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3:5-7/내가 모으리라
내가 모으리라 2007년 11월 21일 본문 말씀: 이사야 43:5-7 (사 43: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사 43: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사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참으로 계시다는 것은 이 지구상에 이스라엘 나라가 참으로 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을 보이기 위해 생겨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늘나라의 그림자처럼 지상에 펼쳐진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다루시는데 그 와중에서 인간들이 평소에 마음이 품고, 상상해내는 하나님상이 어떠한지가 다 드러납니다. 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들이 생각한 하나님과 참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지를 대조케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에 의해서 망하는 유일무이한 나라가 됩니다. 이것은 참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 하나님편이지 사람편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담고 있는 엉터리 하나님이 왜 엉터리인가를 들추어내는데 있어 하나님은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해왔는데 그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은 예외없이 모두 곡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해석들을 내어놓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들이 평소에 품고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허망한 신인가를 노출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잘못된 하나님상에 근거하여 거기서 구원론도 끄집어내게 됩니다. 물론 터무니 없는 구원론입니다. 그 구원론은 다름이 아니라 신의 말씀을 자신들이 준수해서, 그 순종한 분량만큼 구원도 가능하고 하늘 나라에서도 보너스를 확보해서 보다 편안한 영생을 누리게 되리여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려 주신 말씀은 인간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의도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 인간의 능력으로 지킬 수 없는 말씀들을 주신 것입니다. 즉 인간들이 지킬 수 없은 말씀을 주셨는데 이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기에 주셨을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이 오해는 물론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하나님상으로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차단하는 식으로 나오십니다. 구원이란 곧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로 확정지어버리십니다. 비록 사람들이 아무리 간절히 내세의 영생을 구걸해도 하나님을 일체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그 요구의 배후에는 거짓된 하나님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신 모든 말씀은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로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만을 낳는 존재로 확정됩니다. 인간의 종교심이란, 신이 주신 말씀을 인간이 지켜낼 수 있다는 점을 기본으로 해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즉 신은 인간과 거래를 터고, 그 거래 조건에 부합한다면 구원도, 영생도 신이 보장해주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거부나 차단이나 거절도 성립될 수 없고 우호적인 계약 성사에 대한 의지만 존중될 뿐입니다. 신은 인간들의 존재를 보장해주고, 인간들 이름의 명예나 영광도 훼손하지 않고 더욱 증강시키는데 주력해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서도 편안하고, 죽어서도 영원한 축복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좋은 성격을 가진 신의 마땅히 할 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구원의지를 꺾습니다. 즉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구원되지 못함을 알려주는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말씀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인간의 구원을 저지하지 않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은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는 말씀인데 인간들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몰려오는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즉 ‘말씀 성취적 동기’를 감추지 못하고 자기 행위에 담아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으심은, 인간들이 결코 하나님께로 오고 싶지 않게 되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인물을 지상에 보내셔서, 그래서 인간이라면 당연히 안 믿고 싶은 생각이 쏟아내는 그 와중에서 하나님은 친히 구원될 자를 모으시는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외면하고 회피하게 될 분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인간들은 당연히 그 분은 죽였고 무시했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자력으로 하나님께서 나아갈 수 없는 자들임이 확연해졌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는 구원 창구를 일원화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주시지 않고 도리어 그 어떤 인간이든 다 싫어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분의 이름으로만 구원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싫어하는 인간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사야 32:15에 보면,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번개가 치는 장소는 우리가 지정해 놓은 지점이 아닙니다. 번개 마음대로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들이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그 하나님으로 인해 참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인간 쪽에서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번개가 지상에 꽂듯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신을 받은 사람은 수평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서 비로소 수직적인 안목을 갖추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구원 의지와 열심을 거부하시고 오직 구원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그 분의 결정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 실제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구원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일괄적으로 하나님의 허락을 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더 이상 자기 이름이나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구원의지 대신 주님의 구원의지와 그 공로와 영광과 이름으로만 구원이 성사되었음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오늘 본문의 말씀조차 에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의 창구가 예수님으로 하나로 고정되어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