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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7대구강의07-다윗왕중심의전쟁2자유게시판열왕기상

07대구강의07-다윗왕중심의전쟁2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7 대구강의 7 - 지옥의 하나님 19

07,06,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정복, 정복, 또 정복 !!

이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의 위상,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 되게 한 위상이 과연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다윗과 다윗 자신의 죄,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 이런 것들을 연관시켜서 살펴보았는데, 어떻게 기억이 좀 납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윗을 진짜 비참한 죄인으로 내몰아 세우는 그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그것은 바로 정복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정복하는 왕이라는 말이다. 물론 핵심은 시편은 51편이지만, '상한심령' 말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이 왕이 되어서 하는 대부분의 것은 전쟁에 관한 것이고, 이러한 전쟁이라는 것은 항상 정복이 뒤따르는데, 즉 정복이 없는 전쟁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은 언제나 정복에서 정복으로 이어지는데, 그야말로 정복시키고야 마는 전쟁이라는 말이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전쟁의 한 가운데 서 있는데, 그래서 소년시절에 골리앗을 쳐부술 때부터 다윗은 이미 전쟁을 위한 왕이라는 말이다. 물론 다윗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데, 그분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말이다.

◈ 다윗이 전쟁을 위한 왕이라면, 예수님은?

그러므로 다윗이 전쟁을 위한 왕이란 말은,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고, 그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기능에 대해서 새로운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즉 기름부음이 과연 어떤 일을 하는 것이고, 그리고 장차 오실 진짜 기름부음을 받는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을 미리 앞당겨서 보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이 이렇게 전쟁을 위한 왕이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전쟁을 위한 분으로 등장한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 골치 아픈 열왕기상하나 역대상하를 어떻게?

여기서 역대상 12장 22절을 보겠는데, 열왕기상하나 역대상하를 이야기할 때, 신학자는 물론이고 목회자의 경우도 그렇고, 사실 교인들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루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아서 말이다. 그래서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데, 목사는 자존심 때문에 마음속으로 그렇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엄두가 나지 않을 때는 핵심만 제대로 체크하면 되는데, 그 핵심을 알게 되면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마음에 와 닿게 된다는 것이다. 열왕기상하나 역대상하의 그 기나긴 스토리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그것을 알면 되는데, 그것이 역대상 12장 22절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대상 12:22)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여기에 보면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 '군대' 라고 할 때는 잘 알다시피 출애굽을 할 때 애굽에서 나온 그 어중이떠중이 집단을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여호와의 군대' 라고 했다는 것이다.

(출 12:41)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민수기에 보면 백성의 숫자를 헤아리는데, 왜 숫자를 세는가? 전쟁에 나갈 20세 이상의 남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또 이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왜 법궤를 앞장세우는가? 이 법궤가 진격하면 적들이 물러가고, 법궤가 멈추어져 있으면 적들이 알아서 무릎을 꿇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민 10: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민 10:36)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그리고 사무엘상 같은 경우에도 법궤가 블레셋 적진을 마구 돌아다니면서 적들을 다 처리하고 말이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야말로 혼 줄이 나고 나서 암소가 끄는 수레에 태워서 법궤를 벧세메스로 다시 보낸다는 것이다.

◈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전쟁을 !!

그리고 이렇게 법궤가 이동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다윗이 사울과의 싸움이 일어났을 때도, 즉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도 블레셋을 치는 일은 또 그 일대로 따로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다윗은 자신의 위치가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이 전쟁은 전쟁대로 치르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 당신은 지금 전쟁을 하십니까?

그런데 교회정문에서 교인들에게 "지금 전쟁을 하십니까?" 라고 하면, "지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복 받기 위해서 인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가 왕창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데, 즉 지금 한국교회는 구약에서 뭉태기(?)로 뭔가를 빠트리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조금이 아니라 뭔가 왕창 빠졌다는 말이다.

◈ 뭔가 왕창 빠진 느낌, 왜 허전한가?

물론 신학교에서는 빠트리지 않고 다 배우기는 하지만, 하지만 소위 목회를 하면서 왕창 빠트리고서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 빼버리고는 "우리는 죄인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아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죄 용서를 받고 난 뒤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질문하면, 거기에 대한 아무런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이유조차도 전쟁을 위한 인물이었고, 전쟁을 멈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윗이 있는 곳마다 전쟁이 들끓었다는 말이다. 그런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의 후손이라는 우리들 자신이 "죄지었다. 용서받았다. 끝" 라고,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허전(?)하다는 것은 뭔가 커다란 구멍이 생긴 듯한, 즉 덩치가 큰 것이 빠져나간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 빼먹고 열왕기상하나 역대상하를 봐도 골치만 아프고, 그래서 "이런 것은 몰라도 구원을 받았는데, 그냥 요한복은 3장 16절만 알면 되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너무나 부담스럽기에 보지 않으려고 하고,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 골 아픈 역대상을 잠시 살펴보면 !!

이번 시간에는 '다윗전쟁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즉 다윗은 왜 끊임없이 전쟁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여기서 역대상을 잠시 보면, 아까 보았던 12장을 계속해서 살펴보면, 유다자손이 6800명이고, 시므온 자손이 7100명이고, 그렇게 계속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대상 12:24) 유다 자손 중에서 방패와 창을 들고 싸움을 예비한 자가 육천 팔백명이요
(대상 12:25) 시므온 자손 중에서 싸움하는 큰 용사가 칠천 일백명이요
(대상 12:26) 레위 자손 중에서 사천 육백명이요
(대상 12:27) 아론의 집 족장 여호야다와 그와 함께한 자가 삼천 칠백명이요
(대상 12:28) 또 젊은 용사 사독과 그 족속의 장관이 이십이명이요

그렇다면 이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놀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역대상 14장 10절 이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대상 14:10)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대상 14:11) 이에 무리가 바알부라심으로 올라갔더니 다윗이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하나님이 물을 흩음 같이 내 손으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함으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대상 14:12) 블레셋 사람이 그 우상을 그곳에 버렸으므로 다윗이 명하여 불에 사르니라

그야말로 다윗이 전쟁을 통해서 블레셋을 완전히 박살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16장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옮겨놓고, 그 뒤 18장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을 쳐서 항복을 받고 말이다. 아무튼 이제 다윗은 그 어디로 가든지 간에 무조건 이긴다는 것이다.

◈ 무조건 이기는 다윗 !!

(대상 18:13)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그리고 난 다음에 19장에 가면 요압이 아람 사람을 치는데, 그리고 암몬 사람을 치고 말이다. 암몬은 까불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29장 끝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다윗은 젊은 시절부터 계속해서 전쟁과 전쟁의 연속이었는데, 이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가? 여기서 20장 1절과 5절을 보자.

(대상 20:1)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요압이 그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서 암몬 자손의 땅을 훼파하고 가서 랍바를 에워싸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니 요압이 랍바를 쳐서 함락시키매

(대상 20:5) 다시 블레셋 사람과 전쟁할 때에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이 사람의 창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

그리고 역대상 끝까지 계속해서 전쟁이 없었던 날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쟁과 전쟁을 거듭하게 되는데, 여기서 역대상 21장 1절을 살펴보자.

(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 착한 다윗과 악한 다윗 !!

여기서 드디어 전쟁의 의미가 아주 어렵지만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전쟁을 벌릴 때, 이것이 좀 어렵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하면, 다윗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착한 다윗과 악한 다윗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착한 다윗은 무엇이고, 악한 다윗은 무엇인가? 착한 다윗은 회개하는 다윗인데, 바세바에게 자기가 어떻게 했다고 하면서 회개하는 말이다. 악한 다윗은 21장 1절에 나오듯이, 백성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다윗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회개하는 것이 착한 다윗이고, 백성들의 숫자를 헤아리게 하는 것은 악한 다윗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구분은 누구의 안목에서만 나올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안목에서만 가능한데, 이렇게 하나님은 다윗을 데리고 다니면서 전쟁을 했는데, 그렇다면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인가? 하나님의 전쟁인가? 아니면 다윗의 전쟁인가? 당연히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전쟁 목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시면서, 과연 이 전쟁의 목적이 다윗으로 하여금 적들을 쳐부수게 해서 다윗의 복수를 하는 것인가? 다윗의 복수가 전쟁의 목적이냐는 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전쟁의 목적도 이런 것인가?

여러분들이 지금 제 질문의 의도를 데대로 모르는 것 같은데, 그래서 먼저 창세기 15장의 내용으로 다시 질문하고자 하는데, 오늘은 참석한 인원도 얼마 안 되니 속닥하게 깊이 한번 들어가 보겠는데, 일단 창세기 15장 16절을 보자.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 아브라함이 4대만에 돌아오는 이유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4대만에 돌아오고, 가나인 10족속을 치는 것이 아브라함의 뜻인가? 아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저 나쁜 가나안 10족속들 말이야. 하나님이여, 제가 공격하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는가?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상태에서 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적이 아니라, 죄를 지어야 적이 되기에 말이다.

그런데 창세기 15장 16절에 보면, 아직 죄악이 관영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처벌을 받을 만큼 아직 죄가 숙성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쳐야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자손들이 4대만에 애굽에서 나와야 되는데, 그렇다면 1대나 2대나 3대만에 나오면 안 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왜 4대만에 나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저쪽에 적이 아직까지 죄가 관영치 않았기에, 즉 적이 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느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숨겨져 있는 본래 언약이 담고 있는 뜻을 위해서 누구를 이용했는고 하니,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율법과 상관이 있는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나는 죄를 지었다. 어떻게 하면, 누구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하지 않는 나쁜 다윗에 속하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겠다는데, 그것이 무엇이 나쁩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은 그것이 바로 악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 왜 율법이 가미되는가?

율법에 의해서 죄가 발생되는데, 그러면 430년 이후에 아브라함에게 율법이 추가되는데, 이렇게 율법이 추가된 것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냐하면 죄 용서는 율법이 없어도 되는데,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약속을 믿어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인이 되는 것은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 하나님의 약속만 받아드리면 의인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무엇을 할 것인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으로 다 끝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뜻이 아니고, 이 율법이 가미됨으로 말미암아서 죄가 숙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가 숙성이 말이다.

◈ 성도는 잉크맨 !!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교회당 바닥에 잉크를 부으면 시커멓게 되는데, "아이쿠 다행이다. 잉크가 여기에만 쏟아져서 말이다" 라고 하면 안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로 하여금 잉크병을 들고서 대구시내로 나가서 다니면서 줄줄 잉크를 쏟아 부으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서울로, 광주로, 부산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마구 다니면서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야 율법에 의해서 온 세상에 죄가 관영해지는데, 누군가가 저에게 "아니, 목사님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라고 하면, 저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데, "글세,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하면, 죄가 관영해야 !!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하면 죄가 관영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이 아브라함 언약이 모든 언약의 기초가 되는데, 구원을 받는 언약에 있어서 말이다. 노아언약은 그 배경이 되고 말이다. 즉 아브라함 언약은 직접 구원을 받는 언약이라는 것이다. 이 언약에 의해서 축복과 저주가 나누어지니까 말이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죄가 관영해야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이 해야될 일 속에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언약을 달랑 이용만 해서 자기의 개인적인 구원만을 챙기고자 한다면, 그렇게 되면 무엇이 빠지는고 하니까, "죄가 관영해야 한다" 라고 하는 이 중요한 사실이, 즉 창세기 15장 16절의 말씀이 왕창 사라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취지를 뭉태기로 다 잘라내고, 그냥 모르는 척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제기 이런 이야기를 지금까지 계속해서 해왔는데, 저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조롱하면서 비판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예수를 믿고 난 뒤에는 개인적으로 죄를 더 지어야 한대. 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라고 말이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언약 안에 있게 되고, 이런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뚝 끊어지고, 이제는 언약의 사람으로서 이 언약이 밀어내는 대로 밀리게 되는데, 그 밀리게 하는 실려있는 내용물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 죄가 관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의 7인과 7나팔과 7대접 !!

바로 이렇게 죄가 관영하는 여기에 요한계시록의 7인과 7나팔과 7대접이 있고, 이것을 천사가 일일이 뜯고 불고 쏟고 하는데, 천사는 그냥 하늘에 있지 왜 이러한 일을 하는가? 성도는 이것을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을 터트릴 때마다 성도는 죽어있기에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도는 순교하고 순교하고 또 순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은 천사가 하고 성도는 7인과 7나팔과 7대접이 터질 때마다 순교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 오잉, 잉크맨에서 페인트맨으로 !!

하지만 기존의 요한계시록 강해집들을 보면 이런 의미가 나오지 않는데, 아브라함의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언약이라는 것은, 우리 개인의 구원을 위한 사적인 용도가 아니고, 죄를 끝까지 관영하게 한다는 것이다. 죄가 골고루 다 퍼지도록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검을 페인트를 가지고 전 세계를 다 돌아다니면서 칠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명을 가진 자가 곧 성도라는 것이다. 그것이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인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창세기 15장 16절이 설명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3대에 나가면 안 되고, 반드시 4대만에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아직까지 죄가 관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 철학 - 인간은 왜 자아 중심인가?

그러니 우리는 인식의 발상을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요즘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인간은 왜 자아 중심인가?" 라는 것을 분석하기 위해서인데, 거기에 찬성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철학의 치명적인 헛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성경은 자기 개인 중심으로 말하는 법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은 모든 것을 이렇게 자기 개인 위주로 바라보다 보니, 구원을 말해도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말이다. "언약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소리를 할 줄 알아도, "언약을 위하여 내가 있습니다"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언약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그렇게 구원을 받아놓고는 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성도라면 언약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자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언약 때문에' 라고 해놓고는, 그만 입을 닦고는 도망쳐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언약이 그 도망가는 놈의 뒷덜미를 붙들고 시비를 거는데, 다음과 같이 말이다.

* 야, 어디로 도망가노?
* 저는 이제 구원받았으니 되었습니다.
* 나하고 같이 일 좀 해야지.
* 무슨 일요? 언약은 구원시켜 주는 것 아닌가요?
* 아니야.
* 맞는데...
* 쑬데 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이리 좀 와 봐. 어서!
* 에이, 싫은데요.
* 이제는 니가 가는 곳마다 죄가 드러나야 한다.
* ? ? ?

이렇게 성도라면 그 해야할 일이 분명히 주어져있는데, 아니면 말고 말이다. 저기 저 지평선 끝까지 죄가 가득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온 세상에 죄가 관영되게 하기 위해서 성도들을 이리 저리로 마구 파견근무를 시킨다는 것이다.

◈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리 !!

다윗의 경우에도 왕이 되면 끝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왕이 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약속의 땅에 있어서, 그 모든 지경에 무엇을 해야 하는고 하니까, 끝까지 그들을 갈바서(?)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벌리는 전쟁의 의미인데, 이렇게 전쟁을 벌림으로 말미암아서, "저 이방민족들은 왜 정복을 당해야 마땅한 놈들인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쪽으로 다윗의 임무가 주어져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역대상에 이런 내용도 있는데, 다윗이 좋게 좋게 하려고 암몬나라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상을 보내었는데, 그쪽에서 오해를 해서 사신의 옷에 궁둥이 짝에 구멍을 뚫어놓았을 때, 다윗이 그것을 빌미로 해서 마무리 전쟁(?)까지 다 정복해버린다는 것이다. 암몬과 그를 도운 아람의 군사들까지도 모두 박살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전쟁이 그렇게 다윗을 따라다닌다는 말이다.)

(대상 19:3)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를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 신복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대상 19:4) 하눈이 이에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 보내매

◈ 이 세상이 왜 저주를 받아야만 마땅한가?

이것은 개인 다윗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하나님의 본래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본래의 뜻은, "이 세상이 왜 저주를 받아야만 마땅한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을 약속의 땅으로 끝까지 보내게 되고, 다윗은 그런 역할을 감당하고 말이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에서 너무 승리하다가 보니 잊어버렸는데, 즉 승리를 하면서도 자기가 왜 승리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과 같다 것이다.

주기도문에 보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부분이 있는데, 혹시 천 목사님 집에 일용할 양식이 있습니까? 오늘뿐만이 아니라 내일의 양식도 있지 싶은데, 그런데 왜 일용할 양식인가? 우리는 내일 양식도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주기도문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으례히 내일양식, 모래양식도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곧 나쁜 다윗에 속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나쁜 다윗이라고 양식을 주지 않는가?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는 그것을 두고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지금 역대상 14장부터 20장까지 이렇게 보니까, 계속해서 전쟁에 전쟁을 거듭하는데, 결국은 다윗이 약속의 땅 지평선 마무리까지 전쟁으로 다 정복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21장에 보니 '사단이 일어나'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사단의 함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명령을 듣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여기서 이것을 철학적으로 한번 따져보자는 말이다.

* 사단은 누구의 지시를 받는가?
*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 그러면 사단은 독자적인 행동을 할 능력이 없는가?
* 있다.
* 그러면 말이 앞뒤가 모순이 되지 않는가?
* ? ? ?
*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가?
* 없다.
* 그러면 내 팔을 내 마음대로 흔드는 것은 무엇인가?
* ? ? ?

◈ 오스카 쿨만- 하나님께서 막대기에 사단을 묶어놓았다 !!

이러한 문제가 그대로 사단에게 넘겨져서 사단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저는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욥기를 좀 강의하고 싶은데, 욥기 1장에 보면 사단이 마치 주인공(?)처럼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 주장아 아니라 오스카 쿨만의 주장인데, 하나님께서는 막대기에 개(사단)를 줄로서 묶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는 자유로운데, 막대기에 묶인 줄이 가는 곳까지만, 즉 줄이 허용하는 반경까지는 말이다. 이렇게 사단은 이렇게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는 자유롭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면 하나님께서 스톱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스카 쿨만의 주장이 아니라,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토마스 아퀴나스가 했던 이야기라는 것이다. 천주교 사상인데, 이렇게 되면 신부나 목사가 무슨 주장을 할 수 있는고 하니,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가 해야될 것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라는 말이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할 도리는 자기가 다 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여기 막대기에 묶여 있는 개가 가만히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가 묶여있는 줄이 허용되는 반경까지는 마구 돌아다니듯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주의 뜻이라는 것이다.

◈ 선과 악이 하나님이 지정한 범위 내로 !!

그러나 과연 이런 주장이 옳은가? 최 간사님, 어떻습니까? 동의를 하십니까? 이런 주장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고 하니, 이런 관점으로 생각할 때, 언약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고, 오스카 쿨만과 같이 말이다. 이것이 모든 철학자들의 딜레마인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언약의 옳고 그름이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의 범위 내로 제한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반경 밖으로 나오면 옳고 그름을 묻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 있는 이 범위 안에서만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묶여있는 것이 사단이 되던지, 인간이 되던지 말이다. 이해가 됩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한 범위 안에서만 옳고 그름이 되는 것이지, 그것을 벗어나면 사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 엄마왈, 집에서 숙제해 !!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엄마가 외출을 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하는 말이, "집에서 숙제를 하라"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아이는 집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집에 있으면서 컴퓨터 게임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이 무엇을 가지고 따지는가? "집밖으로 나갔는가, 안 나갔느냐?"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는 엄마가 지정한 영역 내에서 숙제를 하지 않고, 왜 컴퓨터 게임을 했는가?" 라는 것을 따진다는 말이다. 옳고 그름을 그렇게 따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사단이 사단으로 저주를 받게 된 것은 사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단은 피조물인데, 피조물 가운데 악한 천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누구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고 하니, 사단에게 물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사단이 묶어놓은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지, 사단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 원죄는 용서하지만, 자범죄는 NO ??

이런 사상이 계속해서 들어가면, "원죄는 용서해주되 자범죄(고범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묻는다" 라는 주장이 나오고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론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제대로 하지 못하면 상급이 없다는 말이 나오고, 천국에 가서도 불이익을 당한다고 한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말한 모든 것들이 다 똑같은 관점에서 나오는 것인데, 심지어 칸트의 윤리도 마찬가지인데, 사실은 이 칸트가 주장한 윤리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닌데, 물론 조금은 복잡하기는 해도 말이다. 시간이 되면 한번쯤은 읽어볼 만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언약은?

그런데 언약은 그게 아니라, "하나는 사랑을 받기로 작정했고, 다른 하나는 미움받기로 작정되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9장에 나오는데, "에서는 미움을 받기로 작정했고, 야곱은 사랑을 받기로 작정되었다" 라는 것이다. 이 두 개가 모여서 언약이 되는데, 달랑 야곱 하나만이 언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롬 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언약 !!

이렇게 언약이 되어버리면, 이 언약 안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언약이란 것이다. 이것을 '영원한 언약' 이라고 해서,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멜기세덱이 있는 부분에 나오는데,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한 아들을 보내서, 그 아들을 통해서 모든 것을 언약적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 막대기 개념이 아니라, 수평선로 개념 !!

그런데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막대기와 줄' 이야기가 애초부터 하나님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 쪽에서 만들어낸 것이지 말이다. 인간 쪽에서 자기들이 뭔가를 책임질 것이 있다고 스스로들 여겨서, 이렇게 인간 쪽에서 출발한 하나님 개념과 자기들의 개념을 모두 다 수용하다보니, 이러한 막대기(?) 개념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개념은 없고 영원히 만나지 않는 수평으로 달리는 철로개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4장에 있는데, 이 두 여자를 두 언약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갈과 사라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을 지난 울산강의에서 상세하게 했는데, 참고로 하라는 것이다.

(갈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아무튼 언약개념은 이렇게 동그란 원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쫙쫙 뻗어 가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끝도 없이 말이다. 그래서 지옥도 영원하고 천국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로 중요한 부분인데, 이것을 동그라미로 생각하지 말고, 저기 지옥에서 당기고 천국에서 당긴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 아, 어디론가 땡기고 싶어 !!

여기에 이렇게 지남철(자석)이 있다면 사단은 하나의 못이고 압핀이라는 것이다. 성도들도 천국에서 당기는 못과 압핀이고 말이다. 막대기에 끈으로 묶어서 풀어놓은 것이 아니라, 뭔가 마구 땡기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땡기는데 누가 땡기는가? 언약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의 배후에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예수님의 배후에는 영원한 하나님이 계시고 말이다. 그런 영원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약속에 의해서 말이다.

◈ 언약 - 몸통은 하나인데 바지가랑이는 두 개 !!

제가 울산강의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는데, "언약은 몸통은 하나인데 바지가랑이는 두 개이다"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두 언약이니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의 몸통에다 두 개의 바지가랑이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심판주이니 말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가?

◈ 예수님은 구원자이고, 또한 저주자 !!

예수님의 저주는 영원한 저주인데, 예수님이 '화 있을진저' 라고 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원자로만 보지 말고, 예수님은 언약이니까, 즉 "예수님은 구원자일 뿐 아니라, 영원한 저주자이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저주자로 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 하나님의 땡겨줌에 대해서 감사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누군가가 저 머나먼 미래에서 자기를 당긴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사실은 주께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성도는 그것이 고맙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 영원한 지남철이 있어서 우리를 천국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당긴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야, 그래야 욥기가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욥기뿐만 아니라 성경전체가 모두 해석이 되고, 역대상 21장의 '사단이 일어나' 라는 부분도 해석이 된다는 말이다.

(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 왜 사단이 일어나서 격동케 하는가?

사단이 왜 일어나서 격동하는가? 언약의 면면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약의 두 가랭이를 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다윗은 왜 계수했는가? 그것은 제가 시컷 이야기를 했는데, 다윗은 계속해서 승리하니까, 자기가 왜 승리하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승리하니 고맙다는 것이다.

이렇게 승리했으면 그 승리한 업적과 성과는 누구에게 오는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승리하도록 하셨기에, 그 수많은 전쟁의 승리는 다윗의 업적으로 모두 남는데, 이방민족을 쳤으면 그들은 다윗의 포로라는 것이다. 그만큼 영토가 더 늘어나고 인구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방나라들은 그런 재미로 전쟁을 하고 말이다.)

아까 본 역대상 14장에서 20장까지에도 나오듯이, 다윗은 이렇게 계속해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는데, 그래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는데, "아하, 하나님께서 '나' 라는 인간을 선택해서, 이제 나는 가만히 있어도 승리가 주어지는구나" 라고 말이다.

* 질문 - 죄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 답변 - 하나님이든 인간이든 책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 질문 - 아무튼지 사단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개인에게 적용시켜보면, 이렇게 언약이 끌어당길 때 자기가 어떤 죄를 저지르게 될 때, 그렇게 된 원인은 언약에, 즉 하나님에게 있으니, 행위의 책임조차도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닌가요?
* 답변 - 그렇지요. 그것이 바로 나쁜 다윗입니다. 방금 죄를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만약 착한 일을 했다고 보면, 고아원을 방문하고 자기 신체를 기증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은사를 통해서 착한 일을 시키는데, 그때는 책임이라고 하지 말고, 죄에 대한 반대적 의미이니, 보상이라고 할까요?

◈ 나쁜 다윗의 한계는?

질문하기 직전에 제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승리는 이루시는구나" 라고 생각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나쁜 다윗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이것이 나쁜 줄 모르는데, 굉장히 고맙게도 그때 누가 등장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사단을 삽입시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큰 이스라엘인가, 작은 이스라엘인가? 물론 큰 이스라엘이란 것이다. (큰 이스라엘?) 이렇게 큰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은 사단을 집어넣는데, 그러면 큰 이스라엘을 작게 만드는가? 이것은 그러한 크고 작은 양(量)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질(質)에 대해서 다시금 묻는다는 것이다. 언약의 질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오해하는가? 얼핏 들으면 괜찮은 소리 같기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신다" 라고 말이다. 다윗의 이런 고백이 무엇이 문제인가? 자기가 이기고 싶어서 이긴 것도 아니고, 자기가 승리하고 싶어서 승리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서 자기게 주셨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숫자를 계수했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공로를 말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그렇게 계수한 것을 괘씸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냥 괘씸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도 사단을 집어넣어서 괘씸죄의 표시를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사단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러니 사단을 격동시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인데, 사단을 끌어당기는 것은 하나님이니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적재적소에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대상 21:7)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 여기서 사단의 역할은?

여기서 사단이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다윗으로 하여금 천국에서 끌어당기도록 않고 뭔가 스스로 여기서 스톱이 된다는 것이다. '끌어당김' 이라기보다는,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함으로 말미암아서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다윗이 "이 정도면 나도 괜찮다" 라고 스톱이 될 때, 바로 그때 사단을 집어넣어서 스톱하게 만든 그 자아상을 폭파시켜버리고, 다시금 천국으로 쫙쫙 끌리게 하는 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율법을 통과해야 !!

다시 정리해보면, 속닥하게 좀 어렵게 하려고 했더니만 너무 어려워들 하는 분위기인데, 아브라함은 율법이 없이도 구원을 받았는데, 즉 의인이 되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무엇을 통과해야만 하는고 하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모세와 더불어서 이 율법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고 말이다.

그러면 왜 통과해야 하는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그 내용 속에 들어가 보니, 우리는 아브라함이 "스톱, 저는 믿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것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즉 "하나님, 이 정도면 되었지요. 의인이 되었으면 끝났지. 뭐"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개인 구원용도로 스톱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율법을 통과해보니, 와장창 다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 넘어가는데 구원받는 자가 누구인고 하니, 회개하는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윗의 경우에, 율법이 왔을 때, "제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세율법이 아니라 저의 상한심령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항상 해체시키고 더 강한 땡김으로 !!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단이 어떤 때 필요해서 어떤 때 활용을 한다는 것을 제대로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되었지" 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보면, 확정적으로 "이 정도면 되었다" 라고 안일하게 자기 구원용도로 하나님의 언약을 계산할 때, 그때 사탄이 개입해서 해체시켜버리고, 다시 저 먼 미래에서 날아오는, 천국에서의 소 힘줄보다 더 강한 땡김으로, 즉 천국에서의 그런 사랑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 미래에 무슨 일이 있기에 나 같은 놈을 당기는가?

그렇다면 다윗의 그 다음 관심사는 무엇이겠는가? 숫자가 몇 명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즉 "하나님이 전쟁에서 얼마나 승리하도록 하셔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전리품으로 얻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아니, 도대체 미래에 무슨 일이 터져서 지금 나 같은 인간을 잡아당기는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대하 21장에 나오는 '오르난'의 집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즉 예배를 드리는 모습인데,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새언약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부분이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상 21:28) 이 때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 왜 전쟁이 반드시 필요한가?

다시 정리를 해보면, 우리는 흔히 하는 좋은 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승리하게 하셨다" 라고, 아까 한 주기도문의 경우에도, "나는 잘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내일이 되면 또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모레도 또 주시고, 역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맞아" 라고 하면서 주시는 것이나 얻은 것에 정착하고, "역시 은혜로 주시니 고마워" 라고 하면서 거기에 머무르고 있다면, 무엇이 없는고 하니, 전쟁이라는 것이 쏙 빠지고 없다는 것이다. 아니, 전쟁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좀 어렵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받았다" 라는 이야기가 무엇이 뭉치로 빠졌는고 하니, 전쟁을 해야 될 이유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전쟁을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아니, 주님이 혼자서 전쟁을 해서 우리가 다 구원을 받았는데, 새삼스럽게 우리가 왜 다시 전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말이 맞지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바로 나쁜 다윗이고, 즉 사단이 격동할 때 드는 생각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단을 보내는 것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은 이렇게 멀리서 당기는데, 그런데 우리는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전쟁을 통해서 은혜를 !!

그러니 이렇게 전쟁을 했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데 은혜를 계속해서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즉 전쟁을 통해서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어느 능력 있는(?) 목회자의 한계 !!

예를 들어서, 어느 목사가 목회를 하는데, 그 목사의 손이 환자의 근처에만 가도 병이 다 나아버리고, 그 목사가 던진 손수건만 만지게 되어도 간질병들을 비롯해서 온갖 병들이 다 낫아 버리고,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전도를 하는데 3000명에게 설교를 했는데, 그만 소문이 나서 5000명이나 회개를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말이다.

이럴 때 그 목사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내가 병을 고치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설교를 잘해서"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그것은 엉터리 사이비이고, 그래도 목사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서 쓰시는구나"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선이 아닌 진심으로 말이다. 정말 자기의 솔직한 신앙고백이,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사용하시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나쁜 다윗이라는 말이다.

◈ 나쁜 다윗 - 아, 주께서 나를 들어서 사용하시는구나 !!

우리는 그 정도의 신앙고백이리면 최고의 신앙수준으로 보는데,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하니 해석이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격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이다. 먼 미래에서 강력하게 당겨서 구원을 받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당기는 먼 미래를 쳐다보지 않고, "아이쿠, 하나님도 대단하셔. 나는 그냥 대충 이야기했는데 두 사람이나 회개하고 교회에 나오고, 참 좋기는 좋다" 라고 말이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해서 안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전쟁 - 승리가 아닌 땡김을 기억하라 !!

그것이 아니라면 다윗이 미쳤다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또 제사를 드리는가? 제사는 (전쟁할 때) 한번만 드리면 되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준 것은, 그러한 승리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전쟁은 다윗을 통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미 승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두 평행선으로 잡아당긴다는 것이다.

◈ 기찻길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 !!

다시 말해서, 막대기에 줄을 매달아서 개를 묶어놓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기찻길이라는 것이다. 쫙 뻗어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시원하고 확실한지 말이다. 먼 미래에서 당긴다는 것이다. 즉 에서는 백 날을 해도 그 당기는 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지옥으로 가야 되고, 야곱도 역시 그러한데, 그러나 그는 무슨 짓을 해도 당기는 힘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천국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별의 별 짓을 다해도 말이다. 험난한 세월을 살던, 밋밋한 세월을 살던 상관없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땡기는 위력이라는 것이다.

◈ 쿨만 - 역사의 중심은 십자가 사건 !!

소위 구속사를 주장한 오스카 쿨만의 공헌이 있다면, 그의 시간관은 문제가 좀 있지만, 재림이 역사의 마지막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마지막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가 역사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재림은 십자가 이후가 아닌, 십자가의 포장지를 뜯는 것이 바로 재림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 초라해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초라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럽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재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땡기는 것인데,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가 다 땡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먼 미래의 십자가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성과를 얻었는가?" 라는 것에, 우리들은 그런 것을 계산하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십자가는 미래사건인가, 과거의 사건인가?)

◈ 7만이나 억울한(?) 죽음을 !!

바로 그러한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단을 개입시켰고, 그렇게 사단이 격동하니까 다윗은 자기 성질대로 숫자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렇게 되니 사흘만에 숫자가 얼마나 줄어들었는가? 7만 명이나 그냥 죽었다는 것이다.

(대상 21:1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

그럴 때 다윗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 잘못은 제가 했는데, 죄 없는 백성은 왜 죽이십니까?" 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관심은 다윗을 인간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다윗을 통해서 먼 미래에서 누군가가 당기고 있다는 것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지금 "다윗아, 정신차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다윗은 철저하게 이용을 당하는데,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3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도록 하는데, 첫째는 삼 년 동안 기근을 당하든지, 둘째는 석 달을 적에게 패하여 그들의 칼에 쫓기든지, 셋째는 사흘 동안 전염병이 이스라엘에 유행하며 나라가 박살이 나든지 말이다.

(대상 21:11)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대상 21:12) 혹 삼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

◈ 자기 성깔대로 살지만, 그러나 !!

이것은 다윗의 착함이나 경건함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의 성깔을 있는 그대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은 철저하게 이용을 당하는데, 언약의 두 가랑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다윗의 있는 성질이 그대로 다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선택을 해야 되는데, 3년도 너무 길고, 3개월도 좀 그렇고, 그래서 3일을 택하게 되는데, 아마 3년과 3개월 중에 선택하라고 했으면 3개월을 택했지 싶은데, 만약 3년 기근, 3개월 도망, 3일 전염병, 그리고 3시간 손들고 벌서기 중에서 택하라고 했으면, 3시간 벌서기를 택했지 싶은데,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성질대로이기 때문에 말이다.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설 수 있는 일을 선택한다고 해서 3일 동안의 전염병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다윗의 선택은 끝이 나고, 이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만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렇게 당기는데, 즉 지옥에서 당기고 천국에서 당기는데, 막대기와 동그라미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여기서 놀랍게도 다윗은 자기 동그라미를 가지는데, 즉 다윗은 나름대로 오스카 쿨만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런 생각을 다 한다는 것이다. 작년이든, 올해든, 내년이든 말이다. 이렇게 막대기로 묶어놓고는, "이 밖에는 모르겠고, 여기 원 안에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 자기 동그라미를 포기해야 !!

그러나 다윗은 자기 스스로(?) 이런 생각을 포기하게 되는데, 그래서 "먼 미래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쳐들어오는지, 그것만 수용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때 7만 명이나 죽게 되었는데, 그것을 멈추게 해달라고 다윗이 먼저 요청을 했는가? "하나님, 너무 심합니다. 이제 그만 좀 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다윗은 요청이고 뭐고, 그런 것은 모르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이다. 7만 명이 아니라, 70만 명을 죽여도 자기는 할 말이 없으니 말이다.

◈ 아니, 하나님께서 후회를?

여기서 이것이 중요한데, 그런데 그때 누가 철회하는가?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창세기 6장에서 홍수 때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것을 후회하시고" 라고 되어 있는데, 사람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 본인이 만들었는데, 그런데 후회도 본인이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가 하는 일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밖에 더 되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신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풀리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만 해석이 되는고 하니, 인간은 이렇게 막대기에 묶여있는 동그라미이고, 그리고 언약은 먼 미래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의논해서 스스로 결정한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제 아무리 동그라미를 100개를 가지던지 200개를 가지던지 간에,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먼 미래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의논한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알아서 처리해서 일방적으로 가져다 안겨주는 쪽으로 일을 진행하신다는 것이다.

◈ 뉘우치사 - 세상만사 언약대로 될 뿐이다 !!

아까 두 가지를 말했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7만 명을 칠 때 하나님께서 철회를 천사에게 통보하는데, "천사야, 천사야, 이제 고만 해라이. 그만해" 라고 말이다. 그것이 여기 15절에 보면 그것이 나오는데, 그리고 여기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인간적인 표현이라고 하면 다 해결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뉘우칠 일을 왜 하시는가? 미리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것인가? 우리가 생각해도 "이것은 뉘우칠 것 같으니 하지 말아야지" 라고 감이 오는데 말이다. 우리의 이성으로 말이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모른다면 말이 되는가?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분이 말이다. 뉘우칠 것 같으면 처음부터 하지를 말지, 왜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다.

(대상 21: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바로 이러한 이야기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후회하사' 라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이것을 신학자들이 해석해 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 해결점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땡기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끼리만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지, 인간들을 넣어줄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든지, 뉘우침을 하든지, 근심을 하든지, 이러한 뉘앙스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이 세상에 모든 일어난 일은 언약대로 될 뿐이다" 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은 땡기는 힘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라는 말이다.

◈ 하나님이 뉘우치면, 우리는? - 감사합니다 !!

여기서 이렇게 하나님이 뉘우친다고 해서, "하나님, 그렇게 뉘우칠 것을 왜 하셨나요? 아까운 생명만 왕창 죽이고 말이지요. 너무하네요. 책임지세요" 라고 우리 의견을 하나님 앞에 개진할 수 있겠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후회를 하든지 뉘우치든지 그것은 우리 결코 소관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뉘우치면 뉘우치는 데로 당해야 되고, 후회를 하면 후회를 하는 데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당해야 되는 입장인데, 오히려 그것을 즐거워해야 하고 말이다.

그것을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멜기세덱' 이라고 나오는데, 일체 아비도 없고 엄마도 없고 족보도 없는 말이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가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이지, "저는 왜 안 됩니까? 우리 엄마는요?"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일체의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의견을 개진할 입장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언약의 특징인데, 언약의 바지가랑이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분이 정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쟁 이야기를 정리하겠는데, 전쟁을 왜 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역대상 21장 17절 말씀을 한번 보자.

(대상 21:17)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 다윗왕의 임무 - 전쟁과 제사 !!

다윗의 임무는 무엇인고 하니, 백성들이 죄를 짓되,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왕이 해야하는 일인데, 그러면 "아까 목사님은 전쟁하는 것이 왕의 임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을 텐데, 물론 맞는 말인데, "그런데 목사님은 왜 지금은 백성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까?" 라고 다시 묻는다면, 사실상 이런 질문을 엄청나게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당기는 길이 있다면, 1km지점의 이야기와 2km지점의 이야기와 3km지점의 이야기가 다 모아져서 진짜 십자가에 담긴 내용을 모두 이야기해준다는 것이다. 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앞의 질문은 "1km지점의 이야기와 2km지점의 이야기가 왜 다릅니까?"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 모이는고 하니, 제사를 드리든 전쟁을 하든 말이다. 이 십자가에서 종합적인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말이다.

◈ 십자가 복음이 이래도 반쪽복음인가?

그런데 제가 이렇게 십자가만 이야기한다고 반쪽자리 복음이라고 하니 기가 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막대기와 동그라미를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 동그란 원 밖에서는 십자가로 구원받고, 원 안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성화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막대기와 원만 생각하니 십자가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반쪽 복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동그란 원 안에서 인간이 해야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마지막까지 쫙 이어진 십자가로 생각해보면, 이 중간 중간에 어떤 것들이 있는고 하니, 전쟁하는 이야기, 백성들을 계수하는 이야기, 사실 계수는 다윗이 했는데 그 벌은 백성이 받고 말이다. 다윗에게는 부스럼조차도 나지 않았다는데, 죄책감(?)에 밤에 잠은 좀 뒤척였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계수한 대가로 내려진 두 번째의 벌칙이 다윗이 3개월을 쫓겨다니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채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다윗은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1km지점이든, 2km지점이든, 3km지점이든, 4km지점이든 간에 그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전쟁을 해서 승리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전쟁의 왕이 최종적으로 진짜로 해야하는 것은, "아하,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용서하는 것이, 앞의 전쟁에서나 계수하는 것에 모두 흡수가 되는구먼" 이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 이단을 연구합시다 !!

이것은 제가 얼마 전에 쓴 글인 '이단을 연구합시다' 라는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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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