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4:1-5/이스라엘 후손
이스라엘 후손 2007년 12월 12일 본문 말씀: 이사야 44:1-5 (사 44: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사 44: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을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사 44: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사 44: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사 44: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맹세며 약속입니다. 인간이 개입해서 인간 손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에 의해서 필히 이루어질 내용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안 이루어질 것이라고 걱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상황입니다. 하나님 말씀 중에서 안 이루어지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나와 있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차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이 내용도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질 사항입니다. 사람들의 개인적인 자질이 우수해서 이 성경 말씀이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맹세에 의해서 꼭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논다고 해서 하나님도 함께 놀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놀아도 하나님의 자기 약속은 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뭐든지 자기 힘으로 이루어내려고 하다보니 항상 미완료로 끝날까봐 조마조마하게 됩니다. 그저 속으로 애를 태우면서 ‘구원되어야 할텐데’라고 바라기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세요. 갈라디아서 3;1에 보면,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구원에 대해서 ‘사건 종결’을 선언해 버렸습니다. 십자가가 곧 구원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괜히 마귀의 시험을 받아야 우왕좌왕 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서 이루어질 구원은 다 이루어내게 됩니다. 다른 방도나 기준점은 더 이상 없습니다. 사람 중에 제일 안타까운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인생관이 확정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잔뜩 세월의 무게만 짊어지고 머리가 허옇토록 살았다 뿐이지 아직도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단언을 내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도 자기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결정되어있지 않으면 참 힘든 인생을 보내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점을 자발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그 사람들의 자질이나 인품이나 자기 능력으로 성사시킨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죽는 것은 한 번 정하신 일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고, 죄와 상관없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인생관은 인간의 자체 능력으로 확신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복이 왜 오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작업의 일환으로 복이 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큼은 자기 아들로 만드십니다. 이스라엘에게 복이 주어졌다는 말은 곧 복을 받지 못한 다른 사람은 자동적으로 저주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시편 79:6에 보면,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받은 복이 뭘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인데 그가 받은 복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그 복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약속의 가지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오실 그 분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나만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이를 두고, 그는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아무 일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복이 장차 후손들에게 그대로 받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즉 ‘아무 행한 것도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의인되었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아브라함과 이들 사람에는 공통점이 형성됩니다. 신약에 와서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께서 주시다는 점을 고백하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고 했습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을 능가하는 능력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유는, 그 믿음의 내용이 해당되는 그 분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 들어갈 수도 없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만들어 천국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드님을 하늘에 보내시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치 프랑스 요리 중에 ‘뽕듀’라는 요리가 있는데 이 요리는 치즈 녹인 것을 소스를 하여 작은 땅에 이 소스에 젖셔먹는 요리입니다. 우리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 성취성을 온 몸으로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겁니다. 마치 뽕듀 요리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힘으로 구원되지 못했음을 즐겁게 자인하고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만 구원됨을 마음껏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과연 어느 인간이 자력으로 이 고백을 즐겁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창조한 여수룬이라고 불리우는 자기 백성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서슴없이 이런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결코 그들이 스스로의 여망에 의해서 하나님 아들 되고 싶어 환장한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분의 찾아오심으로 인하여 성도는 그 찾아오신 하나님의 마음을 담박에 알게 되는 관계에 놓여 있게 된 것입니다. 서로 알아보는 사이가 형성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 라는 사람의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을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의 행차를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삭개오를 보는 순간, 이 두 분 사이에는 영원 전부터 반드시 언제 가는 만나서 다시는 헤어지지 않는 자식과 부모 관계처럼 엮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의 관계입니다. 이 삭개오의 입에서는 결코 자기 행함이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구원이 자기에게 이루어졌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우리 속에서 폭발하여 우리의 성도됨이 말씀 자체의 능력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