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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아브라함과 마가복음의 예수와의 비교강의-

아브라함과 마가복음의 예수와의 비교1992년 10월 13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3 (p 208) 흔히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후세의 모든 믿는 자는 아브라함이 이해하고 있는 신관과 동일한 신관을 가질 때만 그것이 제대로 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이 범주에 속하는가? 아브라함의 운명이 그 당시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그가 [약속]을 지녔다는 점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대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약속]을 지녔다는 점에서 아브라함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이 범주에 속하는가? 예수님도 만약에 아브라함과 유사한 운명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소유한 약속과 동일한 질의 약속을 소유했기 때문이 아닐까? 약속이라는 주제 하에서 신구약이 영속성을 갖게 되려면 약속을 지닌 자들만의 공통적 선상에서 일정한 법칙 하에 유사성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직 [약속] 때문에 야기된 법칙이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약속의 원형]을 인정할 수 있다. [예견된 약속]과 [실현된 약속] 사이에서 발견된 공통속성이 [적용된 약속]을 지니고 있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그 구원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본 글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서 일목요연하고 스피디한 기술전개를 보이는 마가복음과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생애의 유사점을 비교함으로 약속 실체에 접근을 보다 용의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쓰는 글이다. 1. 아브라함의 생애 (1) 외지에서 투입된 인물 가나안 땅이란 그야말로 [함의 후손인 가나안의 땅] 이다. 함 족속이 주인 격이다. 그런데 그 땅의 소유주를 그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방침이다. 하나님에 의하면 모든 땅은 오직 [하나님만의 것] 이며, 만약 하나님의 안식에 거슬리는 존재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저주하여 팽창을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복이 팽창을 말한다면 저주란 소멸을 말한다. 더 이상 확산시킬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더구나 땅의 속성과 부합되지 않는 상태 같으면 제거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땅의 평정은 하나님 자신이 안식을 누리는 것과 관련 있다. 땅에 비창조적이고 반청조적 혼란의 세력이 거하면 하나님은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조치가 실시되는가? 창세기 3:15에 의하면 [투쟁] 이라는 방식의 도입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투쟁] 이란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은 하나님의 새로운 시도에 못마땅해 하고 대항한ㄴ 실체를 두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 대상의 결말에 대해서 이미 형식화한 바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홍수심판이다. 그 실시된 심판행위의 결과를 가지고 비언약적인 요소를 척결하는 이유로 삼고자했었다. 노아 후손 중, 함과 가나안이 여기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다. 그들은 아버지 노아에 대해서 [노출] 그 자체만을 가지고 노아를 평가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덮여진 수치] 로서 아버지를 이해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정신이었고 심중을 반영한 것이었다. 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존재로 탈바꿈한 인간 부부를 찾아온 하나님은, 앞으로 이 부부에게 벌어질 일을 약속으로 남기면서 그 증거로 가죽옷을 만들어 그들의 수치를 무마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은 땅으로 내려간다. 땅은 약속을 지는 부부를 맞이하게 되는데,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쪽이 하나님 편이다. 거기에 비해 가인의 후예인 라멕은 비보호 적이다. 이는 가인의 속성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함과 셈과 맞부딪히는 계기를 마련하시는데 그것은 셈의 후손 중 한 인물이 함의 땅에 침입함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비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의 시발로 봐야한다. 비록 거기에서 그는 나그네요 방랑자가 되지만 결국에는 오히려 주인노릇하게 된 그 경위를 통해서 저주받은 땅에서의 약속은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되는가를 만천하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2) 모든 권세를 초월한 권세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자 같은 함땅인 애굽에 아브라함이 내려간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지상의 최고 권세를 만나게 되고, 그 땅에서의 삶과 죽음은 마치 그 세속권세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머리 숙였고 그 권세에게 아내를 상납했다. 그렇게 해서 그 권세의 초월성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약속을 숙성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세속권세의 껍질 안에서의 자라날 그런 권세가 아니라 오히려 덮고 있는 권세마저 정복해 버리는 권세였다. 바로왕이 기겁을 했다. 더 높은 권세로부터 온 인물을 자신이 다스려했다고 혼쭐이 난다. 바로왕이 오히려 그 초월적 권세에 굴복한다. 흉년이 끝나고 다시 돌아오면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약속을 준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추가했다. 네가 좌 하면 내가 우 하고 네가 우 하면 내가 좌 하리라 ! 아브라함은, 약속이란 내가 성취해 나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 뒤, 아브라함이 지닌 초월적 권세는 그의 신분의 성격으로 이어지면서 그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인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소돔전쟁에서의 승리자, 기도해서 천사를 방문케 하여 조카 롯을 소돔성 심판에서 건진 일 (19:29), 그날 왕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하여 태가 다시 회복시켜준 선지자적일, 헷족속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하나님의 방백] 이라고 부르면서 정식으로 땅의 일부를 아브라함 후손의 소유로 삼게 한 일 (23:6), 이미 아기를 가질 기력이 모두 죽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바로 가나안 땅의 모든 권세를 일축하는 초월적 권력의 소유자로서 아브라함이 그 땅에 투입되었음을 나타내는 징조이다. 그리고 앞으로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날 약속의 그 자손이 본질을 말하기도 한다. (3) 희생제물로서 등장된 약속의 자식 초월이란 무엇에 유용한가?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만 필요한가? 초월적 능력이란 갇혀있는 현 삶의 체제를 무난히 극복시켜 주는데도 유용하다. 세속 권력이란 땅의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더 땅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권력구조에 말없이 순응시키는데 효과 있다. 더 큰 권세의 작용이 없이는 그 땅이 하나님과 연관 맺기 글렀다. 초월적 인물에서 새로운 방식에 의해 자식이 하나 태어난다. 소위 [약속의 자식] 이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매겨준 약속의 범주 내에서만 활약한다. 다른 자식과 구별됨을 보이기 위해 [할례]를 행한다. 난지 8일 만에 할례 한 자는 이삭이 최초이다. 할례란 남성의 생식기 끝표피를 자르는 것으로, 인간의 생식기능과 무관하다는 징표가 그 의식 속에 담겨 있다. 즉 땅의 후손이 아니라 [약속의 후손] 이다. 따라서 이제 땅은 이 [약속의 후손]의 활동여하에 따라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 [약속의 자식]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원수의 성문]을 여는 것이다. (22:17 / 24:60). 어떤 방식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가? 그 방법은 세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로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심판하고 죽여 버리는 하나님의 심판행위 속에 참여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초월적 희생제물과 더불어 부활하는 것이고 셋째로 그 부활한 증거로 원수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전에 (15: 1-21) 자기가 바친 제물 속에 하나님이 임재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약속의 내용들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로 통해서 이루어짐을 인식하고 있었다. 초월자의 능력도 임재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 약속의 자식]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했었다. 아브라함은 서슴없이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그렇게 해서 그 약속 성취에 자신이 참여되기를 바랬다. 이는 [약속의 자식]이 지닐 약속 성취의 효과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역시 [그 약속의 자식]은 아니었다. 그를 대신해서 수양에 희생제물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미래를 내다보게 되었다. 결코 양이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 동급동종제사의 원리에 의해서이다. 요한복음 8잘 56절에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가 이제는 보고 기뻐했다고 되어 있다. 즉 정말 초월자로서 희생제물이 된 자만이 진정한 안식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다. 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믿음이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화 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로마서 4:17-25). 2. 예수님의 생애 (1) 초월적 인물 마가복음은 첫 줄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세례요한이 그의 길을 예비하였으며, 세례 받을 때 하나님에 의해 아들로 확인된다. 또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했고, 또 천사들의 수종을 받는다 ( 1: - 3), 이 같은 운명을 짊어지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외치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 여기서 말하는 복음이란 과연 그 내용이 무얼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일을 보다 효과 있게 하기위하여 제자들을 선택한다. 제자들은 임의대로 자기의 일을 정할 수 없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예속된다 ( 1: 16-20). 예수님의 초월적 사역은 계속 된다. 안식에 들어가서 가르쳤는데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의 가르침과 같다고 했다 ( 1:22).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다.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들과 사람과의 논쟁을 설명하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 1:23-28) 악마의 나라를 능가한ㄴ 거룩한 하나님, 즉 예수님의 권세가 분명히 나타나있다. 그 다음에 [이것은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을 명한즉 순종하는 도다] 라고 외쳐대는 뭇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나간다. 병자를 고치고 새 교훈을 주는 방식 때문에 그 당시의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낡고 힘없고 무감각 적이고 구세대적인 것으로 판명되고 말았다. 일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왔을 때, 한 문둥병자를 고치는 사건이 삽입이 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활동이 결코 율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병이 나은 문둥병자에게 예수님은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명한다. 그때 율법이 정한대로 제물을 바쳐서 율법이 어떤 식으로 완성이 된 것을 증거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병자는 예수님의 명을 어기고 자기가 경험한 것을 널리 전파했다 ( 1:40-46). 그러니 그때부터 예수님은 처신하기가 매우 난처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활동이 단순히 병 고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써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기 때문에 고유의 목적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지자 단순히 사회질서 차원에서 정치세력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종교적 이유는 약화되고 정치성을 띤 제재의 눈총을 집권자들은 가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모세율법을 어기는 게 아니었지만 정치세력들은 예수님의 전도활동을 정치적으로 제재하기 위해 종교적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2) [믿음]의 실체 2장에 들어가면서, 그동안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끼친 감동으로 인해 우호적인 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믿음] 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하셨다. 중풍병자들 데리고 방해받는 군중을 헤치고 지붕을 통해 예수님께 다가오는 운반자의 노력에 대하여 예수님은 [믿음] 이라고 하셨고 그 믿음과 죄 사함과 직결시켰다. 원래 죄 사함이란 율법적 테두리에서 언급된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접근하는 태도를 믿음이라고 부르고 죄사람 즉 [義]의 차원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분명 인간에 대한 율법이 지적하는 죄성에서 해방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계신 게 분명하다. 그 믿음의 중앙에 예수님이 서있다. 예수님은 바로 믿음의 대상이 되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시므로 하나님 자리에 서 계신 것이다. 이로 인해서 군중은 새로운 각도에서 놀라게 되는데 ( 2:12), 예수님을 병이나 고쳐주는 떠돌이 선지자의 노선이 아니었던 것이다. 죄인과 의인의 갈라짐은 율법의 차원에서 더 이상 이해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 2:17) (3) 충돌 기존 세력과의 본격적인 충돌은, 예수님이 세리 레위를 제자로 삼으면서 일어난다 ( 2:13-17), 이는 죄인을 의인이라 부르고 의인을 죄인이라 부르는 가치관 도립에 의해서 현 종교체제의 전적 부정을 선언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 뒤에 금식에 관해서 마찰이 일어나면서 ( 2:18-22) 예수님은 새 술을 담을 새로운 부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셨다. 터져버리는 술 부대, 이는 유명무실한 종교체제를 비난하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 새로운 차원의 금식이 조만간에 있게 되는데 그것은 나 예수의 체포소식이다. 또 다른 충돌은 안식일논쟁 때문이다 ( 2:23-28). 제자들이 안식일날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었기 때문이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므로 서 안식일의 지향점을 예수님 자신에게도 흡수시켜 버렸다. 연속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논쟁 나열을 통해서 마가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필연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4) 기성세력과 분리를 꾀하는 예수님 계속되는 기성세력권의 저항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새로운 공동체의 등장을 암시케 한다.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인가 - 내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 ( 3:34) 왜 이런 현상이 꼭 일어나야만 하는가? 예수님이 이런 현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한다 ( 4:11). 기존 세력권의 배척은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에 대한 애정을 가중하는 것과 잘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애정 어린 결속은 활발한 전도활동으로 이어져 보다 큰 영향력으로 기적이 행사된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의 골은 날이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 이제 예수님과 교훈과 기적도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제시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제자들은 이런 와중 속에서 자신들의 위상이 얼마나 바리새인들과 멀리 와 있는가를 실감되어야 한다. 이적들이 절정에 이를 때,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살해당함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 수난이 단지 예수님 혼자만의 수난이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는 함께 받아야 될 공동의 수난이다 ( 9:27-35). 그것만이 최후의 구원에 도달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이 자신의 죄 때문에 발생되지 않고 [섬김]에 의한 필연적 과정으로 본다 (10:45). 따라서 그전에 제자들도 이 [섬김]의 정신이 없으면 제자로서 자격이 없다 ( 9:33-37). 이 [섬김]의 정신으로 인해 기존 권세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발되고 비판받는다 (12:38-40). 여기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섬기는 자들의 모임]과 [형식적인 자들의 모임]으로 예리하게 구분하고 계시다 (12:43-44).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의 모든 체질은 이미 예수님의 생애로 통한 기준에 의해 평가받아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 (13:22). 종말의 성격은 벌써 결정된 것이다. (5) 권세자들의 일방적 공세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는 것을 통해 예수님은 만사가 자기 정체를 다 드러내는 계기로 보고 있다. 인자는 인자대로 갈 장소로 가고 흩어질 양들은 다 흩어지는 것도 이 시점이다. 예수님은 이런 와중에서 흘려지는 자신의 피를 언약의 피라고 지칭하셨다 (13:24). 그런데 언약의 피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흘려지는 피라고 하셨다. 즉 희생제물계약에 준한 피라는 것이다. 그 희생 제물에 제자들도 가입될 수 없다. 쏟아진 피는 전부 예수님 자신에게서만 나온 피다. 예수님은 죄인들 틈에 끼어서 함께 죽음을 당하시므로 (15:27) 자기 사역을 중심으로 해서 심도 있는 죄성을 폭로하고 자신을 죽음으로 몬 모든 작태들과 일상적 죄 개념을 같은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즉 죄의 진정한 본질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야기한 그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믿음 없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 (16:16). (6) 구원의 진정한 의미 마가복음에서의 구원의 의미는 현재화된 그리스도의 능력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16:17-20). 그러나 능력이 실재화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우편에서 예수님이 지금도 일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완성상태이기에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성 상태이기에 효과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검토해 본 바, 하나님이 내려주신 약속이란 반드시 천상의 인물이 지상에서 하는 사역만이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초월자의 희생]이며 이 희생은 믿는 자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않게 만드는 요인으로 시간을 초월해서 작용해 왔다.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약속은, 그 약속으로 인해 아브라함이 자기 운명이 사용되어졌다는 차원에서 예수님과 동질성을 띠고는 있지만 자신이 약속의 주체가 못되고 다만 믿는 자의 입장에 항상 서있어야 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와는 다르고 지금의 성도와는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아브라함 언약은 장래의 약속의 자손과 그를 믿는 성도의 위상도 함께 보여주고 있으니 그야말로 약속의 선조라고 할만하다. 아브라함 안과 그 후손되시는 예수님에 의해 약속의 실체가 드러났으면 창세기 32장 15절에 나오는 뱀의 실체도 드러난다. 무엇이 아브라함의 원수였는가? 그것은 아브라함 언약에 준하여 지상에 내려온 초월자 희생에 대하여 의미를 주지 않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며 이 지상에서 축출당할 대상이 된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 전쟁의 수행했고 예수님이 그 세력권속에서 승리했으며 또한 성도도 이런 정신들을 배격해야 할 사명을 지닌다. [섬김]과 [희생정신]이 성도됨의 열매이며 [지배욕구]와 [성장의 욕구]는 아무리 교묘하게 기독교적 형태로 사용해도 마귀 그 본질에서 나온 정신들이다. 성도는 날마다 이런 사고와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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