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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31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바울의 이원론자유게시판로마서

2008031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바울의 이원론

이름 : 한윤범(IP:59.6.189.246)

2008031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바울의 이원론

(강의:이근호 목사)

진도 안 나간 것 같지만 진도 많이 나갔습니다. 그런 중요한 본문 같은 것은 계속 앞부분에 설명이 됐고요.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끝나면서 언급했던 게 있지요.

하늘에서 성령을 받아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을 때 이 구원받은 사람이 나름대로 이 땅에서 자기 역사, 나는 과거에 이렇고, 이렇고 이런 것을 따로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를 우리가 왜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단순히 이 사람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사도바울의 이원론, 하늘과 땅, 세상을 어떻게 봤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 지금 래드는 원어를 동원해서 여러 가지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네 가지 내지는 다섯 가지 세상의 개념을 사도바울은 달리 사용하고 있다. 이래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기 달리 쓰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뜻으로만 봤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원어적으로 따져서 다섯 가지 내용이, 개념들이, 용법이 있었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 사람의 네 번째인가 용법에 보면, 악이 지배하는 세상, 악이 다스린다. 그런데 악이 다스리는데 우린 뭐가 궁금합니까? 악이 뭔질 알아야 우리가 대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악이 뭐냐? 여기 대해서 사도바울이 뭐로 봤느냐 하면,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봐요. 나오죠. 읽어본 사람은 압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이 바로 악이다 이렇게 본 겁니다.

초등학문 속에 뭐가 포함됐느냐 하면, 헬라적으로 철학이 포함돼있고, 또 뭐가 포함됐느냐 하면, 유대적으로 율법적인 의식과 절기. 그러니까 율법, 할례 이런 것을 뭐로 봤다? 초등학문으로 봤다. 그래서 이것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 성도는 뭘 피해야 되느냐? 이런 악이니까 악을 이기고, 악을 대적해서 헬라철학에도 빠지지 않고, 유대의식, 절기에도 빠지지 않을 때 우리 성도는 성도다운 생활을 복음생활을 할 수 있다. 래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근데 제가 보기에 이 사람 생각은 잘못 됐어요. 왜 잘못 되었느냐 하면, 방금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걸 철학에서 뭐라 하느냐? 이걸 ‘존재론적 사유’라 하죠. 나라는 인간이 뭘 피하고, 뭘 멀리하고, 뭘 대적하면 나는 괜찮은 존재로써 버티느냐? 그런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관심사가 뭡니까? 내가 성도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돼? 어떻게 하면 나 아직 괜찮은 건전한 존재로 다시 유지할 수 있느냐는 쪽으로 돌아오죠.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종말 때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뭐가 쏟아진다 했습니까? 예수님의 속성이 구체화 되면 이걸 가지고 기능인데, 예수님의 속성과 기능이 쏟아지지요. 왜 그렇습니까? 구약 때는 제대로 해. 잘하란 말이야. 복 줄게. 아이고, 못해. 그럼 회개해. 이게 되지만 종말 때는 모든 것이 인간의 능력은 이미 끝나버렸잖아요. 모든 말씀은 이를 막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 안에 가둬두었다 이 말이죠.

만약에 존재론적으로 봅시다. 제가 방금 기능적으로 봤는데 존재론적으로 봐버리면 어떤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 옛날 구약사람들은 율법을 줘도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제대로 못 지켰다. 그런데 이제 신약에 와서 예수님 십자가 지고 부활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온 이유가, 니는 이제 모든 말씀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거야. 다시는 십자가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어떻게 해서 거룩한 생활을 하느냐? 거기에다 중점을 해서 너는 거룩한 사람이 돼라. 이젠 그런 거룩한 존재가 됐으니까. 옛날엔 못한다는데 이젠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해야 된다는 쪽으로 나오죠. 존재론적으로 봐버리면.

특히 로마서 8장 같은 경우에 죄로 말미암아 율법을 이룰 수 없는 것을 이제는 성령의 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전에는 죄 때문에 율법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는 율법 사람이 아니고, 영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원 없이 마음껏 마음만 먹으면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말씀을 다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과 지시들을 봐라. 그것은 ‘하라’하는 거잖아. 근데 하라 하는 걸 안 하고 예수님만 쳐다보고, 십자가만 쳐다보면 그거는 안 되잖아. 실제로 뭘 해야지. 점점 더 하나님 말씀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했으니까 베드로전서에 보면, 거룩하게 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나오죠.

래드도 말은 안 하지만 약간의 그런 뉘앙스가 굉장히 많이 풍겨요. 침례교 쪽 아닙니까? 침례교 아니라도 인간은 다 그런 게 있으니까. 이게 제가 보기에는 복음적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이 말이죠.

이 존재론적에 대해서 뭣이 문제 되느냐 하면, 존재론적으로 봐서 분류를 하는 거예요. 내가 싸워야 될 적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적이 뭡니까? 헬라철학이고 그리고 유대의식이고 또 하나 여기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천사숭배 같은 것, 미신적인 것, 오컬트라 하죠. 주술적인 것, 괴상한 종교 이런 것들을 멀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봤을 때 헬라철학을 멀리하고 이런 것을 멀리하는 방식이 뭡니까? 그들이 뭐라고 주장합니까? 헬라철학을 공부하지 말라 했으니까 아예 철학공부 안 하면 되고, 아예 철학 모르면 돼. 그 말 아닙니까, 그렇죠? 헬라철학을 멀리하라 하니까 모르면 그만이잖아요. 근데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됩니까? 말이 안 되죠.

왜냐? 헬라철학이 뭔데요? 인간 본성에서 나온 건데 그걸 공부 안 했다고 해서 그 본성이 그대로 안 생긴다고. 그건 눈 감고 아옹하는 격이죠. 타조가 원래 그렇답니다. 자기 잡으려는 짐승이 오게 되면 타조가 도망가다 안 되면 자기 머리만 땅에 박아버리면 나는 안 봤다 이러면 되는 줄 아는 거예요.

헬라철학이 뭐냐 하면, 사람이 여기 있다. 있는 인간이 어떻게 신과 결합을 할까? 이게 헬라철학입니다. 아까 했잖아요. 신의 말 안 들으면 오래 못 사니까. 신에 순응하게 되면 복 받아서 풍족해서 잘 먹고 잘 사니까. 가인의 제사가 그것 아닙니까? 헬라철학이 뭐냐 하면, 그냥 구약에서 말하는 이방종교라고 보면 돼요. 구약에서 이방종교가 나오면 이방종교가 어떤 종굔지 알아야 될 텐데 우린 이방종교 나오면 그건 몰라도 돼. 왜? 난 여호와 믿으니까.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데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믿다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껍데기는 여호와고, 알맹이는 전부다 이방종교였죠. 이방종교 내막도 모르고 무조건 반대하면 이방종교 아닌 줄 알고 있어요.

이방종교 생각 좀 더해봅시다. 사람이 대지, 토지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인간은 무엇과 싸우느냐 하면, 대지의 고통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고통과 싸울 때 인간은 선악 사고방식이 작용을 해야 돼요. 작용을 하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때 내가 괴로우냐? 그것은 내가 죄를 지을 때 괴롭고, 어떤 때 내가 편하냐? 내가 착할 때 복이 온다. 라는 선악구조로써 이방종교에 다 깔려 있습니다.

선이 뭐냐? 신에게 아부를 하는 거예요. 뇌물을 하는 거예요. 정성을 드리는 겁니다. 정성을 다해서 살아가면 복을 받는 겁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것이 욥 아닙니까? 욥이 처음에 고난 오기 전에 무슨 생각했습니까? 욥도 그렇게 생각했고 욥의 친구들도 생각한 게 뭡니까? 욥은 의인이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애들도 다 참하고 열 아들 잘 큰다. 이렇게 봤잖아요.

그것이 일반적인 하나님인데 그걸 무슨 하나님이라 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했지요. 다 잊어버렸지요. 엘 샤다이. 갑자기 전능하신 하나님 속에 뭐가 왔는데? 고난의 하나님이 와버리니까 누가 혼동을 일으키느냐 하면, 욥도 혼동을 일으켜서 1장부터 36장까지 계속 혼동을 일으키고, 동시에 누가 혼동을 일으킵니까? 욥과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는 세 친구가 욥의 적으로 나서고 말아요.

마, 니 잘못했다 해, 마. 왜 이리 고집이 세노?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야. 니 봐라. 니 꼴좋다. 마누라 가버렸잖아요.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회개해. 회개하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해진다고. 우리가 아는 신앙이 그거잖아요. 니도 알잖아. 아는 신앙과 안 맞잖아요. 니가 분명히 벌 받는 것은 죄가 있어서 벌 받은 거야. 그런데 없거든. 그러면 하나님 행동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 밖에 안 되잖아. 하나님이 일관성이 있으려면 네가 잘못했다고 해야지. 욥은 골치 아파요.

이게 바로 이방종교라. 전능하신 하나님. 자기의 생존에 유리한 걸로 복으로 간주하고, 생존에 불리한 걸 벌 받은 걸로 간주하는 인간들의 본성이죠. 그게 헬라철학입니다. 헬라철학을 좀더 보게 되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뭐가 유리한가를 조사해봅니다. 뭐가 유리하겠어요? 헬라철학에서 어떤 게 제일 유리하겠어요? 그것은 바로 따라 해보세요. ‘공동체’였어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 했어요? 사람은 혼자 못살고 사회적으로 같이 살아야 된다.

혼자 살면 못 사는데 왜냐하면 지금 저주를 뿜어내는 대지에서 살기 위해서는 혼자 못살고 모여 살아요. 그래서 가인이 받은 벌이 뭡니까? 혼자, 유리한 자가 되리라. 이거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못 견딘다는 거예요. 그만큼 뭡니까? 그 당시에 철학이 기존에 있는 선악체제와 더불어서 저주를 인간의 능력으로 이겨내려고 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더불어 사는데 질서가 안정되면 복 받은 거죠. 그럼 질서가 안정되기 위해선 여기 뭐가 개입돼야 돼요? 헬라철학에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법이잖아요.

그런데 법은 누가 만듭니까? 법을 누가 만드느냐 하면, 보세요. 사람이 신에게 복을 받아서 생존에 유리하려면 공동체 생활을 해야 되고, 혼자는 못살고, 생활을 하려면 여기에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려면 뭐가 들어가야 된다? 법이 들어가고, 법을 누가 제정하느냐 하면, 힘이 제정하고, 누가 힘이 있느냐 하면, 이게 바로 영웅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영웅이 나와요.

사사기에 기드온이 떴잖아요.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 됨을 포기하고 누굴 왕이라 했습니까? 기드온과 기드온의 자식들을 왕으로 삼아서 우리를 다스려달라고 하지요. 사무엘상 8장에 보면 뭡니까? 우리는 왕이 없기 때문에 나라꼴이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보세요. 이방나라의 공동체가 있는데 이방나라가 누굴 칩니까? 주위에 있는 아람나라, 블레셋이 누굴 칩니까? 이스라엘을 치지요. 이스라엘을 치니까 이것은 뭐가 없기 때문에? 힘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뭘 달라? 영웅을 달라. 영웅이 다른 말로 이게 뭐냐? 이게 신라시대 어금니 한 사람. 어금니를 뭐라 합니까? ‘이사금’ 이사금을 한 자로 말하면 ‘왕’이죠. 우리에게 뭘 달라? 왕을 달라.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들이 왕을 구한 것은 뭘 포기한 것이다? 나의 왕 됨을 포기한 것이다. 이게 신약시대에는 왕을 또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지도자를 달라.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우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뿐이고, 우리의 아비는 하나님뿐이다. 지도자라 하는 건 필요 없다.

이 공동체를 만약에 뭐로 바꿀 수 있을까? 공동체를 교회로 바꿔보세요. 결국 뭐가 나와요? 교회가 되려면 카리스마 있는 왕 같은 목사 있어야 되죠. 권력이 한 곳으로 몰려야 되죠. 이것이 바로 헬라철학입니다.

그러면 이야기 들어보니까 헬라철학이고 뭐고 간에 저게 맞잖아요. 원래 저렇게 살잖아요. 근데 성경을 안 봐서 그래요. 성경 보면 사도바울 보세요. 사도바울에게 이 분은 누굽니까? 그리스도 밖에 없지요. 그 말 그대로 아닙니까? 그리스도 외에는 지도자가 없느니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직분 가진 사람은 뭡니까? 은사는 누굴 어떻게 한다? 지도자 된 게 아니라 은사 있다, 섬겨라가 아니고, 오히려 은사 있다 섬길래. 섬길래가 되죠. 그렇지 않아요? 이것 좀 비약해서 이야기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죽은 존재에요. 신약에서 마지막 때 모든 인간은 죽었는데 살아있는 건 한 존재 밖에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제가 쓰겠습니다.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이라 합니다.

그리스도 몸이라 할 때는 개인을 이야기하면 안 돼요. 왜냐? 개인을 이야기해버리면 그리스도가 주는 속성이 죽어버려요. 기능이 죽어버려요. 개인을 이야기해버리면 타인과 대비된 개념이에요. 그러면 니가 사냐, 내가 사냐? 이래 나온다고요. 손이 발 더러 쓸데없고, 눈이 발더러 쓸데없고 이리 돼버려요.

이게 개인을 보는 은사가 나타나면 안 돼요. 그리스도 몸에서 나와야 돼요. 그리스도 몸이 돼버리면 너나가 아니라 너의 기능, 나의 기능이 돼버린다고. 목사의 기능, 집사의 기능이 돼야 된다고. 왜 그 사람을 목사라 이야기 안 하고 목사의 기능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뭐냐? 목사가 뭐보다 높지 않다? 집사보다 높지 않다. 이게 문어라면, 문어가 다리가 여섯 개 아닙니까? 어느 긴 다리가 다른 다리보다 높다하면 머리 되는 문어가 가만두지 않지요. 서로 섬기라 하는 로마서 12장에 나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섬기는데 문제는 섬기는 방식이 개인의 재주가 아니라 주님의 속성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 속성이 참, 이거 이야기하려면 오늘 이 강의, 속성이 뭐냐? 이거 아닙니까? ‘희생’ 아닙니까? 자기를 버리는 것. 성령 받았다. 은사 받았다. 성령 받았다. 섬긴다. 섬기면서 대가를 원한다. 이거는 말이 안 되죠. 왜? 우리는 이미 모든 생명을 어디서 받습니까?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받기 때문에 따로 대가를 다른 사람에게 존경심을 받을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조차 없습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존경심을 기대한다면 우리 자리가 뭔가 주님의 생명으로 꽉 차 있지 않고, 빈자리가 남아있다는 게 돼요. 남아있으니까 그걸 마저 채울 때 저 사람 존경받을 때 나는 기분 좋다. 이거는 우리 자아의 밑구멍에서 솟아나는 우리의 아담의 속성, 본능입니다. 이게 죄지요.

현대인들은 자아의 주체의 가치에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목사가 나, 어떻게 생각해요? 나, 위대합니까? 나, 상 받을 만 합니까? 항상 개인을 지목해서 이야기해주기를 원해요. 당신,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 받으면 누구 겁니까? 옆 사람 것입니까? 자기 것이지요. 교회 와서 복 챙겨서 가버려요. 그러면 항상 사람은 나만 챙길 때 기분 좋아요. 서로 같이 가도 기분 나빠요. 돋보이고 돋보이면서 돋보일 때.

이게 라멕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가인은 벌이 칠 배지만 나를 건드리면 놈은 칠십칠 배지요. 라멕이 왜 그렇게 나와야 되느냐? 모든 인간은 영웅은 아니지만 영웅 지향성, 언젠가 되고 싶어 하는 그런 본능을 라멕이 대신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헬라철학입니다. 요한삼서에 보면 교회에서 으뜸 되고자 하는 자를 주의하라. 방향성이 으뜸이라는 게 아니라 으뜸 되고자 하는 자를 으뜸 되고 싶어서 환장한 자를 주의하라.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주님의 속성이 오면 특징이 뭐냐? 희생이죠. 희생은 뭘 염두에 두지 않느냐? 내가 이렇게 하면 지켜볼 거라는 그런 대가성이 없이 하는 게 희생 아닙니까?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뭐라 합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목사들, 신학자들 그 대목 어디 있는지 찾으려고 해도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예수 말씀 가운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는 말이 없다니까. 참는 자가 복이 있다. 하는 거 어디 있어요? 성경 어디 나옵니까? 없어요.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한다고.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런 건 성경에 안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복 받으세요가 아니라 있는 복이 그냥 있는 겁니다. 있는 복이나 나눠달라는 뜻이에요.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만물의 쓰레기 같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쓰레기 같이 만들었죠. 우리는 죽고, 너희는 살고. 고린도후서 나오지요. 나는 날마다 죽어 가는데 너희들은 날마다 살고. 나는 미천하나 너희는 부한 자가 되고. 우리는 죽은 자 같으나 너희는 살고. 그게 뭐냐?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성과 십자가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철저하게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능이에요 기능.

내 존재를 기어이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 몸에서 죽어야 했어요. 자아가 늘 죽어 있어야 돼. 매일같이 안 죽는 걸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안 죽어요. 안 죽는데 안 죽어서 설치는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그걸 죽었다고 본다 이 말입니다. 그게 참 어려워요. 이 말이. 손가락 움직여요. 안 죽었어요. 우리는 차 몰고 가다가 누구 튀어나오면 기분 나빠 욕합니다. 안 죽었다고. 성질도 안 죽고 자존심도 안 죽었어요. 안 죽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뭐냐? 그게 죽어 있는 거다 말이죠.

이게 종말에 나타나는 종말, 세대론적 이원론이다.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세대론적 이원론이라는 래드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래드가 헬라철학에 대해서 잘 모르게 때문에 그 ‘세대’란 의미를 이 사람 철학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성경에 세대 나오니까 세대 쓰면 되는 줄 아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헬라철학에서 세대란 말은 어려운 말입니다. 칸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이왕 헬라철학에 대해서 어렵게 해볼까요? 못 알아들어도 할 수 없습니다. 플라톤은 이 세상을 둘로 봤습니다. 무와 유로 봤어요. 유에서 또 둘로 봤어요. 하나는 정지와 운동으로 봤어요. 정지된 것도 운동하는 것으로 봤거든요. 그런데 운동은 항상 어디로 가느냐? 정지될 때 본색이 드러나요. 이거는 운동할 때는 옳지 않아요. 그런데 운동을 중시한 것은 뒤에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사람이 온전히 살아있는 것, 이게 정지 아닙니까?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이데아라 하거든요. 형상이라 하거든요. 형상이 온전하게 될 때까지 운동한다는 것은 형상에서 뒤떨어진 게 아니고, 약간의 형상의 흔적들을 갖고 나아간다. 이래 보는 거예요. 이걸 모방이라 보는 거예요. 그런 거 용어 다 알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뭡니까? 격이 떨어졌기 때문에 죄인 되는 거죠. 이게 중요합니다. 헬라철학에 의하면 헬라철학 다 때려치우고, 우리 인간의 본성에 의하면 온전한 나가 있어요. 우린 예수님 말씀 들으면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요. 온전한 나 있고, 그걸 닮아가려고 애쓰는 내가 있잖아요. 예수님보다 우리 격이 떨어지지요. 하지만 주를 본받기 위해서 노력하잖아요. 따라가는 것 때문에 죄는 아니다 이 말이죠. 뭔 뜻이냐 하면, 미흡하지, 좀 모자라지, 아이큐가 뒤떨어지지 죄는 아니라고 보잖아요.

성경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게 차이나요. 우릴 죄로 본다고. 좀 봐주소. 인간 아닙니까? 우리가 신입니까? 하나님은 중간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거룩한 율법이 들어갑니다. 우리는 율법 열 개 중에서 아홉 개 지키잖아요. 이게 통하는데 주님한텐 안 통합니다. 열 개 다 온전히 그것도 항상 오후 두 시 되면 한번 지켜. 그게 아니고 세 시고 네 시고 꿈속에도 벗은 여자 보면 안 돼. 꿈속에 벗은 여자 보면 간음한 거예요. 안돼. 꿈속에 폭력 질하면 살인죄에요.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그 말은 뭐냐? 왜 선악과 따먹었느냐? 이거에요.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것 가지고 잘하면 될 것 아닙니까? 이거고, 주님께선 왜 선악과 애초부터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었어? 이렇게 된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이거는 흙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선악과 따먹었는데 아직도 살아있으니까 인간이라 쳐주소. 선악과 쪽에서 선 쪽으로 하면 안 됩니까? 쳐주소. 이게 바로 헬라철학이고 일반인들 사고방식입니다. 성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는 늘 죽어야 됩니다. 죽으면 그럼 일을 못하잖아요. 죽으면 일 못하지요, 그죠? 거기서 끝나면 믿는 사람이 없지요. 뭔 뜻인지 압니까? 그렇게 끝나면 믿는 게 없지요. 기껏 자기 믿다가 그거 아니라 하니까 에이, 때려치워라. 이거 아닙니까? 우리교회도 많아요. 그래 우리교회 안 나오는 사람 많습니다. 자꾸 설교하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아무리해도 뭘 잘라버리느냐 하면, 설교시간에 예수님이 이렇게 한다는 걸 다 잘라버리고 목사님, 내가 어떻게 할까요? 그거 해도 죄라고요. 안 하지.

헌금해도 그것이 영광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영광입니다. 하면 예수님 피 생각은 안 하고 헌금해도 죄? 어, 그거 잘됐네. 이 교회 참 좋은 교회다. 헌금 안 해도 복 받았다 하니까 안 해버리는 거예요. 그거 한 일년 갑니다. 계속 이야기하면 안 나옵니다. 자아의 가치와 자존심을 완전히 모독하니까.

예수님이 은혜 주니까 예수님 은혜 안 느껴요. 예수님의 은혜보다도 내가 이렇게 해서 남들 보기에 내가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써 하나님도 좀 알아 달라. 이걸 원해요. 일반교인들도 이걸 원한다고요. 저 사람 말고, 이 사람 말고, A, B 말고 나, 내가 교회에서 내가 독대고 내가 남보다 신앙 좋다는 걸 알아줘. 사람들이 교제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내가 남보다 나은 점이 이것이라는 것을 집에서는 발산이 안 되잖아요. 시찰회 나가서 구역예배하면서 그걸 발산하는 거예요. 전도사님이 기도시키기를 바라고, 심방 가서 말하기를 바라고, 그게 자기 영광의 대가를 원하죠.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 영광을 빙자하지만 결국은 누구 영광이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희생과 대가없는 것, 이런 속성.

그러면 사람이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어떤 대가와 남들의 칭찬을 기대하지 않을 경우는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이 팔십, 구십 되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런 일들을 시키고 일 다 했나? 죽여 버립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하죠. 이런 일들 다 하게 하고 자기를 죽여 놓고 공로는 누가 싹둑 가져가고? 주님만 몽땅 가져가고.

그게 사도바울, 열두 제자 갔던 무슨 길입니까? 순교의 길이었습니다. 특히 스데반 집사가 그런 분 아닙니까? 스데반 집사가 뒤에 설교한 것 말고 앞에 보면 뭘 했느냐 하면, 놀랍게도 귀신을 쫓아내고 집산데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능력을 행하고. 물론 집사니까 구제도 행했어요. 돌아온 건 뭡니까? 돌에 맞아 죽었어요. 아벨이 분명히 제사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응답했습니다. 돌아온 건 뭡니까? 형한테 맞아 죽고, 형은 잘 먹고 잘 살고. 그 드라마 아무도 안 봅니다. 그래 사람들이 창세기 4장을 안 보잖아요. 비극적으로 끝나잖아요.

그래서 교회가 안 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성경대로 왜하냐 이 말입니다. 이 세상이 무슨 세상입니까? 이 세상이 악마의 세상에서 구약에 있는 미가 나오지요. 사람들의 복을 위해서 돈을 받고, 그들의 좋은 소리해서 하나님 할렐루야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을 이야기하면 그런 사람은 밥 먹고 살았지만 예레미야나 미가는 굶어죽었습니다. 순교해 죽었어요.

이 악마 같은 세상에서 왜 복음 전하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전하고 싶어서 전하느냐? 나도 안 하고 싶은데 주님의 속성이 십자가의 속성이 부득불,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지요. 부득불 하려고 하는 이것이 나에게 뭐다? 이게 나의 복이다. 희생해서 얻는 게 복이 아니고, 희생 안 되는 인간이 대가를 노리면서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대가 없이 하게 한다는 이 사실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복의 개념이 달라요. 베드로전서에 나오지요. 십자가 지려 간 것은 그 길을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심이라.

제가 설교하면서 요 근래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예수님의 설교에 천국, 지옥 이야기 보세요. 천국, 지옥 이야기하면서 천국 좋단다 이 이야기 안 하지요. 뭐 이야기합니까? 천국 가는 길 이야기하고, 지옥 가는 길 이야기하죠. 만약에 천국 간다고 하면 전부다 천국 좋다고 다 올 것 아닙니까? 길을 이야기하니까 아무도 안 와.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 이야기,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고 쭉 나온 게 뭡니까? 포도원 이야기하면서 아침에 열 시에 온 사람, 열두 시 온 사람 이야기하니까 알아듣질 못하는 거예요. 성과급이 없으니까. 노동의 대가 양만큼 복이 안 오니까. 한 시간 일하고 똑같은 품삯을 받으니까 천국이다.

심지어 베드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내가 몇 번까지 용서해 줍니까? 이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와요? 지금 우리 사고방식 아닙니까? 뭘 원해요? 내가 용서해줬다. 니, 나 존경해라. 이거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매일같이 이거 품고 살아갑니다. 내가 이렇게 일곱 번 용서했으니까 그만큼 나한테 존경해줘야지.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줘야지.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니가 몇 번 용서해주라고? 일흔 번에 일곱 번씩 용서해줘라. 라고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뭔가 받아 챙긴 게 있으면 그걸 나눠주기 바쁘지, 뭔가 받은 게 없는 인간은 꼭 뭐 하나 해놓고 자기 행동에 노동에 대해서 대가나 챙기는 놈은 그거는 옥에 갇혀서 죽는다 했지요. 임금 앞에 돈을 수십 억 긁어놓고 탕감해주니까 좋다 하다가 자기 종하나 동전 십만 원짜리 하나 안 준다고 옥에 가둔 그 놈, 임금이 화가 나서 그 놈, 부자를 어떻게 했습니까? 집어넣었잖아요.

이처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뭔 뜻입니까? 우린 뭐다? 많이 용서받았으니까 우린 뭐 했습니까? 계속 죄인으로 남아야 돼요. 우리가 왜 죄인이냐 하면, 주님 속에 안 들어가고 얼쩡거리니 때문에 죄인이에요. 주님과 함께 삶 속에 들어가야 되는데 계속 얼쩡거리고 있는 거예요. 너무 무섭기 때문에, 너무 겁나기 때문에 관찰하고 중계방송이나 하고 있단 말이죠. 주님 이렇게 살았으니까 십자가 믿어 구원받습니다. 계속 중계방송해요. 본인은 거기 들어가질 않는 거예요.

심지어 들어가도 문제에요. 들어가도 기껏해야 열두 제자 꼴 밖에 안 납니다. 천국에서 누가 높으냐? 이것 밖에 이야기 안 해요. 그러니 지금 래드가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출발해버리면 여기서 어떤 공식이 나오는데, 이런 공식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아까 그 그림을 설명해 드려야 됩니다.

제가 공식을 하나 적어볼게요.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뭡니까? 표상이니라. 로마서 5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뭐라고요? 표상이죠. 표상이란 말은 연관성이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누가 실체에요? 그리스도가 실체죠. 내가 아까 했죠? 모든 인간은 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것은 누구 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 돼야 돼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돼버리면 성도는 죽은 인간이 되니까 이건 안 되니까 그리스도의 몸이라 해야 돼요. 다른 말로 두 자로 하면, 교회죠. 그리스도 몸만 살아있단 말이죠 그리스도 몸만 살아있으니까 아담은 그리스도 몸을 위한 표상이라.

그러면 아담은 죽었잖아요. 아담 죽었는데 또 새끼 까서 죽었지요. 또 죽었지요. 또 죽잖아요. 죽어야 되면서도 계속 나와야 될 이유가 뭡니까? 아담 때문에 아닙니다. 나는 나 때문이 아니에요. 여러분 때문에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 공식이 깨져요. 우린 누굴 위해서? 그리스도 몸을 위하여 이분이 실쳅니다. 영원한 실체고, 우린 영원한 실체가 아니란 말이죠. 여기서 실제로 뭐가 나오느냐? 속성이 나와요. 속성이 나와야 표상이란 관계성에 들어갑니다. 속성 안 나오면 남남이에요. 표상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구약성도도 마찬가지로 장차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표상이고, 신약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신약성도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잔데 그리스도의 속성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표상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면 속성이 뭡니까? 속성이 뭡니까하면, 우리가 착해지는 것.

속성이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공의와 자비 아닙니까? 그러면 이 속성이 오게 되면 아까 제가 예수님의 속성 가운데 천국 갈 사람들은 자비의 그릇이죠. 이쪽은 뭡니까? 로마서에 보면 자비의 그릇이라 돼있고 그 앞에 보면 긍휼을 베푸는 자. 이쪽은 뭡니까? 긍휼의 반대가 뭐죠? 진노 아닙니까? 진노를 베푸는 자잖아요.

그런데 재미있잖아요. 이게 긍휼 아닙니까? 긍휼은 뭔 뜻이에요? 불쌍히 여기는 거죠. 밑바닥은 똑같지요. 추가적으로 뭐가 와요? 진노 받아야 마땅한데 추가적으로 뭐가 옵니까? 진노 위에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자비가 되죠. 자비라는 것이 자비 이퀄 뭐 더하기 뭡니까? 진노 더하기 용서, 또 다른 말로 긍휼, 이게 들어가야 자비가 나온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만 딱 챙기고 진노는 잘 안 챙기는 버릇이 있어요. 이러면 안 돼요. 우리가 성도가 그리스도의 표상이죠. 그러면 뭐가 있어야 돼요? 진노와 용서가 함께 있어야 되죠.

그래서 제가 아까 베드로 이야기했잖아요. 몇 번 용서해줍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된다고. 몇 번 용서하면 누구 잘났다고? 지 잘난 거죠. 자기 증거 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베드로는 누구의 속성입니까? 그리스도의 표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용서와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가 원치 않는 길을 가야 됩니다.

요나에 있어서 요나의 박 넝쿨 있잖아요. 요나의 박 넝쿨 요나가 시시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언제 요나가 박 넝쿨을 귀하게 봤습니까? 박 넝쿨 맨 박 넝쿨인데 박 넝쿨이 달라진 게 아니라 누가 달라졌어요? 자기 자신이 자살하려고 했거든요. 한강에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하나님이 자살 대신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요나에게 죽음의 고통을 줘버리죠. 얼마나 재밌죠. 재밌지 않습니까? 주여, 내 알아서 죽을게요. 하고 요나가 알아서 죽겠다고 요나서 4장에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알아서 죽이는 게 아니고, 땡볕에 극심한 고통을 줘버리죠. 만약에 알아서 자살해버리면 그는 뭘 기억 못합니까? 이 진노를 기억 못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죽는 것도 못 죽어. 뭘 경험해야 돼요?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해야. 하나님의 적개심 그리고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 하는.

저는 가끔 그런 생각하면서 죄인임을 느끼는데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변호하고 그것을 제대로 못 알리고 있는 이 나약함과 게으름. 예수님 죽었는데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이 죽었는데 도대체 정신을 어디 팔려서 예수님의 피 흘린 것을 제대로 변호하고 앞장서서 외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이 모습, 이게 바로 죄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죄의 기준이 뭐예요? 내가 얼마나 위대하냐, 얼마나 착하냐가 기준이 아니고, 죄의 기준이 뭡니까?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니까 죄의 기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복음이 기준이어야 한다. 내가 부족해서 반성이 아니고, 십자가 속성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진노와 용서를 함께 안고 있고, 이쪽 지옥 가는 사람은 뭐 밖에 없어요, 뭐가 빠졌습니까? 긍휼이 빠졌고 뭐 밖에 없어요? 진노 밖에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왜 진노하십니까? 그 밑에 뭐가 있기 때문에 진노합니까? 로마서 1장에 나오지요. 그들로 뭐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게 하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한 자에게 악한 자에게 뭘 줍니까? 햇빛과 공기를 주시잖아요. 노아언약에 의해서 모든 사람, 불신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지요. 사도행전 17장에 모든 만물을 하나님이 소생케 했죠. 다 살아라 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그들로 하나님을 영화롭지 않게 했잖아요.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을 알고도.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 은혜에 대해서 그들은 인간은 뭐냐? 죄를 지어서 하나님 은혜를 모독했지요. 자기 영광을 위해서.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신이라 했으니까. 거기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오지요. 그럼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놓고도 감사할 줄 몰라요. 우리는 불신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때까지 우린 나밖에 몰라요. 자기 자존심만 생각하고, 자기 위신만 생각한다고요. 심지어 하나님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 도와준 게 뭐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다 말이죠.

나오는데 거기에 뭐가 옵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있지요. 그러니까 맥도날드 햄버거 같으면 이쪽은 보통이고 우리는 특대 아닙니까? 마지막에 얹히는 게 뭐예요? 나는 이만큼 존대했다, 봉사했다 이게 아니고, 죽을 때 강도처럼 십자가의 은혜가 얹히잖아요. 우리는 뭡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이것을 말씀의 능력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것이 로마서에 나오지만 그걸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왜? 그걸 실천했다고 치면 그게 전부다 영광이 누구한테 돌아옵니까? 나한테 돌아오죠. 왜? 우리는 속성이 더러운 아담의 속성이기 때문에, 양쪽 다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 뭘 깨닫게? 죄를 깨닫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게 되면,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것을 한 2초나 1초 동안에 그걸 밖으로 나오게 한다 말이에요. 그 나오는 상황을 누가 만듭니까? 주께서 그런 상황을 만들지요. 차를 가다가 만약에 낭떠러지에 떨어진다든지 깨보니 꿈이었다든지. 그 꿈을 내가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만들지요.

내가 남한테 심방 가서 말실수를 크게 했는데 나중에 전화 와서, 그렇지 싶더라. 또 교인 하나 떨어졌다. 하는데 목사님, 그 말씀해서 너무 은혜롭다 하거든요. 그 상황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 만들었지요. 자기가 평소에 하나님 이런 기도응답 안 했다고 까불다가 갑자기 다리가, 허리가 아파서 일어서지 못할 때 내 기억 속에 잃어버렸던 건강주신 것이 하나님 은총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또는 비가 안 오는데 비가 왔을 때, 공기가 희박한 가운데서 공기가 맑은 것을 깨달을 때 순간순간 깨달을 때 우리는 뭐냐? 내가 나 된 것은 주의 은혜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할 때 누가 깨닫게 합니까?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예수님이 만들어서 성도로 하여금 그런 고백이 나오게 하시잖아요.

자기가 그렇게 잘나서 된 건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란 말이 그 말이에요. 자기 죄를 모를 때는 감사가 안 나옵니다. 자기 대가성을 원하지.

자, 그러면 아까 던진 문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표상이기 때문에 본인이 실체가 되면 안 되고, 누가 실체다? 예수님이 실체고 우리는 그의 속성과 기능이 작용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죠. 주의 긍휼과 자비가 작용하는 도구가 되죠.

그렇다면 아까 문제의 해답이 거의 나왔습니다. 다시 문제를 볼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도가 되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느냐, 없느냐? 이거는 없지요.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가 없어요. 왜냐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A라는 지점과 B라는 지점, C라는 지점 계속 동질성을 유지해야 돼요.

사실은 사람이 과거가 어떻다 하는 것이 다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지금 현재가 돼버리면 과거는 없어요. 없는데 과거는 어디 있느냐? 현재 나의 기억에만 있지 과거는 없어요. 열여덟 살 때 젊었던 나 없습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대구에서 고등학교 나왔는데 가보세요 없어요. 나 없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오년 전에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다. 그런 사람 지금 없어요. 기도원에 가보세요. 없어요, 그 사람. 다 까먹고 지금 나가 있을 뿐이에요. 근데 지금 은혜 까먹은 나와 그때 그 사람하고 나는 딴 사람이에요. 왜? 그땐 은혜 받았으니까 지금 은혜 안 받았으니까. 딴 사람이라고. 딴 사람이 없어요. 지금 있다는 것은 현재 나가 있을 뿐이죠. 미래 없어요.

제가 미래 없다고 하면, 그럼 목사님 미래가 없다 하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이미 구원을 받았고 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 하는 그럼 구원 얻게 될 그 사도바울과 구원받았다는 사도바울과 동일한 사도바울이 아니고 딴 사람입니까? 그게 성경하고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래 따질 거란 말이죠.

제가 아까 했잖아요. 교인들이 오게 되면 뭘 다 잘라버린다고? 주님이 하신 일 다 잘라버리고 내가 어떻게 할까만 남는다고 했지요. 지금 주님이 살아계시잖아요. 주님이 어떻게 살아 계신가? 주님이 살아있다는 실체가 어제나 오늘이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실체의 특성은 뭐냐? 아셔야 돼요. 실체는 어떤 때만 실체라 할 수 있느냐 하면, 이게 연속성을 가질 때만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살아있다는 걸 뭐라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지요. 그리스도만 살아있는 게 아니죠. 그리스도 몸이 살아있죠. 물론 머리도 살아계시고. 그럼 그리스도 몸이 실체라면 뭘 유지할 수 있다? 연속성이 유지되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면 우리도 연속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되게 하는 이 작업, 그리스도 몸을 연속성을 유지하는 이 작업이 우리 손에 달렸습니까, 주님 손에 달렸습니까? 주님 손에 달렸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안 믿고, 못 믿고 갑자기 주님 손에 달린 게 아니고, 이게 갑자기 누구 손에? 내 손에 달렸다 하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실체가 아니고, 나는 나의 실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를 증거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해서 이만큼 신앙생활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기도해서 유지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예배참석하고 성경공부해서 유지하고 있다. 자기 역사 되돌아보죠.

그러면 이것은 뭡니까? 죽은 자가 죽은 자 같이 꼬집는 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우리 믿읍시다. 정말 간단한 말이다. 나훈아처럼 올라가서 바지 벗어서 믿습니까하고 꼭 해야 돼요. 믿읍시다. 우리는.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 것 맞는데 이게 성령을 통해서만 믿게 돼있어요. 선물이니까.

주께서 그리스도 몸을 할 때에 그냥 하라 하는 게 아니라 믿음을 줍니다. 믿음은 어디서 와요? 그리스도에게서 와요. 오게 되면 이 믿음의 특징이 뭐냐? 선물로 준 믿음은 이게 내 게 안 된다는 거예요. 성령으로 선물로 온 믿음은 이게 선물로 왔다고 해서 우리는 받아 챙기면 내 것 되잖아요. 내 믿음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몸에 해당되는 믿음입니다.

중구청에서 중구청장한테 관용차를 줬습니다. 차 누구 겁니까? 소유자 누굽니까? 중구청이지 중구청장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중구청장 마누라 왜 타고 다녀요. 아니잖아요. 믿음을 선물로 받았잖아요. 이 믿음 주인이 누구십니까? 그 믿음 주인이 주님이고, 그걸 그리스도 몸의 머리에 속하는.

그래서 각자각자 사람 달라도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다. 몸도 하나다. 이 말이 그 말입니다. 내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우리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 만드는 작업 가운데서 업적이죠. 주님의 업적, 실적이죠.

이래 이야기하면 목사님, 성경적으로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주님이 그런 재주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믿음 없는 나를 구원하는 재주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 내 뜻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이걸 믿느냐? 했어요. 안 믿었습니다. 왜 안 믿느냐? 자기가 실천했기 때문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나 말고 외곽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철저하게 믿습니다.

나 말고 내게 희망 줄 권리는 없다 이 말입니다. 예수도 내가 믿어서 예수 믿지 그냥 믿게 되는 믿음은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진 강도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몰라요. 옆에 있는 강도는 안 믿었습니다. 정상적이에요. 그런데 같이 사형언도 받고 같이 지금 형틀에 있는 예수를 믿으니까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가리라 했습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리라. 이거 주님께서 우리 보고 하라고 한 게 아니고, 네가 그런 믿음 있느냐? 그런 믿음 없지. 믿음이란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살아있는 것도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주께서 지체라고 너는 내 몸이라고 선언하시는 선언입니다. 이게 복음이고 그 복음 안 믿는 사람이 이 제목처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웬 은혠지 웬 사랑인지 예수를 핍박하려는 우리가 맞을 정도로 우리는 예수를 싫어하고 지금도 하나님 싫어하고 나만 좋아하는 사람 맞습니다. 하나님의 웬 은혠지 웬 축복인지 이런 죄인을 불쌍히 여겨서 십자가 피를 흘려서 모든 죄를 다 안 본 것으로 없는 것으로 쳐준다는 이것이 복음으로 믿어지는 주님의 솜씨와 작품인 줄 믿습니다. 이제는 우리 대가 바라지 말고 나눠주고 희생하는 것을 주의 복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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