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4월 4일 강의 창세기 32장 / 3월 7일 창세기 30장, 31장
울산 4월 4일 강의 창세기 32장 / 3월 7일 창세기 30장, 31장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307 창세기 30장, 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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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04 창세기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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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124.♡.85.92)
08-04-05 00:49
우리교회(IP:220.♡.176.141)
08-04-13 10:31
울산080404a창세기32장a20080404a 울산강의-창세기 32장
(강의:이근호 목사)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32장의 내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2장의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의 미처 생각나지 않은 것들이 창세기 32장에 다 들어있어요. 창세기 32장의 내용이 엄청나게 중요한 이유가 이스라엘이라는 그 나라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창세기 32장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야곱의 이름이 바뀝니다. 뭐로 바뀌느냐?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 이스라엘로 바뀌는 이유가, 야곱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문’이거든요. 하늘과 땅의 사다리가 설치 된 인간은 야곱밖에 없습니다. 에서도 아니고, 이삭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에요. 하늘나라와 땅 사이에 사다리가 연결돼있어서 이건 통로입니다.
그림으로 합시다. 새순교회 오면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게 왜냐하면 피곤하시기 때문에 그림이 낫지 싶어서 그림으로 자꾸 그립니다. 하늘과 땅의 유일한 통로가 이게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오지 않으면 하늘나라와 못 통해요. 통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유일한 통로가 벧엘이라니까 하늘의 문이거든요. 유일한 통로로 모아주는데 모아주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은 개인이 있으면 개인은 흩어지려고 해요. 따로따로 놀지요. 흩어지려고 하지, 사람이 모으려고 하면 힘들어요. 우리교회도 그렇고, 새순교회도 모이자 하면 힘들잖아요. 니 마음대로 하세요. 하면 기분이 제일 좋잖아요. 자꾸 모으려고 하면 힘들어요. 안 됩니다.
그래서 공식인데 하나 외워놓으세요. 신앙생활이란 뭐냐? 지난번에 공식하나 드렸는데, 구원은 뭐라 했습니까? [구원=죄인+용서]라 했지요. 지난 공식에 어디서 한 기억나는데 여기선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구원이란 죄인+용서입니다. 확실한 공식입니다. 이게 의인이 아닙니다. 죄인 될 때 용서가 첨가되어서 구원이 이뤄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 뭐 하게 합니까? 죄인으로 파악을 하고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그때 용서의 눈이 떠지죠. 용서 받은 자만이 구원됩니다. 자질로써 구원되는 게 아니고, 용서가 있으면 구원되는 거예요. 개인의 자질, 능력 가지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을 때 아담을 보세요. 사람이 누구 집의 감나무 땄으면 원상회복을 시켜놔야 될 텐데 감나무를 따든지 뭘 부수면 원상회복부터 해야 될 건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 수리할 생각 안 하고 뭐부터 한 줄 알아요? 부끄럽다고 지 가릴 것 먼저 가렸어요. 그렇지요?
선악과 왜 따먹었느냐? 하고 오니까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하고 자꾸 자기 입장을 이야기한다고. 하나님 것 왜 손댔느냐? 어릴 때 어린애들 전축 있잖아요. 오랜만에 ‘전축’이란 말 쓴다. 전축 부셔놓으면, 야, 전축 이 바늘 누가 분질러 놨어? 이렇게 하면, 난 몰라요. 하고 도망가기 바쁘잖아요. 그게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는 그 행실,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선악적인 구조가 뭐냐 하면, 나쁜 일을 했으면 선한 일을 해서 그걸 보충해주면 그만 아니냐? 이렇게 돼요.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들어가요. 뭐냐 하면, 그 선한 일 중에 하나가 뭐냐? 예수 믿어주는 거예요. 선한 일을 하게 되면 나쁜 일을 보충하고 그 골을 메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 믿어주는 착한 일로 해서 내가 평생 죄 지은 것을 메울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그것 선악구조에서 나온 거예요. 이거 가짜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은 선악이 아니라 예수님이 갖고 있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선물로 주어져서 선물로 받은 것이 우리 죄를 용서해야 그래서 구원되는 겁니다. 이 공식.
하나님에게 받은 선물로 용서 되어서 구원받는 건데 우린 여기다가 ‘죄인+용서’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죄인인 내가 예수 믿기라는 죄인이 했던 예수 믿기를 용서에다가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니까 구원받는 것도 지가 잘나서. 지 잘나서 구원받은 걸로 돼버립니다. 용서 받아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저 잘했지요. 하고 들이대는 거예요.
참, 목사로선 답답하지요. 용서 받았습니까? 하면, 용서 받았다는 이야기를 생전 안 해요. 왜냐하면 용서 받았다면 못난 인간이 되니까. 그게 지 자존심이 상하거든요. 예수 믿어줬잖아요. 자꾸 예수 믿어줬단다. 그러니까 잘한 짓 중에 또 하나 추가돼서 예수 믿는 일도 잘했으니까 나, 구원해줘. 아주 당당해요.
그것은 이 공식에 어긋납니다. 이게 선악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예수 믿어주는 착한 일 해서 그걸로 자기가 자기를 구원시키려 하는 그건데 그거 가짭니다. 그 가짜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데 어떻게 가짜가 등장하는가?
신앙적으로 공식 하난데 공식2 해봅시다. 성질이 급해서 글자 함부로 씁니다. 신앙생활이란 다수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자, 신앙생활이라는 건 뭐냐 하면, 교회 왔다. 집사님들 계시다. 집사님, 하나, 둘, 셋, 넷, 집사님 다섯 명 왔고, 나까지 합치면 여섯 명 왔구나.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 둘, 셋, 다섯, 여섯. 여섯 명이잖아요. 그런데 뭐가 신앙생활이냐 하면, 여섯 명 왔지만 우린 전부다 하나다. 한 놈이야. 라고 그렇게 느껴지도록 인도당하는 것,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이게 인력으로 되겠습니까? 인력으로 불가능해요.
사람은 독자적인 자기 개성을 부각합니다. 사람 사는 맛이 뭐냐? 남이 안 가진 걸 내가 갖고, 남이 못한 걸 내가 할 때 남이 안 되는 걸 내가 가질 때 그게 어떤 자아가 내가 이렇게 가치 있구나. 라는 걸 온몸으로 느낄 때 비로소 사람 사는 기분을 느낍니다.
옛날에 어릴 때 다른 집에 티비 없을 때 금성티비 다리 네 개 있는 것 있을 때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이 김일 레슬링 보려고 우리 집에 와서 볼 때 그때 기분 말도 못하게 좋습니다. 그런데 티비 가정마다 다 있을 때 사는 재미가 없어요. 또 남한테 없는 것 뭐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전화기 있어야 돼요. 추첨해서 있는 전화기, 그것 있을 때 또 기분 납니다. 남들 전화기 놨을 때 재미없어요.
절대로 인간은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고, 모아졌다 하더라도 톡톡 튀면서 개인이 따로 튀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이란 것은 뭐냐? 내가 아무리 잘나도 한 몸에 붙어있는 하나의 사지(四肢), 그리스도의 한 몸에 붙어있는 하나의 지체에 불과하다. 따로 내 몸을 갖는 것은 나한테 무의미하다. 나는 그리스도 몸에 붙어있는 하나의 뻗어 나온 선인장에서 가시가 뻗어 나왔잖아요. 주님이 하나의 장미요, 선인장이라면, 나는 주님 몸에 붙어있는 가시다. 그렇게 느껴지게 하도록 주께서 인도할 때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주장합니까? 제가 왜 이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그럴 경우에만 자기 몸을 따로 생각해서 자기 자신을 안 믿기 때문에 그래요. 오직 한 몸 되는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따로 나와서 나 자신을 안 믿으려면 나, 너, 하나, 둘 숫자를 못 세게 하기 위해서 나, 너 없이 우리는 전부다 한 몸이라는 것을 느낄 경우에만 우린 각자 우리 자신을 안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만 안 믿습니다.
부부가 같이 가다가 남편이 다른 남자와 시비 걸릴 때 평소에 집에서 잔소리 그렇게 긁던 아내가 그땐 갑자기 남편 편을 듭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위기가 왔을 때 갑자기 남편한테 역성을 들고 당신 나쁘다고 편들 때 그때 뭘 느끼느냐 하면, 아하 우리가 딴 몸이 아니고 한 몸이라는 걸 느낍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날 때부터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고민은 그거에요.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을 어떻게 주님 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어떻게 바꿀 것이냐? 이건 인력으로 안 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다수성을 갖고 있는 것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계속해서 개인적인 가치가 이 세상에 별 의미 없다는 것을 깨우치는 그런 사태, 그런 사건들이 계속해서 우리 쪽에서 일어나게 만드는데 그 중에 사건 하나가 창세기 32장에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싸우는 한 판 붙는 그런 사건이 터진 겁니다.
성경 전체가 그래요. 천 명이 있든, 만 명이 있든 우리 보기에는 천 명 있다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봐도 달랑 한 명밖에 없어요. 누구냐? 아담 밖에.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아담으로 모으고, 구원받을 사람을 전부다 그리스도에게로 모아 버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어요. 한 쪽에 아담에 속한 사람이 있고, 한 쪽은 예수님에 속한 사람이 있고. 이 세상에 두 사람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놀라운 것은 이게 철학자들이 이런 데서는 무식한 게 한 사람이 범죄 해서 그 밑에 새끼 깐 모든 사람이 다 범죄 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그 밑에 지체로써 붙어있는 장미의 가시처럼 붙어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되는 이 원칙을 가동시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가동시켜요.
따라서 하나님, 저 행동 어때요? 라고 자기 행동에 대해서 바라 볼 근거조차 날려버리죠. 하나님, 저 오늘도 행동 어떻게 했어요? 라고 니가 니 자신한테 묻지도 말란 말이죠. 왜? 그렇게 물으면 여전히 우리는 다수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한 몸에 머무르는 게 아니고 다수성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를 대변하면 안 됩니다. 오랜만에 좋은 말 합니다, 지금. 절대로 내가 내 자신을 대변하게 되면 하늘나라 못 들어갑니다. 내 대변을 하지 말고 다수성이니까 너 따로, 나 따로니까. 우리를 대변할 분은 나에게 찾지 말고 나의 모든 것을 나를 대표할 한 분에게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간단히 말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예수 믿습니다. 라는 말이에요.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자꾸 반성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마귀에 시험 듭니다. 하나님, 오늘 내 행동 완벽했어요? 내가 빛과 소금의 역할 했습니까? 신자다운 행동을 했어요? 자꾸 돌아보시는데 돌아볼 때마다 방향이 다수성에서 하나로 모아져야 할 그것이 자꾸 나를 의식할 때마다 하나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죠.
결국은 뭐냐? 나의 완벽한 나를 믿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나를 믿고 결국 남한테 증거하는데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훌륭함을 남한테 증거하는 그런 식이 된다 이 말이죠.
창세기 32장 같은 경우에는 자기 밖에 몰랐던 야곱이 이제는 하나로 모아지는 그 과정이 바로 창세기 32장이고요 그래서 나온 결과가 뭐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숫자가 천 명이든 이스라엘 나라가 십만 명이든 오십만 명이든 상관없이 몽땅 하나의 이스라엘이라는 원칙 하에서 통제받고 움직이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얼굴이 다 다르고 DNA가 다르고, 지문이 다 다른데 수천 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각자 분산해놓으면 수천 명이 자기들끼리 싸워요.
그런데 막상 이스라엘 앞에 어떤 적이 나타나면 미디안이 나타나든지 안 그러면 암몬 자손이 나타나든지 적이 나타나면 갑자기 하나님의 성신이 여기 오게 되고, 하나님의 성신이 퍼붓게 되면 전부다 제각기 싸우고 하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니까 전체가 그렇게 개성이 있고, 고집 세고, 지 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니까 전부다 이게 다수성이 하나로 모아져서 저쪽의 하나를 이쪽의 하나가 대결해서 이기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2장을 하고 난 뒤에 하나의 여러분, 격언을 정리하신다면 이렇습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이승만이 했던 그 이야기 되는 거예요. 여리고 성 치고 난 뒤에 아이 성 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패배했지요. 그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중에 배신자가 있었어요. 아간. 하나 돼야 될 건데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 자기가 돼버리면 하나가 아니라 아간 따로, 이쪽 따로니까 둘이 돼버리죠. 둘 되니까 이거는 적을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적은 이미 하나로 규정했는데 적을 이길 수 없어요.
지금 우리가 수학적으로 볼 때 분명히 이사야 30장 봅시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이사야 몇 장이고? 잠간 기다려보세요. 히스기야 나오는 대목 보면, 여기 37장 7절에 보세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다 돌아가 버렸지요. 뭐가? 하나님의 신이 그 속에 두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된 것처럼 다 돌아가지요. 그렇지요?
또 36장에 히스기야 보면, 앗수르 전쟁할 때에 그때 얼마나 죽었느냐 하면, 십팔만 팔천 명이 한꺼번에 죽지요. 십팔만 팔천 명이 전부다 자기들끼리 보면 개성들이 강하지요. 그런데 죽을 때 어떻게 죽습니까? 한 사람 죽듯이 죽어버립니다. 근데 십팔만 앗수르 군대 죽을 때 이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 생각이 따로 따로 였습니까, 하나가 되었습니까? 오직 하나였지요. 하나님이여, 우릴 앗수르 군대에서 구원해 달라. 오직 하나만 있지요.
근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할 때 하나와 하나로 붙어요. 하나와 열이 붙는 게 아니고, 숫자가 열 명이든 백 명이 됐든 전부다 하나로 치고, 이쪽에 천 명이든, 만 명이든 전부다 하나로 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뭡니까? 여러분 살아가실 때 뭡니까? 주일날 교회 나오고 평소에 다른 집사님 생각하십니까? 안 하거든요. 교회 오면 하나인 것을 알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신앙생활은 뭐냐 하면, 너는 너 혼자 따로 노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이라는 걸 생각 안 하면, 나는 평생 동안 이만큼 일궈놓은 것은 누가 도와줬어요? 내가 나한테 투자하고 내가 죽도록 고생한 거예요. 집에 있는 가구 하나, 내 차 하나, 아파트 하나 이거는 어느 집사님이 도와준 것도 아니고, 목사가 기도한 것도 아니고, 이거는 순전히 내가 노력해서 내가 새벽부터 밤늦도록 내가 고생해서 내가 얻은 거잖아요.
이거 무슨 성입니까? 이거 다수성이죠. 왜? 나밖에 모르는데.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야곱입니다. 그런데 야곱을 뭐로 바꾼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뀌는 작업을 한다 이 말이죠. 나는 나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 구원받는 것도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라는 식으로 그게 믿음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믿는 야곱에서 뭘 믿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계획 잡힌 대로 가는구나. 하는 이스라엘로 가는 겁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다수성이 하나로 바뀌는 게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기존까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열심히 교회 나가 예배드리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큐티하고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봤는데 앞으로 그거 신앙생활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앙생활하는 것과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우리 집에 있는 아파트 하나 내가 고생해서 벌은 것처럼 내가 천당 가는 것도 내가 평생 남들 안 주고 내 기도 나한테 돌아오고, 내 기도응답 나한테 돌아오고, 내가 전도했고, 내가 성경 봤고, 내가 큐티했고 전부다 내가 나한테 투자한 결과로써 내가 구원받는다. 이거 신앙과 가장 거리가 먼 사고방식입니다. 그거는 종교지 믿음이라고 볼 수 없어요.
창세기 32장에 첫 번째 보면, 야곱이 그들을 볼 때 이르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그 다음에 뭐라 돼있습니까? 군대지요. 군대의 특징이 뭐냐? 위에서 까라 하면 까야 돼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지요. 백부장이 했잖아요. 이게 군대체질이에요. 내 밑의 종들도 가라하면 가고. 앞으로 갓, 뒤로 돌아 갓.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게 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마하나임이라 하는 것은 무수한 천사들 집단을 뭐로 본다? 하나의 군대로 잡아서 이동시킨다 이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델이 돼요. 우리 모델은 이미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천사처럼 하나님이 천사를 부리는 것처럼 그렇게 부림을 당하는 그 우리,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에스겔 37장에 보면, 아골 골짜기인지 어떤 골짜기인지 바짝 마른 그 골짜기에 해골만 수북이 있는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그들이 전부다 살이 덮여서 힘줄이 덮이면서 살았는데 각자 집에 갔습니까, 어디 갔습니까? 살아났는데 그들을 뭐라 하느냐? 그들이 하나님의 군대라 하지요.
그러니까 구원받았다는 말은 이제는 구원받았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런 군대는 없어요. 군대 되자마자 제대하는 건 없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가지고 하나님의 군대라 해요. 한번 봅시다. 12장인가, 11장인가 정신이 없어서. 아, 맞다. 12장 41절요. “사백 삼십 년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뭐라 했습니까? 나오지요.
세상에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자기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은 따로 봅니다. 까불지 마. 너희들은 징집되었어, 징집. 감사합니다. 이젠 우린 자유를 누리면 되겠지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게 안 된다니까요. 징집된 거예요. 뭐하라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라고. 징집되었습니다. 천사를 부리듯이 부리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을 볼까요? 요한복음 1장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장 6절 설명하고, 그 다음에 유명한 49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야곱의 이스라엘이 풀리지 않아요. 요한복음 1장 6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보세요. 이게 얼마나 현대 21세기 사람들 모독하는 말입니까? 인간은 똑같은 게 아닙니까? 오줌 싸고, 목욕하고, 밥 먹고, 하루 세끼 하고.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고. 이게 민주주의 원칙 아닙니까?
근데 이 본문에 보면 뭐라 돼있어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지요. 독특하지 않습니까?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고, 무슨 인간이 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인간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때부터 이제는 우리에게 위기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보냄 받은 사람이 진짜 왔다면, 우리는 그 사람 말에 순종 안 하면 우리는 지옥 가지요. 우리 중에서 하나님께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우리 보고 니, 지옥 간다. 그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오늘날 성경을 안 보는 이유가, 평소에 너나 나나 똑같다고 생각해야 우리가 살기가 마음이 편해요. 우리가 안심이 돼요. 아이고, 지나 개나 똑같은 놈. 이런 때 마음이 편하다고요. 공평해요.
근데 만약에 우리 새순교회 가운데 김 집사님이 나는 어젯밤 계시를 받았는데 하나님이 날 보냈데. 하고 이렇게 와서 주일날 이런 소리 하면 그때부터 마음이 괴로워. 왜냐하면 목사님 말 들어야 되는지, 하나님께 보낸 사람 말 들어야 되는지. 혹시 목사님, 보냄 받았습니까? 난 그런 기억 없는데. 그러면 제쳐놓는 거예요. 그럼 당신은 안녕, 빠이빠이고. 이젠 하나님께 보냄 받은 사람의 만약 그 말에 순종 안 하면 자기는 지금까지 살은 게 다 헛산 거고, 망하는 인생이 되죠.
그러니까 성경에 하나님께 보냄을 입은 자, 라고 나오는 그 순간부터 이 땅에 위기입니다. 순종할래, 말래? 이거에요. 세례요한, 지가 착각한 거지. 이러면 순종 안 해도 돼요. 지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 별 게. 지가 착각한 것, 지가 상상한 거겠지. 나도 상상하겠다. 그렇게 무시하면 마음이 편하지요. 마음이 편하면서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짜 보냄을 입었더라면 그럼 내가 그 사람을 무시하면 보내신 하나님은 누가 무시해요? 내가 무시하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래 나올 때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 사람들이 비상이 걸렸습니다. 비상이 걸려서 진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맞는지 확인작업에 들어가는데 그게 19절, 20절, 21절 나옵니다. 선지자입니까? 아니요. 제사장이십니까? 아니요. 그럼 메시아이십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당신은 하나님께서 날 보냈다 합니까?
나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보낸 게 아니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대타로 먼저 앞서서 나를 보낸 겁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신경 뚝 끊으시고, 내가 앞으로 소개하시는 그분을 안 믿으면 당신 지옥 갑니다. 라고 식으로 세례요한이 나옵니다. 나는 쇠해야 되고, 나는 무대에서 꺼져야 되고, 그분은 무대에서 새롭게 등장, 흥해야 된다.
이 소식은 총선 소식 아무것도 아닙니다. 친박연대 그거하고 비교 안 돼요. 세상에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낸 자가 나타났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똑같은 인간 아닙니까? 지가 별 겁니까? 니도 니 자신을 위해 살고, 나도 나 자신을 위해서 살고. 똑같다. 우리 아무 사이 없다. 이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우리 원대로 되지 아니하고 우리 가운데 보냄을 입은 사람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바짝 긴장하면서 인생 헛살았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거예요.
보냄을 입은 사람, 사도요한이 말하기를 보냄을 입었으니까 자기가 중심이 될 텐데 놀랍게도 사도요한은 자기가 중심이 아니에요. 그러면 누가 돼요? 다수가 되죠. 신앙생활은 뭐라고요? 다수에서 뭐로 모은다? 하나로 모은다. 사도요한은 자기가 비록 보냄을 입었지만 자기를 위한 보냄을 입은 게 아니고, 다수에서 어디로 갑니까? 하나로 모아지는 거예요. 그 하나로 모아지는 걸 가지고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1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49절에,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아스라엘의 임금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한테 칭찬을 받았어요. 참, 니는 간사한 게 없구나. 참된 신앙이라고 칭찬 받은 이유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았어요. 그저 자기 자신은 하나로 얼굴을 방향을 틀면서 살아왔다 말이죠.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할 때 기도 내용이 뭐냐 하면, 주여, 약속대로 예언대로 오실 분, 오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되기를 원해요. 약속대로, 하나님의 예언대로.
보통 세상 사람은 자기가 자기한테 투자하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자기가 애써서 공들여서 이만큼 내가 살았다. 자기 자신을 과시하기 바쁜데 이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예언을 기다립니다. 예언대로 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대로 되게 하옵소서. 그래 예언대로 온 사람이 누구다? 내다.
그 다음에 51절 보니까 니가 큰 것을 보리니 곧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한다 했지요. 인자 위에 사다리 타고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이것은 어디 나오는 겁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자 하는 창세기 야곱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야곱 이야기는 장차오실 한 분 되시는 마지막 아담 되시는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이 지금 폼을 내고 있는 거예요. 먼저 연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연기? 다수에서 뭐로 모아지는? 하나로 모아져야 그게 하늘과 땅이 통하는 유일한 그리스도의 문인 것을.
그래서 이걸 모아지는 작업을 야곱 본인이 못합니다. 하나님 손대야 돼요. 하나님이 손대서 야곱으로 하여금 다수성을 유지하는, 그러니까 나 자신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 복 받았습니다. 기분 좋다. 하는 자기 자신을 믿던 것이 뭉개지고 깨져서 그 배후에 있었던 자기 때문에 안 나타났던 자기 때문에 걸려서 안 보이던 자기 안에 근원이 되고, 바탕이 되는 분이 자기를 타고 앞에 등장하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야곱 안에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있었어요. 근데 이스라엘은 야곱 때문에 숨겨져 있었는데 야곱이 환도뼈 맞고 와장창 깨지니까 그동안 숨겨져 있던 이스라엘이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죠. 하나님의 언약인 이스라엘이 죽은 야곱을 통해서 드디어 등장하니까 그때 이름을 니는 이제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 해요. 왜? 그 이스라엘이 장차오실 요한복음 1장에서 누구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지금 강의한 가운데서 여러분, 기도 열심히 하시라. 이런 것 없지요. 열심히 착한 일, 없지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종교심을 보면 안 된다 하니까. 그게 신앙이 아니라니까. 자기 자신의 신앙마저 포기하고 그걸 깨부수는 하나님의 자명이 있어야 돼요.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마저 깨지는 그게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그게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투자를 하면 할수록 깨지기는커녕 점점 자기가 고착화돼요. 단단해집니다. 자기 자신이 더 단단해지고, 단단해진 자기는 옆의 사람하고 비교하게 돼요. 저 사람은 기도 두 시간, 나는 세 시간한다. 자꾸 비교하게 돼요. 저 사람 저렇게 해서 복 받았구나. 난 복 더 받아야지. 자꾸 비교된다고. 저 사람 저래서 목사한테 칭찬받았구나. 난 칭찬 더 받아야지. 자꾸 비교가 된다고.
그래서 성경은 다수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작업을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가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해요.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시면, 성경의 중요한 테마는 거의 다 밝혀집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을 마시게 되면, 몸의 지체가 되고, 지체가 되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눈이 발더러 쓸데없다는 소리 못하고 발이 서로 지체 간에 쓸데없는 게 왜 왔냐? 이런 소릴 못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린 전부다 지체기 때문에 한 몸을 위해서 우린 존재한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게 뭐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때 그래요. 공식 하나 씁시다. 오늘 공식 몇 개 나온다. 공식 뭡니까? 구원은 죄인 더하기 용서. 두 번째는 다수가 하나로 모아지는 게 신앙생활이다. 세 번째 공식은, 성령은 하나로 집결시킨다.
나, 성령 받았다. 성령 받고 설교해서 돌에 맞아 죽은 사람 있지요. 누굽니까? 그게 바로 성령충만 받고 돌에 맞아 죽었어요. 그런데 성령충만 스데반 집사가 그때 뭘 봤습니까? 주님께서 서셔서 자기를 반기죠. 성령의 특징은 돌에 맞는 날 보는 게 아니에요. 저 사람은 돌 안 맞는데 왜 돌 맞나? 나 재수 없다. 이래 보는 게 아니고, 성령을 받게 되면 돌에 맞든 안 맞든 간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항상 하나를 보도록 하는 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을 잘못 받아버리면 이런 게 있어요. 기도원에 가서 성령 받아서 나는 훌륭하다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과시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게 아니고, 악령 그대로 있는 사람이죠.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별 신경을 안 쓴다는 거지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별 신경이 안 써져요. 주께서 알아서 다 하는데 내가 왜 신경 쓰느냐? 이게 말은 굉장히 쉬운데 말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되거든요.
근데 이게 기쁨이 쏟다 오르면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기는 이거는 가끔 이런 경우가 주께서 다 알아서 하는데 내가 왜 마귀의 시험 들어서 쓸데없이 사서 고민을 했을까? 바보, 병신 같이. 이런 경우가 아주 편안한 가운데 일어나는. 이게 성령 받은 상태입니다. 성령 받게 되면 하나로 모아져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나님의 신이 오게 되면 뭐다?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 그러니까 전쟁할 때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갑자기 전부다 그렇게 싸우던 사람이 하나가 돼버려서 저쪽 하나와 싸워 이기게 되는 겁니다. 성령의 특징은 무조건 다수를 하나로 만들어서 전부다 하나로 생각하는 거예요.
성령으로 성경을 보면 어떻게 되느냐? 예를 들면,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우리는 뭐라고 했습니까? 안개라 돼있지요. 야고보 4장에 보면, 너희는 곧 있다가 없어질 안개라 하지요. 성령이 와서 성경을 보면 우리가 안개라는 점에서 굉장히 기쁨이 옵니다. 왜냐하면 김 집사, 최 집사 차이가 없이 모조리 전부다 뭐기 때문에? 안개다. 그런데 성령이 안 오게 되면 아이고, 저 사람 목도리 너무 괜찮다. 저 사람 머리 너무 잘 나왔다. 어느 미장원에서 했나? 자꾸 비교를 하게 돼요. 저쪽 교회는 교인이 몇 명인데 우리 교회는 얼마 안 되는구나. 이게 안개라는 걸 놓쳐버려요.
그러면 성령이 안 온 상태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 그럼 저는 안개라 할 테니까 교인들 많이 모아줄랍니까? 자꾸 성경대로 열심히 살 테니까 나의 자존심, 나의 위신과 나의 명분과 나의 명예를 나의 것으로만 채워줄 용의가 있습니까? 라고 나서는 거예요. 이게 성령이 없을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성령이 없이 성경을 봐버리면 성경대로 철저하게 지켜서 그것이 몽땅 나에게 괜찮은 것을 투자되는 투자용으로 들어가 버려요. 큐티 열심히 하면서 이렇게 기도하는데 내 소원 안 들어줍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남들과는 차이 나는 값진 나를 만들어 달라.
그런데 진짜 성령 받아보면 뭐라 하느냐? 니는 안개니라. 뭐라고 안개냐 하면, 니가 내일이 우리한테 보장이 안 됩니다. 주의 뜻이면 내일 살기도 하고, 그거는 굉장히 기뻐하는데 그 뒤에 말, 죽기도 하리니. 아, 이거는 듣기 싫어요. 내일 죽으면 애, 장가를 못 보낸다니까. 장가갈 때 아버지, 엄마 없이 장가가고. 다수를 하나로 모아서 다수를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게 성령의 역산데.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 있잖아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 주일날 이거 설교하면서 아~ 교인들 인상 안 좋데요. 왜냐하면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인간을 군화발로 진흙에다 짓밟는 소리에요. 인간 존엄성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신, 그리스도 영 없어요? 사람 아니네. 그 뜻이거든요.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입은 자가 있다는 말은 우리 인간에 대한 모독이에요. 똑같은 인간 아니라는 거예요. 얼마나 성경 자체가 우리를 모독하는 말입니까? 성경 자체가 이게 모독하는 말이 아니고, 그렇습니다. 기분 좋습니다. 이래 나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그 순간만큼은 안 보고, 하나로 모으는 그 하나에다가 하나니까 땅에 통하는 문, 통로인 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그런 기쁨을 느끼겠지요.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봅시다. 제가 이런 이야기했지요. 문이 하나입니다. 하늘과 땅이 통하는 이 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이 말이에요. 사람들은 다수 아닙니까? 사람은 다수니까 누구하고 비교해요? 이거는 안 보이니까 누구하고 비교합니까? 자꾸 옆 사람하고 비교해서 저 사람 이기게 되면 내가 하늘나라 올라갈 거야. 자꾸 이래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시험 드는 것이 뭐 간음한 자, 깡패 이런 걸로 시험 드는 게 아닙니다. 교회 시험 드는 것은 기존에 어떤 여자 집사님보다 더 시어머니한테 효부 노릇하는 그런 며느리 왔을 때 교회 시험 듭니다. 미워 죽어요. 지가 뭐 잘났다고 시어머니한테 저렇게 정성을 다 하노. 그런데 철없는 목사는 그걸 칭찬한다고. 우리 새로 오신 김 집사님, 세상에 그 치매 걸린 그걸 업고 봉양하는 걸 보니 정말 성경말씀 맞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가 저 경우 아닙니까? 이러니까.
지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누구를 본 받자 이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빼놓고는 우리는 전부다 똑같다. 안개라는 그걸 이야기하는 게 성경인데 목사부터가 경쟁을 시킨단 말이죠. 최 집사님 헌금도 아끼지 않고, 과부 같아. 자기 재산을 다 바쳤는데. 저건 좀 산다 하면서 이천 원이 뭐고? 동냥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지금 하나로 모으는 게 아니고, 다수를 놓고 서로 이깁시다. 라는 쪽으로 나갈 때 사다리를 타고 누가 내려오는 게 아니고, 지가 사다리 누가 먼저 올라가는가? 시합 부추길 때 그거 교회 아니죠. 얼마나 힘들겠어요. 사람이 다수와 경쟁하게 되면 어떤 관계에 드느냐? 이거 좀 어려운데요. 이거 하고 쉽시다. 피곤하시니까.
사람이 뭐냐 하면, 중간에 관계를 딱 끊어버리면 사람이 없어요. 반드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엮어지는 관계 속에 그게 사람입니다. 혹시 시동생 있습니까? 사모님. 있어요? 사모님이 형수 되려고 애쓴 적 있습니까? 없지요. 목사님하고 결혼하니까 졸지에 시동생이 뭐라 합니까? 형수님 하지요. 자기는 남편하고 결혼만 했을 뿐인데 형수라는 걸 탐낸 적 없는데 형수가 돼버린 거예요. 조카, 삼촌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은 자기가 뭘 관계를 맺고자 해서 만든 게 아니고, 어느 자리에 서있었는데 그 자리가 관계망 속에 하나의 점을 차지해버리니까 이 순간 얽히고설킨 관계가 쳐들어온 겁니다. 그러면 졸지에 자기는 한 남자의 아내 노릇만 하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형수가 말이야. 형수가 모범을 보여야. 내가 언제 형수 되려고 했습니까? 난 한 남자의 아내 되려고 했지, 언제 형수 되려고 한 적 없거든요.
사람들은 개인이 어떻든지 관계없이 그 관계망 속에서 본다 이 말이죠. 하나님도 그렇게 봐요. 뭐냐 하면, 우리는 개인으로 내 잘하면 될 것인데.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이미 어떤 사랑의 관계 속에 집어넣어버렸어요.
성경에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본의 아니게 이미 예수님의 용서라는 사랑의 그물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뭘 해도 그게 용서가 될 때 이게 사랑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사랑을 하려고 한다면 그거는 사랑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랑의 주체가 나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의 차이는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내가 해야 되지만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저쪽에서 오는 거잖아요. 이것이 하나님께 보냄을 입은 자 아닙니까? 하나님께 보냄을 입을 때 그냥 빈 통으로 보내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가지고 온 겁니다. 이거 못 알아듣네.
세례요한의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세례요한은 자기가 그냥 보냄을 받은 게 아니고, 앞에 누가 온다? 주님을 증거하는 관계망 속에 세례요한 구원받은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리를 누가 정해줬습니까? 하나 밖에 없는 다수가 아니고 하나, 예수님에 의해서 용서받을 때 그 사람의 자리는 예수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영이라는 그리스도 사람이 되는 거예요. 주님으로부터 늘 용서를 받는 관계다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다수끼리 김 집사, 박 집사 맞서 싸우면 이것은 뭡니까? 내가 만들어가는 나의 관계가 되서 이 관계는 주님이 주시는 그런 용서의 관계가 아니고, 내가 새롭게 정립해서 이 교회에서 내 편이 몇 명이지? 이번에 장로 투표할 때 내가 장로 나오면 몇 표 나오겠나? 자꾸 자기가 중심된 관계로 나선다 이 말이죠.
제직회할 때 말발 설 때 몇 명이더라? 최 집사는 나 싫어하더라. 내 노선 아니고, 내 라인 아니고. 자꾸 이래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다수가 돼버려요. 자기가 다수의 중심이 되는 거예요. 상대방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런 것이 바로 교회로써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뭔가 다가오는 게 있어야 돼요.
쉬기 전에 다음 시간에 할 것 미리 당겨서 하겠습니다. 미리 맛만 보고 쉬겠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은 죽음을 최초로 극복해서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이기고, 사람을 이기지 못하면 저주의 자리에서 복의 자리로 못 넘어 갑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야곱이 누구라고요? 야곱 안에 누가 있단 말이에요? 이스라엘이 있다 했지요.
쉽게 이야기하면 요새 수요일 날, 목요일 날 연속극이 있어요. [누구세요] 그 연속극에 보면, 조승유? 윤계상이 나오는 게 있어요. 그 사람 몸을 빌려서 죽은 사람 자꾸 등장한다고요. 아침 아홉 시, 열 시, 열한 시 세 시간 동안 잠시 그 사람 이용하다가 열한 시 땡 치면 분리되거든요.
그 대목을 보면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통로입니다. 하늘과 땅의 통로인데 우리는 뭐로 생각하느냐? 우리는 자꾸 뭐가 돼요? 우리는 매일같이 야곱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야곱 같은 우리 배후의 뭐가 되느냐? 이스라엘로 내주하셔서 죽음에 있는 인간을 뭐로? 생명의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돼야 구원받으니까. 이스라엘 영역 안에 들어가야 돼요. 근데 우리는 자꾸 야곱 안에, 야곱은 뭡니까? 야곱은 속이는 자, 사기 치는 것, 내 힘으로 내가 진다는 이거거든요.
그래서 창세기 32장은 뭐냐 하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극복하는 사람이 누구냐? 바로 이스라엘로 소개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도 이기고, 인간도 이겨서 우리로 하여금 저주에서 벗어나서 된 분인데, 그분이 우리를 대변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하여튼 그 정도 아시고, 10분 쉬시면서 상세한 건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교회(IP:220.♡.176.141)
08-04-13 10:32
울산080404b창세기32장b20080404b 울산강의-창세기 32장
(강의:이근호 목사)
이 야곱이란 사람이 32장에 보면 겁을 내요. 뭐냐 하면, 에서가 따라와서 자기를 죽인다는 거예요. 야곱이란 사람에게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죽음의 공포가 항상 뒤집어써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형한테 맞아 죽게 돼있습니다. 형이 올까 싶어서 형한테 갖다 바칠 예물을 미리 빼놔요. 형이 온다는 소식 듣고 이 예물을 받으시고 화를 좀 누그려 뜨리시길 바랍니다. 하고 한편으로 그렇게 하고 또 지는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뭐라고 기도하느냐 하면,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다시 은혜주면 다시 돌아간다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에서가 형이 날 죽이려고 옵니다. 11절에 보면 제가 너무나 두렵습니다. 두려워서 내 처자를 칠까 겁냅니다. 제가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뤄지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이것은 바로 야곱 안에 뭐가 들어있다? 죽음의 기억이 계속 야곱 안에 들어있어요. 야곱 속에 야곱을 뜯어보면 죽음이 칭칭 뱀처럼 똬리를 틀고 죽음이라는 게 칭칭 감고 있어요. 그 야곱이 뭐냐? 우리 자신들이에요. 우리 자신의 뚜껑을 들어보면 우리 속에는 뭐가 감겨 있느냐 하면, 죽음에서부터 도망치기 위한 모든 수작들이 우리 몸이 칭칭 감고 이것이 자아를 형성합니다. 나라는 걸 형성해요.
전에 이야기했지요. 프랑스빵은 겹겹이 주름져 있지요. 우리 인간도 뜯어보면 하나둘씩 주름이 있는데 주름이 뭐냐? 안 되질라고 애썼던 그것이 층층이 이루어서 자아를 이룹니다. 기어이 살아보려고.
그런데 여기 일 번이 진정한 죽음이 무엇이냐? 참 이런 말하기가 제가 어려워요. 이해될까? 야곱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야곱 자체가 죽음의 열매에요. 이근호란 인간에게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솜씨가 이근호라니까요. 우리가 죽을 때 죽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점점 죽어가고 있어요. 죽음이 나의 왕이에요. 이근호가 이근호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으면 안 돼. 죽음이 저를 쥐고 있는 거예요.
친구, 의리, 사랑 지가 굶어 죽어보세요. 친구가 어디 있어요. 교회가 어디 있어요. 밥 먹고 살기 어려운데 무슨 교회를 나옵니까? 하나님, 예수? 아니에요. 전부다 살만 하니까 교회 나오는 거예요. 한국교회 부흥되었어요? 한국교회 뭐하는 동네인지 압니까? 죽은 시체들이 모여서 살려달라고 비는 데가 교회에요. 혹시 살려 줄까봐. 커피 마시고 금요철야하면 혹시 살려 줄까 싶어서. 사는 속도를 행운이 와서 더 감해지도록.
그래서 목사 설교에서 이것만 챙깁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보시면 반드시 더 잘 살고 오래 삽니다. 그것만 챙겨. 딴 소리 절대 안 챙겨요. 예수고 성령이고 다 비껴갑니다. 안 듣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사는데 지장이 없겠습니까? 몸이 건강하고 어떻게 사는데 지장이 없겠습니까? 그 자체가 뭐냐? 그 자체가 이미 죽어있다는 뜻이에요. 자기가.
야곱이 이미 죽어있는 인간이에요. 죽어있으니까 형이, 타자가, 자기의 다수가 겁이 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그 죽음 속에 있는 야곱을, 그 다수 속에 있는 야곱을 생명이 있는 하나로 인도하는 걸 그걸 뭐라 했습니까?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 했지요.
두 번째가 뭐냐? 저주의 경계를 넘어야 돼요. 야곱의 힘으로 안 됩니다. 야곱은 기껏해야 죽는 게 무서워요. 이것밖에 안 돼요. 얼마나 죽는 게 무서웠던지 자기한테 다가온 하나님의 천사를 자기를 죽이려고 온 사람인 줄 오해했어요. 이거는 야곱의 본성입니다. 사람이 자기 방어에 자기 자신에 아주 몰두하면 얼른거리기만 해도 적으로 간주합니다.
일산에서 그랬고, 안양도 그랬지요. 어린여자아이를 성폭행하는 그 분위기가 되니까 집에 있던 부모들이 휴대폰 쳐서 학교 파할 때는 전부다 애 데려갑니다. 그 분위기 자체가 죽음의 분위기에요. 집에 있는 죽어갈 엄마가 학교 간 죽어갈 지 새끼를 같이 해서 죽음으로부터 방어하려고 하는 거예요. 경찰은 뭐하느냐 하죠. 곡물 값 올라가고 기름값 올라갈 때 여기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두려움을 느낀다는 말은 잘하면 살겠다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음으로 푹 잠겼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음에 빠져서 죽음이 왕 노릇한다. 사망이 오히려 왕 노릇한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령은 성경에 있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게 성령입니다. 진짜 내가 매일같이 살아가는 게 안 되질라고 살아가는구나. 라고 하는 게 로마서 5장에 실감나게 만들어요. 우리로 하여금.
교회와도 죽음의 공포는 풀리지 않고, 교회를 나가도 죽음의 공포는 떨어지지 않고. 휙휙 뱀이 죽음이라는 뱀이 아침 눈 뜨고 저녁 갈 때까지 내 몸을 휙휙 감고 아주 목을 꼭 조이고 있는 거예요. 한시라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없게 만들어요. 그래서 누가 오면 바짝 긴장하죠. 그게 야곱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죽음이 무엇인가? 야곱을 통해서 알아야 돼요. 성경 아니면 죽음이라는 걸 알 수가 없어요. 우선 세상적으로 보면 죽음이 뭐냐? 이겁니다. 논리가 이런 논리인데 이 논리를 잘 들어보세요.
자아라는 것, 자기라는 것, 과거의 기억의 층이 만들어낸 이미지. 나라는 것은 과거에 누적된 층이 만들어낸 지금의 이미지에요. 서울대학 나왔다. 그럼 나는 서울대학 나온 자아에요. 나는 재산이 한 10억 있다. 10억이 있는 자아에요. 니는 5억? 나보다 반 밖에 안 되네. 너는 나보다 재산이 반 밖에 안 돼. 할 때 상대방과 비교할 때 뭐로 비교합니까? 과거로부터 내려온 내 머리 속에 있는 기억과 저 사람의 기억과 비교하면서 니는 너고, 나는 나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돼요.
그래서 연예인들이 나이 많은 걸 그렇게 무서워해요. 왜냐하면 자기의 기억 층에 뭐냐 하면, 나는 예뻤다, 팬들이 많다, CF에 잘 나온다. 지금은 나이 많다. 쭈글쭈글 못생겼다. 팬들 다 떨어졌다. 그러니까 수술하자. 아직 탱탱하단 소리 듣고 다시 드라마 뛰자. 방금 이야기한 전체가 자아라는 거예요. 자아라 하는 것은 뜯어보면 기억이 누적된 걸 자아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게 죽는 순간이 오게 되면, 자기가 죽어버리니까 듣는 거 정지하잖아요. 죽는 순간이 되면 제일 난처한 게 기억이 없어지면 뭐가 없어져요? 자아가 없어지니까 자아가 없어지면 뭐도 없어지느냐 하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도 내가 죽는다는 그 주인공 자체가 없어져버려요. 죽음 자체가 없어져요. 참 말 어렵게 한다.
죽는 순간이 되면 죽음 자체가 없어져요. 죽는 것이 두려울 때가 언제 두려우냐 하면, 아직도 살아있으니까 죽는 게 두렵지요. 자아가 살아있으니까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하지만 죽는 순간이 오게 되면 죽는 게 무섭다는 자아마저 기억이 정지되니까 기억이 사라지니까 이것도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안갭니다.
안개가 있으면 이 안개 축축하네. 이거 황사 아니냐? 안개가 있으니까 이리 따지고 저리 다지지만 안개가 없는 순간에는 방금 뭐 있었는데, 없네. 잊어진 존재가 없는 존재가 돼버려요. 그럼 어떤 사람이 목사님, 과거는 있었잖아요. 하는데 사람의 존재가 허무한 게 성경의 시편에 나옵니다. 과거에 아무리 오래 살았던 이 세상에 구십을 살았던 백세를 살았던 간에 어떤 순간이 없어지면 과거의 살았던 것도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다 사라져버려요.
내가 있는 순간이 없는 순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려워요. 뭐냐 하면, 니가 있다고 하나? 사실은 없는 거다. 하는 거예요. 그 없는 거라고 시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림자’라 하거든요. 성경에서 인생을 뭐라고 하느냐? 인생은 이렇습니다. 시편에 보면, 그대로 할게요. “인생은 헛것이요 그림자 같으니라” 돼있거든요.
여러분, 그림자가 어느 정도 헛것인지 알아요? 제가 움직여 볼게요. 여기 물병이 있고 비타500 있는데 제가 움직이면 가만있는데 위에 뭐가 덮이지요. 그분 그림자가 덮이지요. 그림자가 덮이면 물병이 화냅니까? 비타500이 어떤 영향을 받습니까? 이게 껍데기 정도가 아니라 얇은 껍데기, 그림자니까 얇은 껍데기라고 보면, 얇은 껍데기가 지나가도 아무 영향 없지요. 아무 신경 안 쓰지요. 우리 인생이 그렇다 이 말이에요. 살아있을 때는 인상이 가지만 죽고 나면 그냥 그림자처럼 그런 사람도 있었지. 옛날 내가 어떤 남자하고 산 건 기억나는데. 그러니까 애가 생겼지.
죽은 남편을 기억한다는 것은 죽은 남편을 기억하는 게 아니고, 죽은 남편 가운데서 나와 관련된 것만 골라서 내가 재편집해서 내 기억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것도 내가 죽으면 죽은 남편도 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이걸 성경에서 뭐냐? 안개니라. 또는 인간은 헛것이고 그림자 같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니가 평소에 의미 있다고 연결시킨 연결들이 관계들이 죽고 나면 다 무의미했음을 알아라 이 말이죠.
그러면 대안이 뭡니까? 죽음이 뭐냐? 야곱이 지금 창세기 32장에서 애쓰고 열심히 기도하고 붙들고 한 모든 게 뭡니까? 뭘 몰랐어요? 본인이 안개며 그림자인 줄 모르고 하나의 실체처럼 계속 굴지요. 그래서 대부분 목사들이 뭡니까? 얍복 강가에서 예수 믿고 야곱처럼 붙들고 기도하면 복 받는다고. 이거는 반대로 가르쳐요.
붙들어도 붙든 이유가 뭐 때문에 붙듭니까? 안 되질라고 붙들잖아요. 안 죽으려고 붙드는 자체가 이미 붙든 자체가 죽음이 만든 현상이라니까요. 그림자가 붙들어봐야 주님 끄덕도 안합니다. 그림자인데. 우리가 그림자 덮이면 이게 어디서 시비 거노? 이렇게 합니까? 지나가소. 이렇게 하면 끝나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분명히 중고등학교 때 싸웠을 거예요. 그 싸웠던 친구, 지금 삼십 년, 사십 년 지나 만나보세요. 그 싸웠던 것 감정 없어졌습니다. 그때는 저놈 안 죽이면 나도 학교 안 온다. 그렇게 심각했던 것이 한 사십 년 지나 보니까 아이고,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공부도 안 하고 노는 애들처럼 침 뱉어가면서 먹어주는 줄 알고. 꺼덕꺼덕 나팔바지 입고 돌아다니지만 나팔바지든 뭐든 간에 그것도 아~무. 속에는 섞어서 해골인데 위에다 나팔바지 걸쳐봐야 뭐 합니까?
그런데 젊은애들은 자기가 죽는 걸 모르고, 생생하게 살았다고 보니까 나팔바지에다 뭘 걸치네. 실체인 줄 알고, 뭐 된 줄 알고 그렇게 노는 거예요. 나이 구십 넘은 할머니 목욕탕 가도 보도 안합니다. 젊은애들 목욕탕 가면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나이 구십 넘은 할머니들 목욕탕 가면 애들 안 봅니다. 쭈글쭈글한 육체 보면 밥맛없지 뭐하려고 봅니까?
야곱이 자꾸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이삭의 하나님, 절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야곱을 도와준 적 없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목표로 하지, 야곱이 아닙니다. 야곱은 다수에요. 이스라엘은 하나입니다. 참 이스라엘이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뭐라 했습니까? 너는 참 이스라엘이다. 나다나엘이 되면 안 돼요. 나다나엘에서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이스라엘로 돼야 구원받는 거예요.
천국은 이스라엘만 가는 곳이지 나다나엘이 가는 곳이 아니에요. 이근호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만 가는 데에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서 가야 되지 내 몸 되서 가는 데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써 장미 한 송이만 들어가요. 우리는 가시가 되서 들어가죠.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그렇지요. 모든지 하나지요.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리스도도 하나요. 전부다 하나다 이 말이죠.
여기서 야곱은 야곱의 죽음을 그는 어디서 알게 되었습니까? 에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까? 몰라요. 에서를 보면 더욱더 살아야겠다는 집념만 강하죠. 내가 살아야겠다. 32장 내용이 그거에요. 내가 형한테 져선 안 된다. 왜? 난 축복받을 사람이니까. 하나님이요,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 하나님께 도움 됩니다. 저가 살아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든지 국가와 민족,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든지 내가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게 야곱이에요. 그 자체가 되질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자체가 인개인 줄 모르고 살아야겠습니다. 바로 그 인간을 하나님은 죽이려고 하십니다. 왜? 그게 죽음이기 때문에.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자기가 죽음인 것을 알게 된 것은 다른 사람이 에서가 와서가 아니라 누가 와서 그렇습니까? 하나님 사자가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신약에 보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걸 상세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십자가 졌거든 누가 널 꾀더냐?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든.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의 관이거든요. 우리의 최후의 모습, 우리의 진실한 본질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버림받았지요. 왜 버림받았습니까? 죄가 있기 때문이죠. 그 죄는 어디서 나온 죄입니까? 예수님이 죄 진 적 없는데 왜 죄가 있었습니까? 그 죄는 어디서 가져온 죄에요? 나에서 가져온 죄 아닙니까? 예수님을 날 대신해서 현재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비쳐볼 때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는 버림받아야 될 인간인 것을 십자가에서 유일하게 알게 됩니다.
산에 가면 고전압 흐르는 전신주가 있지요. 이만 오천 볼트 흐릅니다. 그거 만져보세요. 삐찍삐찍 갑자기 하나의 불꽃이 타버리죠.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게 이만 오천 볼트 전신주를 만지는 것과 똑같아요. 똑같은 정도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심하죠. 지가 서울대학 나왔든 지가 이건희가 되서 총재가 됐든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은 전기 만지면 감전사 안 됩니까? 창녀가 되었든 세리가 되었든 지가 백부장이 되었든 그리고 그야말로 강도가 되었든 누구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은 감전사되어야 될 죄가 왕 노릇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보여줬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사도바울이 자기가 뭐라 했는지 압니까? 나는 율법에서 완벽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선악적인 논리로써 흠이 없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입에서 뭐라 했는지 압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이게 뭔데? 감전사 당했다. 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