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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 3월14일강의 엡2장10절 예비하사, 선함이란강의에베소서

서울 3월14일강의 엡2장10절 예비하사, 선함이란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92)

080314 엡2장10절 예비하사, 선함이란

우리교회(IP:124.♡.85.92)

08-03-15 11:44

우리교회(IP:220.♡.176.141)

08-03-26 17:55

서울080314a엡2장10절1에베소서 제 7강 (이 근호목사, 2008년 03월 14일(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우리의 의견은 일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그런 것은 일체 여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는데 우리와 의논을 해서 우리 의견을 들어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고, 그런 것은 이미 우리 소관에서 떠나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만한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도 걱정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능력을 발휘하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이, 네 안에 능력이 있는데 좀 발휘를 해 보시죠”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착한 사람이 되었으니 슬슬 착한 일을 시작해야지!” 그렇게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논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부치느냐 하면, 우리가 방금 읽은 에베소서 2:10에 보면 “예비하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미리 예정하사, 미리 준비되사, 그런 뜻입니다. 미리 정해졌다는 말은, 미리 정한 그 프로젝트, 그 과업, 숙제, 거기에 필요한 일, 거기에 필요한 능력, 무엇보다도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몇 년 몇 월 몇 시에 태어나야 하는 것 까지, 이미 그것은 우리 소관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겁니다.

우리 보기에는 저 어린애가 우연히 태어난 것 같습니다(사실 우리 쪽에서 보면 그냥 우연히 태어난 것이 맞지만). 엄마 아빠가 이런 코, 이런 눈을 가진 아이를 낳자고 다짐을 했는데 과연 그런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부모는 한명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태어난 것뿐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나는 이런 아기를 원합니다, 라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아이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아이들도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바가 되고 하필이면 그 부모의 몸을 빌어서 그냥 태어난 겁니다. 쑥 빠진 거죠. 그것을 볼 때에 이 성경말씀, 에베소서를 보면서 철저하게 내가 이렇게 해보겠다는 자기의견을 거기에 집어넣지 마세요.

집어넣으면 손가락이 부러지는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라는 것을 집어넣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럼 이제부터 나는 목사님의 말씀대로 놀겠습니다” 하는데, 이 놀겠다는 것도 집어넣는 거예요. 그냥 놀겠습니다, 하는 것도 일하겠습니다,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부산강의에서 그런 소리를 하니까 아주 목사님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왜냐하면 목사님이 복음을 설교하면서, “주님께서 예정하사 주님의 은혜로 헌금을 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헌금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죄입니다”라고 하니까, 교인들이 무엇을 잘라버리냐 하면,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하십니다”라는 그 부분은 가위질을 해서 잘라버리고 뒤에 있는 무엇만 딱 챙기느냐 하면, 헌금하는 것도 죄입니다, 라는 그것만 딱 챙겨서, “헌금을 해도 칭찬들을 것이 못되는데 내가 왜 헌금을 해? 헌금 하나 안하나 죄라면, 이왕 죄가 될 것 같으면 헌금 안하고 죄인 소리 듣는 것이 돈이라도 남기는 것이 되지”라는 계산이 서서 헌금을 안 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습니까?” 이렇게 물은 것인데 교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무엇을 하면 복을 받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헌금하니까 죄가 된다면 안하면 된다’고 나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아예 못 들은 척 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한테는 예수님은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제 계신 분이 아니고 실제로 있는 것은 내가 만져볼 수 있는 내 손가락과 얼굴과 내 몸만 실제로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바도 없고 본 일도 없기에 일단 없는 것으로 치고, 현재 있는 것은 내 손이 있고 내 발이 있고, 이것 가지고 뭐 할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인가,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생각하니까 에베소서를 설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사” 하면 그 이야기를 안 듣는 거예요.

나의 운명을 누가 예비한다는 것은 관심이 없고, 지금 내가 이렇게 한 것을 이렇게 고치면 내가 어떻게 되느냐 그것에만 관심이 있지, 누가 나의 운명을 예정해서 그 예정한 운명대로 한다는 것은 못 믿겠다는 말입니다. 못 믿겠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듣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사” 빼버리고, “하나님이 예정하사” 빼버리면 성경 에베소서든 마태복음이든 누가복음이든 할 이야기 하나도 없습니다.

물리학에서 아인쉬타인이라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는 3차원이었습니다. 3차원이라는 것은 어떤 위치를 표시할 때, 두 개 붙으면 2차원, 하나 붙으면 1차원, 하나도 없으면 0차원이 되는 겁니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평면에 점을 찍을 때 x좌표와 y좌표를 구하면 그 두 좌표를 이용해서 평면에 점을 찍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를 정할 때 몇 개가 필요하냐고 할 때 두 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겁니다(2차원).

그런데 어떤 공간에 입체를 표현할 때는 x,y,z 라는 세 가지 좌표가 필요하다고 해서 이것을 3차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인쉬타인이 나와서 이 삼차원에다가 시간요소를 집어 넣어서 4차원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몇차원이냐, 10차원, 12차원이 나옵니다. 차원이 높아졌어요. 아무리 차원이 높아져도 그 기본은 상식적인 것, 3차원에서부터 출발해서, 3에서 4, 3에서 5, 3에서 6, 이렇게 3차원을 기본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차원이 영적 차원이 되어 버립니다. 지상의 인간들의 차원은 현재 내가 있다 여기 있는 내가 신이시여 뭐 할까요? 이것은 육적인 차원이고, 3차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정했다, 그 예정한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뒤집어 쏟아져 내려오는가? 이것이 영적 차원입니다. 성경을 육적인 차원에서 보게 되면, 원인을 이렇게 집어넣으면 그 결과가 반드시 방정식처럼 이런 식으로 나와주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힘을 주니까 올라간다.” 여기서 원인이 있고 원인 다음에 결과가 있습니다. 결과 없는 원인 없고 원인 없는 결과가 없습니다. 이 원인에다가 자기 자리를 채우는 겁니다. 어떻게 했더니 이렇게 되었는가? 이 아무개 장로님이 어떻게 했더니 대통령까지 되었는가? 그러면 나도 이 아무개 자리에 들어가서 그렇게 하게 되면 대통령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참모급 정도는 될 수 있다는 계산을 하는 겁니다.

이게 소망교회 아닙니까? ‘이아무개장로가 소망교회 다니더니 대통령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소망교회 다니면 대통령까지는 안 되더라도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습니다. 이 때 그 원인자가 누구냐, 바로 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원인자이고 내가 원인자이고 내가 원인자로서 꼼지락 거려서 어떤 행동을 했더니만 이렇게 약속된 결과가 나왔다는, 그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성경에서 인간이란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원인에서도 인간은 빠지고, 결과에서도 인간은 빠지고 그 중간에 들어가는 매개체의 자리에 사람이 있어서 원인도 영적이고 결과도 영적으로 올라가는데 다만 사용하는 것은 인간을 사용해서 올라간다는 겁니다. 인간이 매개라는 것은, “뭐가 통과했네? 뭐가 쑥 지나간 것 같아” 이렇게 누군가 나를 가지고 노시는 것 같아요.

나를 가지고 다루는 것 같고, 나를 가지고 사용한 것 같이 와서 스치고 가버릴 때 그 때 전선에다가 전기에너지를 지나가게 하면 철사가 열이 올라서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처럼, 갑자기 주님을 만나니까 내가 벌겋게 달아오르죠. 달아오르면서 결과적으로 “너는 구원되었다. 너는 영생 얻었다. 내 살과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누구도 영생 얻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약속된 것이 뭔가 통과되고 보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이미 구원받은 상태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신분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목사님, 그것 참 듣기 좋은데, 그러면 나도 그 매개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매개체가 되면 안됩니까?”라고 합니다.

보세요. 매개체란 매개체 쪽에서는 원인도 가입 못하고 결과도 가입 못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냥 중간과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면 나는 그좋은 중간과정이 될 수 있습니까? 중간매개체가 되지 못했다는 그 결과를 가져와서 그 원인을 또 이 매개체 밑에 달아요. 그래 놓고는 “그 원인에서 어떻게 했더니만 당신은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 되었습니까?”라고 또 이렇게 묻는 거예요.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며칠 했더니만 주의 종이 되었습니까?
“설거지 하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설거지해서 성령 받을까요?”

또 그렇게 묻습니다. 설거지 하다가 성령 받았다는 말은 설거지하고 성령 받은 것과 관계가 있다, 없다? 관계없다는 거예요. 설거지 하는 것을 구원되면 식당 아줌마들 다 구원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반사람들은 기껏해야 3차원에 있기에 기껏해야 자기 육적인 생각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몇 차원 해봐야 다 삭제해 버리면 3차원밖에 남지 않으니까.

육적인 생각밖에 나오지 않으니까 육적인 생각이 납득이 되는 식으로 자꾸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서 안 그러면 교회 나오지 않겠다고 버티는 겁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성령을 받았거든요.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았으니까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것은 육적인 일이라고 아울러서 이야기를 해버립니다.

“육적인 일은 이런 것이고요, 육적인 일은 이런 것입니다”하고 양쪽 이야기를 다 해버리니까 사도바울 말을 들어버리면 평소에 하고 싶은 것이 다 육적인 일로 분류가 되어 버립니다. 참 사도바울이 얄밉죠. “복음이 이렇습니다” 하면 될 텐데 꼭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니올시다.” 이렇게 나옵니다.

교인 쫒아낼 일 있습니까? “이것이 복음이다” 하면 될 텐데 “이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하면서 배타적인 속성을 가지고 쳐버린다는 말이죠.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바울의 말이 나오죠. 사도바울이 성령 받은 사람이고 설교도 백점짜리 설교입니다. 그 설교도 성령에 의해서 한 설교입니다.

우리네 상식 같으면 사도바울이라는 원인이 성령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기에 사도바울이 설교하면 다 먹어 주리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도다. 옳도다 그렇게 된 것이 (너는 잘려야 될 인간이기에) 네가 잘려야 될 인간인 것을 전하기 위해서 설교를 한 것이다.”

설교를 한 것은 사람 하나를 꼬드기고 포섭하기 위해서 설교를 한 것이 아니고, 예정된 자와 예정되지 않은자가 이 지상에서 이미 분류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매개체와 매개체가 아닌 사람이 이미 분류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상당히 냉혹해요. 사도바울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냉혹해야 하는 그 이상으로 사도바울은 본인 자신에게 더욱 더 냉혹하게 대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나는 사람에게 금이나 은을 탐내지 아니하고, ‘받는 거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 하여 나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자기한테 냉혹합니까?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대가라는 것을 기대 할만도 합니다. 마귀의 시험 드는 요소가 대가 아닙니까? “이만큼 했는데 왜 성과가 이것 밖에 안 되는가?” 이것이 대가 아닙니까?

갑작스레 자기가 매개체인 것을 모르고 갑자기 자기가 주체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뭐가 와서 뭐가 통과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율법이고 내가 뭔가를 개시했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로부터 나온 것은 철직이 반드시 그 결과를 자기가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안심하는 버릇이 있어요.

나로부터 모든 것이 생각이 나오고 내가 기안을 했으면, 그것이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내가 최종적으로 확인해서 마지막 판단은 내가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심판주는 내가 아니고 누구입니까?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누구에게 맡겼습니까?

요한복음 5:22,23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 맡겼잖아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 맡겼다는 말은 누구에게는 안 맡겼다? 나에게 안 맡겼어요. 그러니까 교회 목사가 집사보고 당신은 이단이야, 라는 소리를 해도 그것은 쓸데없는 심판이 되는 겁니다. 목사가 집사보고 이단이라는 소리를 해도 그것은 그냥 화가 나서 하는 소리지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먹어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심판주가 아니거든요.

그런 소리를 듣는 집사도, ‘목사님은 나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구나’라고 그냥 여기면 될것인데, 십자가 지지도 않고 심판주가 아닌 목사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그 소리를 듣고 삐져서 집사가 교회를 안 나온다는, 이것은 또 무슨 도발입니까? 지금 제가 의존교회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의존교회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잖아요.

앞으로 어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없다는 말입니다. 당장 한사람이 아쉬운 판국인데 목사가 누구에게 욕을 하겠습니까? 목사가 그랬다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님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목사가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삐지는 그 집사도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 심판권이 예수님에게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했으면 예수 아닌 자가 어떤 것을 이야기를 해도 거기에 대해서 ‘음, 나의 신앙을 흔들어 놓으려고 저렇게 장난을 치는구나’라고 이렇게 보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을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미움을 받”는다고 하지요? 이게 누구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습니까? 자기이름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는 관계에 놓인 사람이 예수님의 매개체입니다. 그 외에는 예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없어요.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아야 될 운명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옷이 쫙 진열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3차원적 상식으로는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맞는 옷을 여러 옷 중에서 골라서 입는 것이 상식입니다. 부처를 믿을까, 예수를 믿을까, 그것도 내가 먼저 있고 나에게 유리한 것이 예수냐, 부처냐를 골라서 나에게 유리한 것이 부처이면 부처를 믿고 나에게 유리한 것이 예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남대문 옷부터 만들어놓고 그 옷을 입을 사람을 차후에 이 땅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참 이런 소리를 하니 못 알아듣지요. 옷부터 먼저 있어요. 예수님의 속성이 먼저 있어요. 그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중간과정, 중간매체로서 활동하기 위해서, 그 속성에 맞추어서 우리가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증거를 대라고 이야기한다면 증거를 대 줄게요. 어디에? 에서와 야곱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계시가 딸려서 태어납니다. 그 뒤에 줄이 있어요. 우주인들이 우주에서 유영을 할 때 무엇이 있던가요? 요새는 과학이 발달해서 그것도 없지만. 그 뒤에 줄이 달려 있습니다. 그 줄이 끊어지면 아슬아슬 하지요.

우주를 헤엄칠 때 뒤에 줄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 뒤에 탯줄처럼 예수님의 속성이 계속 우리에게 빨대처럼 쫙 쫙, 주입될 수 있도록 주님의 파이프가 우리에 등허리에 꽂혀서 온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에서는 창세전부터 뭐하게 되어 있고? 미움 받기로 작정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예비하사”입니다. 에베소서 1:5에서는 “예정하사”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미움 받는다는 것이 헛소리가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미움 받는다는 것은 남대문 시장 옷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미움 받는 사람이 기어이 되게 만드는 능력은 빨 때 꽂아서 찾아오신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요. 복음이 얼마나 간단합니까? 무지 간단하지요. 성경의 내용이 간단하지 않습니까? 간단하기는 한데 너무나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너무나 거꾸로이기 때문에 난감하지 복음안의 영적원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하나의 저수지라면, 창세전의 저수지에서 물길이 여러 갈래로 흐르는데 a b, c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에게서 여러 갈래의 물길이 내려오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것을 믿음의 선진들이, 노아는 방주 만드는 것으로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줬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속성 일부를 보여줬고, 모세같은 경우에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함으로써, 요새 같으면 재벌 2세가 아닙니까, 재벌 2세되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백성과 고난받기를 더 원했다는 쪽으로 하나의 줄기로써 매개체로서 활동한 거예요.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12장 넘어오면 이처럼 우리에게는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같은 경우 어떤 때는 달랑 한명이 출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녹음해야 될 김 대식성도님과 설교자 나, 둘이 앉아 있습니다. 그 현장에는 둘이 있어도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은 두명이 훨씬 더 되는지 알수 없잖아요. 나는 80명 90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니까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허다한 증인들, 앞서간 사람 뒤에 오는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한명이든 두 명이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이게 오늘 강의를 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대목입니다. 에베소서 2:10에 보면 “선한 일”이 나옵니다. 그 선한일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 선한일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선한 일입니다.

왜? 예수님만이 주체가 되시고 우리는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한일이라고 하면 뭘 생각합니까?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선한 일을 자꾸 생각합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내 쪽에서 생각이 나가면 그 결과가 나에게로 귀환됩니다. 항상 뭘 해도 자기영광만을 위하여 개시가 됩니다. 내가 석류차를 이렇게 마시는데, 앞에서 “아, 맛있다”고 하면, “너는 뭔데?”라고 나옵니다.

내가 마셨는데 왜 저쪽에서 맛있다고 합니까? 내가 마셨으면 내가 맛있어야 되고 최후 판단은 내가 내리는 겁니다. 이게 날 때부터 아담에게 속한 버릇이고 상식입니다. 그런 인간은 뭐든지 뭘 생각해도 다 나 좋은 대로 합니다. 뭐든지 다 내 영광을 위해서 버릇처럼 하는 인간을, 성경은 그것을 주체를 바꾸어서 매개체로, “너는 주체가 아니야. 너에게 돌아올 것은 없어”라고 주체를 바꾸는 이 작업을 우리가 할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뭘 하지?”
“예수를 믿어야지.”

이것은 누구 좋으라고 믿는 겁니까? 이것은 자기 좋으라고 믿는 겁니다. 그것은 성경의 뜻도 아닙니다. 그래봐야 누가 좋습니까? 내가 좋아요. 내가 믿어서 옆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 좋으라고 예수 믿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믿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대학교에 복학을 해서 선교단체(한국대학생선교회, C.C.C.의 엑스플로)에서 4영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의자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당신이 지금은 이 의자에 앉아 있는 주인공이지만 의자에 앉아야 될 분은 예수님이기에 당신이 비켜나고 예수님을 여기에 앉게 해야 됩니다.” 그때는 제가 ‘아, 그렇구나’ 했습니다. 지금 보니 그게 거짓말입니다.

그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의자에서 내가 비켰다고 칩시다. 내가 비켜나고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힙니까? 예수님을 앉혔어요. 그 결과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변두리에 있고 좋아하는 중심은 누구입니까? 내가 중심 아닙니까? 중심지가 이동했을 뿐이지 여전히 중심은 내가 중심입니다. 4영리는 엉터리입니다.

제가 동대구역에서 버스를 타면 광고지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상담 합니다”라는 내용의 광고지인데 열 가지의 경우가 나옵니다. 시름시름 이유도 없이 앓는 병, 고부간에 갈등, 공부는 하면서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경우, 관재, 이사 가는 날, 부부 이혼문제…, 그런 것이 있거든 상담하라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그런 생각 했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누가 좋습니까? 결국은 상담하는 내가 좋잖아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교회 올 때 누구 좋으라고 옵니까? 교회 문 힘 있게 열고 들어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 아닙니까? 내가 들어오고, 내가 앉았고, 앉아 있다가 나갈 때도 누가 나갑니까? 내가 나가죠. 교회 잠시 왔다가 사라질 때 자기 좋으라고 교회에 오는 겁니다.

나 좋으라고 교회에 오는 것이나, 무릎팍 도사와 차이점이 뭡니까? 다 똑같습니다. 그게 무슨 매개체입니까? 사고방식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주께서 오라고 해서 참석했고, 주께서 가라고 해서 나간다고 되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한다.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사명을 가져야지.”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명이 먼저 있고 그 사명에 의해서 나는 교사 하게 되어 있다” 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는 교사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얼마를 주시렵니까? 나에게 그 대가를 얼마 주실 겁니까?” 결국 교사를 해 놓고는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것을 떼지를 못해요. 결국 교사하는 내 주체를 좋으라고 교사를 해 주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정이라든지, 예수 믿음이 단순히 3차원에서 영적차원으로 진입하는 그러한 내용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그런 방정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뭐든지 내가 심사하고 내가 하겠다고 하면 그 결과는 옆길로 새지 않습니다. 꼭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왔는지 옆길로 샜는지에 대한 최종판단은 누가 내립니까? 그것을 개시한 내가 내립니다. 그게 바로 반칙이며 엉터리입니다.

예정론을 이야기 할 때, “창세전에 구원되도록 되어 있고 믿도록 되어 있다. 참 기분 좋다”, 이것이 예정론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정론을 이야기 할 때는 “네 사고방식을 전부 바꾸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안 바뀌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바로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뭘 통과했습니까?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광야를 왜 통과했습니까?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약속의 땅이 있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안 바뀌면 그 땅은 없는 땅입니다. 사람이 그냥 사람에서 약속의 사람으로 바뀌어야 비로소 그 사람의 눈에는 땅이 있어도 약속의 땅으로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하신일 중의 하나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먹인 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인 것을 선한 일로 본 거예요. 왜냐하면 그 때 배고팠거든요. 그리고 경제적인 처지가 아쉬웠거든요. ‘내가 일 안해도 돈 팍팍 주는 사람이 없을까’라고 은연중에 내부에서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딱 맞게 해주니까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따라 다닌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선한일이 따로 있음을 가르쳐 주고, 그것은 선한일이 아님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하신 일인데 사람들은 그것이 선한 일인 줄 알고 확 달려드는 거예요. 여기 오다 보니 어떤 교회에 이런 표어를 붙여 놨어요. “십자가가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그게 뭡니까? 무릎팍 도사입니다. 믿기만 하면 소원대로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만사가 달라져도 혹은 안 달라져도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환경 바뀌면 하겠습니다. 환경 안 바뀌면 못 하겠습니다”라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환경의 주도권을 가졌었지만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환경과 관계없이 우리는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라는 뜻이 십자가입니다.

제가 고함지른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바뀔 생각은 안하고 자꾸 환경만 바꿀 생각을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니까, “너희들은 왜 따라 오느냐? 무슨 생각을 가지고 따라오느냐? 떡을 먹고 배부르니까 따라오지!” 따라오는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원하는 떡은 내가 줄 떡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왜? 그것은 생명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너희들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생명인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 이렇게 하니까 그 사람들 다 가버립니다. 그 다음 말이 재미있어요. “두 번 다시 예수를 따라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저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목회신학이라는 것을 배웠지만, 어느 강의시간에도 “예수님의 목회는 말 한마디로 따라오는 사람까지도 다 보내버리는 것이 예수님의 목회였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이거 우습지 않습니까? 저는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매우 심각하게 들으시는 것 같습니다. 선한일이라고 하니까 자기 주체 입장에서 선한 일을 생각하고 목회, 그러면 자기 입장에서 목회를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같은 목사 동창생인데 한사람은 큰 교회 당회장을 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열 댓명 교회의 당회장을 하면 누가 봐도 그 목회자를 비난 할 겁니다. “아이고, 쫄딱 망했구나”하고 욕을 할 겁니다. 물론 요새는 열 명도 아쉽지만요. 열 명이 다 뭡니까? 두 세명만 있어도 좋아요. 어찌되었건 누가 봐도 그것은 욕을 할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다 시계를 차고 있지요? 시계의 기능이 뭡니까? 시간만 잘 맞으면 되지요. 목사의 임무가 뭡니까? 목사의 임무는 매개체입니다. 남대문 시장에 걸려 있는 그 옷의 속성을 통과하게 되면 자기 교인 몇 명이냐 하는 것은 의미 없고, 히브리서 12장에 가면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봅니다.

증인만 지켜보는 것이 아니고 천군천사까지 다 지켜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가는 길을 천사들이 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길도 도왔고 예수님이 기도할 때도 천사가 도왔습니다. 예수님 끝까지 따라 온 사람 한사람도 없었고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기도할 때 다 엎어져 잤습니다.

그런데 엎어져서 자는 그 순간에 누가 도와줬습니까? 천사가 와서 힘을 북돋아 줬습니다. 천사는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공관복음에서 했던 그 선한 일은 시, 공간을 초월해서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일은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는, 이 3차원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가지고 선한일을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합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가버리는구나. 그런데 그옆에 보니까 무릎팍 도사가 와서 외치니까 사람이 많이 모이는구나. 사람 많이 모이면 헌금 많이 나오고, 헌금 많이 나오면 월급이 많이 나오고, 그리 되면 저 목사 자식은 생존에 유리하니까 잘먹고 잘살고, 나는 교인도 적고 헌금도 잘 안 나오니까 내 자식은 생존에 불리하고 죽을 판이구나. 그러니 나에게 무엇이 선인가? 나에게 선이라는 것은 내가 판단하니까 내가 생존에 유리하면 선이고 내 생존에 불리하면 악이 되니까, 복음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나도 그쪽처럼 해야 되겠다. 왜? 그것이 선이니까.’

목사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일반교인들과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했고 스데반집사가 어떻게 했는지, 그런 것은 보지도 않아요. 예수님의 선한 일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이미 성령 받고 난 뒤에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아버지의 뜻을 받들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시계는 뭐만 잘 맞으면 된다? 시간만 잘 맞으면 갑니다. 천원짜리든 만원짜리든 중국산이든 관계없이 시간만 잘 맞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아버지의 뜻만 증거하고 아버지의 뜻만 이루면 되는 거예요. 마귀가 와서 예수님에게 시험하기를 “예수여, 당신 밥 먹고 해라. 하나님의 아들도 밥 먹고 해야 되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아버지의 뜻이 나에게 생명이지 다른 것은 생명이 아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 하는 선한 일입니다. “아이고,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소. 예수님이나 그렇게 하지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할 수 있겠는데, 예수님만 하고 우리는 못하기 때문에 따로 추가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겁니다.

성령을 보냈으면 그때부터 모든 행동, 행동을 어떻게 해야 선한일이 되는지, 무슨 행동이 선한일인지는 이미 우리 소관에서 떠나 버렸어요.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만 매개체로서 나타나고 드러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선한일의 특징이 있다면, 그 밑바닥에 흐르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선택된 자에게만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지요. “내가 온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인데 아버지의 뜻은 뭐냐?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40)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8,29)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서 일하고자 하는 그것을 비록 우리 인간들이 못하더라도 주님은 해 내신다는 것을 믿어주고 인정해주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그 사람 속에 일어나고 있는 매개체로서의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소유가 아니고 수반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말 자체가 참 어렵습니다. 무엇이 왔기에 외부로 드러나는 반응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에베소서 2:8에 보면 “믿음은 선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유가 아니라는 말이기에 가지고서 어떻게 써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선물이냐 하면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산을 들어서 바다에 빠지게 해 보라”는 겁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이 한번 해 보시렵니까?

관악산 들어서 서해바다에 빠지게 해 보시렵니까? 안되지요? 우리가 그것을 못해서 안 된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보고 그것을 해보라는 뜻도 아니고 우리가 그만큼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믿음은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게 하는 그 정도에 못 미친다는 겁니다. 그 정도에 못 미치니까 예수를 믿을 수가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을 때, 내가 그 믿음을 가지겠다고 한다면 과연 나는 그런 믿음을 가졌다, 혹은 안 가졌다는 그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리지요. 그러니 그것은 사이비 믿음이 되는 겁니다.

내가 예상하고 내가 기억 속에 가지고 있던 그 같은 성질의 믿음을 은근히 요구하고 있다가 내가 필요한 그 믿음을 과거와 현재의 것을 임의적으로 뽑아서 조립해 낸 겁니다.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진짜 믿음이 선물로 오게 되면, 예수님께서 믿음줄 때 다 주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에게만 준다는 것, 달라고 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줄 사람 따로 있기에 예비 된 사람만 믿어지고,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사람만 믿어지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리되면 주체가 내가 아님을, 예수님이 이미 하셨다는 것을 남에게 증거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나를 약간 꼬집습니다. 안파요. 더 꼬집어요. 안 아파요. 더 꼬집어요. 그때는 아프네요. 이것은 내가 판단하는 거죠. 어디까지는 안 아프고 어디서부터 아프다는 것을 내가 느끼고 내가 판단하는 겁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하면 아프다는 것까지 알고 꼬집히는 그 강도도 내가 조절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나를 발길로 차면, 차이자마자 아야, 하고 쳐다보게 됩니다. 이것은 내 쪽에서 예상치도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의 예정을 믿는다는 말은, ‘내가 이렇게 하면 구원된다’는 그런 것이 없었는데 갑자기 누가 발로 차버린 거예요.

차여 보니까, “너는 창세전에 예정 되었어”라고 할 때 그 창세전에 예정되었다는 것이 이해되고 믿어질 때 그게 믿어짐은, 창세전에 예정된 것만 주의 뜻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 믿어지도록 하는 그 믿음까지, 내 소유가 아니고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나에게 개입된 거예요. 그런 뜻으로 지금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2장을 써 나가는 겁니다.

제발이 자꾸 틀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5-27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시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 볼 때 자기가 생각하는 선한 일만 따로 골라내고, 자기가 주체가 못되는 것은 전부 다 빼버립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 이야기를 안 합니다. 왜 안하느냐 하면 그것이 성경이 있다고 이야기를 해버리면 사람들이 “예정된 자만 구원된다면 나는 놀아도 되겠네. 교회 안 나오고 헌금을 안 해도 되겠네. 봉사를 안 해도 되겠네”라고 하면서 나태해져 버리면 교회가 돈이 안 되잖아요.

그것을 미리 의식하면서 “보세요. 헌금을 안 해서 저주 받았습니다. 당신이 원인이 되어서 뭔가를 해야 복을 받지 당신이 원인이 되어서 아무것도 안하게 되면 그 결과로 반드시 저주가 옵니다”라고 합니다. 전부 다, 저주와 복이란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가르치기를 원해요. 그래야 교회가 돈이 됩니다.

서로 서로 경쟁이 되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보람을 느낍니다. 왜? 옆 사람이 기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니까 그 결과는 내 몫으로, 내 영광으로 하나의 대가처럼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대가가 돌아온다면 나에게 돈이 한 100억이 있었으면 좋겠다.’ 100억이 있으면 그만큼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100억이 있다가 그 다음날 100억이 다 날아가면 그것은 내 생존에 불리하니까 하나님이 저주를 내린 줄 알고 있어요. 저주나 복을 뭐로 봅니까? 나의 생존에 유리하냐, 불리하냐, 이것을 가지고 따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애들한테 뭐라고 가르칩니까? 나쁜 친구는 사귀지 말라고 하죠. 나쁜 친구를 사귀게 되면 생존에 불리하다고 보는 겁니다. 좋은 친구 사귀고 공부 잘하는 친구하고 사귀면 생존에 유리하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참 모순 아닙니까? 공부 잘하는 친구입장에서 보면 그 친구를 사귀는 그 사람은 뭐가 됩니까? 나쁜 친구 아닙니까?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야지 한쪽은 좋은 친구 되고 한쪽은 나쁜 친구 되어버리며 앞뒤가 안 맞잖아요.

공부 잘하는 친구 사귀어서 공부 잘하면 소득이 올라가고 소득이 오르면 생존에 유리하고 그것이 선한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 다음에 나를 따라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부자청년이 가버렸어요. 돈이 생존에 유리하냐, 예수님이 생존에 유리하냐를 따져볼 때, 돈이 아무래도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3차원이고 육이 아닙니까? 그냥 간 것이 아니고 근심하면서 가버렸어요. 그래서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예수님보고 그럴 겁니다. “예수님이 실수했다. 일단 꼬셔서 빼먹을 것은 다 빼먹고 나중에 2차 작업으로 ‘예수 믿으면 구원 된다’고 하면 되는데 왜 초장부터 가게 하는가?” 그래도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뭡니까? 예정된 자는 그 말을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사람 많이 꼬시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라, 예정된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이상의 말을 해도 그것을 알아듣는 희한한 사람이 누구냐를 찾는 작업입니다. 보통 상식적인 말을 하면 다 알아듣는데 상식을 뛰어넘는 소리를 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누구냐, 그것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뽑아내는 방식입니다.

다른 방식은 안 됩니다. “옳도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했다. 따라서 들을 귀 있는자가 복이 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들을 왜 하셨습니까? 그 바탕에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예정된 자에게만 말씀이 꽂히고, 예정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주체인 것을 모독했다고 분노하고 미워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한마디 한마디,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뭐 하게 만든다? 실족하게 하는 말씀만 남겼습니다. 너, 나 할 것이 없이 1000명이면 1000명 다 실족하는데 그중에 한명이 실족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일 설교 마지막에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화투장을 넘기면서 10월 단풍이 어디 있는가, 계속 넘기는 거예요. “아니네. (덮어놓고) 아니네. (덮어놓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라는 것은 전도하면서 꼬시는 것이 아니고, 덮어놓으면서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가 누구냐를 들추는 겁니다.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천명을 들추고 만명을 들추는 겁니다.

진짜 복받은 사람은 누구냐? 이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나는 피조된 것이고 피조된 사람은 예수님이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에 예정된 뜻에 의해서 태어났다”를 믿으면서 자기 자신 위주로 살지 않는 사람이 누구냐를 찾는 것.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교회(IP:220.♡.176.141)

08-03-26 17:56

서울080314b엡2장10절2에베소서 제 8강 (이 근호목사, 2008년 03월 14일(b), 서울의존교회)

예수님의 선한일이란, ‘부자냐 가난하냐’, 그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착하냐, 안착하냐’, 그 문제도 아니고, ‘네가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세상은 이미 끝날 세상이고 정죄 받아야 할 세상이니까 정죄 받는 세상과 함께 멸망 받지 말고 그 세상에서 너만은 빠져 나오거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뭘 알아야 되겠어요?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가? 그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내가 그토록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세상에서 크게 되고 싶은데,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은 “네가 너희들만큼은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빼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했으니까,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느냐를 알아야 우리가 세상에 협조 안하고 세상과 함께 살지 않을 수 있잖아요.

‘아, 이래서 세상은 멸망 받았구나. 이래서 우리는 구원 받았구나’라고 하면서 구원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멸망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거부할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가를 이야기해 봅시다. 두 번째 시간은 좀 어렵습니다. 선한일을 하려면 반드시 누가 옆에 있어야 됩니다. 혼자서 볼펜 돌리고 있다고 선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옆 사람에게 볼펜이 필요할 때 그것을 줄 때 선한 일이 됩니다.

이렇게 선한 일이라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선한일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이에 뭐가 형성됩니까? 선한일이 되는 겁니다. 혼자서 도 닦는 것은 선한일이 될수 없지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의 비유를 드는데, 어린이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 보셨지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죽도로 얻어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도록 길바닥에 누워 있을 때 마침 그 길을 어떤 제사장이 가다가 그것을 보고 못본척 그냥 지나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오길 래 강도만난 사람이 도움을 청했지만 그도 못본척 그냥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오는데 그 사람은 평소에 동네 사람들이 믿음 없다고 깔보는 사람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유대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다가와서 피가 난 상처를 닦아주면서 “어디 사십니까?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살았습니다. 제 등에 업히세요.”

그렇게 해서 치료도 해주고 머물 곳을 마련해 주면서 “주인장!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다 해주세요. 제가 다 낼 것이고 만약에 이 돈으로 모자라면 내가 다시 와서 다 갚을테니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세요” 하면서 자기 이름도 안 밝히고 그냥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중에서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 두 번째 사람? 아니지요? 세 번째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할 때 혼자서 사랑, 사랑, 한다고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아무 영문도 이유도 없이 그냥 사랑 받아야 될 사람이 있어요.

만약에 제가 여기 앉아 있는데 아주 못생긴 사람이 와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제가 좋아하겠습니까? 못생겼는데. 화를 내면서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원했는가?”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사랑이 형성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사랑하고 하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사랑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언제 사랑이 형성됩니까? 누가 와도 나는 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는 그런 지경 상태에 놓여 있어야 사랑이 형성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지경에 놓여 있어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아무것도 될 것이 없을 때, 그리고 세상과 더불어서 멸망당해도 싸다, 하는 그것이 확정되었을 때, 가족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고, 심지어 국가에서 일주일 안에 사형을 집행한다고 할 그런 순간, 모든 사람이 다 침 뱉고 돌아설 때에 그때 비로소 뭐가 됩니까?

그때 누군가 나를 구원하면 그때 비로소 나는 뭘 느끼느냐?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지요? 십자가 옆에 달려 있던 누구입니까? 강도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사형 집행되는 사형수였습니다. 그 사형수가 예수님보고 “나를 생각해 달라”고 하니까, 이제 사랑받을 대상이 나타났지요? 그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어디에 있으리라?)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누가 사랑받을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이 담기는 그것을 보고 좋아합니다. 자기 사랑이 사랑 값을 하면서, 사랑이 사랑의 행세를 하면서 그 속에 녹녹하게 담겨 있을 때 그것보다 이 세상에 더 중요한 인물이 없습니다. 강도가 되었든 창녀가 되었든 예수님의 자기의 사랑이 담겨 있는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고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 양이 더 귀하고 좋은 것”(마 18:12,13)입니다.

같이 집에서 농사짓던 부지런한 아들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유산을 다 탕진하고 몰골도 형편없고 몸에서 냄새는 풍기고, 슬리퍼 질질 끌면서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 집에 와서 “아버지, 아들 대우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저 종이나 시켜주시고 밥이나 먹여주면 감사합니다. 아버지, 절 받아 주시겠습니까?” 라고 나오는 그 집나간 그 아들에게 주님께서 “너 같은 인간에게 주려고 내가 금가락지 마련했고, 소를 잡았다”고 하십니다.

“제가 그럴 자격이 됩니까?” “네가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묻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내 사랑이 네 속에 녹녹히 그냥 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특기나 재치나 재롱이나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전히 감하지 아니하고, 녹슬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우리에게 담겨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뭘까요? 그 사랑이 한글자로 “피”입니다. 우리는 피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피는 선지국할 때나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피가 필요하냐, 필요없냐, 그런 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누가 판정한다고요? 내가 판정해서 내가 유리한 것만 골라서 선택합니다. 그게 아니고 정작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우리자신도 몰라요.

그러나 뭔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내가 저것 없이는 못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왔다는 것, 그것도 용서하는 피가 왔다는 것은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 못 받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이 나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지혜 있는 것, 교양 있는 것, 그런 것을 원하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것을 가지고 구원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진짜 어리석은 겁니다.

우리의 주특기를 발휘하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공부 잘하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애들 앞에서 “공부 잘해서 구원 안 된다”는 소리를 하면 부모들은 걱정이 많이 됩니다.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는 애들이 공부를 다 제쳐놓고 놀기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공부 잘하는 것은 공부의 속성이 이미 들어 있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말려도 열심히 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말려도 공부하는 애들이 있고, 하라고 해도 노는 속성이 있는 애들은 놀기 마련인데 그것이 어떤 애이든지 그것이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 부모책임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모를 매개체로 사용해서 그냥 쑥, 하고 낳은 것 뿐입니다. 나쁜 짓 할 때 때려 주시고 좋은 일 할 때 칭찬 해 주시되 그 애 운명에 대해서는 부모가 깊이 관여하지 마세요.

다만 제가 부모한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범이나 잘 보이세요.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도 있는데, 자기생각하기도 바쁜데 자식까지 생각 못합니다. 부부 싸움할 때 애들 안 보는데서 하고, 하더라도 좀 건전한 주제를 가지고 부부싸움을 해 주셔야 됩니다.

“여보, 내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데 힘이 달려서 두 시간을 못 넘기네. 어쩌면 좋아?”
“여보, 걱정하지 마시오. 두 시간 못 넘어도 상관없어.”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해 가면서 부부싸움을 해야지, 엉뚱한 것을 가지고 부부싸움을 하면 안 됩니다. 애들이 다 듣는다고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때 방주를 생각 못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 일을 했습니다. 제가 어느 주일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2+3=5라고 할 때 이것이 맞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2+3=5라는 수학이 기초가 되어서 이것이 물리가 되고, 이 물리를 기초로 해서 인간의 모든 문명, 토목공사와 건축등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2+3이 5도 되고 6도 되면 건물이 무너지는 수가 생겨납니다. 토목공사 할 때 측량하는 사람이 2+3을 6이라고 계산하면 그 건물은 허물어집니다.

그러니까 2+3=5, 이것이 진리가 맞다고 했는데, 이것을 아는 인간들이 왜 홍수심판은 몰랐나 하는 겁니다. 2+3을 아는 지혜가 누적이 되어서 그 지혜로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했지만 그들은 홍수가 올 줄은 몰랐다는 겁니다. 방주를 뚝딱거리면서 만드는 그 소리를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처럼 방주가 있는 것을 봐서 미래의 구원은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방주에 연관된 그 무엇으로만 구원되는 것이 미리 알려지지요. 방주를 만드는 그 망치소리, 그 의미를 알아야 되듯이, 예수님의 손에 박힌 못자국, 옆구리의 창에 찔린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내세운 새 언약이 뭐냐, 내 살이 찢어지고 내 피가 흐르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낸 대안이거든요.

그렇게 할 때, “저 피 없이는 나는 뭘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없으니까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그 깊숙이 들어 있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서 예수님 죽으신 것만이 실체고 진리고 내가 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는 일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그냥 시간 때우기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전 2:2)고 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두껍게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왜 십자가의 피가 흘려져야 되는가,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 나열된 문장들입니다. 모든 문장들이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한일이라는 것은 이웃이 있어야 되고 그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이란 오직 피가 예수님의 사랑의 전부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주님의 사랑을 피로 확정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피로 하나님의 원수된 자, 경건치 않은 자에게 사랑을 확정하셨다”고 합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확증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회의할 때 망치를 두드리잖아요. 결정을 내릴 때 망치를 세 번 두드립니다. 땅, 땅, 땅! 이것이 확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뭐냐?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어요. 그 정도로 너는 죽었다는 겁니다. 죽은 내 목숨 교체하는 겁니다.

“목사님, 우리가 그것은 다 알거든요?” 하시겠죠. 그런데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그 이야기가 맞는데 왜 우리의 24시간 일과는 거기에 관심이 없습니까? 분명히 우리가 성경대로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맞고 성경대로 예수 믿는자가 맞는데 왜 우리는 도통 그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는 채 살아갑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여기에 대한 해답이 약간 복잡하고 깁니다. 그러나 중요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취지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확정하셨는데 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확정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생각이 뭔지를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 사람은 아주 좋은 곳에서 살다가 아주 나쁜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쫓겨난 곳은 주변 환경이 사람들이 아주 살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흉측한 동물들, 가시들, 사람들이 살기에 힘들게 하는 것들이 마구 자라났습니다. 땅을 갈아서 곡식을 심으면 에덴동산처럼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했는데 아무리 밭을 갈고 땅을 갈아도, 잡초가 양분을 다 빼앗아 가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은 ‘힘이 들어도 어찌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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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9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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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