 거예요. 저는 사르트르의 이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놓친 게 있어요.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할 때, 그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죄가 뭔지를 모른다.’고 말을 고쳐야 돼요. ‘나는 아직 내 자신이 미 확정적이야. 열심히 살면 훌륭한 사람 되고, 게으르게 살면 나쁜 사람 되는 거야.’ 이게 사르트르가 하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일반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아니고 아직도 인간은 자기가 훌륭한 줄 알지만 아직도 무슨 사태가 일어나고 어떤 사건에 부닥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교회를 10년 다니고 20년 다녀도 나중에 이런 경우의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신학교 가서 성경을 100독을 하고 해도, 목사 생활 30~40년 한 뒤에 하는 소리가 ‘이 성경이 틀렸다.’는 거예요. 성경이 맞는가 내가 실험을 해 보니까 안 맞더란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 당신이 틀렸어! 신학교 때 순진할 때는 성경 맞는 줄 알았는데 막상 인생을 살아보니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입을 것 먹을 것 준다고? 안주데. 안 주니까 당신이 틀린 거야. 하나님 당신 틀렸어. 내가 맞아.”

이게 신학해서 목사가 되고 40년 50년 장로해도 그런 소리가 나온다니까요. 성경이 혹시 맞는가 실험을 해 보니까 아무리 실험을 해 봐도 안 맞더라는 것입니다. 개척교회 해서 복음대로 하니까 손님 안 오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개척교회 안 합니다. 이건 저도 마찬가지고 오 목사님도 마찬가지일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게 처음 예수 믿을 때는 “하나님 맞습니다. 먹고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지요. 저는 이대로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 되고 20년쯤 목회하면 “네가 틀렸어. 사람이 먹고 입는 것이 다가 아니야.”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은 하나님은 예초부터 없었다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되게 하면, 즉 먹는 것 입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면 하나님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는데 내 마음에 먹는 것 입는 것으로는 족한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예초에 없었는데, 내가 상상해서 믿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있잖아요. 사람이 상상을 언제 합니까? 현재 상상하지요. 상상할 때 항상 과거를 기초로 해서 상상하는데, 지금 과거의 것을 상상한다는 말은 과거의 것이 되살아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 과거는 없는 거니까. 십자가 사건이 지금부터 2,000년 전 사건 아닙니까. 그러니까 과거죠.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를 생각한다고 합시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십자가 사건이 그대로 올라온 거예요, 지금 내가 상상한 십자가입니까? 지금 내가 상상한 십자가를 십자가라고 믿어버리면 이미 과거는 사라진 것이거든요. 그러면 과거의 십자가 사건은 한 물 간 거고, 현재 내가 상상한 십자가만 덜렁 믿는단 말이지요. 상상한 십자가 믿어봤자 내일 되면 현재가 과거 되니까 또 이것도 날아가 버려요.

결국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 믿는 게 아니고 그냥 상상만 줄곧 하는 것뿐이란 말이지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경험이라면 갈라디아서 3장 1절이 뭡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할 때, 갈라디아 3장 1절이 맞아요, 지금 내 경험이 맞아요? 누가 맞습니까? 내 경험이 맞아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어리석도다”고 했는데 어리석기는 바울이 어리석어요. 왜? 십자가가 보이지도 않는데 보인다고 했거든요. 상상하면 보이지만. 상상해서 보이는 십자가는 과거 그 십자가가 아니고 지금 내가 억지로 상상한 것 밖에 안 돼요. 이것은 자기 꾀에 자기가 스스로 최면을 건 거예요. “나는 십자가로 구원 받는다. 십자가로 구원 받는다.” 이것을 계속 반복을 하니까 이것은 자아도취에 빠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성경을 보면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며 따라 다녔잖아요. 한번 혜택을 입었어요. 그런데 다 떠나가 버려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 가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탕자 이야기했잖아요. 탕자는 가락지 끼고 새 옷 입어도 여전히 자기는 탕자 맞다고 유지해 줘야 그 가락지와 옷을 아버지 공로로 돌릴 것 아닙니까.

이것이 자기최면이나 상상이 아니라면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우리로 하여금 뭘 유지시켜 줍니까? 계속 죄인으로 유지시켜 주는 기능을 말씀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디모데전서 6장에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이 말은 ‘지키겠습니다. 이제는 족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이 말씀은 나이 90이 되도록 우리로 하여금 못 지킨다는 겁니다. 우리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절대 족하게 여기지 않는 거예요. 저녁 먹은 것으로 만족 안 합니다. [비타 500]이라도 한잔 마셔야 만족하지.

사람은 상대방을 대할 때 사랑해서 상대방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어린아이 2명 성추행하고 살해한 사람은 대학까지 나온 사람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곳에 있지 말고 무안에서 양파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사람 죽일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 안양 그 복잡한데 사느냔 말이지요.

사람이 사람을 자꾸 만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상대와 비교해서 그를 꺾는데서 내가 이만큼 인간답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자꾸 사람을 만나요. 집에 있는 주부가 술꾼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월급날 돈 좀 있으면 비싼 술집에 가서 술 퍼먹고 팁 날리고 늦게 들어온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집에 술도 준비하고 좋은 안주도 마련하고 자기도 야한 옷 입고 화장하고 “여보, 술집에서 술 마시지 말고 집에 와서 마셔요.” 라고 하면 남편이 뭐라고 합니까? “술맛 안 난다.”고 하지요.

이것을 돈으로 계산할 것이 아니라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것을 삼켜버리고, 그것을 작살내 버리고, 그것을 지배할 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누구를 만나서 그걸 내 밑에 굴복시키는 재미로 돈을 뿌리는 거예요. 돈 밑에 무릎 꿇지 않는 인간 누가 있습니까. 다 무릎 꿇지. 내 밑에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이런 재미로 팁을 100만원씩 날린단 말이지요.

그러면 아내가 “내가 무릎 꿇을 게. 집에서 돈 날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안 됩니다.이미 아내는 남편 머리 꼭대기에 올라 있기 때문에 안 꺾이거든요. 잔소리만 해댈 뿐이지. 그러니까 밖으로, 밖으로 도망가는 거예요. 나는 누구를 이길 수 있다. 남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다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범죄라는 겁니다.

혼자 살면 범죄 안 일어나요. 그 시간에 강원도에서 혼자 감자 캤으면 아이 죽일 일 없다고요. 꼭 도시에 가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누가 더 세냐를 자꾸 경쟁하는 거예요. 그런데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요. 이러면 인간은 심심해서 못 살아요.

그래서 성경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후빕니다. “하나님 당신이 틀렸어!” 라고 할 구절들만 있어요. 그래서 성경이 갈수록 깊은 거예요. 성경 이만큼 알았으니까 이제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고 또 보고 성경을 계속 보면 항상 성경은 볼 때마다 내 속에 분통이 터져서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 할 말씀만 계속해서 펼쳐집니다.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를 화나게 합니까? 이혼 직전에 있는 사람 같으면 이 말씀 지킬 거예요. 이혼 직전이 아니라 가족들이 오순도순 잘 사는데 이런 말하면 짜증나지요.

창세기 22장 보세요.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고 합니다. 미운 독자가 아닙니다. 나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아들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독자’를 어떻게 하라고요? 번제로 드리라. 이게 얼마나 끔찍한 말씀입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주님께서 우리 속을 확 긁어요. 우리를 탕자로 만든다고.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다고. 왜? 아까 공식 이야기했지요. 구원 = 죄인 + 용서. 우리는 자꾸 죄인 안 되려고 하고, ‘하나님 당신이 나쁘다’고 나올 만한 그런 말씀과 사건들을 계속 일으킵니다.

‘자녀를 잘 양육하라.’ 성경에 나오지요. “주여, 자식 잘 양육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양육은커녕 자식을 갖다버리고 싶은 일들이 터진단 말이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 단순한 과거의 십자가 아니고 지금 현재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담아서 우리에게 줍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못 박고 나온 것이 뭡니까? 성령의 열매지요.

못 박히기는 우리가 막혔는데 그 공로는 누가 가져갑니까? 성령의 열매니까, 우리의 열매가 아니니까. 온유, 자비, 화평, 양선 -- 성령님의 열매지요. 이 모든 것이 십자가로 우리를 못 박아서 나오는 것은 주께서 그 공로를 가져갑니다. 가락지도 주님의 것이고 옷도 주님의 것이고. 이렇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탕자로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가출해야 돼요. 하나님 없는 곳으로 도망칩니다.

매일같이 하나님 없는 곳으로 갔다가 저녁쯤 되면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새벽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고. 하여튼 성경 말씀 보면서 “주여, 죄인 맞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 그 순간이 뭐냐? 탕자가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순간이에요. ‘현재 내 모든 것이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에요. 그 순간 지나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또 가출하게 만들어요. 가출 하면서도 “하나님, 당신이 잘 못해서 내가 가출한다. 잘 해주면 내가 왜 가출해?” 하면서 또 가출해요. 가출했다 몽땅 다 잃어버리고 돌아와서 “미안합니다.” 하고 다시 들어오고.

15절을 다시 봅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무엇을 구원하시려?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뭐로 봐야 된다? ‘나는 죄인. 주님의 나의 구원자.’ 간단하지요. “예수여!” 하고 부를 때 그 부름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나는 죄인. 주님은 나의 구원자.’ 이게 포함되어 있는 “예수여!”입니다.

뭔가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건져내야 할 필요가 있는데 뭐가 결핍되어 있는가? 악마가 우리의 뿌리입니다. 제가 주일 오전에 그런 설교했는데, 어항 속에 물고기가 한 마리 있어요. 이 물고기가 물이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바깥의 사람만 느낍니다. 어떤 사람이 어항 속에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손을 넣으니까 물고기가 오해해서 손이 나에게 직접 닿는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손이 물부터 먼저 닿지요. 물 닿고 난 뒤에 물고기에 닿지요. 내말 맞지요?

여기 물고기를 사람으로 본다면, 사람과 실제세계 사이에 뭐가 가로놓여 있습니까? 물인데, 이 물이 뭡니까? 악마에요. 우리는 악마 속에 놓여진 사람이에요. 그냥 사람이 아니고. 악마 속에 놓여진 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죄 아래 있다.’고 했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저주 아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저주 아래 있는 놈을 건져서 축복 아래로 옮겨 놓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신 거예요. “예수여!”라고 부를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 주님은 구원자’라고 했잖아요. 거기다가 내용을 더 첨가해 보세요. ‘나는 마귀 들린 자. 주님은 날 건져 내시는 분.’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끊어지면 우리는 어디에 놓여 집니까? 사단에게서 못 벗어나게 되지요. 20절 보세요.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사단에게 내어 줬다.’고 합니다. 사단은 악마지요. 악마한테 후달리도록 방치를 한 거예요. “그래그래 네 갈 길 가거라.” 하고 악마한테 내 준 거예요.

[The Others]라는 영화 봤어요? 어떤 집이 있는데 아빠는 군인이어서 전쟁터에 갔고 그 집에 엄마하고 남매 둘이 살고 있어요. 그런데 광고도 내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자 1명하고 아줌마 2명이 취직시켜 달라고 왔어요. 그래서 취직시켜 줬어요. 그런데 남매가 자꾸 하는 말이 “엄마, 우리 집에 유령이 사는 것 같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래도 자꾸 유령이 사는 것 같다고 하니까 3명다 쫓아내 버렸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엄마하고 두 남매가 유령이라. 그리고 취식하러 온 사람은 진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유령이 사람 쳐 죽인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승과 저승이 완전히 다 바뀐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유령을 무서워하잖아요. ‘유령이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해 봐라.’ 이런 뜻이거든. 내가 정상이라고 보면 남들은 악하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저쪽에서 보면 내가 악마고 내가 귀신이 되는 거예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는가 하면, 예수님은 정상이지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우리가 생명이라고 간주하고 살잖아요. 그런데 이 둘이 만났습니다. 만나니까 뜅겨버렸지요. 뿌리가 다르니까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악마에 속하고 귀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평소에 해 본적이 있습니까?

종교란 뭐냐? 종교는 내가 종교단체에 가서 내 잘 되도록,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으면 참석 안 합니다. 꼭 도움 되는 곳만 골라서 가요. 나 위주로 행동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도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섬겼더니만 예수님께서 날보고 죄인이라고 해요. 그래서 기분 나빠서 예수님을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올 때는 우리는 예수님을 붙들고 도움 받으려고 했는데, 예수님을 보니까 “저게 미쳤지. 제 주제 파악도 못하고” 이렇게 나오니까, 우리는 “예수 당신한테 우리는 잘 해주려고 하는데 왜 내게 욕해요? 우리 서로 좋게 합시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는 말이 “당신은 말만 했다하면 우리를 욕하는 소리한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단의 자식이고, 독사의 새끼다.” 세례요한도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하고. 바리새인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저들이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는 정상이거든요.

여러분, 한번만 생각해 봅시다. 지금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우리보고 욕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내가 모르는 진실을 진짜로 그분이 이야기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는 독사의 새끼 맞습니다. 성경은 이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부터 시작이 되어야지, ‘내가 주님한테 잘 할 테니 내게 복 주시고 날 천당 보내 주세요.’ 이런 흥정이라든지 이런 제사 이것은 또 하나의 소유인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종교생활입니다.

종교생활은 ‘추가 밥’입니다. 취미생활 중에 종교하나 걸쳐서 하는 거예요. 꽃꽂이하면 꽃꽂이가 날 죄인으로 만듭니까? 아니잖아요. 서예하면 날 죄인으로 만듭니까? 세상의 어떤 직업도 지금보다 나를 더 향상시키는 그런 취미고 그렇지 나를 뭉개는 취미는 아니잖아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회 가기 전보다 가고 난 뒤에 향상되고 복 받아 부자 되고, 나름대로 도움 되려고 가는 거예요.

도움 되려고 오는 인간들을 향하여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네가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는 생각지 않고” 이렇게 욕을 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기분 나쁘잖아요. 기분 나쁘지만 한번 생각해 보잔 말입니다. 혹시 예수님 말씀이 맞을 수가 있습니다.

영화 끝에 나와요. 처음부터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현재 여자 주인공과 두 남매가 인간들이고 하인으로 온 사람들은 귀신이라고 전부 그렇게 생각했는데, 끝에 보니까 이 여자가 우울증 걸려서 두 아이를 죽였고 자신도 자살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들이 그 집에 살았던 거지요. 남편이 돌아왔는데(산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도 없는 빈 집이고, 죽은 자들은 돌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지만 전혀 알지 못하고.

이것이 뭐냐 하면, 이미 우리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짜 예수로 자꾸 변경해서 믿어요. ‘나에게 욕 안 하는 예수, 내 소원대로 들어주는 그런 부처님 같은 예수, 내 비전을 들어주는 예수, 내 꿈을 이뤄주는 예수’ 이게 한국교회 99.9%입니다. 이건 전부 이단입니다. 교회가 악마의 집단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성경에 근거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시면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했잖아!”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참고사항으로 들었다. 나중에 돈 좀 벌고 난 후에 그 말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하지, 그것이 진짜 그 말씀 못 지키는 지옥 갈 죄인인 것을 모르고 “아이코, 주님 잔소리 좀 어지간히 하소. 고급 아프트 한 채 샀다고 그 난리가. 세상 다 그렇게 돌아가는데 나 혼자 그렇게 산다고 별 수 있나. 나중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그렇게 살지 뭐.”

이렇게 우리는 주님 말씀을 참고사항으로 듣습니다. 주님은 진지하게 말씀하시는데. 어느 정도 진지하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죽지요. 맞지요? 그런데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사는 게 고생이니까 ‘살 동안 고생 실컷 하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악마에 속한 우리들의 주장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지옥 가는데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지 “네 손이 범죄하거든 그 손을 도끼로 찍어버려라. 그 아픔보다 더 아픈 것이 지옥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뽑아내는 아픔이 엄청난 아픔이고 장애인이라는 놀림을 받지만 그렇더라도 지옥 안 간다면 그것이 훨씬 낫다. 왜? 지옥의 그냥 쉬는 세계가 아니라 영원히 고통이 주어지는 세계입니다.

‘미쁘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맞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이 말씀이 너무나 맞기 때문에 오죽 답답했으면 ‘손이 죄를 범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리고 나머지 죄 없는 육체 가지고 지옥 안 가는 것이 훨씬 낫고, 눈이 범죄하거든 아예 빼버리고 눈 없이 지옥 안 가는 것이 훨씬 낫다. 내가 이 사실을 알려줄게.’ 라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한 말씀 한 말씀이 굉장히 심각한데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귀신이고 악마인줄은 모르고 기름 값, 원자재 값 오르는 것, 물가 오르는 것 이런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고요. 한나라당 공천 못 받은 사람들이 친박연대 만들고, 안양에서 초등학생 살해된 것 이런 뉴스, 악마가 짜깁기한 것을 진짜 중요한 소식인줄 알고 그 안에 푹 잠겨 삽니다.

이런 것들에 잠겨 살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놓쳐버려요. “네 손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잘라버리라. 두 손 가지고 지옥 가는 것보다 한 손으로 천국 가는 것이 낫다.” 이런 말씀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깁니다.

마귀가 하는 짓이 이런 것입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합니다. 복음의 광채를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생생함이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께 한 말이 있어요.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가 주일 아침에 그 말씀 하면서 느낀 게,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것을 마귀가 이야기하잖아요. 오늘날 우리교회 교인들이 하루에 수백 번도 더 하고 있어요. “예수님.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성경 왜 읽어야 하는데?” 지금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기름 값 오르고 장사 안 돼서 죽을 지경인데, 성경은 왜 봐야 하는데.

이게 우리는 우리가 유령인줄 몰라요.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인줄 알아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건져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유령이고 죄인인 것을 들춰내 놓고 그 다음에 우리를 건지십니다. 내가 마귀 자식이고 나는 유령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실체가 아니고 그냥 아담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면서 그 후에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로 못 박아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데려 갑니다.

도마가 왔을 때, “나는 안 보고는 못 믿는다.” 이게 뭐냐 하면, 나의 본질은 보는 것이 진리다. 그런데 그 껍데기는 뭡니까? 껍데기가 실존이죠. 나는 보고 믿는 그런 인간인데 그 껍데기는 도마 아닙니까. 실존이 뭐라고 했습니까? 껍데기고 안에 든 내용은 본질이라고 했지요.

도마의 본질은 ‘나는 보고 믿는다.’ 이것이 본질이고, ‘그런 사람이 나 도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손에 창 자국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 하실 때 “보니까 믿겠네.” 라는 것이 아니라 “주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라고 했어요. 이것은 본질 자체가 바뀐 거예요. 껍데기가 바뀐 것이 아니고 ‘보고 믿겠다.’는 것 때문에 주께서 못 박혀야 했고, 창에 찔려야 했습니다.

‘보고 믿는다.’ 이게 바로 처음부터 악마의 본질을 갖고 있었던 도마입니다. 진짜 살아 있는 영원하신 부활의 생명이 오니까 내가 생명이 아님을 아는 거예요.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 오니까 내가 유령인 것을 알듯이.

사람은 안개입니다. 안개의 특징은 자기의 가시거리 밖은 몰라요. 안개 바깥에 뭐가 있는지 몰라요. 이게 안개입니다. 인간은 허구입니다. 본질 자체가 마귀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껍데기도 허구고 본질도 허구고, 이 허구라는 것을 누가 이야기 한다? 예수님이 오시니까 밝혀지는 거예요. 그래서 본다고 하는 놈들은 소경이고, ‘내가 소경이었구나.’ 하는 사람은 진짜 세상을 보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2008. 4. 9. 09:42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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