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08. 2. 22) 2강 녹취록
광주강의(08. 2. 22)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2. 22) 34-2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은 내가 누군 줄 몰라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시고 율법을 줬다는 말은 결국 인간은 율법이 만들어낸 인간이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이 만들어내는 인간. 법이 만들어내는 인간. 사람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 법 위주. 법이 있고 그 법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후차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
물론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율법으로 만들어 낸 율법 속의 인간이 있고, 또 한 인간은 약속 아래 있는 인간. 율법 아래 있는 대표적인 사람은 이스마엘이죠. 약속 아래 있는 대표적인 사람은 이삭이죠.
하나님께서 사람 모아놓고 두 종류로 가르는 것이 아니고, 아예 율법 아래 있을 사람과 약속 아래 있을 사람을 정해놓고 거기에 합당하게 맞춰서 인간을 창조한 겁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의 권한입니다.
우연히 태어났는데, 여기서 더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설명하기 힘들어요. 어려운 것 해 볼까요?
아담 안에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다 있어요. 아담 안에서는 아버지가 아무리 부모지만 자식하고 아버지하고 단절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지금 속이 아픈데 아들 속 아픕니까? 안 아프잖아요. 단절되어 있는 것 맞잖아요.
에스겔에 보면 아버지가 죄를 지어도 그 아들한테는 그 죄를 물리지 않고 각자 자기 죄에 의해서 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서로 단절되어 있단 말이지요. 분명히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도 그것이 단절되어 있어요.
그런데 로마서 5장에 보면 전체가, 모든 인간이 다 한 사람이에요. 뭐로 삽니까? 그 때 그 아담으로 사는 거예요. 아담이 아닌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모두가 아담이에요. 합치면 아담들이 아니고 아담 한 사람이에요. 연속성, 이어지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분명히 불연속적인데, 부모 자식 간에도 각자고 부부간에도 동상이몽이에요. 같은 곳에서 똑같이 잤는데 꿈은 달라요. 여기서 과학이 문제입니다. 똑같은 환경에서는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과학인데, 꿈은 해당이 안 됩니다. 똑같은 온도에 똑같은 침대에 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꿈이 달라요. 과학자들은 설명이 안 됩니다.
프로이드는 이것은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 세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데, 이게 불연속성이 맞아요. 다 각자인데 그게 연속되는 경우가 딱 두 가지가 있다고 봐요. 하나는 죽음입니다. 죽으니까 어디로 갑니까? 흙으로 가는 거예요. 목표 지점이 A라면 출발점은 다 달라요. 그러나 결국 도착해 보니까 100년을 살든 900년을 살든 도착해보니 한 곳에 다 모입니다. 어디냐? 아담의 운명 속에 다 모여요.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렇게 아담을 수 천 명, 수 만 명을 한 아담의 운명 속에 집어넣는 그 지점에 누가 서 있느냐? 한 분 예수님이 서 있어요. 왜? 심판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수 천, 수 만의 인구라도 그걸 한 아담으로 봐서 첫 번째 아담 말고 자기 자신을 두 번째 아담(혹은 마지막 아담)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그냥 건성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내가 두 번째 아담 이야기하면 지어낸 이야기인줄 아는데,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하도 성경을 안 보니 “왜 평소에 우리가 못 듣던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는데,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빼고 늘 복 받으라는 이야기만 했기에 두 번째 아담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것은 전체 배출된 이 모든 아담이 누구를 겨냥해서? 이것이 철학과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겨냥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창조된 겁니다. 그러면 두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하나는 율법 주신 분이고, 또 한 분은 약속을 주신 분이죠. 달리 표현하면 미움 받기로 작정된 자고 하나는 사랑 받기로 예정된 자. 이렇게 나누지요.
모든 인간은 결국 예수님의 속성, 율법과 약속을 다 알고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의 비밀을 아시는 그분의 속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피조물은 피조 되어야 하고 창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율법 때문에 태어나야 될 사람과 약속으로 태어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으로 태어난 사람은 육체라고 하고, 약속으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빨리 했기 때문에 이것이 맞는지 갈라디아서 4장 21절을 봅시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라고 하면서, 22절 이하에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고’ 율법에 해당되지 않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자유라고 합니다. 법으로부터 벗어났데요. “여호수아야, 네 더러운 옷을 벗어라.” 율법에서부터 벗어났지요. “네 죄를 사하노라” 하나님의 생명나무, 사랑의 약속을 받은 사람, 이것이 약속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 쪽은 율법 그대로 있는 사람이고, 한 쪽은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 행함이 없어도 구원 되는 사람. 한쪽은 죽도록 행해도 지옥 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두 언약이란 말입니다.
두 언약인데, 29절에 보면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이 율법에 해당되는 사람을 뭐라고 봅니까? 육체에 해당된다. 믿을 것은 육체뿐이고, 자기 자신밖에 없고, 한 쪽은 성령을 따라 난 사람. 성령께서 도와주고, 성령께서 인도하고, 성령께서 다스리는 그런 성령에 속한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 항상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하는데, 어떤 인간도 우리하고 똑같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봐요. 정말 육과 영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면, ‘아, 이런 것이 육이고 이런 것이 영이구나.’ 하고 성경 하나하나 보면서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따로 구분되어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자크를 열면 쫙 갈라지는 것처럼 성경을 보면서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이 있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사람이 있구나.’ 이렇게 나눠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오래 봐도 그게 안 나오는 사람은 육체로 성경을 지켜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여튼 제가 지금 이야기 한 것의 요지는, 율법으로 난 사람이, 이것은 자기가 나고 싶어서 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율법에 속한 사람이 있고 약속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그 이야기 한 겁니다.
그런데 약속에 의해 태어난 사람은 자기가 아담 안에서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죽어도 마땅한 것을 알기 때문에) 약속을 증거하지만, 율법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놀랍게도 자신이 뭔가 소유해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믿을 사람이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완벽한 신학, 철저한 신학 이런 것을 구비해야 그걸 무기로 삼아 끝까지 밀어붙여서 하늘나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보다 좀 더 높이, 좀 더 완벽하게.
‘좀 더 완벽하게’ 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위계질서, 점점 높이 있는 단계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이건 잘못 된 거란 말이지요. 차라리 이런 사다리에서 떨어져 버리세요. 그래야 사람은 사다리로 올라가서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안 올라가도 주께서 주신 약속, 믿음이라는 선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안단 말이지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더 높은 사다리로 올라가려고 낑낑거리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애처롭고 가짢고 우습지요. “아이코,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디모데전서 편지를 보내게 된 에베소 교회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1장 4절에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이것이 뭐냐 하면 율법이거든요. 율법이라는 것은 선한 것인데, 선한 것이란 말은 항상 선해요. 율법은 항상 선하기 때문에 그 율법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율법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에요.
율법에 속한 사람들이 미치고 환장하는 것은, 제발 따라잡아야 되면서도 완전하게 내가 지켰다고 할 수 없게 미끄러져 간단 말이지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더 높은 하늘이 있는 것처럼, 뭐든지 내가 시도해서 하려고 한다면 자기 몸을 피곤케 하는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보면, ‘끝없는 논쟁’ 끝도 없이 갈 때까지 가는 거지요. 이 사람들은 율법이 바로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요. 9절에 보면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이런 항목들.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이런 경우를 당하잖아요. 이런 경우를 볼 때에, 율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내부를 완전히 해체하는 용도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말이 어려운데 쉽게 이야기합시다.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말은, 쉽게 예를 듭니다. 제가 지금 안경을 씁니다. 이 안경은 희한한 안경이어서 사람의 죄를 아는 율법적인 안경이라 합시다. 안경을 쓰면 인간의 모든 죄가 보이지요. 그런데 이 안경은 누가 쓰는가? 심판 주. 예수님만 쓸 수 있는데, 에덴동산에서 “안경 쓰지 마라. 이 안경은 너희들이 쓰는 것이 아니고 심판 주가 쓰는 거야.” 라고 했는데, 마귀가 와서 하는 말이 “안경 너도 써. 안경 쓰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는 거야. 너를 심판하는 기준을 네가 빼앗아가 버리면 누가 너를 심판해?” 이렇게 나왔단 말이지요.
심판하는 그 자리를 내가 점령해 버리면 누가 더 이상 심판할 자가 없잖아요. 이게 마귀가 노리는 것 아닙니까. 불신자들에게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다고 하니까 “나는 예수 안 믿으면 그만이지.”라고 해요. ‘예수님이 심판 주다.’ 라고 믿기 보다는, ‘나는 예수 모른다.’고 하면 아예 심판도 없을 것이 아니냐는 거지요.
이처럼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부터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을 심판할 권한도 없고 자기가 누구한테 심판 받을 이유도 없이 되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왜 죄냐 하면, 그것이 생명나무와 같이 못 있는 이유가 되었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영원히 살 권리를 박탈당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악이에요. 생명나무를 못 먹는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이것은 결국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심판해?”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넌 죽어 마땅해!”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런 성질을 아담 안에서 계속 이어받으니까 그 다음에 율법을 주면, 이 율법을 사람들은 몽땅 그 내막을 알아서 다 떼면 더 이상 누가 나를 지적할 사항이 없게 된다고 생각해요.
다시 합시다. 율법 말고 예수님의 의로 구원 받는 사람은, 율법 말고 의로 구원 받아서 예수님의 의를 자랑하는데, 계속 율법에 미련을 가지고 율법을 완전히 다 알아서 소지하려는 사람은 “내가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데, 내가 뭐가 잘못 됐는데?”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자랑할 게 율법 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정도 하면 완벽하지. 더 이상 내가 천사도 하나님도 아니고 이정도면 됐지.” 하고 자기 변명에 나선단 말이지요. 누가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그래서 성화론이 이단입니다.
성화론의 관심은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이만큼 성화되었다. 나도 성경 안다.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 만날 안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을 내 소유용으로 만들려고 해요. 그렇게 해서 어떤 것도 나를 지적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수치를 줄이고 당당해 보려는, 그러니까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바로 성화론이란 말이지요.
‘율법 외’인데, 그것이 아니고 사다리타고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목사는 로마서 8장을 설교하면서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은 율법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온전히 이루려 하심이다. 예전에는 성령을 못 받아서 율법 못 지켰는데, 이제는 성령 받아서 제대로 한번 지켜봅시다.”
다 지켰다 합시다. 그러면 남는 게 뭡니까? ‘다 이루었다.’는 거지요. 그럼 “네가 뭔데?” 자기가 예수가 돼 버려요. 다른 차를 타야 되는데 다른 차는 안타고 그 차(율법) 속에서 완벽한 신이 되고자 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오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기쁨보다도 “너는 참 훌륭하다.”는 소리가 더 기분 좋은 거예요.
“너는 죄 없다.”하는 소리가 더 기분 좋은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필요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필요 있느냐? 미리 봅시다. 1장 15절 봅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전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율법에 대해서 흠이 없는 자”라고 했어요. 율법을 내가 제대로 몰라서 율법을 내 구미에 맞게 선택해서 내 잘남을, 내 의로움을 확인시켜주는 변명거리로 율법을 사용하니까 ‘율법에 대해서 내가 완전한 자’라고 했지만, 실은 ‘율법 아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다 죄인이다.’
그래서 이 성경을, 예수 믿었다고 이 성경을 덮지 말라는 거지요. 성경은 율법적 기능으로써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지적하고 또 지적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다른 차를 탔다는 기쁨이 오지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기쁨이 있지요. 성경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이런 기쁨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당신만 죄인 중에 괴수냐? 우리도 죄인 중의 괴수다. 그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끊임없는 변론’을 왜 합니까? 다 너보다 내가 더 잘났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평소에 우리가 생활하는 모습 아닙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자기의 수치를 줄이는 쪽으로 행동한다고.
왜 여자아이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난 후에 피부 관리하고 쌍꺼풀 수술하고 왜 그렇게 합니까? 좀 더 완벽하게, 좀 더 완전하게. 내가 원하는 진선미가 있잖아요. 진은 대학에 입학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으니 됐고, 선은 앞으로 두고 봐야 할 것이고, 제일 쉬운 게 미가 당긴단 말이지요. 그래서 완벽한 아름다움 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제가 박사교회 있을 때 형님이 헐값으로 중고 프라이드(기아 자동차)를 줘서 처음 승용차를 타게 되었는데, 그 때 소원이 뭐냐 하면 프라이드 베타를 타게 된다면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정말 했습니다. 프라이드와 프라이드 베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차 뒷부분이 베타는 툭 튀어나왔습니다. 차를 몰고 가는데 프라이드 베타가 옆에 지나가면 공연히 주눅이 들고, 약간 시기심도 있었어요.
프라이드까지 오니까 프라이드 베타가 얼마나 좋은지 보인단 말이지요. 지금은 리오(기아 자동차)를 타는데, 프라이드 베타는 차도 아닙니다. 그 차 생산 중단 되었을 걸.
사람이 24시간 하는 일이 그거예요. 보다 완벽하고 좀 더 높게, 좀 더 우수하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내 속의 욕망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엘런 포우의 단편소설에 [어셔가의 몰락]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여기에 보면 이 귀족은 가장 맛있는 것, 보다 아름다운 옷, 보다 감미로운 음악 이런 것들을 찾다보니까 나중에는 망했어요. 더 찾을 것이 없어서. 뭘 먹어도 맛있는 것이 없어요. 완벽하게 맛있는 것을 찾다보니까 그런 게 없어요. 어지간한 것은 다 먹어봤는데 맛이 없어요. 웬만한 명품은 다 입어봤는데 이제 그건 것도 싫증이 나요.
이것을 ‘욕망 체감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욕망을 원하면 원할수록 자기가 선택할 폭은 점점 줄어듭니다. 이것이 부자의 딜레마입니다. 부자의 고민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칠 지경에 까지 갑니다. 거꾸로 돌아가기도 해요. 일부러 보리밥 먹어 보기도 하고.
보석 귀한 줄 알았지 밥한 끼 귀한 줄 몰라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아프리카 난민들 도와주고 착한 일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런 일도 두 세 번 하면 재미없어요. 자극이 없어요.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나를 어떻게 고치면 됩니까? 어떻게 발전하면 됩니까?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 내가 너를 이런 식으로 구원해 줄게.’ 이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방주는 임시적인 종말입니다. 그렇지요? 방주에 들어갈 때 세상 끝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방주에서 나와요. 이것이 뭐냐 하면, 구약의 한계가 이것입니다. 구약은 모든 것이 종결된 상태가 아니고 뭔가 예만 보여줘요.
구약에는 TV가 우리 바깥에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가 불났다고 해서 그것으로 롯이 구원 받는 것은 아니거든요. 항상 우리는 구약적 관점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좀 더 완벽했으면 하지만 항상 이런 것은 일시적으로 해서 끝납니다. ‘아, 은혜되더라.’ 은혜 되도 몇 분 못갑니다. 그것을 아예 인정해 주세요. ‘아, 지난 주 설교 은혜로웠는데 그 은혜가 좀 오래 갔으면 좋겠다.’ 그 은혜 오래 안 갑니다. 또 오래 안 가게 해요. 하나님이. 집에 돌아가는데 갑자기 차 시동이 안 걸려 은혜고 뭐고 다 날아가 버려요.
성경을 깊이 보면, ‘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건져주셔야 하는가?’ 이것을 알게 됩니다. ‘왜 나는 나에게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존재인가?’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인간은 율법을 알리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내 구원을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얼마나 무섭고, 율법은 우리를 아예 죄인으로 간주하고 들어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 아래 있게 한단 말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약속 안에 있잖아요.” 라고 하는데, 약속 안에 있어도 율법 아래 있으면서 약속 안에 있습니다. 아까 했잖아요. TV가 들어와서 TV는 항상 우리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면서 그 위에 예수님의 피를 묻히고, 그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는 거예요. 죄 빼고 은혜만 달라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단 말이지요.
‘감자탕에 왜 감자가 없냐?’ 고 하는데, 한 날은 버스에서 라디오를 들어보니까 그 감자가 식물성 감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돼지 등뼈를 감자뼈라고 한답니다. 감자탕에 감자가 많은데 내가 생각한 감자는 없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이 어떤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가 창조되고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은 사라져도 말씀은 우리 속에 남아 있다. 그 말씀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그 약속대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이런 것은 우리가 우리를 더 높은데 사다리로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다리로 올라가지 말로 다른 차로 바꿔 탑시다. 사다리 있는 소방차 타지 말고. 이번에 알았어요. 소방차 있다고 불 안 나는 것이 아니라고. 인간은 대비책이 없습니다. 소방차 있다고 해서 불 안 나는 게 아니에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는 다른 차를 타고 있습니다. 다른 차를 타고 있으면서 뭘 본다? 소방차의 사다리로 올라가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저렇게 사니 주께서 일방적으로 구원하셔야 하는구나!’ 그걸 발견하는 겁니다.
9절에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를 위해 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세상에 존재해야 주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대목을 보면서, ‘율법은 선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자도 선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율법을 다 지켰다. 그래서 율법은 나와 상관이 없고 나쁜 사람을 위해서만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은,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너, 율법으로 구원 받을래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을래’ 그러니까 자기 구원하려고 뭔가 따로 내려온 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속성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자기 살기 위해서 ‘율법으로 할까, 예수 믿을까?’ 이런 식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내가 선택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선하다.’ 라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율법은 율법대로 체험하면서도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율법을 보면서도 ‘아, 나는 율법으로 보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익히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으니까 율법만 놓고 보니까, 이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자기가 삼켜서, 율법을 다 떼는 식으로 그렇게 자기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런 인간적인 행함으로 바꾸려고 하지 마라.’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4절 초반에 나옵니다.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족보라는 것은 전통, 역사 아닙니까. 그 다음 “신화”도 마찬가지고.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열심이고 하나님의 행함이죠. 그것이 적혀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이지요.
5절에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네가 사랑을 보여주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뭐예요? 사랑은 단절이 아니고 연결입니다. ‘내가 널 사랑한다.’ 이 말은 ‘너와 내가 남남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연결되어 있어요. 끊어짐 없이 한 덩어리로 연결된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바티유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아주 잘 표현했어요. 사람이 죽을 때 우는 사람과 안 우는 사람이 있는데, 우는 사람은 평소에 죽은 사람과 사랑으로 연결된 사람이고, 안 우는 사람은 사랑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의 사랑이라는 것은 자꾸 딴 몸으로 느껴지지 않고 내 손가락, 내 발가락처럼 나에게 붙어있는, 떨어질 수 없는 한 덩어리처럼 느껴질 때 그 때 비로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사랑이죠.
진짜 성도 같으면 이런 사랑의 모습으로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안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한 몸이죠. 한 몸이기에 자연스럽게 사랑이 나오죠. 누구를 바라볼 때? 끝없는 족보, 내 잘남 이것이 아니라 예수님 쳐다보면 이제 한 몸인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
한 몸일 때는 왼쪽 손과 오른쪽 손이 경쟁합니까? 안 하잖아요. 같은 몸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끝없는 논쟁은 결국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논쟁하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자는, 주님의 사랑과 한 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나는 잘났다. 그러니까 나에게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라.’는 것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잘남을 자랑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에베소 교회 내에 많이 퍼졌던 모양이에요.
12-13절 봅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할 때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뭐냐 하면, 사람이 누구한테 자랑할 때 ‘나는 이만한 자격이 된다.’ 이렇게 자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이 죽이려고 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됩니다.’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죠.
‘나는 당신들을 잡아 죽일 사람이기 때문에 정말 주님이 맡겨준 이 일을 할 자격이 된다.’ 이 말이거든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나는 예수 믿는 놈 다 죽인다.’ 라는 말을 실제로 했고, 그렇게 사람들을 죽여 왔기 때문에 그야말로 내가 사도 직분을 감당할 사람이 맞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입장에서 참 적합하다고 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바울의 이런 말을 듣고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죠. 우리교회 그런 사람 한 분이 오셨어요. 그분은 서울대학 나오신 굉장히 똑똑한 분인데, 말을 할 때 앞뒤 다 끊어버리고 결론만 던지니까 듣는 사람이 다 놀라요. 예를 들어서, 친구가 교회 가면, “우리 교회 가서 죄짓자.”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듣는 사람은.
교회 가는 친구에게 “너 미쳤다.” 이렇게 해요. 이것은 “네가 다니는 교회는 교회 아니다.”라는 뜻이거든요. “왜 교회 가서 왜 죄짓나? 교회 가서 착하게 살아야지.” 교회 가서 죄 짓자는 말을 알아야 복음을 제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앞뒤 다 끊어버리고 결론만 던져버려요. 그래서 듣는 사람이 시비는 거는(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이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설명을 좀 붙이시기 바랍니다.’ 라고 부탁을 합니다만, 사도바울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동안 예수 믿는 사람을 폭행했고, 예수님의 면상을 때렸기 때문에 그야말로 내가 예수님을 증거할 적임자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나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줄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나는 반대편 쪽 사람인데 반대자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으니 세상에 이런 놀라운 보너스가 어디 있냐는 말이지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디모데후서에 나오는데 한 번 봅시다. 1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계획 잡힌 대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그 은혜대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나 같은 인간도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을 봅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여기 한 번 적어볼게요. 앞에 괄호하고 ‘세상에 임하셨다.’ 그 앞에 괄호를 했는데 뭐가 들어갑니까?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여기에 ‘죄인’이라는 말이 있지요?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공식 아닙니까. 이 공식이 성립되려면 구원 받은 모든 사람은 어디에 다 들어가야 돼요? ‘나 잘났다. 똑똑하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신학 했다. 나 목사다.’ 이것 다 때려치우고 어디에 집어넣어야 돼요? ‘죄인’에 집어넣어져야 그 사람의 입에서 제대로 ‘예수님이 세상에 임했다’가 증거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 공식을 누구한테 적용시킵니까? 자기 자신부터 우선 적용합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 되어야 비로소 죄인 된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임하신 이유를 이 공식대로 자기를 앞장세워서 공식대로 증거할 수 있단 말이지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임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즐겁습니까? 자기가 죄인이라서 절망한 사람. ‘야,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었다.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나는 죽으면 지옥 갈 거야.’ 라고 하는 사람에게 이 공식을 들이대면 효과 만점입니다. 그렇겠지요?
이 사실을 성령이 임해서 그 사람이 믿으면 그 사람은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오늘날 우리에게 좀 시들한 것은 우리가 사다리를 타서 죄에 대해서 자꾸 완벽하려고, 죄인의 공식에서 벗어나서 다른 공식, 내가 하나님의 법대로 위대한 나를 자꾸 생각하니까, 이 공식이 안 들어오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임한 것이 별로 안 들어와. 왜? 자신이 너무 잘났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죄인 되기 위해서 지하 퇴패 이발소에 갈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나쁜 짓 안 해도 살아가면서 시기와 질투와 미움 이런 것이 우리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계속 나와요. 온갖 더러운 것이.
우리나라 이명박 내각의 평균 재산이 얼마입니까? 46억.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 ‘저것들은 뭘 해서 저렇게 많이 가졌나?’ 하는 시기심과 질투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눈에 보일 때마다 시기와 질투. 뭘 봐도 시기와 질투. 한 시도 시기와 질투가 안 나올 때가 없어요. 24시간 시기와 질투가 나와요. 하루 중 단 1초라도 ‘나는 죄인이다.’ 가 나오면 다행입니다.
15절 끝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그 다음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만드신 방정식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압니다. 약속 백성의 특징은, 하나님의 약속은 본인이 원치 않아도 약속이 힘으로 약속 속에 담아놓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세상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해도 우리에게는 죄가 나옵니다. 시기와 질투가 나오고. 그러다가 누가 좀 잘 해주면 ‘해 해’ 거리면서 좋아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는, 평소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기쁨이 얼마나 없었으면 우리가 원하는 좋은 것을 주셨다가 그것을 도로 빼앗아가요. 그러면 우리는 굉장히 기분이 나빠요. 그러니까 이것은 평소에 공짜로 구원해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을 감사해야 되는데 자꾸 우리는 뭔가 더 소유하면 기뻐하고 내 것이 줄어들면 짜증내는 이런 것이 죄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오게 되고, 또 시들해 지고 그런 일이 반복됩니다. 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죄인도 구원했다는 이 기쁨이 우리가 소유한 기쁨보다 더 월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많이 하지요.
이번에 헬기 추락해서 7명이 죽었어요. 유족들 난리 났잖아요. 나이 90 되어서 노망해서 죽기를 기다리다가 죽은 것이 아니잖아요. 잘 죽었다고 하면서 기쁨의 장례식을 치른 것이 아니지요. 가장들이고 평소에 자식들이 기대하고 의지했던 아버지입니다. 군의관은 그 아내가 임신한 상태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아이는 아빠 없는 아이지요.
사람의 평소 모든 행동은 수치를 감추는 식으로 움직이는데,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수치라. 왜? 아버지가 없으니까. 이걸 누가 책임집니까? 이 자존심 상함을 누가 책임지겠어요.
공지영이라는 작가가 아프리카에 가서는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항의를 했답니다. “신이시여, 진짜 당신이 살아 있다면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습니까?” 반항을 하려면 처음부터 반항하지 꼭 그런 장면을 봐야 반항합니까. 인간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지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은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다 욕할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어디 나를 건드려. 내가 얼마나 사다리로 올라가서 천당 가려고,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내 사다리를 걷어차서 땅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떨어져서 수치스럽게 하고, 왜 헬기가 추락해서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아야 하고, 왜 하필이면 그 때 눈이 와서 시야가 흐리게 했으며 ---
“왜 하필이면 ---”하고 1장에서 20몇 장까지 계속 원망하는 것이 욥기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이런 소리 할 때는 이미 도를 텄어요. ‘인간아, 내가 있고 하나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차후에 만들어졌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약속 아래 있는 사람은 이런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좋은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는 아담과의 연속성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그 성질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주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이렇게 화내고 죄만 지어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긍휼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행위를 고치라는 말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심지어 환란과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딩동’하고 전해지는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 안 봐도 굶어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봄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며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죄인 노릇하면서 살아가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한 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16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는 인내심이 택한 백성 구원 받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망쳐 보세요. 우리 돌아올 때까지 주님 재림 안 하십니다. 모든 것을 올 스톱하고 기어이 우리에게 긍휼을 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기어이 우리를 낚아채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믿노? “날 봐라. 나는 예수 믿는 사람 체포하고 잡아 죽였다. 하지만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날 구원했어.”
아직도 주님이 재림하지 않는 이유는 구원 받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자기 숙제를 하셔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혼자서 완벽하고 완전을 기하려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하나님이 구원할 모든 사람들은 다 아담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긍휼 때문에 우리가 거저 구원 받은 겁니다.
그래서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인간은 자기 행위로 의인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서 그 다음에 긍휼이 더해져서 구원하시는 이 공식, 죄인 되게 하고, 그 다음에 긍휼을 알게 하시고, 오직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이 방정식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여기서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방정식대로 매일같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 때문에 이 방정식대로 진행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지 여러분이 울며 기도해서 이 방정식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죄인 되게 하시기에 여러분들은 매일 시기 나고 질투 생기고 그렇습니다. 장사하면서 옷 사러온 손님이 30분 기웃거리다가 ‘맞는 것 없네.’ 하고 갔을 때, 가까운 곳에 벽돌이라도 있으면 던지고 싶습니다. 이것이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것만 보지 말고 방정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있어요. 주께서 세상에 임하신 이유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나 같은 인간 건지시려고 오셨구나. 그런데 또 손님이 오게 되면, 아예 죄인이기 때문에 각오를 해요. ‘30분쯤 뒤지다가 그냥 가세요. 그것도 극복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꾸 뭔가 하려고 하고 뭔가 안 하면 미진한 것 같고, 괜히 수치스러운 것 같고 이 모든 것이 아담의 죄 때문에 온 버릇이고 속성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이며 예수님의 긍휼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 3. 18. 10:36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