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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314-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8강자유게시판에베소서

20080314-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8강

이름 : 오용익(IP:59.3.147.58)

에베소서 제 8강 (이 근호목사, 2008년 03월 14일(b), 서울의존교회)

예수님의 선한일이란, ‘부자냐 가난하냐’, 그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착하냐, 안착하냐’, 그 문제도 아니고, ‘네가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세상은 이미 끝날 세상이고 정죄 받아야 할 세상이니까 정죄 받는 세상과 함께 멸망 받지 말고 그 세상에서 너만은 빠져 나오거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뭘 알아야 되겠어요?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가? 그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내가 그토록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세상에서 크게 되고 싶은데,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은 “네가 너희들만큼은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빼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했으니까,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느냐를 알아야 우리가 세상에 협조 안하고 세상과 함께 살지 않을 수 있잖아요.

‘아, 이래서 세상은 멸망 받았구나. 이래서 우리는 구원 받았구나’라고 하면서 구원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멸망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거부할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가를 이야기해 봅시다. 두 번째 시간은 좀 어렵습니다. 선한일을 하려면 반드시 누가 옆에 있어야 됩니다. 혼자서 볼펜 돌리고 있다고 선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옆 사람에게 볼펜이 필요할 때 그것을 줄 때 선한 일이 됩니다.

이렇게 선한 일이라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선한일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이에 뭐가 형성됩니까? 선한일이 되는 겁니다. 혼자서 도 닦는 것은 선한일이 될수 없지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의 비유를 드는데, 어린이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 보셨지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죽도로 얻어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도록 길바닥에 누워 있을 때 마침 그 길을 어떤 제사장이 가다가 그것을 보고 못본척 그냥 지나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오길 래 강도만난 사람이 도움을 청했지만 그도 못본척 그냥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오는데 그 사람은 평소에 동네 사람들이 믿음 없다고 깔보는 사람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유대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다가와서 피가 난 상처를 닦아주면서 “어디 사십니까?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살았습니다. 제 등에 업히세요.”

그렇게 해서 치료도 해주고 머물 곳을 마련해 주면서 “주인장!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다 해주세요. 제가 다 낼 것이고 만약에 이 돈으로 모자라면 내가 다시 와서 다 갚을테니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세요” 하면서 자기 이름도 안 밝히고 그냥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중에서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 두 번째 사람? 아니지요? 세 번째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할 때 혼자서 사랑, 사랑, 한다고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아무 영문도 이유도 없이 그냥 사랑 받아야 될 사람이 있어요.

만약에 제가 여기 앉아 있는데 아주 못생긴 사람이 와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제가 좋아하겠습니까? 못생겼는데. 화를 내면서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원했는가?”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사랑이 형성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사랑하고 하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사랑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언제 사랑이 형성됩니까? 누가 와도 나는 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는 그런 지경 상태에 놓여 있어야 사랑이 형성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지경에 놓여 있어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아무것도 될 것이 없을 때, 그리고 세상과 더불어서 멸망당해도 싸다, 하는 그것이 확정되었을 때, 가족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고, 심지어 국가에서 일주일 안에 사형을 집행한다고 할 그런 순간, 모든 사람이 다 침 뱉고 돌아설 때에 그때 비로소 뭐가 됩니까?

그때 누군가 나를 구원하면 그때 비로소 나는 뭘 느끼느냐?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지요? 십자가 옆에 달려 있던 누구입니까? 강도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사형 집행되는 사형수였습니다. 그 사형수가 예수님보고 “나를 생각해 달라”고 하니까, 이제 사랑받을 대상이 나타났지요? 그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어디에 있으리라?)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누가 사랑받을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이 담기는 그것을 보고 좋아합니다. 자기 사랑이 사랑 값을 하면서, 사랑이 사랑의 행세를 하면서 그 속에 녹녹하게 담겨 있을 때 그것보다 이 세상에 더 중요한 인물이 없습니다. 강도가 되었든 창녀가 되었든 예수님의 자기의 사랑이 담겨 있는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고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 양이 더 귀하고 좋은 것”(마 18:12,13)입니다.

같이 집에서 농사짓던 부지런한 아들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유산을 다 탕진하고 몰골도 형편없고 몸에서 냄새는 풍기고, 슬리퍼 질질 끌면서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 집에 와서 “아버지, 아들 대우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저 종이나 시켜주시고 밥이나 먹여주면 감사합니다. 아버지, 절 받아 주시겠습니까?” 라고 나오는 그 집나간 그 아들에게 주님께서 “너 같은 인간에게 주려고 내가 금가락지 마련했고, 소를 잡았다”고 하십니다.

“제가 그럴 자격이 됩니까?” “네가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묻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내 사랑이 네 속에 녹녹히 그냥 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특기나 재치나 재롱이나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전히 감하지 아니하고, 녹슬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우리에게 담겨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뭘까요? 그 사랑이 한글자로 “피”입니다. 우리는 피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피는 선지국할 때나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피가 필요하냐, 필요없냐, 그런 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누가 판정한다고요? 내가 판정해서 내가 유리한 것만 골라서 선택합니다. 그게 아니고 정작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우리자신도 몰라요.

그러나 뭔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내가 저것 없이는 못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왔다는 것, 그것도 용서하는 피가 왔다는 것은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 못 받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이 나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지혜 있는 것, 교양 있는 것, 그런 것을 원하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것을 가지고 구원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진짜 어리석은 겁니다.

우리의 주특기를 발휘하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공부 잘하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애들 앞에서 “공부 잘해서 구원 안 된다”는 소리를 하면 부모들은 걱정이 많이 됩니다.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는 애들이 공부를 다 제쳐놓고 놀기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공부 잘하는 것은 공부의 속성이 이미 들어 있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말려도 열심히 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말려도 공부하는 애들이 있고, 하라고 해도 노는 속성이 있는 애들은 놀기 마련인데 그것이 어떤 애이든지 그것이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 부모책임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모를 매개체로 사용해서 그냥 쑥, 하고 낳은 것 뿐입니다. 나쁜 짓 할 때 때려 주시고 좋은 일 할 때 칭찬 해 주시되 그 애 운명에 대해서는 부모가 깊이 관여하지 마세요.

다만 제가 부모한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범이나 잘 보이세요.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도 있는데, 자기생각하기도 바쁜데 자식까지 생각 못합니다. 부부 싸움할 때 애들 안 보는데서 하고, 하더라도 좀 건전한 주제를 가지고 부부싸움을 해 주셔야 됩니다.

“여보, 내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데 힘이 달려서 두 시간을 못 넘기네. 어쩌면 좋아?”

“여보, 걱정하지 마시오. 두 시간 못 넘어도 상관없어.”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해 가면서 부부싸움을 해야지, 엉뚱한 것을 가지고 부부싸움을 하면 안 됩니다. 애들이 다 듣는다고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때 방주를 생각 못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 일을 했습니다. 제가 어느 주일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2+3=5라고 할 때 이것이 맞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2+3=5라는 수학이 기초가 되어서 이것이 물리가 되고, 이 물리를 기초로 해서 인간의 모든 문명, 토목공사와 건축등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2+3이 5도 되고 6도 되면 건물이 무너지는 수가 생겨납니다. 토목공사 할 때 측량하는 사람이 2+3을 6이라고 계산하면 그 건물은 허물어집니다.

그러니까 2+3=5, 이것이 진리가 맞다고 했는데, 이것을 아는 인간들이 왜 홍수심판은 몰랐나 하는 겁니다. 2+3을 아는 지혜가 누적이 되어서 그 지혜로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했지만 그들은 홍수가 올 줄은 몰랐다는 겁니다. 방주를 뚝딱거리면서 만드는 그 소리를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처럼 방주가 있는 것을 봐서 미래의 구원은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방주에 연관된 그 무엇으로만 구원되는 것이 미리 알려지지요. 방주를 만드는 그 망치소리, 그 의미를 알아야 되듯이, 예수님의 손에 박힌 못자국, 옆구리의 창에 찔린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내세운 새 언약이 뭐냐, 내 살이 찢어지고 내 피가 흐르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낸 대안이거든요.

그렇게 할 때, “저 피 없이는 나는 뭘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없으니까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그 깊숙이 들어 있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서 예수님 죽으신 것만이 실체고 진리고 내가 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는 일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그냥 시간 때우기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전 2:2)고 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두껍게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왜 십자가의 피가 흘려져야 되는가,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 나열된 문장들입니다. 모든 문장들이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한일이라는 것은 이웃이 있어야 되고 그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이란 오직 피가 예수님의 사랑의 전부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주님의 사랑을 피로 확정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피로 하나님의 원수된 자, 경건치 않은 자에게 사랑을 확정하셨다”고 합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확증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회의할 때 망치를 두드리잖아요. 결정을 내릴 때 망치를 세 번 두드립니다. 땅, 땅, 땅! 이것이 확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뭐냐?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어요. 그 정도로 너는 죽었다는 겁니다. 죽은 내 목숨 교체하는 겁니다.

“목사님, 우리가 그것은 다 알거든요?” 하시겠죠. 그런데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그 이야기가 맞는데 왜 우리의 24시간 일과는 거기에 관심이 없습니까? 분명히 우리가 성경대로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맞고 성경대로 예수 믿는자가 맞는데 왜 우리는 도통 그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는 채 살아갑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여기에 대한 해답이 약간 복잡하고 깁니다. 그러나 중요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취지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확정하셨는데 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확정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생각이 뭔지를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 사람은 아주 좋은 곳에서 살다가 아주 나쁜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쫓겨난 곳은 주변 환경이 사람들이 아주 살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흉측한 동물들, 가시들, 사람들이 살기에 힘들게 하는 것들이 마구 자라났습니다. 땅을 갈아서 곡식을 심으면 에덴동산처럼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했는데 아무리 밭을 갈고 땅을 갈아도, 잡초가 양분을 다 빼앗아 가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은 ‘힘이 들어도 어찌되었든 이 땅에서 살아야 되겠다’는데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 살면 사는 일이 잘 안되니까 더불어 살고 함께 살려고 합니다. 그것을 부족연맹, 공동체라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이 학교 갈 때 제일 싫어하는 게 뭡니까? 자기들끼리 놀고 자신을 안 넣어줄 때입니다. 그게 참 섭섭합니다.

가인이 죄짓고 난 뒤에 받은 벌이 뭡니까? “너는 이제 혼자 놀아라” 하는 벌을 받았어요. 그래서 가인이 사람들 노는데 자기도 끼워 달라고 하니까 “그럼 넣어줄 테니까 일주일에 한번씩 떡볶이를 사라. 그러면 줄넘기놀이에 넣어줄게”라고 했습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법’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제일 힘센 아이가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고무줄놀이 하는 공동체에서 질서가 유지되려면 법을 지켜야 됩니다. 일주일 만에 한 번씩 떡볶이를 사줘야 됩니다. 이주일에 한번 사면 얻어맞아요. 만약에 그것을 해주지 않으면 고무줄놀이에 끼지 못해요. 여기서 사람들은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남들이 나를 도와주는 일을 할 때 옳은 일을 했고, 남들이 나를 안 도와줄 때는 나쁜 일을 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착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 그 착함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착하게 되면 남들이 나를 도와주니까 내가 살기가 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적고 가족들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나중에 어려움에 처할 때 정말 힘이 들어요. 누구한테 전화 걸 데가 없어요. 그런데 가족들이 많을 때는 자기가 어려움이 처할 때 도움을 청하면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다든지, 어려운 일에 처했는데 아무도 도와줄 이가 없으면 그것처럼 슬픈 것이 또 없어요. 심지어 한강에 빠져 죽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쪽에서 먼저 저 사람을 도와줄 필요가 있지요. 주고받고 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어야 좋은 관계가 유지가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한 일이 뭡니까? 내가 상대방에게 좋은 일을 해주면 저 사람도 나에게 좋은 일을 해주니까, 내가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마당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그게 나만 그렇습니까? 이 세상 전부가 다 그렇습니까? 이 세상 전부가 다 그렇지요?

이런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지요. “저는 줄넘기 놀이 같은 거 끼기 싫거든요. 저는 그냥 혼자 살거거든요.” 그래서 그 애를 모든 친구가 상대를 아예 안 해주면 학교에서 중요한 정보가 있을 때 그 애에게 그 정보를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그 정보를 가지면서 자기들만 행동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소풍날짜가 갑자기 바뀌었는데 그런 것도 안 알려 주고 자기들끼리만 가는 겁니다.

이렇게 학교친구들이 자신을 왕따 시키면서 자기들끼리만 놀 때 두 번 다시 그 학교에 가기가 싫어집니다. 사람들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사람들이 자신을 포근히 감싸주기를 원합니다. “어디 불편한데가 있다든지 혹은 도와드릴 일이 혹시 없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 교회는 날로 부흥되고 “왔나? 가라!” 이러면 왔다가도 가버립니다.

“복음이고 뭐고 나는 사람에 의해서 몸소 느껴지는 사랑을 원하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성경이야기는 싫다”는 것입니다. “나의 아쉬운 것을 당신들이 도와주면 나도 당신들에게 섭하지 않을만큼 헌금할게. 서로 주고 받으면서 상부상조하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상식이 아니냐” 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아까 읽은 고린도전서 11장 32절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고린도전서 11:31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따로 관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뭐라고 했습니까? 서로 도와주고 서로 협조하는 세상이잖아요. 그런 세상을 누가 원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한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원합니까? 보다 많은 친구, 보다 많은 유력한 인사, 보다 많은 힘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들끓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내 주위에 겹겹이 나에게 보탬이 되고, 참모가 될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내가 사는데 보다 풍족하게 여유만만하게 돈걱정 안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고그 소망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또 한사람 두 사람 아부해 가면서 ‘어려울 때 나 좀 도와줘 응? 나도 당신 도와줄 테니까’ 라는 식으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살아보려고 그 애를 다 쓰는데 살아가는 동안에 뭘 생각? 예수 생각? 예수 피? 생각 안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은 기존의 교인들이 다 나 하나에 애정을 보내주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목사님부터, 장로님과 권사님들이 다 앞장서서 나를 도와주기를 기대하고 교회에 옵니다.

예수의 피가 하나님 사랑의 확정이라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외롭고 아플 때 누군가 나를 치료해주고 어려울 때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그런 것을 받기 위해서 왔지 예수의 피 이야기를 들으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물네시간 교회를 오든 직장에 가든, 저 사람이 내가 살아가는데 유리한 사람인지 불리한 사람인지 그것만 체크하면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큰 교회에 가면 내가 약국 경영한다 치면 단골손님이 그만큼 쫙 늘어나게 됩니다. 작은 교회 오면 별로 큰 도움이 안 됩니다. 장가가고 싶고 시집가고 싶을 때도 큰 교회에 가면 처녀 총각이 많아요. 입맛대로 골라잡을 수가 있는데 이 의존교회는 하나가 아쉽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살아가는 일에 어떤 것이 나의 유리한 환경이냐? 그것을 24시간 생각하는 겁니다. 노아 때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인자가 올 때도 마찬가지고.

거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 나에게 도움 될 만한 일을 저쪽에서 베풀어줄 때 그것을 선한 일로 간주하는 겁니다. 저쪽에서 대가가 주어질 때 그 대가성을 주고 받는 것을 선한 일로 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아주 냉혹하게 말합니다. “네가 24시간 무슨 생각을 하든 관계없이 이미 너에게 약속된 지불해야 될 하나님의 축복은 지불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네가 그 따위 생각을 하니까 줄 축복도 안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 좋은 말이죠? 24시간 우리가 그런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도 오는 축복이 중간에서 다시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인간이든 주께서 너무 잘 아십니다. 너무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24시간 내 생각만 하고, “세상 좋구나. 세상이 멸망 좀 안했으면 좋겠다”고 이런 소리를 외치면서 돌아다녀도 영생줄자에게는 기어이 “그것이 바로 죄니라”고 지적해 가면서 피 묻은 손을 우리에게 내 밉니다. “내 손 잡아라!”

“네가 어떤 인간인지를 내가 아는데, 아니까 내가 너보고 고치라는 소리를 안 할게. 성경 몇 장 보고, 기도 몇 시간 하라는 그런 소리를 안 할 테니까 이손을 잡아라! 이 손 잡고 결정적인 순간에 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네 속에 파고들었다. 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미 네 속에 있다”고 합니다. 순간 순간 그것을 깨달을 순간들이 자주 벌어질 겁니다. 왜? 우리와 관계없이 성경말씀대로 우리를 매개체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지 않게 우리 속에서 성경말씀이 뛰어 오르고,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감격 속에서 피어날 때가 문득 문득(1초나 2초쯤) 있습니다. 그게 나와요. 세상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세상에서는 하나의 법이 있는데, 이 법은 영웅이 결정합니다. 영웅이 결정하는 이유는 옛날부터 영웅이라는 것은 일반인보다 더 돌출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이 영웅인데 창세기 10장에 나옵니다.

영웅이라는 것은 신이 능력을 줬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못해내는 것을 특출나게 해 낸다고 보는 겁니다. 그에게 영적인 카리스마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법을 만들 때, 요새법은 국회에서 발의해서 대표로 대통령이 발표합니다만 옛날에는 범상치 않은 영웅이 내뱉은 것이 다 법이 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왜 좋아하느냐 하면, 그렇게 되었기에, 하나님이 영웅을 만들었기에 그가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방법을 한 수 배우고 싶어서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똘마니 노릇을 다 하는 겁니다.

그것도 즐거이 아주 기쁘게 하는 겁니다. 기아 자동차에서 다른 사람은 한 달에 한 대씩 파는데 어떤 신입사원은 하루에 열대를 팝니다. 그는 졸지에 신입사원에서 그 회사의 이사가 됩니다. 그는 이제 자동차만 파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도 팔고 회사에서 강의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야 하루에 열대 팔린다”는 그 소리에 즐거이 동의합니다. 그가 이사 된 것도 마땅하게 여깁니다. 왜? 자기들이 못한 일을 그가 해냈으니까.

부럽다.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되었는가? 바로 그 방법이 그 회사 안에서는 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법 배후에는 뭐가 있는가? 힘이 있어요. 힘이 있는 그 사람을 왕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왕이 되고 싶은가? 우리 모두입니다. 왜냐? 왕이 된 그 인간도 아담의 속성을 가졌고 우리도 아담의 속성을 가졌으니까 우리도 왕이 되고 싶은데 왕의 자리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왕 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살살 왕에게 아부를 합니다.

영웅이라는 것은 영웅을 통해서 신이 축복을 준다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왕, 영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자진해서 왕에게 복종하는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강도만난 사람과 똑같이 도저히 우리 능력으로 이런 시스템을 못 벗어납니다. 절대로.

제가 장담합니다. 못 벗어납니다. “목사님은 주의 종이고 성령 받았으니 가능할걸요?” 아닙니다. 못 벗어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트럭으로 물건을 배송하는데 한번 하면 25만원을 받는답니다. 한주에 세 번을 배송하니까 한주에 75만을 받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새벽 3시에 일어난답니다. 그분이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서 새벽 3시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기를 알고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야, 돈이 이만큼 좋은 줄 해보니 알겠더라.” 돈 이겨낼 장사 없습니다. 십자가고 뭐고 돈 준다고 하면 진리고 뭐고 보던 책 덮고 얼른 달려가게 되는 겁니다. 나이가 80이든 90이든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으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입니까? 재물을 섬긴다는 말입니까? 재물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섬길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더 이상 자신을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바꾸려고 힘쓰고 애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계속 우리가 재물을 섬기고 있어야 예수의 피가 피 값을 합니다. 잘 가르치고 있지요? 참 멋지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입니다. 디모데전서에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 성경대로 우리는 돈을 사랑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더 심한 말을 해 놓았어요.

“네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며 유익을 보리라 하는 인간들아! 네가 뭔데? 말을 그따위로 하면 안 돼지!” 그럼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인가요? “주의 뜻이면 내가 오늘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이렇게 해야 그것이 주의 뜻이다”라고 나와 있더라도 돌아서면 우리는 도시에 가서 돈 벌 생각 합니다.

비록 안개라고 우리를 놀려도, 그래서 우리는 안개에 불과하더라도, 안개가 하는 짓이 뭡니까? 돈벌 궁리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악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어도 “많이 캐라. 많이 묵으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가 다 압니다. 애가 태어나면 주의 뜻대로 잘 양육하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고3 되어서 교회 가려고 하면 엄마가 말립니다. “공부해! 대학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든지 성가대를 하든지 맘대로 하고 지금은 공부해라!” 엄마쪽에서 난리를 칩니다. 예수님의 피라는 것은 이런 사정을 훤-하니 다 아십니다. 그 다 아시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크게 쓰겠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예비하사”라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다 안다. 복음 듣고도 네가 행동을 어떻게 하는지 다 안다.” 알아요. 그것까지 다 아십니다. “예비하사”입니다. 예수님이 가룟유다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가룟유다가 천당 가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가룟유다도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가룟유다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떡 먹을 때 나에게 손을 대는 그것도 알고 손대는 네가 나를 팔아먹을 것이다”라고 다 아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만 되는 이유는 그래야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한일은 과거에 미래와 현재를 초월해서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시간과 관계없습니다.

우리는 현재가 되면 과거는 날아가 버리고 미래가 되면 현재가 날아가 버립니다. 항상 우리는 현재밖에 몰라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앞 뒤까지 다 아십니다. 왜?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성까지 다 아십니다. 다 아시고 내린 결론이 뭐냐? “내가 너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 무슨 뜻입니까? “너는 50년 예수 믿었어도 피 없으면 지옥갈 놈이다.”

“50년 동안 부산으로 서울로 성경을 강의한다고 돌아다녀도 너는 피 없으면 지옥 갈 놈이다.” 그 예수님의 피흘리심이 현실입니까 아니면 내가 꿈꾸는 자아상이 현실입니까? 우리의 자아는 수시로 바뀝니다. “나는 착하게 삽니다.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사는 이런 사람입니다”라는 이것이 다 허구입니다.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매일 바뀝니다. “나는 주의 말씀대로 아이를 잘 키웁니다.” 몰라요. 나중에 자식이 애 먹이면 “아이고, 지질이도 복없는 여자, 지질이도 자식복도 없지”하면서 그 남편을 떠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장담을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장담을 믿지를 않습니다.

성전에 맹세하고 금으로 맹세하고 하늘에 맹세해도 우리의 일체의 맹세를 주님께서는 부도수표로 처리합니다. “백만원짜리 수표로 끊어드리겠습니다” 해도 찢어 버립니다. 세상일은 내 맹세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맹세대로, 예비하심대로 됩니다. 자꾸 우리 자신이 현실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진짜 현실입니까?

어려운 대목을 하나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고 옆에 거울이 있습니다. 이 거울에 비친 이 상이 누구입니까? 내 모습이 빛에 반사되어서 거울에 비치잖아요. 우리는 거울에 바친 나밖에 생각 못해요. “착한 거울아, 착한 거울아!” 자꾸 내가 나보고 하루 종일 대화를 합니다.

우리는 남과 대화하는 것 같은데 남과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 보면서 대화하는데 남을 내 거울의 대용으로 사용해서 맨 날 나와 대화하는 겁니다. “저, 오늘 머리 예쁘게 나왔지요?” 무슨 뜻입니까? 거울대신 남을 대용삼아서 내가 요구하는 대로 대답을 좀 해 달라는 겁니다. 부부 사이에,

“여보, 오늘 뭐 달라진 것 없어?”

“없는데. 자자!”

“잘 봐, 뭐 달라진 것 없어?”

“없는데. 당신은 내 머리 새로 한 것이 안보이나?”

“거울보고 이야기 해라!”

“거울 대신 당신 입으로 듣고 싶다.”

왜? 거울은 하나가 될 수 없지만 남편은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자기 하소연을 하면서 만납니다. 목사로서 설교하면서 참 답답한 것은 자기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없을 때 참 답답하죠. 심지어 한명을 두고 설교하고. 물론 한명도 없을 때는 설교를 안 합니다만. 설교 할지도 모르겠다. 미지의 대상을 향하여(?)

항상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원해요. 나머지는 다 삭제하고. 그러니 부부가 한 몸이라고 해도 평생 남입니다. ‘남’에서 점 하나 빼버리면 ‘님’이 되고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 되어 버리잖아요.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남이 되는 장난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웃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아~~~~인생」(♬도로남)

주님께서는 그 자아속에 성령을 통해서 내가 비치는 거울속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담아 놓으니까 화들짝 놀래 버립니다. “어? 어떤 분이 피흘리고 저주받고 벌을 받고 있네. 저분이 누구지? 저분은 내가 가진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예수님이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사람들이 “이 근호 목사는 미쳤구나”라고 하는데 맞습니다, 제가 일단 미쳤다고 인정을 하고.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안 죽었습니까? 어떤 청년이 지금 죽었지요? 이 00 4번타자 전 프로야구선수가 한강에 투신해서 죽은 거 맞잖아요. 그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도 죽었어요.

이 00은 나하고 관계없지만 예수님은 관계있어야 됩니다. 왜? 하나님의 예언대로 된 분은 그분밖에 없습니다. 이 근호도 예언되어 있지만 부스러기 예언이고 진짜 모든 예언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새 언약, “내피와 내 살”, 거기에 모든 천군천사들이 몰입해서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진짜 현실은 맨 날 나를 이야기 하는 그 ‘나’가 현실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하는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유일하게 우리가 믿어야 되고 섬겨야 될, 장차 구름타고 오실 심판주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당부합니다. 제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판단하고 심판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심판할 자격도 안 되고 심판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심판은 예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예수 피를 믿으면 다시는 죄에 대해서 묻지 아니하시고 의인이라 해준다고 고린도 후서 5장에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맨 날 24시간 움직이는 내 몸만 의식하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남이었고 상관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십자가와 대비시키고 대조시켜주시고, 그분의 피 흘리신 이유를 알려주시니 이제부터는 날 위해서 살지 말고 날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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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9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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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