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대구강의13-가짜이스라엘1
07대구강의13-가짜이스라엘1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7 대구강의 13 - 지옥의 하나님 22
07,10,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먼저 들뢰즈 철학을 !!
이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재 75페이지에 있는 '가짜 이스라엘'을 공부할 차례인데, 그것을 하기에 앞서 들뢰즈의 철학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는데, 오늘 교재의 내용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들뢰즈는 자기의 철학에서 유기물과 무기물을 나누는데, 여기서 유기물은 '유기체' 라고 보면 되는데, 사람들이 유기물과 무기물 중에서 봐서 어느 쪽이 더 좋아하는가? 상식적으로 봐서 말이다. 당연히 유기체를 좋아하는데, 생명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 들뢰즈 - 유기체에는 반드시 크랙이 !!
그러나 들뢰즈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즉 유기체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 틀렸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고 하니, 교회를 유기체라고 하는데, 그것까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 유기체에는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 있는데, 왜 죽음이 있는고 하니, 유기체에는 반드시 크랙이 생기게 되어있는데, 즉 금이 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균열이, 툭툭 갈라진다는 말이다. 즉 있음은 언제나 갈라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생명 - 있음에서 없음으로 귀화하려는 힘 !!
이것이 '지옥의 하나님' 앞부분에 나오는데, 있음은 항상 없음으로 귀화하려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을 성경에서는 생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에는 생명이 두 가지가 있는데, 즉 없음에서 있게 하고, 물론 같은 말이지만, 죽음에서 생명이라는 것이다.
창조언약은 이렇게 없음에서 있음으로 시작이 되는데, 그런데 새언약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무에서 유로 나가는 것을 반대로 되돌려주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해야 계속해서 무에서 유가 되고, 즉 죽음에서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 십자가에서 후패의 힘이 !!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후패하는데, 이 '후패' 라는 것이 있음을 없음으로, 즉 생명을 죽음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그 힘이 십자가에서 나오는데, 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저주받았음인데, 이 저주의 힘이 나와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다 후패시키고,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하는 작업을 생명이란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다.
◈ 들뢰즈 - 죽게 만드는 힘이 생명 !!
흔히 사람들은 유기체 내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는데, 그러나 들뢰즈는 그것이 아니라 죽게 하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즉 죽게 만드는 힘이 생명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인데, 우리는 죽게 만드는 것을 죽음이라고 보는데, 그러나 들뢰즈는 그것을 생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게 만듦으로 말미암아서 새롭게 살아있는 것이 죽음의 바탕 위에서, 마치 쓰레기더미 위에서 꽃이 피어나듯이 그렇게 피어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 들뢰즈는 '금(크랙)' 이라고 했는데, 즉 '갈라짐' 이라는 말이다. 마치 오래된 건물에 금이 나듯이, 그렇게 죽죽 갈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들뢰즈는 이렇게 갈라진다는 것, 깨어진다는 것, 분열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 들뢰즈, 헤겔 선배님 그게 아니라 !!
들뢰즈의 철학 앞에 헤겔이 있는데, 이 헤겔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정(正)과 반(反)과 합(合)에서, 이 '반'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이것을 '모순'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있는데 그 반대되는 것이 나왔을 때는 모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순을 빨리 해소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빨리 해소가 되어서 새로운 '정'으로 '합'을 이루어야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버리는데, 그렇게 반대로 해서, 유기체가 계속해서 깨어진다는 그 자체가 이 세상이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깨어지고, 계속해서 분열되는데, 계속해서 갈라지고 말이다.
◈ 이젠 죽음도 긍정적으로 !!
이렇게 되면 무엇이 긍정되는고 하니, 인간이 죽는다고 하는 것이 긍정이 되어버리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들뢰즈의 철학이 불교와 통한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긍정하는데, 물론 석가모니는 처음에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다가, "아니냐,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어" 라고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인간의 생로병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동안에 미처 몰랐던 것이 눈에 확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고정된 거점중심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고정된 것과 그 고정된 것을 이동하는 흐름중심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고정이 아닌 흐름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진리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들뢰즈도 마찬가지이지만, 불교도 아주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그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해체되는가? 즉 무엇으로 인해서 해체가 되는지, 그렇게 해체시키는 배후에 있는 힘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좀더 나아가면, 미래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데, 초대교회는 이 재림을 그냥 막연하게 온다고 했는가? 아니면 갈급한 마음으로 기다렸는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대했다는 것은, 지금 예수님의 약속에 의해서 그 재림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세상을 볼 때 말이다.
◈ 미래가 잡아당길 때 비로소 과거로부터 !!
여기서 이 점이 중요한데, 사람이 과거에 집착해서, 그렇게 과거가 잡아당기는 그 힘으로부터 뗄 수가 있는 것은, 미래가 잡아당길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래가 잡아당기니 과거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작년 가을이 너무나도 좋았다" 라고 하면 사람이 너무 슬프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 작년이 오지도 않고 말이다.
이렇게 "또 가을인가. 세월이 너무나도 잘 간다" 라고 하면서 가는 세월과 시간을 아쉬워한다는 것은, 그런 사람은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한 발짝도 떨어지기를 싫어하는 반발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역시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미래를 향하여 마치 군인들이 군가를 부르면서 행진을 하듯이 그렇게 씩씩하게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래, 가을이구나. 또 밀려가자" 라는 식으로 억지스러움이 있게 되면, 미래 지향적이 아니라 과거 지향적이 된다는 것이다.
◈ 과연 '현재' 라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런 주장에 대해서, "그러면 목사님, 현재에 만족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의문을 가질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시간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면 현재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가 없다고 하니 어리둥절한 표정인데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 여기 날카로운 칼이 있고 물결이 이렇게 있다면, 이 칼을 가지고 물결을 나누면 둘로 갈라지는데, 즉 우리 인간의 시간에는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 있는데, 이러한 과거와 미래를 날마다 쪼개는 것을 바로 '현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제가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을 한번 반박해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5초 뒤가 바로 과거가 되는데, 물론 5초 앞은 미래지만 곧장 현재가 되어버리고 말이다. 문제는 이 칼이 이동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칼이 이동하면서, 이것이 내면이라면, 표면은 현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표면은 없고, 내면 쪽에 영원한 현재만 있는데, 내재적으로 말이다.
◈ 아이온과 크로노스 !!
이렇게 내재적으로 영원한 현재만 있는 것을 '아이온' 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이렇게 갈라지는 것을 '크로노스' 라고 하고 말이다. 여기에 있는 A4용지를 칼로 찢으면 그냥 이렇게 죽죽 찢어지듯이 움직이면서 찢어 가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의식인데, 물론 나중에는 이러한 의식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무의식이 나오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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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노스'(chronos)는 연대기적 시간을 말한다. 매일 한 번씩 어김없이 낮과 밤이 찾아오고, 매년 한 번씩 봄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카이로스'(kairos)는 특정한 시간 또는 정한 시간을 말한다. 또한 은총의 때라고 말한다. 시간은 비록 흘러가는 것이지만,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에 이 의미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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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아무튼 이러한 의식을 지금까지는 '나' 라는 입장에서 보았지만, 이것을 '콕' 집어들어서 이제부터 제3자 입장에서 공간화시켜버리면, 위층과 아래층이 없어져버리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남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운 시간개념이란 것이다.
이러한 것을 물리적 시간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 물리적 시간은 '나' 라는 게 그만 빠지고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시간은 무엇인고 하니, 실제의 시간은 아래층에 있는 것인데, 이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즉 물리적으로 본다는 것은, 즉 이런 시간개념이 수학의 물리적 관념에서 나왔는데, 이 수학적 관념은 실제가 아니라, 자연물을 이용하는 용도로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안경에 다리가 두 개인데, 그렇다면 안경에 왜 다리가 3개면 안 되는가? 만약에 남자들처럼 다리가 3개면 걸리고 불편하니 그래서 다리가 2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리인가? 진리는 아니고 편리한 용도로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편리해서 만든 것에 불과한데, 그러니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 니는 누고? - 나는 인경을 만든 사람이다 !!
그런데 이렇게 편리함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안경이고 의자라고 하면,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까, 그만 진짜 '자아'를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는 모두 잊어버리고 무엇만 남는고 하니, "나는 안경을 만들었다", 혹은 "나는 의자를 만들었다" 라는 것만 덜렁하니 남아있다는 것이다.
* A : 나는 의자를 만들어서 편안하게 잘 앉아있다.
* B : 그렇게 편안하게 앉아있는 당신은 누구시죠?
* A : 그런 것을 묻지 말고 우리끼리 잘 의논해서, 앞으로 이 의자보다 더 편리한 것을 한번 만들어 보자. 이 자연물을 이용해서 말이다
* B : ? ? ?
그래서 화력발전에서, 수력발전으로, 원자력 발전으로, 그리고 풍력발전으로,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풍력발전기를 만든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런 것은 묻지 말라는 것인데, 아무튼 자기는 풍력발전기를 만든,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묻지 말라는 것이다.
◈ 과학은 말씀에 관심이 없어 !!
그러니 과학은 이렇게 일직선으로 있기 때문에, 현재 자기가 누구인지, 그런 것은 묻지 않고, 오히려 감추기 위해서, 과거에는 불편했지만 미래에는 편리할 것인데, 즉 지금은 자동차가 땅위를 달리기만 하지만, 미래에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것이다. 운전도 할 필요도 없이 자동차가 알아서 목적지까지 가고 말이다.
그렇게 과학적 사고방식에서는 현재를 굉장히 강조하는데, 즉 과거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현재에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미래에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닌다고 말이다. 그것만 남게 되는데, 모든 신경을 다 거기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철학적 질문은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철학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신학에도 관심이 없고, 이제는 성경도 별 의미가 없고, 물론 진리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어디에 이용할 것인가?", 그것에만 집중한다는 말이다. "현재 지금 이 상태에서 보다 더 편리한 것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 결국은 자기를 감추기 위한 몸부림 !!
결국 이렇게 과학에 치중하고 자기 편리함에 몰입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만 인정하고 진정한 자기의 자아는 감추기 위한 몸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윤리에서는, 사실 이 윤리가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텐데, 그런 윤리는 학교에서 써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이 되던 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윤리는 무엇인고 하니, 속도를 조절하자는 것이다. 즉 과학이 진리가 맞는데, 자연물을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이 인간의 전부가 맞기는 한데, 그래도 시간의 속도를 좀 조절하자는 말이다. 이렇게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면, 발전을 해도 되지만 환경을 조져버리면, 그렇게 되니 자연히 환경문제가 거론되는데, 지구 온난화 같은 현상들 말이다.
그리고 지금 집에는 돈이 없는데 할아버지가 가망도 없는데 병원에서 돈이 엄청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병원비를 줄이려고 하는 짓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안락사' 문제인데, 그런데 "주사기를 뺄까, 말까" 라고 하는 것은 조절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어느 쪽이 더 편리하냐는 것인데, 할아버지 쪽인지, 우리 쪽인지 말이다.
◈ 현대윤리 - 속도를 좀 조절해주세요 !!
다시 말해서, 속도를 좀 조절하는 것이지, 과학에서 탈피하는 것이 윤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속도를 조절하지 않고서 너무 지나치게 되면, 물론 강자는 살아남겠지만, 약자들이 모두 떨어지면 사회적 반발이 엄청 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면 속도를 좀 조절하자는 말이다. 사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우리 같이 철학을 하는 사람들도 좀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자기들 밥그릇 싸움도 들어있고 말이다.
◈ 선지자들은 가짜 이스라엘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이렇게 들뢰즈 철학을 살펴보면, 이런 '금의 갈라짐' 자체를 무엇으로 보자고 하는고 하니, 긍정하자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교재인 '가짜 이스라엘'을 살펴보게 되면, 어느 정도 쉽게 이해가 되지 싶다는 것이다. 과연 선지자들이 이러한 가짜 이스라엘에 대해서 긍정을 했는지, 아니면 부정을 했는지를 말이다.
사실 지금 이스라엘은 진짜가 아닌 그야말로 완전히 가짜인데, 그들은 '여호와' 라고 말들은 하지만, 그 포장을 뜯어보면 바알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들이 그것을 과연 긍정했는지 부정했는지, 그것은 중요한 이슈가 된다는 말이다. 지금부터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과연 선지자들의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말이다.
◈ 사도바울 - 범죄를 하나님의 언약에 넣어서 !!
이렇게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물론 선지자들이 그것을 기뻐하지는 않았는데, "야, 진짜 잘되었다. 망해라. 이 나쁜 놈들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도 유대나라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어디에다 집어넣어 버렸는고 하니, 하나님의 언약에다 넣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집어넣어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이스라엘의 범죄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라는 것으로, 즉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우리도 죄를 !!
예를 들어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서 아담이 죄인이 되었는데, 그러면 어떤 경우에 아담의 죄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고 하니, 물론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나쁜 것이지만 말이다. 우리 자신이 죄를 지으면 우리는 당연히 죄인인데, 그런데 그렇게 죄를 짓는 것이 우리 때문에 그러한가? 성경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우리는 책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발상의 전환인데,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기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고, 그런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어떤 의로운 행위를 함으로서 그런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아니, 아담이 범죄했는데 왜 너희들이 그렇게 스스로를 그렇게 못살게 구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자꾸만 책임을 지려고 하면, '아담의 범죄' 라고 하는 동일한 우리(틀) 안에 집어넣은 취지가 우리의 착함 때문에, 즉 우리 자신들의 양심의 가책 때문에 방해를 받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언약 안에다 집어넣어 버렸는데,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착하기 때문에, 즉 "모든 것이 내 탓이요" 라고 하는 것이 그냥 들으면 참으로 좋아 보이는데,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니, 아담이 범죄했는데 니가 왜 그렇게 까부노?" 라고 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이제 개판으로 ??
여기서 진도가 더 나아가면 분위기가 좀 무서워지는데, "그러면 우리는 책임이 없네. 개판으로 살아도 되겠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것은 나중에 처리하더라도, 기본적인 것은 무엇인고 하니, 아무튼 "독자적인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다. 즉 개인이라고 해서 개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만약에 하나님의 개입이 쏙 빠지면 !!
저는 이것을 힘주어 강조하는데, '하나님의 개입' 이라고 말이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이것을 빼버리고 하는데, 그러니 무슨 성경해석이 제대로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을 빼버리면, 자기 자신의 의지와 행동으로부터 출발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학이 말이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까? 아니면 말아야 합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주께서 '쉐마, 이스라엘아' 라고 했으니, 이것을 제가 어느 선까지 들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가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꾸만 양적인 측정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해석을 하면서 제일 중요한 하나님의 개입이 그만 빠져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이 들어가 버리면, 흔히 이것을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로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이제 망나니로 살아도 되겠네"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이 무슨 망나니를 허용하는, 그런 개입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개입이 무슨 허수아비인가? 그런 것을 그냥 놔두게 말이다. 우리의 발걸음까지도 세시는 분이 말이다. 오히려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꼼짝하지마" 라고 되지 말이다.
◈ 다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어떻게 보았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의 범죄를 선지자들은 어떻게 보았는가?" 라는 것인데,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보아서 언약에다 넣어버리는데,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반드시 범죄를 해야만 한다" 라는 쪽으로 선지자들이 정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범죄해야 무엇이 관여해지는고 하니, 하나님의 언약 폭이, 즉 그 지배권이 넓혀진다는 것이다.
◈ 긍정적으로, 반드시 죄를 지어야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택한 나라인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지평선이 넓어져서, 점점 더 이방나라에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즉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넓혀지는 계기가 바로 이스라엘의 범죄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서있으면 그 지평선까지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그 너머에 있는 것들까지도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서 시선을 점점 더 멀리하고, 그렇게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선지자도 떠나게 되는데, 처음에 선지자가 여기 이스라엘 안에 있을 때는, "이스라엘아, 회개하라!" 라고 하는데, 물론 그들은 들은 척도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 선지자들, 고난과 핍박을 받으며 점점 높은 곳으로 !!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란 것이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즉 국가적인 이스라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확대되어있다는 것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더 넓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쪽에는 이방민족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을 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면 무엇이 드러나는고 하니, 소위 '범죄', '여호와의 은총' 이라는 개념들이 수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렇게 이방민족들까지 합세해서, 범죄나 은총이나 언약이나 율법 등의 개념들이 변화하고 발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마다 이러한 개념들이 조금씩 다른데, 이사야와 에스겔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다.
◈ 니들이 구약을 알어 ??
그런데 기존의 구약학자들은 뭐라고 하는가? 이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사야나 에스겔이 서로 몰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래서 제2이사야, 제3이사야 등을 이야기하는데, 편집된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정작 자기들이 모른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은 전부가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올라가는 층이 두꺼운데, 이것을 선지자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지만 다만 층을 점점 높여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층이 이렇게 높아갈 때는 그냥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핍박과 고난과 아픔이 자꾸 생기는데, 그렇게 선지자들은 자기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믿으면서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에이, 더러워라. 이젠 더 이상 안 한다" 라는 게 아니라, "너희들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루터기는 있다" 라고 하면서 끝까지 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지자들은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말이다.
(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되며
(사 6: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위대한 건강, 위대한 밥상 ??
따라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프거나 가난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높은 곳에서 볼 수가 없는데, 항상 건강하다면, 철학자들은 이것을 '위대한 건강(?)' 이라고 하는데, 물론 이러한 표현은 현대인들을 비꼬면서 하는 말로서, 위대한 밥상이 아니라 말이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건강해서 교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문젯거리가 없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몹시 아프거나 그렇게 가난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이렇게 넓게 보지 못하고, 결국은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아니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새로운 지평선이 !!
선지자들의 경우에, 자기 백성들과 결탁되어있기 때문에, 즉 태어난 곳이 그곳이기 때문에 자기 형제들과 자꾸만 트라블이 생길 수밖에는 없고, 결국은 떨어져서 살아갈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백성들과 원수가 되면 될수록 자기가 그 앞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선이 열리고, 그것을 바라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인데,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자기 친구들과 형제들이 핍박을 하니까,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면서, 다윗은 매일같이 쫓겨다닌다는 것이다. 그렇게 쫓겨다니면서, 자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즉 하나님의 언약의 폭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대로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결론은, 주께서 정하신 대로 !!
"그렇다면 목사님, 도대체 결론은 무엇입니까? 딱 한 마디로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묻는다면, 결론은 '정하신 대로' 라는 것이다. 즉 모든 일들은 주께서 정하신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무엇을 정했는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정하신 대로' 라는 것을 이해했다고 하면, 그것은 기존의 것과는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해한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떨어져봐야 하는데, 그것이 어디까지인고 하니, '죽음까지' 라는 말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어떠한가? 이러한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 욥아, 나는 니 죽음의 배후에서 일한다 !!
욥기의 경우에, 주님은 아픔과 가난은 죽음 그 이후까지 욥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욥은 전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 저를 죽이십니까? 제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욥의 경우에, 자아의 죽음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있는데,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는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욥이란 인간의 자아의 죽음, 바로 그 죽음 배후에서 '주욱' 당겨서 일을 하시는데, 하지만 욥은 모른다는 것이다. "주님이 저를 죽이시면 의인을 죽이는 겁니다. 그렇게 의인을 죽이시면 하나님은 악인이 아닙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욥은 하나님이 자기의 죽음 배후에서 일하심을 전혀 모르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죽어버리면 하나님의 뜻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 죽음의 배후에서 날아오는 사랑이기에 !!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의 모든 주어지는 것은 자기의 죽음 그 이후에서 날아오는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사랑을 이해하려고 하면 자기의 죽음마저 포기해야 그 사랑에 접촉이 된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바로 그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래서 상당히 난해한데, 때로는 황당하기까지 하고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면, 지금 여기서 '나'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즉 언약을 보고 있는데, 그런데 실제로 언약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즉 예수님이 계시는 십자가 자리에서 '내'가 있는 자리로 십자가의 능력이 날아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능력이란 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능력인데, 하지만 자기는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나' 자신과 함께 죽음인데,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이다. '내 교회', '내 가정', '내 자식', 그리고 '내 애인' 등등, 이런 식으로 말이다. 자기가 공부한 것들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모두 이렇게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튀어나왔는데, 그래서 이런 것을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이다. 청문회를 하든 무엇을 하든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 Death makes him !!
영어의 표현에 "Devil makes him" 이라는 말이 있는데, "악마가 그들을 만든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빌어먹을" 이라고 하는 일종의 욕설인데, 저는 이것을 바꾸어서 "Death makes him" 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하는 것마다 되는 일이 없다" 라는 의미로서, 그러니 빌어먹을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라고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어렵게 '나'를 이야기하지 말고, 쉽게 베드로를 예를 들면, (베드로는 동네북인가?) 베드로의 경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을 했는데, 왜냐하면 베드로는 지금 그런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에 없는 상태인데, 그러니 베드로는 자기가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빌어먹을' 이라는 말이다.
비록 자기가 물위를 걷고 장모를 낫게 했지만, 자기가 지금 죽는다고 하는 것에 걸리니, 그렇게 되니 그야말로 빌어먹을 세상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가 재수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알았던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빌어먹을'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를 저주한다" 라고 3번씩이나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다는 말이다.
◈ 베드로야, 나는 니가 좋다 !!
그런데 요한복음 13장이나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베드로야,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 라고 했고, 또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 누구를 찾아왔는고 하니, 베드로를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니가 나를 사랑하는가?" 라고 3번이나 반복하시는데, 그렇게 하니 베드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까, "니는 니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갈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면류관마저도 반납하면서 !!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개입' 인데,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서 우리는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개인도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그런 범위 안에서만 정보가 들어있는 것이지, 진정한 하나님의 개입은 천국에서 면류관을 반납하면서, "주여, 이 면류관은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었기에 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들은, "정말 주님께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른 자를 의롭다 하시고, 정말 주께서 다 하셨구나. 발걸음을 센다고 하더니만 진짜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도 헤아린다고 하더니만 정말이구나. 난 농담인 줄 알았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내가 살아있음을 전제로 !!
그렇다면 이렇게 '나'로부터 나오는 해석들이, 즉 예수님께서 다 하신다는 것은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각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은 다 각자마다 고유의 지평선이 있는데, 그 지평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고 하니까, 자기가 지금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즉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말이다. 그렇게 모두들 자기가 살아있음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의 개입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각자 나름대로 말이다.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제대로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결코 아닌데, 제 아무리 백 날을 설교해도 그 사람은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 범위 안에서 이해하니 말이다. 즉 자기가 필요한 것만 채택해서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아니 집사님, 제가 그렇게 설교를 안 했는데요?" 라고 해도, "어, 저는 그렇게 들었는데요" 라고 하면 끝이라는 말이다.
요즘 십자가 마을에서 '예수사회' 때문에 논쟁이 좀 있는데, 장로님이나 집사님이 어떤 문제점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정말 그런지 한번 살펴보고 나서, 그때는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뭔가 문제점이 있다 싶어서 의견을 제시하면, 그런 의견을 제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너거들 잘났다" 라고 해버리니, 과연 그것이 말이 되는가?
◈ 저 목사, 나를 공격목표로 !!
저 같은 경우에도 설교를 하면서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하는데, "여러분, 성경을 보니 어떤 사람이 사도바울을 핍박했는데, 구리 장색을 하는 인간도 그러했습니다" 라고 하면, 교인들 50명 가운데 49명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도 역시 안 믿을 놈들은 안 믿어. 그들은 정말이지 당해도 싸"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딱 한 사람, 어저께 목사에게 대든 인간은, "저거 나보고 하는 말이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 설교시간에 공격하는 수도 있는데, 그러면 사실은 둘 다 문제가 있고 말이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생각하야 할 텐데, 자기의 개입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당신, 지금 누구에게 하는 말이야?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이지. 내가 그렇게 만만한 인간으로, 내가 그렇게 물로 보여. 빌어먹을!"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마" 라는 것이다.
◈ 십자가에서는, 주체도 허물허물 !!
그런데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면 과연 이런 말이 맞는가? 틀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니 말이다. 자기 안에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임해야만 가능한 현상이고 말이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그는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고 그 돌을 다시 집어서 던질 수도 있는데, 하지만 성령이 임하니 뭐라고 하는가?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을 충만하게 느끼니까, 주체가 그만 허물허물해진다는 것이다. 그 꼿꼿한 주체가 마치 도토리묵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니 상대방이 돌을 던져도, 그 돌을 던진다는 행위만 남고, 그 돌에 누가 맞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주체가 없으니까 말이다. 평소에는 "어디 감히 나에게 돌을 던져" 라고 하다가, 이제는 그런 자기가 없으니, 돌을 던지는 행위만 있을 뿐, 그것이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나' 라고 하는 주체가 없으니 말이다.
◈ 성령충만 - 아니, 왜 그러세요?
그렇다면 어느 정도라야 성령충만함 인가? 누군가가 자기에게 욕을 하면, "이게 어디서 감히 욕을 해"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 저 사람이 누구보고 저런 소리를 하지" 라는 정도가 되어야만 주체가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등따시고 배가 부를 때도 가끔 그럴 수도 있는데, 일종의 교만에서 나오는 '여유로움' 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정말로 가난하고 병들어 있을 때 욕을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주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욥처럼 더욱 더 강렬해진다는 것이다. "너거들, 지금 내가 돈이 없다고 몸이 아프다고 놀리지" 라고 말이다. 이것이 노인네들의 고질병이 아닌가? "이 놈의 자식들, 내 귀가 어둡다고 욕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성령충만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나' 라고 하는 블랙홀에 빨려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성경을 안다고 하는 것이, "나를 물로 보는가?"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을 보게 되면, 그런 성경을 알았던 것이 하나님의 개입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인데, 물론 성경구절은 달달 외우겠지만 말이다.
◈ 선지서 해석 - 십자가로 나를 지적해야 !!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성경을 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나' 라고 하는 그 인간 이후에 있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관점에서 다시 소급해서, 현재의 가치 있다고 하는 '나'를 지적하는 방향으로 선지서가 기록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선지서의 경우에, 의외로 간단하게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다니엘서의 경우에도 다니엘 언약 이후에 있는 십자가 언약을 가지고서 이 다니엘서를 해석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다니엘은 선지자로서 십자가를 알았으니, 그러니 그 당시 사람들이 왜 다니엘을 그렇게 핍박하고 공격했는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다니엘처럼 이 시대 이후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몰랐기 때문에, 즉 지평선을 보는 눈이 좁았기 때문에, 물론 다니엘은 알고 있었지만, 그를 공격하는 자들은 그 이후를 몰랐기 때문에, 이 다니엘을 곡해하고 오해해서 핍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니엘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핍박도 없었다는 말??)
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놈들을 풀부불에 던진다든지, 엉뚱한 곳으로 기도하는 놈들을 사자굴에 집어넣는다든지 할 때, 그런데 그 왕이 나중에 보니 다니엘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 불에 타서 죽지 않았네. 어, 사자굴에서도 멀쩡하구나. 야, 진실로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잠시 그때뿐이지만 말이다.
(단 6: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 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단 6: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 선지자 - 장래의 일을 미리 알고서 !!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의 범위를 죽음까지 포함해서 더욱 넓혀서,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개입까지도 몽땅 다 이해해야 하는데, 선지자들은 희미하나마 앞으로 장래에 일어날 일을 다 알고서 미리 전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임마누엘' 인데,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는 것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말이다. 물론 요나서도 말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다시 정리하면 !!
강의도중에 오신 분들을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설명을 해드리자면, 들뢰즈 철학의 경우에 무기물과 유기물로 나누는데, 보통은 유기물에 생명이 있다고 하지만 들뢰즈는 그렇게 보지 않고,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넘어가는 과정에 금이 가는데, 즉 해체가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체시키는 힘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생명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기물도 있어야 하고 무기물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금이 가는 것을 긍정하자는 것인데, 크랙이 생기는 것을 말이다.
이것을 그대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적용시켜버리면, 이스라엘이 금이 가고 깨어지고 타락하는 것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까, 그렇게 금이 가고 깨어지고 타락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생명으로 보자는 것이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증거로 말이다. 그럴 때 이 선지서가 제대로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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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그런데 목사님, 이렇게 되어버리면 들뢰즈 철학이 그만 선지서를 바라보는 하나의 잣대가 되어버릴 수도 있지 싶은데, 물론 그의 아이디어는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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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방을 통해서 주체를 파악 !!
그리고 이것도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한데, 아마도 베르그송이 그런 주장을 했지 싶은데, '나' 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여기에 황룡사 탑이 있는데, 지금 경주에는 황룡사 탑은 불에 타고 없는데, 그 흔적만 남아있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음각을 해놓으니 주위에 비어있는데, 그러나 그 비어있는 것 때문에 실체가 간접적으로 파악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당신 곁에 누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들로 인해서 '나' 라고 하는 주체가 파악이 된다는 것이다. 음각적으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만 자기들은 잘났다고,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다고 하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왜 이방민족들이 자꾸만 쳐들어오는가? 뭔가 문제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 주님의 취미는 조각상 만들기 !!
자꾸만 자기들이 잘났다고 하는데, 그것을 두고 "그것이 아니야" 라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잘남을 계속해서 우기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그 주위에서 그것을 깎아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조각가가 깎고 깎아서 자기가 원하는 조각상을 만들 듯이 말이다. 그렇게 깎는 쪽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 있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는데, 그런데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될 때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지적하고 우리의 죄를 공격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죽여버리고 깎아버린다는 것이다.
◈ 이젠 새로운 피조물로 !!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서 깎이고 또 깎인 것을 두고서 '새로운 피조물' 이라고 하는데, 이런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버리면, "아, 말씀이 육신이 되었구나" 라는 것을 두고, "야,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을 지키면 그렇게 되는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말씀에 의해서 지적을 당하는 죄인이 되어야 하고 말이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의인이 되어서, 그 의인되신 분이 날마다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할 때, 바로 그때 그 관계가 생명의 관계이고, 의(義)의 관계라는 것이다.
◈ 니는 세워라, 나는 깎겠다 !!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을 깎아버리는데, 그런데 철학은 이와 반대로 세운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이 있고, 그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이성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기 스스로 반성하면서 자꾸만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자기 손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말씀을 우리의 골수를 쪼개고 심령을 쪼개서, 그렇게 쪼개고 또 쪼개어서 결국은 남는 것은 죄밖에 없음을 깨우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개입 덕분입니다. 은혜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사고의 발상을 반대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다니엘을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살아있을 동안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 주님이라고 하지만, 정말 자기 목숨이 최고인데, 주님은 그 죽음마저도 극복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셨는데, 그러한 주님의 그 사랑을 아픔과 고난 가운데서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02,20 오후 10시 37분에 마침.
아, 이은성이 다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