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311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 밖의 사람자유게시판요한복음

20080311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 밖의 사람

이름 : 한윤범(IP:59.6.189.246)

20080311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 밖의 사람

(강의:이근호 목사)

만약에 세미나에서 [그리스도 밖의 사람] 할 때 그냥 읽어보세요. 라고 할 문제가 아니고 이 사람이 래드가 글 쓸 때 얼마나 함축성 있는 글 썼느냐 하면, 거기 [그리스도 밖의 사람] 29장 보면, “바울의 인간관과 세계관은 그의 종말론의 기본적인 면을 설명해준다.” 해 놓고 그 뒤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헬라적 이원론은 우주론적 이원론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류학적 이원론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주론적 이원론, 두 단계 실존, 하늘과 땅을 대비시켰고, 인류학적인 이원론은 사람의 두 부분 몸과 영혼을 대비시켰다.” 하는 이 문장 가지고라도 이게 세 시간짜리가 나와야 된다고.

이거 지금 548페이지 앞부분 해도 세 시간 같으면, 뒷부분 550페이지부터 이거 다 하려고 하면 한 학기 다해도 다 못해요. 그 정도로 그것 때문에 초반에 래드가 얼마나 문장을 쓸 때에 그냥 기도원에 계시 받아서 은혜롭게 쓴 게 아니고, 하나하나 체계성 있고, 이것 하나만 알아도 여러분들은 신학을 아는데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하는 그러한 사명감이 넘쳐서 이 글을 쓴 거예요.

그럼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스도 밖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안 나오는 용어죠. 성경에는 무슨 용어가 나오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이 나온다 말이에요. 그리스도 안이 나오고 그리스도 안이 있다는 말, 이것도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좀 있다 설명해 드릴게요.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이 성립되거든요. 그런데 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쓸 때 이게 어떤 공간범위로 설명해버리면 이 말 자체에 약간의 충돌되는 모순되는 게 있어요. 왜냐하면 세상 모든 만물이 다 누구 안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잖아요. 지옥도 그리스도 안에 있고, 불신자도 그리스도 안에 있잖아요. 그러면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무슨 난데없이 그리스도 밖이라는 말이 왜 튀어나오느냐 말이죠.

고린도전서 8장 6절, 골로새서 1장 16절, 고린도전서 3장 23절 정도. 이런데 보면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직접 창조한 걸로 그렇게 돼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도 마찬가지고 다 그렇게 돼있지요.

자, 그런데 그럼 그리스도, 존재적으로 봐서 그리스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데 왜 제목부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냐 말이죠. 그러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그 밖에 있으면서 누구 지배 받는다 말이에요. 말이 안 되거든요.

여기서 이제 약간의 사도바울의 개념을 정의할 때 우리가 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이다. 라고 딱 정의를 내리고 들어가려고 하다고 찡하고 부딪히고 된 대목이 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사고방식을, 사상을 아, 이거다. 라고 하나로 묶으려고 하다가 다른 게 안 맞는 대목이 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샌더스란 사람은 사도바울은 왔다갔다한 사람이고 일관성이 없다. 사도바울 신학이 일관성이 없다 이 말은 처음에는 예수님 빨리 재림한다 하다가 나중에는 늦췄다하니 지 마음대로고,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해놓고 나중에는 행해야 구원된다. 지가 지 모순된 내부에서 했기 때문에 결국 사도바울은 그 시대만 사도지, 지금까지 우리가 사도라고 주의 계시라고 받들어 모실 필요는 없다. 그 시대의 필요했던 사도기 때문에 그 시대에 적합한 말씀만 준 것이지, 오늘날 시대에는 다 골라 챙겨야 되지 참고로 할 뿐이지 사도바울이 옳다. 이러면 곤란하다는 쪽이 오늘날 신약신학계의 흐름입니다.

계시라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지 주님이 줬다 하는 것은 하나의 핑계에 불과하고 결국 사람이 만든 게 아니냐. 그래서 책제목도 [신학은 인간학이다] 하는 책제목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참고로 할 뿐이지 성경을 맹신하지 말고, 거기다가 엎어지지 말고, 그냥 사람들과 잘 타협해서 그때그때 필요한 신의 계시를 살아가면서 지가 영적으로 만들어내면 된다. 통용시키면 그만이다. 이런 쪽으로 나옵니다.

가다머라든지 현대해석학 쪽으로 리꾀르라든지 하이데거 쪽으로 나오면, 요새 신학자들이 그쪽 철학을 많이 공부하거든요. 물론 라캉이라든지 들뢰즈 철학도 많이 공부해 보면 나오는 결론은 뭐냐 하면, 성경이라고 딱 진리라고 할 수 없고, 성경이라 하는 것은 인간 내부에 있는데 성경은 인간 내부에 이미 성경적인 계시 쪽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계시다. 이러면 독선적이 되니까 서로 타협해서 좋은 게 좋으니까 서로 의논해서 그 필요한 계시를 따로 만들어내면 됩니다. 라는 쪽으로, 성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계시라 하는 것은 성경에 정해진 게 아니고, 계시라 하는 것은 대화에요. 의사소통이죠. 디스커스라 하죠. 담론이죠. 서로 의논해서 이렇게 합시다.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거지 사람이 안식일 위해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좋으면 그게 계시 되는데 하나님이 사람 사랑하는데 말씀보다 사람이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말씀 위주가 아니고 사람 위주기 때문에 사람을 봉사하기 위해서 말씀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파하면 도와주고, 그게 하나님의 계시다 이 말이죠.

만약에 성경이 계시라 하면 성경을 계시라는 말은 좋지만 이런 해석이 옳다고 독선적으로 나가버리면 성경의 계시에 대해서 더 나가서 뭐냐 하면, 성경해석은 이래해야 계시다 해서 성경 계시에서 어긋나서 이렇게 성경 해석해야 이게 진리라고 성경 빼놓고 또다시 진리체제가 또 따로 구축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한 것 밖에 안 되니까 교만한 마음이 되잖아. 라는 그쪽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과 ‘그리스도 밖’, 그러면서도 세상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창조했다. 그런데 공간적인 범위 내에서 영역 범위 내에서 불신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어떻게 해서 왜 그리스도 안과 바깥으로 나누는 또 이런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느냐 이 말이죠.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께서 창조했다고 했으면, 우리 보기에 ‘안’인데.

그런 게 구약에도 나오지요. 모든 인간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어놓고, 인간은 그러면 누구 자식입니까? 신의 소생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또 유대인은 따로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의 아들 따로 나오느냐 말이죠. 그러면 창조해서 하나님 아들은 뭐고, 하나님의 언약을 줘서 하나님의 아들 되고, 그건 또 뭐냐? 둘 중에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 말이죠.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줬다 하면 그러면 기존에 하나님이 만드신 일반 사람은 은혜를 안 줬냐 이 말이죠. 줬거든요. 은혜를 줬으면 은혜라는 게 뭡니까? 거저 주는 것 아닙니까? 거저 줬으면 확실하게 거저 줘야지, 거저 줘놓고 지옥 보내고. 말이 안 돼요. 특히 이스라엘 같은 것은 거저 은혜 받아놓고 지옥 보내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느냐? 종잡을 수 없지요.

그 이유를 오늘 이 시간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전부다 누구 입장이냐 하면, 인간 입장에서 봤어요. 인간 입장에서 하나님을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죄라고 지적하면서 말씀을 주는데 ‘너는 죄인이야’하는 식으로 말씀을 주는데 그게 아니고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니까 얼마나 착한 일이냐 하고 자기를 난 나쁜 짓고 했지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예수를 믿고자 하는 착한 것도 있으니까 아마 이거는 옹호되겠지 하는 식으로 성경을 보니까 그러한 오류가 생기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성경을 봐서 애를 쓰는데 하나님 쪽에서 도와줄 거지, 내가 하나님 알려고 애를 쓰는 이걸 큐티해서 열심히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 같으면 나의 신앙생활을 협조하는 것이 하나님한테 좋고 나한테 좋은데 그것마저 죄라고 하면 그럼 나는 뭐 하려고 신앙생활 하느냐 말이죠. 하나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하는데 신앙생활마저 죄라고 규정해버리면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이래 나오거든요. 그게 다 인간중심에서 나온 겁니다.

천주교에서 칼 라너죠. 라너가 하는 말이 교회 바깥에도 신자가 있다. 이렇게 했을 때 처음에 천주교 내부에서 반발이 있었고, 개신교는 말할 것도 없었어요. 교회 바깥에 무슨 신자가 있느냐? 이래 나오니까 내가 교회 바깥에도 신자가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 내 지향점, 마음가짐이 누구 좋으라고 하느냐 하면, 다 하나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하는 거다. 하나님은 그 마음 아신다. 그러니까 내가 틀리지 않았다 이리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밖 할 때 그리스도 밖이란 말은 잘 안 써요. 그리스도 안이란 말을 써서 나온 이유가 이걸 신학적으로 하면 어렵기 때문에 실제적인 이야기해봅시다.

교회에서 교회가 있는데 사람들이 찾아오잖아요. 이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고, 등신이 아니거든요. 이 사람들은 뭘 중심으로 하느냐 하면, 자기를 중심으로 오잖아요. 자기중심으로 오는데 그러면 자기가 이 교회에 등록했다. 그러면 이 교회에 합세했잖아요. 그럼 이 교회에 누가 포함되어있습니까? 자기가 포함돼있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옳고, 그르고 선과 악을 자기가 포함된 교회중심으로 구분하든지 하여튼 자기를 일단 포함시키고 자기 자신을 의로운 쪽으로 선한 쪽으로 포함시키고 자기 안에 있는 것과 자기 밖으로 이렇게 설정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다 그래 설정한다 이 말이죠.

대학교 자율화 되자, 안 되자. 기름값 오르자, 내리자. 할 때 기분 나쁜 사람도 있고, 기분 좋은 사람이 있어요. 기름값 오르면 석유회사 기분 좋지요. 왜냐하면 자기가 석유회사의 직원이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요새 주유소 입 벌어지잖아요. 주유소 돈 잘 번다고 입 벌어지는데. 남들은 서민들은 지금 힘들어도 주유소는 입장은 좋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뭐든지 좋다, 나쁘다, 옳고, 그르다 누굴 포함시킵니까?

나를 포함시키는데 만약에 사도바울이 강대상에 설교한다고 봅시다. 사도바울이 설교할 때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받고 그리스도 바깥은 지옥입니다. 라고 할 때 사도바울의 기준은 뭐냐? 그리스도를 내세운다고. 그렇다면 여기 온 사람의 이 기준은 처음에 교회 올 때 누구 기준이었습니까? 자기 기준 아닙니까? 자기 기준을 삼던 것을 뭐로 바꿔야 돼요? 그리스도로 바꿔야 되는데 이게 불가능이잖아요.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고.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자기 기준으로 해서 자기가 믿는 예수가 좋고, 남이 믿는 예수는 별론데 항상 내 기준인데 사도바울이 강대상에 설교할 때는 너나 기준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과 밖으로 이야기해버렸다고. 그러면 기준을 당장 뭐로 바꿔야 되느냐 하면, 내 기준에서 누구 기준으로? 그리스도 기준으로 바꿔야 되거든요. 바꿀 그런 능력이 우리한텐 없어요.

옛날에 엑스포 할 때 4영리 했잖아요. 4영리 쪽지 네 단계 보세요. 의자에 나가 앉아 있는데 이걸 뭐로 바꾸라 합니까? 이걸 그리스도로 바꿔야 하거든요. 내가 여기 앉아 있는 나를 꺼내고 그리스도를 중간에 놓을 때 이걸 누가 좋아합니까? 내가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중앙에서 벗어났습니까, 안 벗어났습니까? 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내가 사실은 이게 여전히 나 중심으로 있지.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겠다. 이거 누구 좋으라고? 옆 사람 좋으라고? 내 중심이죠. 나 좋으라고. 그러니까 내 중심을 포기했어요, 포기 안 했습니까? 포기 안 했어요. 포기 한 적이 없다고. 이게 인간에 불가능한 일이에요. 예수를 믿어도 나 좋으라고 믿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지옥 안 가고 천당 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중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 적 없어요. 인간은.

그래서 사도바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요. 전부다 곡해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한 마디 하면 다 곡해하고, 한 마디 하면 다 오해하고, 한 마디 하면 다 해석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전히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가다머가 해석학하면서 철저히 규명했습니다. 가다머가 하이데거 이론을 빌어 와 철저히 해놨어요. 인간은 아무리 해도 아무리 멀리 도망을 쳐도 인간이 여기 있고 지구가 이렇게 있고 내가 저 멀리 도망쳐도 태양계 밖에 가도 거기 누가 있습니까? 자기 손바닥에 있어요. 손오공이 권두운 타고 멀리 도망쳐 보니까 부처 손바닥에 있잖아요. 인간은 아무리 사색하고 연구하고 탐색하고 큐티하고 묵상해도 그 마지막에 보면 누가 있습니까? 자기 손바닥 안에 있어요. 인간은 자기 손바닥을 못 벗어납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사야 40장에 보면,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이고, 풀은 시들게 돼있고, 그 시들게 하는 말씀은 안 시들고 영원해야 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그 말씀을 보게 되면 뭘 각오해야 돼요. 시들어버려야 돼요. 그런데 이사야 40장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시든 나도 안 시들게 하기 위해서 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반칙이다 이 말이죠. 큰 반칙 아닙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 안에 있으면서 내 안의 예수로 새롭게 내가 지배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복음을 처음에 이야기하면 아주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느냐 하면, 아하, 내가 진짜 지금까지는 복음이 아닌 걸 복음으로 생각했구나. 그런데 복음을 들었으니까 나는 이제 복음만 믿으면 산다. 이 복음을 우리 가족들에게 전해야지 합니다. 한 일년 지났습니다. 이년 지나가고, 삼년 지나갑니다. 그 다음부터는 복음 아닌 교회를 원합니다. 왜? 복음 아닌 교회는 전부다 하수고, 복음을 계속 전하는 교회는 자기가 계속 깨져야 되니까 그게 자기 자존심이 견딜 수 없는 거예요.

하수들에게 상수 짓하는 게 재밌지. 말씀 처음에 일, 이년 기뻤어요. 이, 삼년 넘어가면 겁납니다. 삼, 사년 넘어가면 그 자리에 도망치고 싶어. 처음에 교회 올 때 기도하라 하면 대중기도 참 잘합니다. 한 이, 삼년 복음 듣고 난 뒤에 기도, 띄엄띄엄 합니다. 사, 오년 지나고 난 뒤에 기도시키면 이 교회 안 나옵니다.

그건 뭐냐? 예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자기를 사랑하는데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겁니다. 계속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25절이나 쭉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자기를 미워하라 하거든요. 사람들이 죄를 미워하라 하는데 죄를 미워한다고 부흥회할 때 회개 많이 하잖아요. 사람이 죄를 미워하고 반성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무나 자기를 사랑스럽기 때문에 자기 속에 죄에 있다는 걸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죄를 추방해서 더욱더 내가 사랑스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반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그렇게 하는 너를 미워하란 말이죠. 그건 바리새인들이 다 했으니까.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이건 바리새인들이 다 한 것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고 너 자신을 미워하라 하니까 내 자신을 미워하려면, 내 자신을 미워하고 뒤에 남는 또 나를 설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내 안에 내가 몇 개 있어야 돼요? 그 두 개를 놔두고 내가 추방해야 할 나와 추방하고 난 뒤에 단독적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나를 따로 만들어놓고 추방시키되 찬란하게 빛나는 이거는 절대로 추방 못한다는 게 남아 있어야 내가 나를 미워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데 담배를 피웠다. 아아, 괴롭다. 내가 왜 담배를 피웠을까? 끊는다 해놓고 왜 담배를 피웠을까? 라고 그렇게 담배 피우는 나를 질책하는 나는 뭐고 말이고. 그 우수한 질 좋은 나는 뭐냐 말이죠. 결국은 괜찮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이런 담배 피는 나쁜 버릇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그것 질책하고 미워하는 거예요. 저쪽을 멀리해야 나는 계속 아주 훌륭하고 우수한 나로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방금 한 이야기, 예수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없지요. 처음부터 인간은 예수와 상관없는 거예요. 예수 상관없이 우수하고 훌륭한 나가 되기 위해서 예수여, 당신 나에게 어떤 도움 줄 거요? 그것 따지려 예수를 찾지 계속 훌륭한 나를 미워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이 어려운 거예요. 요즘 제가 마가복음 시작했는데 제 아내가 하는 말이 마가는 어려운데. 마가복음이 원래 어렵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태는 좀 길게 썼는데 마가는 아주 단출하게 설명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윤 집사님이 그리 이야기해요. 마가는 곧바로 십자가로 바로 치고 올라가기 때문에 급경사로 하고 바로 빨리, 빨리. 하여튼 마가는 ‘빨리, 빨리’가 많아요. 빨리, 빨리, 속히, 속히 하는 말이 많아요. 십자가로 바로 가버려요.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이 두루두루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피는. 산이 이렇게 있으면 산에 바로 가지 않고 살펴서 유대인들을 포위해서 예수님 이런 분이다. 이런 식으로 가는데 마가는 예수고 유대인이고 예수님 바로 가버려요. 왜 제 아내가 마가복음 어렵다하고 그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게 신약이 뭘 근거로 하느냐 하면, ‘종말’을 근거로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때가 아닙니다. 애들아, 인간들아, 우리 하나님인데 말씀인데 나 하나님하고 같이 해보자. 이런 쪽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아, 네가 본토 집, 아비 집을 떠나라. 내가 양과 소떼를 증산시켜 줄게. 복 받아라. 이게 진짜 네가 예상 못한 복을 받았지. 그래, 훌륭하게 살아라. 이스라엘아, 십계명, 신명기 말씀대로 네가 살면 복을 받고 안 살면 저주 받는다. 그러니까 받도록 열심히 해봐,

지금 뭔가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장을 열어주고, 자리를 만들고 지금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신약은 뭐냐 하면, 종말 때입니다. 마지막 때에요. 스바냐나 스가랴에 보면 마지막 어두운 때라 하니까요. 그 스바냐, 스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만 여호와 이름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구원된다 했습니다. 깜깜한 날이요, 어두운 날이요. 모든 예루살렘은 불타 버리고, 모든 사람은 제 갈 길 가버리고.

누가 와서 데려가지 아니하면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서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을 깔아놓은 것이 신약이에요. 누가 와서 데려가지 아니하면 누가 와서 성령을 줘서 성령세례 받아서 건져내지 않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아,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맛이 가는구나. 그걸 그대로 보여주는 타일 깔듯이 쫙 깔아서 보여주는 세계에요.

그래서 마태, 마가 신약성경에는 구약에는 아브라함, 이삭이 등장하고 이사야, 예레미야가 어떤 영웅처럼 엘리야, 엘리사가 등장하지만 신약의 특징이 뭐냐? 예수그리스도 빼놓고 전부다 다 죽어. 열두 제자도 결국 뭡니까? 다 도망가잖아요. 신약성경의 특징은 예수그리스도 빼놓고 다 죽는 거예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 없다는 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종말이 돼버리면 더 이상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의는 일체 없는 거예요. 그동안 율법을 준 것은 모든 것을 이걸 막아버리기 위해서 준 겁니다. 그리고 이걸 막고, 그 다음에 저주 안에 갇혀 있다는 것. 원래 저주 안에 갇혀 있었어. 이게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면서 죽어가니까 주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율법을 줘서 봐라. 니가 왜 죽느냐? 인간은 왜 태어나며 왜 죽음으로 달려가야 되는가? 그건 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고, 왜 죄에 갇혀 있는가? 그 이유를 낱낱이 설명하기 위해서 법을 줘버리니까 이 법을 항상 모든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법의 추궁에 따라서 반드시 벌을 받게 돼있다.

따라서 분명히 이것은 우리가 애초부터 저주 받는 것이 명확한 분명하다 돼있어요. 성경에 갈라디아서에. 그 대목이 참 재미있어요. 애초부터 율법을 줘놓고 구약처럼 율법 한번 지켜봐라. 새삼스럽게 어떤 여지를 주는 게 아니고, 율법을 주었다는 그 자체가 애초부터 어떤 인간도 저주에서 못 벗어난다. 왜 그러냐? 아브라함 봐라. 행함으로 구원받았나? 오실 분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걸 보니까 우리는 저주 받는 것이 분명하다. 라고 갈라디아서 3장 거기서 사도바울이 그래 이야기하죠.

실제로 사도바울 본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면서 율법에 의해서 흠이 없는 자라고 자처하며 돌아다녔고, 특히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가 예수라는 이단 족속들을 작살내는 그것이 자기 양심에 입각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확신했던 사람이 졸지에 뭐가 됐습니까? 나는 종말에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이래 되면 뭡니까? 방금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 전체가 자기를 뭐 한 거다? 자기를 미워한 거예요. 이제 아시겠지요.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한데 사도바울이 자기 내부적으로 아무리 기도하고 도를 닦아도 점점 더 자기는 완벽해질 뿐이에요. 완벽에 완벽을 기할 뿐이라고. 거룩에 거룩을 기할 뿐이에요.

그런데 그 사도바울이 아무리 자기를 회개해도 그 회개한 자기는 회개했다는 이유 때문에 더욱더 고상하게 돼버리죠. 남은 반성하는데 자기는 반성하니까 남은 회개하는데 회개하니까. 그런데 자아가 죄인 중에 괴수가 되고 몽땅 자기 자신이 미울 수밖에 없다는 이유는 그거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뭐로 왔습니까?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니까 비로소 자기가 미워지지요.

그래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이건 명령은 분명히 누구한테 한 겁니까? 우리한테 한 것 같아도 이게 지금 신약시대는 무슨 때? 종말의 때기 때문에 종말의 때는 새삼스럽게 명령해서 지키는 때가 아니고, 명령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다? 니, 주제파악 해. 니는 안 되는 인간이야.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씀을 준 거예요. 이 말씀 보고 반성하면 구원해 줄게. 이런 게 없습니다. 왜? 종말이기 때문에.

그래서 종말의 특징이 뭐냐? 주의 영이 임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처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서 구원이 되어야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방식은 그거는 구약 때나 한번 시도해봄직 하지만 그건 이 시대가 이미 지나버렸습니다.

래드는 그런 식으로 지금 제가 얘기한 식으로 종말을 설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 못하고 있느냐 하면, 래드는 아까 몇 페이지 입니까? 548페이지 [그리스도 밖에 사람] 바로 밑에 보면, 래드가 여기에 헬라의 종말론, 우주론적 이원론 두 단계 실존, 하늘과 땅을 대비시켰고, 인류학적인 이원론은 사람의 두 부분 몸과 영혼을 대비시켰다. 라고 이 말 한 것은 이게 이 사람이 학자기 때문에 저쪽 인간적인 철학 반대하면 이쪽 자기가 자동적으로 진리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을 아무리 읽어봐도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 끄집어낸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 밖에 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말도 답변이 여기 안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정신이 어디 팔려 있느냐 하면, 저쪽에 이방인들의 철학을 깨부수면 자동적으로 이쪽은 그리스도 안에 사람 안 되겠나? 하는 그런 학자적인 열심으로 이렇게 쓴 거예요. 참 안타깝죠.

방금 제가 이야기한 종말론은 이것은 바로 ‘언약적 종말론’입니다. 언약적 종말론은 어디서 나와야 되는가? 십자가에서 나와야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 어려운데요. 제가 아까 사람들이 교회 올 때 뭘 가지고 온다? 자아 가지고 오지요.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서 누구 이야기 듣습니까? 예수이야기 듣지요. 그러면 자아는 자기를 깨부술 수 없으니까 예수를 믿지요.

믿을 때 누구 좋으라고? 예수 믿는다는 중간 과정에 불과하고, 결국 예수 믿어서 좋은 사람은 누가 좋다? 내가 더욱더 좋아지는 예수 믿기 전보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더욱더 좋아지는 그런 쪽에 관심을 갖고 예수를 믿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자체적으로 어떤 종말론도 형성되지 않지요. 마치 구약사람들이 여호와 믿고 복 받아서 여호와 믿고 지가 잘 되는 구약시대, 종말 아니었던 시대의 되풀이 밖에 안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이 책의 내용이 그것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여러분, 헬라철학 믿지 말고 예수 믿읍시다. 이거 누가 못합니까? 한다 이 말이죠. 헬라철학 믿지 말고 인간 철학 믿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읍시다. 이거 누가 못해요. 헬라철학 실천에 옮기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실천에 옮깁시다. 실천에 옮길 수 있거든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 말이죠. 완전하진 않지만 최선은 다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나 이래 되면 최선을 다한 공로가 누구한테 누적이 됩니까? 나라는 인간에게 누적이 되죠.

자아라는 쪼개버리면 여기에 동질성이 있어요. 자아라는 것은 칸막이거든요. 이쪽 칸막이, 저쪽 칸막이. 칸막이, 칸막이 딱 쳐버리면 그 안에 같은 동질성이 나와요. 그 동질성이 뭐냐 하면, 이게 기억에 담기거든요. 그럼 내가 만약에 무슨 잘한 일했다. 잘한 일했으면 동질성이 잘한 일이 여기에 저장이 되지요. 칸막이가 자아라 했잖아요. 잘한 일했으면 누가 잘했어요? 칸막이에? 내가 잘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여기 나쁜 친구가 있다. 술 먹고 담배 피는 나쁜 친구를 안 사귀는 거예요. 나쁜 친구가 들어와 버리면 이 동질성이 기억에 착한 자아죠. 여기에 나쁜 친구를 사귀어버리면 이호성이나 이런 인간, 나쁜 친구 들어와 버리면 이거는 착한 나가 뭐로 바뀝니까? 이 동질성이 나쁜 자아가 섞이게 되잖아요. 나쁜 자아가 안 들어오기 위해서는 친구를 멀리해버리는 거예요. 친구를 멀리하면 거기에 적당한 요한삼서가 뭐냐? 이런 자와 사귀지 말라. 이런 거 나와요.

성경을 볼 때 염두에 두느냐 하면, 착한 자아, 동질성 이걸 염두에 두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행동을 가려서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에 뭡니까? 술 취하지 말고 뭐에 취하라? 성령에 취하라. 하는 거예요. 술 취하지 않고 성령에 취하면 누구 좋으라고? 지금까지 착한 자아로 포장된 나에게 더욱더 같은 하나님의 착함이 들어와서 나는 더욱더 착하다는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무슨 종말입니까?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교회 나오다가 갑자기 직장생활해서 한 한달 동안 출장 간다든지 안 그러면 가게 문을 주일날 손님을 받았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주일성수란 말을 어겼잖아요. 주일성수 어겼으니까 가게 문 열고 뭐해야 되느냐 하면, 열한 시 예배 시간 맞춰서 성경 보는 거예요. 왜 성경 봅니까? 나쁜 짓을 했으니까 뭐가 깨집니까? 나의 동질성, 기억 있는 착한 동질성이 깨지니까 덜 깨지는 수위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그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 물론 나중에 한 달 뒤에 가겠지만 그전까지는 늘 성경 보면서 주여, 비록 참석 못해도 은혜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함으로써 계속 착한 나가 유지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죄인입니까? 이런 죄인이 어디 있어요? 이거 죄인 아니에요.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죠. 이게 무슨 종말입니까? 그래서 제가 그런 말 하죠. 목사들이 말씀 속에 들아 가지도 않고 말씀을 관찰해서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교인들에게 중계 방송하는 사람입니다. 저희는 말씀 속에 안 들어가요. 왜냐하면 말씀 속에 들어가면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도 없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겁이 나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인자가 머리 둘 것도 없으면 이 동질성이 무슨 동질성입니까? 이것 조금 더 설명해 줄게요. 자아라는 동질성에 갇히고 인간은 기억만 들어있어요. 기억 속에 나는 착한 나로 유지된다 하는 그건데, 유지된다, 유지되지 않는다 하는 것은 특히 이방인들, 유대인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입니다만 가인의 제사에 나와요. 저주 받은 세계에서 생존문제가 우선 관심사가 되는 세상에서 신의 복을 받는다는 말은 생존에 유리하면 복 받은 거고, 생존에 불리하면 저주 받은 거예요.

그런데 생존에 유리하다는 말은 그만큼 질적으로 착하다. 다른 말로 뭡니까? 의인될 때 생존에 유리하도록 많은 복을 채워줄 것이고, 내가 질적으로 나쁜 놈 같으면 죄인 같으면 생존에 불리하도록 해서 나를 빨리 죽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인이냐, 죄인이냐 이 모든 이방민족들의 종교가 다 그러니까.

그래서 가인이 뭐했습니까? 풍성한 수확은 얻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 살게 해줬다는 말은 나는 그만큼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직까지 살아있는 걸 보니까 의인 맞는 모양입니다. 감사해서 이 제사를 드립니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이유를 막론하고 뭘 해야 됩니까? 돈을 벌어야 돼요. 돈을 벌고 잘 살 때 그때 주위사람들이 볼 때 왜 그러냐 하면, 자아도 똑같은 동질성을 갖고 있으니까. 야, 내가 갖고 싶은 돈을 당신이 갖고 있는 것 보니까 당신은 복 받은 사람이고, 나는 그것보다 덜 받은 사람인데 당신은 어떤 수단을 부려서 신으로부터 이런 복 받았는가? 그 방법을 나한테 이야기해주면 내서 그대로 실천해서 당신처럼 복 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 나는 살만한 정당성을 유지하는 존재, 그래서 나는 가치 있는 존재고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남한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게 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그게 가인의 제사인데 그게 결국 뭐냐? 자기 증거 아닙니까? 자기 존재 증거. 나는 착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교회 오잖아요. 사도바울이 강대상에 서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증인되라 하거든요. 나의 증인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되려면 나를 안 믿어야 돼요. 나를 안 믿고 누굴 믿어야 돼요? 나를 안 믿고 예수를 믿어야 되거든요. 나를 안 믿고 예수를 믿으려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나야 그리스도가 증거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왜 내가 날마다 죽어야 되느냐?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 이유를 알아야 그리스도가 증거돼요. 말만 난 날마다 죽습니다. 죽는 소리 해봤자 이거는 뭐냐? 내가 날마다 죽는 시늉하면 혹시 하나님이 종이라고 해주겠지 하는 그런 또 계산이 있기 때문에 진짜 나는 날마다 죽어야 되는 이유를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날마다 나를 죽어도 마땅한 놈이라는 것을 이유를 알려면 내 속에서 뭐가 계속 나와야 돼요? 죄가 나와야 돼요. 그 죄가 뭐냐? 가인의 제사 같은 원리 아닙니까? 나는 뭘 가져야 살만한 가치가 있고, 내가 목사가 되서 교인이 이만큼 많아야 난 주의 종이라고 남들이 인정해주고 하나님도 인정해 주겠지. 왜? 소유니까. 동질성은 소유 아닙니까? 계속 끌어 모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 이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는 의로운 인간이고, 살만한 가치가 있고, 훌륭한 주의 종이고, 훌륭한 목회자라는 것을 인정받고자 하는 이 죄가 매일같이 솟아나줘야 우리는 뭡니까?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일반인들이 다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본능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나 위주로 나 잘난 위주를 그걸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을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에요. 그래서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 없다고 했습니다.

왜 십자가냐 하면, 부활은 왜 안 되느냐? 부활 돼버리면 자기가 붕 떠서 죽어 좋은데 가려고 하는 그런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이 죄가 지적이 안 돼요. 왜 십자가냐 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님 혼자 죽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게 했던 그 죄는 예수님 본인의 죄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해야 될 사람이 갖고 있었던 죄가 예수님께 넘겨져서 예수님이 아버지께 저주 받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저주받았지요.

그럼 예수님께서 정육점의 고기처럼 매달려 있을 때 이거 누가 사실은 매달려 있어야 돼요? 우리 자신이 매달려야 된다고. 자, 그림을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아까 자아가 두 개라 했지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사고방식의 모든 중심이 무슨 중심입니까? 선과 악의 중심이죠. 그러면 선한 자아가 있고, 내 안에 뭐가 있습니까? 악한 자아가 있지요. 이거 로마서 7장에 나오지요. 내 속에 두 가지 자아가 있고, 하는 그런데 누가 이긴다? 악이 자꾸 이긴다 이 말 아닙니까? 그것도 어려워요. 조금 이따 설명해 드릴게요.

악한 자아가 이긴다는 것이 악한 인간아, 내가 나쁜 짓 하자. 이래서 되는 게 아니고, 꼭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요. 말씀 오기 전까지는 내가 선이 이기다가 말씀 오게 되면 말씀이 악한 나를 자극시켜서 선한 나는 작아지고, 악한 나는 크게 되서 악한 나로 만들어버려요.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이것도 구약 때는 몰랐던 겁니다. 구약 때는 하나님이 말씀주면 착하게 살라는 줄 알았어요. 신명기 28장에 이 말씀대로 지키고 순종하면 복 주겠다고 할 때 우리한테 그렇게 착할 능력 있다고 그렇게 오해를 했고 믿었습니다. 모세가 이혼증서 써줄 때 이혼증서 받고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착한 일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와서 그게 뭡니까? 원래 니가 악하기 때문에 했다는 거예요. 이 사고방식의 전환, 이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십계명에 탐내지 말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안 탐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원래 네 속에 괴물이 들어있는데 그 괴물은 주특기가 뭐냐? 탐내는 게 주특기에요. 남의 교회 탐내고, 남의 교회 건물 올라가는 것 탐내고, 남의 마누라 예쁜 것 탐내고, 남의 몸 건강한 것 탐내고, 심지어 남 설교 잘하는 것 탐내고. 내 속에서 계속 탐심이 지배권을 가지고 올라오는 거예요. 보는 것마다 다 탐이나. 차라리 눈 감고 안 보면 되는데 보는 것마다 탐이나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사람이 손 씻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속에서 올라오는 탐심이 문제라고. 어느 놈이 탐심을 올라오는 그걸 냄새나는 하수구를 어느 놈이 틀어막습니까? 밑에는 구멍이 있는데. 밑바닥엔 바닥이 없어요. 구멍밖에 없어요. 뚝 뚫려있어요. 무저갱에서 온 구멍이 있는데 구멍에서 모든 마귀가 좋아하는 거 다 올라오는데, 맨홀 뚜껑으로 바꿀까요?

사람이 선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악적으로 다뤄요. 왜냐? 선악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좋다. 알았지.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알았어. 선악적으로 다뤄줄게. 악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 운명을 완전히 패대기쳐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두 개의 자아를 둡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기를 나쁜 자아를 알아요. 나쁜 자아를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그렇게 멀리해서 뭐만 돋보이게 한다? 좋은 자아만 남아지게 할 자리에

이 율법의 완성이 뭡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서 뭡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 달려보니까 거기에 누가 정육점에 고기처럼 달려있습니까? 피 흘리고.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죄가 본인의 죄가 아니라니까. 누구의 죕니까? 내 죄잖아요. 그럼 나는 이걸 어디로 가야 돼요? 나는 십자가에 죽어야 돼요.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인데 나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가 살게 함이라. 그건데 이런 나를 십자가에 매달게 하시는 능력이 누구한테 나오느냐 말이죠. 우리한텐 안 나온다 이 말이죠.

우리는 후딱 십자가 대충 알았으니까 부활의 영광만 쳐다보고 있지 다시 십자가 돌아볼 생각 없어요. 십자가, 고맙습니다. 알았습니다. 십자가, 빠이, 빠이. 이제 부활의 영광, 이것만 알지 십자가 볼 생각 안 한다니까요. 계속 자아는 안 돼져야 돼. 나는 예뻐져야 돼. 노래 있잖아요.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성경에서 성경 변두리에 돌지 말고 성경 속에 들어가 버리세요. 성경 속에 들어가 버리면 그 다음부터 누가 지배하느냐 하면, 나는 맨 날 죽는 일 밖에 안 하고 그 죽기 싫은 그 기능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 십자가가 증거되게 하십니다. 기능이 우선이에요. 내 사랑이 우선이 아니고, 주님이 십자가에 한번 달렸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는 십자가 달린 사건을 그 다음부터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인류역사까지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덮어씌우거든요. 십자가 네가 가라. 이제는 십자가 영으로 되서 우리에게 덮어씌운다 말이죠.

그러니까 십자가는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종교로서는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이 와야 알 수 있는 은밀한 감추어진 비밀이에요. 십자가가. 그 십자가를 확장시키고, 물론 성도에게만 시킬 때 그게 우리 구원 받으라고 한 게 아니고, 이미 우리는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람이고, 우리한테 일을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신분증으로 창세전부터 사랑받게 된 사람이니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다가 나 좋으라고 살다가 이제는 주님 좋으라고 주께서 일을 시키는데 일시키는 방식이 뭐냐? 날마다 우리를 십자가에 죽게 하는 거예요.

날마다 죽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서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죠. 내 안에 죽음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나는 죽고, 그러면 당신들이 나로 인하여 죽은 나를 통해서 예수 생명이 나타나게 하리라. 내가 약한 데서 오히려 강함이라. 이 은혜가 나한테는 족하다. 이게 관찰, 중계 방송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직접 그 속에 들어간 사람만이 나올 수 있는 고백이에요. 예수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사람만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아까 처음에 했던 문제, 그리스도 안, 밖의 이야기가 이제 풀리게 되죠. 전체적으로 모든 인간은 다 그리스도 밖에 못 나옵니다. 안에 있습니다. 이거는 고린도전서 8장 6절. 8장 6절 찾아볼까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돼있죠. 모든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그리고 여기 이 교재도 나와 있습니다만 천사들도 다 누굴 위해서? 천사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여기 천사들도 있고 다 있는데 이 전부다 예수 안에 있어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됨이라. 통일되는데 여기에 예수님의 속성이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의의 속성이고, 하나는 진노의 속성이 있습니다. 한쪽은 자비의 그릇이고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 나와야 된다. 그래야 진노의 그릇은 뭡니까? 지옥이고, 여기는 뭐냐 하면, 천국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 안에 모든 게 통일됐다는 이 말은 기어이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가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가고 하는데 이것이 아버지하고 의논한 바에 의하면 창세전에 의논 됐어요. 창세전에 의논되어서 예수님의 속성에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심판하는 속성이 있고, 심판 가운데 그냥 자비로 건져주는 속성이 있다고요.

건져주는 속성,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전체적으로 했다 해놓고, 예수 안이라는 말은 안 하는데 하여튼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 통일했다고 해놓고 ‘예수 안’이라는 말을 할 때 속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아까 이야기한 기능, 기능을 이야기할 때는 이걸 예수님 밖이라 보고, 이걸 예수님 안이라 보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이걸 가지고 경계선을 가지고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직 뭡니까? 내가 십자가 안에서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십자가로 말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첫째 시간을 마치면서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사도바울은 반드시 복음을 이야기할 때 무엇이 복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요. 무엇, 무엇은 복음이 아닙니다를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이야기한다고.

오늘 목회자는 그걸 빼버리잖아요. 이거 하나 더 아시면 플러스 하나 더 아시면 도움 됩니다는 식으로 꼬시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배타적이죠.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주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작용했다. 빌립보서 3장. 자기 배만 채우고, 너희들은 땅의 것만 생각하고. 빌립보서 3장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마라. 너흰 이미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감추어졌느니라.

자꾸 그런 이야기를 저보고 해요. 목사님, 자꾸 그런 대목, 그런 이야기하면 처음 온 사람 못 알아듣습니다. 교인들이 알아듣고 교회 모이면 그 교회 안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고, 그 교회 커지면 누가 좋습니까? 내가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의연 중에 이 교회는 내가 있기 때문에 내 기분에 만족하는 내 마음에 흡족한 교회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이거는 자아를 좋아하는 것이지 이거는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사도바울이 언제 그런 식으로 했습니까? 일단 꼬시고 두 번째 복음 전하고. 이거 안 되거든요. 왜냐 하면, 복음이라는 것은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쪽도 한다.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이미 죽고 주님의 양쪽 기능이 우릴 가지고 사용하기 때문에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천국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뭐도 이야기합니까? 반드시 이런 인간은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같이 이야기해서 나는 나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여서 주님의 속성이 나를 통해서 공의와 사랑으로 나눠집니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 되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되죠.

자, 두 번째 시간에는 제가 그림 하나 그리고 쉬고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제가 두 번째 시간에 할 것은 뭐냐 하면, 하늘에서 어떤 사람 구원을 받았다면, 문젭니다. 이 사람 나름대로 역사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이 문젭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바울처럼 구원을 받았다면, 땅에서 이 사람 나름대로의 자기 고유의 역사를 가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나는 옛날에는 이만큼 선했는데 갈수록 더 선해지고, 한 이십 년 쯤 믿어야 더 선해지고.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건 한 10분 쉬고 해봅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1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572 자유게시판 [고정관념의 벽을 넘어서]를 읽고 [신학] 최고관리자 08-04-09
571 자유게시판 히브리사유와 헬라사유의 유사점과 차이점 미가 최고관리자 08-04-09
570 자유게시판 김용옥의 몸철학과 성경에서의 몸의 개념 [철학] 최고관리자 08-04-09
569 자유게시판 아브라함과 마가복음의 예수와의 비교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8-04-09
568 자유게시판 광주강의(08. 3. 21) 1강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08-04-09
567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13-가짜이스라엘1 - 최고관리자 08-04-08
566 자유게시판 요한 1서를 읽고... - 최고관리자 08-04-07
565 자유게시판 바르트, 몰트만, 틸리히, 판넨베르크 신학의 한계 [신학] 최고관리자 08-04-06
564 자유게시판 20070914-(b)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26강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08-04-05
563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12-성화론3 - 최고관리자 08-04-02
562 자유게시판 인간의 본질과 학문 [신학] 최고관리자 08-03-30
561 자유게시판 2001 히브리서 주보요약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8-03-30
560 자유게시판 20080314-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8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3-26
559 자유게시판 정 목사님 블로그 주소 - 최고관리자 08-03-25
558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11-핍박받는선지자2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08-03-24
557 자유게시판 20080314-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7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3-21
556 자유게시판 2008031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바울의 이원론 로마서 최고관리자 08-03-20
열람 ➜ 자유게시판 20080311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 밖의 사람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8-03-20
554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10-성화론2 - 최고관리자 08-03-18
553 자유게시판 광주강의(08. 2. 22) 2강 녹취록 에스겔 최고관리자 08-03-18
552 자유게시판 20080307b 울산강의-창세기 31장 창세기 최고관리자 08-03-15
551 자유게시판 20080307a 울산강의-창세기 30장 창세기 최고관리자 08-03-15
550 자유게시판 20070914-a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25강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08-03-14
549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09-핍박받는선지자1 - 잘린부분 - 최고관리자 08-03-12
548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09-핍박받는선지자1 - 최고관리자 08-03-12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