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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4월 7일 강의 지옥의 하나님 96p 십자가의 삶강의[신학]

대구 4월 7일 강의 지옥의 하나님 96p 십자가의 삶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407 지옥의 하나님 96p 십자가의 삶

우리교회(IP:124.♡.85.92)

08-04-07 19:39

우리교회(IP:124.♡.84.82)

09-03-14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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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124.♡.84.82)

09-03-14 22:24

대구080407지옥의하나님p096

08 대구강의 4 - 지옥의 하나님 27 - 주님의 전쟁5

08,04,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십자가의 비밀에 대해서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사실 제자들은 잘 모르는데, 물론 예수님과 성령님은 알지만 말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런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인자를 거부하면 용서를 받지만, 성령을 거부하면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쳐서 십자가를 미리 알고 오는 반면에, 다른 제자들은 십자가를 거치는 눈이 없기 때문에, 도대체 저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인자를 거부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만, 성령을 거부하면 오는 세대에까지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니 말이다.

◈ 인자를 거부하면 용서받지만, 성령을 거부하면?

왜 이렇게 인자와 성령을 분리해서 생각을 해야 하는지, 예수님과 성령이 같이 움직이는 줄로 아는데, 어떻게 분리가 되는지, 예수님인 인자와 성령이 가는 길이 다른 길인 것처럼 이해될 공산이 크다는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7장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지 못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榮光)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므로 여기에서 '인자' 라고 하면 영광을 받기 전의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인데, 제자들이 그러한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든지, 그래서 공격을 할 경우에는 용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받으신 뒤에 영광으로 오시는데, 그때 그 성령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든 업적을 다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것은 오는 세대에서까지 결코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말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사람들은 이 십자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알고 있고 말이다. 즉 "십자가에 대해서 아는가? 모르는가?" 라고 하는, 그런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해서 말이다.

◈ 십자가 - 예언된 대로 !!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야만 하는가? 라고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되는데, 사실상 이것이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되는데, 이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쉬운 것부터 먼저 이야기해보면, 이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예언된 대로' 라는 것인데, 즉 예언된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를 위해서 모든 것이 다 예언되어있는데,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때' 라고 하는데, '카이로스' 라고 하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고향에 있다가 "때가 되매 예루살렘에 올라간다" 라고 하고 말이다.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그래서 이 십자가를 틀리지 않게 쉬운 정답을 내린다고 하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예언된 것이고, 그것을 약간 구체화시키면 예수님은 새언약이기 때문에 옛날에 예언된 것은 옛언약인데, 즉 옛언약이 새언약에 대해서 예언을 해서, 그 새언약의 핵심이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들어가는 출입구 노릇을 하는 기본적인 것이란 말이다.

제가 이것을 출입구라고 했는데, 만약에 이런 출입구만 알면 모두 아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그렇나 그렇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빠져버리는고 하니, "왜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심판이 주어지는가?" 라는 문제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 A : 예수님의 예언된 것인데,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셨다.
* B : 어떻게?
* A : 예수님이 자기의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 B :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 A :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 B : 왜 예언이 되었는가?
* A : 하나님이 새언약을 예상해서 예언다발을 그림자처럼 주었기 때문이다.
* B : 그래서?
* A : 예수님이 십자가을 지시고 새언약을 완성하셨다.
* B : 그래요.

이렇게 간단하게(?) 출입구이자 테두리 역할을 하는데, 이럴 경우에는 우리 인간이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느냐고 하는 문제가 여기서는 전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부가 아니라 출입구라는 말이다.

◈ 예수님은, 혼자서도 잘해요 !!

그렇지 않으면 "아, 예수님이 혼자서 잘하셨네. 수고하셨구나. 고맙습니다. 제가 믿어드릴게요" 라고 되어버리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와 심판이 주어진다" 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십자가가 아닌 다른 복음은 저주를 받는데, 어떻게 새언약에서 저주가 팍팍 쏟아져 나오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왜 이렇게 저주가 나와야 하느냐는 것인데, 그것도 하필이면 우리 인간을 상대로 해서 말이다. 물론 그 대상은 인간 배후에 있는 사탄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내용을 다 포함시켜야만 비로소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니 "예수님, 수고했습니다. 믿어드릴게요" 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는데, 이 출입구를 좀더 깊이 들어가면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까, 그 어느 누구라도 이 십자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혼자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의식해야 하는고 하니까, "너희들이 이해할 수도 없고, 도저히 알 수도 없는 길을 나는 따로 가야만 한다" 라고 하는 것이다.

◈ 아니, 그것을 믿어라구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도 인간들이 할 수 없을뿐더러, 그분이 십자가를 졌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도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그것을 도저히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그냥 가만히 있다가 된 통으로 얻어터지는 것인데, 인간들은 주장하기를, "아니 우리 중에서 누가 예수님보고 십자가를 지라고 했는가? 자기 혼자 십자가를 지고 저만치 가놓고는, 우리가 자기를 따라오지 않는다고 저주를 퍼부으니 말이 되는가?" 라는 것이다.

◈ 그래, 나 혼자서도 잘한다 !!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기 혼자 일을 벌리고 혼자 저주를 하고, 그렇게 예수님 혼자서 다 해버린다는 말이다. 인간은 그냥 멍 하니 앉아 있다가 별 맛도 없는 꿀 차만 마시다가 지옥으로 간다는 것인데, 그래도 아침햇살이 맛있는데 말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무덤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십자가를 알려면 '때'까지 십자가에 다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덤에 들어간다고 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이다. 범인이 목욕탕에 도망을 가도 잡히는데, 그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말이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 십자가는 블랙홀의 원조 !!

이것은 시간과 공간마저도 전부다 소용돌이를 치면서 오직 십자가로 빨려서 들어가고,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이, 즉 창세기부터 모두 어디서 빨려나온 것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십자가에서 빨려나온 시간과 공간인데, '때'와 '처소' 등의 개념도 그렇고 말이다. 십자가는 이렇게 소용돌이치는 일종의 허리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십자가로 빨려서 들어가고 십자가로 빨려서 나오고 말이다.

◈ 모든 것이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

그러므로 이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기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이, 이렇게 십자가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서 나오는 그 모든 저주와 심판을 된 통으로 다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설명하지 않았는고 하니까, "인간이 십자가를 모르면 왜 저주를 받는가?" 라고 하는 것인데, 왜 저주를 받는지 말이다. 아무튼 그것은 조금 있다가 하고 먼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

먼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때가 되매' 예언대로 이루어지는데, 심지어 무덤에 있는 자도 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물론 십자가에 달리시기 이전에도 때가 되어야 예수님은 움직였고 말이다.

흔히 인간들이 말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흘러가는 흐름을 잘라버리면, 시간과 공간이 모두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자르면서 구분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경계선이 있으면, '공간1', '공간2'.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공간을 잘라주어야 어느 쪽이 자기만의 공간인지, 즉 자기만의 자리인지 하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잘라져야 만이 여기서 여기까지가 자기의 영토가 된다는 말이다.

근대국가의 영토개념을 이야기할 때, 19세기 유럽의 식민지 정책 중에서 하나가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을 수단과 리비아로 해서 잘랐는데, 그러나 거기에 살던 주민들은 영토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영토의 개념이라는 것은, 20세기에 국가가 유럽에서 전 세계로 퍼지면서 민족자율주의라고 해서 생겨난 것이지 말이다.

그 당시 아프리카 사람들은 집은 있지만 담도 없는데, 즉 "여기서 여기까지 내 것이다" 라는 개념은 없고, 그냥 '우리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우리' 라는 것이 폐쇄된 것이 아니라 개방이 되어서, 어느 누구라도 다 우리 속에 들어올 수가 있다는 말이다.

◈ 왜 '우리교회' 인가?

그래서 우리교회의 이름도 '우리교회' 인데, 그것은 우리끼리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가 와도 다 '우리' 라는 것이다. 물론 일단 들어오고 나서 박살이 나든지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고 색깔이 같다고 하나로 뭉치자는 것은 '친박연대' 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 '우리' 라는 것은, 일단 우리인데 끝이 없는 우리라는 것이다. 즉 영토라는 개념이 없는, 무한대로 열려있는 '우리' 말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미 이렇게 구간과 구간을 정해서 잘라놓고는 결속에 나서는 그런 영토개념이, 즉 국가개념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렇게 공간을 정해놓으니까, 사람들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자기 것이냐고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공간도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왜 초등학생들을 보면, 처음에는 책상에 선만 긋다가 나중에는 책받침을 세우고 말이다.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

이렇게 공간을 자르고, 그리고 시간도 자르는데, 즉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는 무엇을 하고, 11시부터 12시까지 또 무엇을 하고 말이다. 이렇게 공간 자르기와 시간 자르기, 이것을 '칸막이' 라고 하는데, 이런 칸막이가 없으면 인간의 세계관이 형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칸트가 말하는 세계관 !!

이것은 칸트가 주장한 것인데, 인간의 오성(悟性) 가운데 시간과 공간을 미리 잘라서 세계관을 만드는 인식이 모든 인간들에게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흐름을 보는 세계관이 아니라, "어느 것이 내 것인가?" 라고 하는, 자기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기 위한, 즉 자기 것이 자기 것으로 계속해서 남기 위한 시간과 공간만을 생각하고, 그런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자기를 위한 세계관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 영토에 집착하는 가인의 후예들 !!

그래서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은 하나님께서 "나가 놀아라(?)" 라고 벌을 내리니 벌벌 떨면서 겁을 내었는데, 즉 "저의 영토를 벗어나면 저 놈들이 저를 죽일 것이니 제발 좀 봐주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다른 공간에 들어가도 해를 당하지 않도록 가인에게 사인을 해서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부터 가인의 제국들은 전부가 다 영토의 개념으로, 즉 "어느 것이 내 영토인가?" 라고 하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더욱 더 자기 것을 견고히 만들기 위해서, 즉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고 한다는 말이다.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 자기 세계관에는 결코 양보가 없어 !!

이렇게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다 칸막이를 쳐서 자기를 위한 세계관을 형성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자기 세계관에 대해서 결코 양보하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자기 세계관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A 라는 사람이 있고, 또 B 라는 사람이 있다면, A 라는 사람은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 시간을 잘랐는데, 그런데 B 라는 사람은 아침 9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잘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중요한 시간대가 다르다는 말이다.

이러한 두 사람이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무엇이 다른고 하니, 한 사람은 여유가 있어도 다른 한 사람은 자꾸만 시간을 본다는 것이다. 바쁘다고 하면서 말이다. 자른 시간대가 다르니 말이다. 9시에 자른 사람은 9시가 다가오면 바쁘니 갈려고 하지만, 그러나 9시 30분에 자른 사람은 아직도 30분의 여유가 있으니 말이다. (물론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1년 365일이 바쁘다고 36계 줄행랑이 주특기인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만나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에서 형성된 세계관을 가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 세계관을 두고서 '자기 자리' 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관계성' 이고, 더 쉽게 말하면, '자기 거물망' 이고 말이다.

◈ 자기 이름은, 곧 자기 자리 !!

이러한 자리를 성경에서는 '이름'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사실은 '자기 이름'이 아니고, 그것을 뜯어서 보면 '자기 자리' 라는 것이다. 즉 "나는 누구를 알고,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고, 나의 시간이 어디가 중요한 시간이고" 라고 하는, 그런 것들이 모여서 '자기'가 되는 것이지, 자기 신체만이 '자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상당히 복잡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런데 이것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적용을 시켜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대로 모두가 다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한 치도 빈틈도 없이 말이다.

◈ 베드로의 자기 자리 !!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이 죽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자기만의 자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베드로의 자기 자리는,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잘라서 자기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따로 마련한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오니, 그 자리가 바뀌었는가? 결단코 바뀌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시간과 공간에 누가 더 추가되었는고 하니까, 예수님이 그냥 들어오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자기들을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지금 베드로의 자기 자리인데, 여기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덜렁 죽어버리면, 자기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고생 고생한 것이 모두 다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그야말로 자기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일이란, 베드로의 경우에는 '자기 자리' 라는 말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베드로가 자기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는데, 주님이 어디를 가든지 말이다. 그러니 베드로의 자리에 의하면, 즉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지금 자기 자리에 왔는데, 그러니 베드로는 자기 자리가 열린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려고 가니까, 그러한 예수님을 따라가면 자기 자리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것이 예수님의 천국까지도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는 죽어서라도 자기 자리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데, 오히려 죽는 것이 순교라고 여겨버리니 말이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 죽음에 대해서 !!

여기서 죽음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면,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울산에서도 그런 강의를 했지만, 이미 많은 철학자들이 한 이야기인데, 인간의 '자아' 라고 하는 것은 기억의 층이 겹겹이 쌓여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 자아 - 기억의 층이 겹겹이 쌓여서 !!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경험들이 쌓인다고 여기면 안 되고, 과거의 경험들 중에서 지금의 자리에 합당한 것만을 골라서 기억의 장소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즉 선별작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버리고 중요한 것만 골라서 "이것이 나의 과거이었어" 라고 집어넣으면, 그것이 누적이 된 것을 두고 '자아'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아니, 이승엽이 누고?

예를 들어서, 이승엽이 15타수 무안타라고 한다면, 이승엽이 누구인지 모르는 할머니들은 그런 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대구에 있는 골수 야구팬이라고 하면, 그 기억 속에는 이승엽은 적어도 3할은 쳐야 하고, 홈런도 5개정도 나와야 한다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승엽이 그렇게 하면 자기 하루일과도 잘 풀리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일본에서 헤매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이승엽이를 선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경마의 경우에도 보면, 경마에 빠져있는 사람은 땅값이 얼마이고 총선에서 누가 뽑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어제 어느 기수의 어느 말이 잘 달렸는지, 그것이 중요하지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자기 자아가 되고, 베드로가 되고, 즉 자기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어 !!

이것은 간단한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절대로 그냥 믿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저 인간을 현재 내 자리에 포섭시켜서, 내 것으로 만드는 조건하에서 믿는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기극인데, 즉 자기 확대이고, 자기 확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이 세상은 고무풍선불기 대회장 !!

이것을 저는 자기의 '고무풍선불기' 라고 하는데, 그렇게 마구 불어서 현재에 자기가 확보한 기억의 층에다가 예수를 집어넣어서 더 강하고 굳건한 자기로 그렇게 풍선에 바람을 넣어서 부풀게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해놓고는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 자기 믿음을 믿지 말라고 하니까, 그것이라도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3번이나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구원받은 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한 결과라는 말이다.

◈ 믿음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나와야 !!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나온 믿음이어야만 하고, 이런 십자가의 믿음은 새언약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면 오직 주님만 의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그 믿음 속에 포함이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믿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렇게 자기가 믿는 것밖에 없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새언약의 능력으로 오셨기에, 그 새언약으로 파생된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인데, 그 중에서 믿음을 뜯어보니까, 자기가 믿는 믿음은 엉터리이고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와야 그것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 너희 아비는 마귀 !!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는고 하니, 예수님이 자기들을 보고 욕을 하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은 한 분인 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놀리면서(?) 하는 말이, "물론 하나가 맞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들의 아비인 마귀이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자리는 예수님의 자기 자리인데,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리를 유지하면서도 하나님을 포섭해서 하나님은 한 분임을 믿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포섭한 것이 아니라 마귀를 포섭한 것인데, 물론 마귀에게 포섭을 당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호칭만 바꾸어서 말이다.

◈ 자리를 바꿔, 못 바꿔 !!

진짜 하나님은 보내신 예수님과 자리바꿈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리는 전혀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거기에다 예수님도 집어넣고 하나님도 집어넣으면, 그것은 바로 마귀를 집어넣은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간의 기억 층에 이렇게 겹겹이 쌓여있는 것이 '자아'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렇게 자기 세계관, 즉 자기 영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가 '자기 자리' 라고 했고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기 자리에는 자기 관계만이 있는데, 대충 헤아려도 10개가 넘는데, 즉 동창회, 친목회, 교회 등등, 이런 것을 다 끌어다 모은 것이 자아라는 말이다. 바로 그런 관계가 끊어진 것을 '사회적 죽음' 이라고 하는데, 왜 그래서 그렇게 관계가 끊어진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 당했다" 라고 하지 않는가?

◈ 현대철학은 관계철학 !!

인터넷을 하다가도 그곳이 싫다고 해서 아이디를 취소시켜버리면 그곳에서는 죽음인데, 이렇게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현대철학의 뛰어난 점이 드러나는데, 현대철학은 관계철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있어서 철학이란, 자기가 살아있으니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고, 자기가 죽으면 죽는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현대철학에 있어서는, 자기가 태어날 때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고 보니 이미 수많은 관계들이 얽혀 있었다는 것이다. 삼촌, 외삼촌, 고모, 고모부 등등 말이다. 그러니 이미 마련된 사회적 관계 속에 자기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도 내가 고른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저에게서 오랜만이 바른 소리가 나오는데, 엄마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엄머 아빠가 잘 생겼고 돈이 많고 하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계 속에서 다시 한번 인간을 살펴보자는 것이 현대철학이라는 말이다.

◈ 존재에서 관계개념으로 !!

하지만 과거의 철학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 "신이 나를 존재하도록 했다" 라고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에 의해서 철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단은 자기가 여기에 있고, 그렇게 있는 상태에서 사회적인 관계를 자기가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가 일단 있고 나서, 그리고 나서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철학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존재하기 전에 이미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의 자리에서, 쉽게 말해서, 아빠가 엄마에게 밤에 침을 놓아서 자기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왼손잡이는 낮에 만들었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관계가 먼저 있고 그 관계의 부산물로 자기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 현대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그래서 부모들이 하는 "나가 죽어라" 라고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집에서 호적을 파내겠다고 하는 것인데, 이러한 사회적 관계에서 두고서 점멸, 즉 깜박깜박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마치 메트릭스에서처럼 말이다. 그렇게 인터넷에서는 깜박깜박하다가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살아있어도 호적등본에 기록되어있지 않고, 그리고 자기 주민등록증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사회에서는 이미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가인이 받은 벌인데, 즉 가인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것이다. 좀 더 고상한 말로 하면 법적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할 수 있고 말이다.

그러니 현대철학에서 하는 말이 맞는데,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경우에,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갔을 때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고 했을 때, 이것이 과거의 철학에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데, 자기가 등따시고 배부르면 그것이 곧 사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철학에서는 인간 속에서 무엇이 삐쳐 나오는고 하니,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를 유지하면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끊어지면 죽는 것인데, 그런데 베드로와 12제자들은 이 지상에서 천국까지 가서, 거기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않느냐에 따라서, 즉 높은 자리와 연관된 그런 지금의 자기 자아로 본다는 것이다.

◈ 마치 자동차 안테나처럼 !!

이것이 요즘 흔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말하는 비전이고 꿈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젊은 아이들은 이런 것을 분석하지를 못하는데, 물론 나이가 많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열심히 하면 얻을 수 있다" 라고 해도, 그러나 이미 열심히 하기 이전에 자기 속에 이미 그런 관계, 즉 씨앗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자동차 안테나처럼 죽죽 늘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처음에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빨리 진급을 해야하고 말이다. 그렇게 안테나가 죽죽 나온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관계가 없는 인간은 없는데, 공무원 쪽으로 흐름을 타고 싶고, 그렇게 자아를 키우고 싶다는 것이다. 자기가 목사라고 하면 목회에 성공하고 싶고 말이다.

이렇게 현대철학은 상당히 어려운데, 왜냐하면 과거에는 인간은 혼자 있으면 되었는데, 그렇게 존재론으로 철학을 전개했는데,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는 과거의 그런 존재론을 추방시키고 관계론으로서 철학을 하기에 말이다.

◈ 이제는 뇌사가 곧 죽음 !!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인간은 이렇게 기억의 층이 있는데, 그런데 숨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머리에는 수천 개의 뇌세포가 있는데 그곳에다 심장에서 피를 보내주지 않으면 뇌사가 일어나는데, 그렇게 되면 기억이고 뭐고 모두 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병원에서 뇌사를 곧 죽음으로 보는데, 과거에는 심장이 뛰지 않으면 죽음이었는데 말이다.

◈ 인간은 자아가 없으면 죽는 것도 몰라 !!

그래서 기억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자아가 없다는 말인데, 저도 울산에서 이런 강의를 하면서 충격을 받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죽기 전에는 죽는 것이 무서운데, 그런데 일단 죽고 나면 그 죽는 주인공인 자아가 없기 때문에 죽는 것도 모르면서 죽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말인데, 사람이 죽는 것이 무섭다는 말은 살아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일단 죽게 되면, "아이쿠,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는 것도 없다는 말이다. 죽음의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지, 그런데 그 죽음의 주인공 자체를 죽음이 삼켜버리니 죽는 것도 모르면서 죽음의 상태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인간을 보면 이런 허점이 있는데, 지금 한국교회가 인간을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기는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갔는데, 그런데 사랑하는 엄마가 지옥에 갔다면 천국에서 어디 마음이 편하겠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론적인데, 그래서 성경도 모두 존재론적으로 보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인데, 아 나도 살아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간다고 하니, "그러면 바람을 마음을 피워도 되겠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죽게 되면 식구들이 다같이 모이는데, 그렇게 모이면 물론 기분이 좋을 때도 있지만 더러울 때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칸막이로 막아서 저기 천국까지 그대로 자기 관계를 이어가려고 하는데, 하지만 새로운 관계가 빈틈이 없이 준비되어있다는 것이다. 천국의 자리는 우리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자리이기에 자기 사정을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있어서, 부자는 현실의 관계를 끝까지 끌고 가니 지옥이 아닌지요?

그러니 그것이 바로 부자의 현실인데, 자꾸만 계속해서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동생들이 있고, 그리고 나사로에게 물이라도 좀 찍어다가 자기에게 달라고 하는, 아직도 지상에서처럼 나사로를 종으로 여기는, 그러니 전혀 분위기 파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이 오지 전까지는 그렇다는 말이다.

◈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로 이끌지 않으면 !!

어제 아침설교에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요한복음 6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올 수가 없다" 라고 했는데, 제가 그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은 교회까지는 올 수 있지만, 교회에서 예수님까지는 아버지가 개입되어야만 한다" 라는 것이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러므로 아버지의 개입이 없으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인데, 즉 아버지가 이끌어서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수님에게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인정하지 않기에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인간은 자기 자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교회까지 제 아무리 와도 소용이 없는데, 여기서 "아버지가 이끌지 않으면 내게로 올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은 예수님이 없지" 라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말이다. 일단 교회에는 왔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제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셨기에 믿게 되었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자리와 예수님의 자리를 교체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어야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란 말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기다려, 내가 믿을 게" 라는 것인데, 그러나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자리가 따로 있고 자기 자리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자리가 섞이는 것이 아니라 튕겨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깊이 있게,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 너희들이 생명을 알기는 알어?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자리'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정한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밖에 없는데,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주장인데, 즉 "이 인간들아, 너희들은 쫓겨난 주제에 무슨 자리타령이고? 너희들의 자리는 인정할 수가 없고, 오직 내 자리만이 생명나무인데, 너희들이 무슨 생명을 맛본 적이 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렇게 생명을 맛보지 못했으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깜박깜박하는 목숨을 생명으로 대체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선악과 속에는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을 생명으로 우기고, 그러나 예수님은 "놀고 있네. 생명은 맛도 못 본 놈들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아담도 맛을 보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생명의 맛을 볼까 싶어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었니 말이다. 그러니 생명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것을 맛을 보지 못했으니 자기 목숨을 생명으로 잘못 번역해서 자꾸만 확대시키려고, 즉 자기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 부활이 아닌 십자가 !!

하지만 예수님이 생명으로 오신 것은, 예수님의 자리와 우리 인간의 자리를 한꺼번에 다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 말고 부활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 자리가 훼손이 되지 않고 무한대로 넓히면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죽어서 천당에 가니 좋다. 부활이 되니 얼마나 좋은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왜곡된 부활이겠지만 말이다.)

지금 자기 자리가 확대가 되니 그런 "얼씨구나. 좋구나"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하지만 십자가에서는 자기 자리가 완전히 잘리고 박살이 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는 말이, 마치 베드로처럼, "순교해서 구원을 받으면 되지"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자리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런 자기 자리와 주님의 자리가 서로 마찰을 일으켜서 튕긴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공관복음서의 모든 것이 다 해석이 된다는 말이다.

◈ 그러나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 !!

그러면 이제 죽음을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보면 죽음보다 더한 것은 없는데, 자기가 죽는 순간만큼은 자기가 죽는 것은 모르는데, "내가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살아있을 경우인데, 죽는 순간에는 살아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즉 자기가 없으면 죽는 것도 없다는 말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자리가 인간의 존재론적인 자아의 자리가 아니라, 이 죽음의 자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와 심판의 자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자리는 그렇게 따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28절에 보면, 무덤에 있는 자들이, 이것은 인간들이 말하는 자기 자리인데, 그런 무덤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선한 일을 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는 것이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아무리 도망을 쳐도 예수님이 만들어놓은 이러한 자리로부터 도망을 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이쿠, 교회도 가기 싫고, 죽으면 그만인데 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죽으면 예수님과는 빠이빠이 라는 것이다.

◈ 십자가 - 니 자리를 니가 알렸다 !!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알면 자기 자리가 이단임을 알 텐데, 하지만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리에다 십자가를 집어넣고, 자기 자리를 유지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집어넣고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 자리에다가 삼위일체를 집어넣고, 개혁주의를 집어넣고 말이다. 그러니 개혁주의 신학을 아무리 해도 여전히 자기 자리는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죄를 모르는 그런 신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구원이란 무슨 뜻인가? 멸망을 당함을 전제로 한 것인데, 죄가 있어서 멸망을 당하기 때문에 구원인데 말이다. 그런데 죄도 모르고 멸망도 모르면서, 구원만 자꾸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 자리를 넓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비틀어진 자기 자리 !!

흔히 교인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교회에 나왔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바쁘다고 하는 자기의 본래 자리가 있고, 여기에 추가해서 '교회 다니기'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추가를 했으니, 그것은 자기 자리가 비틀어진 것뿐인데, 어떻게 이러한 인간이, 즉 엉터리이고 환상적인 자아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천국이지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죄가 아니냐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바라바는 살려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당시 민중들에게는 예수가 그렇게 체포가 되어서 자기 자리를 넓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러니 없애버려도 무방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산 자와 죽은 자 !!

그래서 제가 여기고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인간이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한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 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죽은 자라고 하는 시각은, 예수님의 자리, 즉 십자가 자리에서 볼 때 비로소 확연하게 드러나고 말이다.

◈ 자리, 관계, 그리고 이름 !!

하지만 이러한 십자가가 아니라고 하면, 인간이 자꾸만 자기 자리에 뭔가를 아무리 채워서 넣으려고 해도, 그렇게 죽은 놈에게는 아무리 집어넣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이렇게 '자리' 라고 하는 성경에 없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관계' 라는 것이고, 성경에 있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름' 이라는 것이다.

◈ '이름'에 대해서 !!

이러한 자기 자리를 모두 총칭해서 '나의 세계' 라고 하는데, 이렇게 자기의 이름이 곳곳에 영향력을 미치는 그 전체가 곧 '나의 이름' 이라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에 박혀있는 그런 글자 몇 개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이름은 죽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보고서 뭐라고 했는가? "내게 금과 은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보면 어느 특정한 한 인간을 지칭하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관계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예수님의 자리, 즉 예수님의 전체를 두고서 이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그 전체를 말이다.

◈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모두가 두 갈래로 !!

그러한 예수님의 이름 전체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나오는데, 그러니 하나하나가 다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너를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미워하는 자는 살리라" 라고 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망은 무엇인가? 로마서 8장에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그런데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경우에도 "너희가 먼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랑했다" 라고 하고 말이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에서 나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가 다 그 안을 뜯어보면 두 갈래가 나오는데, "우리는 죄인이고, 오직 예수님만이 의인이다" 라고 말이다. 모든 개념이 이렇게 갈라져서 나온다는 것이다.

율법에서도, 인간은 죄인이고 그것을 이루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고, 또 땅이라는 것도, 이 세상의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고 말이다. 천국의 개념도 그렇고 말이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캄캄한 저주의 나라라는 것이다. 교회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촛대를 옮겨버린다는 것이다. 몸은 하나라고 하는데, 즉 다수가 아니라 항상 하나로 모아져야, 그렇게 해야 교회라는 것이다.

◈ 오직 예수님만이 의인 !!

이렇게 전부를 다 뜯어보자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너는 죄인이고, 오직 나만이 의인이다" 라고 하는 보여주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개혁주의 신학은 옳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오히려 "개혁주의 신학자체가 죄이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 진정한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의 자리와 예수님의 자리가 충돌하는 것이 십자가라고 하는 기초를 깔아놓고, 이제 우리 교재 96페이지에 있는 '주의 전쟁에 동원된 제자들'을 살펴보자.

** [주의 전쟁에 동원된 제자들] - 사탄의 공격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게 하는 것이요, 또 만약에 의가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되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주력한다.

◈ 사탄의 일이란, 주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 !!

예수님의 이름, 즉 주의 이름인데,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이고 말이다.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할 때, 문제는 이미 인간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사탄이, 그 어떤 이유이든 간에 예수님의 이름을 훼방할 수만 있다면, 즉 방해를 놓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의 일이 된다는 것이다.

◈ 여기서 돌발퀴즈 - 불이야 !!

제가 여기서 돌발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어떤 사람이 열심히 예수님을 잘 믿었는데 그만 공장에 불이 나서 20억을 손해보았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사탄의 시험인가? 그게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한 달만에 20억을 더 벌었다고 하면, 도대체 어느 것이 사탄의 시험인가? 사실은 둘 다 그것을 뭔가 주님과 결부시키려고 의식한다는 것이니, 곧 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다 시간과 공간을 집어넣는데, 그 사람이 20억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간을 투자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20억이 날아갔다는 것은 자아의 껍데기가 날아간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손해를 본 것은 벌을 받아서이니, 이제부터는 착하게 살자. 그러면 20억이 오겠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20억을 번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20억에 20억을 또 더하려고 하니 말이다.

◈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너무나 간단한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짧은 문장인데, 실제로 수련회에 가서 학생들이 많이 외운다는 것이다. 식당 앞에 줄을 서서 짜장밥을 먹기 위해서 말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서 20억이 날아가든지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다 자꾸만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마귀는 웃고 있는데, 무엇이 날아가 버리는고 하니까, "그래, 니 자리를 챙겨야지. 예수에게 빼앗기면 안 돼. 니는 괜찮은 인간이야. 니가 살아야만 주님도 살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마귀는 인간이 로또에 당첨이 되어서 대박이 나던지, 집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타버리든지 간에,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인 것을 흐리게 만들어버리면 마귀는 대성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과 고생은 전혀 다른 것인데, 부자가 되었다고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그렇다면 고난은 무엇인가?

그러면 고난은 무엇인가?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자리와의 자기 관계가 끊어진 것, 그것이 끊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 바로 바로 고난이라는 말이다. 기존의 관계가 모두 박살이 나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데,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이고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경우에는, "우리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배가 부르니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말도 맞는데, 하지만 배가 고파도 그런 소리를 한다면,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인간들은 결코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마귀의 시험을 이긴다고 하는 그 자체가, 그 시험을 이길 만한 자기의 자리가 마련되어서, 그러한 자기 자리와 마귀의 자리가 서로 붙어서 자기 자리가 이기는 것으로 여기니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마귀가 원하는 바인데, "기도를 좀 더 해야지. 그래야 나를 이기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살금살금 약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자기의 믿음으로 마귀를 이기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육'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는가? 육이 아니라 영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다. 즉 성령을 위해서 살면 영생을 거두지만, 육을 위해서 살면 멸망에 이른다는 것이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마귀를 이기는 것은 성령님 소관 !!

그러니 마귀를 이기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데리고 그렇게 사용하실 때, 그러니 우리 소관이 아니라 성령님 소관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항상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니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너를 사랑했다. 두려워 말라. 이미 너는 심판에서 벗어났다"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들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데, 이렇게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딱' 현실화시키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다. 개념이니 문자가 아니라, 실제 현실인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을 들어오셔서 하신다는 말이다.

(요 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마귀를 이긴다는 것은, 자아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이기셨다는 것을 믿도록 하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아하, 이것이 마귀의 짓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마귀를 이기는 것이란 말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알게 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영생이 있게 하리라" 라고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아버지께서 내게로 오도록 하지 않으면 올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유지시켜주는 것이 성령님이고, "내가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 내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자" 라는 것이 곧 육이고, 그것 자체가 마귀의 시험에 속한다는 말이다.

◈ 자기를 부인하고 !!

이제 교재 97페이지를 보겠는데, 먼저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27절 말씀을 살펴보자.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여기 24절에 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현대 철학자들에 의하면 말이 안 되는데,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를 부인해서 생기는 자기가 또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곧 불교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로 부인했으면 되었지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부인을 한 상태에 있는데, 헤겔은 이것을 정반합이라고 보았고 말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자기 자리와 우리 인간의 자리를 바꾸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철학자들은 인간의 자리를 괜찮은 자리로 유지시켜서 나가라고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 예수님, 내가 지켜서 너에게 줄게 !!

그러므로 이렇게 성경을 펼쳐서 볼 때 이렇게 문자로 보면 안 되고, 성부, 성자, 성령이 수직적으로 세워져 보여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내가 지켜서 너에게 줄게" 라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새언약인데,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켜서 우리에게 공짜로 집어 넣어주는 작업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바로 새언약의 마무리 작업이라는 말이다. 성령께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부와 성자께서 움직이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이것을 다 치워버리니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마치 법문(法文)처럼 말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하니, "아이쿠, 오늘도 내가 지켜야 하겠구나" 라고 하는데, 이것이 소위 'QT' 라는 것이 아닌가? 이미 이렇게 주께서 다 지켰고, 그래서 천사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바쁘다는 것이다.

◈ 성경은 성령님의 교과서 !!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는데, 즉 "문자에 대해서는 내게 나와봐라. 어느 놈이든지 모두 다 꺾어주겠다" 라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그렇게 완벽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나는 죄인 중에서 괴수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영으로 보지 않고 문자로서 풀었기 때문에, 즉 성경은 성령님의 교과서이지 우리 인간의 교과서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은 성령의 책으로서, 문자로 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쓴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러한 성경말씀이 문자적으로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는 죄인 중에서 괴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성령 안에서 자유를 얻는데, 그것이 곧 죄에서 자유라는 말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가 우리의 죄보다 훨씬 더 월등하다는 것인데, 이렇게 예수님은 항상 이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데, "누가 주님보다 강하겠느냐?" 라고 말이다. 하지만 마귀는 이것을 절대로 믿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지금 니 형편을 보아라. 그 따위 소리를 할 입장인가?" 라고 말이다.

◈ 마귀는 자꾸 자기 형편을 살펴보도록 !!

그렇게 마귀는 우리의 형편을 살펴보게 해서, 그렇게 자기 형편을 보게 되면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여기서 복습을 좀 해보면, 그것을 자기 위주로 시간과 공간을 자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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