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대구강의11-핍박받는선지자2
07대구강의11-핍박받는선지자2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7 대구강의 11 - 지옥의 하나님 21
07,09,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핍박받는 선지자 2 !!
이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재 '지옥의 하나님' 68페이지에 있는 '핍박받는 선지자'를 보도록 하자. 방학하기 전에도 했지 싶은데 말이다.
** 하나님은 왕이시지만 자기 백성들이 왕 되심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그 왕께서 오셔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운명을 지니시게 된다.
◈ 하나님의 왕 되심 -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되어야 !!
다윗 같은 경우에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니 왕이라고 해도 말이 되는데, 그러나 다윗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왕이시다" 라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가 왕이라는 것을 다윗을 통해서도 일부 보여주었지만, 이렇게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라는 것이다.
◈ 우상 - 희생당함이 없어요 !!
그런데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까, 조금 전에 말한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죽는 정보가 전혀 담겨있지를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죽음이 없다면, 그런 하나님은 우상이라는 말이다. 또한 이러한 우상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속에서 피어나고 또 피어나고 말이다.
◈ 통합이냐, 갈라짐이냐 !!
불교의 경우에도 보면, 절대자, 즉 신을 상대하고, 무아세계, 즉 열반의 세계를 이야기할 때, 자기의 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자연이 있다" 라고 하면, 이 자연 속에서 자기가 어떻게 통합을 할 것이지, 즉 통합의 문제인데, 괴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죄로 인해서 갈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갈라졌다고 해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결합의 문제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인데, 물론 우상숭배이고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인간들이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다윗을 통해서, 그리고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구원되어야 할 자기 백성을 위해서 억울하게 희생된 모습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참된 왕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희생의 모습이 없다면 말이다.
◈ 왕 - ①힘으로 통치, ②희생으로 통치 !!
그러므로 왕은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그냥 힘으로 통치하는 왕이 있고, 희생자, 혹은 대속물로서의 왕이 말이다. 이 두 가지의 왕 중에서 어느 왕이 과연 옳은 왕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경우를 왕이라고 하려면, 우리 인간이 자기 죄로부터 출발을 해야, 그 죄를 통해서 성립이 되고 나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1번을 택할 수밖에 없고 말이다.
이 두 가지 왕 중에서 어느 왕이 과연 제대로 된 왕이냐는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즉 희생의 코스로 가는 것은 선지자의 경우이고, 통치 쪽으로 가는 것은 왕의 코스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왕의 코스는 박살이 나고, 결국 선지자 코스를 통해서 메시야가, 즉 진정한 왕이 오게 된다는 것이다.
◈ 선지자 - 너 같은 놈이 왕이라니 !!
그것은 선지자가 왕이라는 것이 아니라, 왕을 세워놓고는 계속해서 "너는 왕이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부정적인 왕이 계속해서 쫙 깔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노함으로 너희에게 왕을 주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호 13:11)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총신에 있는 어느 교수는 이 점을 상당히 강조하는데, "분노함으로 왕을 주었다" 라는 대목을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왕을 있는 것을 두고, 즉 자기들은 통치자가 있으니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도 여기에 동의하는데, 사무엘상 8장에 보면,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뭐라고 하시는가? 똑같은 말인데, "너희들이 얼마나 나를 싫어하는지 알겠다. 아무튼 허락한다" 라고 하는데, 분노하심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 왕이 얼마나 너희를 힘들게 하는지 알아라" 라는 쪽이라는 것이다.
(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진도를 좀 나가야 되는데, 교재 69페이지에 있는 마태복음 5장 11절과 12절을 보자.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욕과 핍박을 받아야 기쁨과 즐거움이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그 구조가 좀 쉽게 이해가 되지 싶은데, 즉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그 바깥에 무슨 체계가 잡혀야 하는고 하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 라고 할 때, 그렇게 되어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기 주체가 파악이 된다는 것이다.
선지자가 그냥 산 위에서 도를 닦는다고 해서 선지자가 아니라, 욕하고 핍박을 당해야만 되는 상황 속에 일부러 하나님께서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욕을 듣고 핍박을 당하도록 하는 가운데, 그들과 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얽혀있다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 방식 외에 다른 구원방식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언약적인 구원방식인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다윗언약이고 말이다.
◈ 욥이 의인인 기준은 무엇인가?
제가 십자가 마을 수련회에서 욥기를 강의하면서 했는데, 욥이 아브라함 시대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전에는 모세언약이란 책이 없었는데, 즉 그런 계시가 없었는데, 그런데 욥기 1장에 보면, "우스 땅에 사는 욥은 당대에 의인이다" 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이다. 노아도 그렇고 말이다.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렇다면 무엇이 의인인가? 십계명이라도 있어서, "십계명에 비추어보니 당신은 의인이네" 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 교과서이든 뭐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기준이 되는 텍스트가 없는데 무엇이 의인이냐는 말이다. 의인이든 죄인이든, 그런 판정을 내릴 만한 기준점이 없는데 말이다.
노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노아를 당대에 의인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백부장 고넬료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예수님을 모르는데 하나님을 위하여 경건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구제와 기도로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세계를 통해서 선과 악을 뽑아내었다는 것이다.
(행 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행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선지자 - 공짜를 공짜로 !!
이것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지난 수련회 때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미 잊어버렸다고 보고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즉 그 은혜가 공짜로 받은 은혜이기에, 그래서 공짜로 받은 은혜를 공짜로 베풀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 당시의 선지자라는 것이다.
◈ 죄 - 공짜은혜를 자기 노력의 대가로 !!
그런데 자기가 공짜로 받은 은혜를 마치 자기가 노력해서 취득한 것처럼, 그 중간에 '자아' 라고 하는 고정점을 집어넣어 버리면, 그렇게 되면 은혜가 '턱' 하니 막혀서, 은혜가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전달되어야 하는데 중간에 그만 막혀 가지고서, 자신의 노동이 되고 자신의 업적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죄' 이고 말이다.
그것을 '엘 샤다이' 라고 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저 주시는 은혜를 표출하지 못하고 자기의 자아성이 부각되어버리면, 그것이 걸림이 되고 장애를 일으켜서 그만 전압(?)이 생겨버리고, 그렇게 되면 신의 은총이 막혀버린다는 것이다.
◈ 고대 - 인간이 아닌 신을 담아야 올바른 사회 !!
이런 것은 신화를 공부하면 알 수 있는데, 철학에서는 신화를 잘 공부하지 않고 인류학을 보면 따로 나오는데, 그 당시 세대가 신을 가장 그대로 담고 있으면 제대로 된 올바른 세대이고, 거기에 신 대신 인간이 담겨있으면 나쁜 세대라는 것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 신화의 세계에서는 흔히 종교의 세계라고 말은 하는데, 이 종교의 세계를 제사를 지내고 하는 제사의 방법과 의식과 같은 것에 치중하는데, 하지만 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그런 것이 우선이 아니고, 그런 것은 신을 표현하다가 보니 된 것이고, 고대인들의 의식은 무엇인고 하니까, 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면 좋은 사회이고, 인간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 나쁜 사회라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나 우리나라의 왕들을 보면, 20세기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왕의 등극식을 보게 되면 영광을 신에게 돌리는데, 자기를 신의 중매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신이 아니고 신이 시키는 데로 할뿐이라는 것이다. 시편에 나오는 왕의 등극식을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말이다.
◈ 모빙켈이 말하는 시편은?
모빙켈 같은 구약학자는 주장하기를, 시편이라는 것은 그 당시 고대근동지방의 왕이 등극할 때 신의 아들로 신분이 상승하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의 메시야관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과거 출애굽을 인도한 그 '엘샤다이' 하나님과, 지금 왕으로 세워진 다윗과 연결시켜서, 그래서 다윗 때에 와서 '여호와' 라는 새로운 전통이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재편집된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지금 구약학자들은 다 그렇게 보는데, 아무튼 나라 자체가 되려면 왕이 있어야 하는데, 즉 하나님의 왕국이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파견한 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왕을 세운다고 해서 왕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파견한 왕이 말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되면 인간은 빠지고, 그동안 은혜와 은혜로 연결된 것이, 그렇게 액체로 된 은혜가 굳어져서 고형화가 되는데, 즉 형체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 형체가 곧 법인데, 이 법을 전공한 사람들은 아는데, 이 법이 있기 이전에 관습이 있는데, 이 관습이 법이 되어서 관습법이 되고 말이다.
◈ 법 - 관습과 관행이 먼저 !!
이 관습은 다른 말로 하자면 '관행' 이라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공무원들이 건축업자에게 돈을 받는 것을 뇌물로, 즉 범죄로 생각하지 않고 관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행을 거부하면 공사가 수주가 되지 않는데, 그래서 하는 말이 "어디, 초짜가 와서 설치는가. 관행인데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강사가 전임강사로 진급하려고 할 때, 학장에게 자동차를 사주고 봉투를 건네주고 하는데, 그런 것을 관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는 말이 "나는 결코 돈을 주고서 교수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라고 하면, "아니, 이것이 어디에서 관행화 된 관습법을 무시하노. 그러면 너는 한 평생 만년 시간강사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장로 - 누적된 관행을 많이 알기에 !!
이렇게 사회에서는 관행이 법이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법을 만드는데, 그리고 그 구성원에서 오래된 사람을 장로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이가 많고 오래 살았다는 것은 누적된 관행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법은 특수한 경우에만 법으로 만들어놓고, 나머지 세부적인 것은 관행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하려고 하면 골치가 아파서 안 되는데, 그래서 법과 법 사이에 있는 것은 모두 관행으로 해결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관행을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장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는데, 그러니 나이가 많은 연장자가 그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장로가 법을 정하는 입법자가, 즉 법의 제정자가 된다는 것이다.
◈ 칸트가 말하는 법 !!
나중에 칸트철학에 보면, 초월세계에 있던 초이성적인 것, 그것이 곧 자유인데, 이 자유가 인간에게 들어와서 자아를 만나면서 자아 속의 자유로 바뀐다는 것이다. 자아 속의 자유로 말이다. 방금 제가 말한 것은 인간 밖의 사회에 대한 관습인데, 초월세계, 즉 자유가 있는 세계에서 자아 속에 들어오고, 이 자아는 물질로 되어있으니, 이 자유와 자아의 만남에서 스스로 입법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법의 제정자가 말이다.
여기에서 규칙은 이성이 담당하고, 이 이성이 지성에게 명령을 내리게 되면, 지성은 경험을 수정하게 되는데, 즉 경험을 규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경험에 의해서 새로운 형식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구성주의' 라고 하고 말이다. 사회에서 모든 것을 자기 나름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자아에 충성을 하는데, 왜냐하면 이 자아는 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결합된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자아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 동일성' 이라고 하는, 즉 고정적으로 유지되는 자아가 있고, 두 번째로는 항상 수시로 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말이다. 즉 이러한 법의 제정자가 있다는 것이다.
제가 여기서 자아를 이야기한 것은, 참 이번에 하진 씨가 피히테를 잘 정리해주어서 이번 광주강의 때 활용을 요긴하게 했는데, 인간은 사회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순종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보다 자아가 우선이란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는 동의를 하는데, 그냥 아무 사회에나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있는 사회인데, 그것과 자기 속에 있는 법이 일치될 때 자발적으로 순응해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 조직이 좋아. 사회가 마음에 들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욥기 - 관행이 고형화되면서 !!
이러한 법에 대해서 욥기의 경우에는, 즉 욥기처럼 율법이 없는 상태에서는 관행이 고형화되면서, 즉 구체적으로 되면서 법의 역할을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관행인가? 신의 은혜가 구체화되면서, 좀더 국가적이 되면 신의 은혜의 대리자가 바로 왕인데, 그래서 왕이 있으면 국가는 있는 것이고, 그리고 법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모세의 법에 의해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왕이시다" 라는 것을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통해서, "아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고 우리는 그 백성이네" 라는 것이 성립되는데, 이것을 '계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과 백성 사이의 계약 말이다.
우리가 이러한 구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조금은 억지로 법을 만든 것 같은데, 그러나 그 당시 모든 사회에서는 이런 법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데, 오히려 법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즉 신이 있다고 하면, 이런 신의 법이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법에는 기꺼이 자아가 순응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참 선지자는 언제나 또라이 !!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미친놈이 되고 또라이가 되는 것은 누구인고 하니, 그들이 바로 참 선지자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보니, "야, 이사야 정말 대단하네" 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인기는커녕 그야말로 또라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나라는 망해야 됩니다. 또 포로로 잡혀가야 합니다. 하지만 울면서 가도 웃으면서 돌아올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웃기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이냐는 것이다.
◈ 또라이를 보고 싶어요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날 이 시대에서 물론 그런 것을 통해서 사람을 좋게 하지 않는, 물론 역으로 그런 것을 통해서 목회에 성공하려는 야바위꾼이 아니라, 정말이지 사람을 좋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자기 목숨을 내어놓더라도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참된 선지자들이, 분명하게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귀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살고있다는 소식이 어디에서라도 들린다면, 천리만리든 한밤중이든 아니든 전혀 상관없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고, 그냥 철이 없어서 바른 소리를 해대는 부교역자들 말고 말이다.
진짜 의식이 있어서, 비록 부교역자라도 당회장이 엉뚱한 소리를 하면 '씨익' 웃으면서 올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말이다. "부역자 같은 소리하네. 나는 엄연한 주의 종이야" 라고 하는 자유성을 가지고서, 당회장이든 장로든 겁을 내지 않고 진리를 외칠 수 있는 젊은 교역자들 말이다. 교회를 마구 가지고 놀 정도로 자유로운 말이다. (교회를??)
정말이지 그런 분들을 만나기가 힘드는데, 마누라가 볶아대지, 교인들은 압력을 가하지, 아이는 점점 커가지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수들의 세계가 깨끗한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처제가 얼마나 곤란한 가운데 있는지 말이다. 자기 학장 계파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엄청난 핍박을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마태복음 5장 11절과 12절을 보자.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예수님 왈, 내가 니 인생 조져줄게 !!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숙제(?)인데, 인간들의 힘으로는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핍박을 당하고 욕을 얻어먹는 인간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그때 엄청 좋아하라는 말이다. 주께서 이렇게 하셔서 구원받았으니,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내 인생 주께서 조져놓았구나.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지자의 내막에 대해서 교재 68페이지 이하에 계속해서 나오는데, 여기서 교재에 69페이지에 있는 미가서 6장 6절에서 8절을 보자.
(미 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미 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설마, 미가 선지자가 예배까지도 !!
미가 선지자에 대해서, 미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여기에 대해서 천주교나 개신교 구약신학자들 사이에 말이 많은데, 책들도 많이 나와있고 말이다. 그들이 주저주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미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설마 그 당시 제사나 예배까지 부정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 천주교 - 예배도 드리고, 공의도 행하고 !!
주로 천주교 신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데, 여기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일천번제나 알만번제가 제사 횟수가 아니라 한꺼번에 엄청난 제물을 드리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무튼 미가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그 당시 제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도 원하시고, 그리고 제사도 원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그 마음가짐을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 이 제사라는 것을, 즉 예배를 결코 놓치지 않으려고 하기에 말이다.
◈ 개신교 - 과도기적 상황으로 !!
하지만 이에 반해 개신교 신학자들 과도기적 위치에 있다고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제사, 즉 예배를 통해서 소통하던 방식을 바꾸어서, 그러니 이제는 그러한 예배방식이 와해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신약성경 히브리서에서 찾는데, 성경에서 약속이 그 흐름이 한꺼번에 바로 바뀌는 것은 없고, 서서히 바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영화의 경우에 그 필름이 1초에 24장인가 지나가는데, 그 필름 하나하나는 모두 끊어져 있지만, 그것을 연결해서 돌려버리면 사람이 움직이고 말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동체, 즉 움직이는 물체가 되는데, 그것처럼 성경자체가 영화가 되려면 하나 하나씩 고정점으로 잡아버리면 단절되어있지만, 그런데 그것을 단절되었다고 우기지를 말고 전체적인 과도기적 흐름 가운데서, 과연 무엇을 소멸시키기 위한 어떤 일보진전이지, 그런 쪽으로 해석하자는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의 일부가 그런 주장을 한다는 말이다.
◈ 예배가 아닌 인간의 삶 !!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미가가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배 자체에 대한 거부라는 것이다. 예배의 행함에 대해서 다른 방식을 제시하면서, 그러니 이제 이 예배는 그만 철거하고 다른 소통의 방식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 다른 방식이 바로 '인간의 삶' 인데, 그렇다면 이 인간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야 하는가? 그 당시에는 미가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 선지자 자체가 하나의 계시가 되어서 !!
그런데 이 미가에 어디에 저촉을 받는고 하니 다윗언약인데, 이것이 미가와 그 뒤의 에스겔에도 나오는데, "다윗의 자손이 올 것이다" 라는 것을 예비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다윗언약에 저촉을 받는다는 것은, 미가 자체가 다윗은 아닌데, 물론 다윗의 자손도 아니고 말이다. 미가 선지자는 그냥 광야에서 외치는 하나의 소리인데, 여기서 이 '소리' 라는 말은 좀 어렵고, 미가 선지자 자체가 하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삶 자체가 계시가 되는데, 사도바울의 다메섹 사건이 계시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계시가 아닌데, 그러나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하나의 계시로서, 즉 하나님의 계시로서 선지자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가 움직이는 성경책이라는 것이다.
◈ 모세율법의 완성은 러브 !!
그러면 그 당시에 있던 모세율법은 무엇인가? 모세율법의 완성태가 그 당시의 선지자의 삶을 통해서 새록새록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된 모습으로 말이다. 그 예로서, 선지자 호세아의 경우에, 자기 마누라가 바람이 났을 때 값을 주고 데리고 오는데, 그것은 율법에 있는 모든 십계명을 어떻게 완성하는지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탁' 하고 깨어보면 그 안에 율법의 완성이 들어있는데, 반대로 율법의 완성을 모아놓으면 사랑이 되고 말이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 사랑이 모든 것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랑으로 행하고 믿으면 되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랑을 가지고서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말이 안 된다는 말이다.
◈ 그러니 사랑으로 양치질을 ??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명령을 지키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지켰다' 라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는 그러한 것을 보면서 굉장히 분노를 느끼는데, 만약에 "아침에 양치질을 합시다" 라고 성경에 나온다면, 그렇다면 그 완성이 무엇인가? 양치질을 두 번하고 세 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사랑으로 양치질을 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과연 맞는 말인가?
◈ 그렇다면 예배도 사랑으로 ??
지금 이 미가서에서 하나님의 구원방법이 예배가 아닌 사랑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사랑으로 예배를 드리자"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만 하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아니, 십자가 강도는 예배를 몇 번 드렸는가? 그것은 특수한 경우인가?
물론 "삶이 예배이다" 라는 것은 말이 되는데, 교회에 나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예배라고 하면 말이 되는데, "예배를 드립시다" 라고 말하면서, 예배인 것과 예배가 아닌 것을 구분해서, 예배 바깥에는 예배가 아니고 예배 안으로 들어가야 예배라고 이야기해버리면, 그 자체가 법이 되고 규정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예배를 드립시다" 라고 하는 법을 미흡하게 지키게 되면, 어떤 오류에 빠지는고 하니까, 분명히 자기는 사랑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그런데 그 예배를 드린 것이 미흡하게 되니까, 결국에는 '덜 사랑', '못 사랑', '안 사랑'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처음부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 말의 뜻을 아시겠지요? 이미 완성이 담겨있는데, 그런데 그 완성된 것으로 예배를 드려보니 완성된 것이 완성이 아닌 것으로 들통이 나게 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매직펜이 있는데, 이 매직펜을 물 속에 담으니 조금은 희미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매직펜이 아닌가? 희미하게 보인다고 해서 말이다.
◈ 사랑을 '꽉' 깨물면, 제사를 온전히 드렸음 !!
레위기에 있는 "제사를 드리자" 라는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가? 분명히 사랑인데, 이렇게 사랑이 완성이라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해도, 그 사랑을 '탁' 하고 깨트려보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까, "제사를 온전히 드렸음"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는데,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 거룩한 산 제사의 완성이 무엇인가? 사랑이란 말이다. 사랑 안에는 심판이 없으니 말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라
만약에 그냥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예배를 잘 드리고 못 드리는 것에 따라서 미흡과 완성의 차이가 나는데, 그러면 거기에 심판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왜 완전하지 못했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검사를 맡는데, 그래서 제대로 하지 못한 만큼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심판이 없는데, 그러니 모순이 생긴다는 것이다.
◈ 주체는 없고, 관행에 불과 !!
이것을 다시 이야기해보자면, 자아가, 즉 주체가 있다는 것은 일종의 관행인데, 원래 주체는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주체는 없는데 말을 하다보니, 말을 하는 관행상 주어를 따로 설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배부르다' 라고 하면, '누가?' 라고 할 것이고, 그러면 '내가' 라고 하는데, 즉 "꼭 그렇게 '내가' 라고 해야 되겠냐? 척하면 다 알아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배고프다' 라는 것이 우선이고 그 뒤에 '내가' 라는 주어는 관행상 붙어서 따라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는 사건이 주어질 때마다 그때그때 뒤에 따라와서 붙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개의 경우에 개가 태어날 때 이름이 있는가? 사람이 편의상 이름을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개는 사람이 집에서 키우니까 이름을 짓는 것이지, 동해바다에 있는 오징어에 이름을 모두 붙이는가? "1번 오징어는 일근호, 2번 오징어 이근호" 라는 식으로 말이다. 포항의 죽도시장에 가보면, 그냥 한꺼번에 '오징어 5톤에 얼마' 라고 처리하지, "어이, 김 오징어 나와. 그 다음에 박 오징어 대기하고"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오징어가 잡히는 것 자체가 사건이고, 그것을 또한 판다는 사건만 있으면 되지, 오징어 각각의 이름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중요한 건 누구 이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에도 이름이 필요 없는데, 오로지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지 우리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이름이 X가 되었던 Y가 되었던,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름은 전혀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는데,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리스도' 라는 이름이 반석 위에 새겨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반드시 자기 이름일 필요가 없는데, 자기 이름으로 기도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내' 이름을 가지고서, '내가' 배부르게 하고, '내가' 배고프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라는 것이 항상 들어가는데, 그것은 관행상 그렇다는 말이다.
◈ 사랑이란 사건이 우리에게 터지면 !!
사랑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랑이라는 사건이 터져 버리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사랑이라는 사건이 곧 율법의 완성인데, 이렇게 율법의 완성이 터져 버리면, "내가 지켰다" 라는 게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빠져버리는데, 그런데도 그런 사랑 속에서 있으면서 또 자기가 무엇을 한다고 나서면 안 되고, 이 사랑이 어떤 사건을 만드는데, 로마서 12장의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한마디 한마디가 바로 우리에게 사랑의 사건으로서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야, 변화를 받아야지. 이 세대를 본받으면 안 되지. 새롭게 되어야지" 라는 것이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렇게 살 거야" 라고 다짐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지키고 노력하는 차원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 말씀이 사랑 덩어리로 찾아오니 그 말씀에 우리 속에서 폭발해서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 라는 말씀자체가 사랑으로 다가올 때, 그 사랑이 자기에게 팍팍 터지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나' 라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렸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나'를 다시 살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되살려버리면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나'와 주님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나'는 법을 또 따로 만들게 되고 말이다.
◈ 욥이 왜 삐졌는가?
그것이 바로 욥기에서 욥이 낯선 고난을 받게 되는 이유가 되는데, 욥은 생각하기를, 자기는 은혜를 알아서 "주신 자도 하나님이고, 거두신 자도 하나님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왜 자기에게 그러한 고난을 주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욥기를 보면 '나' 와 '왜' 라는 말이 그 얼마나 많은지, 계속해서 욥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하는데, 나중에 할 말이 없어지니 입을 막고 재를 뒤집어쓴다는 것이다.
지금 선지자들도 이 정도까지는 알지 못하는데, 선지자들도 완전히 자아를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에스겔 같은 경우에, "인자야 - 예 - 인자야 이것을 좀 해라 - 예" 라고 하면서 인자(人子)와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희미하나마 좀 남아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처럼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정도는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아직 구약시대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도 주도권이 하늘의 임금님에게 있는데, 즉 여호와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것을 쥐고, 이것이 다윗언약인데, 이 다윗언약은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고난받는 임금으로 이 땅에 와서, 힘을 내세우는 이 땅의 임금과 충돌을 일으키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선지자를 파견해서 집어넣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70페이지를 보자.
** [왕들의 무지] - 솔로몬은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다. 이때부터 왕들의 세속화 정치화에 대항하는 선지자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은 서서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
특히 북쪽 이스라엘이 심한데, 사실상 남쪽 북쪽 할 것이 다 동일하지만, 르호보암 같은 경우를 보면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71페이지를 보자.
**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진 이유도 지파 간의 세력다툼에서 비롯된다. 신앙을 제대로 지키기 위함도 아니고 또한 다윗에게 약속한 그 약속 안에서 살고자 함도 아니다.
◈ 약속을 우리 힘으로 !!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진 무엇인가? 약속을 인간의 힘으로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테두리를 지키려고 하는데, 종교 테두리, 영토 테두리, 왕이라는 테두리, 국가라는 주권 테두리를 말이다. 즉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약속은 자기가 지키고 말이다. 그런데 다윗언약은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는데, 즉 자기가 지킨다는 인간으로부터 핍박받는 형태로,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과도기적으로 신약시대로 넘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 남쪽에 있는 유다도 왕이 오직 힘을 이용해 백성을 자기 종처럼 부리고자 하는 이방나라의 지배체제를 그대로 도입한 데서 문제가 일어났다.
서서히 왕이 우상숭배자로 등장을 하는데, 즉 힘에 의한 다스림이라는 것이다. 제가 이 책에서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성경내용을 다룬 것 말고 이 책의 2부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의 등장'에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목사들이 소위 목회를 한답시고 힘으로 목회를 하는 그런 방식이 이미 성경에 다 나와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 마치 전에 히브리인들 통치하던 애굽의 바로 왕과 같은 위치에서 백성들을 지배하고자 했다.
◈ 왜 애굽처럼 힘을 의지하려고 하는가?
이것이 이사야에도 여러 번 나오는데, "바로 왕의 애굽을 쫓아가자. 애굽이 좋았다. 애굽을 의지하자" 라고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제발 사람과 말들을 의지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우상이다" 라고 말이다. 아니, 살아있는 하나님이 이렇게 계시는데, 애굽처럼 왜 그렇게 힘을 의지하려고만 하느냐는 것이다.
철학을 좀 공부했다면 이런 것까지 이해가 되지 싶은데, 제가 방금 "왕은 힘으로 통치한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철학을 좀 공부한 사람은, "지금 왕이 몸무게가 몇 키로인가? 아니 나이 50이 넘은 사람이 무슨 힘이 있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한 생각을 우리도 해봐야 하는데, "왕은 힘으로 통치한다" 라고 할 때, 그런 점을 말이다.
◈ 노무현과 최홍만이 맞짱을 뜬다면?
예를 들어서, 대통령 노무현과 격투기 최홍만이 싸움을 하면 누가 이기겠는가? 분명히 최홍만이 이기는데, 그런데 노무현이 지시하고 최홍만은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힘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분명히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과학시대에서는 물리적 힘이 아니면 힘으로 여기지를 않는데, 그러니 에너지로 변하지 않으면 힘으로 간주하지 않는 이 시대에, 왜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나 경제학에서, 일반 관행상 '힘' 이라는 물리적 개념을 동원해서 결합력을, 즉 사회의 구성력을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힘이냐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는가?
이러한 힘을 두고서, "물리적 힘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바꾸는 것이 바로 '돈'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권력'으로 바뀌고 말이다. 여기에서 돈을 연구한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 이고, 권력을 연구한 사람은 '막스베버' 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힘은 돌을 던지는, 그러한 물리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에 의하면 돈이고, 막스베버에 의하면 권력입니다. 재벌이 힘이 센 것은 돈의 힘이고, 국회의원이 힘이 센 것은 권력의 힘입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막스베버 - 놀랍게도 권력이 도덕적인 정의로움을 !!
그래서 어떻게 노무현이 최홍만을 이길 수 있는지, 이것을 막스베버가 더 연구를 해보니까, 놀랍게도 권력이 도덕적인 정의로움을, 그런 의로움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로마서의 말씀이 맞는데, "보이지 않는 힘이 의로운가? 아니면 죄인인가?" 라는 것으로 세상은 판명이 나지, 마르크스처럼 돈으로 판명되는 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인간은 "나는 정당하게 존재하는가? 우사스럽지(?) 않는가? 과연 창피하게 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가?" 라고 하는, 자기 내면의 자기 의(義)와 결부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는 인간의 자기 의만 박살을 내면, 이 세상은 꼼짝없이 악마의 하수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악마의 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제 설교시간에 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그만 잊어버렸는데, 제발 자기가 진멸되어야 할 죄인이란 사람만 교회에 나오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람들은 교회에 나올 때에 자기 정당성을 확인 받기 위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도장을 받으려고 말이다. 그러니 이미 힘을 가지고 나오는데, 자기 의, 즉 자존심을 가지고 나온다는 말이다.
"앞으로 최홍만이를 K1에서 뛰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려" 라고 하면, "아이쿠, 아닙니다. 저는 머리에 종양이 있는 환자가 아닙니다. 앞으로 한국에서, 또 K1에서도 계속해서 뛰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즉 법의 힘은 막스베버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자기 정당성인데, 즉 자기는 이 사회에서 나쁜 짓을 한 것이 없기 때문에 수갑을 차고 교도소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의, 자기 정당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다.
◈ 목회자의 임무 - 여러분은 다 디졌시요 !!
그래서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그것은 교만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진멸이 되고 전멸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은 전멸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만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십자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구약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백성들이 왕을 구하는 것도 자기 의로움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71페이지를 보자.
** 이스라엘의 왕들은 섬기기는커녕 백성들을 힘으로 압박하려했다. 그렇게 되면 결코 하나님이 왕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그 나라는 왕 개인의 사유물이 되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이 왕 되시는 나라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적이 된다.
이렇게 백성들이 왕에게 소속이 되어서 사유물이 된다는 것은, 사무엘상 8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미 예언한대로 인데, 왕 제도가 되면 백성들은 왕의 소유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 72페이지에 보면 사무엘상 8장 6절에서 20절의 말씀이 아주 길게 인용이 되어있는데, 어떻게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마지막 20절을 보자.
(삼상 8: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결국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특별히 이스라엘이 누구를 본받으려고 하는고 하니, 민족과의 차별화가 없이 다른 민족들과 똑같이 동질화되기를 스스로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가 어제 설교를 하면서 이 세상의 특징을 두 가지로 보았는데, 하나는 '전염한다' 라는 것으로, 즉 모방인데, '사단이 하늘에 떨어지는 것으로 본다(글제목?)'에 보면 잘 나와있는데, 이 사회는 하나의 신화적 모방에 의해서 국제사회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한 놈을 죽여서 정당성을 얻는다는 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독된다' 라는 것인데, 즉 관행이라는 것이다. 첫째는 전염해서, 즉 다른 곳에 기웃기웃하면서 어떻게 사는지 보고, 그리고는 중독되고 말이다. 이것을 '음행' 이라고 하는데, 엮어져서는 안 될 땅의 것과 엮어지는 것으로, 그러니 잘못된 관계가 음행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인간들의 세상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말이다.
교재 72페이지에 나오는 '선지자를 통한 고발'을 보자.
** [선지자를 통한 고발] - 여기에 하나님 편의 군사로 등장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선지자들이다. 선지자란 자기 시대의 왕과 다윗에게 약속한 왕 사이의 괴리를 두고 왕 체제를 하나님께 고발하는 사람이다.
◈ 아아, 들리는가? 지금은 교전 중 !!
여기에 하나님 편에 어떤 사람들이 등장했는가? 이것을 놓치면 안 되는데, '군사(軍士)' 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엄연히 전쟁 중이란 말이다. 좀도 직선적으로 말하면 '교전중' 이라는 것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만 쏘아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총을 쏘아대고 있는데, 선지자들의 운명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 혹시 장로님, '예언자들' 이란 책을?
아브라함 헤셀이 지은 '예언자들' 이란 책에 보면, 물론 그분은 성경을 언약적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선지자가 얼마나 심하게 당하는지, 저는 그 사람 책의 내용과 표현들이 너무나 좋아서, 그것을 뽑아서 '말씀의 조약들'의 '선지자' 대목에 실어놓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책이 '상하'가 합쳐져서 나오는데, 특히 그 책 '상' 부분이 참으로 좋은데, 물론 헤셀은 유대교 신학자이지만 말이다.
구약의 예레미야, 미가, 에스겔 등등, 선지자들이 그 얼마나 수모를 당하는지, 표현력이 있는 글씨체로 아주 감동적으로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그 책을 읽어보면 구약성경에 있는 선지자들이 그냥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마구 꿈틀거리면서 살아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냥 문자가 아니라, 그야말로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예레미야의 경우에, 그가 가는 곳마다 저쪽에서 화살이 날아오는데,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것을 계속해서 자기의 온 몸으로 맞으면서 가는데, 그냥 빈 공간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 퍼붓는 화살을 맞아가면서, 나중에는 엉금엉금 기어가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 외치는데, 그래서 선지서 자체가 아픔의 신음소리와 통곡소리로 충만한 책들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미가, 요나서 등등이 모두다 말이다. 엉엉 울면서, 너무나 아파서 신음소리를 내면서 한 마디씩 외친다는 것이다.
◈ 뻑뻑하다 !! 뻑뻑하다 !!
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은데, '뻑뻑하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 뻑뻑한가? 사회가 그렇다는 말이다. 안티가 그렇게 많은데, 예레미야 안티가 그렇게 많고, 에스겔의 안티가 그렇게 많다는 것이다. 반대도 그냥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대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 같은데, 예수님이 가는 길에, 그분의 행동하나, 말씀 한마디 한마디마다 안티가 생긴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아가신 그 모습이, 먹물로 꽉 찬 수조 안에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뛰어든 것과 같은데, 움직일 때마다 먹물이 몸에 묻고 또 묻고 말이다. 사실 먹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가 튀었지만 말이다. 그냥 먹물이 아니라 뻑뻑한 먹물 말이다.
도저히 폼을 잡거나 숨쉴 공간도 없는, 그 어디를 가도 마귀가 입김을 내뿜는, 그야말로 검은 증기가 피어오르는 사우나 같은 곳 말이다. 그러한 곳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힘들어서 헉헉거리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단 한번이라도 마음 편하게(?) 지낸 적이 없다는 말이다.
◈ 설교자, 30분의 치열한 교전시간을 !!
목사님들이 복음을 설교할 때도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우리교회의 경우는 교인수가 적어서 그렇지만, 그 교인의 숫자가 몇 천명 정도가 되면, 목사가 한 마디를 설교하면 그에 대한 반박의 화살이 수천 개가 발사된다는 것이다. 어디로 말인가? 강단을 향해서 말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서, "여러분,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되받아 치면서, 30분 동안을 그렇게 교전하면서 치열한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저도 수 천명의 교인들 앞에서 설교한 적도 있었는데, 아무튼 우리도 선지자들처럼 그러한 군사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선지자란 자기 시대의 왕과 다윗에게 약속한 왕 사이의 괴리를 두고, 왕 체제를 하나님께 고발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를 향하여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독촉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이다.
◈ 선지자는, 왕 체제를 하나님께 고발해야 !!
이렇게 선지자는 자기가 왕이라는 것은 아니고, 왕 체제를 하나님께 고발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고발하는고 하니, '희생'으로 고발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못되고 남은 잘되고 말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당하는데, 그 혜택은 남들이 보게 되고 말이다.
◈ 게하시가 왜 문둥병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서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혜택을 주면서 본인들은 현상수배를 당하든지 해서 점점 더 어려움에 처하고 말이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고는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고 말이다. 심지어 나아만의 문둥병이 게하시에게까지 침투해서, 나아만의 문둥병이 게하시의 문둥병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문둥병자에게 포위 당한 엘리사 !!
그러니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은, 이 게하시는 무엇을 대표하는고 하니까, 그 당시 엘리사를 빼놓고 썩어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이 게하시가 대변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엘리사는 완전히 문둥병자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해택은 혜택대로 베풀고, 좋은 소리를 듣기는커녕, 그 희생은 희생대로 당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게하시는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는가?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이 다 낫고 나서 그만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니까,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 게하시 : 보소보소 손님요?
* 나아만 : 왜 그러나?
* 게하시 : 병이 나았으면 치료비는 좀 내고 가야지요?
* 나아만 : 어, 당신 주인이 안 받는다고 하던데.
* 게하시 : 그래도 나에게 내면 되요.
* 나아만 : 진짜로?
* 게하시 : 예. 우리 주인이 다시 받으라고 하던데요.
* 나아만 : 그럼 당연히 내어야지.
* 게하시 : 돈도 많아 보이는데, 이왕이면 팀까지 좀 두둑하게 주소.
* 나아만 : 알았어.
그러니 게하시가 보는 것은, 이 땅을 보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엘리사는 키가 커서(?) 그런지 몰라도 하늘을 쳐다보는데 말이다. 그러니 서로 보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쪽은 "오직 주께서 하셨다" 라는 것이고, 저쪽은 "주께서 하셨지만, 인간을 통해서 하셨다" 라고 하니 말이다. 즉 "나 게하시가 아니라면 누가 나아만 장군에게 그런 말을 하겠노. 그러니 나는 돈 받을 자격이 있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게하시는 이렇게 하나님은 일을 하셔도 인간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고, 그러나 엘리사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엘리사는 사실상 게하시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교재 73페이지를 보자.
** 이들에게는 어떤 힘도 없다. 단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들과 함께 할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진 수난의 대상이 되었다.
◈ 늙은 군인의 노래 !!
선지자들은 아까 말한바와 같이 군사인데, 그런데 문제는 어이없게도 힘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손에 든 무기도 전혀 없고 말이다. 단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은총 때문에 모진 수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이지 감격스러운데, 여기에서 은총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을 받는 은총인데, 이것이 바로 환난과 핍박을 받는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은총만 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태복음 5장에 의하면, 환난과 핍박을 받는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은총만 받았지, 다른 은총은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챙기는 엘리사는 결코 엘리사가 아닌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게하시이지 말이다.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정상적인 의식주조차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겨우 까마귀가 가지고 와서 얻어먹었는데, 아니 까마귀가 주둥이가 얼마나 커야 제대로 된 음식을 주겠는가? 그냥 그야말로 마지못해 살아있는 것이지 말이다. 엘리야는 그런 비참한 가운데 있었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하나님의 심판인 불보좌와 함께, 즉 하늘에 올라갈 때만 불수레를 탄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서 이런 것이 마음에 와 닿아야 하는데, "쥐뿔도 없는 것이 까불고 있네" 라고 하지 말고, 정말이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잘난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엘리야 당시 이스라엘에 3년 6개월을 비가 오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 고통은 누가 당하는가? 그것은 선지자가 그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복을 따올 능력도 없으면서 !!
왜냐하면, 선지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기도해서 나라가 잘 되도록 복을 빌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지자의 임무인데, 그 당시 선지학교는 학생들이 신의 복을 따내는 일을 하도록 교육을 시켰다는 말이다. 그런 일들을 하고 그 대가로 선지자들이 월급을 받는 것이고 말이다.
교인들이 돈이 없어서 헌금을 하지 못하면 누가 어려움을 당하는가? 물론 장로님의 머리카락이 좀더 빠지겠지만, 역시 목사가 굶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목사의 신기(神氣)가 부족해서 복채가 덜 들어오니 말이다. 무릎팍 도사정도만 되어도 되는데 말이다. "아, 내가 영빨이 부족해서 헌금이 들어오지 않는구나" 라고 말이다. 어느 목사 치고 이런 것을 느끼지 않는 목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3년 6개월을 비가 오지 않도록 했는데, 그 고난과 아픔을 누가 고스란히 받는고 하니,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선지자는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비가 오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선지자는 얻어맞을 짓을 한다는 것이다. "선지자님, 비가 오도록 기도해주세요" 라고 하면, "지금은 비가 올 때가 아닙니다" 라고 말이다.
◈ 지금은 쫓겨날 때입니다 ??
과연 어느 부교역자가 이런 소리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새파란 전도사가 수요예배 때 "여러분, 지금은 교회부흥을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교회건축, 헌금, 선교를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회개할 때입니다" 라고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당장에 쫓겨나지 말이다. 아마 정석훈 목사님 말고는 최근에 한 사람이 없지 싶은데, 사실은 교회가 잘 되도 문제이고, 못 되도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무엇을 요구하는고 하니, "당신 선지자가 진짜로 맞아? 가짜 아냐? 진짜라면 뭔가 표시를 보여야지 말이야" 라고 하면서 선지자들을 주목하고, 그렇게 선지자들은 백성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님, 저는 목사가 안 되기를 참 잘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자기의 희망이 목사였는데 그것을 포기하면서 말이다. 목사는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물론 하기 싫다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시킬 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에 있는 예레미야 44장 16절에서 19절 말씀을 보자.
(렘 44: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렘 44: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렘 44: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렘 44:19) 여인들은 가로되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 예수를 믿으면, '행복 끝, 불행 시작' !!
여기 17절 후반부부터 18절까지 보면, "그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러한 구절을 현수막으로 만들어 걸어놓은 교회가 과연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핍절을 당할 것입니다" 라는 구절을 감히 누가 이야기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교회기둥에 새기고 말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라는 것은 마구 새기고 난리를 피우고 하지만 말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핍절이 오고 기근을 당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는데, "여러분, 그동안 그들이 보고 익숙했던 관행에서, 즉 빌면 복을 받는다는 관행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그런 사고방식에서 끄집어내어서, 핍박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분이 바로 주님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환난이 오고 핍박이 오고 기근이 온다는 것이다.
◈ '자아' 라는 복주머니를 찢어버려야 !!
그러니 예레미야는 죽으려고 난리부르스(?)를 추는 꼴인데, "지금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멸망당할 죄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요즘 제가 종종 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자아가 깨어지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아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