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과 학문
인간의 본질과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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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과 학문
1991년 8월 20일 이근호, 성경신학의 세계 1 (p 113)
1. 서 론
2. 본 론
1) 학문의 산실
2) 각 학문들의 본질
(1) 정치에 관한 학문
(2) 경제학으로 나타나는 무의식
(3) 자연과학으로 나타나는 무의식
(4) 철학으로 나타나는 무의식
(5) 종교로 나타나는 무의식
3) 하나님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
3. 결 론
* 참 고 도 서
[미적이론] Theodor W. Adorno. 방대원 번역 (1991 서울: 이론과 실천사)
[국가형성론의 역사] 바디 바른봄 外. 최장집 정해구 편역 (1987 부산: 열음사)
[수탈된 대지] Eeduardo Galeano. 박광순 번역 (1988 서울: 범우사)
[닭이냐 달걀이나?] Robert Shapiro. 홍동선 번역 (1990 서울: 책세상)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Paul Davies. 류시화 번역 (1988 서울: 정신세계사)
[나를 따르라] 브하그완 쉬리 라즈니쉬. 류시화 번역 (1990 서울: 청하)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 안재구 (1991 서울: 竹山)
[氣哲學을 넘어서] 박삼영 (1991 서울: 라브리)
[무한과 유한] 다께우찌게이. 김용준 번역 (1989 서울: 지식산업사)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 한국창조과학회편 (1990 서울: 한국창조과학회편)
[聖과 속: 종교의 본질] 멀치아 엘리아데. 이동하 번역 (1991 서울: 학민사)
[토털 시스템으로서의 세계] Kenneth E. Boulding. 이정식 번역 (1990 서울: 집문당)
[人間과 無意識의 象徵] Carl G.Jung. 이부영 외 (1990 서울: 집문당)
[宇宙心과 정신물리학] Itzhak Bentov. 류시화 이상무 번역 (1989 서울: 정신세계사)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과학교육] John Sharp. 우현기 번역
(1989 대구: 기독교대학설립동지회출판부)
[경제원론] 平田淸明. 강석규 번역 (1987 서울: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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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3-30 17:22
인간의 본질과 학문
1991년 8월 20일 이근호, 성경신학의 세계 1 (p 113)
1. 서 론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남겼느냐를 통해서 알수 있다. 그것은 곧 학문의 형태로 나타난다.
세상 학문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작업을 하면서 모든 학문의 밑바탕에는 인간의 정신 활동이 깔려있고 그 활동의 원천을 추적해보면 인간의 본성이 고스라니 들어있다는걸 알았다. 아무리 인간이 신(神)을 염원하고 무한을 조사하고 영원한 것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고유의 그릇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한도 인간안에 들어있는 무한이다. 영원한 생명이라고해도 유한한 생명안에 들어있기에 진정한 영원일수는 없다.
본 글은 인간이 죄인으로 변모한 후에 무엇을 위하여 노력하며 부단히 움직이느냐를 탐구하고 그 결실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악의 열매와 어떻게 일치되고 있는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2. 본 론
1) 학문의 산실
세상의 모든 학문들은 인류가 대대로 이어오면서 결집된 활동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수천 수만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날의 문화까지 이끌어 온 것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이 총동원되어 조성해낸 위해한 작품을 지금 우리들은 누리고 있다. 결국 그 덩치는 하나이다. 현대에 와서 학문의 다양함에 인간 스스로가 놀라고 있지만 서로가 서로의 얼굴의 다양함을 보고 놀라는 것처럼 이해 안될 만큼 놀라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나중에 가서는 결국 인간의 공통점으로 축약된다.
학문에는 목적이 있다. 인류사회를 보다 낫게 만들고 보다 더 만족스럽게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런데 그 자원을 어디서 가져오는가?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활짝 열려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사통팔방 달리고 싶은대로 달릴 수 있고 뛰고 싶은대로 뛸 수 있다. 부정적인 생각은 금물이다. 찾으면 반드시 찾아지게 되어있고 궁하면 반드시 통하게 되어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거침이 없으며 막힘이 없다.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전지전능하다. 즉 인간은 전지전능하다고 믿을 때만 초인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못한다고 생각하던 민족은 망했고, 된다고 생각하는 민족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이다. 지구상의 모든 자연도태는 인간의 생각여하에 좌우된다. 인간은 이 지구에서는 작은 神이다. 神은 그 어떤 존재로부터 방해받지 않는다.
학문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학문이 급진적으로 발달하는 시기도 인간이 神이라는 존재의 굴레를 벗어버릴 때부터이다. 무엇을 두려워하거나 금기사항이 있다는 것은 학문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무한한 자원, 그 무한한 자원을 이용하고 정복하기 위해서는 정복자도 또한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무한한 재질과 기술개발만이 유일한 학문의 지향점이 될 때, 학문은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다른 피조세계는 이 거룩한 것에 복종해야 될 대상으로 남는다. 학문은 드디어 권좌에 앉아있다. 그에게는 못하는 것이 없다. 모든 신비로움이 그 앞에는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학문으로 해명되지 않는 모든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은 그 자체로서 학문의 세계에서는 죄악이요 범법행위이다. 마땅히 추방되어야 될 전염병이다.
학문이 무한을 넘볼 때부터 인간들은 학문이외에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가져서는 안된다. 인간의 지혜는 제2의 경쟁자를 원치 아니한다. 모든 비밀은 항상 인간의 지혜 앞으로 달려나와 그동안 숨어있었던 죄악에 대해 사죄 받기를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학문을 하는 재미이다.
이러한 학문의 팽창에 대해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인간사회에서 역적이요 배반자이다. 학문의 횡포가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은 학문이 [무한]의 세계를 촉할 때부터이다. 각양 학문의 목적은 오직 무한세계에 대한 정복에 있다. 그동안 인간들은 인간세계의 모든 불행은 무한세계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한세계마저 인간이 소유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소유할게 없고 명실공허한 神인으로 세상에 군림하게 된다. 이제 인간은 神이라고 표현되는 무한세계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무한세계도 인간들이 생각한 그 원리와 원칙을 따른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神만이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을 이제는 모든 인간들이 알게 되었다. 무한은 고대인들에게나 무한이지 현대인에게는 유한이다. 따라서 모든 무한이 온전히 인간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해명될 때까지 학문은 계속될 것이다.
결국 학문이란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활동을 말한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의 의문점이 생긴다. 무한의 세계를 정복해야만 인간은 만족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무한의 세계까지 정복해도 인류사회에 문제가 계속 발생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없는 것이 절대세계에 있다고 누가 그렇게 가르쳤는가?
여기서 우리는 학문의 맹목성을 발견하게 된다. 말로는 인류가 필요한 것을 얻고자 계속해서 나아가본다고 하지만 만족이나 완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나아갈 필요성이 있을까? 논리상 타당성을 우리는 찾을 길이 없다. 그렇다면 무한에 대한 학문의 집념은 다른데서 그 이유와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본래의 충동이요 본능이라는 점이다. 神의 고유성까지 찾아 빼앗아 소유하고 싶은 것은 생리현상에서 오는 결핍이 아니라 자기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불치의 증세 때문이다. 분명 이것은 큰 병이다. 인간은 모두 환자이다. 그로 인해 무한에 대한 맹목적 호기심을 발동하고 있다. 배고파서 학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의 것을 엿보고 싶어서 학문한다. 모든 것을 다 알고파서 학문한다. 인간들은 알아도 될 것과 알지 말아야 될 것을 나누는 것조차 간섭받기 싫은 것이다. 앎에 대한 갈증은 분명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 증세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를 인간 내부를 조사해서 밝혀 보려고 한다.
어떤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자.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깨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는 사람이다. 주위 사람이 안타까워서 직장을 구해 주어도 조금만 고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그만두는 타입이다. 애살도 없고 어디 한곳에 열중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보면서 충동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충동이란 그것이 튀어나올 때는 반드시 어떤 목적성과 방향성을 갖는다. 마치 총알이 튀어나올 때는 어느 한 곳에 반드시 박히듯이 말이다. 우리는 이 사람의 충동이 나왔다는데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관심두어야 한다. 그런데 위에 예를 든 사람은 아무 목적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의 방향성을 감지하기 어렵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문제점도 잘 파악이 안된다. 생을 포기한 사람에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 하기 때문이다. 위의 사람은 먹을 것이 없을 경우에도 도둑질하는게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굶어 죽을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모든 행위의 밑바닥에는 충동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충동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게 하는 마음의 자극이다. 그리고 이 자극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 위의 예를 든 것은 현대인들이 종교에 대한 무감각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절대나 神이나 영원이나 무한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없이, 관심두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나쁘다고 이야기 하면 그들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그건 내 전공이 아니예요]라고 말이다. 위의 상습 실업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종교에 대하여 무감각하면서 그 사람이 종교적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적이란 무한을 향한 본능이나 집념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행동이 무의식속에 있는 어떤 神적 요인으로부터 발생했느냐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충동의 방향을 감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위의 예에서 상습 실업자는 무한한 자유에 대한 추구가 그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고 그것이 충동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외부의 간섭 없이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그 심성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달성하느냐 하는 점은 인간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자유를 찾아 나서고 또 어떤 이는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맞추어서 살아간다. 후자는 소극적으로 자기의 본능을 충족시키고 있다.
인간의 외부와 내부가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내통하고 있다면 인간내부의 세계야말로 인간의 공통점을 규명하는 지름길 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이란 남성인 아버지와 여성인 어머니의 합작품으로 만들어진다. 이 말은 곧 남성의 특성과 여성의 특성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와 남자성향, 여자와 여자성향을 구별지어 언급되어야 한다). 남자성향과 여자성향의 결합은 인간의 무의식속에서 한평생 떠나지 않는다. 남자란 앞으로 나서는 경향을 지녔고 여자는 뒤에서 숨어 도와주는 경향을 지녔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어떤 위치에 있든 목적하는 바는 대동소이하다. 남자성향이 많은 사람은 목적한바를 위해 튀어나오는 충동이 보다 적극적이고, 반면 여자성향이 농후한 사람은 목적한바를 소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할 것이다. 문제는 인간들의 무의식 속에는 무엇이 가득한가 하는 점이다.
이점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최초의 인간을 찾아가야 한다. 인류는 그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했던 것을 그 후손들도 추구할 것이고, 그의 아내가 추구했던 것을 여자성향이 있던 모든 이들(사실상 모든 인간들)도 같이 추구할 것이다. 첫 인간이 한스러워했고 안타까워 했던 것이 후손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이러한 원초적 잔재가 바로 前代에서 실시했던 모든 학문적 작업을 그대로 잇게 만드는 연결점이 된다.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원형적 像은 그 시대에 있어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고 단결의 요인이 된다. 그렇지 않고 한시대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무의식이 단지 그 시대에만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면 세대마다 본능이나 신념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으로 볼 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무의식은 항상 동일한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믿고 의지하고 소원하고 있는 것은 유아적 형태의 황금시대이다. 이상적인 사회, 이상적인 세상은 한 인간이 그가 속해 있는 자연에서는 조성될 수 없는 기억들이다.
인간들이 꿈을 꾸어도 그 목표는 황금시대를 찾아 헤매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이런 뜻에서 모든 인간의 무의식은 무언가에 의해 억압되고 있다. 그래서 억압되어 있는 현실적 상황을 돌파하고 황금시대로 회귀하고 싶은 염원이 무의식속에 남아 꿈이나 충동으로 발산된다. 이 충동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소가 바로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곳이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종교]라고 한다. 현대인들은 비종교화 되고 탈신성화를 노리는데 이것은 곧 비인간화가 되는 것으로 억압의 정도가 가중되는 결과만 낳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상한 정신병은 갈수록 극심해지고 충동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때에 비로소 사람들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비인간화가 되었느냐를 깨닫는다. 물론 곧 잊어버리지만.
흔히 미신이라고 몰아 부친 것을 현대인들은 합리적인 언어와 개념으로 전환시켜 그것을 숭배하고 있다. 그것이 태어날 때 부터 간직한 무의식의 세계에서 바라는 것과 과학이라는 힘을 빌려 달성하려는 이상이 서로 화합하지 않고 대치 상태에 놓이게 될 때 이 분열의 증상은 큰 비극을 유발시킨다. 신성력을 멸시하면서 과학이 만들어낸 신통력에 기대를 걸때 무의식은 배반으로 돌아서고 인간은 이중적 항거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전해져 내려오는 무의식세계의 외침이요, 또 하나는 이성이라는 의식세계가 그 동안 축적해놓은 작업에서 분출하는 필연적으로 다음단계를 향한 맹목적 가속력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대결은 종교를 무시하고 과학을 신봉하는 형태로 표면화 되지만 갈등의 폭은 날이 갈수록 심화된다.
그럼 여기서 집단적 무의식이 각 학문의 도달점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돕고 있는가를 알아본다.
2) 각 학문들의 본질
(1) 정치에 관한 학문
정치에 관한 학문(정치학, 경영학, 법학, 행정학)은 옛날 영웅신화를 논리적으로 착색하여 현대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영웅을 고대하는 민중들은 자기 힘으로 이루지 못한 소원을 영웅이 대신 이루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뜻에서 자신들의 권위와 권리를 그에게 다 넘겨준다. 정치의 발달은 한 시대의 영웅을 합법화 시키고 그에 대한 복종을 정당화 시킴으로 神的인 인간으로 개조해 놓고자 등장한 것이다.
창세기 6장에서 영웅적인 종족이 물속으로 완전히 사장되는 현상은 주목할만한데 그들의 출생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성경은 이들의 결합을 비정상적으로 보고 있다. 결국 영웅의 등장이 현실적이라는 말은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 전에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예인 라멕이 영웅행세를 하고 있다. 결국 영웅이란 아담자손의 변질된 형태로서 세상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 神을 대신하며 神처럼 만민 위에 군림하여 만민의 청송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영웅이란 결코 인간 개성의 발달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나타난다. 神에 가까운 인물이 나타나야 옛날 황금시대로의 복귀를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바램에 맞아떨어진 인물로 군중들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시대의 구가는 신성한 힘이 동원되지 아니하면 달성하기가 요원하다. 보다 천재적이며 괴력적이며 탁월한 인상을 풍겨야 한다.
이처럼 영웅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군중들의 집단적 무의식과 맞아떨어질 때 황금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행정학과 기술학은 [초인]만들기를 위한 학문이다. 이것이 가장 잘 발달된 사회가 군대이다. 군대는 모든 행정관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상관을 영웅시하고 절대시하지 않는 한 늘 짜증을 느끼는 사회이다. 거기는 힘이 우상이며 그 힘을 물리적인 완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있는 영웅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심을 이용하고 있다. 쉽게 말해 권위이다. 따라서 권위를 운운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 집단이 무슨 일을 하던 힘이 종교화된 사회라고 보려고 그 권좌에는 인간들의 의해 영웅시되어 있는 인물이 앉아있는 것이다.
영웅상은 사실 모든 인간들 가슴속에 다 들어있다. 권좌에 있는 영웅은 개개인 속에 있는 영웅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리행위에 나서야 할 책무를 지닌다. 때로는 비현실적인 행동도 용납해준다. 민중들의 억압된 요구를 정화시켜 주기만 한다면 별탈이 없다. 그러나 민중들은 그 권좌에 앉은 영웅이 그야말로 비범하고 대담한 영웅적 과업을 하는데 있어 민중들을 희생양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의식적인 욕구 달성에만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전쟁을 치르는 그림을 감상하다가 그 그림에서 나온 화살에 감상자가 박혀 죽는 꼴이 되고 그것을 바라본 옆에 있는 사람이 사람 죽은 것은 고사하고 깔깔대며 더욱 그 그림에 존경심을 보내는 식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철저한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한 영웅주의인 것이 드러나고 그 영웅주의는 보다 욕구가 만족하는 방향으로 파괴적으로 타나난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이 파괴심리는 계속 깊이를 더하면서 확산된다. 보다 멋있는 파괴주의자가 보다 멋있는 영웅이다. 보다 잔인하게, 보다 철저하게 약한자를 탄압하면서 영웅세계는 발전하고 정치세계는 권위를 더해간다. (창세기 4:23-24)
정치의 발달은 분업에 의한 관료제의 발달이라고 규정하고 싶지만 힘이 보다 높은데서 분업에 종사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자의와 타의에 의해 영웅이 되는 대상으로 남는다. 정말 권좌가 단순히 기능직에 불과하다면 왜 일국의 집권자가 죽었을 때 말단 동사무소 직원의 죽음과 다른 차원에서 애도하는가? 무의식중에 군중들이 [그]라는 특별한 존재가 [그]답게 만들어 온 뭔가 특별하고 고유한 능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상실되었다고 안타까워 한다는 증거가 아닐까?그래서 고대 왕들은 죽음을 통한 새로운 탄생을 연출하곤 했다. 과거 그에게서 분출되었던 그 신비로운 힘을 앉아서 소멸시킬 수 없어 그 영웅적인 재활용하는 방침을 세워보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누구 2세라는 명칭으로 붙여지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예외가 아니다. 전임 대통령의 동상을 세운다든지 종교단체의 행정에 있어 영웅시되는 순교자에게 기념비를 세워줌으로 그에게 주어진 꼭 같은 힘을 후대까지 연장시켜 보자는 바램을 표현하고 있다.
가장 완벽하고 무한한 독재를 위하여 오늘도 행정학은 부단히 발전하고 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민중 속에서 영웅의 얼굴은 더욱 커지고 민중의 얼굴에 함몰되면서 민중들은 영웅이라는 成人이 된 기분에 빠진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탁월한 독재자를 기다린다. ‘큰 바위의 얼굴’ 을!
(2) 경제학으로 나타나는 무의식
경제학에서 제일 민감한 문제는 개개인의 욕구를 어떻게 조절하면서 그 욕구를 적절하게 부추겨 생산력을 향상시키느냐에 있다.
재물에 대한 충동이 왜 발생하며 황금시대에서 살던 기억이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전수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단 하나의 열매를 취하는 것 빼놓고는 인간의 욕구에 총족되리만큼 물자는 풍부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탐욕도 만만치 않지만 그 땅은 하나님이 축복이 유효한 지역이기 때문에 이 축복이 인간의 모든 욕구를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난뒤 축복에서 저주로 변한 지역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인간은 생돈을 위한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서도 아담의 후손들은 옛날 축복의 순간들을 지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의 축복 경험과 현재의 저주 경험 사이에서 인간은 심한 좌절감에 젖는다. 理想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이미 알고 있기에 절망의 폭은 한층 심화되는 것이다. 지어버릴 수 없는 체험이 무의식속에서 입을 벌릴 때, 그 욕구를 들어주기 위해 막연하게 축복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축복을 인간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어떤 선까지? 모든 인간이 모두 만족하게 사용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풍부하게 물자를 생산, 축적할 때까지이다.
아담이 땅으로 추방되었을 때, 인간들은 죽음이라는 것이 물자의 결핍이라는 요소로 인해 생명보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삶이 무엇인지 이미 체험한 그들에게 쉽사리 생명을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인이 하나님에게 호소한 것도 기존 생명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창 4:13). 아직 살아있다는 그 축복성은 계속되는 물자의 공급으로 연장될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더 나아가 살긴 살되 보다 행복하게 황금시대를 구가하려면 그 에덴동산 만큼의 풍족한 물자를 축적하면 된다. 재물의 대한 탐욕은 곧 생에 대한 집념의 표현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존재의 인간들은 생의 보존 방법에 이런 무의식적 공통성을 지니게 된다.
경제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기와 인간들의 경제감각은 별개의 문제이다. 경제학이란 근대국가가 필요로 해서 발달되었지만 그전에 보다 효과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체계 있는 물자생산과 교환이 존재해 왔다. 부의 축척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많은 부는 곧 神의 특별한 배려를 받은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같은 형제지간에서도 장남은 부의 관리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거의 전부를 불로소득형태로 재산이 그에게 양도된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은 그 형에게 기붙어 살아가야 한다. 이때 장자의 권한은 대폭 확대되는데 왜냐하면 물자가 많다는 말은 곧 생명이 그 물자에 의해 오랫동안 지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다른 형제들은 평생토록 그 장남에게 예속되는 것이다. 재물에 의한 예속상태는 한 가문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비옥한 영토를 사이에 두고 다른 종족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일단 피배한 종족은 승리한 종족의 노예상태가 되어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그의 목숨을 부지받게 된다.
고대인들에게 부의 축적이 하늘의 축복으로 간주되는 것은 물자의 생산이 노동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비옥한 토지와 적절한 기후가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때맞추어 비를 하늘에게 공급하지 아니하면 수많은 노동력도 무용지물이 된다. 산업이 농업과 목축에 국한되었던 시절이라 철저하게 하늘의 움직임에 의존되었다. 그러나 분배에 있어서는 부의 축적이 하늘의 축복이라고 하면서도 힘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 볼려고 애섰다. 힘을 소유한 자들이 부도 소유하게 된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축복, 즉 부를 쟁취할려고 애섰다. 생산하는 방법을 통한 부의 축적에서 강탈하는 방법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나아가자 국가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보다 더 큰 힘이 보다 더 큰 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넓은 영토와 거기에서 종사할 노동력은 적의 국민들로 채우도록 조치한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부의 승패를 가름하니 무기의 발달을 위해 경제는 또 다시 유용하게 써먹여져야 했다. 군사들에게 제때에 적절한 봉급이 제공되어야 하고 그들이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는 그 전리품의 상당량을 그들 몫으로 떼어야 했고 또 다음 전쟁을 위해 그들의 사기문제도 고려해 주어야 했다.
神들과 神들의 싸움으로 보이는 고대국가의 전쟁에 사실은 따져보면 어느 神이 싸움을 효과적으로 도와주어 경제적으로 윤택케 하느냐와 관련되어 있다. 나라를 부강케 하지 못하는 神은 무능한 神이다. 싸움 잘하는 神이 인간들에게 제일 환영받는 神이다. 심지어 소수 민족내부에서는 큰 나라의 神을 부러워해서 기존의 자기 神을 버리고 그 神을 신봉하는 사태까지 갔다. 싸움 잘하는 신에게 축복을 한번 기대해 보는 것이다(역대하 28:23)
그러면 일단 그렇게 해서 모아놓은 재물은 어떻게 사용되는가? 일단 자기네들에게 승리를 안겨준 神에게 일부 내어놓고는 그 다음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방탕과 사치는 극을 향해 내닫는데 그 재물로서 그들은 무의식 속에 있는 황금시대를 구가하려는 것이다. 그 황금시대에는 일단 노동이 없다. 따라서 막대한 부를 가지고 노동력을 대신할 노예들을 사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분의 시간은 땀흘려 일하는 노동과 전혀 상관없는 취미에 탐닉한다. 놀고 즐기는데 물자는 이동되고 소비된다. 빈번한 건설이 주종을 이루면서 많은 노동력을 외부에서 유입시킨다. 아무 일도 안하고 논다는 것, 그리고 놀게된 위치에 올라와 있다는 것은 옛날 황금시절의 축복을 재현한 것이라고 보고있다. 인간의 모든 행복과 욕구가 다 충족되는 것을 일하지 않고 놀고 있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놀면서도 풍족하게 생명을 장식하게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경제의 최고 목표가 아니고 무엇인가?
현대에 와서 노동시간의 감소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땀흘리면서 노동해야 한다는 저주의 땅의 경제원칙에 정면 도전하여 첫째 어떻게 하면 노동을 하되 땀흘리지 않으면서 노동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게 되었다. 즉 보다 과학적인 접근으로 경제질서를 정립해 보는 것이다. 분업에서 더욱 세분화된 분업으로, 그리고 그 노동조차도 자동기계에 맡겨보는 방법을 착안해 본다. 둘째로 노동시간을 즐기는 시간으로 전환시키면서도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할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는데 경제학은 고개를 돌린다.생산물에 따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쪽에서 요구되는 것만큼 생산해대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와 향락에 쏟는 시간에 비례해서 훨씬 더 많은 재물이 요구되었다.
정확한 수치와 통계가 현대 경제학에서 있어 필수지만 무엇이 있고서야 그 재산들이 의미가 있지 아무 것도 없는 데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이론상으로서는 물자생산을 무한대까지 늘일 수 있지만 현실에 있어 자원은 고갈되어 가고 있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데는 경제학 이론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인간들이 황금시기를 너무 앞당긴 탓일까? 그래서 다시 자연시대로 돌아가야만 하나? 소비하기 위해 생산을 해왔던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소비가 생산을 위축시키고 말았다. 소비를 강제로 억제시키면 생산이나 투자 의욕이 감소된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
여기서 가진 자의 지속적인 소비를 위해 덜 가진 자의 그 만큼 희생을 할시기가 도래했다. 주어야 될 임금을 주지 않음으로 물자를 특정 계급층으로 모여 들어간다. (야고보서 5: 3- 6) 고대국가에서 부를 전쟁을 통해 빼앗듯이 보다 가 진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다. 한정된 물자를 서로가 서로의 소비를 억제하지 못하고 버티면 결국 힘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데 강제적으로 어느 한편의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진해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돈이 있든지 아니면 권력이 있든지 무엇이든지 힘 될만한 것을 소유해야지만 현재 소비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한 국가내의 경제에 한하지 않는다. 이미 세계경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져 있지 아니한 국가가 없을 정도가 되어버린 현대에 와서 보다 힘 될만한 것을 소지하지 않는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지 물자 쟁탈전에서 밀려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무기, 즉 힘이 될만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 담겨있는 황금시절의 경제원리와 가장 유사점이 있는 것이 현대의 경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쉽게 생산하고 여유 있게 소비할 수 있는 기술과 정보이다.
자국이 망하는 줄 알고 국산품을 애용할 만큼 퇴행하는 소비성향을 지닌 국가나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보다 좋은 것, 보다 아름다운 것 편한 것을 제공할 상품이 있다면 거기에 미쳐서 자국의 마지막 남은 자원도 마다하지 않고 갖다 바치는 것이 무의식 속의 명령을 받는 아담의 후손들이다.
소비의 천국, 소비의 에덴동산(백화점) 앞에 사람들이 오골오골 몰려있다. 우리의 무의식이 우리를 멸망의 길로 내다 몬 것이다. 이것이 후퇴를 모르고 전진을 추구해온 경제학의 말로이다.
(3) 자연과학으로 나타나는 무의식
자연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인류의 해결사라고 자칭한다.
철학자들은 말만 많았지 실제로 해놓은 것이 없다. 신학자들과 종교가들은 허풍으로 민중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 점은 인정하지만 그 민중들이 환각에서 깨어나 삶의 현장에 돌아왔을 때, 불편하고 배고프고 육체적으로 아프기는 여전한 것이다. 이러한 고통의 질곡에서 민중들을 해방시켜 준 자들은 꾸준히 자기 일에 몰두해 자연의 진리를 천혜의 축복으로 전환시켜 준 자기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면서 큰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과학의 공적을 생각할 때, 과학에 반대한 그 당시 지도층의 심한 박해를 열거하면 더욱더 존경이 부각된다.
그런데 자연과학자들이 모르는 게 있다. 그것은 자연은 아는데 자연 중에 가장 귀한 자연인 인간을 모른다. 자연은 인간과 연관지어서 논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
과학은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서 행복은 아니다. 행복과 무관한 사실은 엉뚱한 짓거리의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즉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마치 사진작가가 자연 그대로를 촬영했다고 해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마다 행복하거나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사진 밖에서 그대로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질서의 일부를 우리 인간이 이용했다고 해서 자연 전체가 우리 소유가 된 것은 아니다. 자연은 그대로 자연으로 남아 있다. 수력발전을 통해 전기를 얻었지만 여전히 강물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아무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다만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우리가 그 자연의 일부를 이용함으로 말미암아 자연고유의 질서체계를 우리들이 훼방하여 그 영향을 자연이 받아 부정적인 결과가 혹시 초래하지 않나 하는 점이다.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나님으로부터 허락과 명령을 받아 낸 입장에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지만 그것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이고 타락된 상태의 인간이 저지른 행위가 자연의 시스템에 역행하는 행동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이 처음 이 지상에 등장된 취지가 어디 있을까?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神의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서 존재했었다. 자연을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특정한 명령을 제시했는데 고대인들은 이점을 깊이 인식하여 자연을 통해 다시 神과 관계를 나누고자 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자연을 대하는 고대인은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다루었다.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도 이러한 원형이 그대로 기억되어 있다. 특정한 날짜와 장소, 또는 윤리와 위생이라는 명목 하에 행해지는 금기 사항 같은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경외심을 보이는 것이다. 자연은 자연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과의 연관에서 자연을 해명하고자 했다. 자연의 본질을 자연 속에서 찾지 않고자 하는 것은 神의 지침서 역할을 하는 자연의 임무를 무의식적으로 인정해 주는데서 비롯된다(시편 19:1- /창 9:13-16/창1:14)
그런데 자연을 자연 자체로서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고대 헬라에서 비롯되었다. 탈레스는 자연의 근원을[물]로 보았다. 물은 무엇인가? 그것도 자연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스스로 폐쇄적인 시스템으로 축소된 셈이다. 외부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자연을 자연으로 해명하자는 사상이 바로 기존의 신화적 사고방식에서 비로소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폐쇄적 자연관에 입각한 과학주의는 기독교가 전 유럽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잠시 주출했지만 기독교체제가 무너지면서 신본주의 반발이 가져다주는 사상적 공백을 훌륭하게 대체시킬 정신으로 차용된다. 자연은 자연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모토는 사실 교회의 지나친 간섭에서 벗어나는 구실에 불과했다.
과학이란 저절로 발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곧 과학하는 태도로 연결된다. 이점은 과학시대 이전에 세상을 보던 인간들의 마음자세가 뭔가 변화가 생긴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과학이라는 것은 그 활동의 정당함으로 진실성을 인정받는 게 아니라 과학이라는 학문이 본격적으로 처음 세상에 나타나게된 계기와 무슨 연관을 계속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 업적의 가치성도 그 고유한 논리성에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사실을 진리라고 받아주는 사상적 풍토가 조성된 분위기 속에만 진실이 된다.
여기서 조성된 분위기란 일체 초자연적인 관념으로부터 자유롭게 이탈된 사상적 분위기를 말한다. 그래서 사실 과학이 계몽주의 이후에 계속 발달했다는 소리는 그 동안 다시금 관념이 세계사상의 주역으로 재등장한 적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과학의 진리성 여부는 그 과학적 노작이 얼마나 神이 인간들에게 말하고 싶은 여망을 잘 함유하고 있느냐로 판가름된다. 그러나 과학주의의가 주동이 된 그 이후의 세계는 이러한 자연존재의 본래의 취지와는 꼭 정반대의 목적으로 밝혀지곤 하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자연은 그 자연으로서 완전하다는 주장이다. 이점이 후대 과학하는 자의 절대적인 명제요 과학하는 자세와 동기를 부여시키는 사상이다.
귀납적으로 분석하고 비교하고 관찰하고 실험을 합리적으로 수행하는 과학활동 조금도 두려움이나 동요됨이 없이 냉철하게 자연을 요리하고 분해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마찬가지로 실험의 대상이다. 왜 진작 이런 탐구자세가 인류역사에서 일찍이 나타나지 않는가? 또 왜 그것이 서구에서만 적극적인가? 그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확인하기 전에 미리부터 무의식적으로 짐작된 정답과 진리를 전체주의적인 질서 유지책으로 군주가 일방적으로 강요했기 때문이다.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고 인간보다 神이나 신화가 우선되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神의 이름으로 등장한 군주들에게서 모든 진실된 것을 얻고자 했다. 군주들의 지배 이데올르기에 의해 조정된 진리관과 세상관만이 통용되고 나머지 모든 것은 죄악시되는 시대에서 개인이 神의 대리자인 왕을 통하지 않고서 진리를 얻고자 하지 않았다.
무의식 세계에서 자연을 생각하는 것과 의식세계에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 차이가 나기 시작한 것은 전체를 생각하기보다는 개인이 강조되던 시대로 들어와서는 개개인이 자기가 바로 옛날 그 군주의 행세를 하게 된다. 군주의식이란 곧 내가 직접 神으로 부터 타인을 통하지 않고서도 아들이 되는 의식이다. 따라서 내 나름대로 자연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원리를 파악함으로서 자연 위에 군림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神의 자식으로서 말이다. 이점이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화해해서 살려는 동양적 자연관과 차이나는 점이다. 동양사람들은 그들이 神의 아들이 아니라(신의 아들은 군주밖에 없다) 자연의 자식으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의 자식이기에 자연에 순응해서 사는 것이 진리이고 법도이다. 순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서양의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부하는 자연관과 서로 배치되는 사상이다. 서양은 자연을 정복해 나가는 한편, 동양은 자연에 굴복 당하기를 원한다. 동양의 군주들도 자연을 정복하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을 정복하고 싶었다.
이처럼 과거 군주들이 일방적으로 자기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창안된 신화 위의 자연관을 개인주의적 사상이 퍼지고 부터 그 무의식적 사상들의 진위를 의식차원에서 일일이 확인하고 싶어졌다. 여기서부터 과학은 발달한다. 그래서 선입감 없는 관찰이나 분석이나 실험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의 출발은 무엇이든지 일단 기존의 것을 의심하고 들어가야 한다. 아무리 진리처럼 통용된 것이라도 실험과 관찰로서 감각적으로 증명되지 아니하면 진리로서 자격이 박탈당한다. 가장 완벽한 진리는 진리라고 판정하고 동의하는 인간 그 자체이다. 그래서 납득되지 않는 것은 허위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관념세계에 대하여 보이는 물질세계로 부터 공격이 세차게 이루어진다. 보이지 않는 것은 몽땅 다 보이는 물질세계로 환원되어야 된다. 그래서 진리로서 이루어진 세계 속에 인간이 마음놓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도 물질의 바탕 위에 성립된다는 사상은 유물론적인 가치체계를 형성케 한다. 과학은 이제 기가 살았다. 거칠게 없다. 보이지 않는 관념은 전혀 고려할 필요도 없이 과학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과 초자연으로 생성된 우주에서 자9연으로만 된 우주관이 이미 생겼다. 모든 우주의 원리와 질서와 원칙은 그 물질을 상호간의 엮음에 의해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돌아간다. 하나의 엄청난 기계이다. 한번 만들어놓은 시계는 태엽만 감아 놓으면 저절로 움직여 가듯이 말이다. 우주라는 기계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쪼개고 또 쪼개고 분석하고 또 분석하면 언젠가 그 모든 비밀이 만천하에 공개될 날이 온다는 희망에 과학자들을 들뜨게 만들고 더욱더 자기 일에 열중케 했다.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든지 기적이라든지 하는 것은 없다. 모든 우주의 움직임은 다 원인이 있게 마련이며 그 원인제공은 고정되어 있고 결정되어 있다. 우주가 아무리 변화무상 할지라도 자기원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확인해본 결과 무의식에서 말하는 神이나 초자연적 분위기는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것은 무지에서 나온 괜한 공포였다. 또 그런 공포를 성장과정을 통해 의식세계에서 무의식세계로 어릴 때부터 주입되었다고 말한다. 이제는 과학시대이다. 이 말은 곧 유물시대이다. 즉 물질이 스스로 자체함으로 발생하고 성장하고 통합하고 개선하는 능력을 소유했다고 믿는 시대이다. 물질의 발전은 필연적이라고 믿는다. 부단한 운동과 변화와 발전은 물질세계의 고유의 힘에서 도출된다. 이것을 진화론이라고 말하던가!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보면 운동하고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은 비단 자연세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사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역사의 움직임과 경제의 발달도 우연이 끼어 들 자리가 없다. 세계의 본질은 세계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는데 우주 속에 있는 모든 물질들은 상호연관성을 띠고 거대하게 움직여 나간다.
뉴우톤의 만유인력법칙의 발견이후 사상은 기계론적 결정론으로 정립되었다. 현대에 와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가 주창되고 난뒤 필연에서 우연의 세계관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실생활에 직접 연관있는 상식과학은 여전히 기계론적 결정론이고 역사의 흐름은 자체내의 모순을 알아서 대립시키고 투쟁시켜서 소멸시키는 변증법적 원칙을 고수한다고 한다.
과학발전이 사회발전으로, 사회발전이 경제발전으로 기술이전 되면서 이 결정론적 사상은 자연적으로 확산되고 진리로서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활동이나 창작활동이나 마음과 영혼까지로 물질의 운동과 작용의 결과로 파악하려고 덤벼든다. 물질은 곧 에너지요 에너지는 곧 물질화 되기 때문에 모든 우주의 현상은 다 에너지의 법칙에 예속되는데 그 절대적 자연과학의 법칙은 첫째,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요 두 번 째가 패쇄 된 시스템 안에서의 에너지 무질서의 법칙이다.
첫 번 법칙은 사실상 에너지 이외는 없다는 선언이요, 두 번째 법칙은 무한한 우주에서는 에너지가 스스로 알아서 모든 질서를 잡아 준다는 원리이다.
이제 오늘의 과학이 해야될 사명은 이러한 에너지의 체계가 어떻게 통일을 이루고 자기 고유의 기능을 할 수 있게 하는 그 정보가 어떤 유형에서 주어지는가만 알면 된다. 즉 그 동안 너무 쪼개고 분석하는데 많은 신경을 써왔는데 이제부터는 그 원소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고유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가를 연구하면 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자연과학이 발견한 바에 의하면 물질(에너지)은 自存自行한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이 神이라고 불렸던 것이 사실은 에너지였고 물질이었다. 물론 인간의 영혼도 마음작용도 무의식적 모든 충동과 욕구도 에너지운동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질이 스스로 생각하고 물질이 스스로 운동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물질은 살아있는 것이며 죽은 물질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물질은 영원하며 스스로 자체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녔다.
이렇게 볼 때 자연과학자들은 그 동안 자연법칙을 연구하면서 자연이라는 절대자를 만난 셈이다. 의식세계가 자연에서 만날 수 있는 절대자는 항상 눈에 보이는 神이다. 그들은 새로운 神을 창출했다. 그것은 곧 자연이다. 물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이다. 이 세상은 자연만이 존재하며 이 외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한다면 자연법칙은 막대한 지장을 받아야 될 것이다. 그동 안 神의 노여움이라고 여겼던 것도 단지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이상의 의미도 없고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과학시대란 곧 의식만이 인정받는 시대이다. 느껏, 감각되는 것만 진리가 되는 시대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사과가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가? 사고의 과학적 구조식이 사과의 전부인가? 인간의 생을 보다 풍요롭게 안전하게 깨끗하게 편리하기 위한 노력한 과학은 인간을 물질화로 일반화 시켜놓은 이 마당에서 이제 인간자체를 부정해야 되는 입장에 서있다. 인간을 위한 과학이 인간을 소멸시키는 괴물로 변했다. 인간과 자연의 구분마저 사라진다면 인간이 결국 인간을 삼키는 일밖에 더한 것이 있을까?
인간의 물질화는 무의식을 무시하는 인간활동의 결과이다. 이것이 인간이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결과를 두고 볼 때에 눈에 보이는 것과 의식적으로 확인되는 것만을 고수하는 것이 얼마나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을 우리는 실감하게 된다. 과거와 단절된 체 현실에만 국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자연만 상대해서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준다. 과거의 기억은 인간의 한계성이 어디까지인가를 알려준다. 자연이 애초부터 존재했던 기능이 바로 이러한 과학정신의 오만을 역설적으로 폭로시키는데 있었는데 현대 과학자들이 유감없이 이 기능의 대상이 되었다.
진리란 자연을 알고 우주를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된 창조자가 자연 밖에서 자연을 창조했으며 그분의 지속적인 간섭과 다스림을 파악하는 가운데 과학하는 인간 자신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했는가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을 때 그때야 비로소 [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어떤 법칙을 발견했다고 그 자체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그것을 통해 아는 것이 진리이다.
우리는 모두가 원래부터 에덴인이며 아담들이며 자연인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위상이 어떤 경우에 상실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두개의 나무를 사용했고 인간의 타락 이후에는 온 우주가 인간의 번죄로 저주받아 황폐화 되었음을 말해준다. 과학은 바로 이런 진리를 확인해 주는데 그 고유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럴때 인간은 진정 자연을 제대로 이용할 줄 아는 타락 이후의 자연인이다.
(4) 철학으로 나타나는 무의식
철학하는 동기는 어디 있을까? 철학의 목표는 인간사고의 최종 목표가 된다. 이점을 감안해 볼 때 인간은 무엇에서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향하여 몸부림치며 투쟁하는가를 알므로 철학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가장 인간됨됨이를 나타낸다. 인간들은 부단히 움직이고 쉴새없이 활동하는 것이 단순히 생명력의 존재로만 설명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 생명력들이 뭔가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무슨 성취점을 향하여 투쟁하는 형태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 성취점에서 볼 때에 현재로서의 인간은 미완성이며 결핍된 요소가 있는 게 분명하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무의식이 잘 가르쳐주고 있다. 인간은 할 수 있다고 해서 언뜩 나서서 하는 게 아니다. 어떤 가치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그 가치 판단의 최종 기준이 무엇일까? 인간 무의식세계에서 제일 큰 어른이 있다면 그것은 양심이다. 그 양심이 아니다라고 하면 행동에 옮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양심도 압력을 받고 협박을 받아 비양심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그 때 그 양심은 이러한 악의 강압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그 악의 소리를 들어 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생기는 심리적인 불안과 갈등은 자유를 빼앗긴 댓가로서 톡톡히 형벌을 치르는데 의식세계에서 이 형벌을 감소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작전이 펼쳐진다.
이 자유문제가 인류역사 대대로 진정 철학의 유일한 충동으로 작용한다. 본격적으로 철학이 학문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헬라시대다. 그때까지는 각종 신들의 표상아래서 인간은 스스로 굴복했었다. 따라서 철학은 神들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神이 신화와 계시를 통해 전해주던 진리에서 벗어나 인간이 직접 진리 찾기에 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이다. 모든 것부터의 자유이다.
따라서 철학의 모든 동기는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에 있다.
자유를 찾고 또 그 찾은 자유를 유지하고 또 그 자유를 보다 확대하기 위해서 철학자들은 혼신의 노력을 다 경주했다.
인간이 자유로워지려면 뭔가 알아야 한다. 진실 된 것을 알고 진리를 알고 세상 그대로의 참모습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깨닫고 그리고 완전히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세상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 원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던가? 왜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으면서도 자유롭지 않았고 짜증을 부리는가?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유가 제한 받는다고 불평을 하며 불행하다고 인식하는가? 누가 이 인간들에게 위협과 압력을 가하는가? 전능하신 神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능하신 神을 부정하거나 부인하면 그만 아닌가? 무슨 에로사항이 가로놓여 있단 말인가? 누가 인간들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는가? 자유를 외칠게 아니라 조용히 자유로워지면 그만이 아닌가? 도대체 누구하고 자유를 놓고 투쟁하는가?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유투쟁은 무의식적으로 불안정하고 불안한 심리적 상태를 반영해 주는 증거들이다. 인간내면에 비자유적 감각은 인간의 죄의식 때문에 그러하다. 인간의 모든 불안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을 때 느끼는 불안이다.
죄란 무엇인가? 이것이 죄다 아니다, 나쁜 것이다 옳은 것이라는 양심의 판가름은 이미 뭔가 죄에 대하여 알고 있음을 말해준다.
죄의 기준을 새삼스럽게 세울 필요도 없이 인간은 날 때부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감각을 지녔다. 환경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범죄의 기준이 달라질 수는 있으나 죄의식의 유무에는 예외가 없다. 타인에게 감출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무의식까지 속일 수 있는 범죄는 없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범죄는 죄의식이 없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죄의식이 엄연히 존재하여 인간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데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압박해오는 죄의식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러한 죄의식을 우습게 본다는 과단성을 자신이 새로 만들어 내는데서 범죄는 더욱더 확대된다.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기존의 죄의식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묻어버리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 방식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상관과는 전혀 다른 세상관과 철학이 요구된다. 물론 새로운 세상관과 철학은 죄가 다른 의미로 이해되도록 되어 있다. 인간의 행위 이전부터 죄의식을 갖는 그런 본유적 죄감각을 문제삼으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위가 실제로 행사되어진 뒤에 그것에 한정해서 죄악을 논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본유적 죄의식이 포장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노린다.
따라서 이런 죄 개념 체제에서 가장 높은 경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하게 도덕과 윤리를 행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이 자유를 다시 회복하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기에 사람들은 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최초의 철학이 법 형식으로 제공된다. 법의 제정이 인간을 비자유케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가장 자유롭게 한다. 만약 거의 완벽해서 제정된 법정도는 충분히 저축하지 않고 준수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비로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법은 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인으로 되게 하는 필수적인 수단이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인간이 神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려면 神의 법을 대체할 인간의 법을 만들어서 완벽하게 그 법을 준수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최초의 철학은 율법주의이다. 인간조직사회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법이요 규칙이다. 언어가 발생하면서부터 제일 먼저 써먹은 것도 법 만드는 데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조직에 절대적 규칙과 법이 존재하면 그 조직사회는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당성을 얻고 스스로 절대화한다. 그래서 권위가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이럴 때 인간 개개인이 내부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죄의식이 자기가 속해있는 조직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조직사회 안에서만큼은 자유를 누린다. 설사 그 조직사회의 규칙을 어겼다할지라도 상당한 댓가만 치르면 다시 자유인으로 환원된다. 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면 인위적인 법을 철거했다고 가정해 볼 때 인간의 죄의식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누가 인간을 정죄하는가?
이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일단 죄의식의 근원인 무의식세계에 노크를 해야 한다. 무의식세계는 심한 불안과 갈등을 소유한 세계이다. 이 혼돈과 갈등은 무언가 욕구가 억압된 상태로 있음을 나타낸다. 하고자하는 충동과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 세력들이 서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원하는 것이 원하지 않는 충동으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 선과 악 사이에서 악을 선호하는 충동이 우세하다. 여기에서 스스로 죄의식을 느낀다.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게 된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늘 실감한다. 항상 죄에게 패배하는 실존,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다. (창세기 4: 7) 죄의 종이 된 증거가 바로 죄를 알고있음, 그 자체에 있다. 인간이 죄를 아는 순간은 이미 죄안에 놓이게된 연후의 일이다. 죄에 한번 종이 된 이후에는 다시 죄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왜나하면 인간의 창조는 선과 악을 배경으로 해서 창조된 게 아니라 은혜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은 인간에게는 비본래적 요소이다. 처음 인간이 누린 생명은 선과 악 사이에서 조건부로 공급된 것이 아니었다. 에덴동산의 주종을 이루는 각종 과실들은 인간이 선을 행할 때만 주어지는 과실이 아니라 무상으로 공급되던 것이었다. 선과 악의 조건없이 주어지는 생명은 도대에 어떤 내용의 생명인가? 神이 인간을 창조할 때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피조물은 인간뿐이었다. 천사도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금 받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지녔던 생명은 다른 피조물의 생명과 다른 것이었다. 선악을 알 필요 없어도 유지되던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었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영생나무 과실이 허락된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神으로 부터 지음 받았기에 그 하나님과 有關한 생명이다. 인간은 생명에 관해서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유지된다. 뱀을 통해 나타난 마귀가 노린 것은 그 관계를 비정상적인 관계로 전환시켜 그런 상태에서 영생과일을 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뒤틀린 비정상적 관계를 갖도록 인간에게 유도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생나무의 길을 차단함으로 영원히 비정상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것을 사전에 방비하였다.
이처럼 인간이 본래의 인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선과 악으로부터 생명을 찾을 것이 아니라 본래의 여호와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생명을 고대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약속해 주셨다. 단지 사전에 약속된 자들에게만 이 혜택이 돌아간다. 그 이외의 인간들은 선의 의식과 악의 의식에서 해결점 없는 투쟁과 갈등을 지속할 것이다. 그속에서 본래의 은혜로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의 시발점이다.
인간이 이제 알고 있는 것은 선에 대한 지식과 악에 대한 지식이다. 이 선 개념과 악 개념을 적절히 장치하여 거기에서 죄의식이 발생되지 않는 무의식을 만들어낼 필요성이 있다.
최초의 학문적 철학이 국가법철학에 머물렀던 것이 이제는 보다 범위를 확대시켜 우주의 근원과 본질을 규명함으로 선과 악의 대립을 확대된 무한에서 무산시켜 보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철학에서의 죄악이란 곧 무지였다. 우주에 대하여 모르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모르면 곧 죄가 발생된다고 여겼고 죄가 발생되면 인간은 비자유인이 된다. 죄는 불안을 일으키기에 불안이 없는 인간세상을 위해 그들은 한없이 탐구했고 사색한다.
이러한 우주적 신비철학이 돌파구를 찾았다고 기뻐한 것은 기독교성향의 사상이 전 로마에 덮힐 때 부터이다. 인간의 참된 자유는 유일한 절대신을 신봉하면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절대신은 단순히 세상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죄도 자신의 은혜로서 용서할시는 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식문제가 해결되고 神이라서 인간은 불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