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5:15-17/숨어 계시는 하나님
숨어 계시는 하나님 2008년 1월 16일 본문 말씀: 이사야 45:15-17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 45:16)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사 45:1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나는 과연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수시로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항상 신앙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믿음의 기초를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 합니다. 인간은 안일과 타성에 빠지기 일 수입니다.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식상하고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경우가 흔합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다른 이에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하나님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방 민족의 우상들과 견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숨어계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곧 인간의 천성에서 나오는 우상적인 하나님을 염두에 두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뭐든지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큰 확신을 둡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오감을 총동원해서 그 대상을 규정잡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지고 하면서 그 대상체의 정체를 정립하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면 그 대상을 정립하기에 난감해 합니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민족들은 보이지 않는 신과 인간들과 연결시켜 주기 위해서 인간들이 이해될 만한 방식을 동원합니다. 나타나 보이는 것을 특징으로 삼아 신과 통하기를 고대합니다. 즉 대자연을 만드신 신이 아무리 위대하지만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는 뭔가 인간들이 납득이 될 만한 방식을 사용할 것이 분명하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마저 없다면 인간은 영원히 신과 접선할 수 없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신은 ‘숨어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보도록 ‘나타나는 하나님’입니다. 천주교에는 각종 전통과 형식들이 살아있습니다. 오랜 교회 역사를 통해서 교회는 사람들과 하나님과 사이를 연결해주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 왔고 그런 방법들이 누적이 되어 전통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식이나 성찬식 같은 것은 ‘나타난 하나님’이 유일하게 허락한 인간과의 접선 방식이라고 여깁니다. 신부가 신도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뉘어줄 때, 그 방법에 준해서 하나님도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로서 교인들은 자신이 영원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안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들의 의식은 곧 인간의 기본 심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을 규명할 때 반드시 뭐든지 소유하려는 태도로서 자신을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든지 예수님을 사랑하다든지 하는 것도 모두 그 사랑과 그 존재를 자기 소유로 삼아야 구원된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성령에 의해서 구원된 자라면 예수님 사랑만을 언급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참으로 미워해야 될 자인 것도 고백하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피를 믿게 된 자라면, 자신의 소유욕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저주를 받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2:25에 보면,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숨어계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계시기에 사람들에 의해서 포착되거나 소유화되시는 것을 계속 거부하시고 기피하십니다. 사람들의 감각에 접촉되는 일이 없게 하시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인간을 피해가십니까? 그것은 바로 이미 인간은 자신이 죽은 자요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모든 일은 반드시, ‘없는 자를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방식’으로만 하십니다. 그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스스로 숨는 형식으로서 일하실 것은 일 다 하십니다. 이러한 '숨어계시는 방식‘은 신약에 와서 실제로 하나님이 인간들 군중 속에 나타나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극히 싫어버린 바 되는 방식의 삶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식의 인생을 들고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소유하고 싶어도 본성상 거부하고 싶도록 하는 방법으로 사람들 속에 끼어들어왔습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곧 ‘기피하고 싶은 하나님상’으로 우리 곁에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에 있어서 ‘숨어 계시는 하나님’과 ‘나타나 보이는 하나님’으로 분류된 하나님상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예수 안’과 ‘예수 밖’이라는 둘 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구분되어져 버립니다. 어느 표현으로도 인간이 이해하고 접촉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뭔가 소유해서 ‘자기 것’이 되는 경우를 통해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는 것을 규명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본성을 피해가시면서 하나님의 자신의 약속대로 일을 수행하는 그 과정이 구약에서 신약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사야에서 신약에 이르는 그 도중에 바로 이런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박국 3:17-18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은 내가 나의 소유물로 인하여, 혹은 나의 나 다움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거부하시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계심과 그 활동성 그 자체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하는 사람이 진정 참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신약에 스데반집사님이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의 최후는 피가 낭자는 살해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거추장스럽게 걸치고 있는 옛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순간으로 여기고 기뻐했습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님의 사랑의 피로 얻을 것은 다 얻었습니다. 그 어떤 자기 노동의 대가를 노릴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 피만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