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4:9-11/우상자의 허무함
우상자의 허무함 2007년 12월 19일 본문 말씀: 이사야 44:9-11 (사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사 44:10)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 (사 44:11) 『보라 그 동류가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사람이 신을 만들거나 신을 믿고자 할 때는 결코 지금 형편보다 못해지는 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자신보다 더 위대한 자신이 될 것을 고대하면서 신을 믿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우상을 만드는 자는 수치를 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수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과 그런 인간을 도리어 수치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하나님의 의사가 상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에게 비참함과 수치됨을 안겨줄 수 있는 신이십니다. 즉 참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 신으로부터 인간이 얼마든지 수치를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참된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조종당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대하면서 나름대로 갖고 있는 뜻을 그 신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상을 실제로 제조하거나 그 우상에 입을 맞추거나 그런 신을 찾아다니는 자들은 항상 자신이 꼭 이루고자 하는 뜻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경향으로 인해 진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뜻은 내몰라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수치를 내리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원래 뜻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관심하고 외면해 왔음을 지적해주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방나라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방나라들은 원래 참된 하나님과 동행한 경험이나 경우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그 어떤 신을 거론해도 모조리 다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만큼은 참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미 경험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이방나라들이 섬기는 우상을 선호한지 벌써 오래되었고 유행이 되었고 대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금 참된 하나님을 알리려 하십니다. 참된 하나님은 나름대로의 법과 진리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그 법과 진리를 펼치는데 주력하십니다. 새삼스럽게 인간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그들과 협력해서 세상을 꾸려나가고 자기 백성을 지키고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과 우상과의 차이점이란, 하나님만의 일하시는 원칙과 법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느냐 여부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이 나옵니다. 이 십계명을 풀이내는 열쇠되는 문장이 맨 앞에 나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애굽에서의 인도란 엄청난 힘이 발휘된 것입니다. 따라서 십계명 구절구절마다 이 힘을 증거 하는 식으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첫 계명이란 바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이방나라와는 달리 ‘나’라고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도 알고 그리고 ‘다른 신’이 어떤 신이가도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방 나라 사람들 같으면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이란 오직 한 종류의 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그득히 담겨 있는 욕망을 지극 정성을 다하여 밖에 있는 신을 향하여 빌고 또 비는 정성으로 일관된 신 이외에 다른 신이란 그들에게 없습니다. 아마 비록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정성에 실어서 빌고 또 비는 식으로 여호와를 대한다면 이 사람 역시 다른 신을 섬기는 자에 불과합니다. 에스겔 14:7-8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중에 무릇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로 놀라움과 감계와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는 자’ 역시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없는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앞에 나오는 자는 자기를 위한 물음보다 진정 하나님께서 실행에 옮기려는 하나님의 법과 진리가 무엇인가에만 관심을 두고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과 진리만이 참 하나님의 내용이 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모습은 애굽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이 얼마나 무서우냐를 아는 자에게만 절실히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어느 한적하고 아담한 마을에 난데없는 일단의 검은 복면과 두건을 쓴 자들이 한 밤 중에 들이닥쳐서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도륙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칼로서 죽여버린다면 그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바로 ‘무자비함’이 주는 공포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포근한 정으로 삽니다. 그런데 포근한 정으로 한데 모여사는 정겨운 모임에 갑자기 차가운 무자비함이 들이닥치면 그동안 곱게 간직했던 신에 대한 인상이 모두 다 깨져버립니다. 하나님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방문하듯이 그렇게 방문하지 않습니다. 애굽에 주어진 10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은 ‘무자비함’의 침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죽음의 천사가 온 나라를 공격했습니다. 그 천사에게 자비함이란 전혀 없습니다. 대화도 안됩니다. 봐주기도 없습니다. 융통성이라는 것도 전혀 허용되지 않습니다. 사정없이 죽여나갑니다. 냉혹하기 그지 없는 낯선 현실을 애굽 나라에 사는 모든 자들은 경험했습니다. 이 무자비함이 주는 차가운 상황에서 히브리인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저의 가정은 하나님 믿는데요”라는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무자비함에서 그 어떤 선한 행위나 나약하고 굴욕적인 처신도 통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자비하심 뿐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이 무자비함의 파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그것 뿐이었습니다. 이 피만 증거하겠다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 외에 모든 것은 다 우상입니다. 아하스 왕이 그 당시 강대국인 앗수르의 종교를 그대로 수입하여 신전을 꾸몄지만 그 우상에는 피의 정신이 없어 역시 우상입니다. 피만을 증거 하지 않는 기독교 역시 우상이요 이단일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진리를 아는 자로서 입을 다물고 있지 말고 피만이 진리라고 외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